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기
나는 6·25전쟁 전에 이름없는 한촌(閑村)에서 태어났다. 내가 1949년 1월에 태어났으니 1950년 대부터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전란 후 7년 간 대흉년이 들어서 마을사람들이 배고파서 많이 굶어 죽었다는 시절에도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당시에 보고 겪었던 머슴, 소, 막걸리이다.
우리 집에는 일꾼이 1950년 대에서 1970년 초까지 있었다. 내가 일꾼아저씨의 이야기를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쓰는 이유는 내가 시대적 빈곤과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몹씨도 가난했고, 어려움을 무던히도 겪어내야 했던 옛일을 반추해서 남겨놓고 싶다. 그러나 옛 일을 자세히 기록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당시에 너무 어려서 옛기억을 제대로 회상하지 못한다는 점이며, 또 내가 열세 살 나던 해에 대전으로 전학간 후로 농촌을 점차 잊어버렸으며, 마지막으로 내가 대전과 서울에서 학교에서 다녔으므로 방학 때에만 잠깐씩 일꾼아저씨를 보았기에 그들의 내면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학졸업 후 스무다섯 살 나던 해에는 충남 서해안의 조그만한 면소재 시골에서 방위근무를 섰다. 방위제대 후 스무일곱 살인 1974년 겨울철에 도회지로 완전히 탈출(?)했다. 내가 떠난 후 우리 동네에서는 머슴이 언제부터 그만두었는지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짐작하건데 가난의 상징이였던 농촌(어촌산촌)이, 누천 년 동안 정체되었던 전통사회가 ‘잘 살아 보세’라는 새마을 운동의 기치 아래 1972년경 부터 숨가쁘게 사라졌고 잊혀졌다고 본다. 초가지붕의 이엉을 벗겨내고 스레이트와 함석으로 대체하면서 농촌사회도 급격히 달라졌고, 살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도시로 대량 빠져 나갔다고 본다.
우리 집에서 살았던 일꾼아저씨는 머슴이였다. 머슴은 농사채가 많은 주인집에서 기거, 숙식하면서 일년 간의 농사를 지었다. 머슴을 두는 집은 대체로 농사채가 스무 마지기를 넘거나 남정네가 없는 집이였다. 어머니와 작은어머니도 머슴을 두었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모두 객지에 나가 살았다. 동네는 머슴이 열 명쯤 있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집에서 매일같이 보던 머슴을 우리 식구들은 ‘일꾼아저씨’라고 불렀지 ‘머슴’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일꾼아저씨가 식구였다. 단지 성만 다른 남이였을 뿐이였다.
일꾼(머슴)의 새경은 일 년에 쌀 여덟 가마나 열두 가마였다. 당시에는 장리쌀의 이자가 월 5부(5%)였으므로 일 년 치 새경을 미리 앞당겨 쓰면 쌀이 여덟 가마였으며, 농사가 끝난 뒤에 가져가면 열두 가마였다. 생활형편이 어려우면 새경을 미리 받아 갔으며, 여유가 다소 나으면 농사가 끝난 뒤에 받아 갔다. 생경 열 두 가마를 구루마에 실고가는 날에는 일꾼은 신명이 났다. 그들의 얼굴이 그렇게 말해 주었다.
당시에는 논 마지기당 수확되는 쌀이 두 섬지기를 살짝 넘었으므로 새경을 주기 위해서는 논이 네 마지기나 다섯 마지기가 덤으로 나갔다. 먹매를 제외하더라도 새경은 논의 수학량에 비하여 결코 적은 것만은 아니였다.
2. 머슴과 새경
일꾼이 짓는 농사채는 스무다섯 마지기가 한계였다. 스무 마지기가 넘으면 장정의 일꾼이라도 힘이 벅찼기에 논이 많은 집에서는 젖(곁?)머슴을 더 주었다. 아직 장정의 힘이 지게에 꼴리지 않는 나이였으며, 또 경험부족으로 농사를 독단으로 짓지 못하는 나이의 일꾼이다. 젖머슴은 상머슴 새경의 절반을 받았다.
한 해 일꾼의 옷은 두 벌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음녁 설을 지낸 후 일꾼이 처음 들어오는 날과 칠월 백중날에는 삼베옷 한 벌을 더 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백중날은 ‘일꾼의 날’이여서 ‘하루 동안 싫컨 놀으라’ 고 주인이 노자돈을 주었다. 일꾼들은 끼리끼리 어울려서 장에 나가 흠뻑 취했다. 술 취해 건드렁 거리면서 혀 꼬부라진 일꾼은 파장에서 산 반찬꾸러미를 어머니에게 넘기곤 했다. 아마도 오가는 정이 아니였을까 싶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많은 서울로 … “ 노래와 함께 절대 빈민층의 대부분이였던 영세민의 이농도 점차 잦았다. 농촌인구의 빠른 감소로 머슴 또한 점차 귀해지고, 머슴이 귀해진만큼 새경은 조금씩 더 늘었다. 머슴을 둔 집에서는 새경을 얼마쯤 더 올려 줄 것인지 걱정되어서 남의 눈치를 살폈다. 새경이 적으면 일꾼이 들어오지 않았으며, 또 남보다 더 주면 떠도는 말들이 많았다. 새경을 올려 줄 수도 없고 안 올려 줄 수도 없는 상황이 매년대년 거듭 되었다. 고뿌레 새앙골(샘골)의 황씨네는 부자집이여서 남보다 먼저 새경을 더 올려 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동네에서 떠도는 구설은 이내 흐지부지 연기처럼 사라졌다. 세상인심은 아무래도 덜 가진 사람들의 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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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머니가 머슴과 소를 고르는 조건
체구가 왜소한 어머니는 일꾼을 고를 때는 일꾼이 상머슴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먼저 따졌다. 여러 사람들에게 문리했다(물었다). 힘이 세다고 상머슴으로 치는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을 한꺼번에 모을 수 있는 배포를 가진 사람을 상(上)으로 쳤다. 논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이삼십 여 명의 일꾼들을 한꺼번에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즉 평소에 동네사람과 이웃동네 사람까지도 잘 어울렸다가 농번기에 이들을 모두 불러들일 수 있는 수완을 먼저 쳤다. 무학자인 어머니는 자기 깜냥대로 일꾼아저씨의 교섭능력을 더 쳐주었다.
