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世 直提學公(諱;賜)派 |
文峯先生文集卷之六 / 附錄
行狀[繕工監監役任奇撰] a042_256a 편목색인
[DCI]ITKC_MO_0195A_0070_010_0010_2002_A042_XML DCI복사 URL복사
公。蓬原人也。姓鄭氏。諱惟一。字子中。自號文峯。曾祖諱蘭元。郡守。祖諱光祐。生員。考諱穆蕃。妣李氏。月城望族。大司憲繩直之曾孫。生員時敏之孫。進士弘準之女。以嘉靖癸巳生公。幼有異質。穎悟越人。二三歲時。卽解文字。過目輒成誦。人業識其非常兒。甫成童。從權忠定公所受業。進退酬應。儼若成人。竟日劬書。無少嬉惰。忠定公奇之甚。常語人
曰。能大鄭氏門者。必此兒也。旣長。往師退溪先生。從事於誠篤自治之學。寤疑卞惑。多所自得。退而藏修于家。益加充廣。動靜語默。務與學俱。貧無書籍。力不能購。從人乞假。手自繕錄。五經諸子。下逮稗雜之說。靡不參稽而融貫之。發爲詞賦。夐出流輩。文譽蔚然著聞矣。壬子。中司馬。戊午。捷文科。選補承文權知。己未。陞承文副正字。旋移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壬戌。陞藝文館待敎。仍帶兼職。轉承政院注書。癸亥。侍講院說書,司諫院正言,成均館典籍。以便養乞外。出監眞寶縣。淸修有惠
政。乙丑。除江原都事。兼帶春秋。秋。入爲成均館直講兼知製敎。冬。授司憲府持平兼春秋,禮曹正郞。丙寅。成均直講,司諫院獻納。丁卯。司憲府持平,吏曹佐郞,成均典籍。戊辰。出爲禮安縣監。莅政一如眞城時。冬。徵以弘文校理,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記注官。己巳。議政府檢詳,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弘文館副應敎兼經筵侍講官,司諫院司諫,成均館司成。夏。爲榮川郡守。未幾。丁內艱去。辛未。服闋。拜弘文館應敎。秋。兼史局郞廳,司憲府執義,弘文館副應敎兼知製
敎,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承文院判校,司諫院司諫。壬申。爲弘文館副應敎者二。典翰者二。議政府舍人者二。歷尙衣院正,內資寺正,司憲府執義。陳,韓詔使之來。以遠接使從事官往義州。還。超拜弘文館直提學。兼帶如故。冬。階通政。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癸酉。躋右副承旨,司諫院大司諫。進右承旨,左承旨。甲戌。刑禮二曹參議。乙亥。大司諫。夏。拜護軍。丙子。疾卒于京城之寓舍。十二月一日也。享年四十四。丁丑三月九日。返葬于安東治乃城縣蟻洞先塋之左艮坐
坤向之原。公配淸風金氏。縣監應福之女。賢明有內政。後公三十三年而卒。葬與公同原而異壙。生二女。長曰任奇。監役。次曰韓瀛。縣令。副室有一女二男。女曰李明玉。男思敬,思愼。監役有二男四女。男長叔英。司憲持平。次世英。女長適朴弘敷。次適金垾。別坐。次適韓汝徵。郡守。次適申孝曾。縣令有五男四女。長安國。及第。次正國。及第。次定國。及第。次興國。進士。次昌國。進士。女長適李重吉。牧使。次適李德潤。次適崔弘載。司憲府持平。次適南宮烇。明玉有一男。男陽謙。思敬有四男一女。男承先,承
孝,承周,承勛。女適安魚變。承先有二男一女。男昌言,時言。女適金成厚。內外諸孫凡若干人。公風裁秀發。神氣肅淸。早登退陶之門。其所得於講授者。必驗之身心。不爲詞華口耳之學。先生深器許之。當時儕輩如西厓柳公,鶴峯金公,柏潭具公。莫不以文雅歸之公。公爲人外和內端。平居愔愔若無甚可否。而至於析理論事。確不可奪。好善疾惡。出於成性。聞人有玷行。雖衆所憚者。峻言斥之。不少貸。有一善片長。若已有之。推轂不容口。襟量夷坦。雖有面諂背毁者。置而不問。橫逆之來。笑而受之。
不與校。與人接。雖後進寒士。與之抗禮。無纖毫貴勢態。人無賢愚。樂與之親。閒居必整衣冠坐。雖待卑幼。自朝至夕。風範不少頹。所居四壁。書儒先格言。以自警省。五歲失恃。奉庶母若所自出。事先君子。先意承志。無所違忤。凡可以悅其心者。靡不致焉。疾左右侍。不離側。比喪。哀毁踰制。山骨垢面。淡食草寢。三年一日也。謹於祀先。極誠敬將之。器物必潔。牲醴必豐。昩爽盥櫛。拜謁先廟。雖隆寒甚暑。不一廢。念庶弟妹孤寡不自保。躬撫育之。曲盡恩意。世所遺田廬服器。析而與之。俾獲自裕。尤篤於
故舊。在患難者。必極力拯之。窮乏者。推其所有賙之。其立朝言論。侃侃不阿。無詭隨人意。所友皆一時端人正士。見媕婀淟涊之人。蹙額而起。若將浼焉。雖見嫉。不少䘏。倖臣李樑。權寵傾中外。其子廷賓。愚騃不學。倩人作表。遂占魁科。士論洶洶。唱名之日。多官爭後拜。公獨立殿上。屹然不爲動。明廟喪畢。李相浚慶請祔仁廟於延恩殿。獨祔明廟。如乙巳諸人之議。人莫敢矯其非。公獨毅然曰。凡事不可舍本而治末。若不先攻李相。安能止此邪論。其議遂寢。雅尙廉素。不事作業。位至通顯。
而蕭然若布衣時。頹垣樸舍。不蔽風日。田園無尺寸增拓以爲子孫計者。卒之日。家無長物。鄕之仕於朝者。相率致賻。以供斂事。居閒喜著述。蒐輯鄕中先哲言行文詞。爲閒中筆錄。江原佐幕時。記其山水樓臺之勝。爲關東錄。失於壬辰兵禍。嘗以宋朝名臣言行。朱子已有其錄。其他英雄豪傑節義文章。尙未有表章之者。因集王祐以下至文天祥,陸秀夫,趙良輔諸公數百餘人。目爲宋朝名賢錄。未脫藁藏于家。
後識
按。先生之喪。出於京邸。家藏書籍手藁。無人看
