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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찾았다.
"겨우 찾았어.... 이번엔 늦을 뻔했네."
"아....."
놀이터에 숨어있었던 예진이 절망적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동안 예진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에게 죽었다.
목이 졸려서도 죽어보고, 물에 잠겨서도 죽어보고, 머리가 깨져서도 죽어보았다.
처음 몇 번은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소리지르기도 해보고, 설득해보기라도 하고, 도망다녀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이제는 포기했다.
남자는 자신을 죽이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예진의 모든 말은 남자를 잠깐 망설이게 만들지언정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남자는 확고한 의지로 예진을 죽여나갔다. 그 눈에는 빛이 없다.
"왜, 왜 이러는거야....?"
"사랑해, 예진아. 그러니까 제발......"
남자는 펑펑 눈물을 흘리며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말 뒤에는 언제나 같은 결과가 있었다.
남자의 그림자가 예진에게 드리워지고, 예진은 다시 한 번 죽었다.
이번엔 추락사였다.
20.너는 그 남자를 알잖아.
"수민아. 요즘은 이상한 꿈을 꿔."
"어떤 꿈?"
"그냥. 끝 없이 살해당하는 꿈....."
수민은 걱정스럽게 예진을 보았다. 수민이 보기에 그 일이 있고 나서 예진은 점점 이상해졌다.
잠깐 밝아졌다가도 다시 우울해지길 반복했다. 최근엔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만 다시 이렇게 초췌해졌다.
병원에 가보자고 하면 정신병자 취급하냐고 화를 낼 것이 뻔했다. 그래서 약간 위안이라도 삼을 만한 적당한 곳을 떠올려냈다.
"...내가 아는 용한 무당집이 있어. 거기라도 가볼래?"
기묘한 향을 풍기는 점집.
차를 내오던 무당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예쁜 얼굴을 찌푸렸다. 혀를 차면서 대놓고 콧방귀를 뀌었다.
"친구한테 거짓말을 하면 못쓰지...... 널 걱정해서 여기까지 데려온 친구인데."
싸늘하게 식은 무당의 눈초리가 향하자 몸이 굳는 것 같았다.
"넌 그 남자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잖아. 안 그래?"
"무슨, 무슨 말을 하는거에요!"
"무슨 말이긴."
창백한 낯빛의 무당은 소름끼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었다. 무당은 천천히 예진에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까치에게 왜 새 이 대신 새 집을 달라고 했는지 아니?'"
무당은 이미 전부 알고 있었다. 예진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1.저녁 7시, 지는 해.
빗방울이 뺨을 두드린다. 이어서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해오름 공원의 벤치 위에서 졸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공원 정말로 오랜만이네. 일이 바빠지기 전만해도 예진이랑 자주 산책했었는데.
다이어트한다고 할 때 치킨 시켜주면 날 째려보면서도 우물우물 먹는 게 정말 귀여웠는데.
시계는 7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이럴 때 치맥하면 딱 좋겠는데 말이야.
어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검은 색 안개와 흰 색 꽃봉오리들이 공원 주변에 내려앉아 있었다.
무시하고 나가려하자 다시 시계탑으로 돌아왔다.
"이게....뭐야...."
나갈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나가보려고 했지만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몇 번쯤 공원 안과 밖을 오갔을 때, 꽃이 괴상한 신음 같은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그 안에는 기괴하게도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왜 그랬어, 이 친구야.....]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식당의 단골이었다. 말이 끝나자 얼굴은 눈을 감고 급속도로 시들더니 목이 똑하고 떨어져 나동그라졌다.
떨어진 꽃을 주우려고 하자, 손이 닿기도 전에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기분 나쁘게 변한 공원을 나갈 방법을 찾아 돌아다니다 지쳐 결국 벤치에 앉았을 때, 엉덩이 아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였다.
노트 한 장을 북 찢어낸 것 같은.
펴보자 누군가가 휘갈겨쓴 내용이 보였다. 꽤나 악필이어서 읽는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당신이 누군지는 몰라요. 하지만 만약에 당신이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당신은 지옥에 떨어졌어요.]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같은 내용에 무시하려고 했지만 꾸물꾸물 공원 밖을 기어다니는 검은 안개가 신경쓰여 다시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당신은 아마 죽을 때 가지고 죽었던 물건과 함께 왔을거에요.
저의 경우에는 노트와 연필, 교복과 커터칼이었기에 이름 모를 당신에게 편지를 남길 수 있었죠.
제 노트는 24장. 최대한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쓰려고 해요.
내용은 최대한 기억해주시고, 다음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다시 벤치에 놓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기하]
그리고 생각나는 죽기 직전의 기억.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뻗었다. 간신히 집어들고 안에 있던 내용물을 손바닥 위에 탈탈탈 털었다.
....자살할 때의 기억이다.
이 곳은....
그래서 오게 된 지옥인가보다. 그것 참 너무하네.
사람이 말야, 자살 좀 할 수 있지.
뒷면으로 넘기자 역시 휘갈겨 쓴 글씨로 무언가가 쓰여있었다.
[1. 노을이 지고 있나요? 당신의 몸은 무슨 색깔인가요? 색깔이 남아있을 경우, 그림자가 있을 경우엔 어서 화장실의 거울로 들어가세요.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어요.]
선명한 노을색이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회색조를 띄고 있는 공원에도 붉은색 햇살이 끼얹어져 불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햇살이 닿아도 내 몸은 회색을 띄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몸에서 이어지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색깔이 남아있지 않다면 무슨 뜻이지?
[2. 당신이 회색이라면 화장실에 들어가지 마세요. 이곳에선 생리현상을 해소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그곳에 갈 이유는 전혀 없다는 뜻이에요.
특히 공원에 비가 내릴 때에는 왠만해서는 화장실 근처에 가지 마세요. 거울 너머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은 당신 뿐만이 아닙니다.]
다행히도 내 자살시도는 성공했던 모양이다. 완벽하게 죽은 것이다. 하지만 거울 너머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이지?
공원에는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옷과 종이가 젖어들지는 않았다.
마치 같은 장소에 있지만 서로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그것이 비 때문인지, 아니면 편지에서 느껴지는 스산함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혹시 모르니 화장실로는 가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계속 쭈욱 읽어내려갔다.
[3. 살아있는 사람에게 어떤 감정도 갖지 마세요.
4. 스스로를 상처입히지 마세요.
이미 죽었으니 모든 말은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이 뒤는 찢겨져있어 읽을 수 없었다.
2.저녁 7시 32분.
시간이 느리게 간다. 체감상 4배는 더 느리게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이 갈 때마다 국화꽃이 피어난다. 총 32송이의 국화꽃들.
괴기스러운 그 꽃들이 열리면 그 틈으로 보이는 것은 전부 인간의 얼굴이었다.
이제는 저 해괴한 모습도 적응이 되어버렸다.
두 송이의 꽃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보니 국화였다. 인간의 얼굴을 한 국화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익히 아는 얼굴이다. 주방장님과 지금은 나와 사이가 멀어진 고아원 친구 지훈이었다.
[멍청한 놈. 그리도 남는 건 몸 밖에 없다고 말했었는데...]
[거기선 좀 편하냐...?]
두 송이의 인면화는 나를 타박하다 꽃봉오리 채로 시들어 떨어졌다. 계속 이런 식이다. 추측해보건대, 아마 이 인면화들은 내 장례식장에 와주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국화인 것도 그렇고, 나에게 하는 말도 그렇고. 그나저나 지훈이 놈, 와줄 줄은 몰랐는데. 죽기 전에 화해할 걸 그랬나.
"뭐, 뭐지?"
이상한 광경에도 무뎌지기 시작할 때쯤, 한층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방금까지 들고 있던 종이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기하라는 사람이 썼던 편지가.
벤치를 보자 다행히도 종이는 다시 벤치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당신은 어떤 이유로든 지옥에 떨어진 것이고, 그걸 되돌릴 방법은 없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이 지옥은 당신이 선택한 지옥이라는 것을.
하지만 아주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자정으로 절 만나러 오세요.
꽃이 시들 때마다 시간이 간다는 사실은 눈치채셨나요?
