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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월27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 ‘한국의 밤’ 행사의 꽃은 다름아닌 ‘가야금병창’ 무대였다.
크리스티앙 누아예 프랑스 중앙은행장, 모하메드 알 함리 아랍에미리트(UAE) 에너지장관, 앙헬 구리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총장, 헤르만 판 룸파워 벨기에 총리 및 필립 왕세자 내외 등 500여 명의 참석자는 심금을 울리듯 흐드러지는 12현 가야금에 판소리가 더해진 가야금병창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가야금병창의 위상이 갈수록 제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다. 1985년 ‘사물놀이’가 뉴욕 off-Broadway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둔 공로로 Obie상(Off-Broadway에서 매년 우수작품에 시상하는 상)을 수상한 이래 한국 하면 사물놀이만 떠올릴 뿐 이렇다 할 한국 전통음악에 대한 접촉 기회를 갖지 못했던 세계인들에게 가야금병창은 또 다른 한국문화의 진수를 선사하는 매개체로 서서히 자리매김 중이다.
1999년 창단한 숙명가야금연주단이 캐논변주곡 가야금 연주로 라운지콘서트를 열거나, 가야금을 전공한 국악도가 서울 홍익대 앞 클럽 무대에 가야금을 들고 올라가 인디 뮤지션으로 변신을 시도하며 일군 일련의 성과다.
귀에 익은 멜로디와 리듬으로 21세기 스타일의 가야금병창을 구현하는 또 한편에는 전통의 맥을 잇기 위해 20년 동안 우직하게 <흥보가>와 <심청가> 완창을 예능보유자들로부터 사사한 중요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병창 및 산조 이수자도 있다. 올해 나이 마흔이 된다는 문수정 씨가 그 주인공이다.
2002년 전국국악대경연 가야금병창부문 대상, 2005년 KBS 국악대경연 가야금병창부문 금상 수상자인 그는 3월2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도마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갈라콘서트 무대에 65명의 관현악 오케스트라와 가야금병창을 협연했다. 공연을 며칠 앞둔 3월 중순 서울 역삼동 연습실로 찾아갔을 때도 그네는 밤늦은 시간까지 가야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협연은 처음이어서 편곡부터 호흡을 맞추는 것까지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지만 “목구멍이 찢어져도” 좋으니 뜻 깊은 공연이 됐으면 좋겠다는 문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는 적잖은 한도 섞여 있었다.
“애초에 이번 갈라콘서트는 성악과 오페라로만 기획됐다고 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영웅인 안중근 의사의 서거를 기념하는 자리라면 안중근 의사의 제삿날과 같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음악이 빠질 수 없지요. 명창 안숙선 선생님께도 찾아가 말씀 드렸더니 당연히 같이해야 한다며 힘을 보태신다고 하셨습니다.”
서슬 퍼렇게 핏대를 세우지는 않아도 문씨는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드높이는 일이라면 나직나직 할 말을 다한다. 국악이나 판소리라는 용어를 쓰는 이가 있으면 음악과 노래라는 표현으로 고쳐 일러주는 것도 그의 오래된 습관 중 하나다. 글로벌 시대에 한국과 서양 문화를 칼로 무 자르듯 양분해 편을 가르는 것도 옳지 않으나 서양 것은 음악이고 우리 것은 국악이라고 구분하는 인식 또한 달갑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퇴물 취급을 받는 전통음악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꿔놓을 수 있는 자리이고 무대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노력을 쉼 없이 이어오고 있다. 해외 공연도 매년 빼놓지 않고 다닌다. 중국 칭다오(靑島)를 비롯해 덴마크·체코·헝가리 등 동유럽도 순방했다. 그런데 우리 땅에서는 홀대받는 전통 가락이 세계무대에서는 이국적이고 새로운 음악의 갈래로 호평받는다는 것이 문씨의 증언이다.
2008년 체코에서 해외 대사관 주재원 300여 명을 모아놓고 벌인 공연 때는 눈물을 흘리는 유럽인까지 있었다. 태어나 생전 처음 마음 깊은 데부터 터져나오는 흐느낌을 경험했다며 무대 뒤로 찾아와 악수를 청하던 그 외국인은 가야금병창의 음악성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기도 했다.
