이배사 창원지회에서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읽기 10회차를 진행하였습니다.
■ 일시 : 2024. 6.18. 화요일 PM.6:30~8시
■ 장소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노량관
■ 읽은 부분 : 이충무공전서 3권 처음 ~ 77쪽.( 이충무공전서 권9-부록1. 행록)
■ 참석자 : 동자갑선, 백의종군로 악양, 손자병법, 진해중부장, 합포, 진해현감, 웅천현감, 홍패, 내이포판옥선, 상유 총10명
■ 다음 모임 안내 : 2024. 7. 16 화요일 PM 6:30~8시
■ 장소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 읽어올 분량 :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권10-부록2 , 이충무공전서 3권 (80쪽~169까지)
이제 이충무공전서 읽기도 2/3지점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올해 11월까지 읽으면 모두 완독하게 되네요.
책장에서 잠자지 않게, 부지런히 책을 읽을 수 있는 함께 읽기의 힘을 느끼는 시간입니다.
바쁜 개인 일정 때문에 함께 못하는 회원분들이 계셔서 아쉬울 때도 있지만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동행합니다. 오프라인에서 볼 수 없을지라도 온라인으로 만날 수 있는 환경이 되니 그 또한 감사한 일이지요.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옥수수찐빵, 참외, 아이스커피로 간식을 미리 먹고, 시간이 되자 공부 시작합니다. 이번 차시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 많아 좀 빨리 끝났어요. 그래서 사담이 더 길어졌지요.ㅎㅎ
이번 전국 답사 때 현충사 가는 길에 백의종군로 악양님이 직접 쓴 책갈피 받으신 것 기억하시죠? 자신의 재주를 이배사를 위해 아낌없이 선물하는 따뜻한 마음도 가지신 분!
얼마 전 남명 조식 선생의 글 중심으로 열린 서예전시회에 백의종군로 악양님의 작품이 전시되었지요. 시간되는 몇몇 분들은 현장에 직접 가서 축하해주고, 문화도 즐기는 시간이 되었죠. 서예전에 대한 이야기로 한 꼭지를 장식하고....우리 지회에 재주꾼들이 많아 자랑스럽네요~~ㅎㅎ
이번 학습에서는 행록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책 내용 중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나누었습니다.
웅천현감님의 전반적인 설명을 우선 기록하고, 책 내용 요약한 것은 사진 뒤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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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전서 권9~권14까지는 이순신 후대에 기록하고 정리한 것으로 중요한 순서대로 앞쪽에 배치하였다. 이은상 번역본에서는 권15, 권16이 있지만 일제강점기 때 이순신 연구자들이 이후 자료를 묶어 만든 것으로 정조 때 만든 이충무공전서라고 할 수 없다. 사료가치 또한 많이 떨어진다.
사료가치의 객관성은 장계 ⇨ 실록 ⇨ 일기 순서이다.
■ 행록 : 사람의 언행을 적은 글. 이분이 지은 이순신 '행록'은 처음에는 '행장'이라 불렀다.[「충무록」,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그 뒤 최유해(1588-1641)가 이순신 '행장'을 짓고, 전라좌수사 이여옥이 1716년에 편찬한 「충무공가승」에서부터 이분이 지은 것을 '행록', 최유해가 지은 것을 '행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행장'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평생에 지낸 일을 기록한 글을 일컫는다.
‘행록’은 조카 이분(1566년~1619년)이 정랑 때 쓴 최초의 이순신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분은 이순신의 맏형인 이희신의 아들이다. 그의 형제들인 뇌, 완과 함께 이순신의 진영을 왕래하면서 이순신을 도왔기 때문에 이순신의 행적에 대해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가까운 인척이 기록한 것이므로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행록’은 초판본이 전하지 않고 작성 시기도 알 수 없으나, 이순신의 전사 시기와 이분의 생몰연대를 고려했을 때, 1598년에서 1619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충무공 행록』의 원문은 『이충무공가승』, 『이충무공전서』, 『충무공유사』에도 포함되어 있다.
‘행록’은 이분 사후에 추가되거나 편집된 내용이 있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충무록』(‘충무공’ 시호가 내려진 1643년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의 ‘행장(行狀)’에는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어려서 놀 때도 언제나 여러 아이들과 전쟁의 진을 치는 형상을 하며 놀았는데, 여러 아이들은 반드시 공을 장수로 떠받들었다.’라는 내용 앞에 아래와 같은 어린 시절 내용도 있었으나, 너무 개구쟁이 모습으로 보였는지 『충무공가승』(1716)에는 그 부분이 빠졌다. 그 결과 『충무공가승』을 그대로 옮긴 『이충무공전서』에도 『충무록』의 그 내용은 빠졌다.
