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 - 모차르트 『죽음』 직감했다. 나를 위한 진혼곡이 되겠구나
▲ 모차르트 - 레퀴엠 중 'Dies irae(진노의 날)'
레퀴엠 (Requiem)
미사곡의 일종. 정식명은 《위령미사곡(Missa pro defunctis)》, 즉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이지만, 제일 처음에 흐르는 입당송(Introitus) 가사의 첫마디가 'Requiem æternam(영원한 안식을) …'으로 시작되는 데서 이와 같이 부르게 된 것이다. 연(煉)미사곡, 진혼곡(鎭魂曲), 진혼미사곡 등으로 번역되어 쓰이기도 한다.
통상의 미사는 자비송(Kyrie), 대영광송(Gloria), 신경(Credo), 거룩하시도다(Sanctus-Benedictus),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로 이뤄지는 게 보통인데 레퀴엠은 글로리아와 크레도를 제외하고 작곡자에 따라 부속가(Sequentia, 진노의 날(Dies Irae)부터 눈물의 날(Lacrimosa)까지), 리베라 메(Libera me), 인 파라디숨(In paradisium)을 추가하는 것이 특징이다. 옛날부터 가톨릭교회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로 불리었으나 15세기부터는 다성부로 된 레퀴엠도 나타났다. 가장 오래된 다성부 레퀴엠은 다성음악의 선구자로 유명한 뒤파이가 작곡한 레퀴엠이다.
1563년의 트렌트 공의회는 레퀴엠에 입당송과 진노의 날(Dies Irae)을 쓰는 것을 허용함에 따라 1620년대까지 70여곡의 레퀴엠이 작곡되었다. 또 1600년 이후는 독창·합창·관현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작품도 만들어졌는데 비버나 캉프레의 레퀴엠이 이 시대의 대표적 작품들이다.
이후 모차르트(미완성), 케루비니의 레퀴엠이 등장했는데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대규모의 관현악과 독창, 합창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걸작으로 레퀴엠의 전형을 만들었다. 특히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작곡하다 사망한 일 때문에 레퀴엠 하면 모차르트를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으며, 그의 의문사 및 음모론 관련 떡밥으로도 쓰인다. 또한 케루비니의 레퀴엠은 낭만주의 시대의 대규모 연주회용 레퀴엠을 예감하게 하는 걸작이다.
낭만주의 시대가 되자 미사 음악 장르는 쇠퇴했지만 레퀴엠은 죽음이라는 주제의 심각성과 특유의 낭만성으로 인해 많은 작곡가들이 레퀴엠을 작곡했다. 무려 620여곡의 레퀴엠이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작곡되었을 정도다. 이시기의 레퀴엠은 엑토르 베를리오즈, 주세페 베르디, 가브리엘 포레, 요하네스 브람스, 안토닌 드보르자크, 카미유 생상스, 안톤 브루크너 등의 작품이 유명하며 베를리오즈와 베르디는 오페라의 특징을 도입하였다. 한편으로 루터의 독일어 성서에서 가사를 발췌한 독일 레퀴엠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 중 브람스의 작품이 유명하다.
20세기 현대음악에서는 레퀴엠 전례문을 쓰지 않고 다른 시인의 시나 가사를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레퀴엠들이 나타났다. 파울 힌데미트와 벤저민 브리튼, 리게티 죄르지의 레퀴엠 등이 있다. 또 뮤지컬 전문인 앤드루 로이드 웨버도 전통적인 양식에 따른 레퀴엠을 작곡한 바 있다.
작곡 과정
Requiem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1791년에 작곡한 유일한 레퀴엠이자 유작. 대표적인 미완성 클래식곡이다.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이 익명으로 곡을 청탁한 것이었다. 아내의 장례식 때 자기가 작곡했다고 거짓말하고 연주하려고 했던 것으로
8월 말경, 심부름꾼이 검은 망토를 두르고 그 앞에 나타났는데, 모차르트는 죽을 때까지 이 저승사자 같은 이미지에 시달리며 이 레퀴엠을 '자신을 위한 레퀴엠'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썼다. 게다가 하필 오페라 〈마술피리〉나 〈티토 황제의 자비〉 등의 작곡을 병행 중이었기 때문에 막판 3달 사이에 건강이 더 나빠졌다.