‘THE ALL’의 공연 모습. 맨 오른쪽이 문수정 씨. |
1990년 초까지도 ‘기생’ 소리 듣던 문화
가야금병창이 문화재로 인정받고 이수자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사실 몇 해 되지 않은 일이다. 기악 독주 형태로 가야금만 연주하는 가야금산조(伽倻琴散調)는 19세기 말 고종 무렵부터 틀이 잡혀 전남제·전북제·충청제로 크게 나뉘고, 그 안에서도 산조 명인의 이름을 따 감창조제·한숙구제·심창래제 등의 계파와 계보까지 꼼꼼히 짜여 있지만, 가야금을 직접 연주하며 판소리를 겸하는 가야금병창은 온전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가야금병창에 대한 문화 기록을 말살한 것이 일본이라고 합니다. 원래 왕족도 즐기던 문화여서 왕궁 악사까지 있던 것을 일본이 조선문화 말살정책을 펴면서 가야금병창 악사들을 몰아냈고, 그 이후 가야금병창은 근대 들어 잡문화 취급을 받게 됐지요. 원래 선비들이 시조를 읊으면서 타던 것이 가야금인데, 이후 가야금이 기방으로 옮겨지니 가야금병창의 격도 더불어 낮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0년대까지도 그런 대접은 여전했다. 심지어 그가 가야금병창을 배운다고 하니 주변에서 “기생이나 하는 것”이라며 폄하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배울 곳도 마땅치 않아 대학 진학 당시인 1989년에는 전국에 가야금병창을 전공하는 이가 그를 포함해 달랑 두 명뿐이었다.
“네다섯 살 무렵부터 아침방송에 1997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조상현 명창이 나와 창극을 하는 프로그램을 제일 좋아했어요. 고모가 성악인으로 활동하시는데, 집안 내력인지 어릴 때 이미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였다고 해요.”
타고난 목청에 절대음감도 뛰어나 한 번 들은 곡은 잊어버리지 않고 외워 단번에 피아노로 옮겨 치는 것은 물론이요, 어떤 악기든 들으면 손에서 놓지 않아 초등학교 때 혼자 밤새 기타를 연습해 성인도 몇 달씩 걸려야 완주하는 곡을 하루 만에 터득할 정도였다. 그래도 국악을 업으로 삼으리라는 마음을 품은 적은 없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그를 국악의 길로 이끌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노래를 하고 싶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진로상담을 하면서 선생님께 음악을 전공하고 싶다고 여쭈었더니 허파에 바람만 들었다고 나무라시더군요. 마침 옆에 계시던 음악 선생님께서 수정이는 음악을 해야 한다고 거들어 주신 덕분에 국악예고에 진학할 수 있었어요. 다른 예술고등학교도 많았지만 담임 선생님이 마침 국악예고에서 전통무용을 전공하셨던 터여서 국악예고를 추천해 주셨던 거죠.”
생각지도 못했던 국악예고 진학이었으나 입학 첫날부터 문씨는 “세상에 천국이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에 쾌재를 불렀다. 교가도 국악이고 학교 사방에서 가야금·장구·대금 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는데 그렇게 마음 편하고 즐거울 수 없었다.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국악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강하게 마음을 흔든 것은 가야금병창이었다. 기악만 잘해도, 소리가 모자라도 안 되니 남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하면 할수록 가야금병창의 맛은 깊고 좋았다.
“그런데 진학할 수 있는 대학이 거의 없었어요. 가야금병창 전통 계승에 큰 공을 세우신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 박귀희 선생님이 마침 중앙대학교에 출강하셨지만, 이미 제자가 한 명 있던 터여서 더 이상 전공생을 뽑지 않았죠. 그러다 찾은 것이 바로 전주 우석대학교였어요.”
현재 전승되는 가야금병창 곡의 대부분은 1968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받은 박귀희 여사가 1930년대 말 가야금병창 명인인 강태홍과 오태석으로부터 전수받은 곡들로, 박귀희 여사는 우리의 가야금병창 역사를 다시 쓴 인물이다.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아 1993년 작고할 때까지 박귀희 여사의 문하에는 제자가 여럿 있었지만, 그 중 고인으로부터 6세 때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강정숙 예능보유자 단 한 명뿐이다.
그런데 당시 강정숙 보유자가 전주 우석대학교에서 가야금병창 전공생을 뽑고 있었고, 이 소식을 들은 문씨는 전주까지 내려가 강정숙 보유자의 제자가 되었다. 연습의 고된 과정은 이룰 말할 수 없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여 찢어지고 터지는 것이야 다반사고, 성대결절도 숱하게 겪는다. 목이 쉬어 숨소리만 겨우 나오면 스승이던 강정숙 보유자는 “장구채로 저놈 목을 확 뚫어주면 좋겄다”며 호통치고는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막힌 목에 소리를 톺다(?) 보면 등줄기를 따라 살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온다. 당장 그만두고 싶지만 그걸 참고 견디면서도 소리를 내려고 안간힘을 쓰기를 며칠씩 하고 난 뒤에야 성대에 굳은살이 박인 것처럼 아픔이 사라지고 뻥하니 목이 트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한 고비 넘을 때마다 그는 더욱 강해졌고, 잘 배우고 싶다는 욕심도 커갔다.
“대학 졸업 뒤 강정숙 선생님을 따라 용인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했어요. 거기서 판소리를 더 배우고 닦을 요량이었죠. 그런데 아무리 해도 뭔가 제대로 맛을 살릴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죠. 고민 중에 명창인 윤진철 선생님을 용인대학교에서 만나 그분을 따라 전라도 광주로 내려갔어요.”
