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천외천부와 대한호국회의 역사
오제문의 말이 멈췄다. 그의 눈이 살기에 젖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은 오제문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분노와 증오를 보았다.
오제문은 손등의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마음속의 격정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 듯 그의 침묵은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푸르게 드러났던 주먹의 힘줄이 사라진 후였다.
“한아, 무상진결의 서문을 쓰셨던 무명산인(無名山人)이란 분을 기억하느냐?”
기억하지 못할 수 없는 이름이다.
“예.”
그분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생각은해 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더군요. 쓰여 있던 글이 한문이고, 무상진결과 같은 유의 무예가 국내에 전승되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추측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분은 고구려 분이시다.
“고구려?”
한의 눈이 커졌다. 그 이름이 주는 세월의 무게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제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분의 고향은 현재의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이춘(伊春)이다. 그곳은 당시 고구려의 동북방 지역이었고, 무상문의 발원지가 되는 곳이기도 했지. 이춘에서 북쪽으로 가면 대흑산(大黑山)이라는 산이 있다. 천하를 주유하다 적수를 찾지 못해 대흑산에 은거했던 그분이 선대부터 계속 가입 제의를 해 왔던 은자림에 몸을 담은 것은 그분의 나이 고희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은자림은 서로의 비전을 공유하지만 어떤 구속도 하지 않는다. 비전의 공유도
스스로의 뜻에 따를 뿐 어떤 강제도 없고 개인의 생활에 대한 간섭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은자림에 모인 초월자들이 힘에 의한 억압으로 자신의 뜻과 반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이상(理想)을 공유해 모인 분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지. 그리고 그러한 점 때문에 대한호국회라는 단체가 설립되었다는 것을 초월자 중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은자림의 초월자들이 대한호국회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그자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고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대한호국회, 그러니까 대명회가 은자림의 초월자 중 누군가가 만든 조직이라는 것입니까?”
한의 음성에 놀라움이 배어 있었다.
오제문은 씁쓸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 은자림은 그 구성원들에게 아무런 구속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분들 사이엔 초월자들을 구속하는 단 하나의 묵계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도 깨뜨리지 않았다. 그것을 깨뜨리게 된다면 은자림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역사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
그“분들의 힘은 개인이 일국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였다. 너도 무상진결을 익혔으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비록 현대의 과학 문명이 놀랍게 발전하고 있지만 네가 사욕을 위하여 힘을 쓴다면 일반인들이 그것을 막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은밀하게 힘을 쓰는 경우다. 힘을 공개적으로 사용한다면 현대의 무기 체계로 너를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희생은 크겠지만. 그러나 천수백 년 전의 상황은 현재와 달랐다. 당시의 무기로 은자림의 초월자를 막는다는 것은 이란격석(以卵擊石,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었다 초월자 개인이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정도였으니. 초월자가 개입하여 역사를 바꾸는 상황, 그런 상황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공감대가 은자림의 초월자들 사이에 존재했지. 그것이 은자림의 묵계가 만들어진 이유였다.
대한호국회를 만든 자가 고구려의 역사에 개입한 것입니까?
한의 음성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제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너무나 비현실적이었지만 그는 무상진결을 익히고 있는 사람이다. 오제문이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너는 말 상대로는 아주 그만이다. 하나를 말하면 다음 일을 바로 아니.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대한호국회의 활동을 처음 알아차린 분은 무명산인의 삼대 후예였던 고영한(高榮韓)이라는 분이셨다. 대한호국회의 움직임을 말하기 전에 질문이 있다. 한아, 너는 왜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치는 데 그처럼 전력을 기울였는지 아느냐?”
“동북아에서 수, 당의 배후를 위협하는 강력한 국가였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수, 당의 배후를 위협하는 강력한 국가라.”
오제문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동양사 전체가 엉망진창인 현재의 이 나라 역사 체계에서 그 정도라도 생각하니 다행이긴 하다만은. 고구려는 수와 당의 동북방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수나 당을 무너뜨릴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신라와 백제를 뒤에 둔 고구려는 수, 당을 적극적으로 공략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 그런데도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 이유는 동북아를 안정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구려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갖고 있었다.”
“말씀해주십시오.”
한의 시선은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이준하를 만나 동북공정에 대해서 들은 것이 불과 수일 전이었다.
중국에서 한족이 세운 국가는 몇 되지 않는다. 지금의 중국이 역사를 뜯어고치려고 광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수와 당도 엄밀하게 따지면 한족이 세운 정권이 아니었고, 그 수뇌부도 한족 중심이 아니었다. 수를 건국한 양견은 북주의 건국 공신인 양충의 아들이다. 북주를 건국한 우문씨는 선비족이고, 선비족은 동호의 갈래다. 그리고 동호는 흉노라고 알려진 북방유목족의 지배 하에 있던 부족이고. 수는 선비족이 세운 국가다. 당을 건국한 이연은 서량의 한족 이호의 7대 손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가문은 북주의 명문가였고, 이연의 모친은 선비족이었다. 게다가 당의 실제 권력을 장악한 관롱집단은 섬서성 일대에 근거지를 둔 선비족과 한족의 정치 연합 세력이었다. 당도 역시 선비족이 세운 국가라고 해야 옳다.
지금까지 전하는 중국의 역사책들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 발해가 고대 중국에 세워졌던 나라에 조공을 하는 일종의 속국이라고 적고 있다. 모두 거짓말이다. 누가 누구에게 조공을 한단 말이냐! 단군조선이 한족의 국가에 조공을 한 모든 기록은 한족의 조작이다. 게다가 고구려 이후의 조공은 고대 국가 간의 무역과 정책의 한 방법이었는데도 마치 그것이 종주국과 속국의 관계인 것처럼 그들은 묘사해 놓았다.
