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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심우도(尋牛圖)
처인성인(해월) 추천 0 조회 5 11.04.04 21: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심우도(尋牛圖)

 

우리가 사찰(寺刹)에 가서보면 일주문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깊은 곳에 대웅전(大雄殿)이라는 건물이 있고 그 대웅전에는 각기 그 사찰에서 모시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대웅전에는 그 절이 추구하는 방향에 따라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아미타 부처님 또는 비로자나 부처님 등 을 주불(主佛)로 모시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대웅전에 들어가기 전에 대웅전 밖의 우측 벽에서부터 뒤쪽으로 해서 좌측 벽까지 그림(佛畵)들이 그려져 있는데 보면 볼수록 어떤 심오(深奧)한 내용인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듯한 그림을 보게 된다.

 

나는 옛날에 처음 큰 절을 가보았을 때 그 그림을 보고부터는 그다음 절에 가게 되면 항상 그 그림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 그림에는 주로 소가 그려져 있는데 그 내용을 알듯 도하고 그렇다고 딱히 무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그림이 있었다.

 

그러나 그 그림에 대해서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으며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몇 십 년이 흘러 왔고 내가 불교를 공부 하고나서야 그 내용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그 尋牛圖(심우도)에 대하여 내가 느낀 바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먼저 尋牛圖(심우도)란 소를 찾는 내용의 그림이란 뜻이며 또 열 개의 그림으로 되어있다고 해서 십우도(十牛圖)라고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소란 우리의 본성(本性)을 비유해서 표현한 방편(方便)에 지나지 않으며 선수행(禪修行)의 단계를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로부터 소는 인도나 중국에서 농경생활의 필수적인 동물이므로 사람과 매우 친숙한 동물이다. 세존께서 성불하기 이전에 고타마태자였는데 이 고타마가 곧 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자급자족을 내세우는 선종(禪宗)에서 노동과 관련 있는 소를 등장시켜 선()수행의 단계를 비유하여 마음을 조복 받는 10가지단계를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심우도(尋牛圖)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송나라 시대(宋代)의 확암 사원(廓菴 師遠)스님의 작품이 가장 유명하며 석고 희이(石鼓 希夷)라는 스님이 화답하는 게송을 지었으며 다시 괴납 대련(壞衲 大璉)스님이 화답게송을 넣고 있다.

 

廓菴(확암)의 심우도는 잃어버린 소를 찾아 나서서 소를 보고 잡아끌어서 마침내 소와 내가 하나가 되어 결국 공적(空寂)이 되고 다시 당초의 일상생활로 되돌아가는 내용을 차례로 그리고 있다.

마음의 작용을 잘 다룬 廓菴(확암)의 심우도가 가장 널리 유행하여 오늘날 우리나라 각 사찰벽화(寺刹壁畵)에는 어김없이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심우도(尋牛圖)는 본래 도교(道敎)의 팔우도(八牛圖)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12세기 중엽 중국 송나라 때 확암 선사(廓菴禪師)2장면을 추가하여 십우도를 그려서 심우도(尋牛圖)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도교(道敎)의 팔우도(八牛圖)는 무()에서 그림이 끝나므로 진정한 진리를 표현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2개의 그림을 추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심우도에도 2가지가 있는데 조사선(祖師禪)계통의 심우도에는 동자승(童子僧)이 등장하는 반면에 묵조선(墨祖禪)계통의 심우도에는 어린 목동(牧童)이 등장하며 그림의 이름도 목우도(牧牛圖)라고 하였으며 그림의 제목도 미목(未牧). 초조(初調). 수제(受制). 회수(廻首). 순복(馴伏). 무애(無碍). 임운(任運). 상망(相忘). 독조(獨照). 쌍민(雙泯)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오늘은 조사선 계통의 심우도(尋牛圖)를 가지고 설명하려고 한다.

 

지금 당장 여기에는 그 그림이 없기 때문에 설명내용을 잘 기억했다가 이다음 절을 찾을 기회가 있을 때 기억을 떠올려서 그림을 살펴보면 저절로 그림의 내용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올 것이다.

 

1. 첫째그림은 동자승이 손에 밧줄(고삐 줄)을 들고 있는 장면이 나오면서 尋牛(심우)라고 그림의 이름이 쓰여 있다. 즉 잃어버린 소를 찾는다는 뜻으로서 이는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자리를 찾아 헤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서 불도수행의 입문을 일컫는 것이다.

