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reason
그들에게 용기와 사랑, 평화를!!!
죄책감은
후회스러운 과거 행위가 떠오를 때
그 기억의 귀결이다.
후회스러운 과거행위는
오직 재맥락화를 통해서만
초월될 수 있다
실수는
학습과 발달상의 자연적이고
비개인적인 귀결이며
따라서 피할 수 없다.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
지성이라는 학습능력이
생존을 위해
운용상으로 요구되는 과정인
시행착오의 귀결로서 일어났다.
영적 진화에서
죄책감은
재맥락화되고
그래서 이로운 결과를 낳는다.
죄책감은
조심성으로 재구성되어
파괴적 충동에 지배되지 않게 해주는
안전장치로 여겨질 필요가 있다.
죄책감은
나중에
성숙함의 지혜로 나타나며
또한 자기중심성에 대한
윤리적 평형추이기도 하다.
그래서
죄책감이
재맥락화되고, 조화로워지며,
'책임감 및 양심적이고 내면화된 도덕과 균형을 이루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초월된다.
죄책감은
그 다음
보호적인 것,
안전장치,
학습 메커니즘으로 재맥락화될 때 수용될 수 있다.
무의식적 죄책감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진실과 정직함에서의 일탈은
죄책감의 축적을 낳고
그 다음에 죄책감은
그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본성으로 인해
억압된다.
그래서
긴 시간에 걸쳐
상당한 분량의 죄책감이 쌓이는데,
이것은
'주기적인 대담한 재고조사'를 통해
찾아내지 않는다면
주의를 끌거나 인지되지 않는다
서론
죄책감은
조종과 처벌을 위해
우리사회에서
비난의 형태로 흔히 이용되며,
이는
후회, 자책, 피학성애(masochism) 및
피해자 역할의 모든 증상과 같은
각양각색의 표현으로
그 자체를 나타낸다.
무의식적 죄책감은
심인성 질환, 사고 경향성,
자살행동을 낳는다.
수많은 사람이
평생에 걸쳐
죄책감과 싸우는 반면,
어떤 이들은
도덕관념없이
죄책감을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그것을 피하려고 필사적으로 시도한다.
죄책감의 지배는
결국 "죄"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용서할 줄 모르는 감정적 태도'인데,
강압과 통제를 위해
죄책감을 이용하는
종교 선동가들은
이러한 태도를 남용한다.
처벌에 사로잡혀 있는
그러한 "죄와 구원"의 상인들은
자기 자신의 죄책감을 행동화하거나
혹은 그것을 남에게 투사할 것이다.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는 이상 행동을 보여주는 하위문화들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의식적 동물살해와 같은 다른 풍토적 형태의 잔학행위를 종종 드러낸다.
죄책감은
분개를 유발하며,
살해는 종종
죄책감의 표현으로 일어난다.
사형은
분노와 죄책감에 시달리는 대중이
어떻게 살해를 통해 만족을 얻는지 보여주는 예지만,
그것이 어떤 억제효과나 교정효과를 갖는다는 것이
입증된 적은 없다.
사형은
"정당한' 보복에 대한
감정적 요구를 만족시켜 줄 뿐이다.
임상적 측면
이것은
스스로를 나쁘고 악한 존재로 보고,
신을 보복적인 것은 물론
처벌적 존재로 보는
심한 죄책감과 자책의 수준이다.
죄책감은
주된 심리적 요소들을
수반하는 학습된 행동이다.
거기에는
사회적 프로그램에 의한
부정적 프로그램밍은 물론
사회, 부모, 종교로부터의 입력이 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자기 심판과 더불어
수치심이 우세해질 수 있는데,
이때
자기는 무가치하고 자격없고,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로
또한 신에게 미움을 받아
용서는 커녕
구원받을 자격조차 없는
무가치한 벌레로 여겨진다.
이것은
스스로를 용서받을 수 없고
희망이나 대속(대신 속죄함)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고 보는
자기심판의 수준이다.
죄책감은
참회, 자기혐오, 심리적, 육체적 자기처벌,
자살, 자기부정,
자가증식되는
중독의 형태를 띈다.
"신이시여!
제가 얼마나 고통받는지 보십시오"
이는
신을 조종하기 위한
미묘한 시도다.
에고 기제가
죄책감을 처리하는
한가지 방식은
투사인데,
그 결과
자신의 동기와 감정은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부인되어
저 밖에 있는 것으로,
따라서
미워하고 보복해야 할
마땅한 대상으로 비춰진다.
영적모순을 나타내는 것은
"죄는 미워하라"는
종교적 가르침인데,
이것은
자신이 한탄하는
바로 그것을 표현할 뿐이다.
이러한 함정은
연민과 용서를 통해,
그리고 인류와 개인은
유한하고 무지하여
자신이 하는 행위의 이유나 의미를
진정으로 알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각성을 통해
피해갈 수 있다.
무지는
에고가 상속받은
내적, 정신적 기제들의 자동적 부산물인데,
이에 대해서는
진실대 거짓에서
진화의 관점으로 고찰하고 설명한 바 있다.
죄책감은 또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확신으로 지각하는 것만을 추구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진술이 옳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완화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각의 한계로 인해
사람은 진실과 거짓을 식별하지 못하고
진실로 선한 것을
바람직스럽다고 지각된 것(부, 성공, 소유, 타인을 지배하는 권력 등)과
구별하지 못한다.
죄책감은
후회스러운 과거 행위가 떠오를 때
그 기억의 귀결이다.
후회스러운 과거행위는
오직 재맥락화를 통해서만
초월될 수 있다.
실수는
학습과 발달상의 자연적이고
비개인적인 귀결이며
따라서 피할 수 없다.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
지성이라는 학습능력이
생존을 위해 운용상으로 요구되는 과정인
시행착오의 귀결로서 일어났다.
시행착오의 과정은
그 다음 데이터와 기억으로
축적된다.
기억은
사건들을 그때와 지금으로 분류하는
길고 경험적인 시간 연속체로서
발생한다.
현재의 자기는 있고,
이전의 자기는 있었다.
그런데
진실은
있었던 그것은
있는 그것과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후회와 죄책감은
있는 현재의 자기를 잊었으나,
이제는 더이상 없는 이전의 자기와
동등한 것으로 보는데서
비롯된다.
그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죄책감은
동일한 실수롤 반복하지 말라는
경로로서 일어나는 교육적 감정일 수 있다.
