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지은이: 양귀자 1. 생의 외침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어느날 아침 문득, 정말이지 맹세코 아무런 계시나 암시도 없었는데 불현듯, 잠에서 께어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한 번만 더 맹세코, 라는 말을 사용해도 좋다면, 평소의 나는 이런 식의 격렬 한 자기 반성의 말투를 쓰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열혈한을 만나면 지체없이 경멸해 버리고 두 번도 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런 내가 어느 날 아침,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부르짖었다. 내 인생을 위해 내 생애를 바치겠다고. 그런 스스로를 향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사이 더 욱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눈물이, 기척도 없이 방울방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리는 것이 아닌가. 처음엔 밤 사이 비가 내려 허약한 천장이 또 새는 것인 줄 알았다. 그것도 아 니라면 흥분해서 얼굴에 땀이 흐르는 줄 알았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아니었다.눈물이었다. 눈물이 없었다면 그 느닷없는 부르짖음은 눈뜨고 꾸는 꿈의 잠꼬대 정도로 잊 혀졌을지도 물랐다. 눈물이 없었다면 나는 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온 격렬한 그 구호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저 혼자 흘러 나온 혼자말 따위 나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 엄연한 증거가 있는 것이었다. 속눈썹에 이슬처럼 달려 있는 마 지막 눈물 한 방울, 젖어 있는 휴지 조가, 맵싸한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먹먹한 가슴, 이런 증거들이 나를 채근하고 있었다. 어서 밝혀 내라고, 어서 명명백백하 게 스스로를 설명 해 보라고, 내가 가진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무언가 요구가 있을 때 가능하면 그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 우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다 하고자 했다. 중학교 때 한 번, 고등학교 때 두 번 가출을 해서 어머니의 애 간장을 녹인 것도 다 그런 성격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는 동생이 내게 새 운동화를 사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집을 나와 인천의 모자 공장에서 두 달 간 돈을 벌기로 했었다. 처음에든 여름 방학 한 달 로 동생의 운동화를 해결할 작정이었는데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두 달 만에 나는 동생과 내 운동화, 그리고 어머니의 가둑 구두까지 사 들고 금의 환향을 하였다. 물론 온 가족의 신발을 마련해 돌아온 어린 딸에게 모진 매질과 욕설을 아끼지 않던 어머니로부터 오랫동안 수모를 당하긴 했지만. 그러나 어머 니의 특별한 외출이 있을 때 내가 사다준 새 구두를 착용하는 것으로 내가 받은 수모를 완벽하게 보상해 주었다. 고등학교 때의 가출은 두 번 다 친구들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가장 친했던 친 구가 먼저 집을 나갔고, 이어서 또 한 친구가 가출을 했다. 혼자 남은 나는 심심 했고, 친구들 역시 심심하면 내게 전화를 해서 놀러 오릭를 청했다. 친구의 무료 함을 달래 주기 위해 첫번째는 일주일, 두 번째는 좀 길게 한 달, 나는 그렇게 긴 외출을 하였을 뿐이었다. 결코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 따위는 해본 적이 없었다. 집이 다소 지겹긴 했어도 인생만큼 지겨운 것은 아니었다. 그 세 번의 가출 동기가 그토록이나 변변찮았던 것에 비하면 결과는 한없이 의미심장했다. 나의 행동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은 '가출 소녀'라는 렌즈 를 통과해서 사람들에게 이해되었다. 나중에는 그 일 자체가 바로 나라는 인간 의 본질이 되어버릴 정도였다. 나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소없이 들었다. 세 번씩이나 집을 나간 맹랑한 년...... 그래서 나는 스무 살이 넘은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내입으로 그 사건을 설명 한 적이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 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씹을 줄만 알았지 즐기는 법은 전 혀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어쨌든, 나는 꽃 피는 3월의 어느 아침 느닷없이 나를 설명해 보라는 스스로 의 요구에 사로잡혔다. 