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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도씨 (星州都氏)
氏族의 연원
기세조(起世祖)는 도순(都順), 고려 명종 때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지냈다. 그런데 ‘경술보(庚戌譜)’ 수성시조(受姓始祖)편에 보면, 시조가 도계(都稽)라 하였는데, 그는 중국 남월(南越)의 재상인 여가(呂嘉)의 반란을 토평(討平), 임채후(臨蔡侯)에 봉해졌고 도(都)씨라 수성(受姓), 이때부터 도(都)씨가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그 후손으로 도조(都祖)가 고구려 유리왕 때 우리나라에 건너와 왕을 도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고 하였다. 그 뒤로 도미(都彌)는 백제의 재상으로, 도유(都儒)는 신라에서 김유신(金庾信)을 도와 백제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공을 세워 상천후(尙川侯)에 봉해졌다고 한다.
또 도진(都陳)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통합(三韓統合)에 공을 세워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중시조 도순(都順) 이상의 세대(世代)는 오랜 일이어서 정확하게 밝힐 수 없어 다만 도순(都順)으로부터 기세(起世)한다고 하였다.
도(都)씨는 성산(星山)ㆍ성주(星州)ㆍ팔거(지금의 칠곡(漆谷)) 등 몇 본(本)이 있지만 모두 동조동원(同祖同源)이다. 성산(星山)은 성주(星州)의 옛 이름이고 팔거는 옛날 성주(星州)의 속현(屬縣)이었기 때문이다.
본관지 연혁
성주(星州)는 본래 신라의 본피현(本彼縣)인데, 경덕왕이 신안(新安)으로 고쳐 성산군(星山郡)에 붙였고 고려 태조가 경산부(京山府)로 고쳤으며 경종때는 강등시켜 광평군(廣平郡)으로 되었다.
충렬왕 때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목(牧)을 만들었고 충선왕 때는 강등시켜 경산부(京山府)라 하였는데 조선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태종 때 목(牧)으로 고쳤고 이후 여러 번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군(郡)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는 도(都)ㆍ김(金)ㆍ여(呂)ㆍ가(李)ㆍ배(裵)ㆍ시(施)ㆍ전(全)ㆍ초(楚)ㆍ현(玄)ㆍ석(石)씨 등이 있었다.
파명록
대구파(大邱派)―양직공파(養直公派)ㆍ화재(華齋)공파ㆍ서재(鋤齋)공파ㆍ취애(翠厓)공파ㆍ일암(逸庵)공파ㆍ낙음(洛陰)공파ㆍ경암(敬岩)공파ㆍ지재(智齋)공파ㆍ주부(主簿)공파ㆍ판관(判官)공파ㆍ경재(景齋)공파ㆍ처사(處士)공파ㆍ효자(孝子)공파ㆍ평리(評理)공파ㆍ백재(栢齋)공파ㆍ만호(萬戶)공파, 죽곡파(竹谷派)―교리(校理)공파ㆍ예빈(禮賓)공파, 경주파(慶州派)―초재(草齋)공파, 예천파(醴泉派)―진사(進士)공파, 태천파(泰川派)―선략(宣略)공파, 평양파(平壤派)―참의(參議)공파, 성주파(星州派)―행정(杏亭)공파ㆍ운재(雲齋)공파, 단성파(丹城派)―교수(敎授)공파, 노포파(蘆浦派)―시승(侍承)공파, 연로파(連魯派)―청송당(靑松堂)공파, 용안파(龍安派)―판서(判書)공파ㆍ한림(翰林)공파
주요 세거지
‘경술보(庚戌譜)’에 보면, 12세 도언린(都彦麟)이 선대(先代)부터 세거하였던 팔거현에서 대구(大邱) 하남면(河南面)으로 옮겨갔던 사실이 나타나 있는 점으로 미루어 성주도씨(星州都氏) 상계(上系)는 지금의 경북 칠곡(漆谷)에서 살았던 것 같다.