<빠진 부분의 내용>의 예 ⇨ 참외밭 이야기, 장님 친구와 동아 서리한 이야기
"공이 어렸을 때의 일이다. 참외밭에서 참외를 달라고 하니 참외 주인이 주지 않았다. 공은 집으로 돌아와서 말을 타고 참외밭으로 가서 말을 달렸다. 참외 주인이 멈춰 달라고 애걸을 하였다. 이후로는 공이 그곳을 지나가는 것을 보면 반드시 먼저 반갑게 참외를 주었다. 또 공이 어렸을 때의 일이다. 근처 집에 소경 아이가 있었는데 매번 공에게 와서 요청하기를 "아무개 집에 동아를 많이 심었는데 열매가 아주 잘 익었다고 한다. 밤에 그것을 훔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공이 그것을 승낙하고, 어느 날 밤에 공은 소경 아이의 손을 이끌고 주위를 거짓으로 세 바퀴 돌고 동아가 있는 집으로 향한다면서 도로 소경아이의 집에 이르러서 "여기가 그 집이다."라고 말했다. 소경 아이는 재빨리 그 집으로 올라가 동아를 모조리땄다. 공은 그를 그대로 두고 혼자서 돌아왔다. 소경 아이의 어머니는 누군가가 동아를 도둑질하는 것을 알고 불을 밝혀 들고 나와서 보니 자기 아들이 지붕 위에 굳건히 앉아 있었다.)
<나중에 추가된 기록>의 예1 ⇨ 자운과 옥형 이야기(69쪽), 한산도가(46쪽)
호남의 승려들이 공을 위하여 재를 올렸는데 거행하지 않는 산사가 없었다. 자운이란 자는 공을 따라 진중에서 항상 승군을 이끌고 많은 공을 세웠었다. 그는 공이 돌아가신 뒤에 정미 6백 섬으로 노량에서 수륙재를 크게 열었고, 또 충민사에도 제물을 성대히 차려 제사를 지냈다. 옥형이란 사람도 승려로서 공을 위하여 군량을 이어 대어 자못 신임을 받았었는데, 이때 와서 스스로 아무런 보답도 드린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충민사로 와서 지키며 날마다 물 뿌리고 쓸면서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나중에 추가된 기록>의 예2 ⇨ <한산도가>(46쪽)
<한산도가>시는 ‘충무록’에 없다. 『충무록』에는 ‘시 한 수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충무공전서 ‘행록’에 추가된 시로 볼 수 있다.
<나중에 추가된 기록>의 예3 ⇨ ‘충무’라는 시호 기록
인조조 계미癸未[인조21년 1643]에 충무라는 시호를 내렸다. ⇨ ‘충무’라는 시호는 이분이 사망 후 받은 것이므로 초기 판본에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券9 - 부록1, 행록
(3권 처음 ~77쪽까지)
행록(1) 조카 정랑 이분
가정 을사乙巳 [가정 24년, 인종 원년, 1545년] 3월 초8일 [양력 4월 28일] 자시[오후 11시~오전 1시]에 공이 한성 건천동 집에서 태어났다. - 어머니의 꿈 “이 아이는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 하라”
■ 가정 : 명나라 11대 황제 세종 주후총의 연호. 1522년부터 1566년까지 45년동안 사용
병인丙寅[22세, 1566년] 무예 배우기 시작
임신壬申[28세, 1572년] 훈련원 별과 시험을 볼 때, 말에서 떨어져 버드나무 껍질로 다리 싸맴
병자丙子 [32세, 1576년] 봄 식년 무과 시험에서 병과로 합격. 황석공소서 강론에서 시험관이 "장량이 적송자를 따라가서 놀았다고 했으니. 장량은 정말로 죽지 않은 것인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사람은 일단 태어나면 반드시 죽게 마련입니다. 『강목』에도 '임자 6년에 유후 장량이 죽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신선을 따라가 죽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만 가탁[어떤 일을 그 일과 무관한 다른 대상과 관련지은 것]하여 한 말일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시험관들이 서로 돌아보며 그의 특출함을 감탄하면서, "이것이 어찌 무인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율곡 이이 선생이 전상[이조판서]으로 있을 적에 - "나와 율곡이 같은 성씨이니 서로 만나볼 수도 있겠지만, 그분이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에 만나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고는 끝내 찾아가지 않았다.
함경도 동구비의 권관이 되었을 때 - 청련 이후백이 감사가 되어 각 진을 순행하면서 변방장수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했는데 벌을 면한 자가 적었다. - "사또의 형벌이 매우 엄해서 변방의 장수들이 손발 둘 곳을 모릅니다."
기묘己卯[1579년] 훈련원 근무할 때 - "아래에 있는 자를 건너뛰어 올리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승진하지 못하게 되니, 이는 공평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법규도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기 서녀를 공에게 첩으로 주려고 할 때 - "나는 이제 갓 사로[벼슬길]에 나왔는데, 어찌 권세가의 집에 의탁하는 것이 마땅하는가."
경진(庚辰)[1580년]
가을 발포만호 시절 – 감사 손식이 진법에 관한 책을 강독하게 하고 이것이 끝나자 진형을 그리게 하였다. 공이 붓을 들고 매우 정확하게 그림.