守。散佚幾盡。竊意先生負超卓之才。早親有道。與聞吾宗之旨訣。刻意問學。進進不已。而發身當朝。與奇,李諸先生。竝爲師門所稱。其平生事業。不宜草草寫出。而索之後孫。得貼冊所書先生行狀一本。沒其作者姓名。未知出於誰手。或云先生壻任公奇所錄。意或然也。其筮仕官職。攷其職牒。逐歲入錄。想無遺欠。而於先生平日言行。爲學次第。甚略不究。無以考見踐履之詳。殊可恨也。第狀辭雖若草率。而大體固具。善讀者。亦可因略而得其詳焉。似爲當日之實錄。而
今距先生幾二百年。子孫家無他文籍可靠。雖欲爲之搜究而致其備。亦末由也。退陶先生集中。載與先生往還書札。多至三四卷。大抵皆論學之說。師門平日深加奬許而欲其成就之者。若是其惓惓不已。則先生之於當日。資可以大受。而杠夯他日之大業者。可知也。惜乎。其蚤沒。卒不得究素學。而身後零替。其平生用工實見諸言語者。竟莫能收拾而記傳之。以遺後之人也。然學者就師門書札中所反覆者。而潛心玩索。亦可以得先生風範神采於諷誦之餘矣。又
攷西厓年譜。先生嘗與西厓,鶴峯,松岡諸公。會于書堂。將論劾東皐李相公。屬先生草疏。不至已甚云。然則先生已與選書堂。而狀中闕焉。又知官職除授。猶有所未備者矣。姑記之。以俟後之覽者。後學平原李光庭
행장〔行狀〕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임기(任奇)가 짓다.
[DCI]ITKC_BT_0195A_0070_010_0010_2023_001_XML DCI복사
공은 봉원(蓬原) 사람으로 성은 정씨(鄭氏)이고 휘는 유일(惟一)이며 자는 자중(子中)이고 자호는 문봉(文峯)이다. 증조부의 휘는 난원(蘭元)으로 군수를 지냈고, 조부의 휘는 광우(光祐)로 생원을 지냈으며, 부친의 휘는 목번(穆蕃)이다. 모친 이씨(李氏)는 월성(月城)의 명망 있는 가문 출신으로, 대사헌 이승직(李繩直)의 증손녀이자 생원 이시민(李時敏)의 손녀이며 진사 이홍준(李弘準)의 딸이다. 가정(嘉靖) 계사년(1533, 중종28)에 공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영특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두세 살 때에 바로 글을 알았고 보기만 하면 곧바로 외웠으니 사람들은 이미 보통 아이가 아님을 알았다.
겨우 15세에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에게 수업을 받을 때에 나아가고 물러나며 답하고 응대함이 어른처럼 의젓하였다. 온종일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조금도 장난치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니, 충정공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 늘 사람들에게 “정씨 집안을 크게 할 사람은 틀림없이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자라서는 퇴계 선생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성실하고 독실함으로 스스로를 다스리는 학문에 종사하면서 의심을 깨치고 의혹을 분별하여 스스로 터득한 바가 많았다. 물러나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 때에는 더욱더 확충하여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 말하거나 침묵할 때에 힘써 학문과 함께하였다. 가난하여 책이 없었고 살 형편이 못 되어 남에게 책을 빌려다 직접 베껴 적었지만, 오경(五經)과 제자서(諸子書)로부터 아래로 항간에 떠도는 잡다한 이야기들까지 참고하고 조사하여 능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를 발휘하여 사부(詞賦)를 지으면 동류들보다 훨씬 뛰어나서 문장의 명성이 성대하게 알려졌다.
임자년(1552, 명종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무오년(1558)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承文院權知)에 선보(選補)되었다.
기미년(1559)에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올랐다가 곧바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옮겨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직하였다.
임술년(1562)에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에 올라 그대로 겸직하다가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옮겨졌다.
