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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가평군 청평면 호반로 1073-56 (청평면 고성리 617번지)
피노키오와 다빈치
영업시간 매일 09:00-18:00
연중 무휴
031-5175-8929
전용주차장 무료주차
문화체험비(입장료 정상가) "교육적이면서, 재미있는 곳" 그래서 문화체험비라는 다소 어색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같다.
쁘띠프랑스 정상가
대인/청소년(중고등학생) 12,000원
소인(36개월-초등학생) 10,000
이탈리아 마을 정상가
대인/청소년(중고등학생) 16,000원
소인(36개월-초등학생) 12,000
통합매표소 왼쪽으로 양갈래의 입구가 있는데 왼쪽의 평지로 걸어들어가는 길이 쁘띠프랑스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 높은 경사도를 가진 올라가는 길이 이탈리아 마을로 가는 길이다.
이탈리아 마을 현장할인 특별요금
대인/청소년(중고등학생) 12,000원
소인(36개월-초등학생) 10,000
쁘띠프랑스 + 이탈리아 마을 통합권 현장할인 특별요금\
대인/청소년(중고등학생) 19,500원
소인(36개월-초등학생) 17,000원
관람객 대부분이 통합권을 이용하는 듯 보였고 네이버, 위메프, 티몬 등을 활용하여 미리 예매를 하면 더 값싸게 이용할 수 있다.
우리도 통합권으로 사전예매를 해서 초록색 통합권 팔찌를 손목에 두르고 먼저 쁘띠프랑스(Petite France)부터 돌아봤다.
이탈리아 마을을 찾아 언덕을 올라오니 거대한 피노키오가 두 팔을 벌리고 환영을 해 준다.
이탈리아 마을의 부제가 피노키오와 다빈치다. 이탈리아 마을의 두 개의 핵심 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탈리아 베니스(베네치아)를 대표하는 성당 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 a Venezis)으로 이탈리아 마을이 시작된다.
이탈리아 국기와 EU 국기가 양쪽에 걸려있고 사자 두 마리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위 벽면에는 산마르코의 상징이자 베니스(베네치아)의 수호신인 날개달린 사자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날개달린 사자의 모습은 베니스(베네치아)를 돌아다녀보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의 유래이기도 하고 이탈리아 해군의 상징으로도 사용된다.
마차에 올라타 피노키오와 사진을 찍는 포토존이 있는데... 관광객 상대로 지칠대로 지쳐 축 늘어진 피노키오의 모습이 안쓰럽다.
이탈리아 대표 관광지 콜로세움에 가면 관광객 상대 마차들이 엄청 많이 있다.
말 두마리가 끌면 좋겠는데... 한마리가 힘겹게 개고생을 한다.
또 로마병사 복장의 배불뚝이 아저씨하고 사진찍으려면 돈 내고 찍어야 한다.
가끔 가족들이 달려들어 사진을 찍으면 일인당 돈을 받기 때문에 목돈을 받아 챙기기도 한다.
18세기 이탈리아는 바로크의 전통을 유지하여서 프랑스만큼 로코코 시대에 영향력을 끼치지는 못했다.
이탈리아 로코코양식은 주로 베니스(베네치아)에서 사용되던 장식을 기반으로 하며 지나치게 도금을 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로코코 시대에 베니스(베네치아)에서 유행하던 가구는 옻칠이 강하게 된 "시노 아제리"였으며,
이와 비슷하게 페인트 칠을 한 가구들이 유행했다. 또한 서랍이 달린 형식의 코모드 또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프랑스 코모드와는 달리 윗부분이 과하게 튀어나오며 아래로 갈수록 조아지는 과감한 형태가 특징이다.
이탈리아 북동족 아드리아 해안에 위치한 낭만과 운치가 넘치는 물의 도시 베니스(베네치아)에서 카니발이 열린다.
이탈리아 공식명칭은 "까르네발레 디 베네찌아(Carnevale di Venezia)"이다. Carnevales는 라틴어로 "고기를 먹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식명칭은 영어로 베니스 카니발(Venice Carnival) 이지만, 한국에서는 가면축제로 더 많이 알려졌다.
가톨릭에는 부활절 40일 전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기간에 고기를 먹지 않고 절제하면서 경건하게 보내는 풍습이있다.
그에 앞서 술과 고기를 실컷 먹고 마시며 즐기던 것이 카니발로 이어지게 되었다.
