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람이 있는 풍경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것이고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다. 나는 한번도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예 의에 벗어나는 질문임에 틀림없으니까. 5월의 밤은 아름답다. 어제 낼 비로 밤 하늘은 모처럼 총총 빛나는 별들을 보 여주고 먼 곳에서 흘러오는 라일락 향기는 너무 진하지도 너무 연하지도 않아 이 밤의 그윽함을 더해 준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평수의 집들 당연히 마당이라고 해야 손바닥만한 넓 이가 고작인 우리 동네 담장에는 이상하게도 라일락 나무가 많다. 볼품없는 맨 가지로 서 있을때는 눈에도 띄지 않다가 늦봄이 되어 레이스 같은 보랏빛 꽃송 이들이 매달리기 시작하면 향기와 함께 누추한 골목길을 환하게 만들어 주는 라 일락 그러나 우리 집 마당에는 한 그루도 없는 라일락 크리스털 화병을 내밀면서 라일락을 말하던 이모 집 정원에도 라일락이 없다. 이모 집만이 아니고 그 동네 담장 위로 확인할 수 있는 잘 사는 정원의 수종에 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라일락이 포함되지 않는다. 라일락은 그 화사한 자 태와 향기와 멋들어진 이름에도 불구하고 부잣집 정원에 선택되지 않고 초라한 마당의 한뼘 땅에서 더 많이 생존한다. 초등학교 5학년 이후, 나는 봄이 오면 늘 라일락을 주목해 왔다. 내가 나무라면 나는 라일락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 다. 그런데, 거듭 말하지만 우리 집에는 한 그루의 라일락도 없다. 그렇게 말하면 누군가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럼 어떤 나무가 있냐고. 나무는 없다. 아니, 나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마당이 없는 것이다. 대지 27평, 건평 18 평인 우리 집은 이 동네에서도 가장 작은 집이다. 우리 가족은 십 년 이상 이 동네에서 전세로 맴돌다가 마침내 석 달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결혼 이십칠 년 만에 처음으로 가져 보는 어머니의 집이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일 년에 꼭 땅 한 평씩 장만한 셈이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일 년에 땅 한 평씩만.” 결혼 27년과 대지 27평을 비교하여 이런 공식을 계산해 낸 것은 진모였다. 어머니는 기쁨에 겨워 아들의 비웃음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통쾌하게 그 공식을 이렇게 발전시켰다. “그럼 가만 있어도 십 년 후에는 열 평이 더 늘어날 테고, 이십년 후에는 스 무 평이 더 늘어날 텐데, 이제 고생 끝났다.” 인생이란 더하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까먹기도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아마 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었다. 어머니만큼 뺄셈에 능숙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양말을 파고, 메리야스를 팔고, 나중에는 세수 수건까지 다 팔았지만, 남는 돈이 온전하게 어머니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남편이 빼 가고, 아 들이 빼 가고, 하다못해 야속한 세상까지도 어머니의 돈을 빼앗아 갔다. 물론 나도 빼앗아 갔다... 몹시도 작은 집이지만, 이 집으로 이사를 온 후 나와 진모는 비로소 방다운 방 하나씩을 차지할 수 있었다. 대문에 들어서면 오른쪽부터 진모 방, 진진이 방, 그리고 어머니 방이 있다. 진모 방과 내 방 사이에는 욕실이, 내 방과 어머 니 방 사이에는 부엌이 있다. 뒤꼍에 내어 단 길다란 창고, 앞마당에는 시원스 럽게 물을 쓸 수 있는 수돗간도 있으니 이만하면 라일락말고는 없는 것이 없는 집이었다. 만약 누군가 지금 대문을 들어서서 방 쪽을 쳐다본다면 아마 이런 그림이 보 일 것이다. 환하고 어둡고, 다시 환하고 어둡고, 다시 환한 빛의 그림. 두 번의 어둠은 욕실과 부엌이 자아내는 것이고 세 번의 환한 빛은 세 명의 가족이 각각 하나씩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언제부턴가 늘 이랬다. 두 개의 방을 비우고 하나의 방에 모여서 단란한 풍경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들처럼 늘 이랬다. 그래도 어머니는 요즘 무척 행복할 터였다. 진모가 무슨 생각인지 매일 저녁 늦지 않게 돌아와서 자기 방에 불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어머니 표정은 저절로 환해졌다. 냉장고 속에 진모가 좋아하는 갈치 토막이 빠지지 않는 것도 다 그 탓일 것이었다. 나는 절대 갈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도 그럴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갈치는 아버지가 몹시 탐하는 생선이었고 그래서 진모가 그 습성을 물려받은 것이므로. 갈치라나, 나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다. 라일락 향기에 갈치 비린내가 마구 섞이고 있다. 나는 참을 수 없어서 창문을 있는대로 활짝 열어 젖힌다. 있는 대로 활짝이라고 해봤자 내 방은 가운데에 끼여 있어서 뒤꼍으로 뚫린 구멍 수 준의 창 하나가 고작이다. 오직 하나뿐인 창문에 턱을 괴고 뒷담장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진모 방의 열린 창문으로 한껏 낮게 깔고 있는 그 애의 목소 리가 들린다. “그래. 음. 음... 그쪽에서? 좋아. 그럼 애들 철수시켜... 필요없어. 다 보 내라고... 음.” 정말이지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저런 식의 진모 말투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 르게 쿡,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한다. 지금 진모는 아랫배에 있는 대로 힘을 잔 뜩 준 채, 가능한 한 목소리 톤을 깔기 위해 턱을 목에까지 찰싹 붙이고 있을 것이다. 무게 있는 목소리와 표정이야말로 조직의 보스가 갖추어야 할 가장 필 수적인 조건이라고 진모는 죽어라고 믿고 있다. 언젠가 열려 있는 창문으로 나 는 보았었다. 혼자 거울을 들여다보며, 심각한 얼굴로, 저런 식의 무게 있게 좌 악 깔리는 말투를 맹렬히 연습하고 있는 진모를. “이런 때일수록 조용히 엎드려 있어야 한다고 내가 그랬지... 절대 실수는 용납 못한다... 음... 그래. 애들 단속이나 철저히 해... 알았어. 끊어!”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 이어서 들려 오는 것은 꽉 눌린 목소리를 다듬어 주 는 진모의 헛기침 소리. 일 분 정도의 목소리 다듬기가 끝나고 진모는 다시 띠, 띠, 띠, 전화번호를 누르기 시작한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애쓰 며 귀를 기울인다. 다시 목소리를 까는 진모. “음, 나야... 그래. 오늘 못 나가서 미안해... 그럴 일이 있었어. 그래. 다시 연락할 테니 기다려... 잘 자. 알았어. 나도 그래. 잘자.” 여전히 음산할 정도로 목소리를 깔고 있지만 그 속에 배어 있는 숨길 수 없는 감미로움이 이번 통화 상대는 여자라는 것을 단번에 알게 한다. 여자라, 나는 진모의 예전 여자들을 생각한다. 입대하기 전까지 진모의 여자 문제로 골머리 를 앓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기야 코밑에 수염이 나기 시작하던 고등학 교 1학년 때 이미 여학생하고 사단을 일으켜 퇴학을 당할 만큼 시작부터 화려했 던 진모였다. 그 뒤로 군대에 가기 전까지, 여자애 어머니가 달려와 포악을 떨 며 집안을 뒤집은 일이 두 번, 오빠라는 사람이 찾아와 밥 먹던 진모를 냅다 쓰 러눕힌 적이 한번, 들어와서 며느리로 살게 해달라고 시장까지 쫓아가 어머니를 괴롭힌 덜떨어진 여자애가 걸린 적이 한 번, 우선 떠오르는 큰 사건만 해도 다 섯이었다. 