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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안 산 (馬 鞍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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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료 스크랩 연산군의 슬픈 역사를 음미하며 도봉산 산행
여 천(如 川) 추천 0 조회 76 09.06.09 17: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도봉구 방학동 소재 연산군 묘에서 시작, 오봉을 거쳐 양주시 송추로 나오는 산행...
제공 : 안산 거북이산악회(http://cafe.daum.net/ansangb) 동진

잘 촬영한 사진은 물론 사적지 설명이 너무 좋습니다.  15~16세기 궁중 권력투쟁,
세습 절대왕정의 모순이 만들어 낸 비극...
김정일이과 그 측근 세력들이
인터넷으로 이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면, 무엇을 느낄지?

자살한 범민련 전 의장의 노제를 연다고.. 반국가 조직의 수괴를 위해!
노무현 국민장은 정부의 결정이 있었으니 따랐지만, 국가를 분란 속에 빠뜨린
친북인물들을 미화하려는 움직임..정말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려 하는군요.

역사를 뒤돌아 보고 지금이라도 국익 우선의 마음을 다져야겠습니다.

서울 팝스 오케스트라 - 김희갑/향수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연산군의 슬픈 역사를 음미하며 도봉산 산행 

        정의공주묘-燕山君墓-우의동-圓通寺-牛耳巖-칼바위-五峰-女性峰-송추


 




   
  [정의공주 묘]
    
     수유역에서 [130번 시내버스]를 타고 방학동에 있는
"燕山君 墓"를 먼저 찾아 갔습니다

     "燕山君 墓" 들어 가는 길가에는 "정의공주 墓"가 먼저 보였습니다

     정의공주는 세종대왕의 둘째 딸이며, 매우 똑똑한 여자였습니다.
     "정의공주 묘"에는 남편인 良孝 安孟聃 양효 안맹담의 묘가 함께 있습니다

 






        
          [良孝 安公 神道碑]

          良孝 安孟聃은 세종대왕의 사위이니 출중한 인물임에는 틀림없겠습니다
          초서를 잘 써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았고
활도 잘쏘고 음악,의학등 다방면에 능통했다고 합니다

          하기사 그 정도 수준이 되니 왕의 사위가 되었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 양반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는데
바로 酒님을 무지 좋아했다고합니다


          지나치게 술을 좋아한 안맹담.
          그래서 세종대왕이 '안맹담'과 함께 술 마시는 사람들은
모두 혼줄을 냈다고 할 정도였다네요


          그리고 처남이 되는 '수양대군'에 빌붙어
수양대군의 형인 "문종"의 아들인 "단종"을 죽이고,

          즉 조카를 삼촌이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사건에
적극 가담하여
일등공신이 되기도 했으니,
처세술(?)도 있는 기회주의자로 볼수도 있겠습니다



 





     [정의공주 묘]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한글을 만든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지시해서
'집현전'에서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반대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집현전 학자들은 맹렬한 반대를 하였습니다


     小國인 朝鮮이 자기 글을 만들어 가지면
大國인 中國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므로 한글 창제를
극렬히 반대한것입니다.
세종대왕은 반대를 하는 집현전 학자들을 감옥에 까지 보내며 반대 하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 직접 철저한 비공개로 만들었습니다.

이때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도운 사람은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인 "문종"과 둘째 아들 "수양대군",
그리고 둘째 딸 "정의공주"였습니다

     '정의공주'는 한글 창제의 한 주역이었으니 어찌 쉽게 잊고 살수있겠습니까?

     이곳 근처 창동에 "정의여자고등학교"가 있는데
혹시 "정의공주"와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연산군 묘]

     지금까지 일반인들에겐 아득한 옛날의 전설처럼 되 버린 暴君 燕山君
우리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고 은폐하고 있었던 "燕山君 墓"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暴君이던 聖君이던 우리의 역사 속에 있었던
王이었기에
이번 기회에 "燕山君 墓"를 찾아 보려고 나선것입니다

 


    
     [연산군 묘]

     '연산군 묘'는 '정의공주 묘' 바로 앞으로 난 골목으로 조금 들어 가면 나옵니다
      아파트 단지 한켠에 이런 王陵이 있다는 것도 놀랍고'.....
.


