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은 부처가 틀림없다
서안나(徐安那)
컵은 비폭력적이다
컵은 컵 아닌 것들로 이루어졌으니
컵은 컵을 매일 반성하니
컵은 부처와 간디와 체게바라가 틀림없다
모터싸이클을 타고 밀림을 버렸으니
컵은 당신의 적이 아니다
목마른 자를 위해
한 잔의 진지한 부처를 품고 있지 않은가
컵은 커다란 입이 되어
투명한 뼈와 마르지 않는 피륙과
쉽게 깨어지는 취미를 지녔다
컵이 둥근 입술로 나를 돕는 아침
컵은 동서남북 막힘이 없고
뜨거운 커피 한 모금 속의
바람과 불은 컵에서 내 몸으로 건너온 것
내 혀 속의 소용돌이가 컵으로 옮겨간 것
컵과 나의 인연법이 그러하니
그래서 나는 존귀하고 아름다우며
악어처럼 쉽게 짓무르지 않으니
가장 높은 곳이
가장 낮은 곳이니
컵을 떨어뜨리면
부처는 부서집니까
계간 『서정시학』 2023년 봄호 발표
출처: 시작은모임(young570519) 원문보기 글쓴이: 선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