우리 집은 일꾼아저씨가 농사를 직접 지었다라기보다는 남의 집 일꾼들이 농사를 지었다고 본다. 일꾼아저씨는 구루마와 쟁기를 잘 다루어야 했다. 즉 우리 집에는 대전에서 지에므시(GMS) 트럭으로 싣고 온 구루마(달구지)가 있었다. 바퀴도 여네발통이 아닌 비행기의 단단하고 매끈한 바퀴이였고, 목제소에서 각지게 켠 참나무로 짜서 만든 크고 멋들어진(?) 구루마였다.
일꾼은 오일장(2일, 7일)마다 구루마를 끌고 장터로 나갔다. 동네의 벼가마(쌀, 보리, 밀, 콩,고구마, 스슥, 조…)등 무거운 짐을 날라주고, 올 때는 다른 물건을 조금 실어 날랐다. 또 벼공출(농지세, 벼수매) 때도 장에 나갔으며 타동네로 방아를 찧러 다녔다. 동네 방앗간을 이용하지 않고 타동네로 방아찧러가는 사람들은 죄스러워했다.
구루마 삯은 돈보다도 일품(품앗이)을 외상으로 달았다. 일꾼아저씨는 쟁기로 남의 집의 밭과 논을 갈아주고 품삯 대신 일품을 달아놓았다. 소가 따른 쟁기질은 일품이 사람몫보다 더 많았다. 소품이 있는 날에는 일꾼은 토방에 서서 말하고 마루에 앉은 어머니는 치부책에 꼭꼭 달아놓았다. 나는 이따끔 장에 나가서 쟁기보습을 몇 개씩 사 날랐다.
장에 갔다가 되돌아오는 구루마가 빈 수레이면 하학길의 아이들도 대담해져서 책보재기를 은근슬쩍 올려놓고 또 구루마 꽁무니에 눈치껏 매달렸다. 검정 고무신이 땅바닥에 질질 끌리면서 타는 재미가 여간 솔솔하지 않았다. 고무신 밑창이 쉽게 닳른다는 걱정도 잠시 잊은 아이들은 구루마와 떼어놓을 수 없는 상극이였다? 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메’ 했어도 말귀를 알아 들었다는듯이 소를 아끼는 일꾼은 자주 구르마 꽁무니를 살피고 “야, 이놈들아” 소리를 길게 내질렀다. 화들짝 놀랜 아이들은 벼메뚜기 튀듯 떨어졌다가 찰거머리처럼 다시 은근슬쩍 구르마에 달라붙었다.
우리 집 소는 웅천면내 새장터 소전에서 산 소가 아니라 우시장(牛市場)으로 유명한 서천군 판교 장터에서 사 온 소였다. 소 사는 날에는 어머니는 돈 전대를 아랫 배에 꽁꽁 동여서 졸라매고 새벽에 나갔다가 한밤중에 걸어서 돌아왔다. 새로 사 온 얼룩소는 듬직하게 컸으며 힘도 셌다. 눈망울이 유난히 큰 암소는 눈망울만큼이나 우직하며 순했다. 송아지를 밸 요량으로 암소만을 골랐다. 한 번은 새로 사 온 소가 등치가 큼직하고 듬직했으나 구루마를 끌지 못하고 쟁기질을 전혀 못했다. “속았다”는 소를 다음 장날에 되팔고 새로 산 온 적이 있었다.
4. 소와 나
여름방학 때 내 일과는 소 뜯기는 일이였다. 소의 콧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둥근 막대기를 꼽아서 묶는 코뚜레, 거기에 길게 꿴 나이롱 줄을 슬그머니 쥐고 들판으로 나갔다. 들풀을 마음껏 뜯어먹게 했다. 한적한 신작로 가생이, 논두렁에는 소와 나 둘뿐일 때가 많았다. 한가로운 들판에 정적만이 감돌았다. 나는 하모니카를 늘어지게 불었고 소는 맹꽁이 배만큼 풀을 뜯어 먹었다. 내가 저녁 무렵에 소를 집으로 몰고 오면 소는 나무판자들로 짜 맞춘 둥근 구정물통에 주둥이와 코를 박고는 틉틉하게 쉰 구정물을 거의 다 마셨다. 소가 배터져 죽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으며, 부엌아궁이에서 불을 때던 어머니는 흐뭇해 했다. 내가 소를 뜯기면 일꾼은 소깔을 조금만 베어와도 되었다. 그만큼 일꾼아저씨가 농사일을 더 돌볼 수 있었다. 소와 나는 여름방학 동안 내내 들풀을 찾아 들과 산으로 나돌아 다녔다.