계해년(1563)에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맡다가 부모님을 편히 모시기 위해 외직을 요청하여 진보 현감(眞寶縣監)으로 나가 청렴하게 은혜로운 정사를 펼쳤다.
을축년(1565)에 강원 도사(江原都事)에 제수되고 춘추관을 겸직하였다. 그해 가을에 조정으로 들어와 성균관직강 겸 지제교(成均館直講兼知製敎)를 지냈고, 겨울에 사헌부지평 겸 춘추(司憲府持平兼春秋)를 맡았다가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제수되었다.
병인년(1566)에 성균관 직강,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지냈다.
정묘년(1567)에 사헌부 지평, 이조 좌랑(吏曹佐郞), 성균관 전적을 지냈다.
무진년(1568, 선조1)에 외직으로 나가 예안 현감(禮安縣監)이 되어 진보 현감을 맡았을 때와 똑같이 정사를 펼쳤다. 그해 겨울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부름을 받았고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기주관(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記注官)을 지냈다.
기사년(1569)에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홍문관부응교 겸 경연시강관(弘文館副應敎兼經筵侍講官),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을 지냈다. 여름에 영천 군수(榮川郡守)가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신미년(1571)에 삼년상을 마치고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다. 그해 가을에 사국 낭청(史局郞廳)을 겸임하였고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홍문관부응교 겸 지제교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弘文館副應敎兼知製敎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 사간원 사간을 지냈다.
임신년(1572)에 홍문관 부응교에 두 번, 전한(典翰)에 두 번, 의정부 사인에 두 번 제수되었고, 상의원 정(尙衣院正), 내자시 정(內資寺正), 사헌부 집의를 거쳤다. 사신 진삼모(陳三謨), 한세능(韓世能)이 왔을 때 원접사 종사관(遠接使從事官)이 되어 의주(義州)에 갔다가 돌아와서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에 초배(超拜)되었고 겸직은 이전과 같았다. 그해 겨울에 통정대부에 오르고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을 지냈다.
계유년(1573)에 우부승지(右副承旨),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거쳐 우승지(右承旨), 좌승지(左承旨)에 올랐다.
갑술년(1574)에 형조 참의(刑曹參議)와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맡았다.
을해년(1575)에 대사간이 되었는데 여름에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
병자년(1576) 12월 1일 경성(京城)의 집에서 병으로 생을 마쳤으니 향년 44세였다.
정축년(1577) 3월 9일에 안동(安東) 내성현(乃城縣) 의동(蟻洞) 선영(先塋)의 왼편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언덕에 반장(返葬)하였다.
공의 부인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현감 응복(應福)의 따님으로, 현명하여 집안 살림을 잘 꾸려 나갔다. 공보다 33년 뒤에 세상을 떠났고, 공과 같은 언덕에 무덤을 달리하여 장사 지냈다.
딸 둘을 낳았으니 첫째는 감역(監役) 임기(任奇)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현령(縣令) 한영(韓瀛)에게 시집갔다. 측실에게서 1녀 2남을 두었으니 딸은 이명옥(李明玉)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사경(思敬)과 사신(思愼)이다.
감역 임기는 2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사헌부 지평 숙영(叔英), 차남은 세영(世英)이고, 딸들은 박홍부(朴弘敷), 별좌(別坐) 김한(金垾), 군수 한여징(韓汝徵), 신효증(申孝曾)에게 각각 시집갔다. 현령 한영은 5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 안국(安國), 차남 정국(正國), 셋째 정국(定國)은 급제를 하였고, 넷째 흥국(興國)과 다섯째 창국(昌國)은 진사이다. 딸들은 목사 이중길(李重吉), 이덕윤(李德潤), 사헌부 지평 최홍재(崔弘載), 남궁전(南宮烇)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명옥은 1남을 두었으니 양겸(陽謙)이다. 사경은 4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승선(承先), 승효(承孝), 승주(承周), 승훈(承勛)이고, 딸은 안어변(安魚變)에게 시집갔다.
승선은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창언(昌言), 시언(時言)이고, 딸은 김성후(金成厚)에게 시집갔다. 친가와 외가 손자들이 모두 어느 정도 된다.
공은 풍모가 빼어나고 정신과 기상이 맑고 엄숙하였다. 일찍 퇴계 문하에 들어가 강론과 수업에서 터득한 것을 반드시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였고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구이지학(口耳之學)을 하지 않았다. 퇴계 선생은 인재로 깊이 인정하였고, 당시의 동료들로 서애(西厓) 유공(柳公), 학봉(鶴峯) 김공(金公), 백담(柏潭) 구공(具公) 같은 이들이 모두 고상하고 우아한 면모로 공을 손꼽았다.