전부 시들었을 때, 시간은 자정이 됩니다.]
그 내용이 바뀌어있었다.
뒷면으로 넘기자 그 전의 종이가 그랬듯 규칙들이 드러났다. 여전히 휘갈겨 쓴 글씨지만 군데군데 핏방울이 번져있었다.
[5. 시계탑에 눈동자가 보이기 시작한다면 조심하세요.
그 여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을 불러올 거에요. 다행히도 공원에는 숨을 곳이 있어요.
목 잘린 자는 경고의 의미.
그가 보인다면 화장실 칸에 숨어있으세요.
목 위가 없으니 그는 당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눈 꿰멘 자는 당신을 쫓겠다는 의미.
그가 보인다면 그가 들여다 볼 수 없는 화장실 안의 거울 안으로 도망가세요.
그들은 적극적으로 당신을 숨겨줄 거에요. 그렇지만 필요할 때 빼고는 가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입찢어진 자가 보인다면 공원 중앙의 시계탑 아래쪽에 서 있으세요.
6. 온 몸이 빨간 사람들을 피하세요.]
검은 옷을 입은 사람? 온 몸이 빨간 사람?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과 그런 단어로 이루어진 규칙들에 머리가 아파왔다.
이상하게도 7번에는 줄이 그어지고 핏방울들로 오염되어 있어 알아보기 힘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7. 자신을 지애라고 칭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기하가 기다리고 있으니 시계탑 앞으로 오라고 전해주세요. ]
아마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지.
선을 박박 그어 지운 흔적 아래로는 새로 쓰인 것임이 분명한 글씨가 보였다. 절대로라는 단어에는 별표표시가 되어있다.
[사랑이든, 증오든 다른 누군가에게 갖는 감정의 말로는 상당히 비참해요. 6시 이전까지는 누구에게도 감정을 가지지 말고,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생각하세요.
절대로, 절대로, 다른 누군가에게 애정을 갖지 마세요. 이건 당신을 위한 충고에요...-기하]
3.멈추지 않는 비가 내린다.
저녁 7시 53분.
비가 계속 내린다. 이변을 느낀 것은 시계탑을 봤을 때였다. 시계탑에는 눈동자가 있었다. 분명 조심해야한다고 했지. 쪽지의 내용을 떠올리며 정자 뒤편으로 숨어 눈동자를 보았다. 그 눈동자는 벤치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벤치에는 누군가가 앉아 몸을 흔들고 있었다.
내 몸이 젖지 않는 것에 비해, 긴 머리의 그 여자는 온통 젖어있었고, 몸이 좌우로 끝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말을 걸어보려다가, 위험할 것 같아 그냥 멀리서 지켜보기로 했다. 잘 보이지 않아 이마를 찡그리고 집중하자, 여자의 모습이 자세히 보였다.
"아. 흡..."
숨을 깊게 들이쉬며 입을 막았다. 다행히도 소리는 새어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자는 몸을 흔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칠게 뭔가를 긁어내고 있었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그것으로 정신 없이 팔목을 그어대고 있었던 것이었다. 새빨간 옷을 입은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새빨간 것은 여자의 몸이었다. 과학실에 나오는 해부모형 같은 모습으로, 여자는 노래를 부르며 자해하고 있었다.
-그제는 내가 죽었어요
-어제는 그래서 울었어요
-오늘은 내가 웃어요
-웃어요
-웃어요
여자는 고장난 테이프처럼 계속 같은 노래를 반복했다. 반복하면서 웃어대었다.
-아하하하, 하하. 하하하하!
여자의 온 몸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빗물과 섞여 핏물이 점점 퍼져나갔다. 눈을 떼면 곧장이라도 내 곁에 다가올 것 같은 섬뜩함에 가만히 보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꺼꺼꺼꺼꺼...
꺼꺼꺼꺼꺼.....
뒤쪽에서 목이 긁히며 나는 것 같은 숨소리. 빗소리 사이로 들리는 그 선명한 소리에 등골이 쭈뼛서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물웅덩이 사이로 그것이 비친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형태였다.
목 위로는 아무 것도 없는.
꺼꺼꺼꺼꺼....
목 없는 그것이 내쪽을 향해 다가온다. 숨이 쉬어지질 않는다. 벤치에 앉아있던 여자가 그래도 한때 인간이었던 것 같이 느껴진다면 뒤에 있는 검은 옷을 입은 무언가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 같았다. 눈동자만 겨우 굴려 쳐다보았다. 손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그제는 내가 죽었어요.......
-어제는 그래서 울었어요.......
-오늘은 내가 웃어요.......
다시 여자가 노래를 불렀다.
흐꺼꺼꺼....
흐꺼꺼꺼꺼꺼꺼.....
그것에 얼굴은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웃고 있는 것이다. 내 뒤에 있던 검은 옷의 형체는 웃으면서 서서히 여자의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제는 내가 죽었어요....
-어제는 그래서 울었어요.....
-오늘은 내가 웃어요.......
형체가 여자를 향해 미끄러져 다가갔다.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그것은 새까만 손을 뻗어 여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히힉! 히히힉!
여자는 계속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머리채를 잡힌채로 질질 끌려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에, 검은 옷의 목 없는 형체는 분명히 내쪽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해야하지? 분명 그것은 나도 잡으러 올 것이다. 안개 속에 잡혀가면 어떻게 되는거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끝없이 올라온다.
분명 저번에.....
[......그가 보인다면 그가 들여다 볼 수 없는 화장실 안의 거울 안으로 도망가세요. 그들은 적극적으로 당신을 숨겨줄 거에요.]
그래, 거울! 거울 속으로 도망가면 날 구해줄 사람이 있다고 했어! 정신 없이 공원의 화장실로 달음박질쳤다.
-?어있디어 아혁수
거울 건너편에선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거울을 향해 손을 뻗자 표면이 일렁거리면서 나를 빨아들였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어딘가로 한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4.거울 건너편의 세계
다시 공원 안 화장실, 거울의 앞이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미약하게나마 색이 있었다. 다만 내 몸은 여전히 흑백의 색이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비는 오지 않았다. 살풍경하던 공원은 너무나도 예쁘고 아기자기해서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시계탑을 보니 모든 숫자가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마치 거울로 비춰보는 것처럼.....
"수혁이?"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보이는 것은 순박해보이는 얼굴에 토끼 이빨. 그리고 볼의 가운데 찍혀있는 점.
..........내가 사랑하던 그 얼굴.
"예진아....."
"어디.... 어디 갔었던 거야. 기다렸잖아."
울상이 되어 내 가슴팍을 콩콩 때린다. 맞은 것은 가슴팍이었지만 다른 곳이 아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금 목 위로 없는 사람이 쫓아와. 도와줘. 검은 옷을 입었는데."
예진이는 바로 차분히 가라앉은채로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여기에 숨자."
조각상 뒤에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우리는 좁은 그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나란히 앉았다.
"이 공원, 오랜만이네."
한 동안 서로 말이 없다가, 처음 말문을 띄웠다.
"그러게.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한 것도 오랜만이네에."
예진은 약간의 불만을 담아서 장난스럽게 삐쭉거렸다.
"항상 바빠서 미안해. 좀 더 너와 시간을 보냈으면 좋았을텐데."
사과하자, 예진은 삐죽이던 입을 집어넣고 환하게 웃었다. 내가 미안해할 때면 예진은 언제나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넘겼다. 실은 굉장히 속상할텐데도, 날 배려하겠답시고 그냥 넘겨버리는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우리 첫 키스 장소도 여기잖아. 그 때 기억나?"
"기억하지. 내가 머리 각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쩔쩔매니까 네가 화나서 내 멱살 잡고 주둥이 부딪혔잖아."
"어허, 주둥이라니! 지는 아가리면서."
우리는 어린 아이들처럼 한참을 키득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삐삐- 삐삐- 소리가 울렸다. 예진이가 아쉬운듯 내 볼을 붙잡고 뽀뽀를 했다.
"나, 이제 곧 출근시간이라 가볼게. 또 보자."