12세 도계선(都繼先)의 자손들 중에서 도윤안(都允安)의 후계는 칠곡(漆谷)과 16세 도흠상(都欽相)ㆍ도응복(都應復) 이래로 대구(大邱)에, 17세 도원례(都元禮) 이래로 군위(軍威)의 의흥(義興) 등지에 나뉘어 살았고, 도윤강(都允康)의 후계는 14세 도금동(都今同) 이래로 의성(義城)에 터를 굳혔던 것 같다.
13세 도확(都確)의 후계는 도확의 손자인 도몽득(都夢得)의 대를 전후하여 경산(慶山)과 청도(淸道)에 나뉘어 정착했다고 믿어진다.
12세 도언린(都彦麟)의 자손들은 도언린의 대에 대구(大邱) 하남면(河南面)으로 옮겨간 뒤에 대체로 17세 도경신(都慶新)의 대를 전후하여 대구(大邱)ㆍ창녕(昌寧)의 영산(靈山)ㆍ청도(淸道) 등지에 산거하였고, 13세 도희(都羲)의 자손들은 도희의 손자 도은(都誾) 이래로 고령(高靈)에서 살다가 21세 도선징(都善徵)의 대 이후에 합천(陜川)의 초계(草溪)로 옮겨갔던 것으로 보인다.
10세 도천석(都天錫)의 자손들은 도천석의 대에 팔거에서 경주(慶州) 양좌동(良佐洞)으로 옮겨간 뒤 17세 도천중(都千重)의 대에 다시 경주(慶州)의 서악(西岳)으로 옮겨 그곳을 세거(世居)의 터로 삼았고, 도천석(都天錫)의 동생인 도천계(都天啓)의 자손들도 역시 도천계의 대에 예천(醴泉)으로 옮겨간 뒤 용궁(龍宮)을 비롯한 예천군(醴泉郡) 일원에 많이 살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13세에 도시춘(都是春)의 자손들은 영변(寧邊)을 거쳐 16세 도리소(都理素) 이래로 평북 태천(泰川)에 정착하였으며, 7세 도윤길(都允吉)의 자손들은 관향(貫鄕)인 성주(星州)에서 살다가 13세 도응진(都應震)이 임진란(壬辰亂)을 피해 당시의 목천현(木川縣)으로 피해 갔으므로 그 후계가 충남 천원(天原)의 목천(木川)에 정착하였고, 그밖에 칠곡(漆谷)의 인동(仁同)에도 일부가 가서 살았던 것 같다.
10세 도영창(都寧昌)의 자손들은 도영창(都寧昌)의 대 이래로 함양(咸陽)땅에 세거하였으며, 16세 도순후(都順后) 이래로 고성(固城)ㆍ단성(丹城)ㆍ거창(居昌) 등지로 옮겨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8세 도사면(都思勉)이 홍주(洪州)에서 지금은 충남 논산(論山)에 속해 있는 연산(連山)으로 옮겨가 은거(隱居)했으므로 논산(論山)과 15세 도의원(都義元)이래로 서천(舒川)의 비인(비인(庇仁)ㆍ서산(瑞山), 17세 도명인(都命仁) 이래로 부여(扶餘)에, 10세 도유장(都有章) 이래로 경북 금릉(金陵)의 개령(開寧) 등 충남 일대에 많이 살았던 것 같다.
또한 도사면(都思勉)의 동생 도운봉(都雲峰)의 자손들은, 도운봉(都雲峰)의 아버지 도응(都膺)이 기사년(己巳年)에 화를 입게 되자 풍기(豊基)에서 은거하다가 군위(軍威)로 옮겨 터를 굳혀 살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그중 일부는 16세 도희채(都熙采)의 대를 전후하여 경산(慶山)의 하양(河陽)으로 옮겨가 살았던 것 같다.
그밖에 11세 도언등(都彦橙)의 대에 고흥(高興)의 흥양(興陽)으로 옮겨간 뒤 그곳에도 자손들이 살게 되었다.
