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學脈 (56) 東岡 金宇顒(下)
金宇顒의 학문은「敬」과「義」를 중시하고 절개를 숭상하는 南冥의 학풍을 짙게 띠고 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 金希參은 眞樂堂 金就成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慕齋 金安國, 河西 金麟厚 등과 교유하여 당시 사림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그는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20세 때에는 마침 南冥의 고제자인 德溪 吳健이 星州에 교수로 부임하여 그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는다. 그는 24세에 南冥의 외손녀에게 장가를 들어, 南冥과는 인척간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南冥의 제자로 임란 때의 의병장을 지낸 郭再祐도 南冥의 또 다른 외손녀와 결혼하여 김우옹과 동서를 이룬다. 이러한 까닭에 김우옹은 南冥과 스승이상의 관련을 가졌다. 동시에 죽마지기(竹馬知己)인 寒岡 鄭逑와는 상호 깊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김우옹은 鄭逑의 학문과 덕망을 들어 선조에게 천거하기도 했다.
그 밖에 南冥 문하의 선배인 崔永慶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柳成龍·鄭琢·朴惺·徐思遠·韓百謙 등과도 사귀었다. 그가 퇴계를 만난 것은 27세 때 서울에서였다. 그 후 서신으로 退溪의 가르침을 받는다. 이처럼 그는 넓은 교유를 가지면서도 언제나 강우(江右) 학풍을 견지했다.
김우옹 학문의 요체는 젊은 시절(27세)에 쓴「天君傳」에서 이미 나타난다. 「天君傳」은 南冥이 그린「神明舍圖」를 그린 후 이 그림에 명(銘)을 붙이고 김우옹에게「天君傳」을 짓도록 했다. 「神明舍銘」의 내용은 神明舍(마음의 집)에 太一眞君(天君 즉 心)이 있는데 안에는「敬」이 정승이 되어 내심수양을 하고, 밖으로는 百揆(義)가 사물을 맡아 잘 다스리니 태평하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를 토대로 쓴 김우옹의「天君傳」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天君(즉 마음)이「敬」과「義」의 보필을 받아 나라정사를 펼치니 나라가 태평하고 융성했다. 그러나 天君은 미행(微行)을 좋아해 자주 행방이 묘연했다. 이에 태재(太宰) 敬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며 요망한 신하인 공자(公子)懈와 공손(公孫)傲 등에 의해 태재 敬이 쫓겨난다.
이에 백규(百揆) 義도 실망하고 떠나버린다. 그리하여 天君이 해매니 정사는 문란해지고 사방에서 요사한 무리들이 난을 일으킨다. 還이 난을 일으켜 흉해(胸海)를 습격해서 입성(入城)하니 天君의 군사들은 패하고 궁궐은 유린된다.
天君이 나라를 잃자 공자(公子)良만이 그를 따르며 天君을 깨우친다. 天君은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군사를 모으니 태재 敬이 다시 찾아온다. 그리하여 대장군 克己가 선봉이 되고 공자 志가 원수가 되어 혈전으로 적을 무찌른다. 天君이 나라를 되찾자 백규 義도 돌아와 나라가 평안해진다.
이처럼「天君傳」은「敬」과「義」를 중시하는 사상을 담은 소설이다. 이 소설은 심통성정(心統性情)의 논리를 소설로 허구화 한것으로 朝鮮朝 성리학의 특이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김우옹의「天君傳」은 성리철학 소설의 효시이다. 이처럼 소설형식을 빌어서 철리를 규명한 특이한 양식은 이후 유림에 크게 영향을 미쳐, 白湖 林悌의「愁城誌」菊堂 鄭泰齊의「天君演義」창계 林泳의「義勝記」文無子 李鈺의「南靈傳」歇五齋 鄭琦和의「天君實錄」등의 천군소설 등이 잇따라 출현하게 된다.
김우옹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했다. 42세 때(1581) 직제학이 되었으며 44세 때는 이조참의, 그 이듬해에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50세 때는 鄭汝立의 모반으로 己丑獄事가 일어난다. 이에 연루된 그는 함경도 會寧에 유배된다. 그 후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해 5월에 비로소 풀려 義州 행재소에 이르러 비어기무(備禦機務) 7조를 올렸다. 그 해 12월에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 후 그는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며, 59세에 한성부 좌윤을 지낸후 선조32년(1599) 정월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仁川에서 逍遙堂을 짓고 은거했으며 곧이어 충청도 淸州의 鼎生山 아래로 居處를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64세로 타계했다.
김우옹은 임란과 당쟁의 파란 속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주장을 관철한 드문 정치가였다. 그러한 신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南冥 학풍의 영향 때문이었다. 己丑獄事 때 귀양을 갔을 때도 그는 태연했으며, 그곳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퇴계가 직접 쓴「思無邪무不敬,무自歎,愼其獨」의 12자를 벽에 붙이고 그 속에서 독서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는 당쟁이 발생하자 당쟁의 화를 막아보려고 노력하다가 도리어 당인의 화를 입기도 했다. 그가 제시한 당쟁종식방안은 모든 시시비비를 당론으로 의심할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사정(私情)을 가지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자는 엄격히 가려야하며 특히 임금은 위에서 시비를 분명하게 가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당쟁의 격화를 두려워하여 시비를 따지지 말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철저하게 시비를 밝히는 것이 당쟁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키는 길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임금의 잘못을 얘기할 때면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굴하지 않았다. 太祖의 妃인 神德王后 康氏의 부묘를 모든 사람이 찬성했으나 홀로 반대하여 중론(衆論)에 영합치 않음을 보인 것은 그 한 예이다.
또한 柳成龍이 모함으로 위태롭게 되었을 때 그를 변명하는 사람이 전무했으나 김우옹만이 홀로 항장(抗章)을 올려 그 억울함을 호소하여 구할 수 있었다. 또한 珍島군수가 당시의 권세가였든 尹斗壽에게 수백 섬의 쌀을 뇌물로 바쳐 정원(政院)이 이를 탄핵했으나 西人의 영수였던 鄭澈의 비호로 임금의 태도가 미지근하자 그가 임금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이를 간한 것 등은 강직한 그의 인품을 짐작하게 한다.
김우옹은 문장보다 시가 뛰어났다는 평을 받는다. 그의 문장은 사장가(詞章家)의 글과는 달리 심학(心學)을 기초로 한 것이기 때문에 간명함에 특색이 있다. 뒤에 東(東岡) 愚(愚伏 鄭經世) 蒼(蒼石 李埈) 木(木齋 洪汝河)이라 하여 영남 4대 문장가로 꼽히기도 했다.
그의 무덤은 星州군 大家면 옥화동 능골에 신도비와 함께 있다. 그의 후손들은 1백40여 가구가 진주 등지에 살고 있으며 그의 향리인 大家면「사도실」마을에는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그의 후손 중에는 山淸의 유학자 金황과 독립운동가 心山 金昌淑이 뛰어났다.
▲참고문헌=「東岡集」「韓國의 思想大全集」「天君小說硏究」(金光淳) <李夏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