촉 소리를 내며 따뜻한 입술이 볼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다시 화장실 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화장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꾸로 된 숫자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비가 내리는 공원은 당연하게도 예진이가 없었다.
5.현실에 버려진
알람 소리 때문에 예진이 눈을 떴을 때, 예진은 펑펑 울고 있는 채였다.
분명 꿈을 꾼 것 같은데.
굉장히 행복했던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좀 더 꿀 걸.
핸드폰을 틀자 수혁의 얼굴이 한가득 화면을 채웠다. 그 사진은 수혁의 영정사진으로 사용되었다. 사진 속의 수혁은 환하게 웃고있었기에 영정사진 속 수혁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사진을 찍은 것은 봄날이었다. 유독 바람이 따스하게 얼굴을 쓸어주던 날이었다.
그 날 수혁은 숨기지도 못하는 안절부절한 기색이었다. 발발 떨면서 수혁은 반지를 내밀었다. '나와......' 대답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해져 있었다. '그래.' 영화처럼 낭만적이지도, 연극처럼 극적이지도 않았지만 완벽한 순간이었다. 그 완벽한 순간에 벚꽃은 흩날리고 마주잡은 두 손은 따뜻했으며 햇살은 눈부셨다. 충동적으로 사진을 찍은 것은 그런 이유였다. 영정사진으로 쓰거나, 죽은 남자친구를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 아름다운 순간을 고정시켜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서.
수혁은 죽었다. 따뜻했던 손발은 차가워졌고, 수척해져 몹쓸 몰골이 되어 돌아왔다. 함께 했던 봄날은 영영 사라졌고, 결혼하자는 약속도 무색해졌다. 그렇게 예진 홀로 덩그러니 남아버렸다.
꿈 속에서 예진은 1년 전 모습의 수혁을 만났다. 공원에서 홀로 회색빛이던 수혁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예진은 수혁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1년 전처럼 평범하게 투정부리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회사를 떠올려서 깨어나 버렸다.
왜 거기서 회사 생각을 해서는.
바보 같이.
바보 같이.....
자책하며 눈물을 닦고 나갈 준비를 했다. 믿기지 않게도, 예진은 살기 위해 회사에 갈 준비를 느릿하게 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수혁은 다음 날에도 꿈 속에 나타났다.
10.왜
거울 너머의 세계로 넘어가면 예진이가 있었다. 언제나 거울너머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울의 건너편에서 예진이가 내 이름을 거꾸로 부를 때만 겨우 넘어갈 수 있었다.
-아혁수
자주 넘어가지 말라는 경고가 있었던 것도 같지만, 저렇게 애타게 불러대는데 무시할 수 있을리가 없다. 나는 거울 너머의 세계로 넘어가서 살아있을 적 다하지 못했던 데이트를 했다.
어느 날은 그저 손만 잡고 한 없이 걸어다니고,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수다를 떨고, 햇살이 유독 쨍한 날에는 돗자리를 깔고 나무에 기대어 앉아 낮잠을 잤다.
"사후 세계는 어때?"
"나는 지금 천국에 있어."
"정말?"
"네가 있잖아."
"어우, 참. 주접은. 도대체 어떤데?"
"아우어으아에아..."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묘사하려고 했지만 되질 않았다. 발음이 전부 뭉개지고 있었다.
"너한테 말할 수 없나봐. 어쨌든, 여기 좋아. 나쁘지 않아."
하하하, 그냥 그렇게 웃고 넘겼지만 그건 주접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어떤 종교에서는 자살을 죄악으로 친다는데 딱히 벌 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죽은 뒤에도 예진이와 이런 식으로나마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벅차오르도록 행복했다.
이곳은 정말, 지옥이 맞기는 한 걸까?
11.이곳은 천국. 자해하십시오.
저녁 9시 36분.
공원의 경계에 피어있던 많던 국화는 다 시들어 겨우 4송이의 국화가 남았고, 그나마도 한 송이가 시들어가고 있었다.
-고아원 애들이 너랑 예진이 오기만 기다리는 거 알아? 하, 내가 무슨 말을 하는건지.... 수혁아, 다음 생이 있다면 좋은 부모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요리사 같은 건 다시는 하지 마....
국화 속에 핀 얼굴은 수민이었다. 내 고아원 친구이자, 예진이의 가장 친한 친구. 그러는 동안 해는 더 저물었고, 햇살은 더 붉게 변했다.
붉은색으로 물든 공원을 보고 있자니 이제야 지옥의 이미지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장 지옥에 가까운 모습은 벤치 근처에서 볼 수 있었다.
벤치는 무슨 일인지 온통 살점과 함께 피칠갑이 되어있었다.
그 피와 살점의 양은, 만약 벤치에서 살인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도저히 그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의 양이었다.
벤치에 놓여있던 종이도 검붉고 찐득한 피로 젖어 엉망이 되어있었다. 기하의 것으로 추정되는 휘갈겨 쓴 글씨는 피에 번져 알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 아래, 반듯한 글씨로 쓰여있는 것이 보였다.
[잘못된 정보가 있어 수정합니다.
이곳은 지옥이 아닙니다.
이곳은 자살한 사람들의 천국입니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당신은 기억을 잊을 것입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 자해하십시오.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자살한 사람이 오는 천국?
자해?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인 말들이 생각을 멈추게 만들었다. 여기가 정말 천국이라면, 왜 자해를 해야하는거지? 자해를 하면, 벤치에 앉아있던 그 섬뜩하게 노래를 부르던 여자처럼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자해를 해서는 안된다. 특히 저기 시계탑에 언젠가부터 떠 있는 눈동자가 계속 날 쫓아오는 한.
12.왜?
여느 때처럼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별 것 아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를 확인이라도 하듯이, 예진이가 물어왔다.
"우리 처음 사귀었을 때는 기억해?"
"물론이지. 네가 또 놀려서 내가 그 날 화냈잖아."
"뭘로 놀렸는지도 기억은 하니?"
"당연하지.... 그건....."
아, 뭐였지?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완벽하게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버무리려고 했다. 그러면 평소처럼 예진이는 그냥 웃어넘겨버릴테니까. 하지만 그 날은 아니었다. 예진이는 공허한 표정으로 지겹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역시. 넌 그냥 내 망상이구나. 사실. 나도 점점 널 잊어가. 내가 뭘로 널 놀렸었지? 아마도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하면서 이 던지는데, 네가 노래를 잘못불렀을 걸. 그거 가지고 내가 초중고까지 거의 10년을 놀렸잖아. 그런데..... 어떻게 잘못 불렀는지 기억이 안나."
"그거야......"
"봐, 기억 안나지? 넌 뭐라고 내게 대답했지? 나는 왜 네가 좋았지? 점점..... 기억나지 않아. 내 안의 네가 사라져가. 넌..... 넌 그냥 내 망상일 뿐이야."
"뭐? 난 망상이 아니야."
반박해보지만 이미 예진이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 때가 좋았는데. 이 꿈이 끝나면, 너도 가버리겠지."
"난 망상이 아니야!"
우울한 중얼거림에 말랑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게 식어버렸다. 그에 맞춰 공원의 모습도 점차 다시 회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스산한 목소리로 예진이 나에게 속삭였다.
"망상이 아니라고? 꿈만 깨면 사라져버리는 주제에. 그럼 물어볼게 있어. 대답해."
"뭔데?"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예진이 나를 쳐다보았다. 텅텅 빈 동공은 끔찍했다. 조금씩 나에게 다가오면서, 천천히 물었다.
"왜 자살했어?"
다시 공원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주변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얼굴을 보자 나는 입을 열어 뭐라도 대답해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예진이는 섬뜩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13.편지의 뒷장
나는 예진이의 망상이 아니다. 피로 물든 벤치로 달려가 자해하라고 쓰여있던 그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아직도 기하를 믿고 계시다면 아래 질문해 답변해보십시오. 혹시 당신을 죽인 것에 대해서 기억하고 계십니까? 당신이 왜 죽었는지는 기억하고 계십니까?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들에 대해서는요?]
알았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곳의 시간이 자정이 되었을 때, 당신은 대부분의 기억을 잃고, 당신이 알던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간섭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때를 위해 필요한 준비가 있습니다.