과거는
다시 씌여질 수는 없지만,
건설적 학습의 근원이 되도록
재맥락화 될 수 있다.
과거의 사건이나 결정에 관한 후회는
그것이 당시에는 좋은 생각인 것 같았음을
각성함으로써 완화될 수 있다.
인간정신에
결함이 있고
그것이 전지하지 않은 이상,
죄책감과 후회는
무지와 한계로 인해 생겨나며
또한 진화상의 단계들을 나타낸다.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집단적으로
과거의 오류는
한계로 인한 것이며
진화의 시간표상에서
일정한 지점에 속해있다.
과거에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수용가능하지 않다.
무지는
지각의 착오나
해석상의 착오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후회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사실상
다른 환경에서 나타나고 있을 뿐인
동일한 결함이다.
죄라는 단어의
엄밀한 절대적 정의는
오류다.
죄는
나중에
종교적 금언, 정교화 및
심각함과 유해성의 주장된 정도에 따른
경중으로 인해
가중되게 된다.
운용상으로
단 하나의 반복되는 죄가
있을 뿐인데,
이는
오류, 무지, 그릇된 지각, 실수,
혹은 계산착오의 죄이다.
그것은
인간의식의
한계의 귀결이다.
자기 용서는
겸손함과
이러한 한계의 수용으로 촉진된다.
현실적으로
적절한 것은
익명의 알콜중독자회의 유명한 설립자
빌 W가 말한 "적당한 누위침"이다.
과도한 죄책감과 후회는
'위장된 형태의 자만심'이다.
자만심에 빠진
자기는
부풀려지고, 과장되고,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데
이러한 것의
부정성이
에고를 먹여 살린다.
그러므로
죄책감에서 해방되려면
이 기본적 자만심을 내맡길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에고는
부정성을 통해
그 자체를 재충전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자만한 위치는
"나는 좀더 잘 알아야 했다"
는 것인데, 이것은 항상 거짓인 가설을 제기하는 것이다.
죄책감에 빠져있는 것은
에고를 살찌우는 일이며
방종이다.
그러므로
죄책감을
신에게 내맡기려는
자발성이 있어야만 한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죄책감의 근원은
정신분석 용어로
이른바 초자아(수퍼에고)이다.
초자아는
내사된 시비분별과 관점,
학습된 내용으로 구성된 마음의 일부다.
'비대해진 초자아'는
'과도한 죄책감이나 병적 완벽주의의 근원'일 수 있고,
혹은 타인에게 투사될 수 있는데,
이는
악한 적에 대한 복수로서
극단적 형태의 보복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타인을 죽어 마땅한 존재로서 살해하는 것을
합리화하는데,
문화적 선전과 권위자들에에 의한
사교방식의 세뇌가
이러한 행위를
더욱 뒷받침한다.
심하게
낮은 의식수준에 도달하는 이들은
루시퍼적 오류(자부심, 진실의 왜곡)와
사탄적 오류(잔인성, 야만성)의 결합에
희생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인류 최악의 파괴는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경우가 많았다.
(고전적이고 루시퍼적인 선악의 전도)
에고의 한계를 드러내는
발달적 관점에서 볼 때,
야만 행위의 가해자들은
그들 자신부터가
초보적 의식수준의
피해자임을 알 수 있다.
그 기원과 역동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죄책감은
또 다른 형태의 자만심일뿐이며,
그 속에서
오류는
높은 힘에 넘겨지는 대신
부풀려진다고 요약될수 있다.
신은 사디스트가 아니다. 그래서 자기 훼손이나 자기처벌은 신에게도 동료인간에게도 봉사하지 않는다. 역사적 기독교의 중세적 측면은 자루와 재, 속죄로서의 고통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에고와
에고기제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가질 때,
죄책감이라는 이 기제가
미묘하게 사리추구적이며
금욕주의나 박해의 극단에
이르게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죄책감을 더는 하나의 과정을
취소(undoing)라고 한다.
취소는
처벌적 초자아(양심)을 불러내
보다 현실적인 인생관으로
바꿔 놓은 것 및 오류에 대한 보상과 관련되는데,
초자아는
그렇게 해야
보다 온건하고
덜 시비분별적이며
덜 처벌적이 된다.
이상적 아동발달에서 내사된 부모 "인물"은 자녀에게 가혹하지 않으며 교육자로서 자녀를 지지하고 사랑한다.
처벌적 초자아는
또한 외부로 투사될 수 있는데,
이는
정치적 증오라는
"단물"을 통해
증식되는 공격적, 시비분별적,
극단적인 정치적 위치성의 형태를 취한다.
이 오류의 또 다른 표현은
사회적으로 만연한
'가해자/피해자 모델'인데,
그 어떤 사회적 상황이라도
그 모델에 끼워 맞추는 것이
가능하다.
정신분석에서는
그러한 장치를
투사라고 하는데,
이는
갈등을 의식하고
그에 대해 책임지는 대신
갈등을 계속 억압해두려고 한다.
고전적인 프로이트 용어에서 에고는 영적 용어와는 전혀 다르게 이해되고 맥락화된다.
프로이트적 에고는
이드(원시적 욕구)와 양심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내적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물론
외부 현실을 다루어야 하는
마음의 측면이다.
그래서
심리적 건강이란
건강하고 현실적이고 균형잡힌 성격을 갖는 일과
동등한 것이 된다.
악성의 초자아가 완화되고 온건해질 때
그것은 권위자를 보호적인 것으로 여기고,
권위자의 역할을 가르침으로 본다.
그래서
초자아는
외부세계에 투사되거나
방향을 바꿔 자신을 공격할 필요가 없다.
죄책감과 기억
앞서 묘사한 바와 같이
에고의 이원적 구조는
지각을 낳는데,
지각은 실상으로 오인된다
(법정에서 목격자 증언의 오류율은
50%에 달한다).
기억과 회생이란
실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자신의 지각에 대한 것이다.
비록
엄밀한 역사적 사실이
바르게 회상될 수 있어도
그 의미는 이해되지 않는다.
만일
죄책감이 남아있다면,
그 사건들은 보다 큰
실상의 맥락으로부터
진실로 이해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형
심리학적/사회학적 설명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
이러한 것이 의식의 낮은 수준들이 초월될 때 일어나는
진정한 치유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영적 정렬을 통해,
죄책감의 바탕에 있는
과거 상황이
영적 에너지의 영향력 아래
재맥락화된다.
