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실학 특히 經世致用의 실학파에서는 왕정집중지향의 속성이 더욱 강했었다.
소위 <朝廷의 法制>나 그 운용형태가 지배층士族의 중간농단을 옹호하는 것으로
구조화되고 따라서 국가체계는 일종의 수탈기구로 작동하는데 대한
양심적인 선비들의 반성이 일어나 현실인식이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실학에서 확고한 왕정론을 가장 먼저 주창한 사람은 반계 유형원 선생이다.
하지만 기존체제에 안주하는 지배층 士族은 대다수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반계로부터 60년 후에 나온 성호 이익 또한 변법을 통한 합리적인 왕정의 구현을
추구하였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호 이후 또 60년이 흐른 다음에 태어난 정약용은 성호학과 서학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더욱 개방적인 실학학풍을 확립하고 이용후생까지 아우르며 면학에 힘쓰다 급제하여,
마침 현군인 정조를 만나 한동안 많은 개혁적인 업적을 이루었으나,
정조의 급서로 필경 기나긴 귀양살이로 인생의 황혼을 맞았으니,
이후 조선의 개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조선의 말로였다.
다산은 중국의 古經들을 심혈을 기울여 연구하여
새로운 왕정구현을 위한 <經世遺表(경세유표)>를 저술하였다.
새 시대를 창출하고자 하는 의욕적인 국가개혁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왕정실현은 장구한 세월이 요한다고 생각하여,
먼저 백성을 옳게 다스려 민생보전을 기하고자 <목민심서>를 다시 저술하였다.
<경세유표>에 나타나는 다산의 인간관은
<자율성을 갖고 귀욕과 부욕을 떳떳이 추구하는 존재>로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天理의 이념과 현실의 인간 실태> 사이에는 괴리가 있기 마련이고,
국가의 공동체적 규범에다 인간의 개별적인 욕구를 종속시켜야하는 모순도 있기 마련이다.
다산은 국가체제의 구성과 운용에 관한 제도적 원형들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중국의 역사적 사례들까지 무수히 원용하고 있다.
무릇 국가라는 공동체를 운용하면서 그 구성원인 다양한 개별 인간들로 하여금
각자의 실질을 어떻게 지키고 살려갈 것인지, 이상적인 면과 현실적인 면을 아우르며
많은 사례들을 곡진히 탐구함으로써 전근대 국가체제의 최후의 원형을 집대성 했었다.
국가권력과 개개인의 인권,
그 사이의 간극이나 모순은 오늘날에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질 않은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개개인의 인권이 국가권력보다는 더욱 신장되어 가는 민주주의 체제가
점차 보편화되어가는 추세임에는 틀림없다. 우리 한국사회 역시 그러하다.
그에 반하는 국가체제는 인민(개인의 다수복합체로서의)의 저항을 받기 마련이다.
그게 이젠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추세라,
국권도 인권의 바탕위에서만 강고해 질 수 있는 시대이다.
그렇게 국가와 개인이 정합(整合)의 방향으로 함께 갈 때만,
국가나 공동체가 발전해 갈 것이다.
다산은 자신의 천명을 아는 듯, 묘지명을 스스로 지어 놓았다.
다산 묘지임을 알리는 비석, 여기서 잠시 올라서면 묘소다.
<문도공 다산정약용 숙부인 풍산홍씨 지묘> 부부합장묘.
背山臨水에다 전망이 툭 터져 두물머리가 내려다 보인다. 참으로 안온한 명당이다.
비가 와서인지 상석이나 묘지가 더욱 단아해 보이고 정감이 가는 게,
선친 묘소를 찾는 듯 착각이 일었다.
비가 오는데다가 땅이 질어 무릎은 꿇지 못하고 공손히 합장하여 서서 절을 했다.
예의범절이라는 것도 가만 생각해 보면, 그 바닥에는 합리적인 과학성이 깔려 있는 것이다.
실용을 중시한 다산 선생께서, 비오는 날 진땅에 꿇어 앉아 절함으로 해서
당신을 존경하는 후학이 옷버리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을 것이며,
그런 <過恭은 非禮>, 미련한 짓거리라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몇 해만에 참배를 하고나니 개운하고 차분해져 속으로 다산 선생과 무언의 담소를 한참이나 나누었다.