그 많은 여성들을 다 물리치고 군대에 갔던 진모는 제대 후 지금까지 일 년이 가깝도록 고요했다. 군대에 다녀온 이후 진모가 몰두하고 있는 일은 오로지 조 직의 재건과 정비, 그리고 관리였다. 날이면 날마다 밖으로 나돌면서 집에다는 빨랫감이나 떨구어 놓는 것이 고작인 진모에게 어느 날 뭐가 그리 바쁘냐고 물 었더니 한다는 대답이 이랬다. “위아래도 없어. 나 없는 새 엉망이 돼 버렸더라구. 손 좀 봐줘야 할 놈들이 한둘이 아냐. 조직의 보스 노릇, 아무나 하는 건줄 알아?” 세상에, 조직이라고? 아니, 조직의 보스라고? 어머니 말대로 군대 갔다 오면 정신 좀 차리려나 했더니 아예 ‘조직적’으로 ‘조직’에 매달려서 밤낮을 못 가리는 것이었다. 군대가기 전까지도 제 또래 건달들 몇 명하고 몰려다니면서 술판에 싸움판, 심심하면 파출소 유치장 신세까 지,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진모는 엄마의 애물단지였다. 그런데 3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었다. 하긴 아주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목소리를 깔기 시작한 것이 주요한 변화 중의 하나였다. 말하자면 이제 진모는 동네 건달에서 조직의 보스로 신분 상승 을 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있는 듯했다. 생각하면, 그 나이에도 동네 똘마니 로 남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발전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한 번 더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면,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이 보스 밑의 졸개 노릇에나 만족하고 밤거 리를 뛰어다니는 것보다는 백 번 괜찮은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보기에 그 ‘조직’이라는 것이 참으로 엉성하기 짝이 없 다는 데 있었다. 가끔 집에 드나드는 그 조직원들이라는 면면들을 보면 고등학 교에서 퇴학당한 여드름쟁이 서너 명에, 애시당초 주먹질하곤 거리가 먼 허약 체질의 심약한 성격의 졸개 몇 명을 놓고 노상 조직, 조직 해대니 내 보기에 그 조직이 심히 같잖을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모의 보스 노릇은 엄청 요란한 것이었다. 복장이 우선 그랬다. 새까만 정장에 구김살 하나 없는 와이셔츠와 넥타이, 반들반들 윤이 나 는 구두, 그리고 한 시간 정도는 투자해서 무스 발라 올백으로 넘긴 머리... 아 무것도 모르는 보스의 어머니는 밤마다 와이셔츠와 바지를 다리느라 한 시간 이 상은 품을 팔아야만 했다. 보스가 되기 위한 노력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여기에도 공부가 필요한 법이었다. 진모의 공부는 비디오테이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밤마다 줄담배를 피워 가며 눈이 빠지게 보고 있는 말론 브랜도의 「대부」와 최민수의 「모래시 계」, 이 두 편의 비디오테이프는 진모의 교과서이자 보스 세계의 모든 것이었 다. 말론 브랜도와 최민수가 목소리를 깔지 않았다면 진모도 굳이 그러지는 않 았을 것이었다. 말론 브랜도와 최민수가 검정 양복을 즐겨 입지 않았더라면, 그 랬다면 어머니도 밤마다 허리 아프게 아들의 와이셔츠와 바지를 다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여자라... 나는 다시 진모의 새 여자에 대해 관심을 쏟아 보기로 한다. 거의 틀림없는 일이겠지만, 그것도 보스로서의 구색 맞추기의 일환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한동 안 조직의 정비와 보스의 위상에만 매진하던 진모에게 여자가 생겼다면 그 여자 는 그냥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보스의 여자’인 것이다. 예전에 진모가 아무렇게나 만나고 헤어지던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니야, 아니다. 문득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보스가 먼저인 것이 아니라 여자가 시작일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일의 순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먼저 여자가 있었고, 그 여자를 위해서 진모는 보스가 되고자 했다. 진모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간이었다. 말론 브랜도와 최민수는 여자 때문에 피치 못해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었다. 자, 그렇다면 그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예전 같으면 내 생각은 여기서 멈추었을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것은 진모 의 인생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옳은 삶인지 그것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아무 도 없다.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라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 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일고 배운다. 학교를 다니지 않더라도 좋은 말씀들을 들을 기회는 사방 천지에 차고 넘쳤다. 신문이나 잡지나 책, 그리고 라디오나 텔레비젼에서는 오늘도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등장하여 가슴이 뻐근하도록 일일 이 옳은 말씀만 하고 계신다.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진모의 책임이었다. 내가 간섭하고 나설 일이 전혀 아니 었다. 어려서 물불을 가리지 못할 때라면 누나로서 마땅히 챙기고 도와 줘야 할 부분이 있었다. 그 몫이라면 나는 정말 성실하게 수행했다고 자부한다. 아 버지는 살림을 때려 부수고, 어머니는 부서진 살림 장만하기 위해 새벽부터 일 터로 뛰어나가야 했던 집이 바로 우리 가정이었다. 어머니가 진모를 위해 우윳 값을 대었다면 나는 그 애를 위해 아낌없이 내 등짝을 제공했었다. 심지어는 그 애를 업고 학교에 간 적도 있었다. 50년대도 아니면서 나는 내 유년을 그렇 게 보냈다. 진모가 나 못지않은, 아니, 나를 훨씬 능가하는 문제아로 청소년기를 보내는 동안에도 나는 그 애의 삶에 참견하지 않았다. 진모의 삶은 진모의 것이었고 진진의 삶은 진진이의 것이었다. 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삶의 공식인가 말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것이었고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어머 니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예의에 벗어나는 질문이었다. 누군가 내게 그런 실례의 발언을 하는 것도 결코 용납하 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과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상처받은 내 자존심이 용서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이 이러할진대 타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었다. 내 친구들 에게 한 번 물어 보면 당장 확인될 일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는 절대 충고 라는 이름의 지당한 말씀은 하지 않는 위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말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표현으로 길 게 하는 사람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말이었다. 