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1/11 농업인의 날, 지체장애인의 날, 광고의 날
가래떡 데이, 빼빼로데이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 G20 정상회의 개막...'환율 합의' 주목 주요 20개국 정상과 국제기구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인 서울 G20 정상회의가 1박 2일 간의 일정에 들어갔습니다. YTN 2010-11-11 20:56 http://www.ytn.co.kr/_ln/0102_201011112056523048
[유레카] G20 / 이재성 처음엔 G6이었다. 1975년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의 제안으로 프랑스 랑부예에서 처음 열린 선진 6개국 정상회의의 주인공은 독일, 미국, 영국, 이탈리아, 일본, 프랑스였다. ‘G’는 그룹(Group)을 나타낸다는 게 보통의 해석이지만, 그레이트(Great)의 약자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여기에 들지 못한 나라들이 시샘한 건 당연했다. 특히 1인당 국민소득이 이탈리아보다 훨씬 높았던 베네룩스 3국(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의 불만이 많았다. 이들을 달래기 위해 8차 회의에 벨기에 총리가, 12차 회의에 네덜란드 총리가 ‘일회용’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회의가 창설된 배경은 크게 세가지다. 첫번째가 1971년 미국 달러의 금 태환 정지를 선언한 이른바 ‘닉슨 쇼크’였다. 두번째는 제3세계의 자원 민족주의로 인한 ‘1차 오일쇼크’였다. 세번째 배경은 종전 이래 케인스 경제학의 처방으로 황금기를 맞았던 세계 자본주의가 60년대 말부터 쇠퇴하면서 좌파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이에 유럽의 보수세력은 ‘반공’ 분야의 대선배인 미국을 끌어들였다. 이른바 제1세계가 제3세계와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것이 G6이었던 셈이다.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G6이 아니라 G7이었다. 2차 회의부터 캐나다가 추가되면서 출범한 G7은 신자유주의 전도사 마거릿 대처와 반공 투사 로널드 레이건의 활약을 거쳐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목도하면서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는 세계 자본주의의 요새가 된다. 소련과 중국을 배제하려고 유엔 바깥에 딴살림을 차렸던 G7이 러시아의 참여로 G8이 되고, 중국 등 신흥경제국들을 포괄하는 G20으로 확대되는 과정은 G7로 대표되는 서양 제국주의의 영향력 쇠퇴를 증명한다. 유일 체제가 흔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진국이라도 된 양 우쭐해할 때가 아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한겨레 2010-11-09 오후 08:32:01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447884.html
2010 - 대만 천수이볜(陳水扁) 전 총통 부부 징역 19년 확정 오늘의 역사 (11월 11일)[2010년] 대만 최고법원은 2010년 11월 11일 '직무에 위배된 수뢰죄'를 적용하여 천수이볜(陳水扁) 전 대만 총통에게 징역 19년과 벌금 1억5000만대만달러(약 55억원), 부인 우씨에게 징역 19년7월과 같은 액수의 벌금을 각각 확정했다. 재판부는 두사람이 룽탄(龍潭)지구 개발과 관련한 직무상 수뢰죄와 대만 최고층 건물인 101빌딩의 회장으로부터 받은 뇌물을 죄를 인정하여 형을 확정하였고, 부인 우씨의 경우 돈세탁 죄를 추가하여 징역 7월을 덧붙였다. 대만 남부 타이난(臺南) 출신 일용잡부의 아들로 태어난 천수이볜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국립 대만대학 3학년 때 법률고시에 합격해 변호사가 됐다. 그 후 재야인사를 변호하면서 유명세를 탔고, 1985년에는 직접 반체제 잡지를 만들다 보안법 위반죄로 8개월간 구속되기도 했다. 2000년 집권세력인 국민당 세력을 '부패 집단'으로 몰아 도덕성과 청렴성을 내세우며 49세의 젊은 나이에 총통에 올랐다. 2008년 5월 마잉주(馬英九) 현 총통에게 권력을 이양할 때까지 8년간 대만을 이끌었다.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101123_0003
2009 - 백령도 습곡구조 소청도 분바위 등 천연기념물 지정 인천시 옹진군에 있는 ‘백령도 남포리 습곡구조’와 ‘소청도 스트로마톨라이트 및 분바위’가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 제 507, 508호로 지정됐다. 백령도 장촌해안에서 서쪽으로 300m 지점 용트림바위 건너편에 있는 ‘남포리 습곡구조’는 높이 50m, 길이 80m로, 고생대 이전에 생성된 지층이 지각변동을 일으키면서 생성됐다. 지하 깊은 곳에서 오랜 기간 변성·변형작용이 이뤄져 습곡과 단층이 발달해 있다. 선명하게 드러난 큰 규모의 단층 및 습곡구조는 매우 드문 일로, 한반도 지각 발달사를 규명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할 것이라는 게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스트로마톨라이트 및 분바위’는 백령도 남쪽으로 14㎞ 떨어진 소청도 남동쪽 500m 구간에 분포돼 있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바다와 호수 등에 서식하는 남조류나 남조 박테리아 등이 돌에 박혀서 남은 석회암의 일종이다. 이 곳의 스트로마톨라이트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화석(약 6억~10억년 전)으로 평가받고 있고 모양도 아름다워 보존가치가 높다. 백색의 결정질 석회암이 해식작용으로 노출되어 경관이 매우 수려한 분바위도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인천시 옹진군은 11일 “이에 따라 백령도와 대청도 등 서해 5도 일대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은 6곳으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인천/김영환 기자 ywkim@hani.co.kr /한겨레 2009-11-11 오후 08:11:39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7143.html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가 11일 양곤의 영빈관에서 이브라힘 감바리 유엔 정무담당 사무차장과 만났다. 군사정권으로부터 장기 가택연금을 당하고 있는 수지는 감바리 차장을 만나기 위해 6개월 만에 처음 집에서 나왔다. 양곤=AP연합뉴스 /한국일보 2006-11-13 http://www.madam1.net/zero/view.php?id=poemmovie&page=1&sn1=&divpage= 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06