5. 일은 신나게 해야지
우리 집 일꾼아저씨는 논일에 치중하였지 밭일은 조금 등한시 했다. 손공이 많이 가는 논에 일손이 딸렸기 때문이였다. 일꾼아저씨는 틈이 나면 쟁기로 밭 갈고, 씨 뿌리면 밭일은 그만이였다. 밭 매는 것은 가외였다. 어머니는 동네 아낙들을 품으로 사서 긴 이랑의 풀을 잡아야 했다.
때로는 남자 일꾼들이 밭에 들어서기도 했다. 오후 서너 시 경에 논일(기슴)을 끝낸 뒤 저녁 때것을 먹으려고 집으로 왔다. 때것을 마친 후에는 이삼십여 명의 사내들이 밭에 일렬로 들어서서 호미로 흙을 득득 팠다. 한 켠에서는 풍물잡이들이 풍물을 치고, 나머지 사내들은 풀을 듬성듬성 쥐어뜯었다. 사내들은 신명으로 일했다.
하루의 일이 끝났어도 풍물은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술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장터 술도가에서 자전거로 배달해 온 술통들을 거꾸로 쳐들어서 술바탱이(장독) 턱주가리에 걸친 다음 술을 퀄퀄 부었다. 술은 살아서 출렁출렁 거리면서 쏟아졌다. 막걸리는 하룻밤을 새면 곧 쉰내가 났다. 쉰내가 너무 심하면 아깝더라도 자수물통에 내다버려야 했다. 막걸리가 더 쉬기 전에 다 마셔야 했다. 그래서 남은 막걸리는 모두 내왔다. 틉틉하게 쉰(발효된) 막걸리에 흠뻑 취한 채 신명나게 놀았다. 집에 돌아갈 줄 몰랐다.
6. 벼 바슴하는 날
수십 명의 일꾼들이 한꺼번에 일할 때가 종종 있었다. 모 심기, 세벌(초벌 두벌 세벌)김매기, 벼 베기, 볏짐 나르기, 벼 바슴과 보리 베기(보리 바슴), 풀 치기(퇴비 만들기)하는 날이다. 당시에는 농기계가 없었으므로 손으로 모를 찌고 심고, 낫으로 벼를 베고 지게(등짐)로 볏단을 날랐다. 많은 일꾼들이 지게에 두 개의 대나무 막대기를 덧대고 볏가리를 높게 쌓아 짊어졌다. 겅충겅충 출렁출렁 거리면서 행길을 일렬로 늘어서서 걸어 왔으며, 구루마가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마을안 길로 들어섰다. 울 안, 바깥마당에 노적가리를 다섯 동이나 높게 쌓아 올렸다.
바슴은 늦가을에 했다. 찬 서리가 뽀얀하게 땅에 내린 첫새벽부터, 어둠이 채 가시기 전부터 사내들은 언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면서 바슴마당으로 모여 들었다. 마당가에 장작불을 피워서 언 몸을 녹이고, 뜨거운 국물과 새벽밥으로 빈 속을 채웠다. 일꾼이 노적가리에 올라가서 둥글게 싼 노적가리를 헐어서 볏단을 땅에 내던져 내렸다. 땅에 떨어진 볏단을 운반하고, 볏단을 새끼줄(샛나끼)로 동여맨 후 어깨 위로 쳐 들어올렸다가 절구통에다 힘껏 둘러 매쳤다. 볏낱이 우스르 사방으로 튀었다. 이러기를 몇 차례 거듭한 후 홀태(와룽꽈룽, 호롱기)를 밟은 사람들에게 넘겼다. 홀태는 와릉꽈룽 시끄러운 톱니바퀴 물리는 굉음을 내면서 벼 알곡을 쏴르르 털어냈다. 짚토매가 연방 뒤로 내던져 졌다. 사내들의 고함소리도 신났다.
내 어린 시절은 근력으로 하는 바슴이였으므로 많은 일꾼들이 필요했다. 딸딸이(경운기)가 보급된 뒤로는 경운기 엔진에 피대를 걸어서 탈곡기(계)를 돌렸다. 그러나 내가 스무 살이 넘은 이후에는 반자동화된 탈곡기의 성능이 개량될수록 일꾼의 숫자는 반대로 계속 줄어들었다. 사내들의 시끌벅적거리는 잡소리, 탁하고 거친 웃음도 점차 줄어들었다.
7. 일꾼은 하루에 논 반마지기 일을 더 했지
당시에는 일꾼 한 명당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즉 논 반 마지기를 살짝 넘는 분량이 하루의 일거리였다고 기억한다. 따라서 농사 일을 하루나 이틀에 끝내기 위해서는 동네 사람은 물론 타 동네사람까지도 많이 불러 모아야 했다.
한 사람이 논 한 마지기의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새벽 서너 시 경부터 시작해서 저녁 늦게까지 쉴사이 없이 일하는 경우다. 자기 네의 일이거나 한 마지기당 얼마씩 품값을 더 주기로 약속한 맡고지기의 경우에는 한 사람이 죽을똥살똥 일하는 분량이였다. 식구가 아니면 남의 일꾼을 그렇게 부릴 수는 없었다. 맡고지기 일이라도 사람들은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탈진했다.
8. 일꾼 사랑방
우리 집에는 일꾼사랑방이 있었다. 안채에서 조금 떨어진 일꾼사랑방에는 일년 중 대부분 아침저녁마다 군불을 땠다. 소죽을 끓이기 위해서였다. 당시에 소는 식구만큼이나 소중히 여겼다. 쇠죽 솥에서는 볏짚과 쌀겨익는 구수한 냄새가 났으며, 밤새껏 워낭소리(방울)가 딸랑 거렸다.