한족의 전형적인 춘추필법에 의한 곡필이지. 중화주의에 가득 찬 왜곡이고.
중국 내에서 발굴되는 고구려와 발해의 유물들은 고구려와 발해의 왕들이 중국의 황제와 격이 같음을 말해 주고 있지. 그런 나라의 왕들이 다른 나라의 속국이라니. 북방의 기마부족들은 모두 하나의 국가 기원을 갖고 있다. 비록 지금은 갈라진 지 오래되어 언어와 문화까지도 동일한 것을 찾기 어렵지만 그들이 세웠던 국가의 흥망성쇠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기원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수나 당의 고구려에 대한 집착과 현재의 중국에서 진행되는 역사 왜곡도 북방기마민족의 국가 기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오제문은 잠시 숨을 돌린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고대의 장강 이북을 지배했던 것은 단 하나의 국가다. 바로 고조선이라고 불리는 단군조선이지. 단군조선은 역사 속의 흉노, 몽골, 동호, 선비, 거란, 청을 건국한 여진, 여진의 원부족인 말갈족까지 이 모든 부족들의 기원이 되는 국가다. 그 이전의 국가는 한웅이 지배했던 배달국이지만 네게는 신화처럼 들릴 테니 언급하지 않으마. 단군조선의 건국 연대는 중국 요임금 즉위 때라고 전한다. 그 시절 지금 중국의 북방에 어떤 국가든 존재했던 적이 있느냐? 어떤 기록에도 그런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은 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엔 실제로도 단군조선 이외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청동기를 무기로 사용하면서 조직화된 강력한 기마군단의 무력을 투사하는 국가에 대항할 세력이 있었겠느냐?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단군조선 중기 이후 서기전 12 ~ 3세기를 전후해 나타나는 북방의 기마부족들을 각기 다른 민족으로 이해하는 현재의 고대사 연구는 상식을 무시한 것이다.“
사람들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나도 이 나라에서 가르치는 국사책을 읽었지만 국사라는 책에 적혀 있는 내용에 비상식적인 부분이 있는데도 배우는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한아 너는 현재의 국사책에 적혀 있는 대로라면 고조선이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동북아를 지배했는지 아느냐?“
“대략 이천백 년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통설대로라면 단군조선이 건국된 것은 서기전 2333년이고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것은 서기전 108년이다. 위만이 준왕을 폐하고 위만조선을 건국한 것은 서기전 194년이니 단군조선의 역사는 대충 따져도 이천백 년을 넘는다. 중국의 고고학적 발굴로 고조선의 중심 활동 무대였던 만주 지역에서 출토되는 청동기의 탄소측정 결과 그 연대가 서기전 24세기경이라고 밝혀진 지도 이미 오래 되었다.(요령성 하가점 하층문화, 夏家占 下層文化)
중국의 사학자들과 러시아의 일부 사학자들이 단군조선의 실존을 인정하고,
단군조선의 정통을 이었다고 자처하는 한국의 사학자들은 단군조선을 신화로 취급하는 해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 역사학의 상황이다.
세계사의 어느 민족이 세운 나라도 이천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을 유지한 국가는 없었다. 자칭 중화라 부르는 땅에 건국된 나라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한아, 너는 이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존재했던 단군조선이 어떤 나라였다고 생각하느냐?”
한은 대답하지 못했다. 비록 그가 다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해도 그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우리 민족과 역사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역사 전문가는 아닌 것이다.
단군조선의 국가적 성향은 지금까지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 고대 북방에서 일어선 국가들을 살펴보면 된다. 흉노, 몽골, 동호, 유연, 거란, 선비, 말갈 이 모든 부족이 이룩한 국가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다. 바로 강력한 기마군단을 기반으로 하는 정복 국가들이었다는 것이다.
단군조선은 어떤 국가였겠느냐? 후에 그 땅에서 일어난 국가들이 기마민족이었는데 단군조선을 농경을 주로 하는 국가로 보는 것은 난센스다. 단군조선은 당연히 기마민족이었다. 그럼 같은 기마민족이었던 단군조전은 이천 년 동안 무엇을 했을까? 제대로 남아 있는 기록이 없으니 얌전히 농사나 지으며 살았을까? 그들이 한족의 사서에 남아 있는 것처럼 술과 가무를 즐기며 이천 년을 살았겠느냐? 이천 년을 넘게 국가를 유지한 기마민족이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몽상에 불과하다. 동북아에서 국가를 이룩한 모든 기마부족들은 모두 중원을 도모했고 그들 중 중원을 완전히 정복한 국가도 적지 않다. 세계사에 기록된 것만도 몽골족의 원나라, 만주족의 청나라가 있지. 남북조의 북조를 이룩한 십육국도 모두 북방 기마부족이 세운 나라였고, 수와 당, 오대십국의 오대(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 중 세 나라(후당, 후진, 후한)가 돌궐족이 세운 국가였다. 한족이 중원을 지배한 것은 주와 한, 송, 명 정도이고, 그런 그들도 지배 계급은 순수한 한족이 아니었다.