그런 말을 준비하 지 못한 사람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면, 나의 그러한 주장들은 오류가 많은 것이었다. 아니,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 생은 나의 것이지만, 그러나 진모에게는 누나의 인생이기도 하고 어머니에게는 딸의 인생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진모의 인생은 나의 남동생 의 인생이다. 주체를 나로 놓고 보면, 그러면, 중요도가 확 달라진다. 조용히 입 다물고 구경만 할 수는 없다. 내 인생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나의 남동생의 인생도 가끔씩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다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 지만. 그래서 나는 진모의 여자, 다시 말해서 보스의 여자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진모의 방을 노크했다. 아니나다를까 진모는 등에 베개를 괴고 벽에 기대 어 하염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오늘의 교과서는, 힐끗 확인한 바, 「대부」였다. “무슨 일?” 진모가 점잖게 물었다. 집에서까지 보스의 말투를 사용하지는 않았었는데 이 제는 아주 습관이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보고 있던 영화 속의 말론 브랜도와 알 파치노의 영향이든가. “너, 또 여자 생겼니?” “이런. 나는 말을 하는 순간 후회를 한다. 이렇게 앞뒤 수식 빼고 대뜸 본 론만 들이대는 것이야 안진진의 보통 화법이니 괜찮다 쳐도 거기에 ‘떠’를 분 인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이번에는 보스의 여자인데. 아니나다를까, 진모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올백으로 넘기는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을 때는 이마가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모든 표정이 이마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진모는 한참 동안 양 눈썹에 힘을 주고 있다가 이윽고 담배를 한 대 꺼냈다. 역시 힐끗 쳐다본 화면 속에서 말론 브랜도도 입에 시가를 물고 미간 을 찌푸린 채 멀리 창 밖을 응시하고 있다. “생겼어.” 그러나 대답은 뜻밖에 순순하다. 이렇게 한 박자 감정을 건너 뛰어 이성적인 대답을 하는 방법도 「대부」를 분석하면 금방 확인된다. “좋은 애야.” 담배 연기를 공중에 날리며 짧게 덧붙이는 진모. “이번엔 긴장하지 않아도 되니?” 지나간 과거들이 웅변해 주듯이 네가 여자를 만난다면 나와 엄마는 공포를 느 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또 긴장하며 사건의 추이를 지켜 봐야 하는 것이냐, 라는 내용의 말을 압축해서 던지는 나, 안진진. “여전하군, 누나는.” 진모는 픽 웃으며 비디오의 정지 버튼을 누른다. 아버지 앞에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알 파치노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진모는 한동안 말없이 담배만 태운다. 그리고 묻는다. “누나는 연애를 해봤어?” 연애?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고 연애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나는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하지만 진모의 말에 일일이 반응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 치 까마귀보고 너는 왜 까마귀냐고 묻는 일보다 더 어리석다. 그리고, 사실, 진 모가 나에게 설령 “누나는 사랑을 해봤어?”라고 물었다 해도 느글느글함 때문 에 훨씬 더 괴로웠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천박함이 무명천처럼 고슬고슬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네 이야기나 해봐. 건방지게 굴지 말고.” 나는 사뭇 냉정하게 진모의 말을 잘라 버린다. 상대가 철없는 남동생이 아니 더라도 나는 누구와 마주 앉아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말들을 천연덕스럽게 나누 는 성격이 못 된다. “술 한 잔 할래?” 점점. 진모는 책상 밑에 술병 하나를 꺼낸다. 가만히 보자니 소주가 아니다. 위스키다. 진모는 병째로 꿀꺽 한 모금을 마시고 이마를 찡그리며 입술을 닦는 다. 제법 오랜 시간 연습한 꼴이 난다. 그러는 사이 나도 병째 한 모금을 털어 넣는다. 물론 진모처럼 폼을 잡지는 않았다. “향기가 좋지? 좋은 술을 마시고 있으면, 그러면 나는 좋은 여자가 생각나 더라.” 역시 진모는 진모다. 좋은 술을 마시고 있으면 좋은 ‘여자’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 생각난다고 말할 줄 알면 진모가 아니다. 보스보다 여자가 먼저일 것이는 추측은 거의 확실한 듯이 보였다. 나는 한 모금 더 마시고 술병을 진모 에게 건네 주었다. 이번에는 양이 좀 많았다. 후르르, 목구멍에 불이 붙더니 금세 뱃속이 찌르르해졌다. 조금 더 마시면 온몸이 따끈해지면서 기분이 좋아 지리라. 이런 느낌 때문에 나는 독주를 좋아한다. 술을 잘한다고는 말하고 싶 지 않지만, 술이 주는 즐거움을 누릴 줄은 알고 있다. 진모와 내가 공통적으로 받은 유전자가 있다면 바로 이것, 알코올에 친화력이 있다는 것이다. “군댓밥 삼 년 먹으면서 말야, 누나,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한 게 있어. 안진 모라는 놈의 질을 높이자. 사회에 나가면 이제 하나를 가져도 제대로 된 것을 가지자. 그렇게 결심을 했지. 증말 드럽더라구. 머리 박박 깎아 놓고 헐렁한 군복 입혀 놓으면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 왜 그리 가진 것이 많아? 자식들 말 야, 서울대 다닌다고 영어책 줄줄 읽어 대질 않나, 지 애비가 수십억 부자라고 눈 한 번 꿈쩍하지 않고 말하는 놈이 있질 않나. 하다못해 찾아오는 애인들을 봐도 이건 전무 탤런트 빰치는 거야. 어디서 그렇게 괜찮은 기집애들만 쏙쏙 골랐는지 이 안진모, 세상 헛살았다 싶은 거야, 그래서,” 그래서, 라고 말하다 말고 술병을 기울여 꿀꺽꿀꺽 들이붓는 진모.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괜찮은 여자를 골랐니?” “애는 썼는데...” 올백 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넘기며 진모는 씨익 웃는다. 흡족하다는 표정이 다. 그러던 진모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귀 좀 빌려 줘 봐”한다. 유치했지 만, 동생이라서, 아니 술기운에 참기로 하고 녀석에게 귀를 빌려 줬더니 이름 하 나를 또박또박 귀속에 불어넣는다. 그리곤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확인을 한다. “알아?” 알고말고다. 그러나 진모의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 나올 까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아는 그 이름의 주인은 누구나 이름만 대 면 다 아는 유명 재벌의 회장이다. 하지만 세상에 동명이인은 얼마든지 있는 법, 나는 결코 호들갑스럽게 놀라지 않는다. 그런데도 진모는 저 혼자 흥분해서 나에게 말한다. “놀라지 마. 바로 그 사람이야. 바로 그 사람이라구!” “그 사람이 어쨌다는 거야?” 이거 장난이 아니잖아, 라는 느낌에 홀연 정신이 번쩍 들긴 했지만, 그러나 한 편으로는 여전히 진모라는 위인에 대한 의심을 아주 많이 간직한 채 나는 심드 렁하게 물어 본다. “나도 처음엔 놀랐어. 