좌수사 성박 –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려 - "이것은 관가의 물건으로 심은 지 여러 해 된 것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베어 버릴 수 있겠느냐"
이용이 수사가 되어 공이 부드럽고 원만하게 섬기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일을 핑계 삼아 벌을 주고자 하였다. - “발포의 결석자가 가장 적으며, 이모[이순신]가 또한 네 포구의 결석자 명단을 얻어 갖고 있는데, 이제 만약 임금께 아뢰었다가 뒷날 후회할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임오壬午[38세, 1582년]
봄 군기경차관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수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시켜야 한다고 아뢰었다. 사람들은 공의 군기를 수선하고 갖춤이 저렇게도 자세하고 엄밀한데도 마침내 벌을 받게 된 것은 공이 지난날 훈련원에서 굽히지 않았던 것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고 하였다.
정승 유전이 공에게 좋은 화살통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달라고 하였다. -"전통을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남들이 대감께서 받으시는 것을 어떻다 하며, 소인이 바치는 것을 또한 어떻다 할 것입니다. 전통 하나 때문에 대감과 소인이 함께 더러운 이름을 얻게 된다면 심히 미안한 일입니다.“
계미[39세, 1583년]
가을에 이용이 남병사가 되어 위에 아뢰어 공을 군관으로 삼았다.
이해 겨울에 건원 권관이 되었다. 오랑캐 울지내를 복병을 두었다가 사로 잡음. 병사 김우서가 공이 혼자서 큰 공을 이룬 것을 시기해...
11월 15일에 덕연군 [공의 부친]이 아산 땅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공은 이듬해 정월에야 비로소 그 부음을 들었다.
병술丙戌[42세, 1586년] 정월에 3년상을 마치고 곧 사복시주부로 임명되었다.
정해丁亥[43세, 1587년] 가을에 녹둔도의 둔전관리 임무를 겸하게 되었다. 수비하는 군사가 적은 것이 걱정되어 여러 차례 병사 이일에게 보고하고 군사를 증원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이일은 따라주지 않았다. 8월에 적이 군사를 일으켰고, 사로잡힌 우리 군사 60여 명을 도로 빼앗아서 돌아왔다. 병사 이일은 공을 죽여 입을 막음으로써 자기 죄를 면하려고 공을 잡아들여 형벌을 가하려고 하였다. - "이모는 패군한 부류가 아니다. 그로 하여금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우도록 하라.” 하였다. 그해 겨울에 공로(시전부락 정벌 공로)가 있어서 특별 사면을 받았다.
기축[45세, 1589년]
봄에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공을 군관으로 삼고...
12월에 정읍현감이 되었고, 태인현감을 겸직.
조대중의 역모 죄 – 이순신과 편지 주고받음. "지난 날 도사가 내게 편지를 보내왔기에 나도 답장을 하면서 다만 서로 안부만을 물었을 따름이오. 또 이미 수색물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사사로이 뽑아 버리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오.”
신묘辛卯[47세, 1591년]
2월에 진도군수로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도 하기 전에 가리포 첨사로 임명되었다. 또 부임도 하기 전에 같은 달 13일에 전라좌도 수사로 임명되어 정읍으로부터 부임하였다. ⇨ 철쇄(쇠사슬), 거북선, “바다로 오는 적을 막는 데는 수군만 한 것이 없으니, 해전과 육전 어느 한 가지도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임진壬辰[48세, 1592년]
4월 16일, 왜적들이 부산을 함락하였다는 말을 듣고 공은 급히 여러 장수들을 모두 본영으로 불러 모아 나아가 토벌할 일을 의논하였다. 군관 송희립 - "큰 적이 국경을 무너뜨리고 쳐들어와서 그 형세가 마구 달려가듯이 뻗쳤는데 외로운 성을 앉아서 지킨다고 해서 혼자 보전될 리도 없으니 나아가 싸우는 것만 못합니다. 다행히 이기게 되면 적들의 기운이 꺾일 것이고, 불행히도 싸우다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신하 된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녹도만호 정운 - "신하로서 평소에 나라의 은혜를 입고 국록을 먹으면서 이런 때에 목숨을 바치지 않고 감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것입니까?“
5월 초1일 여도 수군 황옥천이 도망쳐 달아나려고 하므로 목을 베어 널리 보였다.
5월 초7일 옥포에 이르러 왜선 30여 척이 바다 어귀에 줄지어 있는 것을 보고 공이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하자. 여러 장수들 용감히 앞으로 나서서 적선을 모조리 잡아 없앴다. 후에 이때의 전공으로 가선대부(종2품)로 승진하였다.
5월 29일,... 사천까지 뒤쫓아가서 적선 13척을 불태워서 깨뜨렸다. 공도 탄환에 맞음.
