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제기동역 1번 출구부터 서북쪽 종암초등학교까지 구릉 일대가 옛 서울대학교사범대학과 부속중학교 자리다. 아이 때 그 곳 관사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연남동 서울대학교대학본부 근무를 마다하고 이곳을 택한 것은 근무지에 붙은 관사 때문이다. 이듬해 큰형과 작은누나가 사범대와 사대부중을 입학했으니 일석삼조를 이룬 셈이다.
아버지는 대학교무과 서기다. 포켓엔 철필이 꼽혀있고 늘 소매를 끼셨는데 자료를 원본에 올리거나 서류 발급하는 일을 하셨다.
아버지는 휴일이면 밭에 나셨다. 학교 뒤편으로 전쟁을 치루며 방치됐던 밭에 호박을 가꾸었다.
유월이면 꽃 초롱이 달리고 동글보톰하니 꽃대가 오른다. 몇 일 지나면 별모양 호박꽃잎이 벌어지는데 무엇이 급한지 꽃도 다 피지 않았는데 호박이 맺힌다. 다섯 살쯤 인가 아버지가 호박주변의 풀을 쳐내고 고르는 요령을 일러주셨다.
장마가 끝나면 호박밭에 다시 생기가나고 녹아내렸던 줄기 잎이 살아난다, 달빛인가 밤이슬을 받아서일까 호박은 매끈하니 아침이 곱다. 이때부터는 거의 매일아침 밭을 다녔다. 내 두 뼘 크기 애호박은 들기름에 새우젓이면 아침 반찬으로 그만이다.
호박이 많이 달리면서 호박 돌리기가 시작됐다. 관사는 편 복도에 십여 평씩 나눈 연립구조다. 옆집에는 화가 장두건 선생님 복도 끝에 수필가 피천득 교수님댁을 시작으로 사대교수 부고부중교사들께 전했다. 그분들은 큰형 두 누나와 연관된 스승들이다. 아버지 동료도 있다.
씨를 어찌 구했는지 토마토가 자랐다. 토마토는 냄새가 독하여 먹지도 먹을 줄도 몰랐다. 칼국수위에 호박고명과 토마토를 얇게 썰어 얻는데 나는 토마토를 걷어냈다. 대부분의 토마토를 관사에 돌렸는데 이곳 분들은 토마토가 좋다는 것을 아는지 반색이다.
나이가 들어서 호박에 두엄이나 인분을 주지 않고는 달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생물학과 해부실습용으로 기르는 토끼 닭장에서 두엄을 낼 수는 있었겠지만 밭과 한참 멀다. 그렇다면 공동변소 인분을 썼다는 결론이다. 변을 치우는 일꾼에게 막걸리 값이나 주고 밭에 몇 지개 부렸을 것이다.
이런 배달을 누나는 창피해 했다. 어느 교수님의 딸과 사대부중 같은 반이다, 같은 관사에 살면서 농사지어 배달하는 것이 자존심 상함이다.
추석 지나면 노란호박을 딴다. 애저녁 볏이 좋고 바람이 잘 드는 곳의 익은 것인데 맛보기 호박죽용이다.
저장용은 이슬이 짙어질 즈음이면 예상 않던 곳에 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분이 오르고 결이 깊게 패인 것이 좋은 호박으로 쥐생원이 파먹은 것 제하고도 그 숫자가 제법 많다. 보기만 해도 든든한 것이 우리 집 겨울자산이다.
호박고자기로 만들어 쌀가루를 발라 쪄먹거나 시루떡에 고명으로 쓰고 대부분을 호박죽에 쓰였다. 호박죽을 끓이려면 솥이 크고 화독이 있어야한다. 갖춘 집은 우리뿐이다, 교내에 목공소에서 나오는 페목을 틈틈이 모아둔 집도 우리 집 뿐이다.
목조 다다미 관사의 겨울은 혹독했다. 난방이란 것이 무쇠화로나 도자기 히바치에 숯을 피우는데 간혹 숯 대신 나무를 써 연기가 집안에 자욱했다. 그런 온기도 초저녁뿐 새벽녘엔 냉기를 그대로 받는다. 너무 추우면 몰래 전기 고타츠를 킨다. 사람뿐만 아니다 호박도 얼지 않아야 한다.
큰 것 하나 죽을 쑤면 끼니도 때우고 이웃과 나눌 때는 베푸는 것 같아 으쓱하니 기분이 좋았다.
근래 누님께 들은 바로는 그들로부터 도움은 없었다했다. 오히려 같은 직원이라기보다 흙이나 만지는 하찮은 이로 여겼다했다. 한번은 초상이 났는데 어머니는 집의 재봉틀을 머리에 이고가 수의를 밤새도록 지었다. 어느 교사 딸이 시집간다고 몇 날을 다니며 이불을 꿰맨 적도 있다. 아버지는 어느 집 김장독을 묻었는데 관사에서 이런 부탁하거나 들어주는 일은 절대 통용되지 않는 일이다.
아버지는 여럿이 먹을 수 있는 호박이니 이를 나눈다며 모두가 좋을 것이라 했다. 호박을 돌리기는 이득생색이 없었으니 요령도 낮춤도 아니다. 직장인의 밭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관습이란 사고의 전환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좋은 말로 하면 아버지는 자신을 자유롭게 하신 것이다.
요즘 나는 나만의 사고로 서성인다. 배부른지 모르고 배고프지 않다는 식으로 교묘해 가는 나의 삶. 방어우려에 곧이듣지 않는다. 편치 않음을 남기는 힘든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의사는 스스로 너그러워져야 한다했다. 전해질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고 편안한 것 좋은 것 만 보라 했다. 맥박이 빨라지면 잠시 눈을 감고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라했다. 한마디로 일의 옳고 그름이나 경위를 따지 않는 맹문이로 살아가란 뜻이다
다행이 아버지는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셨다. 함께 호박을 고르고 땀을 흘릴 때를 생각하면 상쾌해진다. 잠이 들지 않을 때도 그 회상이면 안정이 인다.
생각해보니 호박은 당신의 자유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의 보루다. 호박이야기가 나오면 다들 목청이 커진다. 변함없이 빛나는 보석이란 뜻이다.
2022년 8월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