공의 사람됨은 외면이 온화하고 내면이 단정하였으며, 평소에는 조용하여 마치 옳고 그름에 대해 별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이치를 변별하고 일에 대해 논할 때에는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타고난 성품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누군가에게 잘못된 행실이 있다는 것을 들으면 아무리 모두가 꺼리는 자일지라도 준엄한 말로 지적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에게 작은 장점이라도 있으면 마치 자기 일처럼 여겨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어올렸다. 도량이 넓어서 비록 앞에서는 아첨하고 뒤로는 헐뜯는 자가 있더라도 내버려 두고 따지지 않았으며, 무례하게 횡포를 부리는 이도 웃으면서 받아 주고 실랑이하지 않았다. 사람을 대할 때는 비록 후배나 지위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동등하게 예우하여 조금도 과시하는 태도가 없었고, 어진 이나 어리석은 이나 할 것 없이 함께 친하게 지내기를 즐거워하였다.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여 앉았고, 비록 신분이 낮거나 나이가 어린 사람을 대하더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풍모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거처하는 곳의 사방 벽면에 선유(先儒)의 격언을 써 두어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였다.
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서모(庶母)를 친어머니처럼 봉양하였다. 선친을 모실 때는 미리 뜻을 헤아리고 잘 받들어 어기거나 거스르는 경우가 없었다. 선친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극진히 하였다. 선친께서 병이 들자 곁에서 모시며 떠나지 않았고, 상(喪)을 당해서는 정도에 지나칠 정도로 애통해하여 비쩍 마른 몸과 때 묻은 얼굴로 초라한 식사를 하고 초막에서 지내기를 3년 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선조의 제사에 부지런하여 지극한 정성과 공경으로 모셔서, 기물은 반드시 청결하게 하였고 제수는 반드시 풍성하게 하였다. 새벽에 세수하고 머리 빗고 사당에 배알하기를 몹시 춥거나 덥더라도 하루도 그만두지 않았다. 이복형제 중에 고아나 과부가 되어 제 몸을 건사하지 못하는 이들을 염려하여 몸소 보살피고 길러서 은혜를 곡진하게 하였고, 대대로 물려 온 전답과 집, 의복과 기물을 나누어 주어서 넉넉하게 살도록 해 주었다.
벗에게는 더욱 돈독하게 하여, 어려움을 겪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힘을 다해 도와주었고 궁핍한 이가 있으면 자기 것을 가져다 보태 주었다. 조정에서 의론을 펼칠 때에는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아서 정도(正道)에 어긋나게 남의 뜻을 따르는 경우가 없었다. 벗하는 이들도 모두 당대의 단정하고 올바른 인사들이었으니, 줏대가 없고 혼탁한 사람들을 보면 마치 자신을 더럽힐 듯이 이마를 찌푸리며 일어나서 비록 미움을 받더라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행신(倖臣) 이량(李樑)의 권세와 총애가 도성 안팎을 뒤흔들었는데, 그 아들 정빈(廷賓)이 어리석어 배우지 않고 사람을 고용하여 대신 표문을 짓게 하여 마침내 과거에 장원 급제하자 선비들 사이에 여론이 흉흉하였다. 합격자를 발표하던 날에 많은 관리들이 뒤질세라 배례를 올렸는데, 공만이 홀로 전상(殿上)에 우뚝이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명묘(明廟)의 상이 끝나자 재상 이준경(李浚慶)이 인묘(仁廟)의 신주는 그대로 연은전(延恩殿)에 모시고 명묘의 신주만 문소전(文昭殿)에 모시자고 청한 것이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 몇 사람의 의론과 마찬가지였다.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는 사람이 없었는데 공이 홀로 의연히 말하기를 “모든 일은 근본을 버리고서 말단을 다스려서는 안 되니, 만약 먼저 재상 이준경을 성토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그릇된 논의를 중지시킬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그 의론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평소 청렴하고 소박함을 숭상하여 재산 불리기를 일삼지 않았으니 고관의 지위에 이르러서도 살림은 썰렁하여 벼슬하지 않을 때와 같았다. 무너진 담장과 소박한 집은 비바람도 막지 못하였고, 자손에게 물려줄 계획을 하여 조금이라도 늘린 전지가 없었다. 생을 마치던 날 집에 값진 물건 하나 없었으니, 고을에 벼슬하는 이들이 서로 좇아서 부의를 하여 장례 치르는 일을 도왔다.
평소에 저술하는 것을 좋아하여 동향 선현의 언행과 문장을 수집하여 〈한중필록(閒中筆錄)〉을 지었다. 강원 도사(江原都事) 때 산수와 누대의 좋은 경치를 기록하여 《관동록(關東錄)》을 지었으나 임진년(1592, 선조25) 병란에 잃어버렸다. 일찍이 송(宋)나라 명신의 언행에 대해 주자가 이미 기록을 해 두었지만 그 외 영웅호걸의 절의와 문장이 아직도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였다고 하여 왕우(王祐)부터 이후 문천상(文天祥), 육수부(陸秀夫), 조양보(趙良輔) 등에 이르기까지 수백여 인을 모아서 《송조명현록(宋朝名賢錄)》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탈고하지 못한 채 집에 보관되어 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경저(京邸)에서 선생의 상이 나니, 집에 보관되어 있던 서적과 원고를 간수할 사람이 없어 거의 다 산일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선생은 빼어난 재질을 지닌 데다 일찍부터 도(道) 있는 이를 가까이하여 우리 유학의 지결(旨訣)을 듣고 마음을 다해 공부하며 그침 없이 진보하여 조정에서 과거에 합격하여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들과 더불어 사문(師門)에서 칭찬을 받았다. 그 평생의 사업을 경솔히 써내서는 안 되겠기에 후손에게서 찾아 첩책(貼冊)에 쓰인 선생의 행장 한 본(本)을 얻었는데, 그 작자의 성명이 없고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선생의 사위인 임기 공이 쓴 것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선생께서 처음 벼슬한 관직은 직첩(職牒)을 살펴보고 연도에 따라 기록하여 빠뜨린 것이 없는 듯하지만, 선생의 평소 언행과 학문을 한 차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아 매우 소략하여 그 실천의 상세함을 상고할 수 없음이 매우 한스럽다.
