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
고향 생각에 심한몸살을 앓는다.
중국 예기禮記 단궁상편檀弓上篇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 나온다. 이 고사성어는 여우가 죽을 때에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뜻으로 죽음을 앞두고 고향을 그리워 한다는 말이다. 네가 지금 그런 처지 같다.
나는 고향이 두 곳 있다. 태어난 고향인 경주와 삶의 고향인 대구를 말한다. 지금은 삶을 정리 하려는 곳인 서산에 살고 있다. 경주에서 20여년 이상 살다가 학교와 직장 따라 포항 서울 대구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그러다가 대구에서 50여년 가까이 생활하다가 올해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하게 된 계기는 서산에 살고 있는 막내처남의 권유로 이루어졌다. 처남의 권유를 받은 아내가 지난해 하반기 어느 날 뜬금없이 서산으로 이사 가서 동생과 같이 살잖다. 처음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 단호히 반대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흔 중반의 나이에 삶의 기반이 어느 정도 잡혀있는 대구를 떠나는 것이 몹시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 생각을 말해도 아내는 몇 차례 더 졸랐다. 그 때마다 나이가 들면 객지에서 살다가 고향 가까이 간다는데 생면부지의 서산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를 염려했다.
대구는 나의 탯줄을 묻은 경주가 가까워 언제라도 갈 수 있고, 대구는 오래 살아서 지리를 잘 알고, 지인들이 있고, 관계를 맺고 있는 곳들이 여럿 있어서 편안히 생활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새로운 지역인 서산에 적응하려면 도전정신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 나이에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대부분 그 나이에 새로운 곳에 가서 적응하기란 쉽지 않으니 가지 말라고 말렸다. 지인들이 만류한다며 이사를 포기하고 대구에 살자고 했더니 서산은 서해안 바다가 있고 유적지가 많고 주위에는 흠모할인물의 고장이라 이곳보다 삶이 풍성할 것 같으니 극구 이사를 가자는 설득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결국 가기로 승낙 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산으로 와서 살아 보니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삶의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고향이 늘 눈에서 아른 거려 눈물이 핑 돌았다. 그곳에서 살 때는 싫증이 나고 어디든지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서 살고 싶을 때가 있었다. 허지만 막상 떠나와서 살아보니 고향생각이 나서 때로는 잠을 이루지 못해 카톡에 저장해둔 추억의 사진을 본다. 그럴 때 마다 서산에 빨리 적응하려고 도시의 속살을 보며 이곳저곳 다니는데 마주치는 길이며 나무며 건물 등 모든 것이 대구에서 살던 곳과 연상이 된다. 한마디로 심한 향수병에 걸린 환자 같다고나할까.
이곳에 오기 전에는 고향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이사를 온 후로는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직장업무로 사할린 동포를 만났을 때였다. “소원이 무엇이죠.” “고향 가서 죽고 싶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 당시는 사할린동포가 고향에 가고 싶다는 간절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8개월 동안 우리 집에서 간병을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방이 꽉 막힌 아파트에서 못살겠다. 마당 넓은 경주 집으로 가서 살고 싶다”고 문을 열고 나갈 때 마다 짜증을 냈다. 80년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 연출을 할 때 고향을 이북에 두고 온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절절한 얘기를 듣고 애타는 그 마음을 몰라주었다. 지금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생활해 보니 사할린동포와 어머니, 실향민의 고향에 가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늦게나마 어머니께 불효를 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난 노천명 시인은 ‘고향’을 이렇게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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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중략)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중략)
시나 수필뿐만 아니라 동요, 가곡, 대중가요에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작품이 수없이 많다 1972년 김상진이 발표한 “고향이 좋아”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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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도 정이 들면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말을 했던가(중략)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
근자에 들은 일이다. 고위공직자가 퇴직을 하고 어린 시절 추억이 잠자는 고향에서 살고 싶어 갔는데 한 평생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주민들이 객지에서 편하게 지낼 때 고향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며 냉대를 하기에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 왔단다.
난 때때로 고향에서 있었던 추억에 잠긴다.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이 호수처럼 고여 있는 초가집, 어린 시절 또래들과 놀았던 경주남산, 삼릉, 오릉, 시냇가, 넓은 들, 당나무, 대구의 고산골 산책길, 신천강, 수성못, 아파트 단지 내 단감을 몰래 따먹던 일, 단골커피 집에서 주인이 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래를 감상하며 차를 마시던 일들이 빛바랜 흑백사진이 되어 스친다. 때로는 꿈속에서 지인들을 만난다. 이튼 날 꿈에서 만난 지인에게 안부를 전한다. 그럴 땐 지인도 보고 싶다며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현대인은 어디 가던 정이 들면 고향이라 한다. 그래서 제 2의 고향이란 말이 생겼는지 모를 일이다. 사자성어에 병주고향幷州故鄕이 있다. 이 말은 중국당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병주에 살며 고향인 함양을 그리워 하다가 다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더니 정들어 버린 병주를 그리워 한다는 데서 생겨났단다. 나 역시 서산을 마음의 고향을 만들려고 노력을 했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에게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고 카톡을 보내고 식사를 하며 지내지만 일흔 중반이라서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는 편이다.
흔히들 객지에서 고향 까마귀만 보아도 반갑다는 말을 들었다. 말씨가 다르고 행동과 삶의 양식이 다른 곳에서 동질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무척 반가웠다. 한번은 간월암에 갔다가 모처럼 바닷가에 왔으니 해물 먹거리를 사려고 상점에 들렀다. 이게 웬일인가! 주인이 대구범어동에서 살다가 38년 전에 이사를 왔단다. 너무 반가워 사지 않아도 될 먹거리를 몇 가지 더 사온 일이 있었다. 주인에게 “적응이 힘들다”하니 “세월이 약이란다” 나약해져 가는 마음 밭을 가꾸려고 사찰에 갔는데 스님이 청송출신이라 무척 반가웠다. 약국에 약을 사러 갔더니 경북하양이 고향인 약사가 “어디서 왔어요.” “대구에서 왔습니다.”하자 반갑다며 약값을 20% 할인해주었다.
이곳에서 생활하는데 뭔가 고립되어 가는 자신이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고향친구를 만나로 간다. 가는 날은 새벽에 출발해서 대구에 도착하면 지인을 만나고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데 왕복 열 번 내지 열 두 번 차를 갈아타야한다. 이런 날은 피로에 지친 파리한 모습을 본 아내는 이사를 가잖다. 힘이 들 때는 당장 가고 싶지만, 이사를 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는 일이라 고심을 하며 지낸다.
오늘도 향수에 젖어 푸른 하늘을 본다.
첫댓글
나이가 들수록 고향의 그리움은 쌓여가지만
또 살다보면 차차 정이 들겠지요.
회장님 반갑습니다. 4월 16일 대구로 이사를 했습니다
다시 오셨군요.
행사나 기회가 되면 봬야겠습니다.
예 저도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