“한아, 대한호국회와 천외천부(天外天府)의 역사를 받아들이려면 네가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동양사의 관점을 완전히 정반대로 바꾸어야 한다.”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한은 오제문의 말을 선뜻 납득하지 못했다. 오제문의 음성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 사람들은 현재의 중국 땅에 일어선 국가를 아시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고대와 중세도 또한 그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지. 그러나 단군조선이 존재하고 있을 무렵 아시아의 중심은 중원이 아니었다. 중원 땅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국가들은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었지. 중원은 조선의 변방이었다. 아시아의 고대사는 중국 역사가들의 농간으로 거꾸로 기록되어 있다. 천하의 중심은 단군조선이었고 현재의 중국 땅에 있는 나라들은 단군조선이 지배하는 천하의 변방에 있던 지방 정권이었다.”
오제문의 말을 듣던 한의 얼굴은 머리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단군조선 이전의 배달국은 너무나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나라였고 그 안에 수많은 민족을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에 단일민족국가라고 하기엔 어려웠다. 씨족 집단의 연합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느슨한 국가였지. 그러나 단군조선은 달랐다. 영역 내의 모든 지역을 삼한(三韓; 마한, 변한, 진한)으로 나누어 다스린 단군조선은 한민족 최초의 단일민족국가였다. 삼한관경(三韓管境) 내의 모든 부족을 하나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으로 녹여 낸 거대한 용광로였지 . 지금 사용하는 한민족(韓民族)이라는 말도 그때부터 유래된 것이다.
단군조선은 기마군단을 바탕으로 건국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대제국이었다. 그 기마군단의 전통은 고구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졌다. 조선의 북방을 맡았던 기마군단의 강력함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단군조선 건국 당시의 아시아 대륙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한족은 황제 헌원 이후 요의 당(唐), 순의 우(虜), 우의 아들 계(啓)로 이어지던 자들이 세운 것을 나라라고 말하지만 헛소리다. 치우천황을 패배시켰다는 시답잖은 전설의 주인공 헌원의 사후(死後) 그의 아들이라는 소호금천과 손자와 증손자라는 전욱고양과 제곡고신 그리고 요, 순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천하의 흥망성쇠와는 상관이 없다. 그들은 천하의 주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황하 인근의 소국(小國)을 지배했던 자들이다. 그들의 양위과정을 선양(禪讓) 운운하는 것은
지나가던 개가 하품할 일이다. 생각해 보아라. 후세의 한족은 그들에게 천자(天子) 운운하지만요, 순의 천자 양위과정을 보면 당시까지도 그들이 씨족 공동체의 수장에 다름없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을 천자라고 부르다니 천자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 말인데 감히 그들이 그 말을 사용한단 말이냐. 후한의 채옹(蔡邕)이 쓴 독단(獨斷)에 천자라는 말이 동이에서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거늘.
그런 자들이 살고 있는 풍요로운 중원을 단군조선이 그냥 두고 보았다면 단군조선의 지배자들을 바보로 생각한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일이다.
단군조선은 주변의 모든 부족을 정복했고 당연히 중원도 정복했다. 그리고 그들을 제후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았지. 대평원에서 단련 된 강력한 기마 군단은 농경을 주로 하던 남부 중원인들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그 공포는 이십 세기 청이 멸망할 때까지 황하유역에 살던 자들의 잠재의식에 남아 있었고, 현재도 없어지지 않았다.
한족의 사가들은 단군조선이 있던 현재의 북중국 대륙에 존재했던 기마부족들이 제대로 된 문화를 갖지 못했던 야만인들이었다고 주장하지. 웃기는 일이다.
“그런 야만인들이 살던 나라에 공자가 가서 살고 싶다고 말했겠느냐? 그리고 후한서를 비롯한 여러 사서에 중국에서 예를 잃었을 때는 사방의 동이에게서 그 예를 구했다는 기록을 남길 수 있었겠느냐?
오제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기세는 한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이어졌다.
“황하 유역에 살던 자들은 하나라와 은나라를 거치며 자체적으로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단군조선을 종주국으로 섬기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그들은 감히 그럴 마음을 먹을 수가 없었고 또 그들은 한민족의 갈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저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황제헌원과 소호금천, 전욱과 제곡, 요, 순, 우가 한족이 아니라 동이에 뿌리를 둔 자들이라는 것은 고사변(古史辯)을 비롯한 대륙의 사서(史書)에 숱하게 기록되어 있고, 최근 산동반도 지역에서 발굴된 대문구문명을 연구한 중국의 고고학자 당란이 갑골로 쓰인 소호씨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이 중국의 신문에도 났었지. 동이라 불리던 우리민족이 현재 중국의 심장부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 유물로도 증명이 되는 세상이다. 게다가 하와 상. 은이 한족이 세운 국가가 아니라는 것은 이제는 중국의 양심 있는 사가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식에 속하는 일이 아니더냐. 단군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 질서가 깨진 것은 한족의 실질적인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화하계인 주의 무왕(武王)이 등장하면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주의 무왕은 황하 중상류 지방인 섬서성 황토고원을 근거지로 힘을 모아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그가 은을 멸망시킬 때 얼마나 잔혹하게 씨를 말렸는지 은허(般據)가 발굴되지 않았으면 은나라는 아직도 전설 속에 남았을 것이다. 현재의 중국 사학계도 은나라가 그들이 말하는 동이(東夷)의 갈래가 세운 국가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 은나라를 무왕이 역사 속에서 철저하게 지웠던 것은 한민족의 중원지배력을 약화시키고 한족의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주무왕의 거대한 야망 때문이었지. 주의 무왕이 은을 멸망시켰지만 한민족의 중원 지배력이 약화된 것은 아니었다. 무왕이 넘어서기에 단군조선의 세력은 너무나 강력했다. 당시의 주 무왕이 차지한 강역은 현재의 중국 대륙의 일부에 불과했고, 그 주변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형식적으로 그들은 주나라의 제후국 형태를 취했지만 그것은 요식행위였지. 그 제후국들 중 많은 나라들이 한민족의 갈래였으니까. 주를 비롯한 여러 소국들은 단군조선의 지방 정권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서경과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보아라. 무왕이 언제 군사를 일으켰는지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夷)의 현인들이 은을 버리는 시점에서 그는 군사를 일으켰다. 단군조선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감히 그가 군사를 일으키지는 못했을 거라는 것이 진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강성했던 단군조선도 천수백 년의 역사를 지나면서 내부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단군조선의 변경인 남부와 서부에 웅거하던 야망을 가진 여러 부족의 수장들이 단군조선의 지배를 거부하며 중원으로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지. 후세의 한족 사가(史家)들은 그들을 동이, 북적 등의 이름으로 불렀고, 후일 흉노로 통칭해서 부르게 되었다. 그들로 인해 서주(西周)가 멸망하고 춘추전국시대를 연 동주(東周)시대가 시작되었다.