다만 행장의 글이 비록 거칠고 소략한 듯하지만 대체는 참으로 갖추고 있어, 잘 읽는다면 간략함을 통해 자세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당시의 실록이 될 것 같다. 지금은 선생과의 거리가 거의 200년이 되어 자손들의 집안에는 믿을 만한 다른 문헌 자료가 없으니 비록 그를 위하여 찾아서 연구하여 온전하게 갖추고자 해도 방법이 없다. 퇴도(退陶) 선생의 문집 가운데 선생과 주고받은 서찰이 수록되어 있는데 3, 4권의 분량에 이른다. 대저 모두 학문에 관해 논의한 글이다. 사문에서 평소 깊이 권장하고 허여하며 성취하고자 하는 노력을 이처럼 부지런히 멈추지 않으셨으니, 당시에 선생의 자질은 큰일을 맡아 뒷날의 큰 사업을 감당할 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서 평소의 학문을 궁구하지 못하고 사후에는 미약해져서 언어에 드러나는 평생의 노력을 끝내 모아서 기록하여 전함으로써 훗날의 사람들에게 남길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학자들이 사문의 서찰 가운데서 반복한 내용에 침잠하여 음미하고 찾는다면, 선생의 풍범(風範)과 신채(神采)를 풍송(諷誦)의 여지(餘地)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서애의 연보를 살펴보니, 선생은 일찍이 서애, 학봉,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 등 여러 공들과 함께 서당에서 만나 동고(東皐) 이 상공(李相公 이준경)을 논핵하고자 하여 선생에게 상소의 초고를 맡기니, 너무 심한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생은 이미 서당에서 선택되었지만 그 내용이 행장 가운데는 빠져 있다. 또 제수된 관직도 아직 다 기록되지 못한 것이 있다. 우선 여기에 기록하여 훗날 이를 보는 사람들을 기다린다.
후학 평원(平原) 이광정(李光庭)
ⓒ 한국고전번역원 | 이광호 (역) | 2022
墓碣文[東江呂爾徵撰] a042_258d 편목색인
[DCI]ITKC_MO_0195A_0070_010_0020_2002_A042_XML DCI복사 URL복사
爾徵自弱冠。從遊疏庵任子茂叔。驩甚如兄弟然。疏庵子嘗道其外王父文峯先生鄭公文學德行之懿。出視其先子所爲狀。爾徵景服焉。志之不倦。殆四十年矣。乃今公之墓將有石。而疏庵後嗣量
來乞銘。爲其能詳而信也。奚可以衰落魯莽爲辭。按。公諱惟一。字子中。文峯自號也。其先著望蓬原。世德燀赫。彌遠而益大傳。公高祖諱賜。直提學。贈左贊成。曾祖諱蘭元。郡守。祖諱光祐。生員。考諱穆蕃。妣月城李氏。大司憲繩直之曾孫。進士弘準之女。以嘉靖癸巳生公。生而穎秀。學語時。已解文字。始授書。閱目成誦。人皆識其非常。舞象之歲。受業于權忠定公。擧止若成人。忠定奇之。期以遠大。旣長。師退溪先生。備問道義之要。寤疑辨惑。多所自得。在門者莫之先也。退而益加充廣。手錄五經諸
子。下逮稗雜之說。參稽融貫。發爲文詞。華聞傾一時。中壬子司馬。戊午。文科。選隸承文院。轉正字。薦入藝文館。轉待敎。又薦承政院注書。移侍講院說書。陞司諫院正言。歷成均館典籍。求養出監眞寶縣。未瓜。遷江原都事。入爲成均館直講,知製敎,司憲府持平,禮曹正郞,司諫院獻納。薦拜吏曹佐郞。又出禮安縣監。錄弘文館。以校理召還。歷議政府檢詳,舍人,弘文館副應敎,司諫院司諫,成均館司成。又出守榮川郡。以憂去。制除。拜弘文館應敎。與修實錄。自後。屢經執義,司諫,副應敎,典翰,舍人,
承文院判校,尙衣院內資寺正。詔使至。遠接使署爲從事。還拜直提學。尋陞通政承政院同副承旨。轉至左承旨。拜司諫院大司諫。歷刑禮二曹參議。復長諫院。遘疾。移西班。易簀于漢城之寓舍。實萬曆丙子十二月也。春秋四十四。明年三月。返葬于安東治乃城縣先兆之左負艮之原。公天分高造道敏。詞章政術。根於學而綽如。行內修而尤篤於孝。深愛至養。率性而無違。居喪過毁。幾至不全。追遠致愨。終身如一日。昧爽冠帶謁家廟。雖寒暑甚。不一廢。幼失恃。事庶氏如自出。撫育庶弟妹。優祈