못 할 것도 없는 일이다. 나는 우선 아주 기초적인 자료 부터 나열해 보기로 한다. 굳이 비공개로 남겨 두어야 할 이유가 손톱만큼도 없 는 나의 평범한 신상 명세서는 이렇다. 이름, 안진진. 그렇다. 나는 진진이다. 처음에 부모가 합의하기는 진, 이라는 외자 이름이었 는데 동사무소에 출생신고를 하러 가는 도중에 아버지의 마음이 변했다. 아버지 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결정한 일도 오 분 뒤에 새로운 진지함 에 사로잡혀 뒤집을 수 있는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는 즉흥적으로 내 이름을 바 꾸기로 했다. 그리고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 진자 같은 것은 한 번 쓰면 너 무 무거우니 두 번으로 합시다. 또 딸을 낳으면 선선이, 미미, 이렇게 이름을 지 을 계획이니까. 그러나 그 뒤 더 이상의 딸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진진이란 이름 앞에 ' 안'이 붙는다는 사실까지는 유념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간 지나치게 해석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도 나라는 인간은 평생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며 살아가야 할 운 명인 것이었다..... 나이는 스물다섯 해와 일곱 달. 가족은 어머니와 남동생 각각 한 명씩. 추가 로, 떠돌아다니며 가끔씩 집에 들어오는, 지금은 그나마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아버지를 넣을 수도 있다. 학력은 대학 휴학 중이고 휴학의 이유는 너무나 간단 명료하다. 막대한 등록 금을 마련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철없이 어머니를 졸라대거 나 코피를 쏟아 가며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이토록 잦은 휴학을 할 필요는 없었 으리라. 그러나 그럴 필요가 어디 있는가. 나는 아무런 할 일도 없었고 이십대는 아직도 5년이나 남아 있었다. 휴학 후 돈을 벌기 위해서 거친 직업을 다 열거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소모 될 것이다. 불과 두어 달 전만 해도 직업을 밝혀야 할 이런 기회가 있었다면, 나 는 조금 망설이다가 '서비스업'이라고 대답했어야 했다. 게으른 주인이 운영하는 커피 전문점에서 카운터를 보고 있었으므로. 그러다가 종종 이 나이에 어린애들 에게 찻잔을 날라야 하는 일도 많았으므로 서비스업, 이라는 대답은 아주 적절 한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행히도 사무원, 이라고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직업이 얼마 나 내게 대견했는지는 한 학기 등록금이 모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3월에 복 학 신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이 자리를 얻는 데 내 안간힘은 전혀 소용 이 닿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모부의 지나가는 한 마디는 엄청난 위력 이 있었다. 이모부는 전화 한 통화로 이 일을 해결했다. 그리고 이모부는 말했 다. 우리 회사에는 자리가 없어서, 라고. 취미는, 없다. 나는 이 취미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취미란 단어는 악취 미의 줄임말과 같은 뜻으로 종종 사용된다. 사람들이 진짜로 즐기는 유희는 고 상한 것보다는 다분히 악의적인 것들이 훨씬 더 많다. 실제로 언제 어디서든 당 당하게 클래식 음악 감상이 취미라고 말하던 커피 전문점 사장의 진짜 취미는 유부녀 홀리기였다. 사장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 취미는 돈도 들지 않고, 위험 부담도 없는 데다, 짜릿한 재미까지 철철 넘친다고 했었다. 이 취미에 문제가 있 다면 신상 카드에 떳떳이 기록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공개적으로 밝힐 수 있는 현재의 내 총재산은 사십이만 팔천원이다. 나의 재 산 규모가 진실로 얼마인지 어머니나 남동생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장만 해 준다면, 거기에 열 밸를 곱한 액수라고 조용히 귀뜀해 줄 수도 있다. 돈 모으기 를 생활 신조로 삼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는 내 또래 누구보다도 더 나는 정확하게 알고 있는 편이었다. 