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수영의 결혼 제의
연말이 되자 종로의 뒷골목마다 상점들에 진열된 크리스 마스 카드와
연하장이 크리스마스 캐롤에 ㅁ추어 바람에 실랑되고 있었다. 평소에도
사람들로 북실되던 종로 였지만 연말이 되자 그런 혼잡함을 즐기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수영은 마냥 즐거워 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이제 한해가 시작되면 우리아이들이 모두 제대를 하게 될텐데...
아침식사를 하다가 외숙모가 혼잣말로 우물거린 말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제대
하게 되면 방이 두칸인 그 집에서 더 이상 수영과 같이 살수 가없슴을 두고 한
말이었다. 외숙모의 그한마디에 수영은 하루 종일 이명처럼 괴롭혔다. 그런탓에
일본어 수업이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는
밸소리가 나자 그녀는 몽유병 환자처럼 멍하니 일어서서 강의실을 빠져 나갔다.
"야, 눈이다 눈 !"
누군가 그렇게 소리치자 썰물처럼 강의 실을 빠져 나가던 동료들이 모두
따라서 탄성을 질렀다.수영도 복도에 난 창을 통해 밖을 내다 모았다. 함박눈은
아니였지만 첫눈치고는 제법 굵은 누발이 허공을 휘날리고 있었다. 그렁나
수영은 어린아이들처럼 즐거워 하는 동료들과도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 가며, 동준의 짐을 나와 외삼촌댁으로 향하던
그때를 생각했다. 그곳애 어떻게든 정착을 하리라고 굳게 결심을 하지
않았던가.그동안 외삼촌 댁에서는 별문제 없이 정말 한가족처럼 잘 지내어 왔다.
무론, 그렇게 되기 까지 수영과 외삼촌 부부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어쨌튼
수영이 영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과 외삼촌 부부를 가리켜 '우리 세식구'라고
스스럼없이 마랗ㄹ수 있었던 그집에서조차 또다른 문제가 일어 났던 것이었다.
남에게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덕을 베풀 마음이 없고 덕을
베풀고자 하는 사람은 그럴이유가 없다는 아이러니 앞에서 수영은 또다시
정처없는 방랑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시흥 전철역 부근에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전철역에서 외삼촌 댁까지는 꽤 먼 거리였지만 수영은 차를 갈아 탈
마음이 나지 않아 그냥 걷기 시작했다. 첫눈을 맞고 싶다거나 하는 낭만은 물론
아니였다. 천천히 걸으며 좀더 생각을 하려고 했던 것 이었다. 우체국 앞을 스쳐
지나면서 수영도 영신에게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를 아직 부치지않고 그냥
가방속에 지니고 있었음을 겨우 기억해 냈다 학원에 나가는길에 부치려
했던것인데, 외숙모의 말한마디에 온 정신이달아나 버렸던 것이다. 우체국에는
연말 연시의 소식을 전하려는 사람들로 종로의 거리를 매우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짜증이없었을 그 어수선한 과정에 수영은 부러움이 울컥 솟아났다.
다정한 가족과 함께 누리고 있는 소박한 행복... 거처할곳조차 마땅치 않아
또다시 방랑을 되풀이하는 자신에 비하면 그들은 정마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우체국을 나선 수영은 외삼촌댁으로 향하지 않고 시흥계곡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렇게 엉망이 디어버린 마음으로 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눈발이날리고 있는 탓인지 계곡을 ㅊ는 사람들의 수는 급겨하게 줄었다. 그리
많이 내리는 눈은 아닌데 산길은 몹시 미끄러웠다. 깍깍깍깍깍...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헐벗은나뭇가지 위에서 검고 흰 빛깔의 새가 기묘한 울음을
울어댓다. ㄲ였다.한국에서는이새가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는 새로 여긴다는
말을 그녀는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울음소리는 투박하기는 했지만, 수영은
까치의 울음소리에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듯했다. 정말 까치의 울음소리
덕분이었는지, 외삼촌댁으로 들어서는 그녀를 영신이 연달아 보낸 두통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고맙다 까치야... 수영은 까치에게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영신의 글씨는 언제나 넘처 흘렀다. 2년 가까이 얼굴을 한 번 보지 못한
채 편지로만 주고 받으면서도 수영이 그에게 마음을 빼앗던 것은 그의 글씨의
탓도 컷다. 인생의 가장오지인 그곳에서도 언제나 힘이 넘치는 글씨로 소식을
전해오는 영신의 편지를 읽는 것은그녀 에게 주어지는 몇 안되는 즐거움이었다.
