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아가씨들의 반란
요즘 MBC에서 방영되고 있는 오락 프로그램 중 하나가 세간에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진짜사나이" 후속편인 여군특집이다.
"진짜사나이", 사나이이면 사나이지 진짜 사나이라는 명칭이 재미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사나이의 사전적인 뜻은 "한창때의 젊고 씩씩한 남자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사나이의 반대말을 지칭하는 적절한 사전적인 뜻은 없다. 궁여지책으로 찾아보니 “아가씨”, “처녀” 등 흔히 잘 알고 있는 단어 밖에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밀착해서 접근해보면 “계집애”, “요조숙녀”라는 사전적인 뜻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계집애”, “요조숙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 지 사뭇 궁금해진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사나이”라는 단어도 지나치리만큼 남자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말로 충분해 보이는데 왜 그 앞에 “사나이”를 강조하는 부사 "진짜"라는 어원을 붙었을까? 또 사전을 찾아보았다. "진짜"의 사전적인 뜻은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는 진짜 남자가 있는데 여자는 진짜 여자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감이 어색해서일까? 왜 여자들은 진짜 여자라는 말도 없고, 진짜 계집애라는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다시 말하면 가짜 사나이도 있다는 말이 된다. 왜 남자들은 남자다워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나이라는 용어로도 부족해서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젊고 씩씩한 남자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할까?
여자들이 활발하고 씩씩한 것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남자들이 섬세하고 여성적인 감성을 가졌으면 다들 좋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역사적으로 보면,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한 교육적인 시스템은 가혹할 만큼 많다. 이것은 어쩌면 남성우월주의 자체가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프랑스에 어떤 여성 사회학자는 남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한다. 사람들의 가능성을 평가할 때 항상 논쟁 꺼리가 되는 것은 양육이냐? 본성이냐 하는 문제이다. 어느 방향으로도 정확한 답은 없다, 하지만, 이미 태어난 것을 가지고 인간의 본성자체가 학습된다고 바꿔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람이 처음 만들어질 때 엄마 뱃속에서는 그냥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그 속에서 성별이 분화되는데, 여자는 그대로 있고 남자애만 어떤 작용에 의해서 변화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쩌면 남자들이란 생명의 본성적인 여성성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왜 진짜 사나이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회적인 어떤 압력이 작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개인의 인격체는 사회적인 다수의 강요에 대하여 쉽게 저항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집단의 암묵적인 약속과 규칙에서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요즘 앞 다투어 정통성을 주장하는 단체가 많다. 자기가 진짜다, 아니야 우리 집이 원조라니까...... 진짜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진짜인데 진짜 진짜다. 라고 하는 사람들치고 진짜는 드문 것 같다.
특히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는 종교단체에서 이런 어원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에 보면 "복음"이라는 말은 있지만 "순복음" 이라는 말은 없다. 믿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믿음이 된다. 근데 왜 큰 믿음이라고 하는지, 나라는 나라인데 한나라, 누리는 누리인데 새누리, 어떤 사람들은 큰 하늘이 되고 싶을 텐데, 작은 하늘이란다.
요즘은 가짜들이 많다. 가짜가 너무 진짜 같아서 진짜, 가짜를 구분해 내는 전문적인 직업이 있을 정도이다.
다시 말하면, 남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여성적인 남자 인 것이다. 여성이다 남성이다. 라는 편견을 버리고 아이들을 키우면 더 건강한 아이로 자존감도 높고, 긍정적이며, 관심분야도 넓어지고, 머리까지 좋아지는 아이로 성장한다고 한다.
우리들은 우리들도 모르게 수많은 편견 속에서 살아간다. 편견은 다양성을 말살하는 아주 무서운 적이다. 어쩌면 남자들은 여자들이 세계를 차지할까봐 두려워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남자들은 여자들을 억압하고 소외시키고 비하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남자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이 세상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여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아 갈까봐 무서워하는 것일까
진짜사나이라는 오락프로그램을 접하면서 많은 생각들로 복잡해진다. 허울 좋은 겉모습보다 진짜 인간성이 깊고 성실하며, 책임감이 강하고. 남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보다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진짜는 그 자체만으로 진짜이니까 말이다.
