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도민회와 자매결연식을 하고 있는 3사단장 시절의 필자. 군 연병장에서 격구 같은 격렬한 운동경기 도중 자주 발생하는 패싸움을 내가 효과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은 나의 연대장 시절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62년 연대장 시절 나는 미 제1군단장 헤리스 중장의 초청으로 미식축구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미 제7사단과 지원사령부 팀과의 경기였는데 처음 몸싸움으로 시작해 치고받는 격투로 확대되더니 마침내 양쪽 가족들까지 합세하기에 이르렀다. 연병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돼 버렸다. 군단장 헤리스 중장은 젊은 혈기의 격렬한 격투를 미소 지으며 보다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이때 군악대의 우렁찬 팡파르가 크게 울리더니 이어서 미국 국가(國歌)가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취임 6개월만에 지휘검열 요청
연병장에서 격투를 벌이던 운동선수를 비롯해 양쪽 응원단의 패싸움, 가족끼리의 싸움이 일제히 중지되고 모두 부동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하여 난장판을 수습하는 것을 목격한 나는 언젠가 나도 그 요령을 활용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중 사단장이 된 후 격구할 때 군악대로 하여금 애국가를 연주하게 했더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 나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보고들은 것을 적용해 가며 사단을 지휘해 사단장 취임 6개월 만에 제1군사령부에 지휘검열을 요청했다. 당시 규정으로는 1년에 1회 지휘검열을 받도록 돼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군사령관에게 약속한 전투서열 1위가 가능하다고 판단해 6개월 앞당겨 지휘검열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예측했던 대로 검열 결과는 최우수 부대로 나타났다. 한신 1군사령관은 내가 약속을 지켰다며 매우 흡족하게 생각하면서 나를 치하해 주었다.
나는 3사단장으로 부임한 이후 끊임없이 북진(北進)의 염원으로 불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국토통일을 기원하는 탑을 세우고 싶었다. 북쪽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한탄강 철책선 부근에 함경남도 도청을 향한 기원탑을 우뚝 세우려는 계획을 구상했다. 나는 함경남도민회 유지들을 초청, 건립취지를 설명하고 자매결연을 제의했다. 임종협 함남도민회 회장과 신태하 사무국장, 이신득 함남지사 및 유지 일행과 장병은 1972년 6월 17일 마침내 한마음이 돼 자매결연을 맺었다. 나는 그날 도민회장으로부터 은(銀)으로 만든 지휘봉을 증정받았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0월 22일에는 국토통일 기원탑과 함남 반공의사 위령비를 준공, 제막식을 가졌다. 함남도민회의 성금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사단장의 지휘력이 한창 발휘되던 1973년 2월 27일, 나는 비무장지대(DMZ) 내 표지판 보수작업을 지시했다. 그 계획은 유엔군사령부가 주관하는 것으로서 1년에 봄·가을 두 번씩 정기적으로 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이 같은 비무장지대 내 표지판 보수공사는 휴전 이후에도 계속됐기 때문에 북측에서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안이었다. 그래도 유엔사는 매번 북측에 보수공사 일정을 사전 통보해 주었다. 그날 작업은 이틀로 정해져 내려왔다. 그런데 북측은 군사분계선 바로 북쪽에 559GP(감시초소)를 불법 설치하고 20여 회에 걸쳐 육성 비난을 하면서 우리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도전적 행위임이 분명했다. 그런가 하면 559GP 바로 남쪽에 있는 우리 측 표지판 0654번을 의도적으로 제거, 휴전협정을 위반하기도 했다. 그것은 우리를 유인하기 위한 심리전으로, 분명히 어떤 함정이 있음을 나는 간파하고 있었다.
검열 결과 최우수부대로 선정
나는 인민군들의 그런 도발적인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당시는 남북협상이 시작돼 쌍방 모두 비방방송을 중단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정보참모 조정채 중령에게 문제의 표지판인 0654번은 남북협상 중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일단 보류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유병현(柳炳賢·육사7특·대장 예편·한미연합사부사령관 지냄) 군단장은 3월 5일 사단을 방문했을 때 내가 적의 함정임을 설명했음에도 0654번 표지판을 포함한 작업강행을 지시했다. 군단 정보참모 역시 사단 정보참모에게 작업강행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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