사람들이 때때로 어떤 거래나 협상의 자리에서 아주 진지한 얼굴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야"라 고 말하는 것을 나는 절대 믿지 않는다. 그런 말은 기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돈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 외 몇 가지 신상 명세를 추가할 수도 있겠다. 가령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라든지, 혐오스럽지도 경이스럽지도 않은 외모를 지녔다든지, 이것저것 잡동사니 로 읽은 책이 꽤 되는 편이어서 그럭저럭 머릿속은 채우고 있는 편이라든가 하 는 것들. 그리고...... 그리고, 뒤에 더 이상 이을 말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이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빈약한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스물다섯, 결혼 적령기라는 사실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내 나이 또래의 모든 여자들이 그렇듯이, 지 금 내게도 머지않은 시간에 청혼을 할지도 모들 두 명의 남자가 있다. 참 이상 한 일이지만, 이십대에는 가만히만 있어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얽어맬 수 있는 기회들이 심심찮게 찾아온다. 나처럼 전혀 내세울 것이 없는 여자에게도 결혼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이십대의 젊은 이라는 것은 어떤 조건과도 싸워 이길 수 있는 천하무적의 무기이니까. 벌써 결혼을 한 여학교 동창들이 바로 그 천하무적의 무기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익히 보여 주는 증거일 수 있다.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K, 그녀 는 뚱보인데다 수다스럽고 거기다 덧붙여 몹시 해독하기 어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K가 작년에 슈퍼마켓의 젊은 사장과 결혼을 했다. 남자는 겉으로 보기엔 몹시 훌륭햇다. 절대 K를 선택할 이유가 내게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K 가 우유를 사러 슈퍼에 들락거린 것이 만남의 시작어었다고 했다. 우유가 그런 놀라운 일을 해치었다. 우유가...... M은 병약한 체질로 학교 다닐 대도 걸핏하면 장기 결석을 하던 친구였다. 더 이상 자리에 눕지 않고 사람 구실만 하면 살수 있어도 원이 없겠다며 눈물짓던 M의 어머니가 생각난다. 그런 M이 미난 의사와 결혼한 지 벌써 2년째다. 병원 복도에서 빈혈로 쓰러진 M을 마침 그 미남 의사가 발견하고 병실로 옮겨준 것 이 사랑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이번에는 빈혈이 그런 놀라운 일을 해치운 것이 었다. 빈혈이...... 아무리 빛나는 이십대라고 해도 극적인 연애담을 누구나 다 소유하는 것은 아 니다. 특히 나처럼 매사에 무덤덤하고 세상사에 대해서 시큰둥한 인간한테는 설 령 그런 극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해도 발길로 걷어차 버릴 가능성이 많다. 아마 이런 뒷말쯤은 군시렁거릴지도 모르겠다. 뭐 이런 일이 다 있담. 유치하게시리. 그랬으므로 지금 내게 나타난 두 명의 남자와도 나는 당연히 몹시 무덤덤하게 만났다. 유치해질 순간은 얼마든지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번번이 내가 그것을 용납치 않았다. 감상적이고 유치하게 살지 않겠다는 자세는 약간 과장되게 말한 다면 내가 지닌 굳건한 세계관이었다. 내게 친구가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은 다 그 때문이었다. 나는 감상과 유치함에 대해 언제나 과감하게 적대적이었으니까. 추리해 보면, 아마도 내 경우에 있어서는 나의 이런 태도 자체가 K의 우유, 혹은 M의 빈혈과 같은 효과를 내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이십 대의 젊음에게는 온갖 것이 다 사랑의 묘약일 수 있다. 이십대한 나이는 무언가 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제 조금씩 가닥이 잡힌다. 되돌아보면 어제도 우울했고 그제도 우울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물까지 흘리며 절박하게 부르짖을 만큼 우울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확실히 예전의 나와는 달랐다. 나는 걸으면서도 생각했고 일을 하면서도 생각했고 자면서도 생각했었다. 사랑에 빠 져 행복한 사람을 보면서 생각했고, 등산에 빠져 주말마다 산에 가는 행복으로 나날을 보내는 옆자리 직원을 보면서도 생각했고, 죽을 때까지 공부만 할 수 있 다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되노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대학 동기를 보면서도 생 각했다. 