공은 매번 싸울 때마다 여러 장수들에게 약속하여 말하기를, "적의 머리 한 개를 베는 시간에 적 여러 명을 쏘아 죽일 수 있으니, 적의 수급을 많이 베지 못한다고 걱정하지 말고 오로지 적을 쏘아 맞히기를 우선하라. 힘써 싸우는지 그렇지 않는 지는 내가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라고 하였다.
6월 초2일, 아침에 당포 앞에 이르러 적선 20여 척을 만났다. “적이 오면 즉시 싸울 뿐이다.”
6월 초4일, 당포 앞바다로 나아가 진을 쳤는데,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돛을 올리고 나팔을 불면서 왔다.
6월 초5일, 공과 이억기는 이른 아침에 함께 출발하여 고성 당항포에 이르러 적들과 서로 마주쳤다. 중간 배 12척, 작은 배 20척도 한꺼번에 쳐서 깨뜨리고 적의 머리 7개를 베었으며 수도 없이 쏘아 죽였다. 이 공로로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6월 초7일, 아침에 영등포에 이르자 적들이 율포에 있다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는 남쪽 바다로 도망갔다. 사도 첨사 김완과 우후 이몽구와 녹도만호 정운이 각각 1척씩을 온전히 잡고 또 합쳐서 왜적의 머리 36급을 베었다.
7월 초8일, 공과 이억기, 원균 등은 각자 배들을 거느리고 진군하여 고성의 견내량에 이르렀다. 적의 선봉전 30여 척이 과연 와 있었고, 그 후방에는 무수히 많은 배들이 바다를 뒤덮고 있었다. ...적선 73척이 한 척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한산대첩.
여러 적장들이 수가를 수군 장수로 삼았었는데, 한산 싸움에서의 적장이 바로 그자였다."라고 하였다. ⇨ 한산도 해전 때 일본 수군장은 수가가 아니라 와키사카 야스하루였다.(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청어람미디어, 2004, 95쪽)
7월 초9일, 한패의 왜선들이 안골포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공과 이억기, 원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일제히 그곳에 이르니,...불태워 깨뜨린 것이 42척이었다.
9월 초1일, 공은 이억기, 원균, 조방장 정걸 등과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부산이 적의 근거지로 되어 있으니 그 소굴을 무너뜨려 버린다면 적의 간담을 꺾을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빈 배 100여 척을 깨뜨렸다. 이 싸움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탄환에 맞아 사망.
“내가 죽지 않는다면 적들이 반드시 감히 침범해오지 못할 것이다.”
계사癸巳[49세, 1593년]
2월 초8일, ...웅천의 적들이 부산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험난한 지대를 거점으로 삼아 배를 감추고 소굴을 많이 만들었다. ...좌별도장 이설과 좌돌격장 이언이 왜선 3척을 끝까지 쫓아갔는데 수백 명의 적이 타고 있었으며, 그중에 적장은 금 투구에 붉은 갑옷을 입고 큰 소리로 외치며 노를 재촉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피령전으로 적의 괴수를 쏘니, 곧 바닷속으로 거꾸러지고 나머지 적들도 모두 쏘아 죽였다.
2월 22일, "적들이 우리 군사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나오지 않으므로 여러 날을 서로 싸웠으나 모조리 섬멸할 수가 없다. 만약 수륙으로 공격하면 적의 기세를 꺾을 수 있을 것이다."라며, 곧 3도의 수군에게 명령하여 ... 뭍으로 올라가 진을 치도록 하였다. 수군 단독 상륙작전.
7월 15일, 공은 본영이 호남에 치우쳐 있어 해상을 제어하기가 어려우므로 마침내 진을 한산도로 옮기기를 청하였고, 조정에서도 이를 허락하였다.
8월에, 조정에서는 3도[충청·전라·경상] 수사들이 서로 통섭되지 않으므로 반드시 주관하는 장수가 있어야 되겠다고 해서, 공으로써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고 본직 [전라좌수사]은 그대로 갖게 하였다. ...둔전을 경작하고, 사람을 시켜서 고기를 잡게 하였으며, 소금을 굽고, 질그릇을 만드는 일에 이르기까지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갑오甲午[50세, 1594년]
정월 11일, ...어머님께서 임시로 거주하시는 곳(웅천동 송현마을)으로 찾아가 뵈었다... 어머님께서는 “진중으로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크게 씻어라.”라고 당부하며, 두번 세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작별의 서운한 뜻이 없으셨다.
3월, 담 도사라는 자가 왜적과 강화하는 일 때문에 명나라로부터 웅천의 적진에 이르러서 공에게 패문을 보내....
계사년과 갑오년 동안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진중에 있던 군사와 백성들로서 죽는 자가 연달았을 때, 공은 차사원을 정하여 유골을 거두어 장사 지내게 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지냈다. 꿈에 나타난 물에 빠져 죽은 제문에 실려 있지 않은 귀신들까지 제사를 지내주라고 했다.
