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다시 태어남(롬 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장부터는 로마서의 결론의 서론 부분으로 그리스도인 윤리나 그리스도인 생애를 다룬다. 그리스도인은 한 마디로 열매 맺는 생활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우리는 그간 배운 로마서의 골격을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본다. 처음 로마서의 본 주제로는 롬 1:17에서의 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구약 성경 하박국 2:4에서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주제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곳에서 등장한 내용들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죄 아래에 있으며 구원 받는 이치는 칭의에 의한 의에 역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침례였다. 침례의 정의가 수록이 된다. 롬 6:3, 4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제 그리스도인은 새 생명으로 살아간다. 그리스도인 생애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룬 내용으로는 롬 6:10-13에『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고 하면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지시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이다. 십자가는 두 개의 나무가 서로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수직과 수평으로 지지되고 있는 것이 십자가이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우리 인간의 뜻을 나타내는바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난다. 침례를 받음으로 주님 안에서 산 자로 생애하여 죄 된 생애를 청산한다. 그리스도인이 죄와는 무관하게 살아야 하는 말씀들은 수없이 많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영생을 지닌 자로 살아간다. 골 1:27에 주님을 가리켜 우리 가운데 계신 영광의 소망이라고 한다.
이제 우리는 본격적으로 롬 12:1절의 말씀을 살피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우리에게 권한다는 언어를 사용한다. 바울이 권하는 말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는 우리들 자신을 나타내는 일이다. 여기에는 단호한 결정이 따른다. 우리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희생제물로 드림만이 아니라 또는 순교자로 죽음만이 아니라 미래에 다시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 산제사로 드리는 일이다.
여기에서의 산제사로 드림이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에 오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과 의지의 변화이다. 회개란 단어가 ‘메타노이아’로 마음의 변화를 뜻한다. 사실 우리의 본성은 변화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 점령되어 새로운 형태로 전환되어야 함이다. 이러한 일이 우리 안에 절로 일어날 수는 없다. 히 2:18에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함이 전제가 된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주님의 시험 받음은 어떠하였는가? 우리와 같이 모든 면에서 똑같이 시험을 받았다고 히 4:15에서 말씀한다.
우리 주님의 시험 받음에 대하여는 벧전 4:1에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이미 육체로 받으신 그리스도이셨다.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야 한다. 그 일을 위하여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방울을 흘리신 고뇌의 순간을 가지셨다. 주님이 몸소 자신의 몸으로 희생을 치루고 있었다. 그리해서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이루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몸을 구원하기 위하여 산 제사로 드릴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단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탄원하고 있는바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위하여 주신 고로 우리도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꺼이 드린다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다. 고후 5:14, 15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주님께서 모두를 위하여 둘째 사망을 당하셨으니 우리 믿는 이들은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여 주님에 의하여 살게 되어 사신 자를 위하여 살라 하신 말씀에 대하여 우리들이 기꺼이 합리적인 예배를 드리도록 청하고 이다. 이는 영적인 의미로 사용한 용어이다. 다시 이 말은 롬 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하신다.
위에서 바울이 말씀하는 내용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생애의 방식을 논하고 있다. 저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다. 따라서 세상에 살고는 있으나 세상 조직에 속하지는 않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던 중에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하기를 위함이라고 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죽는 경험을 갖고 살아간다. 요일 2:15, 16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것과는 정반대로 상치가 된다. 우리가 세상의 것이라고 하면 보는 일과 원하는 것들을 말한다. 보고 원하는 것들 자체가 세상적인 것들이다. 그것에 연연하여 살다보면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세상의 것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한때 쉐케라 목사는 자신이 선교하던 선교지에서 일하던 목사에 대하여 세 부류로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 중에 첫 번째는 여행하는 선교사로 사진기를 들고 다니면서 볼만한 것들을 사진기에 주어 담기에 바쁜 목회자이며 둘째는 정치적 선교사로 하여 대총회 자리에 올라가기를 바라면서 일하는 자들이며 셋째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기 위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람에 대해서는 갈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고 하였으며, 다시 갈 6:12에서는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갈 6:14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스도인은 십자가가 무엇임을 알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육체의 모양을 억지로 내는 자들이 아니다. 저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또한 자신과 세상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자들이다. 저들은 죽은 것이 무엇임을 아는 자들이다.