역시 화두는 平和, 民生, 後生可畏, 實事求是, 斥邪, 爲公, 先公後私. . .그리고 和而不同이다.
또 <실학박물관>의 내용이 더욱 충실해 지길 기원했다.
실학자가 어디 <다산>만이겠는가, 유형원, 이익, 박지원. . .
모든 실사구시의 선현들 유물이 더욱 발굴되고 풍부히 기증되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고가 되고 무언가 깨달음을 주는 전당이 되어야 할 게 아닌가,
으리으리한 예배당, 불당을 짓기보다는 이런 문화유적보존과 도서관, 박물관,
학예관 짓는데 돈을 쓴다면 그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그래야 하질 않겠는가!
기독교인들이 모두 "이스라엘"로 가야하고 불교도들이 모두 인도로 가야 하는 게
아니질 않은가, 이땅에 자손대대로 살아가야 할 게 아닌가,
각자 마음의 평화를 얻는 방법이 다를 수가 있는 것일진대,
實學敎徒, 科學敎徒, 無宗敎徒가 늘어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나로호>발사 실패"뉴스"가 뜨자마자 "인터넷"에 <나무아미타불> <말짱 도로묵!>대신에
<말짱 나로호!> 란 말이 대유행하고 있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우리 사회는 이런 조소적인 造語가 하루가 멀다하고 양산되고 있는 현실이다.
개인이나 조직, 국가가 <공허한 정신의 유희>에 돈을 쓰기보다는
민생과 과학발전, 복리후생에 우선해 돈을 쓰고 투자해야 할 것이다.
溫故而知新,
創新함으로써 참다운 문화창조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더욱 확립되어 갈 게 아닌가,
송재소 교수나 안병직 관장이 진정 잘 해주길 기원해마지 않는다.
* * *
종교간 갈등의 예로 송재소 교수가 2008년10월7일에 쓴 글을 아래에 소개한다.
처용과 기독교
이명박 정부 출범이래 불교 교단은 정부에 대하여 줄곧 불만을 표시해왔다.
이 대통령이 기독교신자이기 때문에 불교에 대하여 편향적이라는 것이 불교 측 불만이었다.
사실 2004년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수도 서울을 하느님에게 봉헌한다”는 기도문으로부터 갈등은 시작되었다.
그 후, 주대준 청와대 경호처 차장이
“모든 정부 부처의 복음화가 나의 꿈”이라고 한 발언,
추부길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사탄의 무리”라고 매도한 일 등이 겹치면서 불교계의 불만은 수위가 높아갔다.
급기야 조계종 총무원장이 탄 차량의 트렁크를 수색한 사건을 계기로 불만이 폭발했다.
불교계는 대대적인 집회를 열고 대통령 사과, 어청수 경찰청장 문책,
공직자 종교편향 금지 입법 등을 요구하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드디어 대통령이 사과하고, 공무원의 직무상 종교차별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의‘공무원복무규정 제4조2항’을 신설하기에 이르렀다.
왜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번에는 이‘복무규정 4조 2항’을 기독교 측에서 역이용하고 나섰다.
41년 째 거행되고 있는 울산의‘처용문화제’를 문제 삼은 것이다.
울산시 기독교연합회와 울산시 교회협의회, 울산시 성시화(聖市化) 운동본부,
울산문화연대 등 4개 단체가“울산시가 처용문화제에 세금을 지원함으로써 무당인
처용을 믿고 따르는 특정 종교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며 지원 중단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처용문화제 지원 관련 조례를 폐지하지 않거나 다른 명칭으로 변경하지 않으면
공무원 복무규정 위반으로 울산시 관계자를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나는 기독교인도 아니고 불교인도 아니다.
그러나 누가 어떤 종교를 믿든 서로의 종교를 인정해주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크리스마스 날 불교사찰 앞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운 승려도 있었다.
또 부처님오신 날 사찰을 방문하여 축하해준 가톨릭 신부도 있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왜 유독 개신교만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가?