엄청 착하거든. 비둘기, 그래, 꼭 비둘기 같았어. 아 냐.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찬비를 맞고 떨고 있는 비둘기라고나 할까. 그런 애는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 일부러 대답을 늦추고 있는 진모. “그 비둘기가 재벌의 딸이었어?” 말장난을 싫어하는 안진진은 기다리지 않는다. “비슷한 거야.” “비슷하다고?” “누나만 알고 있어. 우리 조직원들도 모르는 사실이야. 그 애, 그 재벌하고 아주 가까운 집이야.” 그러면 그렇지. 나는 조금 실망했고, 실망하는 스스로 때문에 조금 더 많이 실망했다. 진모는 그래도 의기양양했다. “그 재벌이 외삼촌이래. 놀라운 일이잖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처음 에는 거짓말인가 해서 애들 시켜 뒷조사를 해봤지. 틀림없었어. 명절마다 그 재벌 집에 모이는 친척 명단에 그 애 아버지 이름도 올라 있거든.” “웃기는 놈. 명절에 모이는 친척 명단? 정말 대단하다. 엄청 대단해.” 비웃기는 했지만, 나는 문득 쓸쓸했다. 명절에 모이는 친척 명단,이라고 내 입으로 한 번 더 발음하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이 나를 씁쓸하게 만들어 버렸다. 바로 이런 기분 때문에 남의 삶에 참견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왔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미 늦어 버렸다. 나는 내친 김에 한 마디 마저 해 버리기로 했다. 사실, 바로 이것을 물어 보려고 이 밤 진모의 방을 노크한 것이 기도 했다. “그럼 이번에는 네 여자 문제로 엄마나 내가 시달릴 일은 없겠구나. 아무렴, 그렇겠지. 착한 비둘기 같은 애를, 아니, 재벌 친척 명단에 올라 있는 아가씨를 우리 진모가 함부로 버리겠니?” 진모, 불현듯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면서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런 다음 허 공을 향해 헛웃음을 날린다. 이 일련의 동작들은 정확하게 최민수를 표절하고 있다. 이젠 거의 자유자재다. 연습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라고, 나는 또 쓸데없 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진모, 점잖게 입을 열었다. “사랑이란... 사랑이란 말이야. 사랑에 빠지지 않아야겠다고 조심 또 조심을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처럼, 영원 무궁토록 사랑하겠다고 아무리 굳은 결심 을 해도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 것이야. 사랑이란 그런 것이라고. 알아?” 지극히 머리를 쓴 발언이었다. 이 말은 재벌 친척이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그렇게 원하기 때문에 사랑하기로 했다는 것을 알아 달라는, 그러나 시간이 흐 른 뒤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말아 달라는, 한꺼번에 두 가지를 강조하되 그지없이 심오하고 멋있게 포장까지 해서 내놓은 수준작이었 다. 하기 이제까지의 그 잡다한 여성 편력이 어디 완전한 무위로만 그쳤겠는가. 이 정도의 말씀이야 여자들에게 들인 진모의 공력에 비하면 사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었다. 이만하면 알고 싶은 것은 다 안 셈이었다. 알고 싶은 것을 다 알았다고 해도 진모의 여자 문제가 달라질 것은 눈곱만큼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진모를, 진모 는 나를 한 번 더 확인한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일까. 아니다. 하나 더 있다. 라일락 향기 아련한 봄 밤에 남매끼리 마주 앉아 나누었던 한잔의 술, 그 아름 다움. 내가 그만 나가 보겠다는 움직임을 보이자 진모는 리모컨을 들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알 파치노가 다시 나타났고, 어딘가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방문을 닫고 나가다 말고, 나는 불현듯 돌아섰다. “네 연인이 연약한 비둘기 같다는 말, 어째 이상하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저 런 영화나 되풀이 보게 만들고 말야.” 두 번쯤 눈을 껌벅거리다 이윽고 내 말을 이해한 진모, 우와, 어떻게 알았어, 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얼결에 씨익 웃는다. 잠깐 방심하고 있는 이런 때 는 최민수나 알 파치노를 밀쳐 내고 진모의 원판 표정이 숨김없이 드러나 버린 다. 술이 깬 후,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는 세간살이들을 보며 짓던 아버지의 멍 한 그 얼굴과 아주 흡사한. “으음, 좀 그래. 강심장 비둘기라고나 할까.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게 보이 는 남자가 조폭의 보스라더군. 하기사 요즘 여자들 다 그래. 그런 이야기라면 다들 깜빡 죽는다니까. 요새 히트치는 영화들 보라구. 다 조폭 이야기야. 조 폭이 우상이라니까.: 조폭, 조폭, 할 때의 진모는 사뭇 들떠 있다. ‘조폭’이 조직 폭력배의 줄임 말이라는 것이야 나도 알고 있지만, 비둘기 한 마리가 홀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진모에게 조폭을 추천하고 있는 줄은 진정 몰랐다. 언제 그렇게 돼 버렸지? 슬금슬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조폭에 관한 정보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는 표정의 진모를 그냥 버려 두고 내 방으로 돌아오는데, 이건 또 웬일일까. 나도 모르게 전염되어 머 릿속에서 자꾸, 조폭, 조폭, 조폭하고 들끓는가 했더니 가만 귀기울여 보니 캄캄 한 부엌에서 실제로 무엇인가 폭, 폭, 폭 끓어 넘치고 있는 것이었다. 끓고 있는 것은 닭이었다. 어머니 방에 불이 꺼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닭 은 조만간 어머니 손길로 마무리될 것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랬지만, 나는 내친 김에 어머니 방까지 들여다보기로 작정을 했다. 닭이 다 삶아질 때 가지 어머니와 같이 있어 주는 것도 나쁘진 않다. 어머니가 나의 방문을 달가 워할는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밖에서 나지막하게 엄마, 하고 불렀지만 기척이 없었다. 방문을 열어 보니 어 머니는 이불도 덮지 않고 팔베개를 한 채로 잠들어 있다. 머리맡에 놓인 장부 책. 아마도 어머니의 오늘 하루 몇장의 팬티와 런닝을 팔았는지, 몇 켤레의 양 말을 손님 손에 넘겼는지, 그래서 얼마의 이익이 남고, 앞으로 얼마를 더 팔아야 곗돈을 부을 수 있는지까지 계산을 다 마친 다음에야 아픈 허리를 방바닥에 붙 여 봤을 것이다. 그리고 저 닭은? 나는 어머니의 머리 밑에 베개나 괴어 주고, 바람 일으키지 않게 살살 이불을 덮어 준다음, 조용히 그 방을 나올 생각이었다. 닭솥을 달구고 있는 가스의 푸 른 불꽃이야 내 손으로도 얼마든지 사라지게 해줄 수 있었다. 열살이 넘으면서 부터 내 손으로 곧잘 밥을 지어 먹곤했다. 착한 마음이 불일듯 일어나는 날에 는 된장찌개도 끓이고 나물도 무쳐서 밥상을 차려 놓고 시장에서 돌아오는 어머 니를 기다렸다. 그러나 열다섯 살이 넘은 후로는 그렇게 착한 마음이 생기는 날이 참 드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철이 들면 더욱 착하게 굴어야 할 텐데,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가만히 주위를 살펴보니, 내가 아는 착한 애들은 모두 바보였다. 