자해하십시오.
기하가 자해를 막는 것은 자해를 통해 빠르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해를 통해 제가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절 죽게 만들었는지 기억해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았습니다.
자해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주어진 복수의 기회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공원 어딘가에서 기하가 버린 커터칼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반듯한 글씨체로 써져있었지만 내용은 상당히 살벌했다.
복수? 그런 건 잘 모르겠다. 내 생전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굳이 그런 것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기억을 잃고 싶지 않다. 내 기억 속의 예진이를 잃고 싶지 않다. 예진이의 망상으로 남고 싶지 않다.
복수와 상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면 꽤나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진이와 내 몸의 상처라면 고민할 여지도 없다.
그래도 상처 내는 건 싫은데.
시계탑에는 여전히 눈동자가 떠있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라도 하는 듯, 도륵도륵 희번득하게 공원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었다. 그 눈을 피해, 나는 시계탑 뒤쪽으로 돌아가 소심하게 손톱 옆 거스러미를 뜯었다. 주욱 늘어나며 살이 벌어진다. 따끔거리며 피가 배어나온다.
기억과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8.죽기 전 준비물은 유언장이라던데
유언장을 쓰는 것은 참으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슬픈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저, 드디어 내가 죽는다고? 같은. 현실감 없는 낙관과 기묘한 안도가 들 뿐이었다.
[얼마 없는 재산은 전부 이예진에게 주세요. 시체는 화장해서 바다에다 뿌려주세요. 어릴 적 꿈이 전세계를 탐험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라도 이루고 싶습니다.]
신변 정리가 끝나자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게 될 예진이에게]
마지막만 간단히 적으면 되는건데. 그러기만 하면 됐는데.
[내가 왜 까치에게 새 이 대신 새 집을 달라고 했는지, 너는 아니?]
하지만 이 구절을 적을 때는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몇 장에 걸쳐서 재산 정리할 때는 그리도 빨리 쓰여진 유언장인데도, 더는 손이 가지 않았다.
결국 오랫동안 울다가 마지막은 신경질적으로 줄을 긋고 종이를 구겨버렸다.
9.왜냐하면
커터칼은 시계탑 아래 쪽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자해하던 여자가 끌려가며 떨어뜨렸던 모양이었다.
칼을 손목에 갖다대는 것은 꽤나 거부감이 들었지만 그 이상으로 두려운 것이 있었다.
스윽
자해할 때마다 사라졌던 기억들이 하나씩 돌아온다.
이번에는 죽을 때의 기억이었다. 하얀색의 병원. 표정이 없는 의사는 뭐라고 말을 했고, 나는 몇 번이나 되물었다. 질린다는 기색도 없이 의사는 몇 번이고 말해주었고, 나는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 겨우 행복의 가닥을 붙잡아가고 있던 차였다. 나만의 가게를 열고, 단골도 생겼고,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암세포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고 했다. 그걸 알았을 때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
끔찍한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약과 약과 약....진통제와 주사들. 잠이 도저히 오지 않았다. 예진이는 수척해져갔고, 나는 그런 예진이에게 화를 냈다.
"아, 꺼지라고!"
예진이는 울고, 나도 울었다.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마음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병상에 있다보면 내가 내가 아닌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점점 자주, 그리고 오래 느끼게 되었다.
나는 종종 다른 사람이 되어 예진이에게 화를 냈다. 예진이는 그런 나도 좋다고 했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병상에서 내가 죽어가듯이, 날 돌보는 예진이 역시 천천히 말라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어느 날 나는 죽이기로 했다.
나 자신을.
영원히.
10.나와 너에 대해서
거울 너머에서 다시 예진이가 내 이름을 불렀다. 색감이 따뜻한 공원 안에서, 예진이는 불편한 듯 팔짱을 끼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면서 예진이에게 달려갔다.
"예진아. 난 네 망상이 아니야."
걸레짝처럼 된 팔목을 보면서 예진이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게.... 이런.... 너 팔목이 왜 이래."
"기억하는데에는 대가가 필요했거든."
나를 망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예진이는 눈물이 맺힌채로 나를 추궁했다. 보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셔츠에 피가 맺혀 숨길 수가 없었다.
"예진아. 난 망상이 아니야. 이제 완전히 기억해. 내 인생을,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너를."
11.우리의 첫 만남이 어땠냐면
"고아원에 처음 왔을 때, 나 맨날 울었잖아. 기억나? 적응하지도 못하고 홀로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을 때 널 처음 봤지. 내가 막 서럽게 우는데,
-그렇게 울면 원장쌤이 나중에 엉덩이 때릴 때 흘릴 눈물이 부족해질텐데.
그렇게 말하며 입에 사탕을 넣어줬잖아. 네가 가장 좋아하는 사탕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사탕 덕분에 바보 같이 나는 서럽던 것도 잊고, 너에게 다른 친구들을 소개받아 잘 지낼 수 있었어. 다시 생각해도 고마워."
"너... 너 정말 수혁이야? 내 망상 아니야? 그럼 말해봐. 내가 널 뭘로 놀려댔는지."
"까치야, 까치야, 헌 이 줄게. 새 집 다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었다. 이가 빠진 날. 지붕 위로 이빨을 던지며 불렀던 노래가 가사가 틀렸다. 예진이는 그것을 듣고 낄낄 웃으면서 날 놀려댔고, 그 놀림은 초중고를 거치며 10년 동안 꾸준했다.
"까치는.... 새 이가 있으면서 왜 헌 이를 가져가는건데?"
예진이 못 믿겠다는 듯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이 안나서 못생겨지면 어떡하냐라고 놀리다가 내가 울어버리자 울음을 그치게 만들려고 던진 질문이었다.
우리 사이에만 알 수 있는 질문과 대답이었다. 나는 그다지 머리가 좋지는 않아서, 나중에 답해주겠다며 미뤘다가, 문학소년이던 중학생 때가 되어서야 나름 머리를 굴려서 대답했다.
"그야 까치는 새 이가 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니까."
"왜 못 기다리는건데?"
물론 머리가 더 좋은 예진이는 한 수 위였어서, 즉각적으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야 까치는 이빨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너에 대한 마음을 자각할 때쯤, 하교하는 널 기다리던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돌려돌려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면 넌 왜 까치한테 새 이 대신 새 집을 달라고 했는데?"
너는 짖궂게도, 내 마음을 모른 척하며 다시 나를 놀려대었다.
"아, 그건 까치에게 물어보든가!"
삐진 나는 이 때 처음으로 예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처음 듣는 내 고함에 놀란 고등학생 예진이는 짖궂던 모습은 사라지고 당황한채로 울먹거렸다. '나 너 좋아해. 까치같은 건 사실 궁금하지도 않단 말이야. 그냥 요즘 네가 나랑 말도 잘 안하려고 하길래. 넌 나 안 좋아하는구나, 미안해.' 그렇게 말하며 예진이는 펑펑 울었다. 울음을 잘 보이는 적 없었던 예진이라, 나는 어떻게 할 줄도 몰랐다.
"너.... 정말 수혁이구나."
처음 고백을 하던 그 날처럼 예진이가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서투르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어떻게 예진이를 달래는지 안다. 나는 말 없이 예진이를 껴안았다. 작은 어깨를 살살 문지르며, 눈물로 젖은 뺨을 닦아주었다. 따뜻한 색채와 온도가 전해져왔다.
눈물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다가, 다시 껴안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다시 예진이를 밀어낼 수 밖에 없었다. 공원 저편에서 뭔가가 있다. 검은 인영이었다.
"예진아. 이만 가야겠어."
"왜?"
"저기 저게 날 쫓아오는 것 같아."
"저게 뭔데? 아무것도 없는데."
내 시야의 한켠에 선명한 것이 예진이에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서 잠에서 깨, 예진아. 위험해. 난 알아서 도망갈게."
"뭔지는 모르지만, 알았어. 저기, 수혁아. 내일도 와야해. 알았지? 제발."