말년의 모차르트는 헨델의 작품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를 반영한 듯 그의 '캐롤라인 왕비를 위한 장송곡(Funeral Anthem for Queen Caroline)'이라는 곡을 레퀴엠 작곡에 많이 참고했다. 들어보면 레퀴엠의 입당송 시작부분과 헨델 장송곡의 첫 합창 'The ways of Zion do mourn and she is in bitterness.'의 사작 부분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91년 9월 모차르트는 친구이자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등의 시나리오를 쓴 로렌조 다 폰테에게 이탈리아어로 이렇게 편지했다. 다만 이 편지는 전문 이탈리아어로 써있다는 점 때문에 수신인을 다 폰테로 추정한다는 점, 일반적인 모차르트의 편지와는 차이가 많은 내용이라는 점, 무엇보다 모차르트 본인의 자필편지가 아닌 사본이라는 점에서 위작이라는 설이 정설이다.
하지만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오전 0시 50분 경에 숨을 거둔다.
저는 당신의 제안에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혼란스럽습니다. 대화도 겨우 해요. 낯선 그 남자의 모습을 눈앞에서 떨쳐낼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그 모습이 보이거든요. 그 자는 호소하고, 재촉하고, 다급하게 제 작품을 요구하는 겁니다. 저도 작곡을 계속하고는 있습니다. 쉬고 있을 때보다 작곡하고 있을 때 더 피곤하지 않아요. 그 외에도 제게는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운 것처럼 느껴져요. 저의 재능을 충분히 펼치기 전에 마지막에 다다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거죠. 삶은 행복의 전조 하에 시작을 고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스스로 평생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섭리가 바라는 대로 가는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까지 쓰죠. 이것은 제 죽음의 노래입니다. 미완성으로 남겨 둘 수 없어요.
모차르트가 라크리모사의 첫 여덟 마디까지 작곡한 후 숨을 거두었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사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모차르트가 앞에서 풀 스코어를 순차적으로 완성해 나간 것이 아니고 성악 부분을 중심으로 작곡해 나가면서 관현악부는 시차를 두고 뒤이어 작곡해 나갔기 때문이다. 이견이 어느 정도 있다. 모차르트가 작업하던 종이 위에 쥐스마이어나 아이블러가 모차르트의 필체를 흉내내어 덧쓰는 방식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모차르트의 작성 부분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모차르트 사후에도 그의 부인 콘스탄체는 이 곡을 완성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노력했다. 이 곡의 완성에 거액의 계약금이 걸려 있었기 때문. 그러나 제안을 받은 작곡가들은 대부분 부담감 등으로 거절했다고 한다. 모차르트가 제자 가운데 높이 평가했다는 아이블러도 완성하려고 시도했으나 거의 손을 못대고 포기했고, 결국 모차르트의 다른 제자 중 한 사람인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 1766 ~ 1803)가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현재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판본(쥐스마이어판)을 기준으로 볼 때, 상투스, 베네딕투스는 100% 쥐스마이어의 창작이며, 라크리모사는 처음 여덟마디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은 쥐스마이어가 작곡하여 완성시켰다. 라크리모사는 원래 모차르트가 아멘 푸가로 마무리하려했다고 하는 설이 있지만, 훨씬 이전에 작곡된 자비송 <Kyrie in D minor KV 341>를 미사로 작곡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악장으로 포함시킬 의도로 작곡한것 일수도 있다는 등, 논란이 있다. 아멘 푸가는 1960년 베를린 주립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는데, 일부분만 발견되었고, 레퀴엠의 Rex Traemendae와 동시기 작곡한 마술피리 서곡 일부와 묶여 있었다. 