그런데 나는? 스물다섯 해를 살도록 삶에 대해 방관하고 냉소하기를 일삼던 나는 무엇인가. 스물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모엇에 빠져 행복을 느껴 본 경험이 없는 나, 삶이란 것을 놓고 진지하게 대차 대조표를 작성해 본 적도 없이 무작정 손가락 사이로 인생을 흘려 보내고 있는 나, 궁핍한 생활의 아주 작은 개선만을 위해 거리에서 분주히 푼돈을 버는 것으로 빛나는 젊음을 다 보 내고 있는 나. 더욱 나쁜 것은, 아직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으면서 두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해 서 결혼을 해버릴 수도 있다고 중얼거리는 '나'였다. 그렇게까지 해서 급히 결혼 을 해야 할 이유가 내게는 전혀없다. 하지만 결혼말고 내 삶의 부피를 늘려 줄 만한 어떤 일이 내 앞에 있는 것도 아니다. 빈약한 인생을 걱정한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결혼에 빠져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어리석은 판단에 사로 잡히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많은 시간 충분한 검토를 거치겠다는 각오만 열렬하다면 말이다. 그랬다. 나는 흘러간 유행가의 제목처럼 참 바보처럼 살았던 것이었다. 그런 깨달음이 언제부터인가 아주 조금씩, 마치 실금이 간 항아리에서 물이 새듯 그 렇게 조금씩 내 마음을 적시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항아리의 균열은 점점 더 커 지고, 물은 걷잡을 수 없이 새어들어 오고, 마침내 마음자리에 홍수가 나 버려서 이 아침 절박한 부르짖음을 토해 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렇게.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걸어야 해. 꼭 그 래야만 해!" 홍수가 나 버리도록 마음자리가 불편할 때가지 나를 참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 까. 인생을 방기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면서까지 무위한 삶을 견디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비로소 이야기의 핵심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여태까지 이 말 을 하고 싶어서 쓸데없는 군말들을 많이도 늘어 놓았구나 하는 알 수 없는 긴장 감마저 느낀다. 내 삶이 이렇게 굳어진 데는 하나의 까닭이 있었다. 아마도 나는 이 아침, 내 삶을 변명하기 위해서라도 꼭 이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 삶을 변명하기 위해서 어머니의 삶을 들취 내야 한다는 일은 정말 어리석 은 변명처럼 들린다. 게다가 스물다섯의 다 커 버린 나이에는 수치스러운 변명 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미 오래 전에 검토를 끝내고 마음 속에 묻어 두었던 일 이었다. 그러나 다시 검토할 수도 있다고 나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내 삶의 뿌리 를 더듬기 위해 어머니가 등장하는 것이 꼭 부끄러운 일만은 아니다. 어머니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두 사람이 부모도 구별 못 할 만큼 닮아 서 키우는 동안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외할머니한테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 었다. 얼굴도 같았고, 성격도 같았고, 하다못해 학교 성적까지도 모엇이든 두 사 람은 똑같았다. 같은 집에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생각을 하며 늘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은 마치 둘로 나누어진 한 사람인 양 보였다고 했다. 도저히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한 사람. 어머니와 이모는 결혼과 동시에 비로소 두 사람으로 나뉘었다. 두 사람으로 나뉘자마자 이들의 삶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세상의 행복이란 행복은 모두 차지하는 것으로, 나머지 한 사람은 대신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소유하는 것으로 신에게 약속이나 받았던 듯이 그렇게 달라졌다. 안타깝게도 나 는 불행을 짊어진 쪽으로 편입되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머니와 이모가 그토록이나 혼란스러웠다. 