힘이넘쳐흐르는 것은 글씨체뿐만이 아니였다. 그를 면회할 때면 언제나
쩌렁쩌렁 우리는 목소리였다. 언제나 그의 목소리는 접견시에서 쩌렁쩌렁 우려
퍼져 수영은 그의말을 하나도 놓칠수가 없었다. 그렇게 힘찬 목소리와
행동거지를 가진 그와 몇마디를 나누다 보면 그간의 생활에서싸여온 온갖
괴로움과 원망이 감정들이 거짓말 처럼 말끔하게 씻겨 내려가곤 했다. 지난번
면회를 다녀 온 것은 일주일밖에 안되지만 수영은 내일은 영신에게 면호를
ㄷ가녀오리라 마음을 먹었다. 이제는 뭔가를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리
강하다고 자부하는 그녀였지만 이대러는 더 이상 버ㅌㄹ수가 엇을 것 같았다.
*
"영신씨 우리 지금 결혼식 하는게 어떨까요?"
"결혼 지금말이오?"
그녀와의 결혼은 뜻밖의 일은 아니였다. 그러나 때와 상황이 문제였다. 영신은
놀란 얼굴로 하며 무슨일이 있느냐고 덧 붙였다.
"일이라기보다는 어차피 제가 한국에 계속 머무러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도리밖에 없어요. 그렇게 해야 여기서 합법적으로직장도 가질수 있고..."
"지금 당장 꼭돈을 벌지 않으면 안될 만큼 곤궁한 것은 아니지 않소?"
"곤궁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고 이건 제 자존심의 무제여요. 남들이 저를
자꾸 이사한 눈으로 처다보는 것도 싫어요. 그리고 이제 외삼촌, 외숙모
댁에서도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요."
"아니 외삼촌, 외숙와 무슨 일이 있는 거요?"
"그게 아니라 이제 곧 그댁의 도련님들 모두 제대를 하게 된대요. 그럼
방두칸짜리집에서 제가 어떻게 같이 살아요.?"
"..."
영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체 입술을 지시 깨물었다. 아주 잠깐동안의
그러나 두사람에게는 너무나도 길게 느껴지는 침묵뒤에영신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그답지않게 힘이 모두 달아나 있었다.
"거처 문제는 내가 알아볼테니 조금만 더 참아봅시다. 그리고 좀더
기다리다보면 좋은 일도 있지 않겠소?"
"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영신씨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
"그리고 영신씨 말씀대로 더 더다릴 수 있기 위해서는 좀더 다른 기획안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다른계획"
"몇가지 생각하고있어요. 하나는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하는 것. 두번째는 미국에 다녀 오는 것... 조금만 더기다려 보자는 게 어떤
뜻인지 알겠지만..."
영신이 조금만 더 기다려 보면 좋은 일도 있지 않겠냐는 것은 물론 가석방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는 다음해 2월에 있을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식때 적지
않은 기대를 하고 있는게 사실이었다. 이제 군부 통치시대가 명실 삼부하게
종식 대고 있는게 사실이었다. 이제 군부 통치시대가 끝나고 문민 정부시대가
열렸으므로신군부의 집권 수단의 하나였던 계엄회의에서 부당하게 과중한
처벌을 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구제의 길이열리지 않겠느냐의 생각이었다.
영신은 그답지 않게 학교의 교무실에 불려온 말썽꾸러기 처럼 풀죽은
모습이었다.
"수영씨를 이 낯선 땅에 대려다 놓고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하는 내가 더 이상
무슨 할말이 있겠소? 그러나 미국에 돌아간다는건 안된 말이오. 그리고 일본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것 마찬가지고... 아무 대책도 세워주지
못하는것주제에 안된다는 말만 늘어놓는게 민망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헤아려
주기 바라오."
