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파당의 지진 현장에서 (로타리 코리아지와 의협신문에 기고한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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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30일에서 10월7일까지 인도네시아 파당에서 의료 선교차 9월30일 오전 10시35분에 출국하여 자카르타에 오후 3시30분에 도착했다. 당일 갈 수가 없어서 10월1일 오전 6시1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호텔에 머무르고 있는데 오후 5시15분쯤에 진도 7.6도의 강진이 파당에 터졌다는 것이다. 당일 저녁에는 공항이 폐쇄되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일찍 공항엘 갔더니 탑승수속을 하는 것이다. 공항이 열린 후에 첫 비행기로 파당에 도착한 첫 의료 응급 구호팀이 된 것 같았다. 비행기는 한 좌석도 빈 좌석이 없이 꽉 차있었다. 사실 의료 선교차 이곳을 방문하는 길이었지만 응급 상황이 발생하여 응급 의료 구호팀으로 변신을 하게 된 것이다.
10월1일 첫 방문한 곳은 국군병원(소디 위르요병원)이었다. 차량을 빌려준 호텔 주인이 자기의 직원이 호텔이 무너지면서 중상을 입고 국군 병원 응급실에 있는데 그 환자를 보아달라고 해서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이곳은 시내의 응급 환자가 다 몰려오는데 군의관들이 경험이 없어서인지 이 환자들을 처치를 못하고 복도에 즐비하게 뉘여 놓고 있었다. 차량을 빌려준 분의 직원을 보고 그렇게 중상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진통제와 약을 투약해 주었다. 그 후 응급실로 가서 병원장을 만나서 한국에서 온 외과의사라고 나를 소개하고 도움을 주고 싶다고 하니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터이라 도와 달라고 한다. 외상 환자들이 주된 환자이므로 창상을 봉합해 주고 골절이 의심되는 환자는 기부스를 해 주었다. 전력 공급하는 곳이 지진으로 피해를 보게 되어서 전기와 전화등 모든 기능이 없는 상태였다. 나의 외상환자의 처리 능력을 병원장이 보고 자기들 군의관보다 월등한 것을 눈치채고 병원장이 중환자를 계속 진료하게 하니 약 3-4시간이 지나서 응급실이 정리가 되었다. 나는 국제 재난이 발생하였을 때에 여러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보다 수월하게 일도 처리하였고 외과적 술기등이 외과의사 30년의 세월 때문이라도 인도네시아 군의관들보다는 우월할 수 밖엔 없었다. 사실 후진국의 외과 기술력은 정말 뒤떨어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파키스탄 대지진때에 발라코트에서 파키스탄 군의관들과 진료를 한 경험이 있어서 이들의 외과적 기술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인도네시아 의사들의 외과적 술기 또한 많이 뒤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거의 응급 환자가 정리된 후에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청소를 하고 난리 법석이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모습을 보고 우리도 한때는 대통령이 오신다고 하면 저랬는데 하며 씁슬한 웃음을 지었다. 환자가족들이 나의 진료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 가족도 보아 달라고 한다. 입원실에 있는 환자라 조금은 조심스러웠다. 담당 군의관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약간의 담당 군의관과의 신경전도 벌이면서 도움을 줄 수 있는한 최대한 그들을 돕게 되었다. 지진으로 모든 호텔과 식당등이 다 부서진 상태라 머무를 곳을 정한 상태는 아니지만 병원을 떠나서 나오려는데 병원장이 나를 잡으며 이곳에서 계속 도와주기를 요청한다. 