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대 경순왕까지 글을 썼습니다. 겨우 마쳤네요 , 긴 글인데... 이해하세요.
(실크로드)
중국과 인도를 잇는 초원과 사막에 깔린 하얀 비단길. 그 비단길을 알록달록 비단 터번을 쓴 멋진 대상들이 낙타를 타고 오갔다. 낮이면 햇빛을 받아 비단길이 더욱 하얗게 빛나고, 밤이면 바람 결 따라 강물처럼 하얗게 흘러갔다.실크로드다. 우리는 서역의 길이라 했다. 물론 실크로드는 그저 아름답기만한 꿈의 길이 아니다.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 혜초 스님과 고구려 고선지 장군의 활약이 바람소리로 남아 있기도한 실로 험한 고행의 길이다. 그 길에는 석굴을 만들고 부처님을 모신 곳도 있고 원형의 모자를 쓴 형상체의 이슬람 알라신도 있으며 가슴에 십자가를 단 기독교인도 있다. 종교가 다르고 말도 다르고 관습도 달랐지만 그래도 그들은 다 통했다. 이는 이를 말하기 전 인류가 갖는 원초적 본능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듯 문명 또한 밝은 곳에서 어둠을 타고 흐른다. 한마디로 인류의 역사는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한 부단한 이동의 역사다. 지구의 환경도 주기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인류 또한 상상할 수 없는 희망에 찬 많은 족적을 남겼다. 빙하기때도 부단한 전진을 했는데 하물며 인류가 황금과 실크의 길을 마다 할까. 흉노가 살던 땅도 거치고 한무제가 흉노와의 예속과 굴욕을 끊고자 위청과 청년장군 곽거병을 시켜 하서회랑에 한4군을 만든 땅도 지난다. 그러니까 감주(주천),숙주(장액),양주(무위),돈황)이다. 5호 16국시대에는 중국을 집어 삼킨,저,강,흉노가 설치던 땅이고 소위 5량(전량,후량,서량,남량,북량)의 수도가 있던 땅이다. 당나라때는 서글픈 고구려유민 20만이 끌려간 땅이 아니던가.
송나라때는 이원호황제의 대하가 송과 한 판 세게 붙던 땅이다. 연지산, 헌혈마, 흉노,토번,위글족,징기스칸,곽거병,위청,고선지, 5량(5개의 량나라),서하(대하),--불세출 영웅들이 혹한을 뚫고 다녀갔다. 우리는 하서회랑으로 이름하지만 중국에서는 하서주랑이라 하는 곳.주랑에서 뜻하는 바와 같이 길죽한 1000킬로에 걸치는 길.기련산맥(해발 3000-4000미터)과 고비 사막사이의 폭이 좁게는 수킬로에서 천킬로에 이르는 이름 그대로의 주랑이다. 길게 쭉 뻗어있는 곳곳에 장액,돈황,주천,무위의 4대 도시가 있고 산단,금창,영창,가욕관이 그곳에 있다. 물 한모금 마시던 곳곳의 오아시스에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말하기를 농사가 주 산업일정도로 풍요로운 곳이다. 서역으로 가는 길, 천산과 알타이 너머 중앙아시아와 남러시아 초원 그러다보면 터키고원이 나오지 않는가.
혜초스님은 중국 밀교의 종장 중의 한 분으로 돈황 장경굴에 남겨진 구법여행기, '왕오천축국전'으로 널리 알려진 구법승이다. 남 천축(남인도)의 밀교 스님인 금강지의 제자로 스승의 권유로 구법여행을 떠난 스님. 고행을 자처한 이유가 뭘까. 4년동안 인도와 서역의 여러지방을 순례하며 남긴 기록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돈황의 장경굴에서 프랑스의 고고학자 펠리오에 의해 발견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신라의 스님. 혜초 스님의 여로는 중국 광주에서 출발하여 해로로 동인도에 도착하여 인도의 불교성지를 순례하고 페르시아까지 갔다가 중앙아시아를 지나 파미르고원을 거쳐 장안으로 돌아오는 그야말로 긴 여정이다. 남인도는 적도와 가까운 지역으로 매우 더운 지역이다. 남인도의 작열하는 태양아래, 모래바람 부는 사막과 차가운 밤 사막의 달을 보고 느꼈을 이국의 정취를 '왕오천축국전'에 맑은 이슬처럼 남겨놓았다.