1930년경에 이르러 성주도씨(星州都氏)는 경북 울진군(蔚珍郡) 원남면(遠南面), 경북 달성군(達成郡) 성서면(城西面), 군위군(軍威郡) 의흥면(義興面), 경산군(慶山郡) 하양읍(河陽邑), 청도군(淸道郡) 각남면(角南面), 성주군(星州郡) 벽진면(碧珍面), 경남 고성군(固城郡) 회화면(會華面), 산청군(山淸郡) 신안면(新安面), 거창군(居昌郡) 신원면(神院面) 등지에 집송촌을 이루고 있었다.
1980년대의 조사에 의하면 특히 경북 성주군(星州郡) 벽진면(碧珍面) 해평(海平)4동(洞) 속칭 개대리(介臺里)마을에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개대리(介臺里)를 비롯, 운정(雲亭)ㆍ봉학리(鳳鶴里) 등 3개 자연부락 2백73가구 중 48가구를 뺀 2백가구가 모두 성주도씨(星州都氏)다.
고려말의 선비였던 횡계공(橫溪公) 도윤길(都允吉)이 난세를 피해 경북 칠곡군(漆谷郡) 동명(東明)에서 이곳 제산 아래에 터를 잡아 당초 수촌(樹村)이라 이름붙였다고 한다.
도윤길(都允吉)의 현손 도형(都衡)ㆍ도균(都勻)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성주(星州)의 대성으로 발전하였다.
씨족史
‘삼국사기(三國史記)’, ‘동사열전(東史列傳)’, ‘동국통감(東國通鑑)’,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 문헌에는 도순(都順) 이전 인물로 도도(都刀)ㆍ도두(都頭)ㆍ도공(都功)ㆍ도비(都非)ㆍ도눌최(都訥催)ㆍ도유(都儒)ㆍ도조(都祖)ㆍ도미(都彌)ㆍ도진(都陳) 등이 등장한다.
그중 도조(都祖)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의 맏아들 유리(琉璃)가 이복동생 비류(比流)ㆍ온조(溫祚)와 왕권 쟁탈전을 벌일 때 유리(琉璃)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이라고 한다.
백제 개루왕(蓋婁王) 때 사람인 도미(都彌)는 부인이 아름답고 정숙하기로 소문이 났다. 왕이 그 소문을 듣고 그의 아내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하자, 도미(都彌)의 두 눈을 뺀 다음 배에 태워 한강에 띄워버렸다. 그러나 도미(都彌)의 아내는 잠자리를 강요하는 왕을 속인 뒤 남편을 뒤쫓아가 하류의 천성도(泉城島)에서 해후, 고구려에서 나물과 풀뿌리를 캐먹으며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현재 도미(都彌)의 무덤은 경남 웅천(熊川)에 있는데 이 지방에서는 누구든 8월 초하룻날 제일 먼저 벌초를 하면 득남한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도미(都彌) 부인의 정절은 우리 역사상 손꼽히는 여절부덕(女節婦德)의 상징이자 귀감으로, 84년 5월 창작 무용극 ‘도미 부인’으로 꾸며져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문화 행사 무대에 올려 졌고 그 후 18개국에서 1백여회의 공연을 가졌다.
도진(都陳)은 고려의 개국 공신이다. 태조 왕건은 그에게 정승의 벼슬을 주었다. 이것이 성주(星州)(팔거)가 도(都)시의 관향이 된 연유다.
기세조(起世祖) 도순(都順)의 아들 충박(忠朴)은 고려 원종 때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지냈다. 3세 도유도(都有道)ㆍ도유덕(都有德) 등 형제도 공조전서(工曹典書)와 명경진사(明經進士)에 각각 올랐으며 뒤를 이어 4세 도효원(都孝源)이 전객령(典客令), 도효신(都孝臣)이 판서(判書), 도효안(都孝安)이 동양창판관(東陽倉判官) 등을 지냈으며, 도효정(都孝貞)의 손자 도천우(都千遇)는 경성수복공신(京城收復功臣)이 되었다.