아랫목 웃목이 잘잘 끓은 뜨거운 구들장 방에서는 동네 머슴, 청장년 아저씨들이 항상 바글거렸다. 사내들의 거친 숨소리와 욕설 그리고 땀에 절은 냄새가 진동하였다. 비 오는 날이거나 밤중에는 짚푸라기로 삼태미, 메꾸리, 멍석, 소덥석 등을 만들었다. 벼바슴이 모두 끝낸 늦가을에는 지붕이엉도 엮었으며 나무자새로 동아밧줄을 꼬았다.
9. 일꾼아저씨는 쌀밥 먹고
우리 집 식구는 보리꼽살미로 밥해 먹고 일꾼아저씨만 쌀밥을 해 드렸는데 일꾼아저씨가 밥상머리에 앉은 쌍둥이에게 쌀밥을 조금씩 남겨 주었다. 쥔 집의 아들인 내가 밥을 얻어 먹었다는 이야기이나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가마솥에 밥을 안칠 때에 가마솥 밑에는 보리꼽살미를 깔고 그 위에 쌀을 안쳤는데 쌀밥과 보리밥이 확연히 구분되었다. 밥은 일꾼아저씨 몫부터 먼저 펐으며 그 후에는 쌀밥과 보리밥을 마구 섞어서 식구들의 밥을 펐다. 우리는 그게 불만이였고, 어머니는 ‘일하는 일꾼아저씨한테는 쌀밥을 드려야 한다’고 무언으로 애들의 식욕을 억눌렀다. 부어터진 입술을 삐죽이 내밀면서 가새(가위)로 빡빡 깍은 대갈통(머리통)을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10. 내가 기억하는 머슴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머슴은 국민학교(초등학교) 1학년 때가 아닌가 싶다. 일꾼의 아들이 굴고개의 흙벽돌 집에서 산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나와 한반으로 기억된다. 그 아이는 이내 학교를 그만 두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말이 내게는 알 수 없는 슬픔으로 남았던 기억이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이씨 성을 가진 일꾼아저씨도 생각난다. 그 분은 우리 집(초가집)을 부수고 새로 함석집을 지을 때 고생을 많이 했다. 이년 간 살았다. 훗날 정신이 부실한 여자를 얻어서 자식을 낳았으나 그 자식도 어리뜩(어리숙)하다는 풍문이였다. 그 분의 초가집은 작았는데 집을 옮기는 방법이 별났다. 구루마 위에 초가집 상태로, 그대로 들어올려서 실었단다. 행길(신작로)따라 천여 보(步)를 이동하였다. 벽기둥이 엇비슷하게 기울어 넘어간 오두막집에서도 그는 오랫동안 사셨다.
이씨 성을 가진 일꾼이 또 있었다. 큰뜸(큰말) 우리 집에서 바라다보이는 융골재 너머에서 산다는 분이였다. 목이 짧고 허리가 꾸부정한 분이였다. 먼 훗날(1972년 경), 나는 그 분의 외아들(돌을 깨는 석수쟁이)과 함께 방위병이 되었다. 나는 낮에 예비군 중대본부에서 기간요원으로 근무했고, 그는 밤에 해안근무를 섰다.
1960년 대 말엽에도 일꾼은 남아 있었다. 별명이 벽시계였던 일꾼아저씨가 있었다. 웅천면 한내(대창리)에서 왔다는 이십대 후반인 사내는 등치가 너무 컸다. 몸집이 우람한 사내의 얼굴은 ‘작은 기둥시계’만했다. 별명이 벽시계였다. 먹성이 좋고 밥을 많이 먹은 탓으로 늘 방구를 꿨다. 쉰소리(헛장담) 잘하는 그는 이태나 머슴을 살았다. 동네 황시네 방앗간에서 벼방아를 찧은 후 일년치의 새경을 구루마로 실어나르면서 입이 함박만큼이나 벌리고 싱글벙글거렸던 사내다. 구루마로 실어가는 쌀가마니를 보고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쥔들의 입장으로서는 아쉽기만한 하였으리라. 왜냐하면 새경을 주고나면 별로 남을 게 없는 농사였다.
내가 머슴이라는 말을 떠 올리는 순간이면 육손이 아들을 둔 일꾼아저씨가 생각난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우리 동네로 이사왔다. 그 분의 아들은 외아들이였다. 너댓 살난 아이는 제 아비의 옆에서 밥을 먹으면서 무의식적으로 등 뒤로 한 손을 감추었다. 감춘 손에는 조그만한 손가락이 하나 더 있었다. 엄지손가락 곁에 삐족히 길게 난 육손이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실로 육손가락을 쩜맸다는 소문이였다. 즉 병신손가락이 더 이상 크지 못하도록 실로 꽁공 동여매서 잘라낸다는 것이였다. 어린 아이가 강제로 뼈와 살을 죽이는 고통을 어떻게 참아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안쓰러운 코흘리개였다.
일꾼아저씨가 가솔을 이끌고 타동네인 우리 동네에 이사왔으므로 모든 살림살이가 부족했다. 어머니는 기본적인 살림채비, 추운 겨울을 나도록 장작 등을 나눠 주셨다. 그런데도 그는 우리 집의 허접한 물건 특히 땔감인 장작을 노렸다. 조금씩 덜어내는 것이지만 표가 날만큼 눈에 거슬렸다. 확증을 잡은 어머니는 젊은 나를 앞세우고 일꾼아저씨네로 갔다. 송판으로 아구를 짜맞춘 마루짝 밑에 채곡히 쟁겨진 장작더미와 쩔쩔 매던 일꾼아저씨 내외가 지금도 생각난다.