    
     [연산군 묘]

     朝鮮王朝 최초의 폐왕(廢王)인 燕山君은 王 대신에 王子君의 예우로 조성되었기에
     곡장(曲墻)과 상석(上石),장명등(長明燈),망주석(望柱石),문인석(文人石)만으로
조촐하게 만들어져있다고 합니다.
     왼쪽이 '연산군 묘' , 오른 쪽은 부인 '거창신씨 묘'



    
     [연산군 묘]

     연산군의 부인인 '거창愼氏'는 아무리 어렵고 고달퍼도
지아비를 끝까지 섬기는
조강지처[糟糠之妻]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녹수"라는 창녀같은 여자의 치맛폭에서 온갖 쌕스로 노닥거리며
국정을 문란케하였는데도
     투기하지 아니하고 왕비로서 체통을 지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왕(廢王)이 된 暴君인 燕山君을 끝까지 모시고  살았으며,
     燕山君이 죽고 난 다음, 燕山君은 유배지 강화도 교동(喬桐)에 비참하게 뭍혔는데
     폐비가 된 거창愼氏부인이 중종에게 최소한의 예를 하소연하여 묘를 이장하고
'王子의 묘'에 해당하는 수준까지 '墓'를 만들수 있게 되었다고합니다





         
          [연산군 묘비]

          "연산군 묘"에서 가장 처절한것은 碑石입니다.

          폐위된 王이었기에 봉분 앞의 비석 전면에는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고만 쓰여있는데, 이 碑名을 보면 애처롭게 까지 느껴집니다.

 


    
     [방학동 은행나무]

     燕山君 墓에서 바라보면 아파트 앞으로 거대한 나무가 한그루 서있습니다
     이 은행나무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을 자랑하는 860살 되는 나무랍니다



    
     [방학동 은행나무]



    
     [방학동 은행나무]

     은행나무 뒤로 三角山이 "三角"임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망경대, 백운대, 인수봉.


    
     [우이동 버스 종점]

     '연산군 묘'에서 우이동 산행 들머리까지는 버스로 한 정거장입니다
     그러나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함으로 걸어서 우이동 산행 들머리까지 오기엔
조금 멀어
다시 버스를 타고 우이동 정거장으로 왔습니다

     오늘 올라야 하는 "牛耳巖"이 보입니다
     여기서 우이암까지는 약 2.5km정도이니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닙니다




 
     [우이암 이정표]

 

[우이암 등산로]

     처음에는 완만한 경사로 워밍업을 하며 오릅니다

 


    
     [우이암 등산로]

     중간 중간 몇개의 암벽 오르막을 지나 갑니다
     "牛耳南稜線"을 따라 오르는 것입니다



    
     [방학동 갈림길]

     30분 정도 오르면 "방학동 등산로 갈림길"을 만납니다



              
               [방학동 갈림길 이정표]

               牛耳巖 방향으로 조금 더 올라 갑니다




    
     [圓通寺 갈림길]

     "방학동 갈림길"에서 조금 오르면 牛耳巖, 圓通寺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이 "우이남능선"을 따라 牛耳巖으로 직접 오르는 길이고,
     우측이 圓通寺를 경유하여 牛耳巖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圓通寺 가는 길]

     평이한 등로를 따라 조금 갑니다


    
     [牛耳巖]

     초록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신록 사이로 牛耳巖이 보입니다.
     이 지역의 이름을 만든 牛耳巖이 자태를 뽐내기 시작합니다




         
          [圓通寺]

          圓通寺가 城郭처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어서 올라 오라고 하는군요
          이 골자기가 "무수골"입니다

          물 좋고 풍광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라고 하여
무수골 無愁골로
이름 지어졌다는군요



    
     [圓通寺]

     원통사는 예로부터 좌우에 수락산과 삼각산을 거느리고 한강을 바라보는
도봉산의 최고 길지에
자리잡은 수행기도처로 알려져 왔다고합니다.