따라서 아멘 푸가는 편집자마다 4마디 이후 부분 전개가 달라진다. Lux Aeterna 부분은 Introitus의 뒷부분과 Kyrie를 합친 것과 가사만 다른데, 이 역시 쥐스마이어가 자신이 없어서 이렇게 처리를 한 것인지, 모차르트가 생전에 유언으로 남긴 부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레퀴엠의 전 악장은 루터교 찬송가 <내 최후의 순간이 올때>의 모티브 음형 "D-C#-D-E-F"를 인용하고 있는데, 임종 자리에서 모차르트가 악보를 넘겨보며 울면서 '내 자신을 위한 레퀴엠이라고 했었지'라고 되뇌었다는 주위 사람들의 증언도 고려해볼때 그가 실제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작곡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모차르트가 남긴 아멘 푸가 스케치를 토대로 판본을 완성한 로버트 레빈은, 아멘 푸가 스케치가 레퀴엠의 Rex Tremendae 스케치와 함께 발견되었다는 점, 그리고 아멘 푸가 스케치에서 모차르트가 "D-C#-D-E-F" 모티브 음형을 전위(inversion)시켜 응용하였다는 점을 들어 분명 모차르트가 레퀴엠에 포함시킬 의도로 작곡한 악장이라 주장하였다. 또한 레빈은 Sequentia 마지막에 아멘 푸가를 삽입하게 되면 각 Introitus - Kyrie / Sequentia - Amen / Offertory - Quam olim Abrahae 각 악장 묶음들을 푸가로 마무리 짓는 자연스러운 미사 형태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칼 가이링거의 주장에 따르면 쥐스마이어가 모차르트의 잘츠부르크 시절 미사곡들을 참고하여 최대한 모차르트 스타일을 살려가며 레퀴엠의 나머지 악장들을 완성하였다는데, 레퀴엠의 Agnus Dei 부분과 미사 브레비스 C장조 "참새미사" <Spatzenmasse in C major KV 220>의 Gloria 부분과 흡사하고 레퀴엠 Lacrimosa의 나머지 부분과 참새미사의 Credo과 흡사한걸 고려할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주장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현대에는 쥐스마이어가 레퀴엠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모차르트의 이전 미사곡들을 깊이 연구했고, 이 과정에서 다른 작곡가나 음악학자들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일부 학자들은 모차르트가 아직 총보에 적지 않고 별도의 오선지에 남긴 스케치들을 모차르트 사후 콘스탄체가 모두 모아서 쥐스마이어에게 전달했고 이를 쥐스마이어가 참고했으리라 추정한다.
이렇게 쥐스마이어는 모차르트가 서거한 이듬해인 1792년 레퀴엠의 미완성 부분을 완성했고, 완성된 작품은 콘스탄체에 의해 의뢰인인 발제크 백작에게 전달되어 1793년 "발제크 백작" 작곡의 레퀴엠으로 초연되었다. 하지만 이미 빈 사람들은 이 곡이 실제로는 모차르트 작곡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고, 이렇게 지금도 모차르트 레퀴엠으로 전해 내려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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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크리모사 · Lacrimosa ★ 진노의 날 · Dies irae
라크리모사는 장례미사에 사용되는 레퀴엠 디에스 이레(Dies irae)로 시작되는 부속가(Sequentia)의 마지막 구절이다.
라틴어로 '눈물 겨운, 눈물을 유발하는'이라는 뜻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1791년에 작곡한 유일한 레퀴엠이자 유작. 대표적인 미완성 클래식곡이다.
제 1부 입당송(Introitus) :
제 1곡 안식을 주소서(Requiem),
제 2곡 자비를 베푸소서(Kyrie)
제 2부 부속가(Sequentia) :
제3곡 분노의 날(Dies irae),
제4곡 경이로운 나팔소리(Tuba mirum)
제 5곡 지엄하신 왕이여...(Rex tremendae),
제6곡 기억하소서(Recodare),
제7곡 사악한 자들을(Coufutatis),
제8곡 눈물의 날(Lacrimosa)
제 3부 : 봉헌문(Offertorium),
제 9곡 : 주 예수 그리스도(Domine Jesu Christe),
제10곡 주님께 바칩니다(Hostias),
제11곡 거룩하시도다(Sanctus),
제12곡 찬미받으소서(Benedictus)
제4부
제 13곡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
제5부
제14곡 영성체송(Communio)
라크리모사
Lacrimosa dies illa,
눈물 겨운 그 날이 오면,
Qua resurget ex favilla
티끌로부터 부활하여
Judicandus homo reus.
죄인은 심판을 받으리라.
