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장흥 사람,광산 김씨, 군수 '金漢一' 묘갈명
장흥 향토사에 그 흔적은 있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이 있다.
바로 광산 김씨 도사공파, '김극통, 김한일' 집안이다.
김한일(金漢一) 집안 족보는 <장흥향교 사마제명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집안 족보 내용에 터잡아 실은 기록들이 꽤 있다.
그 광산 김씨는 '김극통 --김익귀 - 김한일--김상면'으로 이어진다.
장흥 향촌 사회의 당시 발언권이 짐작되는 가문 내력이다.
김한일의 증조부, 우재 김극통(1484~1553)
그 어머니는 장흥 위씨, 참봉 종복(宗復)의 딸이다.
장흥 용산 포곡에 그를 기리는 사당, '포산재'도 있다.
생전에 南州의 높은 선비로 추앙을 받았다한다.
기묘명현들과도 깊은 교류를 하였다한다.
저서로 <우재유고>가 있다한다.
김한일의 부친, 김익귀(金益貴)
사도첨사, 군수를 역임하였다.
김한일의 외조부, 창녕 조씨, 진사 조개세(曺蓋世)
그런데 曺蓋世의 사마시 입격 내역이 얼른 확인되지 않는다.
<장흥향교 사마제명록>에는 나온다.
김한일(金漢一,1589~1667),
<장흥읍지 정묘지>'부동방'편에 등장하고 있다.
1616년 무과 급제.
병자호란(남한산성) 세자 익위사 사어(世子 翊衛司 射御),
심양 배종신,
진도 군수 등 6곳 지방관 역임
김한일의 후손, 김상면(金相勉,1773~ )
<장흥읍지 병오지>에 그 이름이 나온다.
1822년 임오 식년시 을과 3위로 50세 문과 급제. '거주지 장흥'.
1830년7월~1832년6월 김천 찰방
존재 위백규(1729~1798)는 '광산 김씨 金漢一'의 불우한 일생을 정리하고 있다.
"長興府 남포치(南蒲峙) 간좌(艮坐 남서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고 했다.
'용산 포곡'을 말한다.
그는 1636년 병자호란 남한산성에서 세자를 호위하였다.
패전후 1637년에 심양에 인질로 끌려가는 세자 일행을 배종하였다.
그때 배종신 일행으로 '장흥 사람 위천보', '강진 사람 오신남'이 있었다.
출중한 재주로도 그 포부를 펼치지 못한 그를 존재 위백규는 안타갑게 여기고 있다.
ㅡ군수 金公(金漢一) 묘갈명 병서.........존재 위백규
〔郡守 金公 墓碣銘 竝序〕
公은 휘가 한일(漢一)이고, 자가 적만(敵萬)이다.
계통이 신라 헌강왕(憲康王)의 아들 흥광(興光)에게서 나와
대대로 광주인(光州人)이 되었으며 이름난 공경(公卿)들이 계속 이어졌다.
요동백(遼東伯) 석견(石堅)의 아들 호(瑚)에 이르러
영조 임자년(1732, 영조8) 문과에 급제했고, 관직이 군수에 이르렀다.
이분이 참군(參軍) 자용(自庸)을 낳고, 참군 자용이 부장(部將) 적(籍)을 낳았다.
部將 적(籍)이 진사 극통(克通)을 낳았는데, 이분이 바로 公의 증조이다.
할아버지의 휘는 세요(世饒)이고 참봉을 지냈으며,
아버지의 휘는 익귀(益貴)이고 군수를 지냈다.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 曺氏)로, 진사 조개세(曺蓋世)의 딸이다.
만력 기축년(1589, 선조22) 1월 10일에 公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의젓했고, 성장해서는 모습이 크고 듬직하며 기량과 식견이 원대하고
문한(文翰)에 있어서는 붓이 나는 듯이 써서 보는 사람 모두 크게 성취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弱冠의 나이에 이웃 사람이 별사(別榭)를 짓는 공사를 보았는데
한창 도르래〔轆轤〕로 대들보를 올리던 중 줄과 지지대가 중간에서 끊어지자마자
公이 즉시 몽둥이로 대들보를 지탱하니 들보가 들려 줄이 느슨해졌다.