이 과정은
영적 의지의 행사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며,
영적 의지는
그것의 의도, 기원, 기도, 선언을 통해
에고가 아닌
비선형적 참나에 속한 과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과정은 기적수업에
폭넓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 경험은 주관적으로
기적적이고, 변형을 불러일으키며,
평화와 치유의 느낌을 가져다 준다.
이 현상은
영적 모임에의 참여로 촉진되는데
영적 모임에서
개인의 영적 에너지는
집단의 의도, 지지, 영적 장을 통해
증대된다.
수많은 사람이 증언한 바와 같이
부정적 지각과 죄책감은
영적 모임을 통해
긍정적 이해로,
또한 이해력과 기억에서의
변화로 교체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그러한 모임에서
흔히 나오는 진술
"나는 이제 상황을 다르게 본다"의
바탕에 있는 것이다.
이런 변형을 통해
이전에 미웠던 자들이 용서될 수 있고,
이전에 무서웠던 것이
평화롭게 비칠 수 있으며,
증오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연민으로 대체된다.
변형을 초대하는 것은
사적인 자기지만
변형을 일으키는 것은
영적의지의 힘을
요청하는 것이고,
이 영적 의지의 힘을 통해서
표면상으로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질 뿐 아니라
경험적 현실이 된다.
에고의 지배기제에 대한 이해
환상은
위치성의 이차적이고
자동적인 귀결이다.
기적적 변형에서 벌어지는 일은
위치성이 녹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시간과 장소를 벗어난
더욱 큰 맥락화를 허용해주며,
이로써
선형적 내용은
비선형(맥락)으로 대체된다.
부정성을 지속시키는 일차적 토대는
에고가 부정성을 짜내는
은밀한 대가이다.
이 은밀한 대가가
에고의 유일한 에너지원이며,
그래서 에고는
연민은 물론
용서를 적으로 본다.
영적 세계의
기본적 금언은
"정당한 분노는 없다"이다.
에고는 이 말에 대해 질색한다.
그래?
하지만 이런저런 것들은 어떻게 하고?
에고는
그 다음에 세탁물 목록을 들여다보고
온갖 참사, 권리, 침해, 불의, 윤리에 대한 추정적 논증
"도덕"등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늘어 놓는다.
모든 상담자가 후원자,
전문가는 그런 식의
외워 말하기에 익숙하다.
회복하기 위해서
사람이 마주해야 하는 질문은
그러한 것에 달라붙기를 원하느냐
혹은 포기하기를 원하느냐이다.
이것이
결정의 핵심이며
이것없이
치유는 일어날 수 없다.
이 전환점에 이루어진 결정은
뇌 생리에 그리고
증오 대신 용서를 선택하는 지혜를
납득이라도 할 수 있는 뇌의 능력에
실제적 결과를 낳는다.
이 필요한 단계의 수용을 돕는데
어떤 강력한 사례가 유용하며
보탬이 될수 있다.
아마도
가장 규모가 크고 인상적인 사례는
2차대전 참전군인의 예일텐데,
2차대전기간 개별적 전투원뿐 아니라
집단의 경험은 극도로 무시무시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과거 적군 전투원들은
대부분 아주 빠르게 서로를 용서했고,
심지어는 서로에게 정식으로 경례까지하면
전투 종식을 축하했다.
이들은
다시 새로워진 상호존중속에서
악수를 나누었다.
그 중에는 자신들의 선박에 기총소사를 퍼붓고, 전우를 죽이고, 숱한 불구자와 사상자를 남긴 가미카제 조종사들도 있었다. 한편 미국인은 수십만 민간인을 죽인 원폭을 투하한 이들이었다. 전투행위가 중지되자, 상황은 다 끝났으며 그 모든 것이 그저 전쟁때문이었을 뿐이라는 이상한 거의 덮어두는 식의 수용이 있었다. 과거의 전투원이 가까운 친구가 되어 주기적으로 서로의 가정을 방문하게까지 되었다. 생존자들은 지금도 큰 전투를 함께 기념한다.
용서하기를 꺼리는 것은
지각된 불의라는
에고의 단물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의 귀결이기도 하다.
실제로
가장 큰 수혜자는
용서를 받는 쪽이 아니라
용서를 하는 쪽이다.
위와같은 예를 든 것은
가장 혹독한 조건조차
초월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러한 초월은
오직 의지에서 나온 행위를 통해서만
그리고 증오심과 복수심을 품는 일을 내맡기고자 하는
자발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람은
포로 수용소에의
구금, 기아, 고문, 지독한 잔악행위,
학살을 포함하는 전쟁 당사자들의
무시무시한 상황을 감안할 때
어떻게 그런
성스러운 변형이 가능하기 조차
물을 수 있다.
실제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에고/마음은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고작 30으로 측정되는
증오의 에너지 장에 붙들렸을 때,
에고/마음에 필요한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형을 일으키는 힘의 근원이
사적인 "나"로 불리는 마음이나
성격에서 유래할 수는
없다.
필요한 힘은
"영적의지"로 지칭되는
의식의 비선형적 성질안에 거하는데,
오직 이것만이
에고의 위치성을 녹이는데 필요한
힘으로 통하는 문들을
열 수 있다.
성령은
초대를 통해 이해력을 변형시키는데,
이는
은총의 치유력의 현존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에고가
안간힘을 다해도 들어 올릴수 없는 것이
신의 은총에게는
깃털처럼 가볍다.
변형과정의 귀결로서,
타인에 대한 관점이
가증스러운에서 온건한으로
변형될 뿐아니라,
자기에 대한 관점 또한
변형된다.
죄책감에 찌든 문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신을
시비분별하고, 보복하고, 분노하며,
자연재해를 통해
벌하는 존재로 본다.
자연재해는 신에서 비롯되는 악함에 대한 처벌로 맥락화된다.
개인적 시비분별은
지각을 바탕으로 하고,
지각은
신념과 이전의 프로그래밍에 의해 강화되며,
그 모든 신념과 프로그래밍은
에고의 부정적 에너지들이 지불하는 대가에 의해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에고는
어떤 부당한 일로
괴로움을 겪고
순교를 당하고 오해받고,
삶의 부침의
끝없는 피해자 노릇을 하는 것을
사랑할 뿐이다.
에고는
이러한 것을 통해
엄청난 대가를 얻는데,
이 대가는
위치성 자체에서 나올뿐 아니라
동정, 자기연민, 자격있음, 중요성
혹은 자기가 멜로드라마의 주인공 노릇을 하는
"무대의 중심"에
서 있는데서 나온다.
