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을 위한 선의 지혜] 2. 부처님 깨달음 중도와 화두 참선
부처님 깨달음은 생사 도리 밝히는 지혜
인간이 스스로 중도 깨치면
영원한 대자유 길 열린 것
중도 화두 참구해 타파하면
깨달아 생사 괴로움도 해탈
부처님께서 중도를 설한 초전법륜 성지 인도 바라나시 녹야원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과연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예전에 대구에 사는 주부들에게 ‘대월동화’라는 유명한 사자성어가 있었다.
‘대월동화’란 무슨 뜻일까? ‘대월동화’란,
‘대구백화점은 월요일에 쉬고, 동아백화점은 화요일 쉰다’는 말이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대월동화’는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렵지만, 알고 보면 너무나 쉬운 말이다.
그렇다면, 이 ‘대월동화’라는 말뜻을 깨달아 알았다고 생사의 괴로움이 해결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말이다.
이와 같이 말과 문자로 아는 것을 지식(知識)이라 한다.
지식은 보고 듣고 사유 분별로 알음알이로 아는 것이다.
삶에 도움은 될지언정 깨달음의 지혜는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은 나와 우주 만물의 존재 원리,
삶과 죽음의 도리를 밝히는 지혜(智慧)의 깨달음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무엇인가?
인류 문명사에서 깨달음을 말하는 이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영원히 해탈하는
지혜의 깨달음을 말한 분은 부처님이 최초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알라신, 브라만과 같은
전지전능한 지혜와 능력을 갖춘다고 하셨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삶과 죽음의 공포, 두려움, 절망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이고,
범부가 성인이 되는 길이고, 중생이 부처가 되는 길이니 인간의 자기 완성의 길이다.
부처님이 생사의 괴로움에서 해탈하시고 그 길을 알려주신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부처님의 설법은 너무나 방대하다.
예수교는 〈성경〉 한·두 권이고, 이슬람은 〈코란〉, 도교는 〈도덕경〉 〈장자〉,
유교는 사서삼경에 지나지 않지만, 불교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경전이 있다.
더구나 이 방대한 경전이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한자, 한글 등등
여러 문자로 기록되어 전하니 말과 문자,
용어, 개념, 교리, 수행, 믿음, 사상, 종지, 종파가 너무나 다양하고
방대하여 불교 공부는 참으로 어렵고 어렵다.
한국불교는 1700년 동안이나 한자로 된 한문 불경으로 불교를 공부해 왔다.
이 전통은 20세기 후반까지 그랬다.
세종대왕이 우리말과 다른 한자를 공부하는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한글을 창제하고
세종, 세조대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간경도감을 설립하여 우리말 경전을 펴냈지만,
세조대 이후로는 중화 사대주의와 유교 성리학이 뿌리내리면서
불교의 우리말 역경은 중단되고 말았다.
수백 년 뒤 20세기가 되어 조선왕조의 패망과 일제 식민지 침탈을 당하면서
민족사적인 자각과 민주적인 주체 의식이 고양되면서
불교 한문 경전의 한글 번역이 대중화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한국불교는 한글로 된 경전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비로소 불교의 대중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21세기 들어서 남방 상좌부 승가에서 전래되어 온
남전(南傳) 팔리어본 경전이 한글로 번역 소개되면서
팔리어 경전이 부처님 원음에 가까운 초기불교이고,
‘대승과 선종은 부처님 친설이 아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지금 한국불교계는 약간의 혼돈과 갈등이 있다.
더구나 얼마 전에는 불교계에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논쟁도 벌어졌다.
비록 논쟁은 흐지부지 되었지만,
여전히 불교의 깨달음에 대하여 시비와 혼란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부처님은 삶과 죽음의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길을 말씀하셨는데,
우리 한국불교에서 불교 공부는 왜 이리 힘들고 어려울까?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결코 부처님이 뜻하신 바가 아니고 부처님이 원한 바가 아니다.
부처님의 최초 설법, “초전법륜”
그렇다면, 부처님의 깨달음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아 생사의 괴로움에서 해탈한 것일까?
불자라면 누구나 한 번은 이것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참된 부처님 제자라면 부처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부처님의 경전에는 깨달음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아는 바와 같이 부처님의 말씀은 히말라야산맥을 경계로
남방에는 남전 팔리어 경전과 산스크리트어 경전이 전하고
북방으로는 산스크리트어를 저본으로 한 한문 경전이 전승되어 왔다.