전국시대를 끝낸 것은 진(素)의 15대 왕 정(政)이었다. 후일 자신을 시황제라 칭한 자였지. 한아, 너는 시황 정의 뿌리가 어디인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설마 그도 한족이 아닙니까?”
그렇다. 진나라의 시조인 대업은 동쪽 발해 연안의 씨족 출신이었다. 우임금 시절의 사람이지. 그 시절 발해 연안을 지배했던 국가는 당연히 단군조선이다. 그의 뿌리가 어디인지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시황 정은 이족(夷族)이라고 말하기 곤란한 자다. 오랫동안의 중원 생활로 정을 비롯한 그의 조상들은 이미 한화(漢化)되어 있어서 스스로를 한족으로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정은 전국시대를 통일한 후 거대한 야심을 가졌다.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 되겠다는 야망이었지. 그래서 스스로를 시황제라고 부르게 한 것인데 그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단군조선이지.
단군조선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는 공전절후의 일이라 할 수 있는 야만적인 짓을 저질렀다. 분서갱유와 만리장성 축조가 그것이다. 사서들은 옛것을 들어 현재를 비판하는 것은 인심을 현혹시키니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이유로 시황 정이 분서갱유를 단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웃기는 말이다. 정은 군웅이 할거하던 전국시대를 마감시켰던 일대의 거인이었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지. 발굴된 시황릉의 병마용은 당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잘 나타내준다.
그가 분서갱유와 만리장성을 축조한 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진나라 안에 아직도 강력하게 남아 있는 단군조선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 그것이다.
분서갱유를 통해 단군조선을 추종하던 수많은 지식인들과 서책들이 불에 타고 생매장 당했다. 그리고 만리장성을 축조하기 위해 진나라 안에 거주하던 이족들이 동원되었다. 역사는 장성의 성벽 아래 쌓인 해골이 산을 이를 정도였다고 전하니 그때 동원된 우리 민족의 지파들이 당했을 고통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그 일로 중원에서 자신을 이족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씨가 말랐다. 모두 한족 행세를 해야했고 몇 대가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한화 되어버렸다.
시황 정의 진나라는 그의 사후 얼마 안 되어 멸망했다. 그러나 그의 분서갱유와 만리장성 축조를 통해 이룩하려고 했던 뜻은 성공했지. 한족인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의 사가 사마천은 놀라운 창작력으로 사기라는 역사서를 통해 단군조선의 흔적을 지우는데 성공했다. 시황 정의 분서갱유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다른 사서들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사마천이 어떻게 역사를 왜곡했는지 아느냐? 현재의 중국에 전해지는 사서들을 잘 살펴보거라. 흉노나 동호, 산융, 북적이니 하는 이민족을 칭하는 용어가 들어 있는 같은 사건이 다른 책에서는 조선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다.
사마천과 한족의 사가들이 우리민족의 지파들을 제멋대로 부른 이름들이다.
그러나 역사를 왜곡한다고 해도 그들의 처지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끊임없는 북방기마부족들의 반복되는 지배는 한족으로선 가히 운명처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북조의 십육국이 그러하고 수, 당이 또한 그러했다. 오대십국도 다르지 않았다.
오제문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의 얼굴은 진중하게 변해 있었다.
오제문이 한 말의 많은 부분은 그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모르는 내용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르는 내용들은 충격일 수밖에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한아, 통설대로 단군조선의 존재 기간을 그대로 따진다고 해도 동북아에서 사는 사람들은 하나의 국가 체제 아래서 이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다. 너는 그 정도의 세월을 하나의 국가 체제 아래서 산 사람들이 각기 다른 민족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중국 남북조시대 당시 북조의 십육국을 세웠던 이민족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선비와 흉노, 동호, 갈, 저, 여진, 거란, 강족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들 대부분은 한족에 동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부침이 심했던 중국사 속에서도 그러했는데 이천년이 넘는 세월을 하나의 국가 속에서 평화롭게 살았던 사람들이 각기 다른 민족성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다는 말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한아, 너는 지금까지 내가 한 이야기 중 많은 부분이 잘 믿기지 않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규원사화처럼 조선 중기에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인정되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 중인 서적도 일제시대 이후의 기존 학설과 다른 주장이 실려 있다는 이유로 위서 취급당하는 세상이니까.