참 미련한 사람이다. 뒷산에 오르면 온 천지가 맨 나무다. 산에서 눈치껏 잔(작은) 솔가지나 잡목만을 베었다가 새벽녘에 지게로 조금씩 져다가 자기네 집에 쌓아 두었더라면 좋았을 터였다. 미련하게도 주인집에서도 아끼는 장작을 야금야금 헐어냈으니 눈썰미가 날카로운 어머니한테 들킬만 했다. 어머니가 꾸중을 조금만 덜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았다. 너나 할 것 없이 땔감이 무척 부족했던 시절에 겪었던 힘겨운 삶의 연속이였다.
그 아저씨에게 미안한 것이 더 있다.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내가 서울로 올라갈 때는 옷가방 속에는 말끔히 빨아서 갠 속옷들이 가득히 찼다. 일꾼아저씨가 지게로 가방을 져서 역전으로 날랐는데 한 번은 기차시간이 너무 임박했다. 일꾼아저씨는 지게를 진 채로 오십 분 거리를 뛰었다. 나는 앞장 섰다. 샛길로 뛰어서 간신히 열차에 매달린 후에야 그 분을 보았다. 땀에 흠뻑 졌었던 분에게 담배조차 사 드리지 못했던 죄스러움이 지금도 남았다.
내가 스무다섯 살 때(1972년)가 아닌가 싶다? 서해안 웅천면 무챙이(지금은 무창포해수욕장으로 알려짐) 출신인 일꾼아저씨는 윤씨였으며 키가 매우 작았다. 또 너무 늙었다. 밤 중에 십리길의 무챙이교회에 나가고 다음 날 새벽에 다시 되돌아 온다는 것을 알았다. 교회에 자주 다니면 낮에 일이 지장이 많다는 어머니의 꾸중도 건성으로 넘기고 안 다니겠다는 언약도 자주 어겼다. 밤중에 자기네 집에 걸어가서 잠 자고 이른 새벽에 다시 우리 집에 오는 거야 그 사람의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야속하게 지나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다. 나는 기가 죽은 그 분을 달래려고 면사무소 서점에서 성경책을 샀다. 무창이에 가지 않는 밤에는 사랑방에서 성경을 읽어드리고, 무슨 의미(내용)인지를 해석해 드렸으나 그 분은 성경의 기초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신론자인 나도 알고 짐작하는 성경내용을 그는 너무도 몰랐다. 그런데도 어떻게 종교를 믿는다면서 교회(종교, 교리가 아님)에만 극성스럽게 다녔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윤씨는 여름 철에 무챙이로 가 버렸다. 새경도 정리하지 않는 채 일방적으로 머슴관계를 끝냈다. 나는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진, 참으로 조그만한 오두막 집을 찾았다. 참으로 작고 허름한 초가집이 온통 짚덥석으로 빙 둘러쌓였다. 갯바람이 덜 닿을 것 같았다. ‘농사 일을 마저 마무리 지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끝내 설득하지 못했다. 고집이 셌던 노인네였다.
무챙이에 사는 김씨가 있었다. 내가 낮에만 근무하는 예비군 중대본부 행정업무를 보면서 알게 된 예비군이였는데 그는 무척이나 잔말이 많았다. 언행이 어눌하고 행동거지가 어뚠했는데도 그는 아는 것(?)이 너무 많고 넉살이 좋아서 남들한테 비웃음을 샀다. 예비군훈련 때에는 늑장부리고 굼떠서 걱정과 조롱거리가 될만큼 늘 말썽을 피웠다.
그가 일꾼으로 우리 집에 들어왔다. 시집 온 지 얼마 안되는 새색시를 데리고 와서 바깥사랑방에서 신방을 차렸다. 그러나 얼마 살지 않고 무챙이로 돌아갔다. 1973년 봄인가? 그가 우리 집에서 산 일꾼 중 마지막이 아니였나 싶다.
그가 무챙이로 돌아 간 뒤 얼마 안 있어서 승깔(성미) 사나운 장모가 딸을 데리고 가버렸다는 풍문이 어슴프레 떠 돌았다가 잠잠했다. 그는 후에 우리 동네 앞마실의 황씨네로 머슴살러 왔으며, 주인 할아버지의 눈에 들어서 사위가 되었다. 새로 얻은 아내는 김씨보다 더 딱했다.
그가 우리 동네에 정착했다. 그의 외아들이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고 껄렁댄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천에서 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인데도 학교를 자주 빠지고 대신 오토바이 타기를 억세게도 좋아했으며, 오토바이를 훔쳐서 타고 다니다가 들통이 나서 순경한데 쫒겨서 산으로 달아나고, 결국은 농약먹고 자살했다는 슬픈 풍문이 떠돌았다. 김씨의 가슴에 못을 박고 간 철없는 아들이였을까. 중고 오토바이를 훔친 죄를 감당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자살을 택한 아들이지만, 김씨가 실성한 것처럼 아들 이름을 자주 부르면서 울고 다닌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가 못마땅했는지 ‘나도 생떼 같은 자식 셋을 가슴에다 묻고 살지만 자네처럼 울고 다니지는 않네, 울은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혼자만 가슴에 담고 앞으로는 남들 앞에서 죽은 자식을 찾지 마소.’라고 매정하게 혼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자식 죽어 가슴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어?” 말을 덧붙였다.