카니발은 로마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다른 가톨릭 국가에서도 성행하게되었고,
지역 특성에 따라 다양한 주제로 축제를 개최하였다.
종교적 행사로 시작되었지만 현대로 넘어오면서 종교적 색채 없이 유희적 요소만을 가진 카니발도 생기고 있다.
프랑스의 니스 카니발,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과 더불어 세계 3대 카니발로 불리고 있다.
12세기 베니스 공화국이 아퀼레이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으로 산마르코 광장에 모여 파티를 벌인 것에 유래한다.
13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베일을 쓴 여인을 데리고오면서부터 가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가면축제는 공식화되고 확대되었으며, 귀족들은 가면무도회를 개최하여 익명의 일탈을 즐겼다.
후에는 평민도 가면을 착용하기도 했는데, 카니발 기간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착용했다.
신분과 상관 없이 자기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고나 회의에서 솔직한 의사표현을 위해 사용했다.
하지만, 가면을 착용의 부작용으로 범죄와 퇴폐활동이 늘어나게되었고,
일상생활에서는 가면착용은 금지가 외었고 카니발 기간에만 허용이 되었다.
18세기 후반 오스트리아가 베니스를 점령하면서 카니발개최를 막았었고 그 위후 장기간 개최되지못했지만
1979년 이탈리아 정부와 시민, 예술단체가 과거의 카비날을 되살리기 위한 운동을 벌이면서 부활했다.
현재는 300만 명이 방문하는 세계적인 축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알베르토?
지동설을 주장하여 혼자 옳았던 과학자 코페르니쿠스다.
많은 사람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의견을 무시하고 정신나간 사람 치부했지만 혼자 자신의 연구를 계속 해 나갔다.
부정적 의미로 평범한 사람들은 무지하고 자신만 특별하다는 정신분열증을 코페르니쿠스 신드롬이라고도 부른다.
어릴적 사회 공부할 때 국제기구 UNCTAD(United Nations Conv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유엔 무역 개발 회의"를
남북문제해결을 위해 설치된 국제연합의 기관으로 배웠다. 그래서 남한-북한의 문제는 정말 중요한 거구나하고 착각했었다.
그 남북문제는 바로 이탈리아의 빈부격차였다.
북부는 잘살고 남부는 못살고
이탈리아 북부 공업 삼각지대인 밀라노-토리노-제노바 중심으로 패션과 슈퍼카 등 명품으로 가득하고
베로나, 베네치아, 피사, 피렌체, 로마로 이어진다.
이에 비해 낙농업 중심의 이탈리아 남부는 관광수입에 의존하며 살아가며 북부와의 평균 소득격차가 두배가량 차이가 있다.
폼페이, 소렌토, 아말피, 포지타노, 나폴리, 시칠리아가 대표도시다.
이탈리아 축구 2022-2023시즌 세리에A 나폴리(김민재 소속팀)의 33년만의 우승은 그들에게는 눈물나는 영광일 수 밖에 없다.
아직도 이탈리아 북부로 경기를 치르러 나폴리팬들이 원정응원을 가면 "이탈리아의 하수구"라는 비아냥을 듣는다.
나폴리 팬들은 우승을 축하하면서 켜켜이 쌓인 한과 울분을 함께 토해내는 것이다.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와 같이 옛날에 잘 나가는 공화국이 있었던 도시에는
공화국의 부활을 꿈꾸며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소수 정당이 있다.
이런 점은 이탈리아에서도 어느 정도의 자치를 인정해준 사르데냐와 베네토 그리고 쥐트티롤에서 특히 심하게 나타난다.
차별받아온 남부보다 통일을 주도했던 북부 쪽에서 분리독립 주장이 거센 점이 특기할만 하다.
이렇듯 "차라리 갈라서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대표하는 정당이 바로 현 집권당인 북부동맹이다.
이들은 '파다니아(Padania)'란 국명으로 북부의 완전 독립과 연방제를 주장했고,
세금은 많이 내면서 효과는 없는 현상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지금은 집권하기 직전에 북부 독립을 포기하고 전형적인 범국민 우익대중주의 정당으로 노선을 변경했지만,
이탈리아의 남북문제가 얼마나 골이 들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이발사의 90%는 이탈리아 남부 지역 출신인지라
남북으로 이탈리아가 쪼개지면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머리도 못 깎는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다.