     조선초기의 무학대사를 비롯해서 근대에는 만공·동산·춘성스님 등
선지식이
이곳에 머물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관음기도 도량으로도 유명하다는군요



    
     [圓通寺 앞 샘터]

     원통사 입구에는 샘터가 있으며 '감로수'라고하는데 水量이 풍부했습니다.
     암벽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곳에 풍부한 샘물이 솟아나니,
절터로는 안성맞춤이겠지요


    
     [圓通寺 입구에서 올려다 본 "牛耳巖"]

     원통사 옆에서 뒷쪽의 牛耳巖을 촬영했습니다.
     "소의 귀"를 닮아 "牛耳巖"이라 한다는데 저는 눈씻고 다시 봐도
"쇠귀"모양은 아니었고
보시는바와 같이 틈실한 男根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男根 모양을 한 바위들이 옆에도 여럿 있습니다



    
     [圓通寺 안에서 올려다 본 "牛耳巖"]

     원통사는 우이암 바로 아래에 지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奇岩怪石이 병풍을 두른듯 원통사를 감싸안고 있습니다.
     뒤의 바위들은 두꺼비, 학, 독수리, 거북등 108종류의 형상을 갖춘 바위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는데 속세의 때를 벗지 못한 저는 "108"이라는 번뇌의 숫자와
동물형상과 물고기들의 모양이
눈에 비쳐지지는 않지만
기암괴석들로 둘러 쌓인 광경은 아름답게 느껴 집니다




    
     [三聖閣 뒤의 奇岩怪石]

     하늘의 七星과 山의 山神, 홀로 천라만상을 깨우친 獨聖이 있다는 三聖閣.
     불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神들을 절간에 모셔 놓은 것은
     불교를 믿지않고 오리지날 토속 신앙을 가진 조선사람들 까지
끌어 들이기 위한 것이지요

     결국은 불교도 "돈"을 벌기 위해 고육지책을 쓴 것이라고?


    
     [나한전]

     원통사 좌측 위로 올라 가니 엄청난 바위 밑에 동굴이 있으며
     이 굴에 "나한전"이 있습니다.
     "나한"은 석가의 제자들이죠?
     특히 열여섯 제자를 "나한"이라하고 산스크리트語를 漢譯한것이고,
     다시 그 漢文을 韓譯한것이지요.



    
     [나한전 내부]

     궁금해서 '나한전' 안을 문을 열고 들여다 보았습니다.
     키케한 향냄새와 습기로 숨쉬기도 힘들겠더군요.
     석가 제자들이 고생하고 있습니다


    
     [나한전 옆 "藥師殿"]

     藥師殿은 "약사여래"를 모시는 곳이지요
     세상의 병을 모두 고쳐주는 부처입니다.
     하지만 곳곳에 "약사여래"를 모신 藥師殿이 수없이 있지만
아직도 병은 만연하고 있습니다!!!




    
     [藥師殿 앞 "相公岩"]

     이곳이 어쩌면 원통사의 하일라이트하고 할수 있는 역사적 증거가 있는 곳입니다
     藥師殿 앞에 있는 바위에 "相公岩"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보이시지요?
     이 글자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곳의 석굴에서 기도를 많이 했다고하는데,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마치던 어느날 天上의 相公[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배알하는 꿈을 꾸어

     이곳 藥師殿 앞 바위에 "相公岩"이라는 글씨를 새겼다고 합니다

     한가지 배울 점은 "天上의 相公"이 옥황상제 밑에 있는 높은 벼슬의
정승을 의미한다는것..