그의 딸도 부실하여서 멀리 외딴 섬에 갇혀있다는 믿기 어려운 소문도 나돌았다. 이래저래 가슴에 응얼이가 새겨진 김씨가 우리 동네 사람이 된지도 벌써 삼십여 년이다.
작은어머니네의 일꾼은 백씨였다. 그는 고뿌레 마을인 굴고개 태생이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도 작은집에서 일했으며 제대 후에도 다시 작은 집에서 일했다. 일한 지 얼마 안되어서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 병원에서 ‘살려 달라’고 애원했으며, 약 먹기 전에 계모와 심하게 싸웠다는 후문도 있었다.
우리 집 일꾼 중에는 산지기도 있었다. 서낭댕이 아래 마을 진등에서 사는 엄씨는 이년동안 머슴을 살았다. 이웃 집 황씨네한테 돈을 빌리고 대신 머슴갔다. 돈을 다 갚을 때까지 머슴살기로 약조하였는데 이년째 되던 해에 그 분은 자살했다. 왜 자살했는지 또 빚을 어떻게 청산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일꾼 중에 황씨 성을 가진 청년이 있었다. 웅천면과 인접한 남포면 사람으로 기억된다. 심성이 무던히도 좋던 그는 삼년 간 머슴을 살았다. 어머니가 그에게 매봉재에 사는 친정조카 부심이(부심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를 중매섰다. 그들은 결혼 후 고뿌레 마을을 떠났다. 초가삼간의 흙집에서 살았던 무학력자인 외사촌 누이. 그 여동생과 결혼한 그는 이름이 효성이다.
객지로 떠난 후 목수가 되었다는데 지금(2003년)은 그가 환갑을 넘겼을 것 같다. 가난이 싫었던지 그들 내외는 고뿌레 매봉재에 들리지 않았다. 부심이네가 살았던 흙집은 풍우에 사라지고 손바닥만한 집터와 채전밭은 아카시아 상수리나무 등 잡목과 가시덤풀만 뒤덮였다. 그래서 세월은 모든 것을 쉽게 잊어버리게 한다. 그래야 아픔도 치유되겠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꾼이 더 있다. 그 분은 두 살 터울의 내 누나를 예뻐했단다. 들판에 갔다오면 으레껏 삽 안에서 우렁 몇 개를 꺼내어 사랑방 부엌짝(아궁이)에서 구은 후 어린 누나에게 먹여 주었다고 한다. 이른 새벽에 두엄을 지고나가다가 외나무 다리에서 떨어져 불알을 나무꼬챙이로 꿰뚫었다. 덧이 나 자기네 집에서 끙끙 앓았다가 죽었단다. 죽기 전에 문병 간 어머니에게 “쥔 아주머니, 나 살고 싶어요.” 말했다고 노모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눈시울을 적셨다.
이제 남의 집 일꾼 이야기를 덧붙여 본다. 내 누나의 수양어머니 조씨댁에서 십 년쯤 머슴살았던 김씨는 무창포 포구에서 어선을 몰고 돈을 제법 벌었다고 자랑했다. 물론 지금은 늙어서 어구(漁具)조차 드는 것도 힘이 부친다면서도 옛적, 젊은 날에 우리 동네에서 힘께나 쓰면서 머슴살았던 이야기를 할 때는 조금은 신나는 것 같았다.
일꾼 중에는 오서방이라는 일꾼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독신이였으며 짚신을 손수 삼아서 신었다. 이른 아침에 가끔씩 짚신을 삼는 일꾼할아버지 곁에서 짚을 꼬아 만든 짚풀레기를 발가락에 끼고 짚신을 삼는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 보았다. 오서방할아버지는 사년 간 머슴을 살았다.
오서방 할아버지에 이어 그의 큰조카도 일꾼아저씨가 되어 삼년 간 살았다. 오서방의 큰조카는 굴고개 행길 아래 채전밭을 등지고 남향한 조그만한 오두막살이 초가집에서 살았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부인을 두었으나 자식 소출은 없었다. 먼 훗날 그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으며, 얼마 안있어 후유증으로 그의 노모 앞에서 죽었다.
이제는 그 많던 머슴도 꿈속처럼 흔적없이 사라졌다. 고향산천을 등지고 많은 사람들이 객지로 떠났으며 또 고향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이제는 대부분 다 늙고 죽고 몇 명 안남았다. 모든 게 저녁안개처럼 소리없이 사라져만 갔다. 그러나 그 세월이 변해도 남아있는 것이 하나 있다. 무덤이다. 우리 집에서 사년 간 머슴 살았던 오서방 일꾼할아버지의 무덤이다.
욱굴산은 산의 능선을 따라 웅천면과 남포면으로 갈라지는데 그 능선을 신안재라고 불렀다 신안재의 남녘이 욱굴산이다. 욱굴산 잿고개 산길을 살짝 비킨 곳에는 무덤이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난 세월 뒤에야 나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어머니가 오서방(할아버지)의 무덤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예전에 남포면 대월 갯사람들이 웅천장을 보러 다녔던 호젓한 샛길은 점차 흐미해지고, 비바람에 봉분이 낮아진 무덤은 소나무 그늘로 응달이 졌다. 그의 둘째조카와 그의 아들(오서방의 종손)이 벌초한다고 한다. 내가 산을 팔지 않는 한 ‘오서방 일꾼할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의 끈은 오래 이어질 것이다.