2005 - 제1회 정율성 국제음악제 개막 (11~12일) 제1회 광주정율성국제음악제 우리 고장 광주 남구 양림동에서 출생했으며 13억 중국인들의 추앙을 받는 음악가 정율성 선생을 기리는 제1회 광주정율성국제음악제가 광주광역시 남구청과 중국문화부의 주최, 광주문화방송의 주관방송으로 11월11일(금)~12일(토) 이틀간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다. /광주MBC-문화/행사 http://www.kjmbc.co.kr/bbs/skin/board/view.asp?code=event&b_id=24&page=13&keyfield=&keyword=
아라파트 [Arafat, Yasir, 1929.8.4(24)~2004.11.11] 야세르 아라파트 사망(2004)
- Sunflowers' - 'Iris' 1987.11.11 - 고흐 ‘붓꽃’ 최고가 경매 [책갈피 속의 오늘]1987년 고흐 ‘붓꽃’ 최고가 경매 빈센트 반 고흐. 그의 짧은 생(生)의 흔적은 아찔하다. 광기에 베인 그의 예술혼은 그 자체가 통증이다. 그의 예술은 삶의 벼랑 끝에서 토해내는 비명이며 스스로의 상처를 비벼대는 학대(虐待)다. “나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그릴 때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는 에너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 보리밭을 그릴 땐 보리알 하나하나가 영글어 터지는 최후의 순간을 보여주고 싶어. 사과를 그릴 땐 사과의 즙이 껍질을 밀고 터져 나오려는 것을, 사과씨들이 스스로의 결실을 맺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을 담고 싶어.” 고흐의 작품은 한 영혼의 소진(消盡)이자 정신의 고갈이었다. 27세가 되어서야 화가가 되기 위해 데생공부를 시작했던 고흐. 그는 미친 듯 붓을 놀리던 마지막 5년 동안을 정신착란과 발작증세에 몸부림치다 갔다. 그의 나이 37세. 고흐는 가장 더럽고 누추한 땅에 입맞춤하며 불후의 걸작들을 남겼다. 생전에 비평가들은 “고흐의 색채는 야만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팔리지 않는 그의 작품은 닭장의 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푸념했다. “내 그림이 안 팔리는 걸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 값이나 내 여윈 몸뚱어리의 품삯보다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 날이 오겠지.” 생전에 팔린 그의 그림으로는 ‘붉은 포도나무들’이 유일했다. 그러나 고흐가 죽고 나자 작품들은 생활고에 찌들었던 그의 운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계 그림경매 사상 최고가를 잇따라 경신한다. ‘붓꽃’은 1987년 11월 소더비경매장에서 5390만달러(약 635억원)에 팔려 최고가를 기록했다. 앞서 팔린 ‘해바라기’도 기록(3990만달러)이었다. 그리고 3년 뒤 그의 그림 ‘의사 가셰의 초상’은 8250만달러(약 972억원)에 경매된다. 평생의 후견자였던 동생 테오에 안겨 숨진 고흐의 품에서는 쪽지가 발견됐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동아닷컴 2003-11-10 18:30:00
컬럼비아호 [Columbia] 제5차 비행(STS-5) : 1982년 11월 11일부터 16일까지 122시간 15분 29초에 걸친 비행. 승무원은 V.D.브랜드(기장), R.F.오버마이어(조종사), 그리고 J.P.앨런(물리학자)과 W.B.레노어(전기기사)가 전문가의 자격으로 탑승하였다. 이것은 스페이스 셔틀의 첫번째 실용(상업)비행이며, 자유비상하는 인공위성을 스페이스 셔틀에서 궤도에 쏘아 올리는 일을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즉, 컬럼비아호는 SBS-3 및 캐나다의 애닉(Anik) C(Telesat)를 싣고 가서 정지궤도(靜止軌道)에 투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새 우주복을 시험하기 위한 선외활동(船外活動)은 우주복에 문제가 있어 취소되었다. 지구를 일주한 후 에드워드 공군기지로 무사히 돌아왔으나 승무원들의 멀미가 문제로 대두되었다. (발췌) /네이버
1981 - 룩셈부르크의 대공세자 기욤(Guillaume) 출생 기욤 대공세자 [Guillaume, Hereditary Grand Duke, 1981.11.11~ ] Guillaume, Hereditary Grand Duke of Luxembourg (Given names: Guillaume Jean Joseph Marie; born 11 November 1981) has been Heir Apparent to the crown of Luxembourg since his father's accession in 2000. He is also a descendant of the House of Nassau, founded in 1093, which has ruled Luxembourg since 1890. Early life and education http://en.wikipedia.org/wiki/Guillaume,_Hereditary_Grand_Duke_of_Luxembourg
룩셈부르크의 대공위 계승 순위 룩셈부르크의 현재 대공은 나사우바일부르크 대공가의 앙리 대공이며, 대공위 계승 순위 1위는 기욤 대공세자이다. 중세 시대에는 한 가문에 정착되지않고 떠돌아다니는 작위였지만, 빈 회의 이후 오라녜나사우 왕가의 수장이 룩셈부르크의 대공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빌럼 3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빌헬미나가 군주가 되자, 살리카 법에 의해서 나사우바일부르크 대공가의 아돌프가 룩셈부르크 대공이 되었으며 그의 후손이 계속 통치하고 있다. /위키백과
- 'Frisco' - 'Stabile'
- 'Red Curley Tail, Mobile'
콜더 [Calder, Alexander Stirling, 1898.7.22~1976.11.11] 모빌 창시자 콜더 사망 모빌 창시자이자 미국의 조각가인 알렉산더 콜더가 1976년 11월 11일 사망했다. 미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오히려 이런 미술적 분위기와 달리 물건 만드는 일과 기계장치들을 좋아했다.