    
     [三聖閣]

     佛敎와는 전혀 무관한 神들을 모시는 三聖閣이 여느 절이나 맨 위에 있습니다
     원통사 삼성각은 주변 기암괴석들로 더욱 신비로워 보입니다.
     하늘의 七星과 山의 山神, 홀로 천라만상을 깨우친 獨聖
     곧 뛰어 나올듯합니다



 
     [牛耳巖 오르는 길]

     원통사 바로 뒤로 "牛耳巖" 오르는 등산로가 있더군요
     아주 짧은 거리에 있으므로 쉽게 오를수 있습니다



    
     [自然城門]

     "牛耳巖"으로 오르는 등로에는 대문같은 바위를 통과하여
     신성한 인물들만 오르라고하는 듯합니다



    
     [牛耳巖]

     5분도 걸리지 않고 "牛耳巖" 밑으로 왔는데
     "牛耳巖"으로 불리워지는 이 바위는 원래 "관음보살"이 부처님을 향해
기도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원래는 <觀音峯> 으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牛耳巖]

           우이암은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원통사에서 바라 보는 우의암은 男子 거시기 같지만....
           가까이서 보니 한낱 암벽에 불과하네요



         
           [牛耳巖옆 바위]

           牛耳巖옆에는 조금 작은 거시기들이 몇개 있습니다


    
     [道峰主稜線]

     牛耳巖에서 아주 쬐끔 올라 오면 "우이남능선"과 "道峰主稜線"이
만나는 이정표를 만납니다

     이곳에서 우이동쪽으로는 "우이남능선"이며, '칼바위' '자운봉'까지는
"道峰主稜線"입니다

     백두대간의 한북정맥이 지나가는 마루금이기도 하며,
광주산맥을 이루는 주요 산줄기이기도합니다




    
     [道峰主稜線 이정표]

     이곳에서 '우이남능선'을 타고 바로 하산 할수도 있고,
     제가 올라 올때처럼 원통사를 들려 우회해서 갈수도 있습니다


    
     [道峰主稜線]

     道峰主稜線은 山勢가 아주 얇은 마루금이 칼처럼 서있는 稜線입니다
     그러므로 기암괴석이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道峰主稜線에서 바라 보는 道峰山 정상]

     道峰主稜線에 올라 오니 이제 시야가 확트이고 東西南北이 모두 조망됩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오는 道峰山정상입니다.
     道峰山 정상은 紫雲峰, 萬丈峰, 仙人峰, 주봉, 칼바위로 화려한 자태를 뽐냅니다



    
     [道峰主稜線에서 바라 보는 五峰]

     道峰山의 三大 名所는 [紫雲峰, 萬丈峰, 仙人峰]과
[五峰], [牛耳巖]이라 할수 있습니다

     "五峰"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군요



    
     [기암괴석]


    
     [수락산]

     노원구 뒤로 '수락산'이 보입니다.
     안개가 끼여 사진이 선명하지 못합니다


    
     [불암산]

     '수락산' 옆으로 '불암산'이 보입니다


    
     [三角山]

     北漢山의 本名 찾아주기 운동이 전개 되고 있습니다
     모두 동참하여 앞으로는 北漢山의 本名 인 "三角山"으로 불러 주시기 바람니다
     제가 자주 언급합니다만 北漢山은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입니다.
     "崇禮門"을 "南大門"이라고 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한강의 북쪽에 있다고 그냥 일반적으로 부르던
北漢山이라는 地名이 어느듯 고유명사화 되었습니다

 



    
     [道峰主稜線]

     燕山君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하고싶습니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수양대군 "세조"...
     불행은 여기서 부터 시작되지요



    
     [道峰主稜線 전망대에서 바라 보는 五峰]

     燕山君을 이야기 하려면  燕山君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燕山君의 아버지는 조선 제9대 왕인 "成宗"입니다.
     成宗은 수양대군 '세조'의 큰 아들 '덕종'의 둘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예종의 양자로 들어 가지요

     成宗의 正妃는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恭惠王后)이고,
둘째 妃가 燕山君의 어머니가 되는
윤기무의 딸인 "폐비 윤씨"입니다.

