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성흥산(가림성)
2024년 05월 19일(일요일)
산행코스 : 임천면사무소(08:25) - 가리성길 - 성흥산성(사랑나무) (09:05) - 성흥산(09:20) - 호리동길 - 임천면사무소(09:50)
산행거리 : 3.55km
임천면사무소
공덕비
묵은 이색 선생 영당
1960년 흥산 북촌리에 영당을 세우고 춘추봉향을 해오던 중에 흥산 관아터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2010년 5월에 이곳 임천 군사리 성흥산 아래의 길지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묵은선생영당
임천면사무소 0.2km, 솔바람길 1.1km, 성흥사
대조사 갈림길
대조사 0.3km, 임천면사무소 0.7km, 각시바위 50m, 성흥산성 1.1km
우측 대조사, 좌측은 성흥산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충혼사(忠魂柌)
충혼사는 백제 부흥 운동 당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백제의 이름 없는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입니다. 매월 4월 이곳에서 충혼제를 열어 그들의 넔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암벽사이의 돌계단을 올라갑니다.
계단을 올라선 후에 바라본 풍광
성흥산 사랑나무가 보입니다.
조망터에서 바라본 서천군 방향 파노라마
성흥산성
성흥산(286m) 정상부에 쌓은 석성입니다. 둘레 약 1500m, 성곽 높이 3~4m에 이릅니다. 성안에서 우물터, 군창으로 추정되는 건물 터, 초석과 남문 터 등이 확인됐습니다. 현재까지 이어진 꾸준한 발굴 조사를 통해 백제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유물을 발견했습니다.
돌계단을 올라갑니다.
가림성(성흥산성) (사적 제 4호)
성흥산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방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산성입니다. 성이 위치한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인근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방비용 성으로서의 그 입지가 상당히 훌륭하였으며 백제 동성왕 23년(501년)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해집니다. 가림성은 백제의 성 가운데 기록에 의해 축조 연대가 전해지는 유일한 성이고 부여군의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이기도 합니다.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4호 부여 성흥산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07월 28일 부여 가림성으로 명칭이 변경 고시되었습니다. 아울러 성흥산성은 깊은 역사도 있지만 인생샷 명소로도 유명한 부여여행지입니다.
가림성 느티나무(천연기념물)
부여 가림성 느티나무는 금강 하구인 논산, 강경, 서천, 익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가림성 정상부에 있습니다. 나이는 400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22m, 가슴높이 둘레는 5.4m에 이른니다. 거센 바람으로 인해 땅 위에 판 모양으로 노출된 독특한 뿌리 모양과 주변 환경과 어우러진 나무 모양이 일품입니다.
백제시대 군사적 요충지인 가람성 남문에 위치하고 있어요. 가지가 하트처럼 보여서 일명 사랑나무라고 불리며 가림성의 랜드마트이고 '부여의 핫플'이기에 충분해 보였습니다.
주변 환경과 어우러진 나무 모양은 일품이며 역사성과 경관. 심미성이 뛰어나 2021년 8월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성흥산 정상에서 바라본 논산 방향 파노라마
성흥산 정상으로 올라갑니다.
임천 유태사 묘 (林川 庾太師 廟) (부영 향토문화유산)
유태사 묘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고려 개국공신인 유금필 장군을 향사하는 사우입니다.
부여 가림성 내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유금필 장군은 후백제를 정벌하고 태조를 만나러 가는 도중 패잔병의 노략과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는 임천 지역 백성들을 구흘 하였습니다. 서기 941년 장군이 죽은 뒤 백성들이 그 공덕을 기리고자 장군당이라는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올려 왔습니다. 1976년에 장군의 후손들이 부여군의 보조로 옛 장군당을 헐고 바로 옆에 새로 사당을 지었습니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며, "태사유공지묘"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제사는 매년 음력 3월 18일에 지냅니다.
태사유공지묘(太師庾公之廟)
유적지비
유금필은 고려 전기의 무장으로 태조를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운 개국공신입니다. 평산 유 씨 시조. 그는 925년에 연산진과 임존군을 공격하여 후백제의 장군 길환과 군사 3천여 명을 전사시키는 큰 공을 세우며 본격적으로 장수로서 이름을 떨친 사람입니다.
태사 충절공 유금필 장군 유적지 지비(太師 忠節公 庾黔弼 將軍 遺蹟地 之碑)
누각 성흥루
성흥루(聖興樓) 편액
충남 부여 출신인 전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글씨입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성흥산 정상입니다.
정상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고 산불감시초소와 삼각점이 있습니다.
성흥산 삼각점
호리동길, 한고개 갈림길
성곽길, 한고개 1.1km
무너진 성곽
임천면행정복지센터 1.0km, 임천면행정복지센터 1.1km, 성흥산 0.4km
임천면행정복지센터 0.6km, 성흥산 0.8km
호리동계곡 갈림길
성흥산성 서문, 호리동계곡, 소광장
산림욕장 대나무숲
대나무숲길
임천면행정복지센터 0.3km, 성흥산 1.1km
관아터 소나무
수령 : 320년, 수고 : 4m, 나무둘레 2m
임천군 관아 형방청
임천군 관아의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임천초등학교에 객사가 들어선 시기인 1704년(숙종30) 이전에 관아가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시대 관아 건물은 일제강점기 행정개편으로 객사는 주로 초등학교로, 동헌과 내야 등 부속건물은 행정복지센터 등 관청건물로 사용하면서 사라진 경우가 많습니다. 임천군 관아 건물은 마지막 형방청이 1980년대까지 임천경찰서로 사용되어 오다가 허물어지면서 그 흔적을 찾기 어렵워졌습니다.