이 그림의 원문과 偈頌및 화답송은 다음과 같다.

 

원문:

종내불실 하용추심(從來不失 何用追心)

애초에 잃지 않았는데 어찌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

유배각이성소 재향진이수실(有背覺以成疎 在向塵而遂失)

깨침을 등진 결과 멀어져서 세간을 향하다가 길을 잃었다.

가산점원 기로아차(家山漸遠 岐路俄差)

고향집에서 점차 멀어져 갈림길에서 어긋난다.

득실치연 시비봉기(得失熾然 是非蜂起)

얻고 잃음의 불이 타오르니 옳고 그름의 분별력도 어지럽게 일어나네.

 

게송

망망발초 거추심(茫茫撥草 去追尋)

아득히 펼쳐진 수풀을 헤치고 소 찾아 나서니

수활산요 로갱심(水闊山遙 路更深)

물은 넓고 산은 먼데 길은 더욱 깊구나.

역진신피 무처멱(力盡神疲 無處覓)

힘 빠지고 피로해 소 찾을 길은 없는데

단문풍수 만선음(但聞楓樹 晩蟬吟)

오로지 저녁 나뭇가지에 매미울음만이 들리네.

 

화답송(석고 희이화상)

지관구구 향외심(只管區區 向外尋)

오로지 급하게 밖을 향해 찾으나

부지각저 이니심(不知脚底 已泥深)

발밑 진흙 수렁이 이미 깊은 줄도 모르네.

기회방초 사아양리(幾回芳草 斜陽裏)

몇 번인가 방초 우거진 석양 속에서

일곡신풍 공자음(一曲新豊 空自吟)

풍년가를 부질없이 불러봤네.

 

화답송(괴납 대련화상)

본무종적 시수심(本無踪跡 是誰尋)

본래 자취도 없는데 누가 찾는 고

오입연라 심처심(誤入烟蘿 深處深)

우거진 댕댕이 넝쿨 깊은 곳에 잘못 들어 왔구나.

수파비두 동귀객(手把鼻頭 同歸客)

손으로 코 잡고 함께 돌아가는 나그네가

수변임하 자침음(水邊林下 自沈吟)

물가 나무 아래에서 스스로 침음한다.

 

2. 둘째그림은 동자승이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따라가는 장면을 묘사했으며 이름 하기를 견적(見跡)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수행자는 꾸준히 노력하다보면 마음자리의 발자취를 느끼기 시작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그림인 것이다.

 

원문

의경해의(依經解義)

경전에 의거해 뜻을 헤아리고

열교지종(閱敎知踪)

가르침을 배워서 그 자취를 알고

명중기위일금(明衆器 爲一金)

그릇들이 다 한가지로 금으로 된 것임을 밝혀내고

체만물위자기(體萬物 爲自己)

우주만물이 곧 자기라는 사실을 체득한다.

정사불변(正邪不辨)

바름과 삿됨을 가려내지 못한다면

진위혜분(眞僞奚分)

어찌 참됨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으리오.

미입사문(未入斯門)

아직 입문하진 않았으나

권위견적(權爲見跡)

임시방편으로 자취를 본다고 한다.

 

게송

수변림하 적편다(水邊林下 跡偏多)

물가 나무아래 발자국 어지럽게 많으니

방초리피견야마(芳草離披 見也?)

방초를 헤치고 그대는 보는 가 못 보는가?

종시심산 갱심처(縱是深山 更深處)

가령 깊은 산 깊은 곳에 있다 해도

요천비공 즘장타(遼天鼻孔 ?藏他)

하늘 향한 들창코를 어찌 숨기랴!

 

화답송(석고 희이화상)

고목암전 차로다(枯木巖前 差路多)

고목나무 바위 앞에 엇갈린 길도 많다.

초과리곤 각비마(草?裏? 覺非?)

풀 더미에 발리 걸리니 잘못인 줄 알았느냐?

각근약야 수타거(脚?若也 隨他去)

발자취를 따라서 줄곧 따라만 간다면

미면당두 차과타(未免當頭 蹉過他)

정작 마주칠 땐 그냐 지나치리라.

 

화답송 (괴납 대련화상)

견우인소 멱우다(見牛人少 覓牛多)

소를 보는 사람은 적고 소를 찾는 이는 많다.

산북산남 견야마(山北山南 見也?)

산의 북쪽과 산의 남쪽을 보는 가 마는가?