전국에 분포된 도(都)씨들은 모두가 이들의 후손으로 대구(大邱), 경북(慶北) 울진(蔚珍)ㆍ달성(達成)ㆍ군위(軍威)ㆍ성주(星州)ㆍ청도(淸道)ㆍ경주(慶州)ㆍ예천(醴泉), 경남 고성(固城)ㆍ산청(山淸)ㆍ거창(居昌), 충북 청주(淸州)ㆍ청산(靑山), 충남 천원(天原)ㆍ연산(連山), 그 밖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고려 때의 도(都)씨 인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도효안(都孝安)의 아들 홍정(洪正)이다. 그는 공민왕 때 시중(侍中)에 오르면서 정계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그의 아들 도길부(都吉敷)는 우왕 때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한 무신으로 당시 세도가 이인임(李仁任)의 인척이었다. 도길부(都吉敷)는 1380년 왜구가 대거 침입해 충청ㆍ전라도가 큰 화를 입게 되자 이성계등과 함께 충청도에서 전투를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왜구를 완전히 격퇴했다. 이것이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그러나 이인임(李仁任)이 실각하는 정변에서 그 일파로 몰린 그는 죽음을 당하고, 일족은 풍비박산, 곳곳으로 흩어지게 됐다. 도(都)씨들은 이 참변을 〈기사화변(己巳禍變)〉이라 부르고 있다.
도길부(都吉敷)의 아들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을 여말(麗末)을 대표하는 도(都)씨 인물.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그는 이성계(李成桂)와 가까운 사이였다. 기사화변(己巳禍變) 때 장인 우인열(禹仁烈)의 덕으로 화를 면하였고, 고려가 망한 후에는 홍주(洪州) 노은동(魯隱洞)에 은거하였는데,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옛정을 못 잊어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하고 두 번이나 예물을 보내 출사를 권했으나 뿌리쳤다. 그 뒤에도 이성계(李成桂)가 다섯 차례나 불렀지만 끝내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지켰다. 감복한 이성계(李成桂)는 ‘청송당(靑松堂)’이라는 호와 송절시(頌節詩)를 내려 그의 절의를 기렸다고 한다. 이때의 왕지(王旨) 4점과 왕명 1점이 보물 724호로 지정돼 충남 연산(連山)의 보호각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여말(麗末)에 절의를 지킨 두문동(杜門洞)72현(賢)의 한 분이기도 한다.
도흥(都興)은 공민왕 때 무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상원수(上元帥)로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門使)가 되어 봉직 중에 왜구의 침입을 잘 막지 못해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이번엔 왜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1392년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 일문에 의해 살해된 뒤 그의 일파로 몰려 유배를 당했다.
도연(都衍)은 여말(麗末)에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공민왕 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조선 초기에 도(都)씨 사람들은 여말(麗末)의 시련 때문에 출사(出仕)를 꺼려 세조 때 도하(都夏)가 문과에 장원 급제, 정언(正言)ㆍ교리(校理)ㆍ부사(府使)를 지냈을 뿐이다. 중ㆍ후기에 이르러서는 15명의 문과 급제자와 무과 등제자들을 배출한다. 특히 도성유(都聖兪)ㆍ도여유(都汝兪)ㆍ도응유(都應兪)ㆍ도경유(都慶兪)ㆍ도신수(都愼修)ㆍ도신징(都愼徵)ㆍ도형(都衡)ㆍ도균(都勻) 등 이름난 학자가 많다.
도성유(都聖兪)는 성리학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모았고, ‘오경체용합일도(五經體用合一圖)’와 ‘체용각분도(體用各分圖)’를 만들었으며 ‘성리지학(性理之學)’ 등을 저술했다. 도여유(都汝兪)ㆍ도신수(都愼修)와 더불어 경북 달성(達成) 서재(鋤齋) 용호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됐다.
도여유(都汝兪)는 이괄(李适) 난(亂) 때 의병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컸고, 병자호란(丙子胡亂) 후에는 은거하여 후진 양성을 낙으로 삼았다.
도응유(都應兪)는 인조조 이괄(李适)의 난 때 의병장이 되어 활약했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창의상장(倡義上將)으로 공을 세웠으며 조정에 〈축성선장(築城選將)의 소(疏)〉를 올리는 등 국방 책략에 조예가 깊었다. 또 예문에도 밝아 ‘오현예설(五賢禮設)’을 편찬했다. 동생 경유(慶兪)와 함께 대구(大邱) 병암서원(屛巖書院)에 배향됐다.