그러나 燕山君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어머니인줄 알았습니다.
     폐비가 되어 "폐비 윤씨"로 조선왕조실록을 피로 물들게 만듭니다.

     "폐비 윤씨"는 후에 "齊獻王后"로 연산군에 의해 추존됩니다
     "폐비 윤씨"의 본명은 영화 "왕의 남자"에서 "윤소화"라고 하는데.....글쎄요

     우리나라 역사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 "燕山君"
     燕山君을 이야기 하기 전에 "폐비 윤씨"가 된 齊獻王后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에 의해 暴君 "燕山君"이 잉태되니까요



    
     [道峰主稜線 전망대에서 바라 보는 道峰- 칼바위, 紫雲峰, 萬丈峰, 仙人峰]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능을 '품을 회(懷)',
'돌이킬 회(懷)'를 써서
회릉(懷陵)이라 한 것은
     그리운 어머니의 포근한 품에 다시 안기고 싶었던 사모곡이었을까?

     새삼 연산군이 폭군 이전에 시인이었다는 기억을
懷陵회릉에서 곰곰 생각해 볼수있습니다.


     "폐비 윤씨" 齊獻王后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청량리 지나
경희대가 있는 회기동"이 생각납니다

     왜냐하면 그곳, 즉 경희대에 "폐비 윤씨" 齊獻王后의 陵이 있었고,
그 릉의 이름이
"懷陵"이었습니다.
     齊獻王后가 '폐비 윤씨"가 되고 릉 이름은 "懷墓"로 바뀝니다.

     그래서 동네 이름이 "懷墓洞 회묘동"이 되었는데
동네이름으로 좋지 않다고 후세 사람들이 "墓묘"를
비슷한 한자 "基기"로
바꾸어 부르다가 이제는 완전히 한자가 틀리는 "회기동"이 되었답니다


     "폐비 윤씨" 齊獻王后의 墓는 고양시 서삼릉에 이장하여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고 있습니다


 

    
     [五峰-칼바위 갈림길]

     道峰主稜線 길이 갈라지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五峯으로 바로 갈수 있으며
직진을 하면 "칼바위"로 갑니다
     우리는 "칼바위"로 갔다가 "五峯"으로 갑니다



    
     [三角山]

     "폐비 윤씨" 齊獻王后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민요가수 김영임씨가 부른 "회심곡"이 생각 납니다.

     燕山君의 어머니 "폐비 윤씨" 齊獻王后를 기리며 부르는 노래가
'회심곡懷心曲'
입니다.

     는 폐비 윤씨의 무덤 이름이 되는 마음에 품을 회懷, 돌이 킬 회懷입니다.
     恨많은 女人의 상징이라 할 "폐비 윤씨" 齊獻王后, 그리고 회릉(懷陵)
     母子가 모두 廢妃, 廢王이 되고 죽어서도 설움을 받는 비극의 주인공들입니다


    
     [三角山]

     成宗 성종 -
     수양대군 '세조'의 妃이고 연산군의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와
     어머니 소현황후(훗날 인수대비)한씨와 구 공신들과의 정치적 야합으로 13살에 탄생된 王이 조선 9대 왕 成宗(자을산군)입니다.
     막강한 여성파워 앞에 제대로 자기의 정치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조선 최대의 폐륜아 연산군을 만든 불행한 왕입니다.
     물론 역사적 평가는 聖君으로 자리 메김하고 있습니다만....