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제문이 한 말을 온전히 믿기는 힘들었다. 그가 말한 부분 증 많은 부분이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신화와 전설이 난무하는 시대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해한다. 그러나 대한호국회의 존재는 현실이다. 그들과 우리 천외친부와의 전쟁의 이유는 역사에서 기인하는 것이야. 네가 믿고 안 믿고 간에 그들은 존재하고 있다.”
한을 바라보는 오제문의 눈길은 따스했다.
한아, 이제 수, 당의 대(對) 고구려 전쟁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너도 대강은 눈치 챘을 것이다. 고구려는 장강 유역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를 천하의 중심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단군조선, 그 위대한 제국의 정통을 이은 천하의 중심, 그곳은 수나 당이 아니라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위치를 잘 생각해 보아라. 고구려는 대륙과 해양의 연결지점을 장악하고 있었고, 수, 당에서 보면 동북방이지만 동아시아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중앙부를 지배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스스로가 천하의 중심이며, 천손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단군조선의 뒤를 이은 정통 국가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수나 당의 지배자들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지. 고구려를 쓰러뜨리지 않는다면 천하는 결코 통일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상문의 당대 문주였던 고영한은 고구려의 5부족 중 왕족인 계루부 고씨의
후예였다.
서장의 오지 주목랑마(珠穆朗瑪; 에베레스트산)에서 친우인 몽골의 선인 타루가와 함께 이십여 년의 폐관 수련을 마치고 무상문의 발원지인 흑룡강성(黑龍江省) 이춘(夷春)으로 향하던 고영한은 경악했다.
그의 폐관이 끝나기 이 년 전 동북아의 패자(覇者), 그의 자랑스러운 조국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던 것이다.
고영한이 이춘을 떠난 것은 연개소문의 쿠데타(서기 642년)가 있은 8년 후였다. 그런데 그가 폐관하고 있는 이십여 년 동안 연개소문이 사방(서기 665년)하고, 그의 사후 불과 3년 만에 동북아의 패자 고구려는 멸망했다(서기 668년). 가히 천지가 개벽하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수, 당의 연이은 침공으로 국력이 쇠잔하고 피폐해지기는 했으나 고구려의 멸망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가 12개의 성을 신라에 바치며 투항한 것이며, 연개소문의 맏아들인 연남생이 당군을 이끌고 자신의 조국인 고구려를 친 것까지 고영한은 연개소문뿐만 아니라 그 동생인 연정토와 깊은 친분이 있었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인 남생, 남건, 남산 형제에게는 숙부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들의 인성(人性)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지닌 바 재주가 비록 불가일세(不可一世)라 불리던 희대의 영웅 연개소문에 비할 순 없다 해도 그들은 나라를 배신할 정도로 졸렬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고영한은 고구려 멸망의 전후 사정을 상세하게 알고 싶었고 조사에 착수했다.
그때까지의 그는 은자림의 묵계를 어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고구려 멸망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것은 사라진 조국에 대한 그의 안타까움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했다.
그러나 조사에 착수한 그는 고구려 멸망의 배후에 심상치 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연정토의 배신과 남생과 남건, 남산의 권력투쟁에는 그들 형제도 의식하지 못했던 그림자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 흔적을 따라간 고영한이 발견한 것. 그것이 현재의 대명회, 대한호국회의 수뇌부가 회합을 하는 자리였다.
검성(劒聖)이라고 불리던 절대의 고수 고영한은, 그러나 그 자리에서 도주해야 했다. 대한호국회의 회합에 참가한 자들 중 무려 네 명의 능력이 그에 비해 못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대일이라면 고영한의 상대가 될 자는 없었으나 그들 중 둘이면 고영한과 호각지세(互角之勢)를 이룰 수 있었고 셋이면 고영한을 필패시킬 정도의 능력자들이 그들 중 넷이나 섞여 있었다.
조국을 멸망시킨 암중 세력의 수뇌부를 눈앞에 두고도 도주할 수밖에 없었던 고영한은 필사의 도주를 감행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생사의 기로를 숱하게 넘기며 그들의 손길을 벗어난 고영한은 바이칼호 부근에 은거하고 있던 은자림의 당대 림주 야율극리를 찾아갔다. 고영한으로부터 고구려의 멸망에 관한 비사를 들은 야율극리는 경악했다.
고영한에 버금가는 능력을 가진 자가 네 명이나 존재한다는 것은 대한호국회를 구성하고 있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은자림이 아니라면 그런 자들이 존재할 수는 없었다. 동양에서 숨을 쉬는 자들 중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은자림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야율극리는 고영한과 함께 즉시 대한호국회에 대한 조사를 착수했다. 그리고 결과는 그들의 예상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대한호국회의 뿌리는 은자림이었다.
야율극리와 고영한은 한탄했다. 은자림 내에서 묵계를 어긴 자들이 나왔다는 것과 은자림의 초월자들이 지닌 무서운 능력이 결국 오용(誤用)되였다는 것에 대한 한탄이었다.
대한호국회를 만든 자들은 한족의 발원지인 섬서성(陝西省)의 황토 고원을 고향으로 하는 네 명이었다. 양문룡(梁文龍)을 우두머리로 뜻을 합한 진황, 강상홍, 곽거산, 그들 사인(四人)의 초월자들은 순수한 한족이었다.
패천자(覇天子) 양문룡은 고영한보다 십여 살 연하였지만 당대의 은자림주였던 야율극리조차 감탄할 정도로 천부적인 재질을 지닌 천재였다.