[역사속의 오늘] 모빌 창안 '콜더' 사망 움직이는 조각 ‘모빌’을 창안한 미국의 조각가 A 콜더가 1976년 11월 11일 숨졌다. 어머니는 화가, 아버지는 조각가였던 콜더의 대학 전공은 기계공학이었다. 졸업 후 자동차 기술자·도안사·기계 판매원 등의 직업을 전전했다. 피를 속일 순 없었을까? 콜더는 1923년 뉴욕의 미술학교 아트스튜던츠 리그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1926년 파리로 건너가 1936년까지 머물렀다. 이 시기 조각을 하던 콜더는 취미삼아 나무·철사·종이 등으로 장난감 같은 동물들을 만들었다. 이 작품들을 가지고 소형 서커스를 연출해 파리의 많은 미술가들과 문필가들을 불러모았다. 화가들 중 몬드리안에 압도된 콜더는 "몬드리안의 작품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움직이는 조각(mobile)’이었다. 1931~1932년 겨울 사이에 여러가지 기하학적인 모형들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 ‘모빌’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마르셀 뒤샹이었다. 이듬해에는 비슷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작품도 발표했다. 장 아르프는 이것을 ‘스테이빌(stabile)’이라 이름붙였다. 요즘 흔하게 보는 모빌이지만 그 시작에는 이렇게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5년 11월 1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2487&yy=2005
1951년에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법이 폐지되면서 해외영토조직헌장에 따라 본국의 일부인 해외주(海外州)가 되었고, 포르투갈의 중앙집권적 지배는 더욱 가혹해졌다. 그러나 1960년부터 원주민은 해방조직을 결성하고 대규모 무력투쟁을 시작하였다. 그후 해방운동은 앙골라인민해방운동노동당(MPLA), 앙골라완전독립민주동맹(UNITA), 앙골라해방민족전선(FNLA) 등으로 분열하였다. 1974년부터 민주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포르투갈은 1975년 1월 앙골라의 독립을 인정하는 협정에 조인하였고 그해 11월 인민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독립 후에도 내전이 꾸준히 계속되어 왔다. /naver
1974 - 미국의 배우, 영화 제작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DiCaprio, Leonardo) 출생 디카프리오 [DiCaprio, Leonardo Wilhelm, 1974.11.11~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Leonardo Dicaprio 1974년 헐리우드 출생. 어머니는 독일인, 아버지는 이탈리아인이라고 한다. 14세 때 CF로 등장하여 TV 드라마 〈산타바바라〉, 〈러시〉, 〈그로잉 펜즈〉에 출연했다. 1991년 〈크리터스 3〉로 정식 영화에 데뷔했고, 로버트 드 니로와 함께 공연한 〈이 소년의 삶〉에 이어, 93년작 〈길버트 그레이프〉로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상에 노미네이트되면서 주목받았고, 〈토탈 이클립스〉에서는 동성애를 즐기는 시인 랭보, 신판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새로운 해석의 로미오에 도전하여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짐 캐롤의 〈바스켓볼 다이어리〉에서의 빛나는 열연으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샤론 스톤과 함께 서부극 〈퀵 앤 데드〉에 출연하기도 했다. 바이오그래피 /naver 영화
1973 - 핀란드의 생화학자 아르투리 비르타넨(Virtanen, Artturi) 사망 비르타넨 [Virtanen, Artturi Ilmari, 1895.1.15~1973.11.11] 핀란드의 생화학자. 1945년 길고 혹독한 겨울을 지내야 하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절대적으로 중요한 단백질이 풍부한 녹색 사료의 생산 및 보관을 개선하는 연구를 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그는 헬싱키대학교의 화학전임강사(1924~39), 생화학교수(1939~48)로 재직하면서 사일로에 저장한 목초가 보관중 상해버리는 발효과정에 대해 연구했다. 발효생성물인 젖산은 발효가 더이상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사료의 산성도(酸性度)를 높인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새로 저장할 사료에 묽은 염산이나 황산을 첨가시켜 사료의 산성도를 발효가 더이상 일어나지 않는 기준보다 높이는 공정을 개발했다. 이 공정은 그의 이름의 첫 자를 따서 AIV로 알려졌으며, 이러한 산 처리가 1928~29년 일련의 실험을 통해 영양가나 사료의 식용여부와 사료를 먹은 동물에게서 얻어지는 제품의 식용여부에 전혀 문제가 없음이 밝혀졌다. 그는 1931~39년 헬싱키공과대학교의 생화학교수로, 또 1931년부터 헬싱키에 있는 핀란드 생화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콩과(─科 Leguminosae) 식물의 뿌리혹에서 발견되는 질소고정 세균, 버터 보존법의 개량, 경제적으로 합성한 소의 사료 등에 관한 유용한 연구를 했다. 저서로는 〈소 사육의 기본원리인 AIV체계 AIV System as the Basis of Cattle Feeding〉(1943)가 있다. /브리태니커
- Andrei D. Sakharov 1961년 사하로프는 대기중에서 100메가톤짜리 열핵폭탄 실험을 하려는 흐루시초프의 계획에 반대하고 나섰지만 좌절을 겪는다. 흐루시초프는 "과학자가 왜 정치에 간여하는가"고 그를 힐난했다. 1968년 그는 서방세계에 펴낸 '진보, 공존 그리고 지적 자유'라는 책에서 미-소 등의 핵감축과 사회-민주진영의 평화공존을 촉구했다. /세계일보 차준영 2001-07-23 /세상구경 http://jycha2004.blog.segye.com/tag/%EC%82%AC%ED%95%98%EB%A1%9C%ED%94%84
1965 - 로디지아 독립 선언 [어제의 오늘]1965년 짐바브웨 독립 선언 ㆍ남아공에서의 ‘완전한 자유’ 시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개척자’로 불리는 영국 출신 귀족사업가 세실 로즈는 다이아몬드 회사 드비어스의 창업자다. 그의 이름을 딴 ‘로즈 장학금’으로도 유명하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받았다는 로즈 장학금은 영어권 모든 학생들의 ‘꿈의 장학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는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에 로즈 박물관이 있고 말을 탄 로즈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로즈는 보어전쟁을 일으켜 같은 백인 식민지배층인 보어인(남아공의 네덜란드계 주민들)을 몰아냈고, 원주민들에게 헐값을 주고 땅을 사들이거나 빼앗아 자신만의 제국을 만들었다. 동남부 아프리카를 흐르는 림포포강을 넘어 오늘날의 잠비아에 이르는 지역이 그의 영토였다. 그러나 로즈의 말년은 좋지 못했다. 네덜란드계와의 충돌이 물의를 빚어 총독 자리에서 물러났고, 명예와 건강을 모두 잃은 뒤 49세를 일기로 1902년 로디지아의 마토포 언덕에 묻혔다. 구정은기자 ttalgi21@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11-10 17:35:0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101735085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미국 방문에 올라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1961년 11월 11일 김포공항을 출발, 15일간의 방미 장도에 올랐다. 