명암일조 거래로(明暗一條 去來路)

밝고 어두운 한 줄기로 오가는 길.

개중인취 별무타(箇中認取 別無他)

그 속에서 느껴야지 따로 있지 않다네.

 

3. 셋째그림은 동자승이 소의 모습이나 소의 꼬리를 발견하게 되는 내용의 장면을 묘사했으며 이름 하기를 견우(見牛)라고 되어 있다.

유심히 보면 이때 소의 색깔은 검은색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되는 내용이다. 이는 수행자가 사물의 근원을 보기 시작하여 마음자리를 찾는 것이 가까웠음을 뜻하는 것이다.

 

원문

종성득입(從聲得入) 견처봉원(見處逢源)

소리를 쫓아 들어가니 보는 곳마다 근원과 마주친다.

육근문(六根門) 착착무차(着着無差)

여섯 기관의 문마다 한 치의 어긋남이 없네.

용용중(動用中) 두두현로(頭頭顯露)

움직이는 작용 속에 낱낱이 바탕을 드러냈다.

수중염미(水中鹽味) 색리교청(色裏膠靑)

물속의 소금 맛이요 물감 속의 아교의 청색인데

잡상미모(?上眉毛) 비시타물(非是他物)

눈썹을 치켜뜨고 바라봐도 별다른 물건이 아니로다.

 

게송

황앵지상 일성성(黃?枝上 一聲聲)

노란 꾀꼬리가 나뭇가지위에서 지저귀고

일난풍화 안유청(日暖風和 岸柳靑)

햇볕은 따사하고 바람은 서늘한데 언덕의 버들은 푸르기만 하다

지차갱무 회피처(只此更無 回避處)

더 이상 빠져 나아갈 곳이 다시없나니

삼삼두각 화난성(森森頭角 畵難成)

위풍당당한 쇠뿔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화답송(석고 희의화상)

식득형용 인득성(識得形容 認得聲)

소의 모습을 알아보고 그 소리도 알아듣나니

대숭종차 묘단청(戴崇從此 妙丹靑)

화가 대숭이 이로부터 멋진 그림을 그렸다네.

철두철미 혼상사(徹頭徹尾 渾相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비슷하지만

자세간래 미십성(仔細看來 未十成)

자세히 살피니 온전치는 못하구나!

 

화답송(괴납 대련화상)

맥면상봉 견이정(驀面相逢 見而呈)

갑자기 마주치면서 얼굴을 드러내니

차우비백 역비청(此牛非白 亦非靑)

이 소가 희지도 않고 푸르지도 않구나!

점두자허 미미소(點頭自許 微微笑)

스스로 머리 끄덕여 긍정하면서 빙그레 웃으니

일단풍광 화불성(一段風光 畵不成)

한줄기 풍광은 그려도 그림이 되지 않는구나!

 

4. 넷째그림은 동자승이 드디어 소의 꼬리를 잡아 막 고삐를 건 모습의 장면을 묘사했으며 이름 하기를 득우(得牛)라고 되어 있다. 유심히 보면 동자승이 고삐를 걸어서 소의 코뚜레를 잡고 있는데 소는 화가 나서 마구 대항하는 형상이며 물론 색깔은 검은색의 소로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는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자리는 보았지만 즉 아직은 삼독심(三毒心) 때문에 그 마음을 임의로 할 수 없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원문

구매교외(久埋郊外): 오랫동안 야외에 숨어 있었는데

금일봉거(今日逢渠): 오늘에야 비로소 그댈 만났네.

유경승이난추(由境勝以難追): 뛰어난 경치 때문에 쫓아가기 어려운데

연방총이불기(戀芳叢而不己): 싱그러운 수풀 속을 끊임없이 그리워하네.

완심상용(頑心尙勇): 고집 센 마음은 여전히 날뛰니

야성유존(野性猶存): 야성이 아직도 남아 있구나!

욕득순화(欲得純和): 온순하게 하고 싶으면

필가편달(必加鞭?): 반드시 채찍질을 가해야 한다.

 

게송

갈진정신 획득거(竭盡精神 獲得渠)

온 정신을 다하여 이놈을 잡았으나

심강력장 졸난제(心强力壯 卒難除)

힘세고 마음 강해 다스리기 어려워라

유시재도 고원상(有時在到 高原上)

어느 땐 고원위에 올랐다가도

우입연운 심처거(又入煙雲 深處居)

어느 땐 구름 깊은 곳에 들어가 머무누나.