작가는 카를로 콜로디이고 원제는 Le avventure di Pinocchio. Storia di un burattino(피노키오의 모험, 한 인형의 이야기)이다.
이탈리아의 소설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 중 하나로 이탈리아 아동 문학의 걸작 중 하나다.
유네스코 자료에 따르면,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26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책 중 하나이며,
가장 많이 번역된 이탈리아어 책이기도 하다.
우연의 일치인지 작가 콜로디가 의도한 건지 모르겠지만 피노키오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양아버지의 직업이 목수이고 둘 다 이름이 요셉이다. 예수의 아버지는 나자렛의 성 요셉이고 제페토 할아버지의 이름은
이탈리아 이름 주세페인데(풀 네임이 주세페 제페토다), 주세페가 바로 요셉을 이탈리아식으로 발음한 이름인 것이다.
또한 피노키오와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는 못자국이 있으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생겨난 서양식 유머가 있다.
죽은 영혼들이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결정하는 성 베드로가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어
예수가 대신 그 업무를 맡아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익숙한 얼굴을 한 노인의 차례가 되었다. 예수가 그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뭐죠?"
"요셉입니다."
"혹시 직업이 뭐였죠?"
"목수 일을 했었습니다."
"아들이 하나 있죠?"
"예."
"그 아들은 당신에게서 태어나지 않았지요?"
"아니 그걸 어떻게..."
"그리고 그 아들의 팔목과 발에 못자국이..."
"그렇소만..."
예수는 눈물을 글썽이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아버지..."
노인은 의아해하며 어리둥절하다 감격에 겨워 답했다.
"아니 그럼 네가 바로 그 피노키오란 말이냐!"
B&B Italia는 1966년 "피에르 암브로지오 부스넬리"에 의해 설립 이후 컨템포러리 디자인 가구 업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리더로서
현대적이고 혁신적인 가구 디자인으로 깔끔한 라인과 과감한 형상, 고급 소재를 사용한 것이 특징인
대표적인 하이엔드(High-end) 리빙 디자인 브랜드다. 특히 건축가들이 사랑하는 가구브랜드로 유명하다.
Geppetto Gift Shop(제페토 기프트 샵)
피노키오는 이탈리아 직수입 제품이다. 작고 귀여운 오르골도 있고... 특이한 건 다양한 크기와 색상의 에펠탑도 판매한다.
이탈리아마을 전체 파스텔 톤의 색상과 건물구조가 이탈리아 친퀘테레(Cinque Terre)를 닮았다.
친퀘는 "다섯" 테레는 "마을"이다.
그리스에 산토리니가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친퀘테레(Cinque Terre)가 있다.
이탈리아 리비에라에 있는 절벽과 바위로 이루어진 해안이다.
그것은 이탈리아 라스페치아(La Spezia)의 서쪽에 있는 리구리아 지역에 위치하며,
친퀘테레(Cinque Terre)를 이루는 "다섯 개의 땅”은 몬테로소알마레(Monterosso al Mare), 베르나차(Vernazza),
코르닐리아(Corniglia), 마나롤라(Manarola), 리오마조레(Riomaggiore) 이상 5개의 마을이 해당된다.
다섯 마을과 주변 언덕, 해변은 전부 친퀘테레 국립공원의 일부이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다.
사람들은 몇 세기 동안 절벽을 포함한 바위투성의 가파른 지형에서 테라스를 구축했다.
개발이 되지 않은 마을은 친퀘테레(Cinque Terre)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수많은 길과 기차, 배가 다섯 마을을 연결하고, 외부 지역에서는 차를 들여올 수 없으나 매우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이다.
다빈치광장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쉐누아빈치"가 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서쪽으로 27km 떨어진 토스카나의 언덕마을이 "빈치(Vinci)"다. 볼 것 하나 없는 완전 깡시골이다.
그나마 레오나르도(Leonardo) 다빈치(Da Vinci) 생가 방문을 위해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Da는 영어의 from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고향에 따라서 청주택, 홍천댁 그렇게 이름대신 부르기도 했다.
빈치(Vinci) 출신이 몇 명이나 있었겠는가? 그들 모두가 다빈치였다. 이름은 레오나르도(Leonardo)다.
이탈리아가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성 씨가 늦게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빈치 사람 레오나르도"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다빈치광장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 또한 피노키오다.