Huic ergo parce, Deus:
하오니 그 사람을 어여삐 여기소서, 주님.
Pie Jesu Domine,
자비로우신 주 예수여,
Dona eis requiem. Amen.
그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아멘.
Dies Irae. 라틴어로 진노의 날을 뜻하는 말로 레퀴엠에 딸린 부속가 중 맨 첫번째 구절이다.
읽는 법은 디에스 이라이(고전 라틴어), 디에스 이레(교회 라틴어).
레퀴엠은 위령미사곡 중 맨 처음으로 죽은 이의 안식을 비는 입당송,
그 다음에 자비를 비는 곡 자비송이 이어지고, 그 뒤에 이어지는 부속가 중 첫번째 단이 진노의 날이다.
가톨릭세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는 쓰지 않지만,
트리엔트 미사를 드릴 때는 여전히 장례/위령미사 부속가로 사용할 수 있다.
성공회에서는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1990년에 출간된 성공회 성가집 4장과 5장
'두렵구나 그날이 되면'이라는 제목으로 두 곡이 수록되었다.
하나는 그레고리오 성가 제1선법의 19절로 된 길고 아른다운 성가이며 다른 하나는 이것보다는
훨씬 짧은 길이로 축약해서 바흐의 곡에 붙였다. 기독교에서 마지막 때와 최후의 심판이 시작되는
세상의 멸망 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강림하여 모든 영혼을 불러모아 죄를 심판하는 '진노의 날'에
죽은 이의 영혼을 가엾게 여겨 달라고 청하는 내용이다. 이에 관한 내용은 요한묵시록에 잘 나타나 있다.
진노의 날
Dies iræ, dies illa
진노의 날, 바로 그 날,
solvet sæclum in favilla,
온 천지가 잿더미 되는 그날,
Teste David cum Sibylla.
다윗과 시빌라가 예언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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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죽음' 직감했다 레퀴엠, 나를 위한 진혼곡이 되겠구나
모차르트 '레퀴엠'
지독한 생활고·과로 시달려 죽기 직전까지도 작곡 몰두
대표 악곡 '눈물의 날(라크리모사)' 애절한 선율·웅장한 음향…절망감 표현
헨리 넬슨 오닐 ‘모차르트의 최후’(1860)
“결국 나를 위한 진혼곡이 될 것 같구나.”
1791년 12월 4일. 오스트리아 출신의 천재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작곡 중이던 '레퀴엠' 중 '눈물의 날(라크리모사)' 선율이 귓가에 들려온 때였다. 모차르트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미사 음악 '레퀴엠'을 작곡하면서 한발 한발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떠올렸다. 처연한 노랫소리에 무너진 모차르트는 이튿날 새벽 1시 서른다섯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 최후의 걸작 '레퀴엠'이 미완으로 남은 채였다. 모차르트의 직접적인 사인은 지금까지도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지독한 생활고와 과로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데에는 이견이 없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서른 무렵부터 몸을 혹사했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같이 작곡에 매달려야 했다.
오스트리아 출신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레퀴엠 작곡 의뢰가 들어왔을 때도 이미 할 일은 산더미였다.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 ‘마술 피리’ 초연을 동시에 준비하던 차였다.
살인적인 일정을 겨우 소화하면서도 레퀴엠을 맡기고 결심한 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파격적인 조건 때문이었다.
'대학교수 연봉의 5배에 달하는 작곡료와 그의 절반을 선수금으로 지급'. 그해 여름 모차르트를 찾아온 신원 미상의 남성은
그렇게 모차르트의 승낙을 받아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모차르트에게 레퀴엠 작곡을 의뢰한 남성은 발제크 백작이었다.
그는 모차르트에게 작품을 받아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처럼 주변에 선보이기 위해 거금을 들였던 것이었다.
작품이 밀려있던 탓에 레퀴엠 작곡은 주문을 받은 지 석 달 뒤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마침내 작곡을 위한 짬이 났지만 문제가 있었다.