그당시 나는 단지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불을 덮어 줄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베개를 고여 주려고 머리에 손을 대바마자 어머니는 거짓말처럼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머니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하긴,언제나 어머니는 이런 식이었다. 초저녁이고 한밤중이고 새벽을 가릴 것 없이 자신의 의지에 의 해서 눈을 뜨는 순간이 아니면 항상 그렇게 부르짖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제발 그렇게 놀라지 좀 말아요! 나야, 진진이라구." 그제서야 어머니는 평상심으로 돌아왔다. 부석부석한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 며 어머니는 얼른 시계부터 보았다. "웬 닭을 삶는다고 그래요?" 이런 어머니를 보면 어쩔 수 없이 짜증부터 나는 안진진. "불 껐니?" "이제 끓는 모양인데 뭘. 그런데 웬 닭이냐구?" "웬 닭은,진모나 먹일까 하고 아까 얹었는데,그새 잠이 들었네." 평상심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생생해진다. 이불을 걷어치우고 베개를 밀어붙이고,어머니는 지금부터 한판 붙어도 끄떡없다는 투다. 이 놀라운 재주, 그것은 마치 태엽이 다 풀려 늘어져 있던 장난감 강아지에게 있는 대로 태엽밥을 먹인 후의 돌변보다 더 돌연한 것이어서 언제나 나를 기막 히게 만든다. 지칠대로 지쳐서 지푸라기처럼 늘어져 있는 어머니를 대할 때는 짜증이, 태엽이 감긴 후의 생생한 어머니를 대할 때는 적의가 치솟는 어머니에 대한 나의 대응법 또한 그 못지 않게 변환이 신속한 것이긴 하지만.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이젠 안 잔다." 장부책 밑에서 책 한 권을 꺼내는 어머니. "그건 또 뭐예요?" 냉정해지려는 마음을 다스리며 어머니의 일네 간신히 관심을 표해 본다. 어머 니는 책 표지를 손으로 가리며 얼른 나가라고 눈으로 재촉했다. "무슨 책이야?" 갑자기 궁금증이 솟는다. 어머니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 우리집에 아주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책의 내용은 일어나는 혹은 일어난 일의 아주 중 요한 단서가 된다. 자주 있는 일은 나니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힘만으로 상대하 기 버거운 문와 직면하면 마자막 수단으로 동네 서점에 달려가 해결법이 들어 있을 것 같은 책을 고르곤 했다.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와 한참을 씨름하다 문 득 뒤페이지의 해답 편을 반짝 떠올리는 수험생처럼. 내가 기억하기로 어머니에게 난해한 문제를 가장 낳이 제공한 사람은 아버지 였다.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두꺼운 책을 여러권 읽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알 아 낸 것은 책 속에는 해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어머니는 거의 책을 읽 지 않았다. 성공한 여자 사업가의 자서전 한 권과 대학 교수 가 재미있게 풀어 쓴 문제아이 다루는 교육론, 누군가한테서 미꾸라지 양식이 돈이 된다는 소리를 듣고 "미꾸라지 양식법"을 읽었던 것이 아마 전부였을 것이다. 쏟아지는 밤을 물 리치고 독파해 낸 그책들도 어머니 인생에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다. 성공한 여 지 사업가도 되지 않았고, 진모나 내가 훌륭한 자녀로 성장하지도 않았으며 미 꾸라지 양식은 자본금 때문에 시작도 못 해봤으니까. 이모도 책을 좋아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읽은 책을 이모가 읽은 적이 없고, 이 모가 읽은 책을 어머니가 읽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 이모 는 말했다. 진진이 너, 다리를 찍는 사잔사 이야기 아니, 하고 묻던 이모. 아 그 소설,하면서 제목을 대 주었더니 한참 동안 독후감을 소ㄷ아 놓던 이모. 그리고 또 뭐랬지? 아, 그랬어. 요샌 양희은이 부르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라는 노래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 노래를 피아노 반주로 부르고 또 부르다가 딸기 잼 한 냄비를 다 태웠다던가. "엄마도 소설책 읽어요?" 이모가 그럴 수 있다면 어머니라고 못 할 것이 없다. 나이가 들면서 내 어머 니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들고 있는 책을 거의 빼앗다시피 한다. 어머니가 눈을 흘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게 뭐야? 일, 본, 어, 첫, 걸, 음? 100만 부를 돌파한 일어회화의 영원한 베 스트 셀러?" "오냐. 니네 엄마, 일본어 좀 배워 보려고 그런다. 왜?" 역시 이번에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속옷가게, 이문 없어서 이젠 집어칠란다. 요새 우리 시장에 일본 사람들이 하 도 많이 오길래, 그래서 일본 사람 좋아하는 걸로 팔아 볼까 연구 중이야. 빤쓰 아무리 팔아야 남는 게 있어야지. 요샌 내가 파는 속옷은 시골 사람이나 사 입 지 젊은애들은 거들떠오 안 봐. 빤스도 패션이라는 데야 원, 할 말이 있어야지." "일본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데?" "인삼, 김, 김치, 장아찌, 그런 것들을 엄청 찾거든. 박스떼기로 사 가는데 아예 일본 사람만 상대하는 그런 가게가 요새 제일 경기가 좋단다. 그런데 일본말을 할 줄 알아야지. 우선 이 책이나 떼 보고 뭘 하든지 말든지. 까짓것, 하면 하는 거지." 어머니는 자신 있다는 듯 하하, 웃었다. 어머니의 웃음은 나날이 힘차진다. 어 머니에 대해 연구할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 불가사의한 활력일 것이었다. 전 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활력을 재생산해서 삶 에 투자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재생산 기능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젊 어서는 그렇게도 넘치던 한숨과 탄식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 은 이해할 수 없는 삶에의 모진 집착뿐이다. 내 어머니는 날마다 쓰러지고 날마 다 새로 태어난다. 어머니의 불가사의한활력, 이것도 앞으로 내가 유심히 살펴야 할 생의 비밀이 다. 어머니를 탐구하면, 탐구해서 분석하면, 혹시 어머니의 그치지 않는 활력을 표현할 적확한 말을 찾아 낼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어 첫걸음'을 들고 하하, 웃는 오십둘의 어머니.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 여'를 배운다고 진지하게 말하던 오십둘의 이모. 겹쳐지는 두 영상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두 사람이 쌍둥이라는 것을 떠올린다. 닮았다. 그러나 전혀 닮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어디가 닮았고 어디가 닮지 않았을까... "얼른 가서 자. 나는 요놈의 히라가나 마저 외워 버리고 잘테니까. 참, 가는 길 에 가스불 끄고. 어지간히 삶아졌겠다. 내일 아침에 진모 좀 챙겨 먹여라. 일요 일이라고 내처 자지 말고, 알았니?" 어머니는 자기 할 말만 다 마친 뒤 곧장 훌훌 겉옷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어 머니의 잠옷이 나타났다. 이모가 즐겨 입는 비단 잠옷 대신, 치수가 너무 커서 팔리지 않은 춘추 내복. 그것도 오래 입어 팔꿈치나 무릎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희미한 분홍 내복 차림으로 요 위에 엎드려 어머니는 일본어 회화책을 펼쳤다. 일요일 아침. 진모는 그새 나가고 없었다. 