떠나려는 나를 붙잡고 예진이가 부탁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것은 내게서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고 나와 예진이 쪽을 보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그것은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했고, 움직임이 없는 채로 공원의 끝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목이 없는 존재를 보았을 때처럼 도저히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저건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눈이 꿰메어진 상태로, 나와 예진이 쪽을 보면서 미소짓고 있었다.
12.이대로가 좋아
"회사는 어때?"
"아, 썅. 김부장 그 미친 새끼가 또 지랄하잖아. 옘병할 새끼가 지랄해서 피똥싸면서 해놓으니까 또 내 아이템 빼돌렸다. 시발....."
"예쁜 말을 쓰는 건 어때?"
"미안. 김부장 그 약간 정신을 원심분리기에 넣어버리신 자제분이, 또 정신병을 자제하지 못한 것이에요. 그래서 그 장티푸스에 걸려버릴 견공분께서 본인한테 혈변을 볼 정도로의 직무수행을 요구한 뒤에 그 공을 가로채는 행동을 저지르시지 뭐에요. 시발."
"시발은 왜 안 빼는데."
"김부장 생각하니까 혈압 때문에 뺄 수가 없었어."
"김부장은 인정이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예진이 나를 껴안았다.
"아~ 이대로만 있었으면 좋겠다."
"안되는 거 알잖아."
"뭐?"
내 품에서 고양이처럼 늘어지던 예진이가 뻣뻣하게 굳었다.
"뭐라고 했어?"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들은 사람처럼 무서운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결국 하려던 말은 내뱉지 못하고, 다른 말로 에둘러 말했다.
"검은 옷 입은 사람이 날 쫓아오니까. 계속 있을 수는 없단 말이지."
"그런 거였어? 난 또."
눈에 띄게 안심하며 예진이 다시 회사 이야기를 시작했다.
"맞다. 요즘 회사사람들이 나 얼굴 다시 밝아졌다고, 다행이라고 그런다? 역시 네 덕분이야. 수혁아."
"그래? 다행이다. 난 네가 날 생각하면서 슬퍼하는 게 싫어."
"이렇게라도 만나서 다행인거지 뭐. 좀 더 오래 봤으면 좋겠지만. 확 그 검은 옷 입은 사람 굿해서 쫓아버려?"
"그러다 그 무당이 날 쫓아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건 그렇네?"
우리는 늘 그랬던 것처럼, 다시 공원에 앉아 날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래도록은 아니었다. 점점 우리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미안한데 이제 일어나야겠다. 예진아. 또 나타났어."
처음엔 예진이가 꿈에서 깰 때까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검은 옷을 입은 그것은 나타나서 공원 한 쪽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이 눈에 띌 때마다 나는 예진이를 깨웠다.
"아, 그냥 안가면 안돼? 어차피 내 눈엔 보이지도 않는데."
"네가 휘말리는 게 싫어."
예진이에게 딱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분명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엔 착각인가 하고 넘기려고 했지만 확실해졌다.
검은 옷을 입은 그것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나타나는 주기도 점점 빨라졌다. 공원 끝자락에 있던 그것은 이제 놀이터 근처까지 왔다. 오늘은 미끄럼틀 옆에서 웃고 있었다.
꿰메어진 눈 때문에 어딜 보면서 웃는지는 몰라도 시선은 우리를 향해 있었다. 처음엔 미소였던 그 웃음도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 이제는 찢어질 듯 웃고 있었다.
가장 소름돋는 점은 내가 예진이를 깨워 다시 회색 공원으로 돌아올 때마다,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나를 보내주는 것이었다.
아마 이별할 때가 온 거겠지.
13.싫은데?
평소처럼 평범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작별인사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진이는 이상하게도 평소에 꺼내지 않던, 그저 우리가 묻어두었던 것에 대해서 말했다.
"아니, 그래서 옆 부서 이대리가 그러는거야. 남자친구 있냐고. 당연히 있다고 했지. 그런데 그 새끼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객관적으로 예진이는 매력적이긴 했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
"그만 좀 하라고. 남자친구분 죽은 거 다 아는데 왜 계속 그러냐고 하더라고. 존나 무례한 새끼. 그게 말이냐고 방구냐고. 아가리 뚫렸으면 거기로 똥 싸지 말라고 우리 부서 공식 미친놈 김부장도 가서 지랄해줬어. 내 편일 땐 좀 든든한 듯."
"무례하긴 하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잖아."
"너 그거 무슨 뜻이야?"
"난 이미 죽었어.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뭐 어때. 내가 이렇게 만족하면서 살겠다는데."
대수롭지 않은 듯 예진이가 웃는다. 이대로 웃어넘길 생각인 모양이다.
"네가 불러도 이제 네 꿈에 안 올거야. 우린 같이 있으면 안돼. 그러니 더는 날 부르지 마."
"그래."
의외로, 예진이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토끼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네가 그랬지? 네가 있는 곳은 살기 좋다고."
그 말의 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예진이 시계탑 쪽으로 달렸다.
"뭐하는거야?"
이해하고 쫓아갔을 때에는 이미 예진은 시계탑의 꼭대기에 있었다.
"걱정 마. 곧 따라갈게."
그리고 말리기도 전에 손을 놓고 떨어졌다. 실수로 떨어뜨려 부서진 장난감 인형처럼 예진이의 목이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꺾였다. 떨어지기 전처럼 환하게 웃은채였다.
다시 붙여야 해.
그런 생각으로 예진의 몸 쪽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주변이 일그러지며 내 몸은 흑백의 공원, 비가 멈추지 않는 공원의 화장실로 돌아왔다. 토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지만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나는 거울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14.우리는 어땠었더라
너는 책임 없는 철 없는 사랑의 결과물이었고, 나는 음주운전으로 인한 비극의 결과물이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는 같은 고아원에서 자랐다.
너는 적응하고 동네를 쏘다니며 놀았고, 나는 그러지 못해 매일을 울며 지냈다.
나는 너의 사탕을 받아먹었고, 너는 마지막 남은 사탕을 내 입에 넣어주었다.
너는 달리기를 잘했고, 나는 그림을 잘 그렸다.
우리는 많이 달랐지만, 그래도 친구가 되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이빨이 유독 흔들리는 날이었다. 흔들리던 이빨은 톡 하고 빠져버렸다. 원장 선생님은 이빨을 지붕 위로 던지면 까치가 물어가고 새 이를 줄 것이라며, '까치야, 까치야.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를 하라고 했다. 곧이 곧대로 믿은 나는 그대로 했다.
"까치야, 까치야. 헌 이 줄게, 새 집 다오."
.....사실 그대로는 아니다. 새 이를 달라고 하는 대신 새 집을 달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지붕 위로 이빨을 던졌을 때, 너는 낄낄대며 날 비웃었다.
"바보야, 새 집이 아니라 새 이겠지! 너 이제 이빨 안난다? 못생겨지면 어떡하냐?"
그 말 역시 곧이 곧대로 들었다. 못생겨지면 어떡하지. 나는 그대로 울어버렸다.
"우에에엥!"
너는 당황하지도 않은 채 어른스럽게 나를 달랬다.
"야, 걱정 마. 나한테 다 방법이 있어."
날 달래며 어깨를 두드려주던 그때의 너는 좀 멋있었다. 해결방법은 안 멋있었다.
며칠 후 너는 이빨구멍을 하나 만든 상태로 나타났다.
"쟈, 이거바다."
이빨을 뽑고 그걸 굳이 나한테 가져온 것이다.
"야, 그럼 너 이는 어케하는데!"
"난 예쁘니까 이빨 하나쯤 없어도 괜찮아."
"못생겨져도 괜챠나?"
"너 이빨이 없으면 울거쟈나."
"그럼 같이 던지자. 반씩 나지 안으까"
거기까지 계산을 마친 우리는 사이좋게 손 잡고 길을 가다가 넘어져서 이빨을 하수구에 빠뜨렸다.
"후에에엥~"
"으에에에엥~"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당황한 우리는 같이 울었다. 먼저 그친 쪽은 네 쪽이었다.
"그런데 왜 까치는 새 이빨이 있으면서 헌 이빨을 가져가는거지?"