바울은 롬 12:2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면서 마음의 변화를 바라고 있다. 우리의 외적인 행위에 치중함이 아니라 영혼의 성전을 바라신다. 주님이 바라시는 마음은 예수의 마음이다. 빌 2:1-5에서는 예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말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위에서의 권면대로 살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성공적인 생애이다. 바울은 다시 롬 12:3에 우리들이 추구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분수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은 말고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저들에게는 생각하여야 할 이상이 정하여져 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가져가야 한다. 저들 자신은 죽었고, 죽은 우리들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롬 12:4-8)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음으로 할 것이니라』
그리스도인이 의로운 생애를 살게 되는 순간은 믿음을 지닌 상태에서 침례를 받을 때에 시작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후에 그의 삶이 되어져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 로마서 16장까지의 배경이다. 바울이 첫 번 주신 권면으로는 롬 12:3에 주어진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들은 위에서 언급한 믿음이란 용어에 관심을 갖게 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갈 3:24, 25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것이 율법이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이곳에서의 믿음의 주체는 그리스도이다.
믿음이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로 주어지기도 한다. 그리스도인 된 자들이 어떠한 자들인가? 롬 12:4, 5절에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가 된 자이다. 고전 12:13에서는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고 한 성령을 마셨다고 한다. 우리가 침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경험을 갖는다. 그가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우리가 다시 부활을 얻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 생명을 얻어 우리가 되는 일들이 신분의 변화가 오고 생활의 방식이 변화가 온다.
하나님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속하여 있는 교회가 어떠하여야 하는가? 한 몸으로 지체 중에 있는 우리들이므로 교회는 종과 주인의 구분이 없어야 한다. 성령을 주심은 우리 모두를 유익하게 함이다. 우리의 지체 한 부분 한 부분 모두가 각자의 기능이 있어 절대로 필요하다. 우리 몸의 지체 중에 그 어느 것 하나라도 퇴화할 것이 없다. 교회를 운영하는 작업은 목사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방관자가 아니다.
교회는 필요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교회는 봉사를 요하는 곳이다. 바나바와 바울이 마가가 바울의 신임을 얻지 못한 불성실한 행위로 인하여 필요 없는 자로 제외될 순간을 맞이하였었다. 저들끼리 서로 논쟁이 생겨나 서로 갈 길을 달리 가져야만 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한 번 마음에 작정하면 좀처럼 철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바나바는 사람의 인품이 착한 이로 관용이 있는 자였다. 바나바는 마가는 젊은이로 장래가 있는 자였기에 그를 옹호하여 하나님의 사역에 충실하게 하였다. 그가 한 일은 초대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를 일구어냈다. 나중에 바울은 마가를 맞아 주님의 사역에 함께 동행케 하였다.
성경은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였을 경우에 우리에게 적용되는 부분이 있다. 저들은 세상에서부터 구원을 받은 자이므로 주님께 속한 자이다. 저들은 특별한 백성으로 고유한 자들이다. 저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은 수는 없는 자들이다. 그만큼 책임감이 크다. 둘째 저들은 주님을 머리로 모신 몸인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 저들은 주님을 머리로 모신 자이므로 그에게 충성하는 자세를 취할 것이다. 회개하기 전에는 사단의 지배를 받는 이 세상에서는 우리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행하게 되어 있으나 일단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부터는 그리스도가 나의 주가 되어야 함으로 자신의 의지를 그리스도께 묶어 바치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몸의 지체에 놓고 위로부터의 머리인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르면서 살아간다.