공이 일찍이 달밤에 노래를 읊었는데, 그 노래는 이러하였다.(한산도야음)
한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 水國秋光暮(수국추광모) |
추위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 驚寒鴈陣高(경한안진고) |
가슴에 근심 가득하여 잠 못 드는 밤 | 憂心輾轉夜(우심전전야) |
새벽달이 활과 칼을 비치네 | 殘月照弓刀(잔월조궁도) |
또 시조 한 수를 지으니 가사가 참으로 격렬하였는데, 그 노래는 이러하였다. (한산도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 閑山島月明夜 上戍樓(한산도월명야 상수루) |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 撫大刀深愁時(무대도심수시) |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 何處一聲羌笛更添愁(하처일성강적경첨수) |
원균이 공의 지위가 자기보다 높은 것을 원망하여, 공이 자기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면서, 매번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하였고, 혹은 전투에 임해서 명령도 따르지 않기에 이르렀다. .....을미乙未[51세. 1595년] 2월, 자기를 체직[직책을 바꿈]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계문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대장을 바꿀 수 없다고 하여 마침내 원균을 충청병사로 옮겨 임명하였다. 배설이 원균을 대신하여 경상수사가 되었다.
8월[을미년, 1595년]
군사들의 심정은 반드시 정승께서 잔치도 열고 상도 베푸실 것이라 여기는데, 이제 그런 행사가 없다면 실망할까 염려됩니다.”..."내가 정승을 위하여 미리 준비해 두었으니 정승께서 만약 허락해 주신다면 마땅히 정승의 분부로 잔치를 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원균이 충청도에 있으면서 한결같이 공을 비방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그래서 헐뜯는 말이 날마다 조정에 이르렀으나 공은 조금도 변명하는 바가 없었고 또한 길을 다물고 원균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다. 당시의 여론은 많이들 원균을 높이 여기고 공을 내치고자 하였다.
병신丙申 [52세, 1596년]
겨울, 왜장 평행장[소서행장]이 거제[웅천이 올바름]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공의 위엄과 명망을 꺼려서 온갖 꾀를 다 내어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부하 요시라란 자를 시켜서 반간을 시행하였다. (김응서 통해)
임금의 명령으로 공에게 일체 요시라의 계책에 따르라 하였지만, 그것이 실상은 술책에 빠지는 것인 줄은 알지 못했다.
정유 [53세, 1597년]
정월 21일, 원수 권율이 한산진에 이르러 공에게 말하기를, "적장 청정이 근래에 또다시 나온다고 하니, 수군은 꼭 요시라의 약속을 따르도록 하여 기회를 잃지 말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원균을 믿고 있었으며, 원균이 공을 비방하는 것은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공은 비록 마음속으로는 요시라에게 속는 것인 줄을 알면서도 감히 그 앞에서 맘대로 물리칠 수가 없었다.
완평 이 정승[이원익]이 도체찰사로서 영남에 있다가 공을 잡아 올리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말을 듣고 급히 임금께 아뢰기를, "왜적들이 꺼리는 것은 수군입니다. 이모를 바꾸어서는 안 되고, 원균을 보내서도 안 됩니다."라고 하였으나 조직에서 듣지 않았다.
3월 초4일, 저녁에 감옥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의 노여워함이 바야흐로 극에 달하였고, 조정의 여론도 또한 엄중하여 사태가 장차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라고 하였다. 공은 온화하게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려 있으니, 죽게 되면 죽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4월 1일, 사면되어 백의(白衣)로 원수의 막하에서 공을 세우라고 명령받았다. 11일, 어머님의 상을 당하여 압송해 가는 금부도사에게 간청하여 성복 .."나라에 충성을 다하려 했건만 이미 죄인의 몸이 되겠고, 부모님께 효도하려 했건만 부모님마저 돌아가셨구나."
7월 16일, 원균이 과연 패하고, 이억기도 죽었으며 삼도 수군은 모두 적에게 패몰하였다. 공은 그때 초계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었는데, 원수[권율]가 공을 보내서 진주로 달려가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게 하였다.
8월 초3일, 한산[한산도]이 패했다는 보고가 이르자 조정과 민간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다시 공을 통제사로 임명하니, 장수와 군사들이 이 소식을 듣고 차츰 모여들었다. 공은 곧 군관 9명과 아병(대장을 수행하여 본진에 있는 군사)6명을 데리고 진주에서 급히 옥과에 이르렀다....순천에 이르렀을 때는 정예병 60여 명을 얻었고, 보성에 이르렀을 때는 120명이 되었다.
8월 18일, 회령포에 이르렀는데, 전선은 단지 10척뿐이었다. 공은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서 병선을 거두어 모으게 하였다.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나아가 진을 쳤는데, [경상우수사]배설은 군사를 버리고 달아났다.