資以裕之。信乎朋友。懽而有規。喜接士。虛己傾下。揚人之善。不啻己有。嫉惡又甚。聞有玷行。峻斥不憚貴勢。見媕婀淟涊者。蹙額而起。若將浼焉。居常正襟而坐。終夕不少頹。四壁揭儒先格言。以自警省。於家人生業。泊然不入於意。立朝持風裁。侃侃不阿。侍經幄。講釋密微。史臣數稱眞學士。居言地。謇然無所顧。有古遺直風。康陵喪畢。將祔太廟。首相李公浚慶議奉孝陵于延恩殿。人莫敢貳。公獨毅然倡言。直斥李相之非。寢其議。典禮賴而歸正。擧世偉之。朝廷方以紀綱言論之責寄公。
將底于大用。而天奪其年。士林痛惜。愈久愈未已焉。所著書關東錄。失於兵燹。閒中筆錄一卷及宋朝名賢錄十一卷。行于世。淑人淸風金氏。縣監應福之女。賢明有儀則。後公三十三年而卒。葬同原異壙。生二女。長監役任奇。有至性。少從公門下。公雅重之。歸以其子。次縣令韓瀛。副室子曰思敬,思愼。女曰李明玉。監役。有二男。長叔英。文章節行。卓犖絶世。人謂宅相有自也。是疏庵子也。久屛於昏朝。中興初。首被寵擢。驟歷翰苑,玉堂,憲臺。未踰歲而沒。吁命矣。次世英。女四人。朴弘敷,金垾,韓汝徵,
申孝曾。縣令有五男。安國,正國,定國,興國,昌國。女四人。李重吉,李德潤,崔弘載,南宮烇。明玉一男。陽謙。思敬四男。承先,承孝,承周,承勛。一女安魚變。承先之子昌言奉公後。能治石以圖永久。可尙也。銘曰。
若昔道隆。儒雅登崇。維時鄭公。拔萃羣工。神淸學充。識達材通。啓沃聖功。密勿昭融。康莊未窮。今古餘恫。顯刻幽宮。永闡遺風。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9
묘갈문〔墓碣文〕 동강(東江) 여이징(呂爾徵)이 찬하다.
[DCI]ITKC_BT_0195A_0070_010_0020_2023_001_XML DCI복사
나는 약관일 때부터 소암(疏庵) 임숙영(任叔英)과 종유하면서 형제처럼 매우 즐겁게 지냈다. 소암은 일찍이 그의 외왕부(外王父) 문봉(文峯) 정 선생(鄭先生)의 문학과 덕행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자신의 아버지(임기(任奇))가 지은 행장을 보여 주었다. 내가 크게 감복하여 기억을 게을리하지 않은 지 거의 40년이 되었다. 지금 공의 묘에 비석을 세우려 함에 소암의 후사 임량(任量)이 와서 명문(銘文)을 부탁하니, 행장이 자상해서 믿을 만하기 때문이지 어찌 늙어 쇠락하고 거친 자질로 글을 지을 수 있겠는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유일(惟一)이고, 자는 자중(子中)이며, 문봉은 자호이다. 그의 선조는 봉원(蓬原)에서 명망이 있고, 세덕(世德)이 휘황찬란하여 멀어질수록 더욱 크게 전하였다. 공의 고조의 휘는 사(賜)로, 직제학이었고 증 좌찬성이다. 증조의 휘는 난원(蘭元)으로, 군수였다. 조부의 휘는 광우(光祐)로, 생원이었다. 아버지의 휘는 목번(穆蕃)이고, 어머니는 월성 이씨(月城李氏)로 대사헌 승직(繩直)의 증손이며, 진사 홍준(弘準)의 여식이다. 가정(嘉靖) 계사년(1533, 중종28)에 공을 낳았다. 태어나면서 빼어났고, 말을 배울 때에 이미 문자를 알았다. 처음 책을 주자 눈으로 보고 독송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비상함을 알아보았다. 무상(舞象)의 나이가 되었을 때 권 충정공(權忠定公 권벌(權橃))으로부터 수업을 받았는데, 행동거지가 어른과 같았다. 충정공이 기특하게 여기며 원대하게 되기를 기대하였다. 장성하여 퇴계 선생을 스승으로 삼았다. 도의(道義)의 요체에 대해 여러 가지로 질문하고 의혹이 드는 부분들을 깨우치고 변별하며 스스로 얻는 바가 많아 문하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앞서는 자가 없었다. 물러나 더욱 확충하여 손으로 오경(五經)과 제자(諸子)의 글을 기록하였다. 아래로 패잡(稗雜)의 설까지도 참조하여 연구하고 계고하여 두루 관통해서 문사(文詞)로 표현해 내니, 화려한 명성이 한 시대를 흔들었다.