 

화답송(석고 희이화상)

뢰파승두 막방거(牢把繩頭 莫放渠)

고삐를 꽉 잡고 그 놈을 놓지 말라.

기다모병 미증제(幾多毛病 未曾除)

숱한 나쁜 버릇은 아직 없어지지 않았으니

서서맥비 견장거(徐徐驀鼻 牽將去)

천천히 코뚜레를 꿰어 끌고 가더라도

차요회두 식구거(且要廻頭 識舊居)

또 머리를 돌려 예 있던 곳을 알고자 하네.

 

화답송(괴납 대련화상)

방초연천 착득거(芳草連天 捉得渠)

방초의 하늘 닿은 데서 이놈을 붙잡았지만

비두승삭 미전제(鼻頭繩索 未全除)

코 꿴 고삐가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구나!

분명조견 귀가로(分明照見 歸家路)

고향 길을 분명히 비추어보니

녹수청산 잠기거(綠水靑山 暫寄居)

푸른 물 푸른 산에 잠시 머물렀을 따름이네.

 

5. 다섯째그림은 동자승(童子僧)이 소의 고삐를 쥐고 앞서가고 소는 뒤에서 순순히 따라오는 장면을 묘사했으며 이름 하기를 목우(牧牛)라고 되어 있다. 유심히 보면 소의 색깔이 반은 흰색으로 변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수행자가 수행으로 길들여져서 삼독의 때가 거의 지워진 단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소는 자연스럽게 동자승(童子僧)을 따라가는데 이는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원문

전사재기(前思): 앞생각이 조금이라도 일어나면

후념상수(後念相隨): 뒷생각도 뒤따르나니

유각고이성진(有覺故以成眞):깨달음을 인해 진실을 이루기도하며

재미고이위망(在迷故而爲妄):미혹으로 인해 거짓이 되기도 한다.

불유경유(不由境有): 대상 사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유자심생(唯自心生): 오직 스스로 마음이 일어났을 뿐이요

비삭노견(鼻索?): 코를 꿴 고삐를 당길 뿐이니

불용의의(不容擬議): 사량 분별은 용납지 않는다.

 

게송

편삭시시 불리신(鞭索時時 不理身)

채찍과 고삐를 늘 몸에서 떼지 말라

공이종보 입애진(恐伊縱步 入埃塵)

두렵도다. 멋대로 걸어서 티끌 세계에 들어 갈까봐

상장목득 순화야(相將牧得 純和也)

잘 길들여서 온순하게 되면

기쇄무구 자축인(羈鎖無拘 自逐人)

고삐를 잡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을 따를 것이다.

 

화답송(석고 희이화상)

감분산림 기차신(甘分山林 寄此身)

산림이 제 분수라 여겨 즐거이 몸을 맡기고

유시역도 마제진(有時亦蹈 馬蹄塵)

어떤 때는 티끌 날리는 거리로 들어간다.

부증범착 인묘가(不曾犯着 人苗稼)

일찍이 남의 논밭에 침범한 적은 없나니

래왕공로 배상인(來往空勞 背上人)

가고 옴에 소 탄 사람은 쓸데없이 수고롭네.

 

화답송(괴납 대련화상)

목래순숙 자통신(牧來純熟 自通身)

완숙하게 길들여져 절로 몸에 밴다면

수재진중 불염진(雖在塵中 不染塵)

티끌 속에 있더라도 물들지 않으리라.

롱래각득차타력(弄來却得 蹉馱力)

타고 놀다 오히려 좌절을 겪은 덕택에

림하상봉 소살인(林下相逢 笑殺人)

숲 아래서 마주치자 자지러지게 웃어대네.

 

6. 여섯째그림은 동자승(童子僧)이 소위에 올라타고 피리를 불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의 장면을 묘사했으며 이름 하기를 기우귀가(騎牛歸家)라고 되어 있다. 자세히 관찰하면 이제 소는 완전히 흰 소(白牛)가 되어있으며 그 어디에도 대항하는 자세가 없이 순종하며 동자승(童子僧)은 더없이 즐거워 보인다.

이는 이제 수행자가 삼독심(三毒心)을 완전히 버렸으며 더 이상 아무런 장애(障碍)가 없는 자유로운 무애(無碍)의 단계로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움이 가득한 단계인 것이다.