박의장은 11월 13일 오후 워싱턴공항에 도착, 존슨 부통령과 러스크 국무장관 등 다수의 미국 고위층과 주미한국대사, 교포들의 환영을 받았다. 박 의장과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11월 14일 정오 오찬을 겸한 대담에 이어 오후에 본격 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박 의장은 8.12성명에서 발표한 대로 1963년 여름까지는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공약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이 무력 침공을 받을 경우 상호방위조약에 의한 군사원조를 확약했고, 박 의장도 한반도에서 양국의 공동이익이 강화돼야한다고 역설했다. 박 의장은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만나 제트기 등 한국군의 무기현대화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박 의장은 프레스클럽에서 연설과 기자회견을 한 후 맥아더 원수와 벤플리트 장군을 만나고 하와이를 거쳐 11월 25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조선
[역사속의 오늘] 박정희 의장, 미국방문 1961년 11월 11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5일간 일정으로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박 의장은 김포공항에서 가진 미국 방문 출발성명에서 한미 우호관계의 확립을 특히 강조했다. 이 미국 방문의 성격은 쿠데타의 불가피성을 피력하고 민정이양에 대한 혁명정부의 공약을 미국에 확인시키기 위한 것. 실제로 박 의장은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만나 5·16 이후 혁명정부의 업적을 강조했다. 박 의장은 11월 13일 오후 워싱턴공항에 도착, 존슨 부통령과 러스크 국무장관 등 미국 고위층과 주미한국대사, 교포들의 환영을 받았다. 11월 14일 박 의장과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정오 오찬에 이어 본격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박 의장은 8.12성명에서 발표한 대로 '1963년 여름까지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고 재확인 시켰다.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이 무력 침공을 받을 경우 상호방위조약에 의한 군사원조를 확약했고,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통해 제트기 등 한국군의 무기현대화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박 의장은 맥아더 원수 등과 만나고 하와이를 거쳐 11월 25일 귀국했다. 정보관리부 이재근 /매일신문 2008년 11월 1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1429&yy=2008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자 대한민국 해군 창설자인 손원일 제독은 조국의 해양수호에 관심이 많은 선각자 30여명과 함께 1945년 8월 21일 해사대(海事隊)를 결성하였으며, 11월 11일에 서울 안국동 표훈전에서 “해방병단”을 창단하여 1946년 1월 18일 미 군정청의 정식 군사단체로 인정받았다. 이로 인해 해방병단은 해군의 모체가 되었으며, 11월 11일을 현재까지 해군 창설일로 기념하고 있다. (발췌) /cyber해군 www.navy.mil.kr:8100/webmanage_tool/ /2006/11/20061109navy-61-main-a.htm - 12k [대한민국 해군 연혁] 1945.11.11 - 해군의 모태인 해방병단 결단(해군 창설일) 1946.06.15 - 조선해안경비대 발족 1948.08.15 - 정부수립과 함께 해군으로 정식 출범 1949.04.15 -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해병대 창설 1950.09.15 - 인천상륙작전 1950.10.25 - 제1소해정대 창설 1965.03.15 - 파월 비둘기부대 해군수송분대(별칭: 백구부대) 창설 1965.09.20 - 청룡부대 창설 1965.10.03 - 청룡부대 부산항 출발 1965.10.09 - 월남 캄란만에 상륙 1967.04.03 - 해군수송분대가 해군수송전대로 개칭
1942 - 필리핀의 정치가, 부통령 헤호마르 비나이(Binay, Jejomar) 출생 비나이 [Binay, Jejomar Cabauatan, 1942.11.11~ ] 헤호마르 비나이 헤호마르 카바우아탄 비나이 (스페인어: Jejomar Cabauatan Binay, 1942년 11월 11일 ~ )는 필리핀의 정치인이다. 현재 필리핀의 15대 부통령이며 전직 마카티의 시장을 역임했다. 또한 필리핀 야당 연합 (UNO)과 중도 좌파 정당 PDP-Laban (Partido Demokratiko Pilipino-Lakas ng Bayan)의 총수, 아시아 태평양 스카우트 위원회 의장, 필리핀 보이 스카우트 회장이다. /위키백과
1918 - 폴란드 독립 폴란드 독립기념일 독립 기념일 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러시아에 의해 분할된지 123년 후인 1918년 11월 11일에 국가로서의 지위를 회복한 날로 폴란드의 공휴일이다. 폴란드 제2공화국의 설립은 많은 폴란드 인에게 주요 사건으로 간주된다. 1937년에 독립 기념일이 제정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기념식이 두 번 행해졌다. 폴란드 인민 공화국 (PRL) 때에는 국경일이 폴란드 민족 해방 위원회가 친소 세력으로 임시 정부 구성을 마치고 폴란드 민족에게 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7월 22일로 옮겨지기도 했다. /위키백과
1918 -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독일 휴전협정 서명… 1차대전 끝나 연합국ㆍ동맹국 모두 참호전에 치중하다보니 전황은 전쟁기간 내내 교착상태였다. 그러나 1917년 독일이 무제한잠수함작전을 전개하고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선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무렵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동부전선에서 발을 빼자 승리를 예감한 독일은 미군이 본격 투입되기 전 승리를 확정짓기 위해 1918년 3월 21일 새벽을 기해 총공세를 취했다. 360만명을 동원해 7월까지 서부전선에서 5차례나 대공세를 취했으나 필사적으로 맞서는 연합국의 방어벽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7월부터 미군이 하루 1만명씩 속속 서부전선에 도착하고 연합국이 여세를 몰아 8월부터 전면공세로 전환해 전세를 뒤집자 동맹국들이 먼저 흔들렸다. 불가리아와 오스만 투르크가 먼저 항복했고,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제국도 체코ㆍ슬로바키아ㆍ폴란드 등이 저마다 독립을 요구하면서 와해되기 시작했다. 독일 내부에서도 전쟁에 신물이 난 독일 국민들의 저항으로 몸살을 앓았다. 10월 3일 킬항(港)에서 일어난 수병 반란으로 점화된 혁명이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자 11월 9일 황제 빌헬름2세는 망명하고 사회민주당의 에베르트가 총리에 올랐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마침내 1차대전이 막을 내렸다. /조선