11. 내가 머슴이 될 수밖에
1962년(?) 경 이후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 정책과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순차적으로 추진되었다. 도시 인근에 공장지대가 형성되고 세갈래의 시꺼먼한 연기가 공장의 굴뚝에서 내품는 포스터가 도처에 붙여지고, 농어촌의 유휴 노동력을 빨아들이는 경공업산업체가 속속들이 들어찼다. 국민재건복을 입고 헬멧을 쓴 공장일꾼의 그림도 담벼락에 붙기 시작했다.
무챙이 윤씨가 나간 그해(1972년? 1973년?) 여름부터 나는 일꾼없이 농사를 졌다. 소깔을 베었다. 벼도열병과 잎마름병, 장마철에는 뿌리가 썩는 문고병을 예방하고, 뜨물을 구제하고, 초가을 벼멸구를 잡기 위해서 이피엔(EPN), 스미치온, 파라치온, 후미치온 등 농약(지금은 고엽제로 알려짐)도 쳤다. 벼 베고, 벼바슴도 했다. 그 덕분에 나는 여름 철 이후의 논농사 일를 어설프게나마 조금 배웠다.
무챙이 김씨가 무챙이로 돌아간 후 어머니는 머슴을 두지 않고 소작으로 논을 내놓았다. 소도 팔았다. 소작짓겠다는 간청이 많이 들어왔던 때였으므로 논을 맡기는 것은 걱정도 안했다. 단지 가을 바슴이 끝나면 볏광에 가득히 차야할 벼였는데, 이제는 도지(소작료) 들어온 벼가마니가 광 밑바닥에 깔린 정도로 수확량이 크게 줄었다. 경제적인 아쉬움이 남았다. 마땅한 일꾼 구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또 쌀밥 먹는 일꾼이 보리꼽살미를 먹는 주인보다 더 상전같은 세상이였다. 즉 주객이 전도된 변환기였고 혼란기였다. 어쨌튼 일꾼을 더 이상 두지않았으므로 속도 덜 썩지(애타지) 않았나 싶다.
12. 고향 떠난 머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삼십여 년 전(1974년)까지 존재했던 머슴제도가 흔적없이 사라지고, 그들이 살았던 농촌의 모습도 이제는 빛바랜 사진 속이나 나이먹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했던 세상과 세월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도대체 무엇이 옛것인 상태로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다가 남아있은들 그게 무슨 가치가 있으며, 소용이 있다고 거둘 떠 보겠는가?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 …”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또 ‘타향살이 몇해이던가, 고향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다 늙어…” 는 애환가도 생각난다. 그러나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심고 수수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 는 노래(유정무한?)처럼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도시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야박한 세상인심에 이리지치고 저리지친 낙오자들이 돌아가지 못했기에 고향을 그리며 애잔하게 불렀던 것이 아니였을까? 어디 한 번 떠난 고향으로 쉬 돌아 올 수 있었던가. 객지로 타향으로 부평초처럼 떠돌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많은 머슴(네)들이였으며 그들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아니 죽어서야 한 두 명만이 운좋게 영구차 타고 상여 타고 돌아왔을 뿐이였다.
12. 막걸리, 나, 주막집
당시의 술 배달 방법을 조금 기억해 보자. 새장터 술도가는 마을마다 담당구역마다 술 배달꾼을 둔것으로 생각된다. 고뿌레 술 배달꾼은 굴고개의 김씨였다. 김씨네는 막걸리 위탁판매와 솜틀집을 같이 운영했다. 솜틀기계 발판위에 사람이 올라서서 발로 구르면 톱니바퀴가 돌아가면서 뿌이연한 솜가루가 온 방안과 마당에 둥둥 떠다녔다. 솜찌꺼기가 머리카락과 눈섶에 하얗게 달라붙었다. 나이롱 옷감과 얇은 캐시미론 이불이 등장하면서 솜타는 일(목화씨 빼고 묵은 이불솜을 다시 타는 일)이 줄어들자 술 배달만 전문으로 나섰다.
김씨가 끌고 다니는 자전거는 짐을 실기 위해 전용으로 만든 튼튼한 자전거였다. 짐받이 양 쪽에 U형의 쇠고리가 달렸는데 여기에 여러 개의 술통을 매달았다. 경사진 언덕배기나 고개길을 오르려면 자전거에서 내려 힘겁게 끌어 당겼다. 지나가는 사람은 짐자전거의 뒤를 밀어 올렸다.
경운기가 보급되자 자전거 배달은 사라졌다. 경운기가 짐칸에 여러 개의 술통을 실어 날랐다. 짚을 뭉쳐서 만든 쑤세미를 술통 구멍에 꽈악 쑤셔넣고 또 빙빙 틀어박았다. 술통의 좁은 아구리(둥근 구멍)는 출렁거리는 요동(술 무게) 때문에 술이 삐줄삐줄 흘러내렸다. 달작근한 쉰내가 풀풀 풍겼다. 짚쑤세미를 빼내면 술이 분수처럼 왈칵 위로 치솓아 올라왔다.
경운기 짐칸을 알미늄 탱크로 개조한 술배달 전용 경운기가 나타났다. 둥글고 약간 큰 탱크가 부착된 경운기였다. 탱크 밑에는 스도꼭지가 달렸다. 수도꼭지 개폐 잠금장치를 손에 쥐고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비틀면 한 줄기의 술이 좌르르 쏟아져 나오거나 멈추었다. 일하는 날이면, 아침 일찍이 한 말짜리나 두 말들이 사각의 프라스틱 통을 들고 마을어구의 독(돌)다리나 외나무다리에 나가서 술 배달차가 이제나저제나 오기만을 기다렸다. 술 배달차가 나타나는 예전모퉁이(백씨네 선산이 있는 야산모퉁이)을 향해서 눈길을 쏘았다.