한국불교는 20세기까지 북전(北傳) 산스크리트어 - 한문 경전만을 보아 오다가
21세기에 와서 남전 팔리어가 한글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경전을 통해서 부처님 깨달음을 확인해 보려면,
팔리어 남전과 한문 북전 경전을 동시에 대조하여 보면 분명한 답이 나온다.
남전과 북전 불교 경전 중에서 부처님이 깨치고 하신 최초 설법을
‘초전법륜(初傳法輪)’이라 하는데 이견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바르게 알려면 부처님의 첫 설법을 보아야 한다.
부처님의 첫 설법을 기록한 경전들
부처님의 최초 법문을 기록한 경전은 남전 팔리어 〈마하박가 율장대품〉에 자세히 나와 있다.
학자들은 부처님 말씀이 경전 보다 율장이 먼저 결집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불교 승가(공동체)가 만들어지고 계율이 정해진 것이
부처님 말씀을 결집한 것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장〉에 기록된 최초 법문인 초전법륜이 부처님 첫 번째 설법이다.
남전 〈율장〉에는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에 대한 이야기(한국빠알리성전협회)”라는
제목으로 부처님이 깨치고 다섯 수행자들에게 첫 설법을 하는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남전 〈율장〉의 초전법륜의 기록은 남전 〈쌍윳다니까야〉에는
〈전법륜경〉과 〈무아상경〉으로 나눠져 나오며, 북전 한역 〈오분율〉과 〈사분율〉
그리고 한역 〈잡아함경〉, 〈불설중본기경〉 〈전법륜품〉에도 비슷하게 보인다.
여기에서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마하박가 율장대품〉의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부처님 깨달음에 대하여 알아보자.
부처님의 깨달음, 중도
부처님은 깨치고 죽음의 두려움마저 해탈한 뒤
이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먼저 전할까를 생각하다가
마침내 6년 동안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에게 하기로 한다.
부처님은 붓다가야에서 다섯 수행자가 있는 바라나시 녹야원까지
무려 200㎞ 넘는 먼 거리를 찾아 갔다.
다섯 고행 수행자를 만난 부처님은 이렇게 역사적인 설법을 시작한다.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을 섬기지 않는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 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닌 것으로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바른 앎, 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끄는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부처님은 당신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중도를 깨달아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신 것이다.
부처님은 다섯 수행자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양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고 알려주신다.
이것이 바로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다.
부처님은 중도를 깨치면 누구나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떠나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인류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이제 인류는 하늘에 있는 신에게 빌고 의지하여 믿음을 통해서
구원과 영생을 얻는 길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으로
중도를 깨치면 영원한 대자유를 누리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것이 위대한 인간 완성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의 시작이다.
부처님의 중도와 간화선은 하나
부처님의 초전법륜을 듣고 “꼰단냐를 비롯한 다섯 수행자는 모두 해탈하여 아라한이 되었고
부처님 제자가 되어 세상에 여섯 명의 아라한이 생겨났다.”라고
〈마하박가 율장대품〉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불교의 출발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원 무렵에 인도에서 북방 실크로드로 동아시아로 전해졌다.
6세기경에는 인도 남부에서 달마대사가 해로로 동아시아에 최초로 선법(禪法)을 전했다.
동아시아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의 선법은 6조 조계 혜능대사에게 이어졌는데,
혜능대사는 깨달음을 이루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끝까지 따라 온 혜명스님을 만나 문답한다.
혜명은 6조에게 법을 설해 달라고 청하자, 혜능대사는 이렇게 법을 설한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네 본래면목이 무엇이냐?”
이 말을 듣고 혜명은 단박에 깨달아 6조의 인가를 받는다.
이 대목은 〈덕이본 육조단경〉에 기록되어 있다.
간화선에서는 6조 혜능대사의 이 법문을 화두의 효시로 본다.
화두는 선과 악이라는 양변을 떠나 중도를 바로 깨치라고 일러주는 말이다.
부처님이 깨친 중도를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참구하여 깨치는 수행법으로 계발하였다.
이것은 불교사상사에서 혁명이다.
부처님이 깨친 중도를 화두를 참구하여 타파하면
바로 깨달아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하여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 중도와 간화선은 하나다.
▶한 줄 요약
부처님 깨달음, 중도와 간화선은 하나다.
2023. 02. 03
박희승 교수
현대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