[오늘의 경제소사/ 11월 11일] <1547> 11/11/11 '11/11/11.' '빼빼로 데이'가 아니라 1차대전 종전의 별칭이다. 1918년 11월11일 오전11시를 기해 적대행위가 종결됐기에 이렇게 부른다. 전쟁은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었으나 그늘도 만들었다. 1차 대전에서 등장한 항공기와 전차ㆍ잠수함 등의 성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가격 역시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만큼 뛰었다. 요즘 전차 3대면 1차 대전 초기 미군 1개 사단의 기계력인 4,000마력을 간단하게 뛰어넘는다. 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11/10 17:31:01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1/e2009111017310197490.htm
1917 - 하와이 왕국의 여왕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 사망 릴리우오칼라니 [Liliuokalani, 1838.9.2~1917.11.11] [역사 속의 인물] '알로하오에' 하와이 여왕 릴리우오칼라니 '알로하오에 알로하오에. 꽃피는 시절에 다시 만나리.' 하와이를 대표하는 민요 '알로하오에'의 노랫말이다. 하와이 말로 '알로하로에'(Aloha'oe)는 '잘 가요, 그대여'라는 뜻. 노래를 만든 이는 하와이왕국의 마지막 군주인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1838~1917) 여왕이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녀는 공주 시절이던 1878년 연인의 이별 모습을 보고 악흥에 젖어 이 노래를 지었다. 약소국이 강대국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고 분별없이 문물을 받아들이면 어떤 비운을 겪는 지 100여년 전의 하와이왕국은 잘 보여준다. 오빠 칼라카우아 국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한 릴리우오칼라니는 미국의 하와이 병합 야욕에 격렬히 맞섰다. 진주만을 미국에 양도하는 내용의 조약에 반대하고 자국 농업 보호를 추진했지만 친미기업가이자 정치인인 샌퍼드 돌의 무력봉기에 의해 1895년 폐위되고 만다. 돌은 하와이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어 1898년 미국과 합병조약을 체결한다. 그녀는 궁전에서 연금돼 지내다가 1917년 오늘 호놀룰루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알로하오에'는 이별하는 연인들의 슬픔을 넘어 하와이왕국 멸망의 비극을 담은 노래가 됐다. 김해용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1년 11월 1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4797&yy=2011
[어제의 오늘]1917년 하와이의 마지막 여왕 사망 ㆍ‘강제 퇴위’ 이후에는 작가로 데뷔 릴리우오칼라니는 미국이 1898년 하와이를 합병하기 이전 이곳의 섬들을 통치한 최초의 여왕이자 마지막 군주다. 하와이의 왕권을 강화하려고 애썼지만 외국인 기업가들에 의한 쿠데타로 실권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과 유럽 기업가들은 릴리우오칼라니를 실권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여왕이 상호호혜조약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사실상 왕권을 포기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미국이 외국산 설탕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는 정책을 펴면서 수출마저 줄어들자 하와이를 미국에 합병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받으려 했다. 1893년 이들 기업가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가 일어났고 샌퍼드 돌이 이끄는 선교당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여왕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최민영 기자 min@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11-10 21:46: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11102146015&code=100100&s_code=ap005
클레르 [Clair, René, 1898.11.11~1981.3.15] 프랑스의 영화감독. 본명은 Rene Chomette. 파리 출생. 영화평론을 쓰면서 배우 ·조감독을 거쳐 1923년 《잠자는 파리 Paris qui dort》를 발표하였다. 초기의 그는 다다이즘 ·퓌리슴의 영향을 받아 대담한 카메라 기교와 기발한 아이디어를 구사하여 전위영화풍의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막간 Entr’acte》(1924) 《물랭루즈의 유령》(1925)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맥고모자 Un Chapeau de paille d’Italie》(1927)부터 점차적으로 희극적 수완을 보이기 시작하여 유성영화 제1작 《파리의 지붕 밑 Sous les toits de Paris》(1930)에서는 훌륭한 음향 처리와 서민적 정서의 표현으로 흥행에 성공하였다. 이어서 《백만장자 Le Million》(1931)는 경묘한 터치로 그린 희극영화의 걸작이고, 《파리 축제 Quatorze Juillet》(1932)에 이르러 그의 명성은 확정적인 것이 되었다. 아름답게 흘러가는 화면, 분위기의 묘사, 싱싱한 정감, 음악 효과 등은 오래도록 역사에 남을 명작이다. 《자유를 우리에게 Nous 1a liberte》(1931)는 문명비평이고, 《최후의 억만장자 Le Dernier milliardaire》(1934)는 파시즘에 대한 정치풍자였다. 그 후 영국으로 건너가 미국문명을 비꼬아서 그린 《유령 서쪽으로 가다 The Ghost Goes West》(1935)를 만들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으로 피하여 《부인은 마녀 I Married a Witch》(1942) 등을 연출하였으나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전후에 귀국하여 《침묵은 금 Le Silence est d’or》(1947) 《악마의 아름다움 La Beaute du diable》(1949) 《분꽃 Les Belles-de-Nuit》(1952) 《라일락의 문 Porte des Lilas》(1957) 《세계의 모든 황금 Tout l’or du monde》(1961) 《풍아(風雅)한 연회 Les Fetes galantes》(1965) 등 신경을 쓴 작품을 계속해서 발표했으나 왕년의 생채(生彩)는 기대할 수 없었다. 영화인으로서는 최초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 선정되었다. 저서로 《나의 회상 Reflections on the Cinema》(1951)이 있다. /naver
1898 - 미국의 프로 야구선수 피 트레이너(Traynor, Pie) 출생 트레이너 [Traynor, Harold Joseph "Pie", 1898.11.11~1972.3.16] 피 트레이너 하롤드 조지프 "피" 트레이너(Harold Joseph "Pie" Traynor, 1898년 11월 11일 ~ 1972년 3월 16일)는 미국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다. 그는 그의 전체 메이저 리그 경력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1920년부터 1937년까지 3루수로서 선수 생활을 했다. 그는 우투 우타이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메이저 리그 야구 역사상 최고의 3루수로 종종 인용된다. 그는 1948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선수 경력 /위키백과