그가 진황, 강상홍, 곽거산이라는 한족 초월자들을 규합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천재였을 뿐만 아니라 강렬한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양문룡이 대한호국회를 만든 것은 중원이라는 풍요로운 대지에 강대한 한민족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한 한족만의 영원한 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양문룡이 대한호국회를 설립한 이유는 내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중원의 역사 속에서 한족이 실제 중원을 지배한 세월은 그들이 동이라 부르는 우리 민족이 중원을 지배한 세월에 비하면 삼분의 일이 채 되지 않는다.
한족의 역사는 이족에 의한 피지배의 역사다. 양문룡은 그것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지.
야율극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양문룡과 그를 돕는 다른 초월자들은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진 상태였다. 분별을 넘어서고자 하는 수련 중에 오히려 더욱 강한 분별에 사로잡혔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었다.
야율극리는 깊은 탄식 속에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았지만 고영한은 그럴 수 없었다.
고구려를 멸한 당은 그 땅에서 고구려 복국 운동을 하는 유민들을 철저하게색출하여 제거했고, 대한호국회는 암중에 당의 활동을 지원하며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들을 암살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영한은 반선(半仙)의 경지를 눈앞에 둔 인물이었지만 개인의 완성을 위해 민족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야율극리의 제명하겠다는 협박에 가까운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천외천부를 세웠다.
고영한과 뜻을 함께 한 사람들은 백제의 후예 부여연, 말갈족의 이희온, 몽고족의 철련후, 연개소문의 먼 친척인 연운리 등 다섯 명이었다.
천외천부의 첫 번째 활동은 당연히 고구려 유민들의 복국 운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천외천부와 대한호국회의 최초의 조우는 천험의 요새인 휘발하(輝發河)와 혼하(澤河) 사이의 천문령(天門嶺)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측천무후가 고구려 복국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보낸 장군 이해고를 맞이한 것은 대진국을 세운 대중상의 아들, 후일 대발해의 고왕(高王)이 되는 일대의 영걸 대조영이었다.
양문룡의 지시를 받은 진황과 강상홍이 대조영을 암살하기 위해 군막에 접근했을 때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습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고영한을 비롯한 천외천부의 초월자들이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조영은 대중상의 뒤를 이어 대진국의 왕이 되었고, 천문령 전투 이후 동모산을 중심으로 대진국을 대제국 발해로 확장시킨 사람이고, 고구려 복국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대한호국회가 그를 노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으므로 고영한이 그의 주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양문룡이 천외천부라는 한민족 출신의 초월자들이 만든 결사체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면 결코 진황과 강상홍만을 보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천외천부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그것이 출범한 지 얼마 안 되는 대한호국회의 전력을 한순간에 반감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진황과 강상홍의 죽음을 안 양문룡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 사람의 죽음에 어떤 힘이 개입했는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은자림의 초월자들이 아니라면 누구도 그 두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두 사람을 습격한 자들의 정체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친재였고 이미 휘하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한인들을 부하로 두고 있었다.
습격의 배후는 곧 밝혀졌다. 고영한이 자신의 정체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문룡을 만난 고영한은 그에게 역사에 개입하지 말 것을 제안했으나 양문룡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두 세력의 전쟁은 치열했고, 은자림도 무풍지대로 남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두 세력의 전쟁 속에서 동아시아의 역사가 요동쳤던 것이다.
이연이 건국한 당은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安史의 亂)을 거치며 쇠망하기 시작했다.
과장은 있겠으나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나라의 인구가 안사의 난을 거치며 6000만 명에 이르던 인구의 열에 일곱이 줄어 1000만 명 정도였다고 하였으니 그 난의 참혹함을 알 수 있다.
안사의 난의 배후에는 천외천부의 그림자가 있었다. 안사의 난의 주역인 안록산과 사사명은 모두 한족이 아니다. 안록산은 돌궐족과 페르시아인의 혼혈이고, 사사명은 돌궐족이었다.
안사의 난을 거치며 쇠망해진 당나라는 황소의 난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황소의 난은 883년 이극용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하며 진압되었지만 당나라의 역사는 불과 24년 후 끝장이 났다.
그 이후는 북방의 기마민족에 의한 오대십국이 열린다.
대한호국회는 절치부심하며 당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으나 실패했다. 당을 세운 이연은 순수한 한족은 아니었으나 이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며 당의 지배계층은 한족에 동화되어 이미 민족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화된 상태였다.
당이 멸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을 보듯 뻔했다. 당시 당의 번진을 지키던 절도사 대부분이 이민족이었기 때문이다.
대한호국회의 피눈물 나는 노력은 허망하게 끝났다. 천문령에서 입은 타격 이후 세력을 회복하지 못한 그들은 천외천부의 파상적인 공세를 이겨낼 수 없었다.
은자림 출신의 초월자는 초월자만이 막을 수 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고, 일반인들은 아무리 많아도 머릿수로 초월자들을 막아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한호국회의 오대 회주인 양중길(梁中吉)의 대에 이르렀을 때 상황은 다시 변했다. 황소의 난 직후 대한호국회의 회주가 된 양중길은 초대 회주인 양문룡의 후예로 그에 버금가는 천재였다.
그가 대한호국회의 회주로 취임하며 천외천부와의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들이 활등을 중지하고 몸을 숨긴 것이다. 그 은신은 너무나 철저해서 천외천부는 그들의 흔적을 오랫동안 발견하지 못했다.