 

원문

득실환공(得失還空): 얻음도 잃음도 모두 비었구나!

창추자기촌가(唱椎子之村歌): 나무꾼의 산골노래를 흥얼거리며

취아동지야곡(吹兒童之野曲): 산골아이들이 풀피리를 불어보노라

신횡우상(身橫牛上): 태평한 모습으로 소등에 누워

목시운소(目視雲所): 눈은 아득한 허공을 바라본다.

호환불회(呼喚不回): 불러 도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로롱부주(撈籠不住): 끌어당겨도 더 이상 머물지 않는다.

 

게송

기우이리 욕환가(騎牛離離 欲還家)

소를 타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가노라니

강적성성 송만하(羌笛聲聲 送晩霞)

오랑캐 피리소리가 저녁놀에 실려 간다.

일박일가 무한의(日拍一歌 無限意)

한 박자 한 곡조가 한량없는 뜻이려니

비음하필 고순아(知音何必 鼓脣牙)

곡조 아는 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화답송(석고 회이화상)

지점전파 즉시가(指點前坡 卽是家)

앞 언덕을 가리키니 바로 집이라

선취동각 출연하(旋吹桐角 出煙霞)

이윽고 오동피리를 불며 석양 속에 나타난다.

홀연변작 환향곡(忽然變作 還鄕曲)

홀연히 음악은 환향 곡으로 바뀌나니

미필지음 긍백아(未必知音 肯伯牙)

곡을 아는 자는 백아 보다 낫다 하리라.

 

화답송(괴남 대련화상)

도기득득 자귀가(倒騎得得 自歸家)

거꾸로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가니

약립사의 대만하(蒻笠?衣 帶晩霞)

삿갓과 도롱이도 저녁놀에 물들었다.

보보청풍 행처온(步步淸風 行處穩)

걸음마다 맑은 바람에 가는 길이 편안하니

불장촌초 괘순아(不將寸草 掛脣牙)

빈약한 촌초로선 입을 열지 못한다네.

 

7. 일곱째그림은 소는 간데없고 동자승(童子僧)은 나이든 사람으로 변하여 세월이 지났음을 나타내면서 뒷모습만의 주인공이 평평한 바위위에 앉아있으며 앞에는 높은 산만 표현해 놓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이름 하여 망우재인(忘牛在人)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소는 단지 방편일 뿐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모두 잊어야 한다는 뜻으로 불교의 교리는 방편으로서 강을 건너는데 뗏목을 사용하였지만 강을 건넌 후에는 뗏목을 지고 가는 사람은 없듯이 뗏목은 버려야 하는 것처럼 이제 수행자는 소라는 방편 즉 마음자리도 버리고 본성(本性)자리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가 아함경차원의 깨달음 즉 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미세번뇌(微細煩惱)가 남아있는 단계로서 더 깊은 수행(육바라밀 수행)이 필요한 단계인 것이다.

이 단계에서 이제 선승(禪僧)에게 본성자리는 어떤 것입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하실까?

아마 주장자로 탁상을 쾅하고 내리치든가. 아니면 ()”을 할 것이다. 그러면 듣는 사람은 그 반응이 제각각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이쿠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는 지르나.” 이보다 근기가 조금 높은 사람은 아 저 스님이 을 하시는 구나.” 그러나 근기가 더 높은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다.

 

이때 근기가 낮은 사람은 다시 질문할 것이다. “아니 본성(本性)자리라는 것에 대하여 말씀 좀 해 주십시오.”

그러면 스님은 한마디 더 할 것이다. “허어.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구나!”

 

여러분은 여기서 조금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스님은 분명히 답을 했는데 듣는 사람은 듣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는 불교의 대화 방법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여러분은을 듣는 순간 누구나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 여러분의 마음상태를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그 순간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생각도 없는 상태 즉 아주 순백의 상태라는 것을 알아채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번뇌도 생각도 없는 그대로 순백인 원초의 상태인 것 그래서 을 원초의 소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관()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상태가 항상 계속되어야 본성자리에 드는 것이니 이를 말로 설명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불교의 깨달음은 극히 개인적인 감성(感性)의 단계이기 때문에 느낌을 전달할 수도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니 선승(禪僧)에게 물어도 답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각자가 전정사유(專精思惟)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문

법무이법(法無二法): 법엔 두 법이 없나니

우차위종(牛且爲宗): 임시 소에 의탁해 종으로 삼았노라.