1885 - 미국의 군인, 장군 조지 패튼(Patton, George) 출생 패튼 [Patton, George Smith, 1885.11.11∼1945.12.21] 미국의 장군. 캘리포니아주 산가브리엘 출생. 190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17년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 초창기 전차부대 편제를 구성하는 임무를 맡아 공을 세웠다.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1942년 북아프리카 상륙작전에 참가하였고, 1943년에는 미군 제7군사령관으로 시칠리아섬 전역을 신속히 장악하는 전공을 세웠다. 1944년 여름 노르망디상륙작전에서는 전통적인 작전법을 무시한 전격적 공격으로 프랑스 중부 전역을 제압하였으며 그해 12월에는 불주대전투에서 바스토뉴를 방어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45년 3월 독일로 진격, 라인강을 돌파하는 데 성공한 뒤 4월 말에는 독일 남부, 체코슬로바키아 서부, 오스트리아 서부를 차례로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독일이 항복한 뒤 바이에른지방 군정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전후 연합군의 비(非)나치스화 정책을 비판하여 군정장관 및 제3군사령관 직위를 박탈당하였다. 용맹하고 저돌적인 지휘자로 평가받은 반면, 병사 구타와 같은 실수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저서로 《내가 알고 있었던 전쟁(1947)》이 있다. /yahoo
구스타브 6세 [Gustav VI Adolf, 1882.11.11~1973.9.15] 스웨덴의 국왕(재위 1950∼1973), 고고학자·미술사가. 구스타브 5세의 아들이며, 웁살라대학교와 크리스체니아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02년 군문(軍門)에 들어가 1932년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웁살라대학교 재학시절에 고고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고고학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1920년대의 10년간 한국·중국·그리스·이탈리아·사이프러스 등지의 고고학적 탐사에 참여하였는데,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것도 이 시기이다. 아직 황태자의 신분이던 1926년 10월 10일 경주의 고분군 가운데 서봉총(瑞鳳塚) 발굴현장을 참관하였는데, 이때 '서봉총'이란 이름은 그의 참관을 기념하기 위해서 붙인 것이다. 즉 '瑞'는 스웨덴의 한자명 서전(瑞典)의 첫 자에서, '鳳'은 왕을 상징하는 봉황(鳳凰)의 첫 자에서 딴 것이다. /naver
- Elizabeth Stanton, Carrie C. Catt, Lucretia Mott
1880 - 미국의 사회개혁운동가 루크리셔 모트(Mott, Lucretia) 사망 모트 [Mott, Lucretia, 1793.1.3~1880.11.11] 미국의 사회개혁운동가. 매사추세츠주(州) 출생. 1806년 뉴욕주에 있는 퀘이커교(敎) 기숙학교에 들어갔으며, 졸업 후 이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811년 같은 학교의 교사였던 J.모트와 결혼하고 필라델피아로 이주하여 부부가 함께 노예제도 반대운동을 하였다. 1833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노예제 반대협회의 회합에 출석한 이래, 동 협회의 필라델피아 여성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840년 런던의 세계노예제 반대회의에 미국대표로 출석하였으나, 여자이기 때문에 대표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를 계기로 여성의 권리주장 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E.스탠턴과 함께 1848년 7월 세니카폴스에서 여성의 사회적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토의하기 위한 대회를 열고 여성해방의 강령으로서 ‘여성의 소신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미국에 있어서 조직적인 여성운동의 효시로, 그 영향은 전세계에 파급되었다. 생애를 통해서 사회개혁, 특히 노예제 반대 및 흑인생활의 개선과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해 힘썼으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한 운동에서도 활약하였다. /naver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Vittorio Emanuele III, 1869.11.11~1947.12.28] <오늘의역사> [11월 11일] 1869년, 이탈리아의 사실싱 마지막 국왕 비토리오 에마뉴엘레3세 태어나다 1869년 11월 11일,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사실상 마지막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 국왕이 태어났다.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는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할때, 그리고 그가 실권하고 몰락했을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전후 처리 과정에서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는 무솔리니 정권을 승인했다는 과거사 책임으로 결국 퇴위했고, 이탈리아가 공화국으로 바뀌면서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2세의 사보이 가문은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1869년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는 나폴리에서 움베르토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움베르토 1세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특이하게도 빅토르 에마뉴엘레 2세는 당시 기준으로도 무척 단신이어서 성인이 된 후에도 키가 1m 53cm에 불과했다. 1900년에 움베르토 1세가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한 후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가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는 헌법에 보장된 자유를 존중했다. 하지만 새 국왕은 1900년 ~ 1922년 사이 정치 불안정을 초래한 이탈리아 의회 정치 위기를 해결하는 문제에 매일 개입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삼국동맹의 조약 내용을 무시하고 중립을 지키던 이탈리아는 결국 삼국협상측과 손을 잡고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맺었던 삼국동맹을 파기한 후 연합군으로서 참전하게 된다. 전쟁 중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는 전쟁터를 돌며 병사와 이탈리아 민간인들을 돌보았는데 이탈리아인들은 이 시기에 국왕을 진정으로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전후에 경제 공황을 일찌감치 겪게 되었다. 이 시기를 틈타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1922년에 검은셔츠단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키자 결국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수상을 지명했다. 이후 실제 권력은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당에 넘어갔고,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는 명목상의 군주로 전락했다. 