 
     [칼바위 가는 길]

     燕山君의 어머니 "폐비 윤씨" 齊獻王后는 "고부간의 갈등"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남편인 성종의 얼굴을 할키고..등등 이유를 대고 있지만
     사실은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와의
"조선 최대의 고부간의 갈등"
으로 희생되었습니다


    
     [도봉주능선에서 바라 보는 "五峰"]

     성종이 왕이었을 때를 "女人天下"라고들 하지요
     과부들의 천국이었지요.
     과부들이란 정희대비(세조妃), 인수대비(성종 어머니), 안순대비(예종의 계비)
세 과부를 지칭하는데
정희대비만 빼고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 제헌왕후'와
이 과부들이 나이가 거의 같았습니다

     성종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에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친할머니이면서도 법적으로는 큰할머니이니

     시어머니와 며느리 '폐비 윤씨' 사이의 나이가 8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으며,
     다른 대비들과는 나이가 같거나 오히려 며느리인 '폐비 윤씨'가
시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성종은 어머니 인수대비의 반대를 무릅쓰고, 12살이나 위인 연상의 여인이자
     집안이 별 볼일 없는 윤씨를 왕비로 책봉했고 그해 연산군이 탄생합니다.
     정희대비, 인수대비, 안순대비의 세 과부 대비들의 비호 아래 성종의 여성 섭렵은
     조선조 제왕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화려했습니다.
     최고로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그러니 일찍 죽지요 ㅎㅎ
     그래서 齊獻王后가 남편인 성종을 위하여 오죽했으면 옥체를 보존하라고 잔소리를 많이하고 급기야 부부싸움이 잦아 어느날 우연히도
成宗의 얼굴을 할키기까지 했겠습니까

     이 사건으로 꼬투리가 잡혀 齊獻王后는 廢妃가 되며
"폐비 윤씨"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힘이 되어줄 마땅한 배경이 없는 "齊獻王后 윤씨"는  
     명문가를 등에 업은 과부 여성들과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칼바위와 "쥐바위"]

     "쥐바위"를 자세히 봐 두세요. 아시는 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앞으로 저 바위 위로 올라 갑니다
     우특이 "칼바위"인데, "한북정맥"이 五峰방향으로 가지 않고 道峰主稜線으로
     꺽여지는 곳입니다.


     (이 당시에 "어우동"이 맹 활약하던 때이지요?
     본래 어우동(어우을동)은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며느리입니다.
     시문에 뛰어 났으나 너무 남자를 밝히는 호색여자로서
     남편에게 소박을 당한 후 당대의 한량들하고 한 세상 풍미하다
사형을 당한 조선의 옹녀이지요)



    
     [칼바위와 紫雲峰, 萬丈峰, 仙人峰]

     칼바위와 紫雲峰, 萬丈峰, 仙人峰이 道峰山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수락산]

     이 시대에 대한 이야기들은 수많은 영화로,
또한 드라마로 만들어져 모두다 알고 있는 얘기이리라.



     성종이 소년 시절 12살이나 연상이었던 윤씨를
왕비로 책봉할 만큼 사랑한 것은 무엇일까?

     소년 시절에 빠졌던 윤씨의 미모였을까?
     아니면 절대권력을 가진 제왕이라 그런 나이 차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일까.
     21살에 청상과부가 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불과 8살의 차이에
시샘 당한 여자들의 다툼이었을까.

     동갑내기 시어머니 안순대비의 질투 때문일까.
     여자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알수가 없습니다



    
     [칼바위 갈림길]

     "칼바위" 바로 밑에까지 왔습니다.
     여기서도 왼쪽으로 가면 "칼바위"를 오르지 않고 쉽게 "五峰"으로 갈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하산하면 "도봉역"이 나옵니다
     우리는 "칼바위-쥐바위"를 올랐다가 "五峰"으로 갑니다
 




 
     [칼바위 갈림길의 약도와 이정표]

     성종이 1494년 12월24일 창덕궁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자
     29일 연산군이 20세의 젊은 왕으로 즉위합니다.
     국장기간이던 1495년 3월16일 성종의 능에 묻을 지석(誌石)의 초안이 발단이 되어
     연산군은 비로소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게 됩니다.