9월 초7일, 공에게 육지에 올라와서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지금 신에게는 전선이 아직도 12척이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오히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수군을 전부 없애 버린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것으로, 호남 오른쪽[서해 연안]을 거쳐 한강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이 걱정하는 것입니다. 전선의 수가 비록 많지 않아도,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9월 16일, 이른 아침 적선이 바다를 가득 덮고 명량을 거쳐 우리 진으로 향하자, 공은 모든 장수들을 거느리고 나가서 그들을 막았다. 적선 333척.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10월 14일, 공이 우수영에 있다가 아들 면이 죽었다는 기별을 들었다....그 후 공이 고금도에 진을 치고 있었다...새로 잡혀 온 왜적 하나가 배 안에 갇혀 있었다. 공이 그 왜적의 소행을 자세히 물어보게 하였더니, 과연 면을 죽인 놈이 틀림없었으므로, 토막내어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12월 초5일. 나주 보화도에 있었을 때였다... 임금이..."전쟁에 나가서 용기 없음은 효가 아니다."...예에도 경[예법의 원칙]과 권[권도]가 있어서 반드시 평상시의 원칙만을 지키라고 한 것은 아니니 내 뜻을 좇아 속히 권도를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아울러 권[고기]을 보내왔으므로 공은 슬픈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무술[1598년]
2월 17일, 진을 고금도로 옮겼다...군대 위세의 장엄함도 한산진보다 열배나 되었다.
7월 16일,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이 수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도착했다. 공은 진린의 군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술과 안주를 성대하게 차리고 또 군대의 위의를 갖추어 멀리 나가 맞이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더니...병졸들도..."과연 훌륭한 장수다."라고 하였다.
도독의 군사들이 처음 오자마자 자못 약탈을 일삼기 때문에 우리 군사와 백성들은 고통스러웠다. 하루는 공이 군중에 명령하여 크고 작은 막사들을 한꺼번에 헐어 버리게 하고, 공 역시 자기 옷과 이부자리를 배로 옮겨 싣게 하였다...“지금 천자의 병사들은 오로지 행패를 부리고 약탈하는 것을 일삼기 때문에 백성들은 장차 견딜 수가 없어서 모두 피해서 달아나려고 하는 것이다.”
..."천자의 군사들은 나를 배신(제후의 신하가 천자天子에 대하여 자기를 일컫던 말)이라 하여 조금도 꺼림이 없습니다. 만약 나에게 편의대로 꾸짖고 금지하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거의 서로를 보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도독이 “그렇게 하지요.” 하고 승낙하였다. 그 후부터는 도독의 군사로서 규율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공이 법대로 다스리니, 명나라 군사들도 공을 두려워하기를 도독보다 더하게 되어 군중이 편안해졌다.
7월 24일, “노야께서 천조[명나라]의 대장으로서 해적들을 무찌르기 위하여 오셨으니 진중의 승첩은 바로 노야의 승첩입니다. 나는 마땅히 베어 온 적의 머리를 모두 노야에게 드리겠습니다.”
9월 15일, 모든 적들이 곧 철수해 돌아가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공과 도독은 수군을 거느리고 출발하였다.
9월 19일, 좌수영[여수] 앞에 이르렀다.
9월 20일, 순천의 예교로 나아가 진을 치니...
9월 21일,...그날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이 묘병(묘족苗族으로 이루어진 군대)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예교 북쪽에 진을 쳤다.
9월 24일, 들으니 적장 평의지(소 요시토시)가 정예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남해로부터 예교에 이르렀는데, 대개 행장과 함께 철병하여 돌아갈 일을 의논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11월 초2일, 육군과 협공하기로 약속하고 공은 도독의 해군들과 함께 나가 싸우다가 미처 결판이 나기도 전에 사도첨사 황세득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11월 초3일, 명나라의 사선 19척이 과연 얕은 바다에 얹혀 적에게 포위되었다..."적들이 우리 배가 얹힌 줄 알면 반드시 기회를 타서 모두 탈취하려고할 것이다. 너희는 다만 힘써 싸우기는 하되 스스로를 지키면서 조수가 들어오면 곧 돌아오라."고 하였다. 7척은 하나같이 공의 명령대로 하여 마침내 온전히 돌아왔지만, 명나라의 사선들은 모조리 궤멸당하고 말았다.
11월 초6일, 왜적에게 사로잡혀 갔던 변경남이란 자가 적진으로부터 도망쳐 돌아와서 말하기를, "지난 8월에 일본에서 나왔는데, 왜적의 괴수 평수길은 이미 죽었으며, 여러 두목들이 바야흐로 자리를 다투고 있는데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적들도 급히 철수해 돌아가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11월 14일, 평행장이 속히 돌아가고 싶어 하였으나 수군이 길을 막고 있는 것이 걱정되어 도독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진을 물러 달라고 청하자, 도독도 화친을 허락하고자 하였다.
11월 16일, 왜적 오도주라는 자가 배 3척에 마필 및 창과 칼 등의 물건들을 싣고 와서 도독에게 바치고 돌아갔다. ...“대장은 화친을 말할 수 없고, 원수는 놓아 보낼 수 없습니다.”