에고는
모욕과 냉대를
차곡차곡 쌓아두고,
상처받은 느낌을 간직해두며,
불의수집이라는
내면의 멜로드라마에
불만을 비축해 놓는다.
불의수집을 위해
집단적 에고는
권리를 쥐어짜는데,
에고는
어떠한 위치성이나
극단적인 관점에서라도
권리를 불러내
합리화할 수 있다.
권리를 둘러싼 투쟁은 대중매체의 주류이자 정치라는 이름의 논쟁적인 사회적 다툼의 주류를 이루는데, 정치라는 논쟁적인 사회적 다툼에서 진실은 이득을 위해 기꺼이 회생되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 죽는다.
내면의 성찰과
자기 정직성을 통해
에고가
이러한 정당화와 항의를 양육하는데서 얻는
은밀한 즐거움이 드러난다.
에고의 착각은
이 과정이
자신의 성장에 보탬이 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정반대의 효과를 낳는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는데 있어서,
인간고 전체를 바라보고
사건들을
연민(사랑)의 수준에서
재맥락화하는 것이 좋다.
붓다가 지적한대로
죽음이 예정된 존재에게
자동적으로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붓다가
저 카르마적으로 결정되는
재탄생을 배제하기 위해
깨달음을 구하라고 가르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이
용서함을 통해
미운 가해자의
마음의 짐을 덜어줄 때,
마음의 짐을 더는 쪽은
그 사람이 아니라
자기자신이다.
붓다가 또 말한 것처럼,
남에게 벌을 주거나 앙갚음을 할 필요는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손으로
스스로를 끌어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죄지은 자가 벌받지 않고
지나갈까 봐
걱정하는 일이 많다.
의식과 영적진실의 실상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누구나
우주에 책임이 있고
우주의 역학자체에 의거한
신성한 정의에 지배된다.
바다속의 코르크처럼
각각의 영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력의 수준까지 떠오르는데
이것은 바다의 어떤 임의적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다.
키를 잡고 있는 손은
자기자신의 것이며,
이것이 바로
신이 생명에게 허용해준
완전한 자유다.
사람은
오직 자멸할 뿐이다.
우연한 것으로 추정된 사건조차
지각일 뿐이다.
우주에
우연한 일이란 없으며
그런 일이 있을 가능성조차 없다.
이것이
정말로 의미하는 바는
우연한 일이란
일과 인과관계의
뉴턴적 패러다임(측정수준 450)에 한정되어 있는
선형적 에고에 대해
예측 불가능하고
이해불가능할 뿐이라는 것이다.
20년전 대대적으로 보도된 뉴스중 높은 고도를 비행하던 어느 비행기의 동체가 날아간 사건에 대한 소식이 있었는데, 수백명의 탑승객 중에서 단 한명만이 문밖으로 빨려나갔다.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이는 것은 그들이 동일한 끌개장에 정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해의 물고기가 떼지어 유영할때나
새들이 무리지어 날때,
각 개체는 다른 것들과 정렬된 결과로서가 아니라,
동일한 끌개장에 일제히 동조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그곳에 있는 것이다.
각 개체는
개별적으로
강력한 자석과 같은 장을 따르고 있고,
이 장은
차례로
그 다음의 높은 끌개장에 종속되며,
이런 식으로
신성에 까지 이른다.
에고/증오의 정치
이원적으로 구성된 에고는
모든 것을
가해자/피해자의 관계로 보는 경향이 있는
하나의 위치성을 통해
자신을 증식시킨다.
어떤 임의적 위치성으로 말미암아
에고는 사건들을 대립쌍으로
분열시키고
그 결과 일어나는 비난은
죄책감의 형태로 내부로 돌리거나
증오와 편집증의 형태로
외부를 향해 투사할 수 있다.
그래서
에고는
시비분별적이며,
부지불식간에
자기자신의 피해자가 된다.
만일 증오하고 있다면
에고는 진실을 위반한데 대해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을 느끼며
축적된 죄책감을 억누를 수 있는데,
이것은 투사되는 증오심에
더 많은 에너지를 보탠다.
나중에 오는 장에서 논하겠지만,
외부로 증오심을 투사하는 것은 또한
두려움의 수준에 이바지하는데,
그 이유는 에고가 자신이 외부로 투사한 것이
되돌아 올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예측하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장치에도 불구하고,
에고는 공격을 내면으로 돌리든
외부로 돌리든 간에
귀결을 피할 수 없다.
에고 위치의
고유한 허위성은
사실상
죄책감이나 증오를 느끼는 것은
실제 사람이 아니라
에고 자체일뿐 이라는데 있다.
실제의 참나는
영향받지 않는데
그것은
진실은
거짓에 침해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오/죄책감 게임은
운용상으로
내부적 정치일 뿐이며
여기서
갖가지 목소리들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충성을 얻어내려 든다.
에고는
자신의 한계에 비해
우월하다고 직관한 것을
시기하며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쉽사리 증오하고 비난한다.
또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틀린 것으로 만들거나 헐뜯는데,
기득권을 갖는다.
그래서
회의론자는
영적 진실이나
높은 의식을
그리고
높은 의식에서
가치를 갖는 것들(사랑, 진실, 신성, 아름다움)을
미묘하게 증오한다.
순수성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증오심은
신성모독은 물론
외설과 야비함으로 표현된다.
비판으로 알려진 것
(언론자유의 가면을 쓴)
대부분은
빈약하게 위장된 시기어린 증오이며,
이러한 증오에는
죄책감을 줄이려는
합리화된 정당화가
수반된다.
이데올로기적 증오심은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주제나 쟁점에 대한
대중적 논쟁에 불을 지피는데,
에고는 이러한 논쟁으로부터
자신이 이득으로 지각하는 것을
주의 형태로 끌어낸다.
증오심은
종종 비난을 매개로 한
죄책감의 투사라는 형태를
취한다.
이와 유사하게
에고의 정치는
사회속에
자신의 상대역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비난에 깊이 몰두하고 있다.
개인이 어떤 역할을 한다고 해도,
불행한 사건들은
저변에 있는 사회적 과정 자체의
실패를 나타내는 일이 많은데,
사회적 과정의 실패는
원천적으로
그릇된 정책으로 인한 것이다.