뜬금없는 물음표에 나도 그만 궁금해져서 울음이 멈췄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웃기네. 넌 정말 옛날부터 내 눈물 그치게 하는데 뭐 있었나보다.
'그러게, 까치는 새 이빨이 있으면서 굳이 헌 이빨을 가져가는거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나란히 길을 걷는 이빨 빠진 아이들이 손을 잡고 지붕에 이를 던지고 있었다. 그걸 보던 너는 같은 물음을 던졌다.
'까치는 새 이빨이 있으면서 왜 굳이 헌 이빨을 가져 간담.'
오랫 동안 생각한 답을 겨우 꺼낼 수 있었다.
까치가 새 이빨이 있으면서 헌 이빨을 원하는 이유는 새 이빨이 돋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일거라고.
그러자 넌 다시 질문했다.
"왜 기다릴 수 없는건데?"
글쎄. 그 때의 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너에게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너에 비해 똑똑하지는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했던 대답은
"나중에 알려줄게." 였다.
우리는 늘 같이 등하교했다.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그 때쯤의 애들은 짖궂어서 우리를 보며 사귀느냐고 했다. 너는 그냥 웃으면서 넘겨버리고, 나는 그냥 놀리는 놈들을 무시하고 매일 같이 너를 기다렸다.
등교길, 영어듣기 때문에 일찍 나온 우리는 같이 길을 걸었다.
깍깍.
까치가 울었다.
"저걸 보니까 기억 나는데, 까치는 왜 새 이빨을 기다릴 수 없는거야?"
별안간, 네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푸흐 웃었다. 너는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었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다. 그에 비해 나는 키만 크지 삐적 마르고 공부는 영 아니었다. 그 때쯤의 나는 내가 어떻게 너를 보고 있었는지 깨닫고 들키지 않으려 필사적이었다. 그래서 네가 얼굴을 들이댈 때,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까치는 이빨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나름 진지하게 대답했다.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라도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너는 야속하게도 나를 놀리며 낄낄대는 것이다.
"그러면.... 왜 너는 그 때 새 집을 달라고 했는데?"
"아 그건 까치에게 물어보든가!"
삐진 나는 이 때 처음으로 너에게 소리를 질렀다. 처음 듣는 내 고함에 놀란 너는 짖궂던 모습은 사라지고 당황한채로 울먹거렸다. '나 너 좋아해. 까치같은 건 사실 궁금하지도 않단 말이야. 요즘은 말을 걸어도 대답도 잘 안해주고, 그냥 내가 싫었구나. 귀찮게 해서 미안해.'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도망쳐버리려고 했다.
"야, 내가 더 좋아하거든?"
아마 내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먼저 네가 용기를 내줘서였을 것이다.
"왜?"
"왜냐고 물어도...... 그러는 넌 내가 왜 좋은데?"
"왜냐니.... 키도 크고, 세심하고, 욕도 안하고 말도 예쁘게 하고, 배려도 잘 해주고, 약속도 잘 지키고, 청소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잘생기지도 않았고,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는데?"
"네가 뭔 상관이야. 내가 너 좋다는데. 너야말로 내가 왜 좋은데? 나야말로 성격도 더럽고, 입에도 걸레 물었고, 방도 더러운데."
"너야말로 네가 뭔 상관인데. 내가 좋다는데."
어린 아이처럼 싸웠다. 결론은 우리는 서로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종종 우리는 서로의 꿈을 말하며 미래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그 미래는 이루어진 것도 있었고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내가 말하던 꿈대로 난 요리사가 되었고, 넌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나는 우리가 이대로 결혼할 줄 알았다. 우리가 늘 말하던대로 행복하게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됐지?
나는 요리하다가 암에 걸려 결국엔 약을 먹고 자살해버렸고, 너는 그런 내 앞에서 벌이라도 주듯 웃으며 목이 부러졌다.
"아아아아........"
거울에 내 모습이 비친다. 귀신이라고 할 법한 모습이다. 악몽에 나올 법한 흉한 모양새다. 눈에서는 눈물 대신 피가 흐른다. 꾸덕꾸덕한 피는 찐득한 소리를 내며 세면대로 흘러들어간다. 흑백의 세상에서도 피의 색깔만은 선명하다. 비틀거리며 화장실의 밖으로 나왔다.
비가 내리는 공원은 이제 해가 지평선의 끄트머리에 걸려있었다.
어둑해질대로 어둑해진 공원의 끝자락에는 이제 단 한 송이의 국화 꽃봉오리만이 남아있었다. 멈추지 않는 장대비 때문에 시야가 어지러웠지만 국화의 옆에는 내가 찾는 것이 있었다.
"날 데려가."
비틀거리며 빗속을 걸었다. 한기가 몸을 잠식한다. 그것에게 다가갈 수록 두려워진다.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가까워지자 그것의 모습이 점점 잘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옷을 입고, 눈은 꿰메어진, 그것이.
"어서 날 데려가고 예진이를 돌려줘."
15.내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야, 안 들려? 어서 날 데려가라고."
소리도 질러보고 윽박도 질러봤지만 그것은 그저 정지된 로봇처럼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고장난 자판기를 걷어차는 사람처럼 성질을 내봤지만, 그래도 그것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이젠 데려가라고 해도 관심조차 안주냐! 어서 예진이나 내놓던가! 야, 어디서 사람이 말하는데 고개를....."
갑자기 그것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디를 보고 있는거지?
그것의 시선을 따라 가자, 화장실이 있었다.
-아혁수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예진이의 목소리였다.
[히히]
그것은 다시 씨익 웃었다. 입이 히죽히죽 벌어지며 쀼죽한 이빨이 엉망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내 쪽을 한 번 보고서는, 보란듯이 팔다리를 휘적대며 뛰기 시작했다.
-아혁수
다시 한 번 거울 너머에서 예진이가 나를 불렀다. 빌어먹을. 나는 그것이 내쪽을 보았기에 당연히 나를 노린다고 생각했다. 눈이 꿰메어져 있어 그것이 정확히 어디를 보고 있는지 고민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목 없는 것이 나를 봤으니까, 눈이 꿰메어진 저것 역시 나를 노리겠거니 했을 뿐이었다.
전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노린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다.
그것이 보고 있던 것은 내가 아니라 예진이었다.
16.오면 안돼
팔다리를 휘적대며 뛰던 그것은 빠르지는 않았다. 서두르자 겨우 먼저 들어올 수 있었다.
"수혁아!"
거울 너머의 세계, 어제처럼 반가운 얼굴로 예진이가 웃었다.
"너, 안 죽었어?"
"꿈이라 그런가 그냥 깨기만 하고 말더라고."
예진이는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 너머로 나를 따라 들어온 그것의 인영이 보인다. 그것은 미친듯이 웃으며 점점 다가오고 있다. 예진이를 잡기 전에 말해야 했다.
"잘 들어. 자살할 생각 다시는 하지 마."
"알았어. 계속 이렇게 나랑 만나주면 나도 안 죽을게."
"여기도 오지 마. 설명할 시간 없어. 그게 놀이터까지 왔어."
"검은 옷 입은 그것? 난 보이지도 않는다니까."
그것은 계속 뛰고 있는데,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예진이는 지나치게 태평했다. 결국, 나는 생애 생후 통틀어 두 번째로 소리지르기로 했다.
"난 이미 죽었다고! 좀 받아들여! 네가 이렇게 꿈 속에서 나를 본다고 해서, 내가 살아날 수 있는 건 아니야. 너도 제발 네 인생을 살아!"
17.싫은데?
예진이는 답지 않게 비웃는 표정을 한껏 담았다.
"뭐라고?"
"싫다고."
그러지 마. 제발. 여긴 지옥이고, 지옥에 있는게 널 쫓고 있다고.
"으아아으어에."
"안들려."
여긴 지옥이고 지옥에 있는 게 널 쫓고 있다고. 그렇지만 말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발음이 계속 뭉개졌다.
"으아! 이오이오! 이오에 이으 어으! 옷오잇아오!"
"미안한데, 수혁아. 가끔 난 네가 하는 말이 들리질 않아."