임자년(1552, 명종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무오년(1558) 문과(文科)로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 소속으로 선발되어 정자(正字)가 되었다가 추천을 받아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대교(待敎)가 되었다. 다시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추천을 받았고,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옮겼다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으며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쳤다.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요청하여 진보 현감(眞寶縣監)으로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옮겼다. 내직으로 들어가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지제교(知製敎),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예조 정랑(禮曹正郎),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다. 추천을 받아 이조 좌랑(吏曹佐郎)이 되었다가 다시 예안 현감(禮安縣監)으로 나갔다. 홍문관(弘文館)에 녹용(錄用)되어 교리(校理)로 불러 올렸다.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ㆍ사인(舍人),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쳤다. 다시 영천 군수(榮川郡守)로 나갔다가 상을 당하여 떠났다. 상을 마치고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어 실록(實錄)을 편수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후로 여러 차례 집의(執義), 사간, 부응교, 전한(典翰), 사인,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 상의원 정(尙衣院正),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거쳤다. 조사(詔使)가 왔을 때, 원접사 종사관(遠接使從事官)이 되었다가 다시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고, 좌승지(左承旨)에까지 이르렀다.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형조(刑曹)와 예조(禮曹)의 참의(參議)를 거쳤다. 다시 사간원의 장이 되었다가 병에 걸려 서반(西班)으로 옮겼다. 한성(漢城)의 살던 집에서 세상을 떴다.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9) 12월이었고 나이는 44세였다. 다음 해 3월, 안동(安東) 내성현(乃城縣) 선조의 무덤 왼편 간좌(艮坐)의 언덕에 반장(返葬)하였다.
공은 타고난 재질이 뛰어났고 도에 나아감에 민첩하였으며, 사장(詞章)과 정술(政術)은 학문에 뿌리를 두어 여유로웠으며, 행실은 안으로 닦으면서 효에 더욱 독실하였다. 깊은 사랑과 극진한 봉양은 성품대로 하여 어긋남이 없었다. 상을 치르면서 슬퍼함이 지나쳐 거의 몸이 온전치 못한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제사를 지내면서는 삼가는 것을 극진히 하여 종신토록 한결같았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관디를 착용하고 가묘(家廟)에 배알하는 것은 비록 너무 춥거나 덥더라도 한 번도 폐하지 않았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지만 서모를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 모시듯이 하였고, 서모가 낳은 형제자매들을 보살피고 기르며 기도와 재물을 넉넉하게 해서 여유 있게 하였다. 친구들에게 미덥게 하였으며, 즐거워하더라도 법도에 맞았다. 선비 만나는 것을 즐겼는데, 자신을 텅 비우고 몸을 기울여 낮추었으며, 다른 사람의 뛰어난 점을 잘 드러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할 뿐만이 아니었고, 악을 싫어하는 것 또한 심하였다. 잘못된 행동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높은 지위와 권세를 상관치 않고 준엄하게 배척하였다. 우물대는 사람이나 더러운 사람을 보면 마치 자신이 더럽혀질 듯이 이마를 찌푸리면서 일어났다. 거처할 때는 항상 옷매무새를 바르게 하고서 앉아 있었는데, 저녁이 다 되도록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네 벽에는 선유들의 훌륭한 말을 걸어 놓고서 스스로를 경계하고 살폈다. 집안사람들이 생업을 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무관심한 듯 자신의 뜻을 개입시키지 않았다. 조정에 나아가서는 풍모를 견지하는 것이 꼿꼿하며 아첨하지 않았다. 경연에 참여하면서는 강(講)을 하고 풀이를 하는 것이 엄밀하고도 꼼꼼하여 사신(史臣)들이 수차례 진정한 학사(學士)라고 칭찬하였다. 언관(言官)의 지위에서는 주변 상황을 돌아봄이 없이 직언하여 옛사람의 강직한 풍모가 있었다.
강릉(康陵 명종)의 상이 끝나고 태묘(太廟)에 합사하려고 할 때, 수상(首相) 이준경(李浚慶) 공이 효릉(孝陵 인종)을 연은전(延恩殿)에 받들 것을 의론하였다. 사람들 가운데 이론을 가진 사람이 없었는데 공만은 홀로 의연히 크게 말하여 곧바로 이 재상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 논의를 중지시켰다. 전례(典禮)에 의거하여 올바른 데로 귀착하니, 온 세상이 훌륭하게 여겼다. 조정에서는 비로소 기강(紀綱)과 언론(言論)의 중책을 공에게 의뢰하였고 장차 크게 쓰이는 데까지 이를 것이었는데, 하늘이 그의 수명을 빼앗았다. 사림에서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여 시간이 흘러도 더욱 그치지 않고 애도하였다. 《관동록(關東錄)》를 지었는데 전쟁(임진왜란) 통에 없어졌고, 〈한중필록(閒中筆錄)〉 1권과 《송조명현록(宋朝名賢錄)》 11권은 세상에 유포되었다.
숙인(淑人)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현감(縣監) 응복(應福)의 따님이다. 현명하고도 의칙이 있었다. 공보다 3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 언덕에 무덤을 달리해서 장례를 치렀다. 두 딸을 낳았다. 맏사위 감역(監役) 임기는 성품이 지극하고 어려서부터 공의 문하에 있었는데 공이 평소 귀하게 여겨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둘째 사위는 현령(縣令) 한영(韓瀛)이다. 부실(副室)의 아들은 사경(思敬)과 사신(思愼)이고, 사위는 이명옥(李明玉)이다.