유제토지이명(喩蹄兎之異名): 올가미와 토끼가 명칭이 다른 것 같고

현전어지차별(顯筌魚之差別): 통발과 고기가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 일세

여금출광(如金出鑛): 마치 금이 광석에서 나오고

사월이운(似月離雲): 달이 구름을 벗어난 것 같으니

일도한광(一道寒光): 한줄기 차가운 빛은

위음겁외(威音劫外): 겁 밖의 위음 이로다.

 

게송

기우이득 도가산(騎牛已得 到家山)

소를 타고 이미 고향에 도착하였으니

우야공혜 인야한(牛也空兮 人也閑)

소도 공하고 사람까지 한가롭네.

홍일삼간 유작몽(紅日三竿 猶作夢)

붉은 해는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꾸는 것 같으니

편승공돈 초당간(鞭繩空頓 草堂間)

채찍과 고삐는 띠 집 사이에 부질없이 놓여있네.

 

화답송(석고 희이화상)

란내무우 진출산(欄內無牛 ?出山)

산에서 끌고 온 소 집안에는 없고

연사우립 역공한(烟蓑雨笠 亦空閑)

삿갓과 도롱이도 쓸데없다.

행가행락 무구계(行歌行樂 無拘繫)

즐겁게 노래하며 가는 길에 전혀 걸림이 없으니

영득일신 천지간(寧得一身 天地間)

온 천지 사이에서 한 몸만이 자유롭네.

 

화답송(괴납 대련화상)

귀래하처 불가산(歸來何處 不家山)

돌아오니 어디 하나 고향이 아니리

물아상망 진일한(物我相忘 鎭日閑)

대상과 나 또한 모두 잊으니 종일 한가롭네.

수신통현 봉정상(須信通玄 峰頂上)

현지를 통한 봉우리 정상을 반드시 믿을 지니

개중혼불 류인간(箇中渾不 類人間)

그 속에선 온갖 것이 인간 세 아니더라.

 

8. 여덟째그림은 흰 벽에 단 하나의 원[이를 불교에서는 일원상(一圓相)이라고 함] 즉 빈 벽에 원을 하나 그려놓은 장면을 묘사하고 이름 하기를 우구망(人牛俱忘)라고 되어 있다.

 

이는 불교의 상승묘법단계(上昇妙法段階)로서 소도 사람도 실체가 없는 모두가 임을 깨닫는 내용으로 텅 빈 원상(圓相)만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 일원상의 단계가 바로 의 깨달음을 증득한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대승 경전에서는 이라고도 표현되며 반야바라밀다라고 도 표현되며 구경열반이라고도 표현되며 피안의 세계라고도 표현되는 반야부 경전이 이 단계에 포섭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여기가 끝이 아님을 나타냄으로서 도교와 다름을 나타내는 그림이 다음 두 개의 그림이다.

 

원문

범정탈락(凡情脫落): 범속한 생각을 탈락하고

성의개공(聖意皆空): 거룩한 뜻도 다 비어있다.

유불처불용오유(有佛處不用娛遊): 부처가 있는 세계엔 놀 필요가 없고

무불처급수주과(無佛處急須走過): 부처 없는 세계는 모름지기 급히 지나가야 한다.

양두불착(兩頭不着): 범속함과 거룩함 둘 다에 집착하지 않으니

천안난규(千眼難竅): 관음보살의 천안이라도 엿보기 어려워라.

백조함화(百鳥啣華): 온갖 새들이 꽃을 물고 와 공양하는 것은

일장함라(一場啣?): 오히려 한바탕 부끄러운 장면일 뿐이네.

 

게송

편삭인우 진속공(鞭索人牛 盡屬空)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는 다 비어 있나니

벽천요활 신난통(壁天遼闊 信難通)

푸른 허공만이 가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도다.

홍로염상 쟁용설(紅爐焰上 爭容雪)

붉은 화로의 불꽃이 어찌 눈을 용납하리오.

도차방능 합조종(到此方能 合祖宗)

이 경지에 이르러야 조사의 마음과 합치게 되리라.

 

화답송(석고 희이화상)

참괴중생 계이공(慙愧衆生 界已空)

부끄럽구나! 중생계도 이미 비었으니

개중소식 약위통(箇中消息 若爲通)

그 가운데 소식을 어찌 통할 것인가!