일행이 11명이라고 하니 조금 난색을 표하면서 그러면 지진의 진앙지에 가서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 그곳에는 의사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그곳은 일월에 의료 선교차 왔다가 진료 중 쫓겨났던 곳이었다. 파리아만이라는 지역인데 외국인에게 아주 배타적인 장소였다. 그래서 병원장의 소개장을 부탁해서 받고 내일부터 그곳에서 진료하기로 하고 시내에 숙소를 찾아 나서야 되었다. 다행히 먼저 나갔던 일행이 호텔을 하나 찾았고 거주 하게 되었다. 경찰이 운영하는 호텔이었는데 자가발전으로 전기도 들어오고 지하수도 공급이 되어서 샤워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진으로 전기와 수도 공급이 끊어지고 통신마저 되지를 않아 여간 활동이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건물의 붕괴등으로 식사할 식당이 없어 한국에서 가져간 밑반찬은 있는데 밥을 구할 수가 없는 차에 메단에서 어제 못 들어 온 선교사님이 먹을 양식을 가지고 올 수 있게 되어서 우리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온 기자들과 방송팀들 그리고 여러 NGO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매일 아침 7시에 숙소를 출발 하여 2시간을 차로 달려가서 지진 피해 지역의 외상환자들과 일반 환자들을 저녁까지 진료하고 숙소로 돌아오곤 했다. 지진이 발생하니 주유소에 기름을 넣기 위해서 차, 오토바이와 기름통을 든 많은 사람이 주유소에 몰려서 인산인해를 이루는 통에 길이 막히고 기름도 한사람에게 10리터만(50,000루피아) 판다고 한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차는 밤에 줄을 서서 네 번에 걸쳐서 기름을 주유해야 하루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하루는 경찰이 도움을 주어서 기름을 가득 채워서 쓸 수 있기도 했다.
큰지진이 발생하면 집이 완파된 분들이나 조금 무너진 분들도 집 속에서 주거가 불가능하고 밖에서 텐트 생활을 해야 된다.후속으로 일어나는 여진 때문에 다시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10월2일은 국군 야전병원을 보건 소장으로부터 소개를 받고 갔더니 그곳에서 같이 환자를 처음에는 보자고 하더니 얼마가 지난 후에 의무사령관(소장)이 나타나서 곧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더 큰 피해지역으로 소개 하며 캄붕달람이라는 면에 소재한 보건소(붕어 딴중 지역)에서 진료하도록 소개를 받고 한명의 군의관이 대동하게 되었다. 보건소 건물도 곧 무너질 것같이 금이 많이 가 있었고 보건소 앞에 있는 군인 텐트 속에서 진료를 하게 되었다. 텐트속의 대낮의 상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더워서 견디기가 힘들었지만 밀려 드는 환자 때문에 잘 견디면서 진료를 하였다. 오후 늦게까지 진료하고 있는데 이곳의 보건 국장이 방문하고 내일부터는 자기와 상의하여 진료하자고 한다. 그런데 이들과 업무상의는 오전을 넘길정도의 긴 시간을 보내야 되어서 내일부터는 그냥 진료하기로 하고 추후 통보하기로 하였다. 진료가 마칠쯤에 이곳의 통장이 이곳에서 15킬로 더 들어가면 더 큰 피해를 입은 곳이 있으니 내일은 그곳에서 진료를 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래서 내일의 진료를 약속하고 저녁 늦게 귀가를 했다. 돌아오는 길은 교통이 막혀서 2시간 걸리는 길이 4시간이 걸려서 와야 되었고 비가 심하게 와서 난민들의 생활이 걱정이 되었다.
열대지방의 사람들은 더위는 잘 견디는데 조금이라도 추우면 감기에 걸리기 쉬워서인지 유난히 감기 몸살 환자가 많았고 수돗물 공급이 안 되는 관계로 피부병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았다. 지진으로 정신적 안정을 못 찾아 잠을 못 잔다고 호소하는 환자도 눈에 띄게 많았으나 신경 안정제를 가지고 간 것이 많지 않아서 모두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여 안타까웠다. 위장병의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도 많았다.