빗물 새는 단칸 방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를 보다가 이모 집을 가면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 의 이모가 비단 잠옷을 입고 침실에서 나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었다. 울고 있던 어머니가 무대 뒤로 뛰어가 금방 비단 잠옷으로 옷을 갈아입고 행복한 또 다른 사람 역할을 연기하는, 일인 이역의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고나 할 수 있을는지. 그때까지만 해도 삶의 고단함이 어머니의 얼굴 을 많이 할퀴어 놓지 않아서 이모와 어머니를 분별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 이었다. 고백하자면, 비단 잠옷 쪽이 어머니이지 않은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혼란 스러워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이모의 딸이었다면, 그랬다 해도 가난하고 억 센 이모와 부자이면서 부드러운 어머니를 혼동하곤 했었을까. 실제로 나와 동갑 인 이모의 딸은 쌍둥이 이모에 대해서 한 번도 혼란을 느껴 본 적이 없다고 단 호하게 말하곤 햇었다. 그 애는 새침한 표정으로 늘 이렇게 말했었다. 저기 니네 어머니 있다...... 니네 어머니, 아니 우리 어머니와 이모를 놓고 비교하는 일을 멈춘 때는 내가 사람들 표현대로 '심심하면' 가출을 하기 시작한 무렵과 거의 같았다. 나는 똑같 은 조건 속에서 출발한 두 사람이 왜 이다지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만 삶에 대한 다른 호기심까지도 다 거두어 버렸 다. 이런 것이 운명이라면, 그것을 내가 어찌 되돌릴 수 있으랴. 인생은 탐구하 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이것이 사춘기의 내가 삶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어머늬의 경험이 나에게서 멋진 삶을 살아 보고자 하는 동기 유발 을 앗아가 버린 것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정리를 해놓고 보니 너무 무겁다. 풀씨가 바람에 날 리듯, 마음 속에서 막연히 부유하던 생각들도 정색을 하고 정리를 해보면 깜짝 놀랄 만큼 심각해지는 것이 정말 이상하다. 내 삶이 이토록 지리멸렬해진 것은 모두 다 어머니에게 떠넘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원인을 분석한다고 때로는 문제가 있는 가 정에, 혹은 사회에, 아니면 제도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나는 별로 신 뢰하지 않는다. 가끔 그런 분석들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자신의 방종을 정당화하 려는 젊은 애들을 만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교활함을 참을 수 없어한 다. 특히 열대여섯 되는 어린애들이 텅 빈 머리로 앵무새처럼 그런 핑계를 대고 있으면 뺨이라도 한 대 올려 붙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야 한다. 영악함만 있고 자존심은 없는 인간들. 그래서 나는 불행한 어머니에 대해, 행복한 이모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한껏 담담하게 말하고자 한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내 윗대의 상황이 좀 미묘하긴 했 지만, 내 삶이 그것에 완전히 빚져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그러나, 그러나, 이런 말은 어떤가.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 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들할 수 없어 한다.-- 얼마 전 어떤 책을 읽다가 우연히 발견한 구절인데, 내게는 아주 훌륭한 충고 가 되어 준 말이었다. 내 삶을 변명하기 위해 어머니를 끌어댈 용기를 품게 한 것도 고백하자면 바로 이 구절 때문이었다. 인생을 바로 이런 것이었다. 나의 인 생에 있어 '나'는 당연히 행복해야 할 존재였다. 나라는 개체는 이다지도 나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해서 꼭 부그러워 할 일만은 아니 라는 깨달음,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 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 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 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
첫댓글 잼 납니다
재미를 반감시키는 철자법 오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란 말이 생각남니다. "남들이 잘되는 꼴은 못보겠어"와 같은 맥락(남의 불행은 당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