자전거로 술배달할 때에는 술 배달꾼에게 이틀이 삼일 전에 미리 기별했다. 경운기나 술탱크차가 등장한 후에는 기별하지 않아도 맞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술을 받을 수 있었다. 단 아침 일찍부터 행길(일제시대에 만든 신작로)의 마을입구에서 지켜서서 술배달차를 놓치지 않는다는 조건이였다.
막걸리하면 서낭댕이(성황당) 주막집이나 굴고개의 술집이 떠 오른다. 서낭댕이에는 초라한 초가집이 네 채가 있었고 그 중 한 채는 황씨네가 살림집겸 주막집으로 운영했다. 주막이라야 여네 가정집이였으므로 곁방 하나가 겨우 주막인 셈이였다. 쥔 여자는 늙었다. 황씨네 첩이였다. 이 집에서 막걸리를 사면 쉰내(군둥내)가 풀풀 났으며, “술이 게심심하다”고 일꾼들은 투덜댔다. 즉 술배꾼한테 술 받은 지가 오래 되었거나 술에 맹물을 섞어서 팔았다는 증거다. 술맛이 제대로 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해서 대두병(술병)이나 술주전자를 들고 십리 길의 장터까지 걸어서 나갔다가 올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어이 자네, 담(다음)부터는 굴고개에서 받아오지. 거기가 술맛이 좀 낫어.” “그려-유.”
굴고개의 술집도 마찬가지였다. 여네 가정집이였다. 초가집이였다. 막걸리를 주문하면 가난에 절은 오종종한 쥔 여자가 붴(부엌)바가지로 술바탱(술독)에 담긴, 쌀뜨물 같이 뿌연한 술을 한번 후이 휘졌고는 술을 떠(퍼) 담아냈다. 주전자를 채웠다. 때로는 바가지로 술바탱이 안을 득득 긁어내야 했다. 즉 술이 떨어졌다는 의미다. 때로는 쥔 여자 대신에 되바라지고 겉까진 것 같은 지지배, 스무살쯤 돼 보이는 쥔 처녀가 대신 퍼주기도 했다. 왠지 조금은 안쓰러워뵈던 쥔집 딸이였다. 왜 안쓰러워뵜는지 그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다.
장에서 이미 거나하게 취한 사내들이 저녘 무렵이면 건드렁 거리면서 굴고개까지 걸어왔다가 다시 주막집에 들어서기가 일수였다. 밤중이면 동네 사내들도 술집에 꿰(끼어?)들였다. 희미한 남포등(석유등)이 그으름을 내고 사내들의 그림자가 바람따라 덩달아 흔들거렸다. 어둑침침한 부엌 안에 내다놓은 긴 나무의자(긴 통나무를 한가운데를 잘라서 엉성하게 만든) 위에 걸터앉아서 흰색의 막사발(대접)에 담은 술을 주욱 꿀꺽꿀걱 들이마셨다. 안주라야 쉬어꼬부라진 짠지(요즘은 김치?)쪼가리를 대나무젓가락이나 두 손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술주정했다. 너무 취한다싶으면 소 외양간 옆에 곁을 달아낸 방 안에 기여들어갔다. 봉초(봉지담배, 권련초)연기와 담배 타는 냄새가 자욱했다. 방구석에는 화토장을 쥐고 섯다판을 벌리는 잡사내들이 늘 있었다. 화토치거나 말거나 아랫목 구석쟁이에 쑤셔박혀서 세상 모르게 잠잤다. 잠결에 오줌이 마려면 바지갯말을 내리고 xx를 꺼내서 외양간 아무 데나 오줌발을 뻗쳤다. 손으로 ㅈ을 툭툭 털고는 다시 노름방 안으로 기여들었다.
2003.10.3, 하늘이 열렸던 날, 바람의 아들
첫댓글 baboyh 정말 고생했다. 이 긴 글에 담긴 많은 추억과 그리움...모두 우리들의 옛 역사였네.그런데 정말 끝까지 다 못 읽었네,그러나 꼭 내일 끝까지 다 읽겠네. 바보야의 글은 살아있는 글이기에 길어도 아마 다 읽을 걸세.
60~80년대 농촌의 실상을 얼마나 잘 묘사를 했는지, 마치 유년시절을 농촌에서 자란 내 기억을 써 놓은 것 같구나. 참 그때는 전쟁후 가난으로 한 많은 사람들이 많았었지. 우리는 집신 신던 시대에서 낳아 디지털 문명 시대까지, 한 세대에 온갖 변화를 다 체험한 전무후무한 사람들! 자, 남은 여정을 더 멋지게 삽시다!
친구야 약간 길군...그래도 읽을만해...그러나 컴글은 약간 짧은 것이 좋을 것같군...미리 길것이라고 엄살을 부리기는 했지만 한계를 넘으면 건성으로 읽기 싶거든....삼편 시리즈로 썼으면 더 좋을 것같다네!!!
윤환씨 글을 읽으며 아름다운 추억속에 맑은 이슬이 가슴에 내려앉는 즐거을 느끼지요 특히 토속적인 단어 아구리 서넝댕이 봉초 짠지 달구지 대두병 너무너무 내가슴에 감동이 물결쳐요 좋은글 더많이...아름다운 답글도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