후무래자 전무거(後無來者 前無去)

뒤에 오는 자도 없고 앞에 가는 이도 없으니

미심빙수 계차종(未審憑誰 繼此宗)

모르겠다! 누구에게 종지를 계승한다고 하는지를

 

화답송(괴납 대련화상)

일추격쇄 대허공(一鎚擊碎 大虛空)

한번 크게 내려 큰 허공을 부숴버린다.

범성무종 로불통(凡聖無縱 路不通)

범부 성인의 자취는 없고 길도 통하지 않네.

명월당전 풍삽삽(明月堂前 風颯颯)

명월당 앞에 부는 바람은 쓸쓸한데

백천무수 부조종(百川無水 不朝宗)

세상의 모든 강들은 바다로 흘러든다.

 

9. 아홉째그림은 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붉게 피어있는 산수풍경(山水風景)만이 그려져 있으며 이름 하여 반본 환원(返本還源)이라고 되어 있다.

 

반본 환원(返本還原) 이란 되돌아옴을 뜻하는 것으로서 피안(彼岸)의 세계에서 차안(此岸)의 세계로 다시 되돌아와야 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단계에는 법화경의 내용이 포섭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되돌아온 후의 모습은 건너갈 때와 달리 청정한 마음임으로 차안(此岸)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법화경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며 불지견(佛知見)이라고도 한다.

 

원문

본래청정 불수일진(本來淸淨 不受一塵): 본래 청정해서 한 티끌에도 물들지 않으면서

관유상지영고(觀有相支榮枯): 모습 있는 만유의 영고성쇠를 본다.

처무위지응적(處無爲之凝寂): 함이 없는 고요한 경지에 머물러

부동환화(不同幻化): 더 이상 환상과 동일시하지 않으니

기가수치(豈假修治): 어찌 수행과 계율에 의지하리오!

수록산청(水綠山靑): 물은 맑게 흐르고 산은 푸른데

좌관성패(坐觀成敗): 홀로 앉아 세상의 흥망성쇠를 바라보노라.

 

게송

반본환원 이비공(返本還源 已費功)

근원으로 돌아가 돌이켜보니 온갖 노력을 기울였구나!

쟁여직하 약맹롱(爭如直下 若盲聾)

차라리 당장에 귀머거리나 장님 같은 것을

암중불견 암전물(菴中不見 菴前物)

암자 속에 앉아 암자 밖 사물을 인지하지 않나니

수자망망 화자홍(水自茫茫 花自紅)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

 

화답송(석고 희이화상)

영기불타 유무공(靈機不墮 有無功)

신령한 기틀은 유무의 공에 떨어지지 않아서

견색문성 기용롱(見色聞聲 豈用聾)

빛깔도 보고 소리도 듣는데 어찌 귀머거리이겠는가!

작야금오 비입해(昨夜金烏 飛入海)

어젯밤 금가마귀가 날아서 바다로 들어가니

효천의구 일륜홍(曉天依舊 一輪紅)

새벽하늘에는 옛날 같이 둥근 해가 떠있도다.

 

화답송(괴납 대련화상)

용진기관 비진공(用盡機關 費盡功)

기관을 다 써서 모든 노력을 했어도

성성저사 불여롱(惺惺底事 不如聾)

또랑또랑한 그 일은 귀머거리만 못하네.

초혜근단 래시로(草鞋根斷 來時路)

짚신 끈이 다 해진 채 돌아오는 길에

백조부제 화란홍(白鳥不啼 花亂紅)

새들이 울지 않는데 꽃들만 붉게 피었어라.

 

10. 열 번째 그림은 지팡이에 도포를 입은 행각승(行脚僧)의 모습이나 또는 목동이 포대화상(布袋和尙)과 마주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이름 하여 입전수수(入廛垂手)라고 명명된 것을 볼 수가 있다.

 

여기서 ()자는 장거리전자로서 사람이 많은 시장거리를 뜻하며 수수(垂手)는 손을 아래로 늘어뜨린 모습을 나타낸 말로서 이는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는 자신의 깨달음에 만족하여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되며 육도중생의 길목에 들어가 손을 드리운다는 뜻으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위해 속세로 나아감을 뜻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참된 불교의 교리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소승(小乘)은 깨달음 자체로 수행이 끝나는데 대승(大乘)은 깨달음을 얻은 후에 이를 중생제도를 위해 써야 한다는 즉 보살행을 해야 한다는 대원(大願)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법화경(法華經)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증득하여 성불(成佛)하는 것이 최종목표임을 은연중 표현하고 있는 것임을 또한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살행을 하는 수행자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는 것인가? 보살수행의 단계에서는 미세번뇌(微細煩惱)마저 끊어버리고 다시는 어떠한 번뇌에도 끄달림이 없이 청정을 유지하여야하므로 번뇌가 많은 세속에 나아가서도 감정의 기복이 전혀 없도록 수행을 쌓아야하는데 이러한 수행에 의해서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는 암시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번뇌 속에서도 청정(淸淨)함을 유지하여야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란 바로 如如함이니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