도경유(都慶兪)는 인조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27년 정묘(丁卯)호란 때 세자를 남원(南原)으로 호종(扈從), 피난시켰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조령(鳥嶺)에서 대승했으나 쌍령(雙嶺) 전투에서 화약고가 폭발하는 바람에 패배해 그 죄로 유배되던 도중에 죽었다. 그러나 후에 화약고 폭발이 군율을 어겨 그에게 처형당한 비장의 아들이 분풀이로 한 것임이 밝혀져 승지(承旨)로 추증됐다.
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의 아들 신수(愼修)ㆍ신여(愼與)ㆍ신행(愼行)ㆍ신징(愼徵) 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5부자가 당대의 성리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맏아들 신수(愼修)는 인조 때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함흥부사(咸興府使)로 선정을 베풀었고, 말년에는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함흥부사(咸興府使)로 부임했을 때 억울하게 투옥된 백성을 모두 방면하자 밝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를 내렸고, 세인들은 이를 〈설원우(雪寃雨)〉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둘째 신여(愼與)는 효종 때 문과를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지냈으나 재임중에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한 사람의 동량을 잃었다고 아쉬워하며 영이(요즘의 영구차)까지 내렸다고 한다.
넷째 신징(愼徵)은 현종ㆍ숙종 때 활약한 학자로 유림에서 명망이 높았으며 특히 예제(禮制)에 밝았다. 그는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효종비(孝宗妃))가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仁祖)의 계비)의 복상(服喪) 문제가 일어났을 때 대공설(大功說)로 예론(禮論)이 기울어지자 상소를 통해 이를 맹렬히 반대하며 기년설(朞年說)(만 1년)을 주장, 결국 이를 관철했다. 그 뒤 강릉참봉(江陵參奉), 주부(主簿)를 거쳐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나가 치적을 쌓고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었다.
도형(都衡)과 도균(都勻) 형제는 성주(星州)에서 후진양성에 힘써 성향선정(星鄕先正)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형 도형(都衡)은 중종 때 현량과에 천거되어 정언(正言) 등을 지내다 공조좌랑(工曹佐郞) 재임 중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몰려 파직됐다. 낙향 후 아우 균(勻)과 함께 후진 양성에 전념하며 ‘성리회찬(性理會纂)’, ‘효경집해(孝經集解)’ 등 저서를 남겼다.
이밖에 도인엽(都寅燁), 도석훈(都錫壎), 도진삼(都鎭三) 등의 학자들이 있다.
국난을 맞아 활약한 인물로는 임란(壬亂) 때 백목원(白木員) 싸움의 도현종(都現宗)ㆍ흥종(興宗) 형제, 기계(杞溪)ㆍ안강(安康) 싸움에 큰 공을 세운 도맹교(都孟郊)ㆍ도맹호(都孟浩) 형제,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전공을 세운 도우(都遇),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큰공을 세운 판관(判官) 도맹삼(都孟三) 등이 있다.
일제 시대에는 지하 활동을 하다 8ㆍ15 직전에 체포되자 왜관(倭館) 낙동강(洛東江) 철교에서 투신, 순국한 도병철(都炳喆), 이상재(李商在) 등과 연계하여 조선교육협회를 조직했던 도진기(都鎭基), 성주(星州)에서 3ㆍ1운동을 주도한 도무환(都武煥) 등이 독립운동으로 가문(家門)을 빛냈다.