무솔리니는 1935년에 정복한 에티오피아의 황제 관과 알바니아 국왕 호칭을 바치며 적당히 다루었다. 결국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는 이탈리아의 국왕이며, 알바니아 국왕이자, 에티오피아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얻었던 국민의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1940년, 독재자 무솔리니는 나치 독일을 따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전황은 독일과 이탈리아에 불리해졌다. 1942년 말 리비아와 튀니지의 이탈리아군이 연합군에 항복하고, 비슷한 시기에 동부전선에 파견된 이탈리아군 10개 사단이 괴멸되었다. 북아프리카를 완전히 장악한 연합군은 시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다. 1943년 7월 19일, 연합군이 처음으로 로마를 폭격한 후 5일 뒤인 24일에 파시스트 평의회는 무솔리니의 실각을 결정했다. 충격받은 무솔리니는 헌법상 수상 임명권은 국왕에게 있었기 때문에 다음 날 오후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를 알현했다. 파시스트 평의회의 결정을 무력화시켜달라고 청원하러 간 것이었다. 그러나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피에뜨로 바도글리오 (Pietro Badoglio) 원수를 새 수상에 임명했다. 그러더니 무솔리니를 체포해버렸다. 하지만 전쟁 후 1922년의 결정과 이후 파시스트 정권을 지원했다는 점때문에 이탈리아인들 사이에서는 국왕이 퇴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한, 이탈리아를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이탈리아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졌다. 결국 자신때문에 초래된 상황이어서 1946년 5월 9일 왕정 폐지 부결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는 퇴위하고 아들 움베르토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6월 2일 국민투표 결과 54%가 왕정 폐지에 찬성하여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의 희망을 물거품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이 투표 결과에 따라 현재 적용 중인 신헌법을 제정하고 1948년 공화국이 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는 이집트로 망명하여 1947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했다. 이탈리아 왕국의 공식 마지막 국왕은 1946년 5월 9일부터 6월 12일까지 재임한 움베르토 2세지만, 사실상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가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 이후 사보이 왕가는 해외로 망명했으며 사보이 왕가의 재산은 몰수당했고, 2002년까지 사보이 왕가의 남자들은 이탈리아에 입국할 수 없었다. 이들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망명 생활을 했는데, 2002년 이탈리아 의회는 사보이 왕가의 귀국을 허용하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지난 2007년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의 손자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그의 아들 에마누엘레 필레베르토는 2억 6천만 유로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발표하여, 빈축을 산 바 있다. 이탈리아 정부와 정치권은 싸늘한 반응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과거사에 대한 손해배상을 추진하겠다고 대응했다. 김종현 (sepp@ntmnews.co.kr) 기자 /엔티엠뉴스 2009년11월11일 03시13분 http://www.ntmnews.co.kr/detail.php?number=1942
프리트 [Fried, Alfred Hermann, 1864.11.11~1921.5.5] 오스트리아의 평화주의자·정치평론가. 독일 평화운동의 지도자이며, 1911년 토비아스 아세르와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프리트는 1891년 베를린에서 평화주의적인 잡지 〈무기를 내려놓아라! Die Waffen nieder!〉(1899년 〈평화의 수호자 Friedenswarte〉로 개칭)를 창간했다. 1892년 평화주의 작가 베르타 폰 주트너의 도움을 받아 제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독일 평화운동의 구심점이 된 독일평화협회를 세웠다. 프리트는 '근본적 평화주의'를 옹호했으며, 법률적인 수단과 정신개조로 '국제적인 무정부 상태'에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프리트는 독일의 정책에 항의하여 즉시 스위스로 갔다. 그는 〈국제적인 이해와 국제조직을 위한 신문 Blätter für internationale Verständigung und zwischenstaatliche Organisation〉의 편집인으로서 시급한 평화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했으나, 독일이 이를 무력으로 변경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저서로는 〈평화운동에 관하여 Handbuch der Friedensbewegung〉(2권, 1911~13)·〈전쟁 일지 Mein Kriegtagebuch〉(4권, 1918~20)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키(에)르케고르 [Kierkegaard, Søren (Aabye), 1813.5.5~1855.11.11] [책갈피 속의 오늘1855년 철학자 키르케고르 사망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라는 역설적인 행복론을 펼친다. 행복이 본래 없다고 주장하는 그는 일종의 염세주의자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511110113
- Portrait of Dostoyevsky in 1872, painted by Vasily Perov
도스토예프스키 [Dostoevskii, Fyodor Mikhailovich, 1821.11.11~1881.2.9]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심성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으로 영혼의 어두운 부분을 조명한 러시아의 대표적인 소설가이며 언론인이다. 불안정한 중산계층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6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육군 공병학교에 들어갔으나 수업을 몰래 빠져나가 러시아 문학을 비롯한 유럽 문학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유명한 문학평론가인 비사리온 벨린스키에게 중편소설 <가난한 사람들 Bednyye lyudi>(1846)의 원고를 보내 호평을 받은 후 작가가 되었다. 그는 정치적·사회적 개혁운동에 가담했다가 1849년 4월 체포되어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사형 직전 황제로부터 사면을 받아 극적으로 죽음을 모면하고 유형지에서 중노동을 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죄와 벌 Prestupleniye i nakazaniye>을 구상하게 된다. 그는 소설 속에서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세대 및 전후세대를 괴롭힌 도덕적·종교적·정치적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극화했으며, <백치 Idiot>·<악령 Besy>·<카라마조프의 형제 Bratya Karamazovy> 등의 작품은 예술을 매체로 삶의 지혜와 영혼의 울림을 전달한 뛰어난 본보기가 되었다. /브리태니커