시문독엄(柴門獨掩): 싸리문을 닫고 홀로 고요하니

천성부지(千聖不知): 천명의 성인이라도 그 속을 알지 못하네.

매자기지풍광(埋自己之風光): 자기의 풍광은 묻어버리고

부전현지도철(負前賢之途轍):옛 성현들이 간 길들도 등져버린다.

제표입시(提瓢入市): 표주박을 들고 저자에 들어가며

책장환가(策杖還家): 지팡이 짚고 집으로 돌아간다.

주사어행(酒肆魚行): 술집도 가고 고깃간도 들어가서

화령성불(化令成佛): 교화를 펼쳐 부처를 이루게 한다.

 

게송

로흉선족입전래(露胸跣足入廛來)

맨 가슴 맨발로 저자에 들어오니

말토도회소만(抹土途灰笑滿)

재 투 성이 흙투성이라도 얼굴에 가득한 함박웃음

불용신선진비결(不用神仙眞秘訣)

신선이 지닌 비법 따위를 쓰지 않아도

직교고목방화개(直敎枯木放花開)

당장에 마른 나무위에 꽃을 피게 하누나!

 

화답송(석고 희이화상)

자한친종 이류래(者漢親從 異類來)

이놈은 틀림없이 이류에서 왔구나.

분명마면 여노시(分明馬面 驢駑?)

말의 얼굴과 당나귀 뺨이 너무나 분명하다.

일휘철봉 여풍질(一揮鐵棒 如風疾)

질풍처럼 몽둥이를 한번 휘둘러서

만호천문 진격개(萬戶天門 盡擊開)

이세상의 모든 문을 두들겨 여네.

 

화답송(괴납 대련화상)

수리금추 벽면래(袖裏金鎚 劈面來)

소매 속의 금방망이가 정면에서 떨어지니

호언한어 소영시(胡言漢語笑盈?)

오랑캐 말 우리말로도 웃음은 볼에 가득하네.

상봉약해 불상식(相逢若解 不相識)

서로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함을 이해한다면

누각문정 팔자개(樓閣門庭 八字開)

미륵의 누각문도 활짝 열어지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이 깨달음을 중생에게 어떻게 전할까? 보지 못한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 설명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든다면 정중지와(井中之蝸) 즉 우물 속 개구리 이야기에 비유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물속의 개구리는 우물통의 간섭현상(干涉現象)을 받아서 하늘이 동그랗다고 믿고 있다. 그러다가 어떻게 잘못되어 어떤 큰 개구리 한마리가 우물 밖으로 튀어나오게 되어서 밖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이 동그랗지도 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 다시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면 이 개구리는 이제 하늘이 동그랗지 않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개구리가 그 사실을 다른 개구리에게 이야기 했다면 그 이야기를 듣는 개구리가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을 까? 아니면 오히려 바보가 될까? 이 개구리는 사실을 이야기 하였지만 그것을 믿고 믿지 않는 것은 다른 개구리들의 몫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또 다른 개구리들에게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주었거나 나도 한번 밖에 나가서 확인을 해야 하겠다는 개구리가 생길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한 것은 확실한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우물 벽을 기어오르는 개구리도 나올 것이고 철봉을 열심히 하는 개구리도 나올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이란 마음에서 느끼는 감성의 문제이니 전해줄 수는 없어도 동기부여를 함으로서 다른 사람이 깨달음을 향해서 갈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일은 해야 한다는 것이 심우도(尋牛圖)의 마지막 장면에 나와 있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의 내용이며 이것이 대승불교의 기본 뜻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그 내용을 알고 보면 더 재미가 있고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역사적인 유물이나 건물 등을 볼 때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만큼 느낀다.” 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인다면 느낀 만큼이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다음에 사찰을 찾을 때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작은 지식이나마 여러분들의 수행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불하십시오. 東山法師團 惠山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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