남자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신체적으로는 정상이면서도 자신의 남성적 정체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XY들도 많고, 유전적으로는 비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체성을 획득하는 XY들도 많이 존재한다. 남성이 되는 것은 발생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심리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요인들이 더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남성이 된다거나 여성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일종의 지위, 사회적 위치, 문화적 역할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지 생물학적으로 다른 존재에 대치되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남자가 더 이상 인간을 대표하지 않는다. 남성은 인류의 한쪽이고, 남성성이라는 것도 그것이 여성성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정의되기 때문에 일종의 상대적 개념이다.
많은 유럽의 남성들과는 반대로 미국 남성들은 여성들을 원망하기 보다는 문화의 여성화를 더 원망했다.
어린아이들에게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정신장애가 남자아이에게 훨씬 많이 나타난다는 것을 <레옹 아이젠버그는> 그의 연구논문을 통해 발표 된 것이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선 유전자의 약점에서 기인하다고 한다. 남성은 X염색체를 하나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하나뿐인 염색체는 자신에게 미치는 모든 병적인 대립유전자의 좋지 못한 영향력들을 낱낱이 드러낸다. 게다가 정신분석학자들은 성도착증세가 주로 남성에게서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신숭배사상, 이성을 가장하는 성도착증, 이성이 되고자 하는 욕구 등이 대단히 많은 남성에게서 발견된다. 마치 자연은 여성의 정체성보다는 남성의 정체성을 구별 짓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남성의 남성적 정체성을 획득하는 일은 여성이 여성적 정체성을 획득하는 일보다 더 난간을 겪는다고 심리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프랑스의 유명한 여성 사회학자 “엘리자베트 바뎅테”는 그의 책 “XY남성본질에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여성으로 만들어진다.”라는 시몬느 드 보봐르의 유명한 말은 남성에게 적용되어야 맞는 말이다. 즉 , 남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남성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여성에게 여성성을 강요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보다 남성에게 남성이 되어 라는 사회적 압력이 더 심하다. 남성이라는 것이 가르쳐지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남성의 눈물은 울보라는 비난의 화살이 된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남성의 저항이라는 책을 통해 남성들이 일종의 인위적이고 강압적인 남성성으로부터 벗어나서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의 본래적 여성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사회적인 역할과 지위의 문제 때문이라고 보여지지만, 남자같은 여자, 여자같은 남자가 더 많이 태어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몇몇 일부 회의론자들은 재빠르게 남성의 여성화를 배반이라고 규정하며, 전통적 남성상이야말로 애국이라고 이야기 한다.
남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립적인 양성성을 극복하는 일이다. 남자와 여자는 절대 대립적인 관계에서 바라 볼 수 없다. 서로 상대방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남성성이나 여성성의 사회적 구조를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 남성의 위기는 단순히 힘의 문제만은 아니다. 부계사회의 이데올로기와는 반대로 인간의 본래의 기준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남성이 정의되는 것은 여성들과의 관계에 의해 그리고 여성들과의 대조에 의해서이다. 남성과 여성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에서 발전하게 되고, 자손을 출산하기 위한 순간이 아니고서는 결코 만나는 일이 없다. 출산능력의 덕택으로 여성은 가정에서 주인으로 군림하고, 아이들의 교육을 주재하며, 훌륭한 품행을 결정하는 정신적 규율의 굳건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그 나머지가 남성의 몫이다. 생산과 창조 그리고 정치의 영역은 자연스럽게 남성의 영역이 되어왔다. 몇몇 사람들은 남성의 세계와 여성의 세계 사이의 이러한 이원화 속에서 무엇인가 이상적인 것이 실현되어 주길 원했다.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보증하는 양성의 상호보완성이라는 이상 말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현대 용어로 <차이 속의 평등>이라고 말할 것이다. 여성연구 이후에 설립된 남성연구의 독창성은 이 수천 년 묵은 도식과 결별하겠다는 명백한 의지에 있다. 우리는 마치 여성은 자연스럽고 따라서 불가피한 것인 반면, 남성성은 획득해야 하고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여성 그들은 누구인가?”, “남성 그들은 누구인가?” 라는 명제를 양분화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함께 만드는 세상에 당당한 동반자로써 함께 걸어가야 된다고 본다.
혼자서 비바람과 눈보라를 고스란히 다 맞으며 기다리고 있는 의자가 있다.
푸른 잎사귀가 의자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데도 의자는 차가운 냉기를 가슴에 안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