표정을 보니 진심인 것 같다. 아무래도 저것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사후세계에 대해서 묘사할 수 없는 것처럼 지금 내 말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설명을 해봤자 예진이에게는 전해지지 않는 거겠지.
"그냥, 오지 말라고!"
"네가 나랑 결혼을 할 수 있어, 뭘 할 수 있어. 넌 이제 죽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그냥 이렇게라도 곁에 있겠다는게 뭐가 나빠?"
그것은 이제 예진이의 바로 뒤에 있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예진아, 나 정말 너랑 결혼하고 싶었어. 내가 널....사랑하는 거 알지?"
"응."
뒤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예진이는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내 눈은 꿀럭꿀럭 소리를 내며 다시 피눈물이 흘렀다.
18.까치가 헌 집을 허무는 이유
헌 이빨이 빠진 자리에는 새 이가 돋는다.
헌 이빨을 추억하며 빈 잇몸에 끼워넣으려고 해봤자 결국 잇몸만 짓무르는 것이다.
너는 짓물러가고 있었다.
내가 했던 약속에 의해서.
나는 한 때 너와의 삶을 꿈꿨었다. 네가 그토록 놀려대던 '헌 이 줄게, 새 집 다오.' 는 결코 사소한 말 실수가 아니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다.
고아원에 있을 때, 가정이 있던 애들을 우리는 부러워했다. 그 애들은 자신이 있는 집 안에서, 그리고 그 부모님 아래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주었지만 그 가정있는 아이들을 부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씩씩한 너조차도, '집도 없는 게!'라는 소리를 들은 날에는 혼자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서 울고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헌 이를 주고 새 집을 받아 너와 살고 싶었다. 새 이가 영영 나지 않아도 좋으니 우리만의 집을 갖고 싶었다.
그 집 안에서 너와 나는 행복했을 것이다. 우리가 늘 서로에게 속삭였던 것처럼, 딸이어도 좋고, 아들이어도 좋으니 우리가 사랑해줄 아이들을 낳고 꾸린 그 가정에서 우리는 행복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 속에서 그려두었던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죽었으니까.
너는 그렇게 말했다.
"넌 이제 죽어서, 아무것도 못하잖아!"
아니다.
아직 할 수 있는 것이 남았다.
바로 널 사랑하는 것.
네가 나처럼 우리가 살 집을 마음 속에 지어두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마땅히 그것을 무너뜨려야한다.
"수혁아?"
나는 손을 들어 예진이의 목을 감쌌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예진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따뜻한 체온이 손을 통해 전해져온다. 의아해하는 눈빛을 피하며 나는 그대로 손을 조였다.
"커헉....왜.....애.......?"
예진이는 배신감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내 품에서 천천히 죽어갔다.
꿈 속에서 죽으면 꿈에서 깰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게 내가 예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주변이 일렁거리며 다시 거울 밖으로 빠져나왔다. 비가 멈추지 않는 공원. 한 발 차이로 예진이를 놓친 그것은 다시 입맛을 다시며 먹이를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화장실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멈춰섰다.
나는 예진이가 내게 죽었으니 다시는 내 꿈을 꾸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예진이는 멈추지 않고 잠에 들때마다 나를 불러대었다.
그것도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면서 예진이에게 다가갔다.
그 때마다 나는 그것이 예진이를 붙잡기 전에 예진이를 죽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지막 남은 국화 한 송이가 그제서야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널 내 곁에 붙잡아두지 않을 용기가 생겼어.]
19.찾았다.
언젠가부터 꾸던 수혁의 꿈은 가장 최악의 형태로 변했다. 수혁은 피눈물을 흘리며 나타나서 예진을 죽이기 시작했다. 예진은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수혁은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서둘러 예진을 죽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겨우 찾았어.... 이번엔 늦을 뻔했네."
"아....."
놀이터에 숨어있었던 예진이 절망적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동안 예진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에게 죽었다. 목이 졸려서도 죽어보고, 물에 잠겨서도 죽어보고, 머리가 깨져서도 죽어보았다.
처음 몇 번은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소리지르기도 해보고, 설득해보기라도 하고, 도망다녀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이제는 포기했다.
수혁은 자신을 죽이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예진의 모든 말은 수혁을 잠깐 망설이게 만들지언정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수혁은 확고한 의지로 예진을 죽여나갔다. 그 눈에는 빛이 없다.
"왜, 왜 이러는거야....?"
"사랑해, 예진아. 그러니까 제발......"
수혁은 펑펑 피눈물을 흘리며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말 뒤에는 언제나 같은 결과가 있었다. 수혁의 그림자가 예진에게 드리워지고, 예진은 다시 한 번 죽었다.
"다시는 오지 마."
이번엔 추락사였다.
20.너는 그 남자를 알잖아.
"수민아. 요즘은 이상한 꿈을 꿔."
"어떤 꿈?"
"그냥. 끝 없이 살해당하는 꿈....."
수민은 걱정스럽게 예진을 보았다. 수민이 보기에 그 일이 있고 나서 예진은 점점 이상해졌다.
잠깐 밝아졌다가도 다시 우울해지길 반복했다. 최근엔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만 다시 이렇게 초췌해졌다. 병원에 가보자고 하면 정신병자 취급하냐고 화를 낼 것이 뻔했다. 그래서 약간 위안이라도 삼을 만한 적당한 곳을 떠올려냈다.
"...내가 아는 용한 무당집이 있어. 거기라도 가볼래?"
기묘한 향을 풍기는 점집.
차를 내오던 무당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예쁜 얼굴을 찌푸렸다. 혀를 차면서 대놓고 콧방귀를 뀌었다.
"친구한테 거짓말을 하면 못쓰지...... 널 걱정해서 여기까지 데려온 친구인데."
싸늘하게 식은 무당의 눈초리가 향하자 몸이 굳는 것 같았다.
"넌 그 남자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잖아. 안 그래?"
"무슨, 무슨 말을 하는거에요!"
"무슨 말이긴."
창백한 낯빛의 무당은 소름끼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었다. 무당은 천천히 예진에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까치에게 왜 새 이 대신 새 집을 달라고 했는지 아니?'"
그냥 짚어넘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당은 이미 전부 알고 있었다. 예진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 남자, 이젠 보내줘."
"보내주다니요?"
"네가 그리워하니까 그 남자가 못떠나고 있는거잖아."
"하지만.....하지만......."
"산 자의 미련이 죽은 자를 붙잡아선 안돼. 죽은 자의 한이 산 자를 괴롭히면 안되는 것처럼."
"그냥 꿈이잖아요. 고작 꿈이잖아요...."
"넌 그 꿈을 꾸면서 꿈으로만 만족할 자신있어?"
"......"
"그 남자, 성격은 어땠어?"
"착했어요. 남한테 싫은 소리도 못하고....그런 말을 하면 본인 마음이 더 아프다면서 절대 안했어요."
"그래? 그럼 왜 그런 남자가 계속 피눈물을 흘리면서 너를 죽이러 온걸까?"
"모르겠어서 찾아온거잖아요."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면, 계속 잊지 못하면, 죽은 사람은 삶에 가까워지지. 마치 살아있을 때처럼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만나볼 수도 있을거야."
"그러면 안될게 뭐가 있는데요...? 우리가 같이 보낼 봄은 이미 전부 시들었는데, 다시는 오지 않는데. 그걸 꿈 속에서라도 보는 게 왜 안된다는 건데요?"
"살아있는 사람 쪽이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니까."
"그럼 잘됐네요! 차라리 죽어버리면 만날 수 있는거니까!"
"눈치가 없는거야,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거야? 그 남자는 울면서 하기 싫은 짓까지 하고 있다고 말하는거야."
"왜...."
"그 남자가 죽어갈 때, 넌 그걸 보면서 어떤 심정이였어?"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어요.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봤지만 결국엔, 결국엔..... 우린 결혼하기로 했었는데, 행복하게 살기로 했었는데......
"그 남자도 그런 것 뿐이야.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아서, 마음이 산산조각 날 것 같아서, 그래서 네가 따라오지 못하게 막는 것 뿐이야."