감역 임기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장남 숙영(叔英)은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이 세상에서 우뚝하게 뛰어나고 훌륭하여 사람들이 집안에 유래가 있다고 여겼다. 이 사람이 소암(疏庵)이다. 오랫동안 어지러운 조정을 등졌는데, 다시 부흥하기 시작한 시점에 제일 먼저 총애를 입어 발탁되어 한 번에 한원(翰苑), 옥당(玉堂), 헌대(憲臺)를 거쳤는데, 해를 넘기지 않고 세상을 떴다. 아, 운명이다. 둘째 세영(世英)은 사위가 넷인데 박홍부(朴弘敷), 김한(金垾), 한여징(韓汝徵), 신효증(申孝曾)이다. 현령 한영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는데 안국(安國), 정국(正國), 정국(定國), 흥국(興國), 창국(昌國)이고, 사위가 넷인데 이중길(李重吉), 이덕윤(李德潤), 최홍재(崔弘載), 남궁전(南宮烇)이다. 이명옥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양겸(陽謙)이다. 사경에게는 아들 넷이 있는데 승선(承先), 승효(承孝), 승주(承周), 승훈(承勛)이다. 사위는 하나인데 안어변(安魚變)이다.
승선의 아들인 창언(昌言)이 공사를 위해 헌신한 뒤에 비석을 세워 영구히 전해지게 되었으니 숭상할 만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예전 도가 융성할 때처럼 / 若昔道隆
훌륭한 유학자가 높게 숭상되었지 / 儒雅登崇
이 시대의 정공만이 / 維時鄭公
여러 관리들 가운데 빼어났다네 / 拔萃群工
정신은 청아하고 학문은 충만하며 / 神淸學充
식견과 재주는 통달하여 / 識達材通
임금의 마음을 열어 주어 / 啓沃聖功
힘써 밝게 융화시키네 / 密勿昭融
평탄한 벼슬길을 다 가지 못하여 / 康莊未窮
고금에 한을 남기니 / 今古餘恫
묘비와 무덤으로 / 顯刻幽宮
길이 유풍을 드러내리 / 永闡遺風
ⓒ 한국고전번역원 | 이광호 (역) | 2022
墓表[安東權正宅述] a042_260b 편목색인
[DCI]ITKC_MO_0195A_0070_010_0030_2002_A042_XML DCI복사 URL복사
乃城縣東蟻洞負艮之原。有文峯鄭先生墓。夫人
金氏袝。舊有碣。旋泐。後嗣替。莫能改豎。且七十年。縣人慕先生之義。相與鑱石。表于墓道。先生諱惟一。字子中。少學於權忠定公。後師退陶先生。稱高弟。登第選翰苑。歷踐銓郞,中書,玉堂,銀臺。竝帶三字銜。言論風旨。卓然爲昭敬朝名臣。萬曆丙子。以大司諫終。壽四十四。祭於柏麓里社。世系子女。載先生壻任公奇之狀。今不贅云。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9
묘표〔墓表〕 안동(安東) 권정택(權正宅)이 짓다.
[DCI]ITKC_BT_0195A_0070_010_0030_2023_001_XML DCI복사
내성현(乃城縣) 동쪽 의동(蟻洞) 남서향 언덕에 문봉(文峯) 정 선생(鄭先生)의 묘가 있다. 부인 김씨가 함께 묻혀 있다. 예전에는 묘갈(墓碣)이 있었는데, 곧 부서져서 후손이 치우고 다시 세우지 못한 것이 70년이 되려고 한다. 현(縣)의 사람들이 선생의 뜻을 존모하여 함께 도와 돌에 새겨 묘도(墓道)에 세웠다.
선생의 휘는 유일(惟一)이고, 자는 자중(子中)이다. 어려서는 권 충정공(權忠定公 권벌(權橃))에게 수학하였고 후에는 퇴도(退陶) 선생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고제(高弟)라 칭해졌다. 과거에 합격하여 한원(翰苑)에 선발되었고, 전랑(銓郞), 중서(中書), 옥당(玉堂), 은대(銀臺)를 거쳐 삼자함(三字銜)을 함께 겸직했다. 언론(言論)과 풍지(風旨)가 우뚝하게 선조조(宣祖朝)의 명신이었다.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9)에 대사간으로 생을 마쳤는데, 나이가 44세였다. 백록리사(柏麓里社)에서 제사를 지냈다. 세계(世系)와 자녀는 선생의 사위 임기(任奇) 공의 행장에 실려 있으므로 지금은 덧붙이지 않는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광호 (역) | 2022
註;문봉집(文峯集)이 번역되어 2024.2.1.자로 공시가되었기 번역문을 옮겼습니다.
첫댓글 문봉공의 사적을 올려주시어 감사하게 잘 읽겠습니다.
군태님의 좋은글 정보글 잘 공유하고 갑니다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
문봉공의 사적 잘 읽어 봤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지난해 11월에 번역본이 출간되었으나
쉽게 구해 볼수없음에 안타깝습니다.
퇴계선생 제자중에 오고간 서간문이 제일 많다고 하는데
그내용을 보면 학문성과도 대단할것입니다
전번에는 부록 원문이 없었는데 있네요. 요즘 카페에 자주 들리지 못해 못볼뻔 했습니다. 자료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