가야금병창 트리오 결성으로 또 다른 도전 시작
가야금병창 노래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단가나 판소리 중의 한 대목, 또는 민요 등을 가야금 선율에 맞게 각색해 부르는 식인데, 그 중에서도 <호남가>나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등을 으뜸으로 친다. 문씨는 광주에서 윤진철 명창으로부터 판소리 <심청가>를 사사했다. 판소리를 다시 배우며 남도 특유의 사투리가 판소리의 맛을 살린다는 것을 알았고, 판소리 특유의 곰삭은 소리도 체득할 수 있었다.
<심청가> 완창을 마친 뒤에는 판소리 동편제의 <흥보가> 예능보유자인 한농선 명창을 찾아갔다. 한농선 명창이 같이 산에 들어가자 하여 10여 명의 문하생과 홍천 야산이며 지리산 폐가를 빌려 독공 삼매경에 빠져들기도 여러 차례였다. 독공은 소리꾼이 득음하기 위해 토굴이나 폭포수 옆에서 소리 연습을 하는 것으로, 한농선 명창과 함께 산에 올랐던 문하생 중 대부분은 산에서 내려온 뒤 판소리 바닥을 떠나기 일쑤였다.
새벽 4시에 눈을 떠 물안개 피는 폭포수 옆에 앉아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 온종일 한 자리에 앉아 해질 때까지 소리만 하는 독공은 소리를 얻기 전에 자신을 잊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정이었다. 그래도 참고 견뎠다. 중도에 결혼하고 잠시 전업주부로 외도를 한 적이 있으나 소리를 놓을 수 없어 가족을 떠나 다시 가야금병창의 세계로 돌아왔다.
소리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국악선교회 활동을 했고, 덕분에 국악선교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2009년 국악 CCM 음반 ‘마루’를 내놓기도 했다. 소리꾼을 좆아 서울과 강원도·전라도를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3년 동안 그가 운전한 자동차 주행거리만 20만km에 달했다. 그가 가야금병창 이수자가 된 것은 37세 때였다. 열일곱에 첫발을 들여놓았으니 근 20년이나 걸린 셈이다.
“보통 문하생부터 시작해 전수자, 이수자, 전수조교, 그 다음에 예능보유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전수조교가 되면 인간문화재인 예능보유자 후보가 되는 셈이에요. 이수자인 저로서는 아직 갈 길이 멀지요.”
문씨는 전통만 고수하지는 않는다. 전통이라는 것도 당시에는 유행가이고 대중음악이었을 테니 지금 사람들이 가요에 맞춰 가야금 켜는 것이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전통을 제대로 몸에 익힌 퓨전 음악가가 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최근 가야금병창 트리오 ‘THE ALL’도 결성했다. 가야금의 현 한 올 한 올이 모여 전체(ALL)를 이룬다는 뜻이다. 그를 포함해 강은경·주문희 등 세 사람으로 구성돼 있으며 모두 강정숙 명창의 가야금병창 이수자다.
“전통 12현 가야금은 화음을 내지 못해요. 그래서 음악의 맛을 살리기 위해 베이스 가야금을 제작했어요. 낮은 저음역을 맡는 것으로 전통 가락을 더 풍성하게 들리도록 하지요.”
베이스를 맡은 것은 문씨다. 서편제와 동편제 양대 산맥의 판소리 두 바탕을 사사한 그의 소리는 굵직하고 우렁차 여느 여성 소리와 섞이면 울림 강한 가야금병창 소리를 완성한다.
“현재 활동하는 가야금병창 인구는 전국에서 150명 내외 입니다. 10년 전에 비하면 놀라운 성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예종을 비롯해 중앙대·용인대·전남대·백석대 등 전국 곳곳에 가야금 병창을 가르치는 학교도 10여 곳 됩니다. 선배들이 닦아 놓은 터전을 이제 저희가 더 발전시켜야 하니 어깨가 무겁습니다.”
국립국악원과 백석예술대학교 등에서 가야금병창을 가르치는 그에게 수학하는 제자는 모두 100명 남짓이다. 어린 제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마음은 뿌듯하고 안쓰럽다.
가야금병창은 물론이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우리의 판소리를 온전하게 후대에 전하는 국가적 과업에서 일부 몫이라도 맡아 할 수 있음은 뿌듯하지만, 배우는 과정이 제 살 도려내는 아픔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임을 알기에 학생들의 고통이 남의 일 같지도 않아서다.
그래도 배우고 도전하겠노라 이 꽉 깨무는 제자가 있어 문씨는 외로워도 견딜 만하다고 했다. 삶이든 전통이든 이를 지속하게 하는 힘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영광보다 다음 세대를 위하는 마음이 더 클 때 비로소 더 큰 무대와 깨달음을 가져다 준다.
첫댓글 일제가 말살한 우리의 전통문화를 꿋꿋이 잇고 있는 이런 분들 덕분에 우리나라가 유지되고 있는거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