     지석誌石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연도, 행적을 숨김없이 적어 상석과 능상 사이에 묻습니다.
     지석의 초안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무의 이름이 드러나면서,
     연산군은 생모로 알았던 '윤 호'의 딸 '정현왕후'의 아들이 아니고
     '윤기무'의 딸 '폐비 윤씨'의 아들이 자신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칼바위 오르는 계단]

     "칼바위"는 이름같이 매우 위험한 릿지구간입니다
     그래서 친절하게도 초보산객들을 위해 계단을 만들어 놨습니다

     연산군의 복수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 과정에 '폐비 윤씨'의 시어머니 '인수대비'는 손자에게 머리를 받혀 죽고
     시어머니에게 쫓겨나 죽음을 당한 '폐비 윤씨'는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되고
회릉으로 격상하게 됩니다.


     이 덕분에 '폐비 윤씨'는 어느 왕릉 못지 않은 능상과 석물로 단장했으나,
     고작 2년 후에 '중종반정'으로 아들이 쫓겨나고 비참하게 죽게되니
     과연 '한삼의 피'에 서린 원한이 풀렸을지는 의문입니다.



         
          [칼바위에 붙어 피는 진달래]

          생명의 존귀함과 끈질김을 음미하면서 힘든 계단을 오릅니다


    
     [앞으로 가야 할 "五峰山과 五峰"]

     "칼바위"에 올라 가야할 "五峰山과 五峰"을 조망합니다
     능선의 오른쪽 앞에 있는 봉우리가 "五峰山"이고 뒷쪽이 "五峰"입니다.
     "五峰山과 五峰"은 구별해야합니다


    
     [칼바위에서 뒤 돌아 본 "道峰主稜線"과 "牛耳巖"]



    
     [칼바위에서 바라 보는 三角山과 "상장능선"]

     "한북정맥"이 "도봉주능선"과 "우이남능선"을 거쳐
"상장능선"으로 이어져 있는
그림같은 풍경입니다.
     "한북정맥" 마루금은 "삼각산"으로 가지않고 "상장능선"으로 가 "솔고개"를 넘고
     예비군 훈련장 뒷산인 "노고산"을 지나 일산의 "고봉산"을 거쳐
파주의 "장명산"에서
그 脈을 다합니다



    
     [쥐바위에서 바라보는 "칼바위"]

     700m가 넘는 곳이여서인지 아직도 진달래가 피어있습니다


    
     [쥐바위]



    
     [五峰 가는 길]

     晶巖교수님이 道峰山을 山行하시며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晶巖교수님은 "산은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정도로 산을 사랑하시고
즐겨찾으시는
山客이신데 스스로 닉네임을 "夕陽 나그네"라고 합니다.


    
     [五峰에서 바라 보는 "牛耳巖"]


    
     [五峰]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봉우리들입니다.
     암벽등반을 할수있는 장비를 갖춘 사람들에게만 개방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 산객들은 여기서 구경만 하고 가야합니다


      
     [五峰에서 바라 보는 "三角山"과 "상장능선"]

     가운데 "상장능선"이 "한북정맥"이 지나는 산줄기입니다.
     저의 "상장능선 산행기"도 있으니 참고 하시고 못 가보신 분들은 가 보세요~



    
      [五峰에서 바라 보는 "三角山"]



    
     [女性峰]

     五峰에서 女性峰까지는 가깝습니다.
     女性峰은 지나번 산행기에서 자세히 탐구하였기에 오늘은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아니 女性峰은 설명 할 필요도 없습니다
     보시는 대로입니다.




    
     [女性峰에서 바라 보는 五峰]

     모든 인간들은 女性의 이곳으로 부터 나왔느니라~
     그래서 五峰이 주위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철저히 호위하고 있습니다


    
     [송추로 하산하는 중간에 뒤 돌아 본 "女性峰"]




 
     [송추로 하산 하는 길]



    
     [송추 산행 들머리겸 날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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