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 신부
안식일. 이무 일도 할 수 없는 못난 사람들
어제의 복음 내용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자른 제자들의 행동 때문에 안식일 법에 대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공격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배가 고파 사제들만 먹을 수 있는 빵을 먹고 나누어준 조상 다윗의 이야기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끝에 따라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안식일의 주인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다윗이 배고픈 일행을 위해 사제들만이 먹을 수 있는 빵을 먼저 먹고 나누어주어 사람들을 위했듯이 예수님 스스로 안식일의 법을 어기시려 하십니다.
오늘 안식일 회당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모습은 분명 모든 사람들이 보고 들을 수 있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을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보게 됩니다.
회당에 들어선 예수님은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람들 가운데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큰일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불러세우신 것은 분명 안식일에 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 일을 하기 위함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도 갈라집니다. 기적이 일어날 것인가 궁금해하는 사람들과 기적을 이루시면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이므로 고발하려 벼르는 사람들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을 둘러 보시며 기적을 이루시기 전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사람들은 말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는 날이기에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악한 일이나 남을 죽이지 않는 것은 분명 옳은 일이지만 착한 일이나 사람을 살리는 일을 못하는 것은 분명 우리 기분을 불편하게 합니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날에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말문이 막혔고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상태에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손을 펴라”라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이루십니다.
기적을 바라던 사람들에게도 그분을 고발하려 했던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에 대한 물음표가 됩니다.
과연 나는 어떻게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가 말입니다.
주님의 날에 무서운 하느님을 피하기 위해 아무런 일도 못하고 사람의 불행에 눈감고 사는 것이 과연 옳은가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렇게 살던 사람들에게 이런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고 오히려 안식일에 사랑을 실천하신 예수님의 목숨을 노리는 일을 모의하는 극악한 모습으로 사람들은 돌변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름 아닌 하느님의 율법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수호하던 바리사이파라는 것이 너무 놀랍기만 합니다.
안식일. 그리고 우리의 주일. 그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는 이틀간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오늘 주님의 질문 속에서 우리는 죄만 짓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던 생활의 태도에 부끄러움을 발견합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사람들에게 이제 예수님처럼 살라고 사람들이 세워놓은 안식일의 비뚤어진 해석을 넘어서십니다.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되는 날, 사람을 위한 착한 일과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심으로써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무서운 하느님을 넘어서 사랑의 하느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듭니다.
그것도 하느님을 하느님의 법을 이용해서 죽이려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맘은 헤아릴 줄 모르고 자신들을 위해서 하느님조차 이용할 수밖에 없는 못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라 살아갑시다.
이제 매일이 구원의 날이 된 우리는 주님이 마련하신 미사에 와 있으니 우리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오늘 하루를, 또 일주일을 평생을 살아갑시다.
부산교구 정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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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신부
안식일은 무행(無行)이 아니라 선행(先行)의 날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창세 2,2-3; 출애 20,8-11)과 할례를 받는 일(창세 17,10-11)은 야훼께 대한 유다인들의 가장 중요한 신앙행위의 지침들이다. 동시에 이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신앙심을 저울질하는 종교적 기준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 사람들이 이 지침들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데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늘 불쌍하고 없는 사람들에게 이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앞서간 복음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자르는 행동으로 안식일법을 어겼고, 오늘은 예수님 스스로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심으로써 안식일법을 어기신다.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 편에서 보았을 때 치유의 행위가 범법(犯法)이 되나 예수님 편에서 볼 때는 는 아니다.
우리는 앞서간 복음을 통하여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두 가지 법칙을 발견하였다. 첫째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2,27)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2,28)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치유기적은 원래 따로 전해오던 것을 마르코가 의도적으로 이 자리에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예수와 그 반대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을 일단락 짓기 위해서이다. 물론 논쟁의 일단락은 예수에게 불리하게 진행된다.
반대자들이 예수를 제거하려고 결의하고 그 작업에 착수하겠기 때문이다.(6절) 예수께서는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더라도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와 뜻을 밝히려 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신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법칙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려 하시는 것이다.
안식일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 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천지창조의 완성의 날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낸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이 날에 금지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예수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문하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은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옳은가?
이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도 하다. 혹자는 예수께서 굳이 안식일법을 어기지 말고, 안식일을 피해 다른 날을 택하여 좋은 일을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루카 13,14 참조)
그러나 꼭 알아두어야 할 점은 예수께 있어서 내일은 없고, ‘지금’과 ‘여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안식일과 좋은 일을, 안식일과 사람을 살리는 일을 서로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도 밝혔지만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모든 일에게 손을 떼고 쉬셨다(창세 1,2)고 해서 이렛날을 무위도식 하는 날로 생각하면 착각이다.
이 날은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날이기에 거룩한 날이고 다른 날보다 복이 많은 날이다.
이 날이 유다인들에게는 토요일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일이다.
따라서 이 날은 죽은 무행(無行)의 날이 아니라 살아있는 행위의 날,
그것도 선행(善行)의 날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사명의 핵심은 바로 ‘생명을 주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에 있다. 이들 일은 안식일에 더욱 더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것만 챙기고 나만 살자고 하는 행위는 안식일의 정신에 절대적으로 어긋난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죽임을 당할 줄을 내다보시면서까지 안식일에 다른 사람을 살리시는 뜻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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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구 신부
옳은 일과 살리는 일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마르3,3-5)
사랑하는 예수님, 당신은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이란 하늘의 뜻(天命)을 따름이요, 사람을 살리는 일이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옳은 일과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면 죽기를 마다하시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당신이 하늘을 버리고 죄 많은 인간들이 사는 이 땅을 선택하셨을 때도 그것이 옳은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30년 나자렛의 삶을 청산하시고 고향과 가족들을 떠나 출가出家하셔서 떠돌이 랍비가 되셨을 때도 그것이 옳은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을 친구로 맞아들이시고 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기를 즐기셨던 것도 그것이 옳은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기피하던 나병환자를 손으로 어루만져 치유하시고 그에게 새 삶을 주셨을 때도 그것이 옳은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돌로 치지 않고 용서하여 돌려보내셨을 때도 그것이 옳은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끝내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산을 오르신 것도,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조롱을 받으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도 그것이 옳은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
저희들도 당신을 닮게 하소서.
저희들은 너무나 자주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일을 하다가
하늘의 뜻을 외면합니다.
이기심과 탐욕에 눈이 멀어서
형제 사랑하는 일을 소홀히 합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불행을 자초합니다.
저희들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당신을 닮아서 하늘의 뜻을 따라
옳은 일을 하고
사랑함으로서 사람을 살리게 하소서.
오늘 하루도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옳은 일만 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소서.
마산교구 강영구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