달 밝은 밤,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흘러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조차 들리지 않는 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에는 기러기 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그가 선구의 길로 택한 길 서역, 그 길을 따라 소통하고 교류하며 새로운 문명을 꽃피워 왔다. 신라가 번성했을 때 서방의 문물은 실크로드를 따라 경주로 이어졌고, 구도승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이 길을 따라 서역으로 갔으며 또한 들어왔다. 경주는 그 결과 알 수없는 많은 유물과 수수께끼 같은 문물을 그대로 남겨놓았다. 실크로드는 물 흐르듯 흐르는 자연스런 교류의 길이다. 그 길이 요즘 다시 살아서 말한다. 한국 고대사에 있어서 제3 세계는 바로 서역이다. 서역은 지리적으로 중국의 서쪽에 있는 나라로 동방세계의 민족과 문화가 다른 제3 세계를 의미한다. 『사기』에 천하에 많은 것이 3개가 있는데 ‘중국에는 사람이 많고 대진(로마)에는 보물이 많으며, 월지(아프가니스탄 북부,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 남부)에는 말이 많다고 하였다.
서역이란 명칭은 『한서』의 서역전에서 처음 나타난다. 즉, 한 무제 때 흉노에 대항해서 대월지에 장건이 파견됨으로서 이룩된 서역경영 이후 알려지게 된 문화권으로 50여 개의 군소 국가의 총칭이다. 대체로 시대에 따라 그 위치나 성격이 달라졌으나, 대체로 현재 중앙아시아일대로서 동쪽으로 중국(신강성), 북쪽으로 일리강(현재 카자흐스탄 동쪽의 발하슈호의 강), 서쪽으로 시루다리아강과 아무다리아강(바랄해의 강) 하류지역, 그리고 남쪽으로 카슈미르지역 북부일대를 지칭한다. 말하자면 파미르고원을 중심으로 오늘날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자흐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파키스탄의 접경지역과 중국서쪽(신강성)일대를 포함한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그 범위가 넓어져서 위의 지역은 협의의 서역이었고, 당대의 광의의 서역은 천축(인도), 파사(페르시아?이란),안식(이란북부),대신(아라비아),사자국(실론),불름(대진,동로마)까지를 포함하는 장대한 지역이다. 서역제국은 넓은 영토만큼 흉노,토번,알렉산더 대왕, 그리고 사라센 세력 등 여러 민족의 지배를 받았으며, 나라의 크기가 일정치 않으나, 소위 비단길의 요충지였으므로 동서문화를 흡수 교류하면서 독특한 새 문화를 창출하였다. 마치 비빔밥을 만들 듯 고루 섞이며 문화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나타내고 있다.
서역제국은 대체로 사회,경제적 구조에 따라서 크게 거국(농업국)과 행국(유목국)으로 구별한다.대체로 서역이라 할 때는 협의의 서역을 흔히 일컫는 것으로 중국의 신강성 서부(타림분지)를 지칭하는 동투르키스탄과 키르키스탄을 비롯하여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의 남부, 트르크메니스탄의 동부,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북부의 서투르키스탄을 포함하는 지역(중앙아시아)을 의미한다. 엄격히 말하자면 중국의 서부지역으로서 중국의 전통적인 대외관계인 조공으로 관계를 유지한 지역이다.
당대에 이르러서는 서역의 범위가 크게 확대되어 당항(청해성서부),고창(외몽고서부),토욕혼(청해,사천성일대),구자(신강성),우전(신강성 소륵동부),소륵(신강성 소륵:카슈가르),천축(인도),계빈(파키스탄 북부),대월지(아프자니스탄 북부),파사(페르시아,이란),불림(동로마),대식(아라비아) 등까지 포함되었다. 명대에는 더욱 범위가 확대되어 토번과 사자국까지 포함한다. 현재의 키르기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그리고 카자흐스탄의 접경지로서 이러한 복잡하고 기복 무상한 서역이지만, 이 지역은 지금까지 터키계의 돌궐족을 중심으로 인종상의 혈통을 유지하며 하나의 문화적 공통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높은 산과 호수, 그리고 분지로 이룩된 극심한 기후의 편차를 보이는 이타적인 곳, 강들이 호수나 늪지에 스며 저수현상을 보여 물이 귀하다 싶은 곳.
더구나 이곳은 통일된 국가의 성립이 어려워 7세기에 사라센제국이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다시 몽고의 세력화로 편입되어 차가타이 한국(1227~1369),일한국(1258~1411),킵차크한국(1243~1522)의 접경지로서 주로 일한국과 차가타이 한국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그 후 티무르 제국(1359~1500)의 통일 후 정치적 분열로 이어져 중국,러시아,인도,페르시아 등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렇게 주인들이 여러번 바뀌었지만 먹고 사는 것은 변함이 없으며 마치 문명의 바톤을 있는 양 동서교통의 요지로 동서문화 교류를 통해 인류문화 발달에 기여한 바는 무척 크다. 무엇보다도 서역은 B.C. 6세기의 페르시아 제국와 B.C. 3세기의 파르티아왕조, 그리고 알렉산더제국을 거치면서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그리스 문화와 불교문화를 융합시킨 그야말로 요샛말 복합융합적인 역사적 고장이다.