“임진년 이래로 무수히 적들을 잡아서 얻은 총과 칼이 산처럼 쌓였는데 원수의 심부름꾼이 여기는 무엇 하려고 온단 말이냐”... "남해에 있는 자들은 모두 적에게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지 왜적이 아니오." ,..."한번 죽는 것은 아까울 게 없소. 나는 대장으로서 결코 적을 버려두고 우리 백성을 죽일 수는 없소."
11월 18일, 유시[오후 5~7시] 에 적선이 남해로부터 무수히 나와서 엄목포에 정박하고 또 노량으로 와서 정박하는 것도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적선 5백여 척을 만나 아침까지 크게 싸웠다.
... “이 원수들을 쳐 없앨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새벽에 공이 한창 싸움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날아온 탄환에 맞았다. 공은 "싸움이 한창 급하다. 부디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고 하며, 말을 마치자 세상을 떠났다. 이때 공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활을 잘고 곁에 있다가...오직 공을 모시던 종 금이 및 회와 완 세 사람만 알았을 뿐 비록 친근하게 신임하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영구는 고금도에서 떠나 아산으로 돌아갔다....임금께서도 예조의 관리를 보내서 제사를 지내 주게 하고, 의정부 우의정을 추증하였다.
다음 해 기해亥 [1599년] 2월 11일, 아산 금성산 아래 유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덕연군 [공의 부친] 선영에서 서쪽으로 1리쯤 되는 곳이다. 그 후 16년 되는 갑인(1614)에 어라산 임좌의 언덕[현재의 묘신]으로 옮겨 모셨는데, 덕연군 선영에서는 북쪽으로 1리다.
공의 부하들이 공을 위하여 사당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조직에서는 그 청을 허락하여 좌수영 [전라남도 여수시] 북쪽에 사당을 세우고 충민이란 액자를 내려 주고 봄과 가을로 두 번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이억기를 배향하였다.
호남의 군사와 백성들은 끊이지 않고 공을 추모하면서 다투어 재물을 바쳐 사사로이 비석을 만들고는 관찰사에게 글을 새겨 주도록 청하였다. 관찰사가 진안현감 심인조를 보내서 비문을 쓰게 하고 ‘이장군타루비李將軍墮存境’라 하였다.
호남의 승려들이 공을 위하여 재를 올렸는데 거행하지 않는 산사가 없었다. 자운은 정미 6백 섬으로 노량에서 수륙재를 크게 열었고, 또 충민사에도 제물을 성대히 차려 제사를 지냈다....옥형은 충민사로 와서 지키며 날마다 물 뿌리고 쓸면서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함열 사람 박기서는 상복을 만들어 입고 삼년상을 치르고, 연상 때도 모두 와서 제사를 지냈다. 영남 해변 백성들도 사사로이 착량[경상남도 통영시]에다 초묘를 짓고 어디로 나가거나 들어올 때마다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이운룡이 통제사가 되자 민심을 따라 거제[한산도를 가리킴]에 크게 사당을 짓고 무릇 전선이 출항할 때마다 고하지 않음이 없었다.
갑진甲辰[선조 37년, 1604] 10월, 임진왜란 때의 공로를 논할 때,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효충장의 적의협력 선무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및 덕풍부원군을 추증하였다. 돌아가신 부모 이상에게 추은하고 마을 어귀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인조도 계미癸未[인조21년 1643]에 총무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인은 상주방씨로 정경부인에 봉하니...
아들 셋, 딸 하나를 낳았으니, 장남은 회로 현감이었고, 둘째는 열로 정랑이었고, 막내는 면으로 이미 죽었으며, 딸은 선비 홍비에게 시집갔다. 첩의 아들은 둘인데, 훈과 신이며, 첩의 딸은 둘이다. 손자는 형제인데 지백과 지석이며, 손녀는 하나로 윤헌징에게 시집갔으며, 외손자는 넷인데, 홍우태·홍우기·홍우형·홍진하이며, 외손녀가 하나 있다.
행록(2) 판관 홍익현
공은 가정 을사[1545년]에 태어나 만력 무술년[1598]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54세이다. 공의 타고난 성품은 맑고 곧으며 강하고 부드러운 덕을 겸비하였고, 집 안이나 집 밖에서 화내거나 기뻐하는 것을 지나치게 아니하며, 상과 벌을 주는데 공평히 하여 사졸들이 두려워하지만 친애하여 능히 큰일을 할 수 있었다. 공이 통제사가 되었을 때 어떤 이가 죄를 범해 형을 받게 되자 곁에서 모시던 자제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죄가 무거우니 가벼이 벌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공이 조용히 말하기를, "형벌에는 해당하는 법률이 있으니 사람의 말로 경중이 달라지지 않을뿐더러, 또한 자제 된 도리로서 당연히 남을 살리는 방법으로 구할지언정 무거운 형벌을 주라고 청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건원보에 있을 때 호남 무인으로 북도에 가서 수자리 서던 이가 아버지상을 당해 분상奔喪하려고 하나 여력이 없어 출발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나와 그가 비록 본래 아무 교분이 없으나 온 힘을 다해 구해 주어야 할 일에 어찌 알고 모르고의 구별이 있겠는가." 하고 곧바로 좋은 말 한 필을 보내 도와주었다.