"나는 철학에 대해 잘 모르지만 철학을 향한 나의 사랑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맥도웰 [McDowell, Ephraim, 1771.11.11~1830.6.25] 미국의 외과의사, 부인과 수술의 창시자. 1809년 최초로 난소종양을 성공적으로 제거하여 복부를 통한 선택적 수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에든버러에서 의학공부를 마친 뒤 미국으로 돌아와 댄빌에서 개업했으며, 제인 토드 크로포드라는 여인에게 최초로 난소절제술(卵巢切除術)을 시행했다. 마취나 소독도 없이 9.07㎏이나 되는 종양을 떼어냈는데 환자는 그뒤 30년이나 살았다. 그러한 수술이 치명적이라는 당시의 지배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13명의 환자에게 난소절제술을 시도하여 8명이 성공했다. /브리태니커
1741 - 스위스의 작가, 개신교 목사 요한 라바터(Lavater, Johann) 출생 라바터 [Lavater, Johann Kaspar, 1741.11.11~1801.1.2] 스위스의 작가, 개신교 목사, 반(反)합리적·종교적 문예운동인 인상학(人相學)의 창시자. 취리히에 있는 성베드로 교회의 목사로 일했으며, 프랑스 집정내각의 과격함에 항변하다가 한동안 바젤로 추방되었다. 인상학에 대한 연구와 일시적으로 신 들린 상태에 대한 관심은 그의 종교적인 믿음에서 비롯되었고 그러한 믿음 때문에 인간 안에 있는 신성(神性)의 명백한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고 믿고 정신이 얼굴 생김새에 끼치는 영향을 찾으려고 했다. 4권으로 된 〈사람들의 인식과 인류애의 촉진에 대한 인상학 소고 Physiognomische Fragmente zur Beförderung der Menschenkenntnis und Menschenliebe〉를 발표하여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괴테가 라바터와 함께 이 책을 썼으며, 두 사람은 따뜻한 우정관계를 지속했으나 나중에 라바터가 개종하려는 바람에 둘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주요저서에는 〈영원에 대한 희망 Aussichten in die Ewigkeit〉(1768~78)·〈자아 관찰자의 비밀 일기 Geheimes Tagebuch von einem Beobachter seiner selbst〉(1772~73)·〈폰티우스 필라투스 Pontius Pilatus〉(1782~85)·〈나타나엘 Nathanael〉(1786)이 있다. 그가 쓴 서정시나 서사시들은 클롭스톡의 시들을 모방한 것이다. /브리태니커
1729 - 프랑스의 항해가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Bougainville, Louis-Antoine de) 출생 부갱빌 [Bougainville, Louis-Antoine de, 1729.11.11~1811.8.31] 프랑스의 항해가. 해군지휘관으로서 남태평양을 탐험했으며 프랑스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일주 항해(1766~69)를 했다. 그의 보고서 〈세계일주 항해 Voyage autor du monde〉(1771, 영역판 1772)는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유포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 개념은 당시 프랑스 사상계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24세 때 육군에 입대해 루이 조제프 드 몽칼름 장군의 부관으로 캐나다에 파견되었으며 프렌치인디언 전쟁 때 영국군에 대항해 싸우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763년 육군에서 제대하고 해군에 입대했으며 이듬해 대서양을 항해해 남아메리카 대륙 남단 근처 포클랜드 섬에 프랑스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 식민지는 1767년 스페인에 양도되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세계일주 탐사의 항해 승인을 얻은 뒤 1766년 12월 박물학자와 과학자를 대동하고 항해를 시작했다. 마젤란 해협을 통과한 후 남태평양을 지나 북서쪽으로 나아가 타히티에 도착했다. 이후 서쪽으로 항해하면서 사모아와 뉴헤브리디스 제도를 경유했으며 계속 서진(西進)하는 동안 유럽의 어느 선박도 항해해보지 못한 해역으로 들어갔다. 그레이트배리어리프 주변에서 오스트레일리아를 보지 못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솔로몬 제도의 끝을 지나 뉴브리튼으로 나아갔다. 당시 선원들은 괴혈병에 시달렸으며 선박들도 수선작업이 필요해 1768년 9월 몰루카의 부루와 자바의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서 항해를 멈추었다. 1769년 3월 7명의 선원을 잃고 브르타뉴의 생말로에 귀환했다. 1772년 루이 15세의 비서가 되었으며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프랑스 함대의 북아메리카 해안 작전(1779~82) 때 제독으로 활약했다. 1782년 4월 12일 마르티니크 해안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이후 그는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프랑스 혁명기간중 1792년 파리 학살사건에서 위기를 모면하고 노르망디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 정착했다. 나폴레옹 1세로부터 상원의원과 백작에 임명되었으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솔로몬 제도의 가장 큰 섬과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해협 명칭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부겐빌리아라는 식물의 속명 역시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브리태니커
- Frans Snyder - 'Boar Hunt'
- 'Game Merchant' - 'Still-life'
스니데르스 [Snyders, Frans, 1579.11.11~1657.8.19] 네덜란드의 화가. 안트베르펜 출생. 장식적 효과가 풍부한 화려한 화면묘사가 특기였으며, 정물화·동물화·수렵화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처음 P.브뢰겔과 및 H.발렌 밑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1608년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견문을 넓혔으며, 1609년 귀국한 후는 루벤스의 의뢰로 작품 속에 동물 ·과일 등을 그렸다.
1572 - 브라헤, 카시오페아 자리에서 '티코의 신성' 발견 1572년 11월 11일 브라헤, 카시오페아 자리에서 "티코의 신성(New star)" 발견 역사상 최고의 천문관측학자로 꼽히는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2.14~1601.10.24)가 당시 26세의 나이로 카시오페아 자리에서 "티코의 신성(New star)"을 발견했다. 그는 이 별을 주의 깊게 관측했고, 달보다 이 별이 멀리 있으므로 항성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과학향기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한겨레 2008-11-03 오후 06:17: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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