예진은 수혁의 유골함을 한참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정사진 속 수혁은 고통스러웠던 마지막 날들과는 달리 더 없이 건강해보였고, 행복해보였다. 그렇게나 행복해보이는 수혁의 옆으로는 이제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국화가 있었다.
예진이 놓은 국화였다. 언제나 시들기 전에 찾아와서 납골당에 늘 놓아두었던 국화는 언제나 싱싱한 채였다. 예진은 싱싱한 얼굴을 하고 웃고있는 수혁과 그와 어울리지 않는 국화를 오랜 시간동안 바라보다가 치웠다. 오래 전에 못했던 일을 드디어 할 시간이었다.
"이제야 널 내 곁에 붙잡아두지 않을 용기가 생겼어."
예진은 안치되었던 유골함을 집어들었다. 유골함을 소중히 안아들고서, 예진은 그가 바라던대로 그를 서해바다에 뿌려주었다. 하얀 가루가 공기 중으로 흩날렸다가 바다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예진은, 더는 그를 생각하며 울지 않았다.
21.해후
공원은 비가 서서히 멈추고 있었다.
댕-대앵-
시계탑의 종이 울린다. 시간은 드디어 자정이었다.
"안녕하세요, 형."
풀벌레 소리조차 나지 않는 고요한 밤.
자정의 한 가운데서 교복을 입은 소년이 말을 걸어왔다. 그 소년의 손에는 피에 젖은 공책조각이 가득 들려있었다. 교복 이름표에 쓰인 이름은 익숙한 이름이었다.
"네가 기하구나. 네가 그 쪽지들을 남겼니?"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형은 내 말 안 듣고 스스로 상처를 냈겠네요. 보통은 다 잊은채로 넘어오는데. 어떤 기억을 위해서 형은 상처를 만들었어요?"
"까치가 헌 집을 허물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게 뭔데요?"
나는 그저 미소지으며 대답을 피했다.
"그런 게 있어."
기하는 내 대답을 듣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자정부터는 현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어서 살아있는 사람을 도와야 시간이 간다는 것, 그 사람들은 전부 내 생전과 연관이 있다는 것.
하지만 완전히 믿기는 어려웠다.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기하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혹시 성현 형의 편지를 읽었어요? 날 믿지 말라는?"
"응."
"난 이미 많은 힘을 써서 더 이상 자정 전으론 못 넘어가거든요. 그래서 다시 고칠 힘이 없었어요."
"그 사람은 어떻게 됐는데?"
기하는 잠시간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쓴 편지 기억해요? 목 없는 자가 나타나면 화장실 칸 안에 숨고, 눈 꿰멘 자가 나타나면 거울 너머로 넘어가고, 입 찢어진 자가 나타나면 시계탑 앞에 서있으라고 했는데."
"아, 기억해. 그런데 왜 시계탑 앞에 있으란건지 좀 이해가 안되는데."
"왜긴요. 다른 저승사자와 다르게 그 저승사자는 눈이 잘 보이니까 숨기도 어렵고 영원히 도망칠 수도 없거든요. 그러니 그 사자가 화나기 전에 그냥 빨리 잡히라는 뜻이에요. 성현 형은 화가 날대로 난 그 사자한테 끌려갔어요. 아마, 분명 좋은 곳은 아니겠죠...."
기하는 피가 말라붙은 공책조각들을 내게 넘겼다. 이곳은 자살한 사람들의 천국이라는 내용, 자해를 통해 기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원한다는 뜻이니 자해를 해야만한다는 내용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공책 조각들에는 반듯한 글씨가 점점 흐트러져가고 있었다.
[점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자해를 통해 기억한 것은 선명해지는데, 다른 모든 것들이 점점 사라져갑니다. 당신도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당신도 나를 원망하십니까?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기점으로, 점점 편지의 내용은 지리멸렬하고도 섬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편지들은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은 거의 인간의 언어라고도 할 수 없는 끔찍한 내용이었다.
피에 적셔져 마른 것임에 분명한 종이에는 섬뜩한 웃음소리가 종이 가득, 가득 차 있었다.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키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고통을 통해 기억을 하게 되면 결국엔 다른 기억들은 전부 빠져나가고 그 기억만 남아요.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만약에 자해해서 자신을 죽게 만든 기억만을 남기면?"
"미치겠지, 분명."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당장 내 경우만 생각해봐도 예진이와의 추억도 없이 항암치료의 고통의 기억만이 남아있다면 제정신일 수가 없을것이다.
"그 성현이라는 사람도?"
"그거 아세요? 성현 형은 저와 친구였어요. 성현 형은 신부였었고 보육원 애들을 정말 사랑으로 돌보던 사람이었어요. 이 지옥에 떨어져서도 오로지 본인이 돌보던 보육원애들을 걱정하던 사람이었어요."
무표정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기하의 눈썹에 안타까움 비슷한 것이 묻어나왔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이기도 하고, 나쁜 짓을 반복하다가 나중엔 죄 없는 사람들까지 괴롭혔어요. 그때쯤엔 제가 '보육원 아이들이 자기들의 아저씨가 이렇게 된 걸 알면 어떨 것 같냐'고 소리질렀는데, '아저씨'라는 말만 겨우 알아듣고 절 보육원 아이들로 착각하고 울면서 키히히히. 웃더라고요."
"그 사람은... 어쩌다 이곳에 온거야?"
"잘은 몰라요. 성현 형은 교구장한테 제가 알던 누나랑 같은 일을 겪었다고 했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뻔하지 않아요? 형도 여기 주민이니 이해할 수 있잖아요. 분명 자살할수 밖에 없을 정도의 일이었겠죠."
"그 아는 누나가 혹시 지애라는 사람이야?"
기하는 울적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이야기는......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어색하게 웃으며 주제를 돌렸다.
"그래, 널 믿을게. 그러면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해?"
"좀 먼 길이 될거에요."
22.영원한 지옥
기하는 좋은 아이였다.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배려심있는 동행이었다. 덕분에 나도 지옥의 탈출구라는 7시를 향해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6시 즈음에 기하가 멈추어섰다.
"난 여기까지. 6시부터는 본격적으로 죽음이 기억나니까 이 이상부턴 안갈거에요, 형."
완벽한 햇살색 풍경을 향해 녹아들어간다. 해가 점점 뜨고 있다. 회색빛이었던 공원이 점점 밝아지고 있다. 해가 뜨는 저편에는 분명 완벽한 세상이 펼쳐져있다.
내가 가는 곳은 그쪽 방향이다.
"너는?"
기하가 고개를 젓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형, 저 건너편 세상은 완벽해요. 그래서 가고 싶지만....그러니까 안돼요.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테니까."
"왜?"
기하의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언젠가 들은 설명에 의하면 죽은 자의 나라에서는 눈물을 흘릴 수 없다. 눈물은 산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언제나 눈물 대신에 피였다.
"나는 용서하지 않을거거든."
누구를, 하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었다.
나는 고아원 친구들과 예진이 덕분에 행복한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있다는 것을 안다.
한창 모든 것이 즐겁고 꿈만 꾸는 것으로도 행복해야할 아이가 죽음을 택했다면, 그것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은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다. 괴로워보일 정도로 깊게 파인 팔목만 봐도, 얼마나 괴로웠는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용서할 생각 없어. 절대로."
....분명 내가 겪어보지 못했을 괴로움을 겪었을테니까. 하지만 그런 기하가 안타까워 괜히 입을 열었다.
"말리진 않겠어. 하지만 네가 다치진 않았으면 좋겠어."
기하가 비식비식 웃었다.
"난 알아요. 내가 망가지지 않고도 복수하는 방법을. 왜 내가 모르겠어요?"
그 동안 무표정이던 기하가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그 모습엔 더 이상 사람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독기가 서려있었다.
"그래, 잘 있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진심이야."
7시를 향해 떠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긴 절대 천국이 될 수 없는 곳이라고.
설령 이곳을 천국이라 부르더라도, 이미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지옥이니, 영원히 지옥이 될 수 밖에 없는 곳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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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웃긴대학 스팸1게티
http://web.humoruniv.com/board/humor/read.html?table=fear&st=year&pg=0&number=8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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