일요일이라고 내처 잔 것도 아닌데, 어머니의 부 탁대로 진모에게 닭고기를 먹이기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 아침 아홉 시 이십 분에 들여다본 진모의 방은 텅비어 있었다. 이런, 새벽부터 비둘기에게서 소식이 날아든 것일까. 아니면 그 허약한 조직원들이 또 무슨 사고를 친 것일까. 나는 텅 빈 집에서 홀로 물에 만 밥을 먹는다. 건평 18평짜리 집도 혼자 있으 면 휘적휘적하다. 그래도 나쁘진 않다. 나는 알고 있었다. 적어도 한 시간 이내 에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릴 것이었다. 물론 두 남자 중의 한 사람일 터이지만 누가 될지는 나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두 사람 모두에게 미리 일러 두었 었다. 어제 토요일은 야근, 만날 생각이 있으면 일요일 오전에 연락하자고. 그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 내가 누구를 원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 다. 그렇다고 두 사람 모두를 상대해서 사랑의 대 활약을 펼칠 만큼 뻔뻔한 여 자도 못 되는 사람이 나였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지난 어느 날, 그리도 간절하게 스스로를 향해 다짐했던 바대로 나는 이제 되어지는 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안진진이 아니었다. 나는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걸기로 이 미 결심을 한 사람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아주 생각이 깊어졌다. 무슨 일이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주의 깊게 관찰하는 습관도 제법 익숙해졌다. 남자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가 누구를 원하느지 알 수 있을때까지 한 걸음만 뒤로 물러나기로 했었다. 당 분간은 관망, 이것이 내가 두 남자에게 정한 법칙이었다. 그러므로 누구 한 사람 을 선택해서 미리 주말 약속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비상 대책이긴 하지만, 운명이 어떻게 개입하는지 두고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결정할 수 없으면, 그러면, 잠시 다른 힘을 빌려 보는 것이 었다. 물 만 밥을 다 먹고, 간단한 설거지를 마친 다음, 전화기를 욕실 앞에 가져다 놓고 머리를 감을 때까지도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의 행 동 수칙을 변경했다. 머리를 말린 다음 간단한 화장과 외출 채비를 평소처럼 신 속하게 처리한다. 그 일을 다 마칠 때까지 걸릴 시간은 대략 이십 분, 지금부터 이십 분 동안에 전화가 오지 않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전화가 올 때까지 집에 서 머뭇거리는 것도 게임의 법칙에 위반이니까. 이십 분 안에 전화가 오지 않는 다면 오늘의 내 운세는 홀로 영화관에 가고 홀로 책방에 가라는 뜻이니까. 지정해 놓은 이십 분에서 오 분을 남겨 놓고, 마침내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 이 울릴 때 나는 이미 대문 열쇠를 손에 들고 마악 구도를 신으려 하는 찰나였 다. 나는 전화벨이 다서 번 울리기를 기다려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게임은 혼자 해도 아슬아슬하다. 나는 두 사람 중 과연 누구의 목소리가 흘러 나올지 너무나 궁금해서 목소리가 다 갈라질 지경이었다. "아, 진진 씨. 접니다. 안녕하셨어요?" 제한 시간 오 분을 남겨 놓고 전화를 걸어온 남자는 김장우가 아니라 또 한 사람, 나영규였다. 김장우 같았으면 진진 씨,라는 호칭 대신 안진진, 하고 불렀을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면서 오른손으로 쥐었던 전화기를 왼손으 로 바꾸어 쥐었다. 그리고 오른손에게는 걸레를 집어 먼지가 묻은 구두코 닦는 일을 시켰다. 그리고 나는 나영규에게 대답했다. 낭랑한 음성으로 이렇게. "네. 영규 씨!" "지금 나오실 수 있지요? 빨리 나오세요. 날씨가 기가 막혀요." 과연 그랬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괘청했고 나영규는 언제나 그렇듯이 튀 는 물고기처럼 싱싱했다. "이렇게 합시다. 지금부터 이십 분 후에 진진 씨 동네 지하철옆 앞에서 기다려 요. 거기, 주차하기가 마땅치 않으니까, 미안하지만 진진 씨가 먼저 나와서 내 차를 기다려 줘요. 알았죠? 나는 지금 바로 출발합시다!" 나는 지금 바로 출발합시다,라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나영규는 전화기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십 분 후라는 시간을 맞출 수 있는지, 정확히 지하철 입구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등등의 자상한 설명은 나영규라는 남자한테는 어울리지 않는다. 김장우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잠시 망설인다.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십오 분이면 충 분하다. 지금 나가서 기다려 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뭔가 많이 찜찜하다. 나는 괜히 수화기를 들었다 놓아본다. 다 닦은 구도코를 열심히 들여다보기도 한다. 핸드백을 열고 콤팩트를 꺼내 이마며 볼을 탁탁 두들겨 보기도 한다. 마지 막에는 정말 할 일이 없어서 냉장고의 찬물을 한 컵 가득 부어 마시기도 했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 위에 손을 올려놓고 나는 훅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세었다. 둘, 셋, 넷, 다섯. "여보세요?" "안진진! 있었구나, 안진진." 김장우였다. 운명은 두 사람한테 오 분 간의 시차를 두었다. 나는 이 운명을 확인하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있었지요." "그럼, 기다릴래? 내가 지금부터 준비해서 나가면 한 시간 후쯤 진진이 동네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생각해서 나한테 말해 줘." "안 돼요." "그럼 두 시간 후에 만날까?" 아무것도 모르는 김장우는 단지 시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마음 속으로 끙, 한숨을 쉰다. "그게 아니구요. 지금 막 약속이 있어서 나가려던 참이었거든요. 전화를 좀 빨 리 하지..." 나도 모르게 마음 속의 말이 나와 버리고 말았다. 김장우는 잠시 낙망하는 기 색이 역력하다. 김장우의 낙망에 가슴이 찌르르 아프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스 스로에 대해 놀란다. 아니, 이러면 안 돼. 이럴 것 같았으면 운명에 맡기지 말았 어야지. 나는 얼른 고개를 흔든다. 어쩌면, 아니 틀림없이, 김장우와 먼저 약속을 정한 뒤 나영규한테 전화가 왔더라도 이런 기분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감정 은 전혀 주목할 것이 못 되었다. "그랬어...그럼 오후에 만날까? 기다릴 테니 진진이가 전화해." "어려울 거예요. 기다리지 마세요. 우리, 다음에 만나요." "그래...그럼, 어서 나가 봐. 친구가 기다리겠다. 안녕. 안진진." 친구라고? 아무 의심 없이 친구라고 말하는 김장우. 나느 전화를 끊은 뒤 한 참 동안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단호히, 집을 나와 지하철 역을 향해 천천 히 걸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상했던 것보다. 두 남자를 놓고 저울질하는 이런 게임은 훨씬 어려워... 나는 늦었다. 나영규는 십 분 기다렸다고 했다. 나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 따. 나영규의 시야에 잡힐 수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부터 나는 열심히 달렸 다. 