죄지은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대중을 만족시켜주는 반면
사회를 속여 넘기기 일쑤인데,
왜냐하면
해결책은
저변에 있는 과정자체를 살펴봄으로써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빈약한 판단에서 비롯된
죄책감은
선행으로 보상은 물론
배상, 고백, 도덕적 재봉헌이라는
장치에 의해 극복된다.
겸손함은
회복을 돕는데,
이는 죄책감의 일부가
자부심, 예를들면
"나는 그런 실수를 하지 말았어야 했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정할때이다.
~~했어야 했다는 단어에는
오류가 있는데,
이는 가설적인 것을
나타낸다.
가설적인 것은
결코 실상이 아니며,
실제로는 하나의 이상화된 추상이다.
그러므로
가설적인 것은
공상을 나타낸다.
개인의 과거사는
사람이 주어진 상황속에서
실제로 할 수 있었던
최선의 것을 나타내는데,
주어진 상황에는
그 당시
자신의 지각과 감정상태 및
정신적 상태가 포함된다.
실수가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현실적 겸손함을 유지하는데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에고는
종종 틀린 방향을 가리키는
불량 나침반이다.
에고가 가진
한계의 정도를 고려할 때,
어느 누구든
실수라도 저지를 수 있을 정도로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다.
문명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개인뿐 아니라
수많은 대중이 타락했고
죽었다는 사실이
신속히 드러나는데,
이는
진실과 거짓을 식별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무능력의
직접적 귀결이었다.
수백만의 사람, 국가전체,
심지어 몇세대의 시민들이
그릇된 신념, 환상, 망상으로 인해
그리고
온전치 못한 지도자들을
알아보지 못한 탓에
되풀이해서 유린당했다.
그리하여 찰스 맥케이의 유명한 책 "대중의 미망과 광기"는 1841년 이래로 끊임없이 인쇄를 거듭하고 있다.
의식의 진화는
개인과 집단
모두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선택된 과거는
현재에 비해 못해 보인다.
교훈은
오직 하나의
시간연속체상에서
경험의 펼쳐짐을 통해서만
학습될 수 있다.
그래서
가설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 이상이
항상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사람은 50세가 되어야 얻을 수 있는 정보를 25세의 나이에 알 수 없다. 모두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그걸 알고만 있었어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서
겸손함이 있을때,
주어진 매순간은
한계를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의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아니다.
실수는
학습과정에 내재하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조건 자체의 운명이다.
마음의 앎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마음은 추정을 내세워
그 한계를 메우는데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운용상으로 선택과 결정은
표면상 최선의 선택지를
기초로 한다.
영적 죄책감은
도덕, 윤리, 종교적 신념체계의 귀결인데,
이러한 것은 비록 죄책감에 기여하지만
또한 죄책감을 덜고
그로부터 회복되기 위한
유서깊은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들면
선행, 사심없는 봉사, 인도주의적 노력은 물론이고
고백, 용서, 속죄 및 영적 원리의 갱신과
그에 대한 재봉헌이 그것이다.
죄책감은
더 나은쪽으로의 변화를 위한
동기유발 요인으로
유익하게 이용될 수 있다.
적당한 죄책감은
사람에게 양심이 있으며
따라서 교정 가능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정신병질자(사이코패스)는
그러한 자산이 결핍되어 있으므로
맹목적으로 행동하고,
동일한 실수를 반복해서 저지르며,
그로 인해 점점 더 깊이 침몰한다.
그러므로
영적지향이 있는 사람은
행동을 안내하는 현실적인 내면의 안내자로
기여할 수 있는 삶의 지침을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다.
자아이상 ego-ideal
심리적 에고의 또 다른 구조는 프로이트에 의해 "자아이상 ego-ideal"(억압된 동물 본능인 이드와 대비되고, 초자아 혹은 양심과 대비되는 것)으로 명명되었다. 이 정신적 기제는 감탄, 희망, 소망의 대상이 되는 이상화된 기준과 목표, 정체성으로 구성된다.
자아이상은
사람이 되려고 계획하고
희망하는 것이다.
이상화된 인물은
모범으로 내사되며
따라서 영감을 고취시키는 방식으로
포부와 인생계획을 거든다.
이러한
이상의 성취는
자존감과 만족을 높여주지만,
반대로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죄책감을 낳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비현실적 기대는
주기적으로 개정하여
그것이 압박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음에 목표를 간직하는 것은
영감을 고취시키며
실제 목표달성에 도움이 되는데,
왜냐하면 마음속에 있는 것은
실현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을 성취하지 못한데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것은
실수다.
잘 살펴보면
욕망되는 것은
사실상 목표가 아니라
그것과 결부된 만족감이라는 사실이
자주 발견될 것이다.
매순간 선택지와 한계를
다 함께 포함한다.
선택지와 한계는
카르마적 요인들의 전체적 귀결을 둘러싸고 있는데,
카르마적 요인들은
자신의 삶의 유산과 상황이라는
환경전체로서 집단적으로 표현된다.
에고/자기는
선형적이며
따라서 한계와 장애에
종속된다.
이러한
인간 딜레마의 인지는
물질적 목표 대신
영적인 목표들을 선택으로
귀착될 수 있다.
'보물을 지상이 아닌
하늘나라에 쌓아두라'
는 금언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결국
타인과 모든 생명에게
다만 친절한 것은
일시적이며
결국에는 사라지고 마는
세속적 성공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귀결을 갖는다.
목표를
주기적으로 재평가하고,
그러한 목표가 정말로 중요한지
혹은 자만심의 귀결일 뿐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이롭다.
어떠한 모험에서든
성공하는 것은
사람이 이득을 구하지 않고
하나의 생활양식으로서
가능한 최선의 것으로 존재한 것의
자동적 귀결일 뿐이다.
죄책감에서 회복되는 데는
기도가 그리고 영적 가치에 대한
재봉헌이 지극히 도움이 되는데,
이는
인간조건은 현상이 어떻든
모든 사람에게 잘해봤자
어려운 것이라는
연민 어린 각성이 도움이 되는 것과 같다.
죄책감이나 도덕적 결함을 헤치고 나가는 과정에서의 문제들
죄책감은
정상적 초자아 혹은 양심의 기능이며,
프로이트가 "이드'로 명명한 것의
동물적 본능과 충동을 견제하기 위한
억제장치이다.
이드는
종종 살해충동조차 포함하는
매우 원시적인 억압된 본능들로 이루어진다.
지나친 죄책감은
수정을 요구하지만,
죄책감의 전적인 부재는
보다 심각하며
일반적으로 선천적인 병리적 상태의
귀결이다.
