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유순하고 순종적인 색인가!
파랑은 경치 속으로 섞여 사라지는 색, 주목받기를 원하지 않는, 매우 현명한 색이다.
유럽인들이 파랑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런 온건하고 중립적인 파랑의 특징 때문이 아닐까? 파랑은 오랫동안 중요하지 않은 색, 아무 의미가 없거나 별것 아닌 색, 고대에는 심지어 경멸 받는 색이었다. 그러다 점차 멋진 옷으로 갈아입고 그 누구와도 충돌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자리를 잡아갔으며, 이윽고 신성한 색, 만장일치의 색,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색이 되었다. 특히 서양에서 파랑은 관례의 준수를 상징하는 색이 되면서 청바지와 셔츠를 지배하는 색이 된다. 심지어 유럽과 유엔을 상징하는 임무를 부여하기도 했으니 파랑은 우리의 마음에 꼭 드는 색임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이 소심한 색은 여전히 놀라운 능력과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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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드 스탈, <옹플뢰르> 중 일부 그림,1952,개인 소장
바다가 늘 파란색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바다를 흰색, 검은색, 빨간색, 금색, 회색 등 다양하게 변하는 색으로 보았다. 중세 시대에 바다는 녹색이었다. 녹색이 물을 상징하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바다가 녹색에서 파란색으로 점차 바뀌게 된 것은 15~17세기의 항해용 지도 덕분이다. 당시 지도상에서 모든 종류의 물(강, 호수. 연못, 바다 등)이 파란색으로 표시되었는데, 이는 이후 녹색을 부여받을 숲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유명한 '이집션 블루'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오래된 인공 안료이다. 기원전 2세기경 제작된 이 안료는 모래와 잿물에 섞은 구리 가루를 원료로 하여 만들어졌다. 청색과 녹색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시원스럽고 밝은 색깔이다. 이집트 사람들에게 청색은 약한 기운을 몰아내고 번영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색으로 여겨졌다. 또한 청색은 장례용품에도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저승으로 가는 고인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프랑스의 왕들은 유럽 기독교권 왕국의 왕들과 달리 왕실 문장에 맹수가 아닌, 평화의 꽃, 백합을 채택했다. 백합은 '금색 백합꽃이 점점이 박힌' 형태로 문장에 사용되었다. 백합이 실제 프랑스 왕국의 상징이 된 시기는 루이 7세 재위 후반기인 듯하다. 필리프 2세의 대관식을 보여 주는 이 삽화에서처럼 이후 프랑스 왕들은 대관식에서 금색 백합꽃이 점점이 박힌 화려하고 푸른 망토를 입었다.
성모 마리아의 색인 청색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색이었다. 몇몇 프로테스탄트 화가나 필리프 드 샹파뉴 같은 얀선주의 화가들은 흰색, 검은색, 회색, 갈색과 함께 청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반면 빨간색과 노란색은 지나치게 화려하기 때문에 저속한 색으로 여겨졌다.
에드가 드가를 '파란색의 화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이전 세대나 동시대의 화가들처럼 자신의 스케치를 두드러져 보이게 하고, 흰색을 더 밝게 보이게 하려고 파란색 종이 위에 작업을 했다. 이렇게 사용된 청색은 빨강이나 노랑이 줄 수 없는 '아득한' 느낌을 가능하게 했다.
유명한 '샤르트르 블루'는 1140년경 쉬제르가 주도한 생드니 수도원의 부속 교회 재건축을 계기로, 스테인드글라스 직공들이 만들어 낸 나트륨 용제에 코발트를 섞어 칠한 아주 환한 청색 유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 이후부터 이런 청색은 아주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성당들에 나타나기에 이른다. 12세기에 샤르트르의 청색은 매우 선명했으나, 다음 세기에는 현재의 모습처럼 좀 더 어둡고 진한 색조를 띠었으며 빛도 덜 투사되었다.
시인이건 화가이건 초기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파랑'을 열정적으로 숭배했다. 그들에게 파랑은 "꿈, 이국, 무한"의 색이었다. 그중 가장 훌륭한 예는 노발리스의 도달할 수 없는 '푸른 꽃'과 낭만주의의 대표 주자 베르테르의 청색 연미복이었다. 무엇보다 청색은 모든 모양과 공상의 장소인 하늘과 바다를 나타내는 색깔로 손꼽혔다.
파란색은 오랜 전부터 안정이나 평화를 상징했다. 각 나라 국민들 간의 평화나 우호를 증진하는 역할을 맡은 국제기관(대부분 서양에서 창립된)들은 파랑을 자신들의 상징이나 깃발의 색으로 선택했다. 파란색은 공격적이지 않으며, 어떤 것도 위반하는 일이 없고, 안정감을 주며 결집하는 역할을 한다. 1945년부터 유엔군은 파란색 모자를 쓰고 교전국 사이에 개입하여 준재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유엔군의 하늘색 깃발에는 평화의 또 다른 상징인 두 개의 올리브나무 가지가 그려져 있다.
1850년 무렵에 탄생한 진(Jean)은 인디고로 염색한 다양한 파란 색상의 청바지였다. 이 바지는 오랫동안 작업복으로 사용되었으며, 튼튼하고 소박하면서 프로테스탄트적 성격이 강한 옷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다 1950 년대 이르러 처음엔 미국에서, 차츰 유럽에서 여가 활동을 할 때 입는 옷이 되었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살펴봤을 때 청바지를 젊은이들의 반항을 나타내는 상징이나 자유나 반사회적인 이념을 상징하는 옷으로 귀착하는 것은 그 이미지를 남용하는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이상 본문의 몇몇 사진과 설명을 통해 파랑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래서 여러 색깔의 이름을 영어로 발음해 보니 확실히 '블루'라는 단어의 느낌은 '블랙'이나 '레드'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느낌인 것 같다. 잔잔한 바다처럼, 내가 좋아하는 색은 . 진한 클래식 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