나영규는 분명 뛰는 내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면 된 것이었다. 여자 나 이 스물다섯쯤되면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이 정도 트릭은 부릴 수 있는 법이다. "자, 우선 교외로 나가서 봄날을 즐겨 봅시다. 그런 다음에 분위기 좋은 곳에 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돌아다니다 멋진 곳 나오면 차도 한 잔 마신 다음, 종로 로 가서 영화를 보는 겁니다. 점심은 늦게 먹어도 되겠지요? 일요일에는 아침식 사가 늦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침밥을 늦게 먹어 괜찮은 사람이 자기인지 나인지 알 수가 없다. 나영규는 나의 궁금증은 아랑곳하지 않고 운전하랴, 스케줄 발표 하랴 여념이 없다. 만사에 준비가 철저한 나영규답게 오늘의 계획도 하염없이 세밀하다. 내 의견이 필요한 자리는 식당의 메뉴판 앞이나 될 것이다. 하기야 그 것 역시도 예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낙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집은 스테이크 가, 이 집은 곰탕이, 이 집은 냉면이, 등등의 추천 요리 형식을 거치지 않은 적 이 거의 없었으니까. "영화는 6시 40분 시작입니다. 표는 어제 구해 놨지요. 때문에 저녁식사는 9시 입니다. 종로에 아주 맛있게 하는 집을 알고 있으니 그건 걱정 마시구요. 오늘 드라이브는 문산에서 임진강으로, 그런 다음 장흥으로 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차 한 잔의 대화는 아마도 장흠쯤이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만." 스케줄 발표를 마친 나영규는 그제서야 내 얼굴을 돌아다보며 활짝 웃는다. 자신의 발표가 너무나 흡족해서 견딜 수 없다는 웃음이다. 나영규라는 사람의 웃음은 전염성이 아주 강하다. 지금도 그렇다. 마음 속으로는 나영규라는 남자의 일방통행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웃음을 따라 화들짝 웃어 버린다.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무엇이 이 남자에게 있다. 동그 란 눈, 아마 저 동그란 눈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난기 같기도 하고 초롱초롱 총 명기 같기도 한 반짝이는 눈빛, 동그란 쌍꺼풀을 따라 낙천적으로 그려지고 있 는 둥그런 곡선. 그 밑의 조붓한 코도 전혀 세상살이에 시달린 흔적 없이 또렷 하고 맑다. 푸르스름한 면도 자국만 아니라면 거기 수염이 있다고 짐작할 수 없 을 만큼 이 남자의 입술선 또한 깨끗하다. "거기 뒷자석 보세요. 약간의 간식과 음료수를 준비했습니다. 드세요. 오늘 아 침, 나 정말 바빴어요. 진진 씨 모시려고 세차도 했지요, 진진 씨한테 잘 보이려 고 목욕탕에도 갔다 왔지요. 여기봐요, 기름도 만땅이잖아요? 시골에서 주유소 찾기 어려울까 봐 기름도 가득 넣었어요. 그 모든 준비를 마친 다음에 진진 씨 한테 전화한 거예요. 진진 씨, 내 얼굴 한 번 보세요. 나 좀 괜찮게 보여요?" 일부러 내 쪽으로 얼굴을 갖다 대는 나영규. "멋있는데요?" 이런 짓은 아무래도 유치하다고 여기면서도 상황에 적합한 대사를 내놓는 나. 안진진. "여자들은 감각 기관이 확실히 남자들보다 발달한 것 같아요. 오늘 아침에 동 생이 내 팔뚝을 꽉 잡더니, 오빠, 요새 연애하지? 누구야? 나한테 소개해 주지 않으면 재미없을걸? 이러는 거예요 와, 아주 족집게예요." "그래서 뭐랬어요?" "족집게 도사한테 당할 수 있나요. 맞습니다. 맞아요, 하고 술술 다 불었지요. 지금쯤은 아마 엄카도 알고 있을걸요. 고것이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리가 없어 요." 나는 이 발언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하게대처하자고 마음을 먹는다. 주위 사람 을 동원해서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이런 대화의 기술도 어 김없이 내가 정한 유치함의 범위에 속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치함 이 문제가 아니다. 그는 마음을 정했을지 몰라도 나는 아직 아는 것이다. 긍정적 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경솔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꾸한다. "여동생들은 오빠한테 늘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요? 나한테 오빠가 있었다 고 해도 나 역시 매주 일요일마다 그런 말을 했을걸요." "예? 아, 예..." 내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해서 잠시 곤혹해하는 나영규. 모르는 척 잠짓 바깥 에 한눈을 파는 안진진. 운전에 열심인 척하면서 내가 한 말을 곰곰 따져 보는 나영규. 잠시 후 어떤 해석을 내릴지 몹시 궁금하다고 생각하는 안진진. 그 사이 자동차는 구파발을 지나고 있었다. "그렇군요. 진진 씨한테는 오빠가 없군요. 걱정 마세요. 내가 오빠 하면 되잖아 요? 그렇죠?" 마침내 엉뚱한 해석을 내리고 활짝 웃는 나영규. 나도 그만 그웃음에 전염되 고 말기로 작정을 한다. 그러다 문득, 운전하는 남자의 자신만만한 옆얼굴을 보 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고개를 흔든다. 엉뚱한 답변이 아니었다. 아주 적절한 수 비가 아닌가 말이다. 흠, 절대 만만치가 않아. 조심해야지. 5월의 화창한 어느 일요일, 나는 몸을 사리고 한 남자와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하기 시작한다. 동그란 눈을 가진 남자는 운전을 하는 틈틈이 테이프 박스를 뒤 져서 열심히 음악을 공급했고, 스쳐 가는 풍경들에 대해 일일이 촌평을 하는 수 고로움을 마다 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면 나라고 해서 화창한 5월의 어느 휴일에 초록의 향연이 아주 볼 만한 야외를 자동차로 달리는 일이 좋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여러 가지 경로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남자와 함께하는 시간들이었다. 보통 의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사랑이란 그다지 까다로운 요구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만약 김장우가 없었다면 내가 나영규와 더불어 사랑으로까지 가 버리는 일은 아주 쉬운 듯이 여겨졌다. 그에게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이 없는 한은. 나영규에게 치명적인 결함은 없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단정한 얼 굴을 보이며 구불구불한 신작로를 운전하는 일에 열중해 있는 그의 모습에 슬그 머니 미소를 짓기도 했었다. 경치 좋은 곳을 기분 좋게 달리다가 우연인 듯 발 견한 통나무집에서의 점심도 맛있었다. 분위기 좋은 음식점을 찾기 위해 미리 " 서울 근교의 맛있는 집, 멋있는 집" 같은 책으로 철저히 연구를 해둔 나영규의 치밀함을 덕분이었다. "진진 씨 배가 고플 즈음, 아주 자연스럽게 이 통나무집을 지나기 위해서 드라 이브 코스 짜느라 머리 좀 썼어요. 나는 이런 계획을 짜는 일이 정말 재미있어 요. 시간이 내 계획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면 시간을 장악한다는 느낌도 괜찮고 말예요." 마찬가지로, 지나는 길에 자연스럽게 찾아낸, 그러나 사살은 그 또한 연구가 끝나 서을 출발 때부터 이미 나영규에게 선택당하고 있던, 멋진 카페에서 마시 는 차 한 잔도 성공이었다. 약간의 흠이 있다면 이모든 선택이 얼마나 멋들어지 게 맞아떨어자고 있는가를 거듭 강조하는 나영규의 무궁한 활력이었다. "좋지요?" 이집을 선택한 것은 경치도 경치지만 "그날 오후"라는 찻집 이름이 캡이었어요. 먼 훗날, 진진 씨와 내가 앉아서 그날 오후, 우리가 그곳에서 차를 마셨었지, 하고 회상할 수 있는 축억을 만들기에 안성맞춤이었거든요." 