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군 여행] 百年存社計(백년존사계) 충효당(忠孝堂)...........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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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百年存社計(백년존사계) 충효당(忠孝堂)...........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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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미담(美談)이라고 해야 할지 아님 우국충정(憂國衷情)이라고 해야 할지를 생각 하면서 고즈넉한 야산 밑
목조기와 정자엔 대월국(大越國·베트남) 왕조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곳이 있다기에 유랑자가 찾았다. 예부터 우
리는 단일민족 공동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귀화인들도 많이 섞인 다민족 국가가 된지 이미 오래전이다.
귄화인들은 대개의 경우 중국계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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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단일민족 속에는 다른 민족도 있으니 이를 어쩌랴 한나라 무제의 신하였다가 신라로 망명한 경주김씨
의 원조 김일제(金日磾)의 후손은 흉노족이며, 김해김씨의 시조 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인이며,
원나라 제국대장공주를 따라온 덕수장씨 시조 장순룡(張舜龍)은 위구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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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은 국내 유일의 리 왕조 관련 유적이다. 화산 이씨는 2015년 기준 1237명이고, 봉화군에 14명이 살고 있으며 북한에 정착한
만큼 북한땅에 많이 살고있을 것으로 추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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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忠孝堂)의 주인공 리 왕조의 후손은 베트남 최초로 중국 책봉에서 벗어난 정권이다. 수도가 탕롱(현 하노이)으로 유교 문화가
융성했다. 현대 베트남 국부가 호찌민이라면 리 왕조는 독립의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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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인가 청해이씨(靑海李氏) 시조이자 조선 개국공신인 이지란(李之蘭)은 여진족, 사성(賜姓) 김해김씨(金海金
氏)의 시조로 임란 때 가등청정의 부장(副將)으로 따라온 김충선(金忠善)은 일본인, 안남국(安南國)을 최초로 통
일한 리씨 왕조의 8대 왕 혜종의 숙부 화산이씨의 시조 이용상(李龍祥)은 베트남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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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용상은 리씨(李氏)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 집권한 진씨(陳氏) 왕조의 무자비한 멸문지화(滅門之禍)의
보복을 피해 1226년(고종 13) 보드피풀 배를 타고 남지나해와 서해를 거쳐 망명한 곳이 한반도 황해도 옹진반
도이다. 오늘은 이 이용상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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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상은 리 왕조 말기의 왕자다. 6대 영종의 7남이자 8대 혜종의 삼촌이다. 1225년 외척(陳 왕조)이 정변을 일으켜 멸족에 나서자
배로 도주해 이듬해 황해도 옹진군 화산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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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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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고려 고종은 이를 측은히 여겨, 그에게 그 지역의 땅을 주었으며, 그를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고 정착을 도왔으며, 원나라
침입 때 지역 주민들과 함께, 몽고군과 싸워 전과를 올렸으며, 이후 그의 후손들이 이용상을 시조로 받들어, 본관을 화산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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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들어선 충효당(忠孝堂).당도한다, 충효당 주변은 토석 담으로
둘러쳐져 있어 밑에서 보기엔 팔작지붕만 보일 뿐이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 문을 들어서니 화산 이씨(花山李氏)
13대손 이장발(李長發·1574-92년)의 충절을 기리는 정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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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발의 선조 이용상은 1253년(고종 40) 몽고군이 침입하자 고을의 현령이 찾아가서 지원을 요청하자 “내 비
록 재주가 용렬하나 적을 무찌르고 백성을 위기에서 구하는 일을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하면서 성을 쌓고 진
압에 나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고종은 그를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식읍(공신들에게 내려 주어 조세를 받
아쓰게 하는 마을) 2,000호를 하사하게 되는데 바로 화산이씨 시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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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 일청(一淸)이 안동부사로 부임한 후론 봉화가 집성촌을 이뤘다. 일청의 12대손 장발의 충효당이 봉화에 세워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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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忠孝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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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이용상이 고려에 귀화한 불과 27년 후로 이민족으로는 매우 이른 시기에 고려사회의 상류층으로 편입되
었다. 두 아들 중 맏이 간(幹)은 도첨의 좌정승과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둘째 일청(一淸)은 안동부사를 역임하
고 안동 내곡 토곡리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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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시조의 5세 손 해은(海隱) 전객서령 유(裕, 초명, 德裕)와 아들 천은(川隱) 호조전서, 맹운(孟芸) 부자가 가
문을 크게 빛내니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반대하며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두문동에 은거한 구홍(具鴻),
채귀하(蔡貴河) 등과 함께 소위 “두문동 72현”이며 두문동서원 표절실 항절반에 부자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다만 본관을 화산 대신 옹진(甕津)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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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맹운은 정몽주, 이색, 길재, 이은복, 최해 등과 더불어 고려 십은(十隱)으로도 불린다. 부자가 새로 탄생한
조선왕조에 협조하였다면 권력과 부를 대대로 누릴 수 있었을 것이나 그렇지 않았던 것은 진씨에 의해 나라를
빼앗겨 이역만리로 명망의 길에 올랐던 선조 이용상의 한이 수대가 지나도 몸속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
었을까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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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은 화산 이씨 문중이 18세기에 세웠다. 차남 일청(一淸)이 안동부사로 부임한 후론 봉화가 집성촌을 이