조선시대 중요한 역할을 한 임천군 관아를 되살려 문화유산의 가치를 회복하고 보존하고자 옛 문헌자료 및 사진을 기초로 형방청을 건립하였습니다.
일방적으로 형방청은 민, 형사 재판과 죄인을 다루는 업무를 담당했던 곳으로 2019년부터 계획 수립과 발굴조사를 거쳐 2021년 재현하였습니다.
가림추청(嘉林秋廳) 편액
임천면사무소
정림사지
정림사지(사적 제301호)
부여 정림사지는 백제 사찰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중심 사찰 터입니다.
이 절터는 주요 건물인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을 건축하고 주위에 회랑을 구획한 형태로 주요 건물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건물의 기단은 기와를 사용하여 축조한 와적기단으로 이 역시 백제의 독특한 건물 축조 방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대 일본의 사찰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정림사지 박물관
부여임천대교비(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111호)
이 비석은 부여 임천군의 마을 진입로 확, 포장공사 과정에서 발견되었으며, 보존과 관리를 위해 2010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2단으로 된 비문은 조선시대 임천에서 서천군 한산으로 이어지던 대로(大路)의 하천에 놓였던 다리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비문의 윗부분에는 다리의 건립 경위와 과정, 건립 연대 등을 적었고, 아랫부분에는 다리 건설에 참여된 명단을 기록했습니다.
동서장군석
명혜공주 태실비(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113호)
건립연대: 조선 현종 11년(1670), 전체높이: 216cm
명혜공주(明惠公主: ?~1673)는 조선 제18대 현종(재위 1659~1674)의 둘째 딸입니다.
태실비는 원래 충화면 가화리 용골 구태봉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면사무소 앞에 이몰되어 있던 것을 2006년 현위치로 이건한 것입니다.
방형의 비좌(碑座)위에 한 몸으로 이루어진 비몸과 머릿돌을 올린 형태로 비좌의 앞면과 옆면에는 초화문을 새기고 윗면에는 단판의 연화문을 새겼습니다.
비몸의 앞면에는 ‘명혜공주아지씨태실(明惠公主阿只氏胎室)’이라 쓰고, 뒷면에는 ‘강희 9년 3월 13일립(康熙九年三月十三日立)’ 이라고 적혀있어 조선 현종 11년(1670)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림사지 (定林寺址)
정림사지는 사비도성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백제의 가장 중요한 사찰입니다.
중문과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위치하며, 동서 회랑 및 건물지, 승방지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중심 사역의 규모는 동서 약 62m, 남북 약 120m입니다.
발굴 결과
민무늬토기를 포함한 청동기시대 문화층, 정림사 창건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삼국시대(백제) 문화층, 고려시대 문화층 등이 드러났습니다.
사찰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공방 시설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사찰의 명맥을 이어나갔습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
이 석탑은 백제가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 세운 것으로, 백제 석탑의 시원 양식을 잘 보여줍니다. 탑 모서리에 세운 민들림기둥이나 탑신석과 넓은 지붕돌을 따로 가공해서 조립한 것은 이 탑이 목조건축을 모방했음을 알려줍니다. 균형 잡힌 형태화 비례, 장중하고도 세련된 아름다움이 백제 장인의 솜씨를 짐작하게 합니다. 1층 탑신석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 (蘇定方, 592~667)이 자신의 공적을 과시한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새겨져 있습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
우측 우주에 새겨 있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문자.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금당지 (金堂址)
금당지는 부처를 모시던 전각이 있던 곳으로 석탑 기단에서 북쪽으로 약 15m 거리에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기단은 백제 때의 기단을 재활용하였습니다.
금당지역 하층기단에는 동쪽에 7곳, 서쪽에 4곳, 남쪽에 6곳, 북쪽에 7곳의 적심석이 남아 있었고, 기단 내부는 한 곳에서 적심석이 확인되었습니다.
적심석 배치로 보아 금당은 툇간을 포함하여 정면 7칸 측면 6칸의 건물로 추정되며, 정면 18.5m, 측면 13.80m 크기입니다.
석조여래좌상 보호각
강당지(講堂址)
강당지는 경전을 연구하고 교육하던 전각이 있던 곳으로 정면 39.1m, 측면 16.3m의 긴 사각형 평면의 건물입니다.
고려시대의 강당지는 정면 31.8m, 측면 17.9m로 백제 때 보다 작아졌습니다. 백제 강당지의 기단은 여러 장의 기와를 비스듬히 맞대 쌓아 만든 합장식 와적기단과 평평하게 쌓은 평정식 와적기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강당지에는 고려시대 정림사지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보호각 건물입니다. 백제의 건축 양식으로 지었습니다.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남북축선상에 놓여있습니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이며,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지권인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권인은 비로자나불의 특징적인 손모양으로 불법으로서 모든 것을 감싼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로 이어진 8각 대좌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합니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습니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을 중첩되게 표현했습니다. 현재 불상이 봉안된 곳은 백제시대 정림사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됩니다.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
이 석불좌상은 고려시대에 만든 불상으로 화재로 인해 심하게 마모되어 형체만 남아 있고,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입니다. 좁은 어깨와 가슴에 올른 두 손의 표현으로 미루어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상으로 짐작됩니다.
대좌는 비교적 잘 남아있는데 단정하고 균형감 있는 조각 솜씨를 엿볼수 있습니다. 남원 만복사 대좌와 함께 11세기 고려불상 양식의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첫댓글 부여 의 숨결. 이 느꺼지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부여 성흥산 가림산성 멋진사진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