모차르트의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단 것이다. 모차르트의 전기를 출간한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1761~1826)은 당시
모차르트에 대해 이렇게 썼다. “병색이 완연했으며 약을 계속 먹어야 했다. 표정은 창백했고 눈은 멍하니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빈 주재 덴마크 영사였던 니센은 모차르트가 남기고 떠난 아내 콘스탄체의 새로운 남편이자 모차르트의 음악 세계를 깊이 이해한 인물이었다. 심각한 두통과 전신 통증, 망상에 시달린 모차르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제자 쥐스마이어의 도움을 받아 레퀴엠 작곡을 이어가야 했다. 그렇게 모차르트가 온전히 작곡을 마친 부분은 ‘입당송(미사에서 사제가 나올 때 신자들이 외는 기도문)’ 전체와 ‘부속가’ 중
여섯 번째 악곡 ‘눈물의 날’의 첫 여덟 마디였다. 완성되지 못한 부분은 모차르트가 남긴 지시와 스케치, 주요 성부 및
음형 등을 토대로 쥐스마이어의 손으로 채워졌다.
쉴즈 '모차르트가 그의 레퀴엠을 노래한다'(1882)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대표하는 악곡은 단연 ‘눈물의 날’이다. 모차르트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곡으로 죽음을 앞둔 그의 비통한 심경이 담겨있다. 곡은 처연한 음색의 바이올린 선율로 문을 연다. 마치 눈물을 한 방울씩 천천히 떨어뜨리는 듯한 묘한 리듬이 짙은 슬픔을 드러내면 이내 4부 합창이 서늘하면서도 조용한 목소리로 애절한 선율을 토해낸다. 고통을 목뒤로 삼켜내듯 제한된 음량에서 고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움직임은 긴장감을 서서히 고조시키는데, 이때 짧게 끊겼던 음들이
하나의 길고도 거대한 선율로 이어지면서 격앙된 악상을 펼쳐낸다.
저음의 육중한 음색과 고음의 애달픈 음색이 하나의 두꺼운 선율을 이루면서 만들어내는 입체감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압도적이다.
후반부에서 현악기, 관악기, 팀파니로 장대히 연주되는 주제 선율과 베이스 성부를 중심으로 켜켜이 선율을 쌓아 만들어내는 합창의
웅장한 앙상블에 온 감각을 집중한다면 모차르트가 그려낸 극도의 절망감과 고통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다. --- 김수현 기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레퀴엠
입당송
자비를 베푸소서
부속가
(분노의 날, 경이로운 나팔소리, 지엄하신 왕이여, 기억하소서, 사악한 자들을, 눈물의 날)
봉헌문(그리스도, 찬미와 기도를 드리니)
거룩하시도다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어린양
영성체송(영원한 빛)
빛나라 · 2019년 04월
모차르트 레퀴엠
I. Introitus 입당송
Requiem 영원한 안식
II. Kyrie 자비송
III. Sequenz 부속가
1. Dies irae 진노의 날
2. Tuba mirum 놀라운 나팔소리
3. Rex tremendae 두려움과 위엄의 왕
4. Recordare 기억하소서
5. Confutatis 저주 받은 자
6. Lacrimosa 눈물의 날
IV. Offertorium 봉헌송
1. Domine Jesu 주 되신 예수
2. Hostias 희생의 제물
V. Sanctus 거룩하시다
VI. Benedictus 복 있도다
VII. Agnus Dei 하나님의 어린 양
VIII. Communio 영성체송
Lux aeterna 영원한 빛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모차르트의 ‘레퀴엠’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그의 초기 미사곡들과 비교해 볼 때 조금은 우울한 듯하면서도 심오한 감동을 주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다소 어두운 색채를 띠지만 전체적으로 일관된 선명한 화성 안에 모차르트의 섬세하고도 강인한 감수성이 스며져 있다. 음악의 느낌은 대단한 힘으로 때로는 극적인 효과로 절정에 이르기도 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귀함이 넘쳐흐르고 있다.
레퀴엠에 관한 일화로 하이든은 “모차르트가 다른 어떤 작품도 쓰지 않고 오직 현악4중주곡과 레퀴엠만을 남겼다고 하더라도 모차르트는 영원한 명성을 얻는데 충분하였을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듯이, 음악 자체만으로도 깊은 감동을 안겨주며 모차르트를 대표하는 영원한 불멸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