시골 학교 교정에 세워둔 단군상(檀君像)을 훼손한 일이 있었고,
동네 입구에 서있는 천하대장군을 도끼로 찍는 일도 있었다.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부 몰지각한 개인의 소행으로 보아 넘길 수 있지만
처용문화제의 경우는 다르다. 개인이 아니라 기독교 단체가 공식적으로 항의한 것이다.
처용문화제를‘특정종교활동’이라 할 수 있나?
처용문화제를‘특정 종교 활동’으로 보는 시각 자체에 문제가 있다.
신라 향가인 「처용가」에서 유래된 처용희(處容戱)는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궁중과 민간에서 널리 행해져온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문화이다.
처용과 처용가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많지만, 아내를 빼앗긴 사내의 원한과 슬픔을
춤과 노래로 승화시켜 역신(疫神)을 감동시킨다는 내용의 처용희를
‘특정 종교 활동’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41년간이나 지속되어온 처용문화제를‘공무원 복무규정’에 따라 고발하겠다는 것은
얼핏 불교계로부터 받아온 그동안의 시달림을 엉뚱한 대상에게 앙갚음 한다는 인상마저 준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헌강왕이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을 만난 곳이
지금의 울산시 남구 개운포이다. 그 후 그곳에 있는 바위를 처용암이라 이름하고
이를 울산의 상징으로 삼아 해마다 처용문화제를 개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처용설화의 발원지인 울산에서
처용문화제를 개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더구나 처용가와 처용설화는 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학유산이다.
그런데도 기독교 측에서 이를 트집 잡고 나선 연유를 이해할 수 없다.
** 역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哲理를 외면해서 일게다. 범초.
푸르디푸른 숲 배경과 잘 어울리는 다산 선생 상 앞에서, 나는 좀 더 실생활과 면학에 힘쓸 것을 생각했다.
다산기념관에는 비가 오는 날인데도 많은 초등학생들이 버스 대절해 와 있었다.
운길산 역은 시원스레 웅장했다.
비가 와서인지 <鳥安面>이란 지명에 걸맞게, 역 처마밑으로는 많은 제비와 까치가 들락거리고 있었다.
운길산 산행 들머리이어선지 많은 음식점들이 있었다. 비싼 장어집이나 유황오리집이 많은 게
좀 못 마땅하긴 하나, 더러는 백반이나 순대국집도 있었다.
지하철 아니 지상철에서 바라다 보이는 운길산은 정겹게 느껴졌다.
조만간 수종사 거쳐 운길산엘 오를 것을 다짐했다.
전철에서 멀리 양수리가 보인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양수리) 언저리가 다산의 고향 馬峴이다.
양수리는 예전에 斗尾 또는 斗江이라 불렀다고 한다.
미끈하고 시원하게 지은 운길산 역에서는 멀리 비안개 낀 두물머리가 바라다 보였다.
"로맨틱"한 팔당가도, 양수리 가도를 차 몰고 숱하게 달렸건만, 이제 다 지나간 박제된 추억이 아니던가!
이만하면 선진국이 다 된 것 아닌가! 더구나 나는 이런 좋은 시설이용이 공짜이니!
하루 일과를 힘껏 끝냈다는 흐뭇한 마음으로 전동차를 기다렸다.
평생 농군으로 살아온 듯한 촌로가 허리춤에서 천 원 짜리 몇 장을 천천히 세고 있었다.
서민들, 늙으면 다 이렇게 되는 거다! 라는 생각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실학박물관>을 위한 하루가 저물었고, 집으로 가는 길은 또 세 시간이나 걸렸다.
범초.
첫댓글 범초님 아주 좋은글 아주 잘 읽고 갑니다.감사합니다.6월답사도 잘 다녀오소서
감사합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범초.
범초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저도 나주 정씨 문중의 일원으로서 가슴이 뿌듯합니다. 저는 애가 기말 시험이 끝나고 다음 주에 같이 그 곳을 거쳐 수종사, 운길산에 다녀 울 예정입니다.
조상의 얼을 새기는 것은 효도 이전에 자신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겠지요!
운길산, 교통도 좋아지고 수려한 경치에 마음이 맑아지더군요! 꼭 가보세요! 범초.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글을 늘 보시눈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