공이 수군에 있는 10년 동안 한 번도 집안일은 돌아보지 않았으며, 자녀 혼사도 자못 시기를 지나치는 것이었다. 공의 두 형은 공보다 앞서 추겠기에. 공기 여러 조카를 어루만져 키우면서 혹시 무엇을 얻게 되는 때면 반드시 조카들에게 먼저 주고난 뒤에야 자기 자녀를 돌아보았다.
<참고> 충무공 이순신 관련 주요 논의 및 경위 일람
(1) 선조실록에 보이는 이순신과 원균 관련 어전회의
(2) 이순신의 하옥과 석방 경위
(3) 칠천량 패전과 이순신의 통제사 재임명 경위
(4) 이순신의 전사戰死 상황에 대한 이설
(5) 이순신의 전사 이후 장례 및 이장
첫댓글 "진해현감"님의 매 회 올려주신 방대한 자료에 놀랍습니다~~~
"백의종군로 악양" 님의 작품에 또 한 번 감동입니다~~~~
뒷부분은 책내용 요약일 뿐입니다. 이충무공전서에 이런 내용이 이런 순서로 실려있구나라 라고 생각하시며 천천히 보시면 되겠습니다.
절이도님처럼 손으로 필사하는 정성까지는 못쫓아가지요~~ㅎㅎ
우리 지회에 재주꾼들이 좀 많죠?ㅋㅋ
@진해현감 ㅋ 필사가 이제 반을 조금 넘었습니다~~~
게으름에 진도다 더디고... 일기를 짧게 쓰신 날은 참 고맙지요 ㅎㅎㅎ
창원지회는 모두가 다방면에 실력자이십니다~~~
@절이도(여수지부/김공재영) 우와~
벌써 필사를 절반이나?
존경스럽습니다.
성경 필사는 많이 하지만 난중일기 필사는 절이도님이 처음이지 않을까 싶네요. 예전에 태백산맥 문학관에서 대하소설 태백산맥 필사한 것을 보았습죠. 아마도 조정래 작가를 존경하는 사람이었겠죠? 사람의 키높이 정도의 방대한 분량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는데....
절이도님의 필사 완성본을 보게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ㅎㅎ
어제 갑진년 음력 오월 13일 계축일
이충무공전서읽기 대장정 10회차/15회차 찍었네요~
매회 멀리서 수업 마치고 달려와 주시는 이민웅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이스커피, 빵 등 매번 세심하게 준비해 주시는 지회장님 노고 덕분에 대항해 순항 중입니다~
동자갑선님 참외 맛있었어요~
오늘 갑인일 오후 남은 시간 시원하게 보내세요~~^^
늘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
2/3 지점 통과네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뭐든 시작하고 나면 달리게 된다는...ㅎㅎ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공부도 공부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향기가 납니다..ㅎ
그렇죠?
이배사의 끈끈한 정이 있어서 만나면 더 좋죠. 우리 지회에서는 분위기메이커 동자갑선 언니의 역할이 큰 것 같아요. 늘 감사드립니다^ l^
진해현감님 글 덕분에 함께 공부하는 듯 느껴집니다. 굿~~~
함께 공부하는 듯 느껴진다니 감사하네요. 격군님 강의와 더불어 시너지 효과가 있으면 더 좋겠네요.ㅎㅎ
별로 멀지도 않는 곳인데
마음뿐이네요!
웅천현감님의 노고와 진해현감 지회장님의 헌신이 공부하는
전통을 이어갑니다.
덕택에 저도 온라인으로 잘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악양님의 필력에 감탄했습니다.
늘 관심가져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산지회는 자발적으로 더 깊이있는 학습을 하고 있으니...지회의 여건에 맞게 공부해나가면 되겠죠.
악양님은 국전 수상 작가이니...필력이 대단할 수밖에요~~ㅎㅎ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가르치는 웅천현감님^^ 공부하는 진해현감님을 비롯한 창원지회 여러분^^
참 아름답고 존경스럽습니다. 함께 공부할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
우리나라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 1위가 세종대왕에서 이순신으로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장군님에 대해 조금씩 더 배워가는 소중한 시간이 됩니다.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까페가 있어서 참 고마운 일이지요.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날마다 난중일기를 올리는 하성군님의 정성에도 최고~엄지척입니다.
햇병아리로 공부시작한지 엊그제인데 벌써 중닭이 되었네요ㅎ
아는게없어서 한마디한마디가 더 소중한시간들입니다ㆍ
아낌없이 나누는 시간에 감사하고
저도 미천하나마 재주 하나 가지고있어 또감사합니다^^
벌써 중닭!!!ㅎㅎ
함께 으쌰으쌰 하십시다~~
각자 다른 모양새의 다양한 재주를 갖고 계신 분들이 각자의 달란트대로 나누니 더 좋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