루었다. 일청의 12대손 장발의 충효당이 봉화에 세워진 이유다. 이장발은 어려서부터 재질과 의지가 굳어 배움
에 부지런했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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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절시(殉節詩)
百年存社稷(백년존사직)백년 사직을 구할 계획을 가지고
六月着戎衣(유월착융의)유월에 갑옷을 입었네
憂國身空死(우국신공사)나라를 위한 근심에 몸은 비록 헛되이 죽고 말지만
思親魂獨歸(사친혼독귀)홀로 계신 어머니 못 잊어 혼백만 외로이 돌아가네
1592년 6월 10일 문경새재 전투에서 이장발(李長發)이 죽기 직전에 충과 효의 애절한 마음을 을 담아 읊었다는 순절시(殉節詩)로,
후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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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 마당과 뒤엔 은행나무나. 회화나무가 아닌 감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감나무는 뿌리가 가장 깊이 내리고, 감은 제사상에 반드
시 올리는 과실이며, 오래되면 심재(心材)는 검어 먹감나무라고도 한다. 제사를 지낼 때 감이나 곶감을 올리는 것은 감나무 뿌리처럼 대
를 이어 후손을 잘 보전하겠으며 자식을 건사하기 위해 속을 태워 검어진 어버이에게 감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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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모슬하에서 자라던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부분 관리(사대부)가 도망처버린 전장으로 열아홉의
나이에 모친의 허락을 받고 전장으로 달려가 문경새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안타깝게도 그해 6월 10
일 전사했다. 조정에서는 순국한 이장발에게 공조참의의 직위를 내렸으며, 출생지인 봉성면 창평리에 후손과 유
림들에 의해 ‘충효당 화산 이공 유허비’를 세우고 충효각을 건립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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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샛문을 열고 들어서니 건물 네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있다. 문경 전투에서 그가 죽기 직전에 충과 효의 마
음을 담아 읊었다는. 이름하야 이용상의 13대 후손인 이장발의 순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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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비각(忠孝碑閣)
충효당화산이공유허비(忠孝堂花山李公遺墟碑)나라에서 이장발의 순국의 공을 기려 공조참의직을 추증하고 유허비를 세워 길이
후세에 남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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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年存社稷(백년존사직)백년 사직을 구할 계획을 가지고/.六月着戎衣(유월착융의)유월에 갑옷을 입었네/.憂國
身空死(우국신공사)나라를 위한 근심에 몸은 비록 헛되이 죽고 말지만/.思親魂獨歸(사친혼독귀)홀로 계신 어머
니 못 잊어 혼백만 외로이 돌아가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좌도의병장 서기였던 이장발이 쓴 순절시는 절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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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 건물 외관은 영락없는 조선조 건물이다. 하지만 대청의 목조 벽면에 연꽃 문양을 새겼다. 연꽃은 베트남
정신·문화의 상징으로 현재 국화다. 유허비에는 화산 이씨 시조 이용상(李龍祥·리롱뜨엉)의 이름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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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련으로 순절시를 다시한번 더 볼수있다.
百年存社稷(백년존사직)백년 사직을 구할 계획을 가지고
六月着戎衣(유월착융의)유월에 갑옷을 입었네
憂國身空死(우국신공사)나라를 위한 근심에 몸은 비록 헛되이 죽고 말지만
思親魂獨歸(사친혼독귀)홀로 계신 어머니 못 잊어 혼백만 외로이 돌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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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화산이씨종친회가 망명 770년 만에 고국 베트남을 찾았더니 도 무오이 당 서기장을 비롯한 3부의 요인이 모두 나와 환대하
며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왕손에 대한 예우다. 지난해는 주한 베트남 대사가 충효당을 찾았고, 봉화에는 베트남 취재진의
발길도 끊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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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나물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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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000㎞ 거리와 1000년 세월을 헤쳐온 베트남과의 인연은 유랑자가 이렇게 극적으로 만나 보았다. 지금 현
재 베트남엔 진가 때 전조인 이가의 지배층을 몰살했기 때문에 이가의 후손은 정작 현지 베트남에는 남지 않고
한국에만 남아있다고 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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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몇번의 베트남 여행에서 익히 들어 보았던 리 왕조!. 그 무너진 리왕조의 궁 유적지들을 돌아 보면서 귀
에 익은 왕조다. 그런데 이렇게 내나라 내땅에 그 후손들이 살이 있을 줄이야 유랑자도 미처 몰랐었다. 그러고
보면 베트남과의 우리나라와의 인연은 참으로 깊고도 깊은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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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오늘날 우리나라엔 많은 베트남인이 와 살고들 있다. 그들에게는 이 충효당은 자긍심이 될 것이고 한편
으로 우리에게는 베트남문화를 배우는 의미 있는 공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베트남
최초 독립왕조인 리황조의 이야기와, 이장발(李長發)의 구국 충절을 살필 수 있는 곳으로, 경북 봉화의 재사(齋
舍), 충효당(忠孝堂)을 유랑자가 소개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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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통계청의 ‘성씨 및 본관 집계 결과’(2015년기준)에 따르면 한국에 존재하는 성씨는 모두 5.582개다. 귀화성씨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나라는 뜻밖에 필리핀계다. 궐랑로즈, 글로리아 알퀘아포스 등 국제결혼 등으로 귀화한 여성들의 성씨가 대부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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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에는 1750년( 영조 26) 건립한 화산이씨 유적으로는 남한에서 유일한 이장발(李長發)을 기리는 충효당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466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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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s://cafe.daum.net/b2345/9toB/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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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북 봉화군 봉성면 창평본마길 21
(지번)봉성면 창평리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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