죄책감의 부재는
다양한 형태의 범죄와 정신병리로 이어지고
연쇄살인자, 정신병질적 성격
혹은 악성 메시아적 자기애로서의 정치에서
볼 수 있다.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이기심과 잔인성, 포식자 충동에 대해
억지력으로 작용하는 것이
정상적인 죄책감의 기제다.
죄책감의 유용한 측면은
후회, 억제, 교정하는
자기비판을 포함한다는 것인데,
이 모두가
책임있는
도덕과 윤리의 구성요소다.
양심의 이러한 측면은
범죄적/정신병질적 성격이 나타내는
극단적 자만심을 상쇄한다.
정상 상태에서는
억압되어 있는
매우 원시적인 증오 충동은,
억제되지 않는다면
살인자, 강간범, 소아 성애자, 연쇄살인자,
대량 살육자로 풀려나와 사회를 활보한다.
이 모든 상쇄는 대략 30으로 심지어는 그보다 훨씬 낮은 의식수준으로 측정된다. 표현된 행동의 기괴함으로 인해 그러한 사람들은 고전적으로 틀린 사람들로 언급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낮은 아스트럴로 특징지어진 의식수준들에 의해 지배된다.
이러한 장애는
흔히 3세 무렵이면 진단가능하며
욕구충족을 지연시키지 못하고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거나
혹은 귀결을 예상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특징으로 한다.
지금까지
이러한 장애는
치료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그것의 임상적 경과는
하나의 생활양식으로서
상습적이지 않으면 만성적인 범죄행각이다.
만약 이 장애에
충분한 지성까지 동반될 경우
그것은 기업사기나
심지어 종교의 병리적 왜곡이라는
형태를 띌 수도 있다.
그때 종교는 포식을 위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이것은 기괴한 사교로서 혹은 전통적 종교들의 일탈적 왜곡에서 볼 수 있다. 왜곡된 전통 종교들은 본성상으로 사교가 되며 집단 자살은 물론 개인의 자살, 혹은신성의 이름으로 무고한 이들을 살해하는 행위로 이끌기조차 한다.
또 다른 변이는
구획화된 다중 성격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정상적인 면은
사회에 내보여지고
숨은 포식자 측면은
이중간첩, 첩보원, 혹은 반역적 정보제공자로
행동화된다.
그 주요한 정치적 표현들에서
이 장애는 또한
메시아적이고 자기애적인 과대망상증으로 나타나는데,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이러한 과대망상증은
수많은 자국민조차
살해할 것을 요구한다.
죄책감이라는 평형추
전술한 것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죄책감의 부재는
그와 정반대인
과도한 죄책감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이다.
죄책감의 부재는
일종의 정신장애로 인도하는데,
한세기 전에 그것은 도덕적 저능으로 불렸다.
이와 대조적으로
비대한 양심은
지나친 병적 완벽주의나
강박장애와 연관되는데,
강박 장애를 가진 사람은
그저 정상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에 관해서조차
죄책감에 대한 두려움속에서 살아간다.
영적 진화에서
죄책감은 재맥락화되고
그래서 이로운 결과를 낳는다.
죄책감은
조심성으로 재구성되어
파괴적 충동에 지배되지 않게 해주는
안전장치로 여겨질 필요가 있다.
죄책감은
나중에
성숙함의 지혜로 나타나며
또한 자기중심성에 대한 윤리적 평형추이기도 하다.
그래서
죄책감이 재맥락화되고,
조화로워지며,
책임감 및 양심적이고
내면화된 도덕과 균형을 이루었을때
그것은 비로소 초월된다.
죄책감은
그 다음
보호적인 것, 안전장치,
학습 메커니즘으로 재맥락화될 때
수용될 수 있다.
죄책감이 불쾌한 것은
그것이 사랑의 상실 및
내면화된 부모 인물의 불인정과 관련되고,
더불어 자존감의 상실이 따르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종종 타인을 통제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죄책감을 퍼뜨리는 자들,
그것은 또한
거부 불명예,
지위상실을 상징한다.
종교에서 죄책감은
죄와 그리고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은 신에 대한 두려움과
연관되는데,
신이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내쫒은 일은
단순이 인간이기 때문에 오류를 저지르기 쉽고,
신성한 권위에 저항하는 경향이 있는
카르마의 역사적 기원들의
시작을 나타냈다.
살펴보면
오류는
통제되지 않은 유아적 호기심의 하나로 보이는데,
그래서 뱀은
속기 쉽고 순진한 호기심 넘치는
내면의 아이를 유혹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죄책감에 대한
유용한 해석과 이용은
한계와 한도를 존중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죄책감과 두려움은
조심성과 지혜로 성숙된다.
조심성과 지혜는
죄책감을 대체하는
도덕률과 한도에 대한 존중을 낳고,
결국에는
생존, 성공, 행복을 뒷받침하는
성격특징이 된다.
에고는 또한
자신이 죄책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이들을
증오하는데,
이는
모든 권위자에 대한
미성숙한 증오에 기여한다.
그 다음에
모든 권위자는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으로
온건하게 보호해주는 대신
억압하는 것으로 잘못 지각된다.
죄책감은
고통스러운 것으로 비치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한
또 다른 기제는
책임을 부정하고
비난을 통해 타인에게 책임을 투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제는 양심의 고통을 덜어주고.
게다가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기를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을,
외현화된 증오를 정당화해준다.
따라서
사회는 비난하고 책임전가하는 일에 열을 올리며,
죄책감없이 비난과 증오를 투사할 수 있는
죄지은 범죄자들을 끝없이 찾는다.
무의식적 죄책감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진실과 정직함에서의 일탈은
죄책감의 축적을 낳고
그 다음에
죄책감은
그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본성으로 인해 억압된다.
그래서
긴 시간에 걸쳐
상당한 분량의 죄책감이 쌓이는데,
이것은
주기적인 대담한 재고조사를 통해
찾아내지 않는다면
주의를 끌거나 인지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회적 불화와 다툼에 기여하는
매우 일반적인 조건이다.
도덕적/윤리적 잘못은
합리화를 통해 넘어가는 일이 종종 있지만
무의식적 마음은
기만에 넘어가지 않으며
자기나 타인들이 하는 거짓말을
본래적으로 안다.
무의식적 죄책감의
공통된 사회적 근원은
사회의 모든 측면을
설득력있게 정치화하는
현재의 경향에서 유래하는데,
이것은
그 다음
합리화된 정당화를 요구한다.