항상 아쉬움이 남을 만큼이나 짧은 면회 시간이었지만 무거운 이야기들만
나누었기 때문에 더욱아쉽게 끝나버렸다. 영신은 수영이 접견실을 나설때까지
'내말을 잊지말라' 라는 말을 여러번 되풀이 했다. 그와의 면회를 마치면
그동안의 삶이 던져준 신산함이 말끔히 가셔지던 평소와는 달리 힘이 넘쳐
흐르던 그의 목소리가 오늘은 촛농처럼 땅바닥으로 흘러 내리는 것처럼 수영의
발걸음은 천근 만근의 족쇄를 차고 있기라도 한것처럼 무겁기만 했다. 교도소
주변의 거리에서 캐럴송은 무심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연말 특유의 분위기에
덧붙여 이곳 사람들은 이지역 출신의 후보가 대통려이 되었다는 사실에 더욱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연말 특유의 분위기에 덧붙여 이곳 사람들은 이지역
출신의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누어 주고 있는 그 크리스마스 캐럴이 수영에게는
마음의 구머을 스쳐가는바람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교도소 줌변의거리에서도
캐럴송은 무심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연말에 초라하게 지내는 것은
그녀만이 아닐 것이었다. 수영은 문득 며칠전에 김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은 강의가 끝나자 여느때 처럼 김은 안면에 웃음이 가득띄우며
수영에게 다가왔다.
"언니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에 약속을 하시면 안되요."
"왜?"
"반딧불 친구들과 사무실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기로 했어요. 언니가
주인공인 셈이니 절대 빠지면 안되요. 아셨죠?"
"..."
"참, 그리고 조그만 선물을 하나 준비해 주세요.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시간을
갖기로 했거든요. 멋지지 않아요?"
김은 심부름을 다녀와서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표정으로 수영의
얼굴을 처다 보았다.
"그 자리에 야학에 다니는 친구들도 참석하니?"
"아이 언닌... 우리끼리만 오븟하게 파티를 할꺼라니깐 ?"
수영은 '우리끼리'라는 그녀의 말이 마치 밥에 돌이 섞인 것처럼 느껴져.
그돌을 벳듯이 차갑게 대꾸를 했따.
"그렇다면 난 참석을 안하겠어."
"아니, 왜요?"
"남을 돕는 일을 한다는 삶이 자기들끼리만 클히스 마스 파티를 연다는 그
발상 조차 나로서는 이해 할 수가 없어. 그리고 자기들끼리 선물을 주고 받기로
했다믐 게 더더욱 이해가 안되. 차라리 그돈으로 야학에 나오는 학생들에게
학용품을 선물해 주는게 낫지않을까?"
"..."
조금전까지만 해도 웃음이 가득 하던 김의얼굴은 순식간에 납덩어리처럼
굳어졌다. 수영과 지하철 방향이 같아 지하철 역으로향하던 그녀는 역의
입구에서 약속이 있다는 것을 깜빡 잊었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갔다.
수영과 동행하고프 기분이 아니라는 시위를 한 셈이었다. 인파속으로 파묻혀
버리는 김의 그림자를 바라 보며 수영은 김과 카페에서 처음으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던 순간을 생각하게 되었다. 겉보기에 야무지고 생각이 깊다고 여겼는데...
하지만, 어쩌면 그녀를 비롯한 '반딧불'들의 봉사 활동이라는것도 결국 낭만과
자기 우월감에서 한계를 벗엊나지 못한 위선적인 몸짓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내가 세삼스럽게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수영은 상념에 잠겨 있는 자신을 깨우려는 듯 고개를 몇번 세차게 흔들며
차타는 곳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
3개월짜리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수영의 겨에서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흐르고
있었다. 또다시 3개월짜리 비자가 눈앞에 닥쳐와 그녀는 또 한번 비자 연기를
위한 여행을 해야 했다. '크리스 마스 파티'사건이 있고 난 뒤 며칠동안 김은
일본어 학원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수영과는 얼굴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뜻임이 분명한 터였다. 수영은
김과의사이가 그렇게 된이상 이번 토요일의 영어 회화 강의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게다가 토요일은 마침 비자 연기를 위해 주일 한국
영사관이 있는 후쿠오카로 당일치기 여행스케줄을 잡아놓은터여서 그녀에게는
그점이 더욱 고민 스러웠다. 일단 그들에게 실망을 느낀 이상 그전과 같은
열의를 자신에게서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한 일인 이상,
지금 사용하는 교재를 마칠때까지는 강의를 진행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들과 똑같이 졸렬해 지고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후쿠오카 공항이 다가오자,
수영은 지난번의 일본여행을 마치고 되돌아오는 길에서 다음번 여행은 꼭
영신과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슴에 세겨 두었던 소망이 비로소 실현될 수
있을까... 일본은 언제나 내무사열 준비를 막끝낸 막사처럼 모든게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그이면에 흐르는 사람들의 질서 의식은 가히 군기에
비길만 했다 더구나일본은 눈에 쉽게 뜨이는 곳만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석구석 손가락 끝으로 ㅉ어보는 깐깐한 선임 하사 에게도 아무런
트집을 잡히지 않을 만큼 뒷골목 어디를 내놔도 마찬가지처럼 느껴졌다.