사람들이 그제야 뛰어난 힘에 감복하고 무과(武科)에 응시할 것을 권하였다.
만력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승의부위(承義副尉)로 을과(乙科) 제6인에 올랐다.
그 후 무진년(1628, 인조6)에 이르러 품계와 관직, 이력이 난리에 – 원문 빠짐 -
기사년(1629) 3월 春信使 軍官의 공로로 도총부 도사(都摠府 都事)에 제수되었고,
임신년(1632)에 외직으로 나아가 적성(積城) 현감으로 재직하고,
을해년(1635)에 들어와 무신 겸 선전관(武臣 兼 宣傳官)이 되었다.
병자년(1636)에 군직(軍職)으로 南漢山城에 호종하고,
정축년(1637) 1월 세자익위사 사어(世子 翊衛司 司禦)에 제수되고,
2월에 익위(翊衛)에 올라 東宮을 모시고 심양(瀋陽)에 들어갔다.
고국으로 되돌아와 품계가 올라 도총부 경력(都摠府 經歷)에 제수되었다가
곧 정의 현감(旌義 縣監)에 임명되었다.
임오년(1642)에 흥양(興陽)으로 부임지가 옮겨졌다가
갑신년(1644)에 군직(軍職)으로 체직되어 돌아왔다.
을유년(1645)에 신천 군수(信川 郡守)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벌어진 상황이 그의 마음과 어긋난 것을 보고
강개한 마음으로 벼슬길을 즐겁게 여기지 않았다.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굳게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고향 집으로 아주 돌아와 사람들과의 교유 관계를 사절하였다.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 10월 임금이 宣傳官으로 특별히 조정에 불러 달려갔다가
곧 珍島 郡守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탄핵을 당하여 고향 집으로 돌아와 지냈다.
정미년(1667, 현종8) 7월 10일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9세였다.
장흥부(長興府) 남포치(南蒲峙) 간좌(艮坐 남서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평해 오씨(平海 吳氏)로, 군수를 지낸 오응남(吳應男)의 딸이다.
두번째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 李氏)로, 이기생(李基生)의 딸이다.
아들 여하(汝河),여해(汝海),여호(汝浩) 삼형제를 낳았는데
둘째와 막내 모두 武科에 합격하였다.
公의 모습은 듬직하고 고왔으며 응대(應對)는 분명하고 민첩하였으며,
글씨가 힘차고 정묘(精妙)하였다.
인묘(仁廟 仁祖)의 돌보심이 매우 특별하였다.
항상 여름날이면 모시고 글씨를 쓰는데 옷을 적실 정도로 땀이 났다.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직번(直番)을 담당하는 사람이 어찌 金漢一 한 명뿐이냐.
비변사 낭청은 어찌 번갈아 번을 들지 않느냐.”라고 하고
곧이어 수정으로 만든 갓끈을 하사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南漢山城 행재소에서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성가퀴를 순찰할 적에는 항상 특지(特旨)를 받들었다.
일찍이 임금이 차고 있던 銀粧刀를 풀어 주며 이르기를
“어려운 상황에서 네 재능을 시험하리라.”라고 한 적이 있었다.
公이 신천 군수(信川 郡守)를 그만두고 고향 집에서 지낼 적에
어떤 재상가의 차노(差奴)가 農所에서 폐해를 일으켜 公이 몽둥이로 죄를 다스리자,
그 사내종이 돌아가 무고(誣告)하며 한없이 비방한 일이 있었다.
재상가에서 유감을 품어 이로부터 비방하는 말이 조정에 가득하니,
전조(銓曹)의 의망(擬望)이 마침내 끊어졌다.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 5월 효묘(孝廟)가 즉위하고 나서
춘추대의(春秋大義)에 뜻이 있어 무선(武選)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조정의 신하들에게 묻기를
“지난날 심양(瀋陽)에 들어갔던 익위 金漢一은 지금 무슨 관직에 있느냐?”라고 하니,
조정의 신하들이 散職으로 고향에 있다고 대답하자,
임금이 특별히 명을 내려 宣傳官으로서 대궐로 오게 하였다.