쁘띠프랑스에서 어린왕자 못지 않게 이탈리아마을에서는 피노키오를 원없이 만나볼 수 있다.
이탈리아마을 입구에서 본 압도적인 크기의 피노키오에 비하면 아주 작지만 같이 사진찍고 추억을 남기기기에는 가장 좋다.
"코가 정말 오똑하구나!"
벽면에 그려진 이탈리아 장화지도가 빈폴 자전거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100년 전 만들어진 빈폴 자전거는 체인이 발명되기 전이라 앞바퀴에만 동력이 전달되는 구조다. 정말 귀한 물건이다.
뜨거운 우유를 탄 에스프레소 커피인 카페라떼(caffè latte)는 카푸치노, 에스프레소와 함께 가장 흔한 메뉴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에선 아침에만 먹는 음료다. 꼭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커피를 증류해서 컵에 우려낸 다음에 데운 우유를 첨가한다.
피에몬테(Piemonte)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비옥한 농토로 꼽히는 포 강 유역이 동쪽으로 확 트여 있다.
포 강 남쪽의 구릉지에서 뛰어난 품질의 발포성 포도주(아스티)와 증류주(바르베라)가 제조된다.
피노키오 마을이 이탈리아 콜로디(COLLODI)에 있다. "피노키오의 모험"을 쓴 카를로 콜로디(본명: 카를로 로렌치니)는
어머니의 고향이자 유년 시절을 보낸 이탈리아 중서부 토스카나 지방의 마을 "콜로디"로 필명을 지었다.
피렌체에서 기차를 타고 페시아역까지 가서 다시 마을버스나 택시를 타면 콜로디에 도착한다.
천여명 정도가 살고있는 시골마을에 피노키오 인형을 파는 가게부터 표지판, 동상, 벽화까지 피노키오 관련된 것들이 넘쳐난다.
빈치회랑에 가면 쓴 거대한 상반신 피노키오가 놓여져 있다. 아마 "베니스 가면축제" 퍼레이드에 활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오른쪽엔 로마 보카델라 베리타 광장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Basilica di Santa Maria in Cosmedin) 성당 입구 한쪽 벽면에 있는
진실을 심판한다고 전해지는 원형의 얼굴 앞면을 둥글게 새긴 대리석 가면인 "진실의 입(Mouth of Truth)" 작은 모형이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1953)"에서 그레고리 팩이 오드리 헵번에게 장난을 치면서 덕분에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손이 잘리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 평소에 구라좀 치고 살았다면... 손조심...손목 날아간다!
GAMBERO ROSSO Ristorante (감베로 로쏘 식당)
GAMBERO ROSSO(감베로 로쏘)는 이탈리아판 미슐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남유럽 등지에서 잡히는 고급 새우종 이름 감바로 로쏘(gambero rosso)에서 유래했다. 새우깡 봉지에 새겨진 새우의 이름이다.
심해에 서식하며, 조리 전에도 붉은 색상의 갑각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이제 이탈리아 마을에서 피노키오와 함께 또 하나의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살펴보러 간다.
Leonardo Da Vinci 500 ANS DE RENAISSANCE 1519-2019 레오나르도 다빈치 서거 500주년 특별전시회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인물 다빈치가 말년을 보내고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성트르 발 드 루아르(Centre-Val de Loire) 지역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서거 500주년을 맞아 르네상스 시대를 재현하는 축제가 올 한 해 펼쳐진다고 프랑스 관광청은 밝혔다.
수도 파리에서 약 2시간 거리에 위치한 발 드 루아르 지역은 루아르 강줄기가 흐르는 비옥한 땅으로
옛 프랑스 국왕들의 사랑을 받은 왕궁 소유지이자 휴양지였다.
국왕의 초청을 받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와 귀족들은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사상과 생활양식이 흐르는 이곳에서 새 문화와 역사를 꽃피웠다.
[2019년 4월 29일 프랑스 관광청]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 4. 15 - 1519. 5. 2)를 둘러싼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갈등은 아직 진행중...
'이탈리아인이 훔쳐 이탈리아로 가져온 걸작'
1913년 이탈리아는 모나리자를 프랑스에 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1911년 도난되고 2년 후 잠시 고향에(?) 왔던 명작은 성대한 고별 순회 전시회를 거쳐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루브르' 하면 모나리자를 떠올리고, 이 한 작품을 보기 위해 루브르를 찾는다고 할 정도다.
