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용 감독의 1967년작 <안개>는 원작인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 그렇듯
20세기의 현대성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극 중 여성 인물의 유형과 역할이 다채롭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1964)을 원작으로 한 김수용 감독의 69번째 영화 <안개>(1967)는
문학작품을 각색한 한국고전영화 가운데 동시대 영화 이론가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가장 많이 분석되고 거론된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김수용 감독의 다른 ‘문예영화’, 가령 <갯마을>(1965), <산불>(1967?1977), <봄봄>(1969) 등과
비교해 두드러질 정도로, 「무진기행」과 <안개>를 분석한 문헌이 200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발표되었다.
한국 현대문학의 ‘르네상스인’으로서 김승옥이 영화계에 남긴 유산을 재발견하거나,
‘감수성의 혁명’으로 일컬어진 작가의 정교한 문학 언어가 어떻게 영화 언어로 번안되었는지를 비교하거나,
서구 모더니즘 영화의 프레임 안에서 <안개>를 분석하는 작업 등이 이루어졌다.
김승옥 작가 본인이 직접 시나리오로 각색한 <안개>의 이야기는 원작 소설과 다르지 않다.
「무진기행」과 <안개> 모두 ‘귀향 구조’의 서사를 가진 작품으로,
주인공 ‘나’(신성일)가 부잣집 딸인 아내의 권유로 고향인 무진을 오랜만에 방문했다가,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 출세하고자 했던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닮은 음악교사 하인숙(윤정희)을
만나 짧게 사랑을 나누지만, 다시 아내의 연락을 받고 제약회사 전무 자리를 꿰차고자
서울로 귀경한다는 내용이다. 「무진기행」은 일인칭 주인공의 시점으로 6?25전쟁 당시 병역기피자이자
폐병 환자였으나 현재는 성공만을 좇는 무력한 남자주인공의 복잡한 자의식을 내적 독백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안개>는 내레이션과 보이스오버, 플래시백과 시선의 일치 편집 등 영화 고유의 언어를 통해
이를 역동적으로 형상화한다. 여기에 신성일, 윤정희라는 당대 최고의 배우가 출연하는 스타 시스템을
통해 흥행 성공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안개>는 대중적인 멜로드라마로서 언어 외적인 면에서도
다른 예술 매체와 차별화되는 영화 고유의 장치를 십분 활용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 등장하는 오페라 <나비부인>의 ‘어떤 개인 날’ 대신 대중가요인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과
원작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 동명의 주제곡 ‘안개’를 하인숙이 부르도록 설정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하나의 예술사조로서 모더니즘의 맥락에서 「무진기행」과 <안개>의 자리를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서울과 무진으로 대변되는 도시와 농어촌의 대비,
현대화와 산업화가 가져온 신분 상승과 계층 이동에 대한 욕망,
무진의 명물인 ‘안개’가 상징하는 고립과 단절 또는 혼돈과 방황의 공간적 배경,
죄책감과 권태와 수치심에 시달리는 남자주인공의 분열된 의식의 흐름에 따른 기술,
자연주의나 리얼리즘의 세계와 대비되는 파편적이고 모호한 설정(가령 술집 작부의 죽음),
남성 영웅을 유혹하고 위기에 빠뜨리는 누아르적 팜파탈 여주인공,
‘사랑’에 대해 세속과 순수라는 상반된 태도를 반영하는 조연급 인물들의 배치 등 작품의
모든 요소가 20세기의 ‘현대성(modernity)’을 한껏 드러낸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6?25전쟁의 원인을 파헤치기보다,
전쟁의 결과로 야기된 인물 개인의 내면과 감정의 변화가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간 이 작품들에 대한 분석은 남자주인공 ‘윤희중’(소설) 또는 ‘윤기준’(영화)의 여정에
높은 비중을 두고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현대성’에 대한 더 폭넓은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젠더(gender)’에 초점을 맞춰 극중 여성들의 인물 유형과 상징적 역할이 더 많이 이야기되어도 좋을 것이다.
어머니, 아내, 애인, 미친 여자, 자살한 술집 작부.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을 이런 순서로 나열하고 보니 어떤 위계 혹은 스펙트럼이 생기는 것 같다.
어머니는 남자를 잉태하고, 아내는 남자를 보호하며, 애인은 남자의 거울이고,
미친 여자와 술집 작부는 남자가 경험하는 우연한 정념과 성욕의 비극적인 형태일 것이다.
그 위계의 가운데에서 남자의 모험을 이끄는 담지자로서 애인 하인숙은 유행가를 부르면서
‘심심하다’고 말함으로써 ‘권태’라는 가장 모던한 감정을 드러낸다.
서울에 데려다달라고 요구하다가 서울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모순적이고 변덕스러운 하인숙의 자아.
명배우 윤정희의 가장 매혹적인 한때가 담긴 <안개>는 (남성의 관점에서) 20세기 한국 여성이 떠맡은
성 역할을 묘사한 대담한 초상화이기도 하다.
안개(1967) / Mist
https://youtu.be/GppVzuwaK-Y?si=PiQpNW4QDNpDg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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