10월 소명(召命)을 받들어 입시하자
임금이 위유(慰諭)하기를 “오랫동안 보지 못하였는데 늙어 버려 애석하구료.
나는 그대가 청백(淸白)하다는 것을 알고 있소.
病과 가난을 어떻게 감내하고 있소?”라고 하였다.
8일이 지나자마자 珍島 - 원문 빠짐 - 즉시 제수하며 친히 불러 유시(諭示)하기를
“邑이 비록 작지만 心身을 보양하기에 괜찮으니, 가 있으면 장차 그대를 부르리라.”라고 하였다.
11월 6일에 하직 인사를 올렸다.
대신(臺臣)이 논계(論啓)하기를
“金漢一의 성품은 본래 거칠고 사나워 시골 고향에 살면서 패악한 일을 많이 자행했고
관리가 되어서는 포악한 일을 주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임했던 郡邑에서는 원망이 길에 가득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지방관의 직무를 주어서는 안 되니,
파직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택하소서.”라고 하자,
임금이 답하기를 “부임하지도 않은 수령을 경솔히 먼저 교체한다면 매우 타당하지 않으니
우선 그의 능력을 시험해 보아라.”라고 하였다.
18일에 또 논계하였지만 윤허하지 않았는데, 9일 동안 연이어 논계하니,
답하기를 “金漢一이 심양(瀋陽)에 들어가 있을 적부터 그 사람됨을 알고 있었다.
우선 부임하게 해서 그의 재능과 정성을 다하게 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25일에 또 아뢰기를 “金漢一은 본래 용렬한 데다 나이 또한 연로하고,
지방관은 직임이 막중하니 이런 자에게 功效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답하기를 “金漢一이 용렬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은 내가 직접 목격한 사실이다.
정신이 흐릴 정도로 늙은 나이가 아닌데
이런 자에게 功效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지나친 말인 듯하다.
근래에 武官을 대우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매우 부당하다.
金漢一을 우선은 부임케 하라.”라고 하였다.
26일 특지(特旨)를 전했는데,
그 내용에 “그대의 타고난 충성과 근면은 내가 잘 알고 있지만
대신(臺臣)이 여러 번 논계하니 실로 거부하기가 어렵구료.
특명으로 그대를 보내니 그대는 내 뜻을 잘 유념하여
軍民을 어루만져 보살피고 곤궁한 백성을 은혜로써 잘 돌보시오.
해상 방어는 중요한 직임이니, 더욱 일에 유념하도록 하오.”라고 하였다.
진도 군수(珍島 郡守) 金漢一에게 특지를 전달하니,
公이 명을 받들며 떨리고 두려워 이날로 급히 말을 타고 부임지로 떠났다.
다음 해 2월에 진상한 소라〔海螺〕가 부패했다는 이유로
대사(臺司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파직되었는데,
필마(匹馬)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말하기를
“내가 가벼운 죄로 파직당한 것이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교외에 별서(別墅)를 짓고 날마다 친구들과 술자리를 마련하고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문 앞에 홰나무를 빙 둘러 심어,
매 여름마다 거문고로 바람 소리를 곡조로 담고 노래에 화답하거나 춤을 추도록 하였는데
이로 인해 금정(琴亭)이라고 自號하였다.
담담하게 스스로 세상사를 잊고 들판의 노인네와 자리를 다툴 정도로 친숙해져
거의 20여 년 동안 한가로이 지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아, 公과 같은 분은 참으로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將帥이고 온전한 인재라고 말할 만하다.
재주를 펼칠 시기에 태어났건만 이미 세상에 크게 펼치지 못하고,
珍島 郡守로 심신을 보양하다가 임금의 돌보심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으니,
어찌 시운(時運)에 관계된 것이 아니겠는가.
公이 심양(瀋陽)에 갈 적에 사내종에게 생부추 한 짐을 짊어지고 가게 하였다.