또한 3~7세기간의 사산 페르시아와 당대의 서돌궐, 그리고 몽고와 티무르의 지배 등 서양(그리스),인도(불교),이슬람,티무르 등 여러 문화권이 교체되면서 동양이나 서양문화와 다른 제3의 문명권을 형성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받아들이고 전하는 게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고 살지 않았을까. 특히 동서교통의 교량지로서 비단길의 주요거점이 된 지역을 포함하고 있어 기독교문화와 불교문화, 그리고 회교문화를 융합시킨 서역문화의 다양성과 복합성에 요즘 모두들 관심을 갖는다. 현재 알마아타, 사마르칸트, 타슈켄트 등지에서 보여지는 문화의 특이성과 우루무치 돈황 등지를 중심으로 한 돈황학의 학문적 위상에 그 개념상의 정체성, 어려움이 엿보인다.
그러나 서역은 천국,상국,대국으로서의 중국이나 왜적,왜구로서의 일본과는 다른 ‘매혹의 이국’으로서 호기심의 세계다. 순도나 마라난타,묵호자와 같은 서역(또는 인도) 승려를 통한 서역의 존재는 원광,지명 등 구법승을 통한 왕래이후 과거 더욱 뚜렷해졌었다. 더구나 의정의 『대당구법서역고승전』에 나타난 7명의 신라 승려의 활동이나 혜초의 여행기(『왕오천축국전』)을 통해 볼 때 8세기초에는 서역에 대한 이해가 구체적으로 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혜초가 우리 나라에 서역의 여러 가지 사실을 직접 전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구법승을 통해서 서역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졌을 것이다.그 외에도 장수왕과 문자왕이 북위와 집중적인 관계를 가진 것도 서역을 이해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북위(후위)가 돈황일대를 지배하였으므로 서역에 대한 이해는 더욱 가능해졌을 것이며, 다양하고 진귀한 산물을 지닌 서역에 대한 관심은 왕권의 강화과정에서 그들의 권위유지를 위한 장식물로 이용되었을 것임은 확실하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가 북조문화 즉 비한족문화와의 접촉에 따른 다양한 변화, 즉 톱날형의 천의 자락?복희와 여와의 갸름한 얼굴과 치켜 올라간 눈썹 등의 모습에서 짙은 서역적 요소를 찾게 된다. 또한 가야국의 허황후와 인도(야유타국)와의 연결이나 쌍어문과 서역지역과의 관계를 비롯하여 7-8세기 신라불상조각에 보여진 굽타적 요인,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유리제품과 서역관계, 그리고 메부리코와 곱슬머리의 수염을 단 괘릉의 무인상 등 서역적 요소는 널리 인정되고 있다.
특히 신라고분에서 다수 출토하는 유리제품이 서방으로부터 유입된 것임이 확인됨으로써 일찍부터 내륙 외에 해상루트까지 관련시키면 참으로 흥미로운 여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몇몇 조각으로 한국과 서역간의 교류관게를 성급히 논하는 것에 대해서는 성급하다 생각되며 더욱이 어느 양식이나 사조가 또 통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은 대단한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교류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폭넓고 진지하게 다뤄보아야 한다는 말이 맞을 성 싶다. 자료발굴이나 새로운 연구의 심화를 나는 기대한다. 얼마전 페르시아 왕자가 신라연인과 결혼 했다는 신문기사라던지 흥미거리가 사실 속출하고도 있다.
얼마전인가는 경기도 화성에서 화성시 소근산성에서 평택시 자미산성(용성)까지의 당항성(黨項城)은 백제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로 삼국쟁패의 각축장인 동시에 대중국 교역로이며 당나라 사신들과 장사꾼 유학생 고승(高僧)들이 오가던 국제무역항이며 전세계로 향하는 해양 코리아실크로드로 당황성을 당당히 취급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나는 정말 그러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서 요즘 많은 통일신라 유물들이 나오고도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 신라와 중국이 교류하는 관문으로, 당시에는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곳이다. 신라 후기 청해진(淸海鎭)과 함께 신라 해군의 중요한 근거지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발견된 원형(다각형)의 건물지 흔적은 당항성이 군사적·행정적 중심지 역할은 물론 당시 의례적인 기능을 했음을 추측하게 한다. 당항성이 신성하면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은 이곳에 성지와 건물지 흔적들만 남겨놓았다.