우리의 삶의 방식은 요 15장에서의 주님 안에 거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지로 그에게 얹혀 있어야만 한다. 그 어떤 보수를 바라고 일하지 않는다. 에티오피아에 기근이 임하였을 때에 저들 백성을 구조하기 위하여 스웨덴에서는 곡물 투여를 위하여 산악지방에 낮게 비행하여 곡물을 전하기 위하여 아주 위험을 무릅쓴 저공비행으로 밀가루들을 산악지방에 떨어뜨리는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고도의 훈련을 받는 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비행을 하고 있었다. 저들이 그러한 모험을 왜 감수하였던가? 국가에서 그러한 비행을 하는 이들에게 우대의 정책적 고려를 감안한 때문이다. 저들에게는 장학금도 지급되었고 저들은 세계 어느 곳으로도 여행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하는 이들인가? 단지 남을 돕기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분만은 아니다. 우리는 엡 4:11-13에 교회를 돕기 위하여 은사를 주신 것을 활용하는 자들이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교회에 유익을 주기 위함이며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에 이르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자라지 못할 때에 어떠한 일이 생겨나는가? 나이가 들도록 기저귀를 갈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면 이는 참으로 큰 난관이 된다. 바울도 고린도교인들을 대하면서 저들에 대한 고충을 토로한다. 고전 3:1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 하신다. 그래서 저들을 대할 때에 딱딱한 음식을 먹일 수가 없어 젖으로 먹였다고 한다. 이제 유아의 시기를 벗어난 저들에게는 좀 더 향상된 생활을 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주신 권면이 고전 3:3에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나은 형편에 있기를 바라셨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육신으로 사는 것과 영으로 사는 것과의 뚜렷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한다. 고전 4:20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 한다. 독일에서 배출한 유명한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루터란 교회의 신자로 자라난 본 히퍼였다. 그는 독일이라는 나라가 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이 혼란에 빠져 있을 당시에 미국 프린스턴과 하바드에서 신학 강좌를 하고 있었다. 그는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희망하였다. 당시 히틀러가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쟁에 대한 야욕을 꿈꾸고 백성들을 토탄으로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할 수 있는 바의 일을 하기 위하여 고국을 돌아갔다가 그곳에서 체포되어 39세에 순교를 당하는 일이 발생되었다. 당시 교회가 참 길을 제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가 본 것은 교회를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을 보았다. 그가 추구하려던 이상은 끝내 실효를 보지 못하고 그의 신학사상만이 남게 되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의 한 부분이 되고 말았었다.
또 한 사람은 니체였다. 그도 루터란 교회의 신자로 그의 부친과 할아버지 모두가 목사였다. 그가 교회에서 본 것은 위선이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과 교회를 무시하고 적그리스도로 돌변하여 신은 죽었다고 고하며 허무주의자로 무신론자가 되어 나중에는 미친 자가 되고 말았다. 그가 한때는 바른 말을 하였었다. “그리스도인 당신이 나로 하여금 그대의 구속주를 믿게 하려면 그대는 더 많이 구속받은 자처럼 살라”고 하였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에게서 단지 우리가 선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자들을 주시하여 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추구하여야 할 일은 내 안의 그리스도를 보여줘야 함이다.
예수께서는 요 13:35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는 말로서 사랑의 행위를 강조하신다. 사랑의 행위가 참으로 중요한 것이며 그 영향력이 오래 간다.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의 한 부서를 갖고 있는 우리들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선물들을 바르게 사용하는 일이다. 그래서 교회를 축복의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 고전 12:25-27에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모두가 함께 기쁨에 동참할 수 있는 자들이 되도록 하는 일에 열심하는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가 되도록 하자.