항렬표(行列表)
세(世) 29 30 31 32 33 34 35
자(字) 환(煥) 기(基) 종(鍾) 법(法) 격(格) 혁(爀) 숙(塾)
역대 주요 인물
▲ 고려조
도진(都陳)(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도순(都順)(전리상서(典理尙書))
도충박(都忠朴)(전리상서(典理尙書))
도유도(都有道)(공조전서(工曹典書))
도유덕(都有德)(명경진사(明經進士))
도홍정(都洪正)(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문하시중(門下侍中))
도길부(都吉敷)(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도길봉(都吉逢)(문하시중(門下侍中))
도여필(都汝弼)(승지(承旨))
도윤필(都允弼)(창성부사(昌城府使))
도흥(都興)(밀직부사(密直副使)) 도응(都膺)(찬성사(贊成事))
▲ 조선조
도수인(都守仁)(자(字) : 백영(伯榮)·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도수의(都守義)(자(字) : 정영(正榮)·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도이석(都以碩)(자(字) : 집중(執中)·공조참판(工曹參判))
도이억(都以億)(현감(縣監))
도상(都翔)(자(字) : 덕유(德裕)·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도명오(都命五)(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도주세(都柱世)(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도위인(都衛仁)(자(字) : 국경(國卿)·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도성추(都星樞)(자(字) : 두경(斗卿)·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도윤중(都允中)(자(字) : 성숙(誠叔)·첨추부사(僉樞府事))
도명준(都命俊)(자(字) : 사보(士輔)·중추부사(中樞府事))
도중기(都重器)(자(字) : 우정(佑鼎)·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도맹교(都孟郊)(훈련원정(訓鍊院正))
도이하(都以夏)(자(字) : 명언(明彦)·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도세웅(都世雄)(자(字) : 인경(仁敬)·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도계상(都啓祥)(자(字) : 군서(君瑞)·호(號) : 수안재(守安齋)·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도이망(都爾望)(자(字) : 망지(望之)·호(號) : 석천(石川)·부사(府使))
도신언(都愼言)(자(字) : 과우(寡尤)·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도계선(都啓善)(오위장(五衛將))
도계채(都啓彩)(오위장(五衛將))
도정엽(都鼎曄)(자(字) : 광중(光重)·중추부사(中樞府事))
도흥국(都興國)(판관(判官)) 도희윤(都希尹)(찰방(察訪))
도국태(都國泰)(자(字) : 신극(信極)·오위장(五衛將))
도희원(都希遠)(판관(判官))
도경방(都敬邦)(자(字) : 양보(良甫)·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도세관(都世寬)(자(字) : 자원(子元)·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도만규(都晩珪)(자(字) : 명서(明瑞)·호(號) : 강와(江窩)·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도동호(都同浩)(자(字) : 윤일(允一)·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도일곤(都一坤)(자(字) : 인겸(仁兼)·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도진곤(都鎭坤)(자(字) : 형중(亨中)·호(號) : 지암(止菴)·이조참의(吏曹參議))
도낙중(都洛中)(자(字) : 주성(周聖)·호(號) : 치암(癡菴)·의금부사(義禁府事))
도상식(都尙軾)(자(字) : 첨중(瞻仲)·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도우형(都宇亨)(호조참판(戶曹參判))
도인룡(都寅龍)(자(字) : 중현(仲賢)·오위장(五衛將))
도한기(都漢基)(자(字) : 예숙(禮叔)·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도원석(都元錫)(자(字) : 영조(永祚)·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도천중(都千重)(내자시정(內資寺正))