그 옛날 중국으로 가거나 중국에서 오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머문 곳 당항성, 그들 가운데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도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원효대사는 당항성 묘지 속에 들어가 잠을 자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라는 큰 이치를 깨달았다. 각성 후 원효는 중국행을 취소했고 의상만 당항성 앞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갔다.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묘지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백제식 고분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실제 당항성 인근 백곡리에서 백제 고분들이 많이 발견됐다.상상이 아니라 실제로도 연결이 가능하다. 이렇게 원효대사가 대오각성 했다는 장소라고 ‘삼국유사’에도 기록된 당항성은 우리나라 불교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따라서 화성시의 관광명소로 거듭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울러 실크로드를 택하여 당나라에 들른 서역인들이 산뚱반도에서 제일 첩경인 이곳을 생각하였을 것 같다. 이러하듯 많은 사료나 자료 유물들이 쏟아지는 역사의 장소에 대해 이제는 늘 관심어린 추적의 눈빛으로 다가서야 하지 않을까. 상상의 나래로만 펼쳐보던 세계가 의외로 현실로 입증이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문화란 알게 모르게 서로가 영향을 받고 주고 받는 것이다. 동양건축 스타일로 로마 건축물을 보면 언뜻 이해가 안가지만 이슬람 영향을 받은 스페인이나 서역 길 중간의 건축물을 보고 로마를 들여다 보면 어느 면 연결되고 가까이 느껴지는 게 다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종교가 다르고 생활이 틀리고 관습이 다르기 때문 교류는 더욱 활발하고 융성해지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검은 기름이 물 솟듯 솟은 덕에 실크로드 길을 빈번히 오가고 있다. 그때의 터어반 대신 썬글라스를 끼고 하늘을 날고 차를 타고 열심히 무역을 하고 교류를 한다. 아마 인류가 종말을 고할 때까지 할 일이 그 일이 아닐까 싶다. 실크로드 누가 오간 것일까. 고대역사에 대한 여러분의 상상은 자유다. 거기서부터 추적은 시작되는 것이다. 계획 이전 상상이고 꿈이다. 차도 없던 시절 정말로 인류의 족적은 넓고도 광할하였다. 마치 개미가 부지런히 뭔가를 나르듯 본능과도 같이 인류는 하얀 비단 길을 여전히 분주히 오간다. 비단같이 부드럽고 촉촉한 느낌을 서로 느끼며. 나 역시도 그 하얀 길을 따라 늘 꿈같은 여행을 하고 싶다. 우리의 실크로드다. 경주에서 이스탐블까지. 아니 지구상 끝까지.
***
누군가 던진 이 글...나는 역시 흥미롭다.
우리가 알고있는 멕시코는 영어 발음표현이며 실제발음은 멕이코이며 멕시코 본토인은 멕의 나라라는 뜻이라 한다. 맥의 나라가 누구인가? 바로 동이족인 貊族을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다.멕시코 유카탄반도에 대제국을 이루었던 아스텍문명은 아스+떼까(땅)로서 바로 아사달을 의미한다고 하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라고 할것이다. 아시아대륙에서 미주대륙으로 민족의 이동을 우리는 약 12000여년전 빙하기가 끝날무렵 부터 늦게는 8000여년전 사이에 얼어붙은 베링해협을 건너갔다는게 서방 학자들의 연구 정설이며 그 건너간 민족이 다만 누구였는지 모르고 시베리아에 살던 북방민족이라고 모호하게 알려졌을 뿐이었다. 실제로 북미대륙을 통해 중미로 남미로 민족이동을 했던 민족은 바로 아사달인으로 고조선즉 고동북인이었다는것이 여러 지표유물과 문화유적 그리고 언어학적으로 언어학자의 노력으로 밝혀지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아사달인이 처음 넘어간 민족이며 이동루트는 캄차카반도에서 알류산열도의 섬들을 항해술로 건너 알라스카를 지나 북미로 들어가 남행하고 한지류는 북으로 올라가 이누이트가 되었다는 학설이다. 실제로 이누이트(에스키모)가 북극에 정주하기 시작한 최초의 연대를 4500여년전으로 보고있으니 연대기적으로 어떠한 고리가 있는듯하다. 특히 남미로 이주한 고동북인들은 역사적 변혁기에 어김없이 이동을 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 술 더 떠 그 동안 의문시 되어왔던 함양의 피라미드군과 동북아시아의 홍산을 비롯한 부여,고구려의 피라미드 그리고 남미 아스텍과 잉카의 피라미드에 대한 진실이 이제야 밝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여러분들의 상상력은 어떠신지. 이게 사실이라면 실크로드뿐 아니라 에스키모 루트를 찾아서가 또 나올 테다.
* 대중국교역로 백제, 신라의 당항성(黨項城-닭목성) 부근도 //
첫댓글 작품 잘 읽었습니다. 충실한 자료를 곁들여서 더욱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