그의 모습 안에서(롬 12:9∼21)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위의 본문의 말씀의 배경을 위해서는 롬 8:29, 30절의 말씀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안다는 표현은 선택하였다는 개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미리 아시는 고유의 능력이 있으시다. 하나님의 의도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바라는 것이나 모든 사람이 다 하늘에 가지는 않는다. 인류에게 주신 구원의 선물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인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선물을 받아들일 자들을 미리 아신다. 그래서 하시는 일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시며.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하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사를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저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영하기까지 변화하도록 한다. 주님의 최고의 관여는 영화로운 경지에 이르게 함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의 몸이 영화롭게 됨은 주님 오실 때에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함을 입을 때에 된다고 본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한 시작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회개하면서 시작이 된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보이게 하는 위선이다. 사랑에는 위선이 포함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순수한 사랑이어야 한다. 요 13:35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전제됨을 나타낸다. 타인을 사랑함이 따라야 한다. 사람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여야 한다. 죄를 좋아하는 면이 용납되면 안 된다. 죄들을 미워하면서 죄에 의해서 희생되고 있는 죄인들을 폭넓게 대하는 정신이 깔려 있어야 한다.
바울은 롬 12:10에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정신에 있어서 서로 우애함과 존경함이 먼저 있어야 함을 말씀한다. 원래 사랑이란 단어에는 헬라어에 네 낱말이 있다고 한다. 흔한 사랑이 ‘펠레오’와 ‘스토가이’이다. ‘필레오’는 두 사람 사이의 상호의 애정을 지닌 사랑이고 ‘스토가이’는 그것들을 연합시키는 친전하고 상냥한 정신을 지닌 것을 말한다. 이곳의 ‘스토가이’는 식구, 친지, 형제, 친척 사이의 사랑이다. 피는 물보다 더 진하다는 말에서의 끈끈한 정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식구는 단순한 식구가 아니다. 한 가족으로 함께 연결된 자이다. 생명을 함께 소유해야 할 대상이다. 롬 12:11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그리스도인은 좋은 사람들로 특징지어져 있다.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자들이 아니다. 이로 인하여 남들로부터 이용을 당하는 일이 왕왕 있을 수 있다. 저들은 열심히 일하는 자들로 특징을 지녀야만 한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위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타인에게 필요 없이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하라는 경계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위도식하는 자들이 아니며, 남의 집을 기웃기웃거리지 않는다. 일하지 않고 남의 것을 약탈하거나 빼앗지 않는다. 저들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서도 인내하면 살아간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환난은 저들은 그리스도인인 고로 잘못 취급을 당하는 경우이다. 결코 저들이 잘못한 일로 당하는 일이 아니다. 바울은 로 12:13에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여기에서는 공동봉사의 일을 하도록 저들을 도와야 할 일이 있음을 보인다.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당하는 중에서도 저들을 위하여 축복한다. 저들에게는 악으로 갚지 말고 사람들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여 무엇인가 달리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보여져야 한다. 이미 잠언서에서는 잠 25:21, 22에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고 하신다. 위의 행위들은 일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행동이다. 예수께서는 마 5:14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람들에게 선한 행위를 보여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일이 우리 각자의 일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빛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가? 요 1:4에서의 빛인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우리에게 빛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죄인들에게도 비를 골고루 주심과 같이 그리스도인 된 자들은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여 상대하면 안 된다고 한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가리켜 아카페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지니고 그분의 정신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 일이 게으리지 않고 남을 돕는 삶이다.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오히려 축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감이다. 마귀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대신 채워야 한다. 계 18장 1절에 지상이 그의 영광으로 환하여지는 때가 있게 된다. 그 일은 그리스도인 각자의 생애에서 발현될 일이다. 우리는 그때가 일어날 순간을 기다린다.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에서 구원하는 능력이 세상에 임할 한 순간이 정녕 있게 될 것이다. 세상은 현재 우리 그리스도들이 복음의 능력을 발산되는 것을 보기를 염원한다. 우리가 그와 같이 되도록 기도할 일이다 세상이 더 이상 어두움에 방황하지 않도록 우리의 할 몫을 감당하는 이들이 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