도흥손(都興孫)(자(字) : 이수(以秀)·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도인엽(都寅燁)(학자(學者)) 도훈(都壎)(학자(學者))
도진삼(都鎭三)(학자(學者))
도석훈(都錫壎)(정언(正言)) 도진삼(都鎭三)(지평(持平))
[등과인명(登科人名)]
▲ 고려조
문과(文科)
도연(都衍)(우왕조)
(팔거관)
▲ 조선조
문과(文科)
도하(都夏)(정언(正言)) 도형(都衡)(호좌(戶佐))
도현보(都鉉輔)(현감(縣監)) 도희령(都希齡)(교정(校正))
도신수(都愼修)(부사(府使)) 도거원(都擧元)(판교(判校))
도신여(都愼與)(사예(司藝)) 도여항(都汝恒)(부사(府使))
도처형(都處亨)(군수(郡守)) 도영하(都永夏)(판교(判校))
도영성(都永成)(문겸(文兼)) 도중정(都重鼎)
(성주관(星州貫))
[음사인명(蔭仕人名)]
도순(都順)(상서(尙書)) 도충박(都忠朴)(상서(尙書))
도유덕(都有德)(성산군(星山君))
도효안(都孝安)(부원군(府院君))
도홍정(都洪正)(부원군(府院君))
도길부(都吉敷)(부원군(府院君)) 도응(都膺)(찬성사(贊成事))
도사면(都思勉)(직장(直長)) 도순손(都順孫)(찰방(察訪))
도익견(都益堅)(교위(校尉)) 도응정(都應禎)(교위(校尉))
도명윤(都明胤)(진사(進士)) 도처중(都處中)(좌랑(佐郞))
도응룡(都應龍)(교수(敎授)) 도덕택(都德澤)(생원(生員))
도개복(都介福)(가선(嘉善)) 도원신(都元新)(좌랑(佐郞))
도우국(都佑國)(증참의(贈參議)) 도영호(都英浩)(주부(主簿))
도계량(都啓亮)(교관(敎官)) 도춘령(都春齡)(가선(嘉善))
도진환(都震煥)(정랑(正郞)) 도상하(都尙廈)(증승지(贈承旨))
도응계(都應繼)(증참판(贈參判)) 도희락(都熙洛)(사과(司果))
도석규(都錫奎)(가선(嘉善)) 도대영(都大永)(도사(都事))
도진혁(都震爀)(증승지(贈承旨))
도상인(都尙仁)(증참의(贈參議))
도의락(都宜洛)(증참판(贈參判)) 도왕락(都枉洛)(가선(嘉善))
도석권(都錫權)(가선(嘉善)) 도언등(都彦橙)(한림(翰林))
도맹삼(都孟三)(판관(判官)) 도동수(都東守)(증참의(贈參議))
도성룡(都成龍)(증복정(贈僕正))
도천중(都千仲)(동의금(同義禁))
도일두(都日斗)(오위장(五衛將))
[조선조 급제자 정록]
하(夏)(세조(世祖) 4년·알성시(謁聖試)·을과일(乙科一)) 형(衡)(중종(中宗) 14년·현량과시(賢良科試)·병과(丙科)) 현보(鉉輔)(중종(中宗) 38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희령(希寧)(명종(明宗) 15년·별시(別試)·을과(乙科)) 신수(愼修)(인조(仁祖) 5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거원(擧元)(인조(仁祖) 24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신여(愼與)(효종(孝宗) 2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여원(汝垣)(효종(孝宗) 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처형(處亨)(숙종(肅宗) 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영하(永夏)(숙종(肅宗) 1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영성(永成)(숙종(肅宗) 19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중정(重鼎)(숙종(肅宗) 3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인엽(寅燁)(순조(純祖) 25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석훈(錫壎)(고종(高宗) 6년·정시(庭試)·갑과(甲科)) 진삼(鎭三)(고종(高宗) 8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벌열(閥閱)]
●절의(節義)
: 도응(都膺)(고려말 두문제현(杜門諸賢)) 도형(都衡)(기묘명현(己卯名賢))
●호당(湖堂)
: 도길문(都吉文)
●문집(文集)
: 청송당문집(靑松堂文集)(도응(都膺)) 성리정학집(性理正學集)(도성유(都聖兪)) 낙음집(洛陰集)(도경유(都慶兪))
●정려(旌閭)
: 도금동(都今同) 효자각(孝子閣)·도형(都衡) 효자각(孝子閣)·도시복(都始復) 효자각(孝子閣)·도거원(都擧元) 효자각(孝子閣)
도운봉(都雲峰) 배(配) 달성서씨(達成서氏) 열녀각(烈女閣)·도필상(都必祥) 배위(配位) 월성최씨(月城崔氏) 열녀각(烈女閣)·도심해(都心海) 배위(配位) 아주신씨(鵝洲申氏) 열녀각(烈女閣)·도진극(都鎭極) 배위(配位) 순천이씨(順天李氏) 열녀각(烈女閣)
[출처] 성주도씨 (星州都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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