異域 땅에서 체류하는 중에 대소 관리들이 모두 풍토병에 걸렸지만
이 부추의 도움으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곤경에 빠진 상황에서도 치밀한 생각을 해내기란 보통 사람은 생각할 수 있는 바가 아닌데,
대처하기 어려운 좀 더 큰 상황에서 재능을 펼치지 못함이 애석하다.
사람들은 公의 작은 성취만을 보니, 뜻이 있는 사람은 公을 위해 개탄할 뿐만이 아니다.
이에 당연히 명(銘)을 지으니,
銘은 다음과 같다.
굳세고 굳센 재주에 / 桓桓其幹
엄숙하고 엄숙한 衷心 / 肅肅其衷
호랑이처럼 힘이 세고 / 有力如虎
활을 쏘면 命中하였지 / 射則命中
公께서 태어나실 적에 / 維公之生
아 그리도 반듯했는데 / 侯其韙而
武官이 되었으니 / 載武其弁
어찌 時運이 아니겠는가 / 豈曰匪時
임금께서 南漢山城 계실 때 / 王在漢山
보배로운 칼 내려 주셨으니 / 錫汝寶刀
하사한 이 칼이야말로 / 維是刀賜
공로를 세우게 함이었지 / 將選爾勞
桂坊 익위사 익위로 선발되어 / 遴長桂坊
그 누구도 짝할 수 없었으니 / 衆莫敢儷
까마득한 요동 遼海에서 / 遼海茫茫
鶴駕 왕세자를 호위하면서 / 鶴駕是衛
임금의 치욕에 목숨을 바치리라 / 主辱矢死
눈 내린 天山에서 눈물 떨구었네 / 淚雪天山
先王께서 즉위하여 말씀하시길 / 寧考撫運
심양(瀋陽) 시절의 그대를 기억하노라 / 記汝于艱
海邑 진도가 두터운 은전은 아니지만 / 海邑匪腆
그럭저럭 몸을 보양할 만하리 / 聊以糓汝
臺諫의 탄핵이 무척 심하지만 / 臺言孔將
내 그대를 잘 아니 / 予自汝識
그대는 가서 공흠하거라 / 汝往欽哉
가 있으면 그대를 부르리라 하셨지 / 行且召汝
公이 머리를 조아리며 / 公拜稽首
밤낮 황송한 마음으로 지냈는데 / 夙夜隕掉
참소하는 자의 비방 끝없으니 / 讒人罔極
결국 公이 죄를 받게 되었네 / 訌我獲戾
鄕山 고향으로 아예 돌아왔지만 / 大歸鄕山
美人 임금은 天際 하늘가에 계셨으니 / 美人天際
곱디 고운 美人 임금이여 / 美人娟娟
내 생각에 한가롭지 않구려 / 思我不閒
거문고 소리로 님을 감동시키려 하지만 / 琴嗚感君
古槐 홰나무에 부는 바람이 차갑다오 / 古槐風寒
씩씩했던 魂魄을 거두어 / 斂其壯魄
이 무덤玄堂에 묻어 두고 / 閉此玄堂
묘지명 銘章을 쓰나니 / 敍爲銘章
비석이 오랠수록 더욱 빛나리라 / 石遠彌光
[어려운 …… 시험하리라 : 원문의 ‘반근(盤根)’은 반근착절(盤根錯節)의 줄임말이다. 서린 뿌리와 얼크러진 마디라는 뜻으로,
일이 복잡해서 처치하기 곤란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권88 〈우후열전(虞詡列傳)〉에
반근착절을 만나지 않으면 잘 드는 연장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말이 나온다.
[들판의 …… 친숙해져 : 춘추 시대 양자거(陽子居)란 사람이 일찍이 여관에 묵을 적에 처음에는 그가 예모를 엄격히 차린 까닭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대접했다. 후에 그가 老子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 소탈한 태도를 보인 이후로는
모두들 그와 더불어 좋은 좌석을 서로 다툴 정도로 친숙해졌다.
전하여 꾸밈없이 순박한 태도로 서민들과 잘 어울리는 것을 의미한다. 《莊子 寓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