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감독은 한국영화계 최고의 명장이다. 그것은 봉준호, 박찬욱 감독이 나온 지금도 유효한 말이다. 가장 감독스럽고 가장 영화를 멋지게 만든 분이다. 나는 그분의 영화를 보며 감독을 꿈 꾸었고 그에 관한 이야기라면 어떤 이야기든 귀를 쫑긋 세웠다. 초등학생 시절인 1968년에 재개봉관인 화신극장에서 본 <꿈>은 온통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를 만나러 안양의 신필름을 찾은게 1970년이다. 안양 외곽에 자리한 안양스튜디오의 신필름은 내가 최초의 동양 최고의 영화사였다. <빨간 마후라>의 일본판 대형 포스터가 본관에 걸려있고 이곳에서 영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결국 나는 영화계에 입문하였지만 신 감독은 이미 국내에 안계셨고 나는 정진우, 임권택, 박태원 등 다른 감독들의 조감독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84년에 신 감독님이 북한을 탈출하여 미국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한참 후인 1990년대 초 신 감독 부부가 한국으로 귀국하여 프레지던트 호텔에 계신다고 듣고 당장에 찾아갔다. 그리고 나로서는 뜻깊은 해후를 하였고 신 감독과 가까이 지냈다.
수시로 전화를 드리고 뵙고 포이동의 극단 신협 사무실로 찾아 인사를 드렸다. 최고령 배우인 김일해 배우를 찾아 함께 인터뷰도 했었다. 그리고 그의 빨간색 벤츠 스포츠카를 타고 오며 드라마 연출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70세가 넘었지만 빨리 찍기도 문제 없다던 그런 분이다.
200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을 마치고 드디어 인터뷰를 가졌다. 분당 자택에서 네 시간에 걸친 흥미로우면서 재미 있었던 자리였다. 주제는 '한국영화사를 위한 제언'이었다. 나의 질문은 끝이 없었고 그의 답변은 시종일관 막힘이 없었다. 그 인터뷰가 추모다큐에 쓰일 거라곤 당시에는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2006년 어느 날 후배로부터 추모다큐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위중하시다는 말인데 정말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셨다. 북한에서 언든 병마와 싸움에 이승을 떠나신 것이다.
나는 장례식장을 찾아 인사를 드리고 회사로 와 편성 시간을 협의 후 90분 다큐를 만들어 추모 다큐를 방송했다. 그 제목이 <신상옥 감독 추모다큐- 거장 신상옥 영화를 말하다>이다. 한국방송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 된 영화감독 추모다큐였다. 방송은 잘 나갔고 최은희 여사에게 DVD를 전달해 드렸다. "뭘 이렇게 길게 만들었어." 그녀의 감사 표현이었다. 아울러 뒤늦은 출연료 100만 원을 지급해드렸다.
아래는 신 감독님과 부산국제영화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