합리화된 정당화는
그 위치성을 약화시킬만한
증거의 왜곡으로
귀착한다.
한 예가 종교나 신성에 관한 공적인 언급을 일체 반대하는 주장일 것이다. 반대론은 미국헌법의 연방의회는 국교를 정하는 법률로 제정할수 없고를 이용하지만 그 다음에 나오는 또한 자유로운 신상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수 없다는 구절을 고의로 누락시키킨다. 미국 헌법은 자연신적이지 일신론적이지는 않은데, 그 둘차이는 매우 크다.
어떤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절반의 진실을 제출하는 것이
합리화되며,
그에 대한 죄책감은 억제된다.
사회제도에 대한
반대와 관련된 사례들은 풍부한데,
고의로 보고를 누락시키는 반대자들은
철저히 자발적이다.
또 다른 사례들로는
피해자의 권리를 무시하는
가해자의 권리에 대한 지지가 있다.
사회적 죄책감의 축적은
결국 공공연히 투사된 비난이나 악마화로 끝나며,
이러한 것은 그 다음에 그 이상의 미묘한 왜곡과 정교한 수사로 강화된
더한 정당화를 요구한다.
죄책감과 증오는
에고/마음의 한계를
그것의 고유한 구조 및
작용상의 결합과 함께 수용할 때
완화된다.
사람들이
타인의 삶은 물론
자기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을 보면
증오 대신 슬픔이 느껴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증오하는데
아무런 실익이 없다는 것 또한
대단히 명백하다.
용서하는 능력은
인간조건 자체에 내재된 한계를
정직한 겸손으로 수용하는데서 생겨나는데,
인간은
결국 의식진화의
학습곡선상에 있을 뿐이다.
인류전체의 의식수준이 진실의 수준인 200을 넘기라도 한 것은 불과 지난 20년 안쪽의 일이었고, 세계 인구의 78%는 여전히 200이하로 측정된다.
죄책감과 영적진화 과정
영적수행자들이
내면의 수행을
어디서 시작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물어오는 일이 많다.
먼저
통상적으로
영적 단체를 찾아가거나,
강연과 회합, 피정(안거)에 참여함으로써
학습을 통해
영적 여정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성공하려면
어떤 전체적 방향을 가져야만 한다.
산발적이고
단속적인 나아감은
흔히 실망이나 계획 전체의 포기를 낳는다.
매우 중요한 것으로
내면의 도덕적 재고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양심과
양심이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
잘 알아두는 것이 필수적이다.
양심이 온건해지고
건설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재맥락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비난이나
죄책감의 강화, 수치심
혹은 자존감 상실로 끝나기 때문이다.
모든 결함은
에고 구조자체에 내재한다는 것,
그리고
에고는
순진하며 현상과 본질을 식별하지 못한다는 것을
명료히 알아야 한다.
에고는
세상에 대한 것이든
혹은 사적인 자기에 대한 것이든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사실상 없다.
내면의 양심에 호소하여
그것이
가학적인 자기 가해자가 아닌
유용한 동맹자이자 교사가 되는데
전념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양심의 목적이
교육적인데 있도록
확실히 단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성숙한 양심이
유용한 도구이자
쓸모있는 안내자라고 판단해야만 하며,
자신의 의지에 따른 선택으로써
이러한 양심과 일치를 이룬다.
그 다음
의지의 행사를 통해
양심이 방종하며
죄책감에 탐닉하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기적인 또 하나의 가해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는 것은
멜로 드라마적일 수 있지만
세상이나 영적 온전성에 대해서는 무익하며,
사실상 이것은 교활한 방종이다.
상속받은 인간 한계로서의 죄책감은
적당한 뉘위침으로 대체될 수 있는데,
인간한계와 대비되는 완벽함은
똑같이 비현실적인 이상화이다.
한계를 수용함으로써
죄책감은 완화된다.
한계의 수용은
차례로
겸손함의 긍정적 귀결이다.
겸손함을 가질 때
죄책감은
또 다른 형태의 방종에
불과한 것으로 거부될 수 있다.
자기정직성은
용기, 겸손함, 인내를 요구하며,
결국에는
본래 어린시절의 산물로 일어났던
양심의 미숙한 측면들에 대한
연민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자기정직성은
과장되는 경향이 있거나,
그와달리 충동성을 가로막을 경우에는
간단하게 포기되는 경향이 있다.
과제는
성격의 내적결함이나
단점을 정직하게 인정하되,
죄책감의 공격,
즉 자기혐오와 분노,
혹은 자기와 타인에 대한 분개를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에고/마음은
학습된 행동의 세트인데,
그 궁극적 목적은
삶을 온건하게 재맥락화하는
참나의 광휘의 힘으로
자신의 프로그래밍과
기능을 초월하는 것이다.
참나의 현존은
사적인 자기로서의 진화를 포함하여
그 모든 표현을 갖는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경험된다.
그 결과
용서가 선고(심판)를 대체하는데,
그것은 이제 과도한 스트레스없이
진지한 내면의 재고조사를
더욱 심도깊게 진행해도 안전하다는 표시이다.
위의 과정은 다른 모임은 물론 매우 성공적인 12단계 자조모임들 전체의 집단적 지혜를 나타낸다. 그것은 또한 정신분석과 같은 깊이 있는 분석에서 따르는 기본전제를 나타내는데, 예컨대 정신분석의 기본규칙은 정신 내적인 갈등에 대한 탐구를 시작할때 항상 먼저 초자아의 측면에서 접근하라는 것이다.
또한
세상은
증오, 비난, 죄책감이 아닌
지혜에서 이익을 얻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내적 발견의 길 위에서
사람은 후회스러운 기억 및
사건들과 마주치는데,
이는 그저 더욱 잘하겠다는 결정으로
귀착된다.
영적, 치료적 작업에서
매우 유용한 또 하나의 도구는
유머감각인데,
이것은
세속의 부조리극과
그것의 난폭한 돌팔매질의
부정성을 상쇄해준다.
유머는
모순되는 환상들을
꿰뚫어 본 귀결이다.
위대한 스승들은
인간의 기본적 결함이
무지라고 가르쳤지만
인간의 한계를
순진성으로 보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되는데,
순진성은 일차적으로
하나의 단점이다.
준비가 충분하다면
수치심, 절망, 희망없음, 자기비난, 우울,
혹은 자존감의 상실에 빠지는 일 없이
내적작업과
엄격한 자기정직성을
안전하게 이뤄낼 수 있다.