10월3일(꼬롱 바숭지역) 오전 7시에 출발을 해서 2시간을 달려가 어제 진료한 곳에서 약15키로 더 들어 갔더니 집들은 더 많이 주저 앉아 있었고 가는 도로도 많이 망가져 있었다. 한 집 앞에 진료를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키고 여러 외상환자들이 일차 치료가 안되어서 거즈로 덮어만 놓은 상태라 한사람 한사람 이차 봉합술을 시행 하였다.그러던 중에 중환자가 한분 차에 살려왔다. 자세히 진찰을 하니 우측 대퇴골 골절과 좌측 골반뼈의 골절이 의심되는 환자였고 우측 상지는 콜레스씨 골절이 의심 되는 환자였다. 어제까지 기부스를 할 수 있는 재료를 다써서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었고 나무로 부목을 만들어서 고정한 후에 종합병원으로 후송을 하게 되었다.큰 병원에 후송을 하겠다고 하니 가족들이 돈이 없어서 갈 수가 없다고 한다.그래서 이런 상황에서는 무료로 국가에서 치료를 해줄 것이다라고 설득을 한후 후송 차량으로 후송하였다.
10월4일에는(솔록,빠당반장) 일요일이라 교회에서 예배를 현지 동역자들과 함께 드리고 원래 의료선교를 가도록 되어있던 곳에 길이 열렸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진료 하기로 하였다.2시간여를 차량으로 이동하는데 산길에 산사태가 험하게 나서 길을 막고 있었는데 그것이 응급으로 복구가 된 상태를 알수 있었다. 이곳은 빠당반장의 솔록 지역인데 이번이 세 번째의 방문이라 서로 얼굴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 한다. 진료소를 만들고 환자를 진료하는 중에 지난번에 이곳에서 기도해 주면서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서 인지, 기도를 받겠다고 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진료와 기도사역을 같이 감당하였다.
미리 준비를 시키지 않아서 일터에 일을 하러 많은 분들이 나가서 그렇게 많은 환자를 보지는 않았지만 구면의 환자들이 반갑게 맞아 주고 반기고 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10월5일은(시꾸쭈루 지역) 빠리아만 지역의 캄풍달람 면에서 두 번을 일한 곳보다 더 깊숙이 들어가서 일해 줄 것을 요청받아서 그곳을 가기로 하고 출발 하였다.한국에서 들어온 선교구호단체들이 구호물품을 우리가 진료 하는 곳에서 주겠다고도 하고 취재진들도 오늘은 함께 하며 취재하기로 하여 동행하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지진으로 인한 도로의 피해 전기가 끊어진 것과 수도의 단수가 있고 천막 생활의 후유증으로 감기 몸살 환자 늘어 나고 피부병 환자도 늘어 나서 두 질환을 위해서 준비한 약들이 빨리 동이 나기 시작하였다. 모든 환자에게 회충약과 비타민을 줄 수 있었던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이것을 위해서 바이넥스 제약회사와 유한 양행과 대원제약에서 약품을 제공하여 주신 것을 감사한다.
6일은(딴중바숭지역) 저녁에 한국으로 떠나는 날인데 오전에만 파당 시내에서 진료를 하기로 하였다.30분정도 차로 이동하여 니아스 종족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 곳의 교회 앞에서 진료를 하였으며 외상 환자와 감기, 피부병 환자들을 진료해 주었다. 오후에 호텔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떠날 준비를 마치고 쓰던 호텔방들은 한국의 구호팀들에게 인계해 주고 복구와 더불어 문을 일찍 연 피자핫에서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일주일간의 응급의료구호 기간이었다. 심신은 피곤하였고 힘들었지만 의사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에서 지내야 될 환자분들 1195명을 도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종료 하게 되었으며 응급상황은 일주일이 지나면 대부분 종료 되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의 의료 구호 뒤를 이어서 한국의 구호 NGO 들이 들어 와서 우리가 도왔던 곳에 쌀과 텐트를 공급하여 주는 후속 조치를 취해 주어서 너무나 감사했다. 선진화된 한국의 외과 기술을 가지고 응급상황이 발생한 인도네시아의 파당과 파리아만에서 도움을 주고 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현지 사역을 위해서 함께 일한 GP 선교회의 세분의 선교사님들과 현지 목회자들에게 감사함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