추억까지 미리 디자인하고 있는 남자, 현재를 능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어 먼 훗날의 회상 목록까지 계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만들 어진다는 등,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에 그렇게 머리를 쓰고 살자면 피곤하겠 다는 등의 분위기 깨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부득불 해가면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 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이었다. 어쨌든 둥근 눈을 가진 남자의 활력은 대단했다. 그가 가진활력의 양은 아주 대단해서 조금도 아낄 필요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차를 마시고 몇군 데 시골길을 둘러 시내 진입할 무렵부터 피곤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동차를 너 무 많이 타서 느끼는 멀미는 결코 아니었다. 자동차에 실려 어딘가를 달리는 일 은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오늘의 일정이 벅차서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것 도 아니었다. 내가 한 일은 옆자리에 앉아서 몇 마디 말을 나누거나, 웃거나, 내 려서 조금 걷거나 했던 것이 전부였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그 정도를 가지고 벅 차다고 말할 여자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피곤했다. 앞으로 영화에 저녁식사까지 적어도 네 시간 이상을 이남자와 더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아무 데서나 내려 집으로 돌아가소 싶어졌다. 이 남자와 같이 지낼 앞으로의 네 시간에 대해 아무런 궁금증도 없다 는 사실이 어쩌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영화를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다면 휠씬 흥미로울 수 있었다. 설령 영화를 보았다 하다라도 그 다음의 시간들이 백지 상태로 놓여져 있었다면 그만 큼 더 흥미가 발생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영규라면 절대로 시간을 그런 식으 로 방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영화를 보아야 하는 사 람이고, 마음에 정해 두었던 음식점에서 정해진 메뉴대로 식사를 해야 할 사람 이며, 역시 마음에 계획한 도로를 달려서 나를 집에 데려다 주는 것으로 오늘의 일과를 끝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에 대해 그렇게 함부로 단언하는 것은 옮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하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영화를 꼭 보야 하나요?" "그럼요. 이 표 예매하느라고 어제 무려 두 시간이나 투자했는걸요." 나영규의 대답이 나오는 데는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또 물었다. "지금 가면 너무 빠르지 않나요? 극장은 저기 있는데, 시간은 삼십 분이나 남 았는걸요." "아녜요. 정확해요. 주차하는 데 적어도 10분은 소요되고, 약간 걸어서 극장 도 착하는 데 5분, 매점에서 마살 것 사고 화장실 다녀오면 또 5분, 조석 찾아 앉는 데 2분, 도합 22분, 8분 정도 숨돌리고 나면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어요. 빠 르지도 늦지도 않아요. 딱 좋아요." 머릿속에 계산기를 넣어 가지고 다니는 남자. 이 남자 나영규와 앉아 있으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현실이 보인다. 너무나 일목요연하게 어디 제멋대로인 꿈 이나 상상 같은 것은 전혀 끼여들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알고 있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이지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잘 정리된 남의 집보다 적당히 너저 분한 남의 집이 묵어 가기에는 휠씬 편한 법이다. "자, 보세요. 영화 시작 6분 전이에요. 내가 계산했던 시간과 2분 오차가 났네 요." 영화관. 예약된 조석에 앉아마자 오차 시간 2분을 계산해 내는 나영규. "어때요. 이 집 샤브샤브, 맛있지요? 종로에서 외식하려면 십중팔구 실패하기 십상이에요. 하지만 염려 없어요. 이런 수준의 집을 너댓 개 알고 있으니까." 음식점. 한 끼 외식쯤 실패한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어지기라도 하나, 하는 반 문을 숨긴 대 고개만 끄덕이는 나. "이젠 집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어머님한테 전화를 하세요. 앞으로 삼십 분 후에 도착한다구요." 자동차 안. 핸드폰을 내미는 남자에게 "됐어요. 금방 갈텐데요" 하고 말하는 나. "줄거웠어요. 진진 씨도 즐거웠다면 좋을 텐데." 집 가까운 도로, 멈춘 자동차 안.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나영규. 거리의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여전히 웃음꽃이 만개. "저도 즐거웠어요.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남자의 내민 손에 손을 포개며 즐거웠다고 말하는 나. 사실 즐거운 시간들도 적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나영규는 차를 돌려 떠났다. 나 또한 미련 없이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골목 입구의 구멍가게에 하늘색 공중전화가 놓여 있 다는 생각은 하필 그 순간에 왜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가방을 뒤져 동전을 찾았다. 누군가와 밤이 새도록 통화를 해도 남을 만큼 동전은 넘치도록 많았다. 하늘색 공중전화기도 얌전하게 입을 다물고 자신의 몸을 눌러 줄 누군 가를 기다리고 있다. 나 또한 수첩을 보지 않고도 거침없이 누를 수 있는 일곱 개의 숫자를 하나 알고 있었다. 동전이 떨어진 것은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다음이었다. 그는 집에 있었던 것이 다. 나는 한 박자쯤 쉰 후에 "여보세요" 하고 말할 참이었다. 그런데, 나의 "여보 세요" 소리를 기다리지도 않고 기계음이 흘러 나왔다. "김장웁니다. 지금은 남도로 여행 중입니다. 전하실 말씀을 남겨 주세요...삐 이......." 삐이...신호음이 울렸지만 나는 아무것도 남길 말이 없었다. 김장우의 선량한 음성만 귓전에 맴돌았다. 언제라도 가방만 둘러메고 떠나는 데 익숙한 김장우였 다. 그는 전문적으로 야생화만 촬영하는 사진작가였다. 하지만 오늘 남도로 촬영 여행을 떠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이렇게 해석해 보았다. 김장웁니다. 안진진과 일요일을 함께 보내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아서 쓸쓸하게 남도로 떠납니다. 쓸쓸함이 가시 면 돌아오겠습니다........ 내 마음대로 해석한 김장우의 전화 메시지 때문에 나는 쉽게 하늘색 전화기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동전은 넘치도록 많은데, 뒤에서 빨리 끊어 달라고 재촉하 는 사람도 없는데, 조용조용 꽃 가지를 흔들고 있는 라일락은 저리도 아름다운 데, 밤공기 속에 흩어지는 이 라일락 향기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은은하기만 한 데... |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