천외천부가 양중길이 이끄는 대한호국회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사십삼 년이 가져온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양중길은 단순히 숨어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후예를 양성해 힘을 키웠고 오대십국의 혼란을 지켜보며 거란족이 세운 요(遼)를 은밀히 지원했다. 거란족은 그들의 도움을 눈치 채지 못하는 상태에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한족이 흔히 표현하는 것처럼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는 다른 한편으로 사십삼 년에 걸친 노력으로 백두산의 화맥(火脈)을 건드리는 데 성공했다. 백두산이 화산폭발을 하며 발생한 화산재는 발해 전역을 뒤덮었다(최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퇴적층의 다섯 배에 달하는 화산재의 퇴적층이 발해 지역에서 발굴되고 있다).
발해는 대혼란에 빠졌고, 요는 그 상황을 이용해 발해를 멸망시켰다(서기 926년).
천외천부의 초월자들은 대노했다. 요가 비록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표명하고 있기는 했으나 고구려의 정통은 발해로 이어졌다. 요가 발해를 친 것은 강물이 용왕묘를 침범한 격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요군을 이끄는 핵심 장수들을 암살하고자 했으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수십 년간 힘을 키운 양중길이 천외천부의 앞길을 막아섰던 것이다.
대발해의 국도(國都)인 상경용천부 인근의 심산(深山)에서 벌어진 건곤일척의 전투에서 두 세력은 양패구상했다. 그리고 그들이 잃었던 힘을 온전히 회복한 것은 이백 년의 세월이 더 지나고 나서였다.
발해가 멸망한 원인을 당시 발해의 지배층을 이루고 있던 말갈과 고구려인들 간의 반목과 갈등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은 비상식적인 것이다.
중국의 사서들은 발해가 건국될 당시 만주지역에 고구려인들보다 말갈인들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단군조선과 그 이후 단군조선의 정통을 이은 부여와 고구려가 만주를 지배한 세월을 합하면 삼천 년이 넘는다. 고구려가 그 지역을 지배한 세월만 통설로만도 칠백 년이 넘는 것이다.
어떻게 말갈인이 고구려인들보다 많을 수가 있겠는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상식적인 것을 왜곡해 놓았으니 한족의 얼굴 두꺼움이 가히 철판에 비길 만하다.
그 전투 직후 두 세력이 힘을 잃고 서로를 견제하던 때 오대십국 중 드문 한족 정권이었던 후주(後周)의 조광윤이 송을 건국했다(서기 960년).
이백여 년이 흐르자 천외천부는 대발해 전투에서 잃었던 대부분의 힘을 회복했다.
그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천외천부와 실과 바늘의 관계인 대한호국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외천부는 몽고족을 주목했다. 요는 이미 금나라에 의해 멸망한 후였고, 여진이 세운 금나라는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몽고는 달랐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 칭기즈칸이 몽고족의 부족장이 되어(서기 1188년) 흩어져 있던 몽고족을 통일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은자림을 이끌던 림주 우문휘(尤文輝)는 천외천부와 대한호국회의 움직임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두 세력의 수장들과 만남을 제의했고, 당시 천외천부를 이끌던 고한웅과 대한호국회의 양무강은 그 제의를 수락했다.
그들의 만남은 세 세력의 모든 사람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시 천외천부를 이끌던 검선(劒仙) 고한웅은 무상진결 최후의 절학(絶學) 천단무상검도를 창안한 불세출의 천재였다.
그러나 우문휘와 양무강 또한 고한웅에 뒤지지 않는 천재들이었고 세 명 모두 그 능력의 끝을 알 수 없는 절대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만남이 기나긴 초인들의 전쟁에 대해 어떤 것이든 결론을 내릴
것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에서 만나는지는 최고의 비밀이어서 당사자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사람들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각 세력의 수장들이 만나기로 한 날이 지난 후 모두 넋을 잃었다. 그들이 만난 결과는 모든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극도로 불신하고 증오하게 만들었다.
우문휘와 고한웅, 양무강. 세 사람 모두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영원히.상황이 이렇게 되자 세상사에 초연하던 은자림의 초월자들도 분노했다.
이제 전쟁은 천외천부와 대한호국회만의 것이 아니었다. 은자림의 초월자들 중 분노를 참지 못한 일부가 두 세력의 해체를 요구하며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말로 되지 않으니 직접 실력행사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지난 이백여 년간 꾸준히 힘을 키운 천의천부와 대한호국회의 힘도 은자림에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다. 비록 초월자들의 수는 은자림이 많았지만 두 세력의 초월자를 합치면 은자림에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은자림의 초월자들이 모두 나섰다면 전쟁은 그날로 종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으로 뛰쳐나온 은자들의 숫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이미 세상의 욕망을 벗어난 은자들에게 민족을 구분하는 것, 그리고 그 민족을 위해 싸우는 것은 무의미한 살육에 불과했다.
천외천부와 대한호국회는 어쩔 수 없는 연합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천외천부만 해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한호국회는 천외천부에 손을 내밀었다. 은자림의 은자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자신들만의 전쟁을 치르자면서.
은자림의 은자들이 세상에 나와 있는 이상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을 도울 수가 없었다. 은자들은 그들에게 그럴 수 있는 여유를 전혀 주지 않았다.
천외천부와 대한호국회의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연합은 그렇게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은자림의 다른 은자들이 지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세상으로 나왔던 은자들은 다시 그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그런 서약이 이루어진 것은 은자들이 두 세력의 힘에 의해 패퇴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은자들의 성향 탓이 컸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우문휘의 불귀(不歸)로 치솟았던 분노가 가라앉고 함께 수련하던 은자들이 하나 둘 전쟁 중에 사망하면서 다시 은자림의 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은자들의 수가 늘어난 것이었다.