지난번의여행때도 그래지만 수영이 일본인들에게 가장 큰 부러움을 느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후쿠오카 공항은 작았지만 역시 깨끗 했다. 수영은 서둘러
공항을 빠져 나와 영사관으로 직행해서 비자를 받고는 다시 공항으로향했다.
12월 중순이었지만 후쿠오카의 날씨는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그래서 거리를
좀서성여 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귀국하는 비행기에 오르기
까지 두시간 나짓한 여유는 마냥기다리기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무엇을 하기에ㅡ 불안하기 이를데 없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그냥 공항으로
돌아가 기념품집에서 후쿠오카의 푸경을 담은 사진 엽서를 사서 영신에게 보낼
간단한 매시지를 적고, 남은 시간은 신문이나 사서 읽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공한에 도착하자마 우선 엽서를 사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러나 공항의 규모가 너무 작은 탓에 기념품점따위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영신이에게 마음의메시지를 담는것만으롬 만족을 해야 했다.그나마
다를까 신문잡지를 파는 곳이 있어서 겨는 마이니치 신문을 사서 천천히 내려
읽어 갔다. 일본 역시도 경제 문제들에 대한 걱정이 신문의 많은 부분을 채우고
있었다. 최근 일본의경젠ㄴ 저우의 예측에 비해 성장이 현격히둔화 되고 있어
뭔가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 되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그리고 한국
경제와의 관련 기사가 그녀의눈길을 끌었다. 미국, 독일 등의 회사에서 뮤역,
자동차, 전기 분야에서 무역, 자동차, 전기분야에서 한국에 대한 신규 투자를
포기하고있는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마이니치 신문 분석으로는 기업활동에
있어서 까다로운 규제와 절차, 세금, 그리고 노사분규 등을 그 이유로 꼽고
있다. 신문을 정독하는 사이, 어느덧 비행기에 올라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녀는
다음번 일본여행은 영신과 함께 할수 있기를 바라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몇시간 동안의 숨가쁜 여행 끝에 피로에 지친 끝에 지친 몸을 이끌고
가까스로 '반딧불'들의 야학장소로 사용하는 사무실에 도착을 하였을 때 굳게
잠긴 철문이었다. 좀늦을 모양이군... 만일 무슨일이 있다거나 했다면 사무실
출입문에 메모 쪽지라도 붙여 놨을 것이다. 수영은 사무실앞에서 서성이며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앞을 서성이던 수영이 다리가 아파
계단위에 쪼그리고 앉아야 했을 때까지도 학생은 단 한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수영은 그렇게도 삼십분도 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여학생은 그때 이렇게
말했다. 언닌 그 실력 가지고 차라리 영어 학원 강사를 하시지 그러세요. 그러면
돈도 많이 벌수 있을 텐데... *
지난말 연말을 유쾌하게 보낼수 있었던 것처럼, 새로 열린 한 해도 수영은
조금도 들뜨게 하지는 못했다. 어차피 떠나야 한다는 결론이내려진 이로는
외삼촌댁 에서의 생활은 아무리 서로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한동안 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불편하기만을
했다.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김이 다시 학원에 나타난 것은 새해가
시작된 며칠후의 일이었다. 일본어 수업이 끝나자 김은 머뭇거리며 수영은
다가왔다.
"언니, 바쁘지 않으면 저와 얘기좀 할수 있어요?"
"그럴까?"
그녀와의 대화가 썩내키지 않은 아니였지만 수영은 고개를 끄떡이었다. 어떤
일이든 은 근 슬쩍 넘어가느느거은 수영의 성격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렀다.
지난번 사무실 앞에서 피곤에 지친 몸을 추위에 떨어가며 했던일을 생각하면
그녀의 빰에 손자국이라도 남겨야 분이 풀릴 일었지만, 일단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 주는 것이 순서일 듯 했다.
"미안해요, 언니..."
지난번에 그카페ㄹ 들어서자 김은 거의 울상이 된체로불쑥 그렇게 말했다.
"뭐가?"
"그동안 저도 많이 괴로웠어요. 언니한테 용서를 받지 않고는 제 마음이 도저히
홀가분해질것같지 않아서 ..."
"..."