그것은 범행현장을 들킨 도둑이 말한 그대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네.
안그런가?"
세계의 종교들은
공식적인 속죄와 자기반성의 기간을 갖지만
그러한 것은 구획화되며
또한 불쾌하게 침울한 것으로
비치는 경향이 있다.
성숙한 영적 수행은
보상이 따르는
성장과 교육으로 귀착되고,
이는
더욱 큰 행복과
기쁨으로 인도해준다.
속죄는
삽화로 그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영적 성장은 영구적이다.
신학과 죄책감
인류는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종이며
인류의 기원은 매우 원시적이었고,
실상에 무지했다.
따라서
고대문명들의 신학적 신념은
몽매한 상상력의 신화에서 태어났는데,
이러한 신화에서 우위를 점한 것은
우세한 낮은 의식수준들과 일치하는
부정성이었다.
아담과 이브의 우화는
70으로 측정되고,
인간이 죄안에서 태어났다는 관념의 진실수준은
고작 30으로 측정된다.
신성은
억압적이며
무서운 것으로
지각되었다.
의식연구에서 일어난 대안적 관점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무구하지만
무지하게 출현했으며,
현재 200으로 측정된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크라테스가 표명한 것과 같은 인간관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인간은
자신이 선으로 지각되는 것을 하기로
선택할 수 있을 뿐이므로
본질적으로 무구하지만,
사람들은
세계에 대한 거짓된 환상들에서
참된 선을 구별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임상적, 영적경험, 역사와 조사는 물론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소크라테스의 진실은
입증된다.
인간에게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선악의 체계가 세워졌는데,
이는 실용적이었고
아이들과 200이하로 측정되는
인구 대다수에게
사회적 가치가 있었다.
진화되지 않았거나
미성숙한 이들은
영적/윤리적/도덕적 기준에 대한
감각을 결하고 있기 때문에
"선악"이라는 규칙의 안내를 받는다.
의식수준 200이하에서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고
따라서 선악에 대한 금언이
앎의 결핍을 대신한다.
온전치 못한 이들에게는
유혹적인 것이
보다 진화한 사람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선택지일 것이다.
범죄는
개인의 의식수준과
직접 관련된다.
감옥의 재소자들은
평균 50으로
측정된다.
그래서
죄책감은 적절한 곳에서
귀중한 기능으로서
집단적으로 봉사하는데,
이는 원시적 본능들의 행동화에 대한
사회적 평형추이다.
또한
현실감이 결여된 이들에게도
선/악의 죄책감은
비슷한 가치를 갖는댜.
이 경우 죄책감은
진화되지 않은
미개한 에고의 고삐풀린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억제하는
평형추로서
긍정적 측면을 갖는다.
보다 성숙한 사람들에게 있어
본능적이고 원시적인 욕구가
충동성의 형태로 예기치 않게
방벽을 뚫고 나올 수 있는데,
사람들은
나중에 후회하거나
그것을 어리석은 실수로
바라보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실수는
판단착오를 낳는 경향이 있음을 자각하라는
쓸모있는 경고이다.
옛 속담에
'노년의 회색 머리칼은 번것이다'라고 했듯이,
성숙은 평생에 걸친 과정이다.
과거의 오류에 대한
일정정도의 후회와 가책은
불가피하며,
이는
자기와 타인에게
연민을 일으키는데
도움이 된다.
인간의 오류를 참작하는 것은
보다 온건하고
현실적인 양심을 가리킨다.
죄책감과 증오의 이원성
자신과 타인에 대한 귀결이
광범위할 수 있기 때문에
죄책감과 증오는
내면으로 향하든
혹은 타인에게 투사되든
진지한 주의를 요한다.
더욱 큰 행복의 경험을 가져다주는 보상은 만족스러우며, 경험적으로 그만한 노력의 가치는 충분하다.
죄책감과 증오의 포기는
삶의 모든 수준에
크게 이로운데,
왜냐하면
그러한 에고 위치들은
자신과 타인을
좀먹기 때문이다.
저항은
에고가 부정성에서 뽑아내는
은밀한 쾌락에서 비롯된다.
첫댓글 죄책감의 지배는 결국 "죄"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용서할 줄 모르는 감정적 태도인데, 강압과 통제를 위해 죄책감을 이용하는 종교선동가들은 이러한 태도를 남용한다. 처벌에 사로잡혀 있는 그러한 "죄와 구원"의 상인들은 자기 자신의죄책감을 행동화하거나 혹은 그것을 남에게 투사할 것이다.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는 이상 행동을 보여주는 하위문화들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의식적 동물살해와 같은 다른 풍토적 형태의 잔학행위를 종종 드러낸다. 죄책감은 분개를 유발하며, 살해는 종종 죄책감의 표현으로 일어난다.
영적수행작들이 내면의 수행을 어디서 시작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물어오는 일이 많다. 먼저 통상적으로 영적 단체를 찾아가거나, 강연과 회합, 피정(안거)에 참여함으로써 학습을 통해 영적 여정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성공하려면 어떤 전체적 방향을 가져야만 한다. 산발적이고 단속적인 나아감은 흔히 실망이나 계획 전체의 포기를 낳는다. 매우 중요한 것으로 내면의도덕적 재고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양심과 양심이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 잘 알아두는 것이 필수적이다.
죄책감을 갖기보다는 차라리 후회를 하라더군요
죄책감은 자기 혐오와 자기 비하, 가치없음 등을 증폭시키지만
후회는 자기 행위를 돌아보고 양심적 개선책을 찾게 해 주는 긍정적 효과를 얻게 되는 때문이랍니다
그렇군요. 차라리 후회를 하라!!
ㅎㅎㅎㅎ
에고/자기는 선형적이며 따라서 한계와 장애에 종속된다. 이러한 인간 딜레마의 인지는 물질적 목표 대신 영적인 목표들을 선택으로 귀착될 수 있다. 보물을 지상이 아닌 하늘나라에 쌓아두라는 금언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결국 타인과 모든 생명에게 다만 친절한 것은 일시적이며 종내는 사라지고 마는 세속적 성공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귀결을 갖는다. 목표를 주기적으로 재평가하고, 그러한 목표가 정말로 중요한지 혹은 자만심의 귀결일 뿐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이롭다.
옛 속담에 노년의 회색 머리칼은 번것이다라고 했듯이, 영적각성과 성숙은 평생에 걸친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