은자들을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던 당시의 수장 운중진인(雲中眞人) 함곤(咸坤)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전의가 없는 사람들을 이끌고 전쟁을 하면서 승리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그가 이끄는 은자들 모두가 이름 모를 산야에서 까마귀밥이 될 수도 있었다.
은자림이 돌아가자 남은 두 세력 간의 전쟁은 다시 치열해졌다.
기나긴 전쟁 속에서 천외천부와 대한호국회는 지난날처럼 역사에 전면적으로 개입하지는 못했다. 이미 서로의 조직을 자신의 손바닥처럼 알고 있는 그들은 상대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대가 목표로 삼은 나라나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을 막을 수는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역사에 전적으로 개입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미약하나마 나라의 운명에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몽고족이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에 걸치는 거대한 대제국을 건설하는 데는 분명 천외천부의 도움이 존재했다. 그리고 주원장이 도움을 받은 백련교의 배후에 대한호국회의 입김이 있었음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명이 건국된 후 기마유목민족의 패기는 사그라지는 듯 보였다.
명의 기세에 힘입어 욱일승천하는 대한호국회와의 오십 년 전쟁에서 천외천부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들의 추적을 피해 바이칼호 부근까지 후퇴한 천외천부는 다시 이백 년 가까운 세월을 숨죽여야 했다.
그 침묵의 세월이 끝난 것은 첫 고구려와 발해의 땅에 살고 있던 건주여진족에서 걸출한 영웅이 성장하면서였다.
후일 청(淸)의 태조(太祖)가 되는 아이신지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努兒哈赤)를 도와 만주를 평정한 천외천부는 명 내부를 혼란에 빠뜨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미 명은 그 수를 다하여 환관이 득세하고 지배층은 파벌을 형성해 권력 투쟁에 여념이 없는 상태였다.
천외천부의 지원을 받은 이자성은 서안에서 칭제하며 대순(大順)을 건국하고(서기1644년 3월), 대순을 건국한 그 다음 날 북경을 함락시켰다(서기 1644년 4월). 대한호국회가 썼던 것처럼 천외천부는 이한제한(以漢制漢)의 방법을 썼던 것이다.
이자성은 명을 멸망시켰으나 중원은 안정되지 않았다. 이자성이 천하를 확실하게 손에 넣기 위해서는 산해관 수비를 담당하던 오삼계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자성과 오삼계는 한족이다. 천외천부는 명이 지배하던 영역을 한족에게 넘겨주기 위해서 이자성을 도운 것이 아니었다.
천외천부는 이자성의 부하들을 움직여 오삼계의 부친과 애첩을 납치했다. 오삼계는 격노했고 산해관으로 진격하던 청군에 투항했다.
당시 청을 지배하던 섭정왕 도르곤은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투항한 오삼계를 평서왕(平西王)에 봉했다. 청군에 쫓겨 달아나다가 호북성과 강서성의 경계인 통산현 구궁산 부근에서 촌민에게 살해되었다고 전해지는 이자성의 죽음은 천외천부에서 보낸 초월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후일 오삼계와 경정충, 상지신이 일으킨 삼번의 난도 천외천부의 지원을 받은 청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대한호국회는 청을 도와 명을 멸망시키려는 천외천부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음지에서 이루어진 전쟁 속에서 쌍방 모두 극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결국 명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청과는 달리 명엔 기울어가는 국운을 돌이킬 수 있는 영웅이 없었던 것이다.
대한호국회가 천외천부를 막아서는 동안 누군가 명의 국운을 다시 일으켜야 했는데 그럴 인물이 없었다. 대한호국회는 이백 년을 절치부심한 천외천부를 막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그들에겐 명을 도울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대한호국회는 피눈물을 흘리며 대륙의 최남단인 현재의 베트남 지역까지 쫓겨 가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천외천부의 대한호국회에 대한 추적은 끝없이 계속되었지만 대한호국회는 끈질기게 그 명맥을 유지하며 힘을 길렀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세월이 다시 이백여 년 흘렀을 때 대한호국회에 기회가 왔다.
긴 세월 동안 대한호국회는 일방적으로 쫓겨 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천지회와 같은 반청복명을 기치로 내건 비밀 결사들을 지원했고, 건륭제 시절엔 백련교를 움직여 반란을 일으켰다.
청조가 이 난을 진압하는 데 걸린 시간은 8년, 사용한 비용은 1억 2천만 냥이었다.
청조의 재정은 파탄 직전까지 몰렸다.
백련교의 난으로 기울기 시작한 청의 국운은 영국과의 아편전쟁을 거치며 결정적으로 기울었다.
기울어가는 청조(淸朝)의 국운을 되살리기 위한 천외천부의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었지만 안팎으로 적을 맞이해야 했던 천외천부의 노력은 패배가 노정된 것이었다.
몰려오는 서양 열강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활동하던 천외천부의 배후를 대한호국회가 쳤다. 물실호기(勿失好機)의 기회를 놓칠 그들이 아니었다.
외세에 대항하며 대한호국회가 지원하는 중국국민당의 전신, 중국혁명동지회의 청조를 멸망시키기 위한 여러 차례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으로 천외천부의 역할은 끝이 났다.
힘을 나눌 수밖에 없었던 천외천부의 초월자들은 차례로 대한호국회의 초월자들에게 죽어갔고, 청은 멸망했다.
그리고 1912년 반청복명을 기치로 내건 손문을 대총통으로 하는 한족이 지배층인 국가,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원세개의 권력 장악과 손문의 실각으로 잠시 정국이 요동친 시간이 있었지만 청은 되살아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