"저번 토요일에 사무실앞에서 오래 기다리셨죠? 그것도 사실은 다 내
잘못이었어요. 사실은..."
김은 손가락으로 누고리를 찌고나서 말을 이었다.
"돌이켜 보면 제가 생각이 짧았던 거지만 제가 언니를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를 했다가 언니 한테 핀잔만 듣고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몰라요.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그런식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녀는 수영에게 단단한 앙갚음을 하겠다고 별렸다는 것이었다. 이미
수영의 연인이 영신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영신이 누구인가 알고 있었던 김은
그사실을 '반딧불'들에게 털어놓았다고 말했다.
"그한마디에 나타난 친구들의 반응은 저도 놀랄 수밖에 없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 애들이 글세 ..."
김의 이야기로는 모두들 표정이 돌변하며 한마디씩 더하더란 것이었다. 어쩐지
무료로 영어를 갈쳐 준다는 폼이 이상했다 했지... 그동안 우리를 이용하려고
했던게 틀림없다구...
"그런 친구들의 반응이 사실은 제가 원했던 것이었을 텐데도 막상 그 모습을
대하자 저는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어 오는 것을 견딜수 없었어요. 그 보다 더
저를 견딜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저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이었죠. 전 그순간
지금까지의 저의 삶이 얼마나 거짓된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달을 수있었어요."
그녀는 그대목에서 말끝을 흐리더니 끝내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그모습을
바라보고있던 수영의 한줄기 회호리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녀처럼
속시원히 울고 싶었다. 그러나 한 번 약해지기 시작하면 끝없이
약해질것같아이를 악물며 참아냈다. 오랜만에 그녀와 지하철을 같이 타고
오는동안 수영은 그녀에게 말을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역시
마찬가지 였다. 차창밖으로 빠르게 스쳐가는 바깥의 풍경처럼 고국에서
지내오던 반년간의 수영의 머릿속에서 반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고달픈 여로이
끝은 어디었는가. 외삼촌댁에 들어가자 현관 한쪽에 낯선 신발 한켤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군화였다.왔구나! 외숙모의 아들이 휴가를 나왔고 수영이
이집을 떠나야할 순간도 눈앞에 다가오고 만 것이었다. 수영은 이제는 '우리
세식구'라고 여겨지지 않는 외삼촌 부부에게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방으로 들어 갔다. 그녀의 눈길은 한쪽 구석에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여행용
가방에서 떨어질지 몰랐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외숙모가 그녀의 어깨를
어루 ㅁ었다.
"어쩌겠니, 우리가 사는게 이런걸..."
"..."
외숙모의 목소리에는 큰죄를 짓기라도 한 듯한 듯한 미안함이 잔뜩 베어
있었지만 수영은 그 안타까운 말투에서 느껴지는 동정신에 오히려 몸서리를
쳤다. 사랑을 ㅊ아 고국에 돌아와 기껏 남의 동정이나 받아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니... 네게 부모가 없는가, 형제가 없는가, 아니면 돌아갈 집이 없는가...
"오늘은 어쩔수 없으니 그냥지내도록 하자. 저 아이는 우리와 함께 자면
되니까."
외숙모는 수영의 기문을 짐작하고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도로나가 버렸다.
넉달 남짓한 기간 동안 정말 한가족 처럼 지내 언 것을 생각하면 외삼촌
부부에게 과워해야 했고 언젠가는 그들의 은혜에 보답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도리였다. 그리고 실제로그런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였다. 그럼에도 서글프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영은 다음날 아침 일찍 외삼촌댁을 나섯다.어차피 떠나야 할 집에서 잠시라도
머문다는 것은 서로에게 불편한 일이었다. 그동안 잘지내어 왔고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것임에도 서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그녀처럼, 외삼촌
부부역시 그녀를 모질게 쫓아내는 듯한 생각이 들어서인지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눈치였다. 더욱이 평소 워난 늦잠꾸러기여서 허구헌날 외숙모와
싸움을 일삼던 외삼촌마져 새벽같이 일어나 계속헛기침만 해댔다. 수영은
또다시 양손에 무거운 책가방을 하나씩 들었음에도 택시를 잡는 것도 잊어 버린
듯 마냥 걷기만 했다. 그녀는 팔에 전해 오는 가방의 무게를 거의 느낄 겨를이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그녀는 차라리 모든걸
포기하고 지난번 결심했던 대로 한강다리밑으로 기어 들어가응게 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강다리 밑이라해서 그녀가 머무를 곳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