거기에서 오는 국가적 위상, 관광수입 등 '모나리자 이펙트'는 상당할텐데...
이 때문인지 이탈리아에선 끊임없이 모나리자에 대한 애정이 쏟아진다. 소장국가인 프랑스보다 더할 정도로...
부러우면 지는건데...
레오나르도 "피에로"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밤 3시경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의 '빈치(Vinci)' 마을에서 태어났다.
레오나르도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부모인 변호사 아버지 안토니오 피에로와 농민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아들이었다. 처음 태어나서는 어머니의 집에 살다 대여섯이 돼서 아버지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레오나르도를 돌봐준 것은 아버지보다는 숙부였고 숙부는 어린 레오나르도에게 자연과 세상을 조금씩 가르쳐주었다.
어머니 카테리나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소작농의 딸로 체르케스인 출신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아버지가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인식해 레오나르도는 14살쯤 피렌체로 이사를 가 안토니오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공방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20살이 되어 베로키오의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수로 참여해
꼬마 천사 두명을 맡았는데, 당시에 일반적이던 템페라 기법에 새로 알려지기 시작한 유화를 같이 실험해서 그렸다.
세간에는 베로키오가 그걸 보고 현타가 찾아와 화가를 은퇴했다는 야사가 전해지지만, 그 뒤에도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그림 뒤로 베로키오는 다빈치를 정식으로 화가 길드였던 성 루카 조합에 가입시켜주게 했다.
30살이 된 1482년 다빈치는 밀라노 공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밀라노 공이었던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다빈치를 지원하면서,
다빈치는 여러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암굴의 성모>나 <기마상> 등이 만들어졌고, 그 중 가장 유명한 건 <최후의 만찬>이다.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나면서 1499년에 프랑스 왕국의 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점령하고 루도비코는 프랑스에 투옥되며
밀라노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다빈치는 잠시 베네치아에서 일을 하다가 1500년 피렌체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1501년 <성 모자와 성 안나> 제단화를 그린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연구 스케치와 관찰을 남겼다. 헬리콥터나 인체비례도 등
잘 알려진 다 빈치의 과학자/기술자적 면모는 이 때의 스케치로 알게 된 것이다.
1503년에 피렌체 시청에 벽화작업을 의뢰받아 <앙기아리 전투> 작업을 시작했는데, 재밌는 건
옆편 벽에서 라이벌인 미켈란젤로가 <카시나 전투>를 작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1503년에는 그 유명한 모나리자 작업을 시작해 죽을 때까지 그림을 손에 놓지 않는다.
1506년에는 루이 12세의 요청을 받고 다시 밀라노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밀라노를 떠나는 1513년까지 다빈치는 다양한 작업과
연구를 하면서 지냈는데, 제3차 이탈리아 전쟁으로 1512년 교황이 밀라노를 공격하고 프랑스는 물러난다.
그렇게 프랑스가 떠나면서 다빈치는 교황령의 로마로 가서 교황청 작업을 주로 하게 되었지만 완성작 없이 취소되었고,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 루아르 강의 앙부아즈 궁에 기거하게 되고, 여기서 <모나리자>가 완성된다.
그러나 말년에 가면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어 그가 좋아하던 작업은 할수없게 되었으며 소일거리만 하게 되었다.
결국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직감한 그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1519년 5월 2일 프랑스의 클로 뤼세(Clos Lucé)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레오나르도는 독신인터라 그가 자식(?)처럼 아낀 제자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가 모든 재산을 상속받는다.
그의 기록은 공학, 식물학, 조경 분야 등 다방면에 이름이 남아 있다.
그러나 다빈치가 관심을 가졌던 방대한 분야에 비하면 남아있는 작품의 숫자는 적은 편이다.
게다가 본인이 작품에 서명하지 않았던 탓에 다빈치의 작품인지 아닌지 이견이 갈리며 불확실한 작품들이 많다.
거기다가 워낙 본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보니 아무데나 다빈치가 관여했다는 소문이 붙어버리는 상황이다.
예를 들면 근거가 불확실함에도 일반적으로 스파게티 면이나 포크까지 발명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자기소개서에선 대부분을 군사용 공격병기를 구상해 이야기하였고, 그림의 재능을 마지막에 소개했지만
오늘날 다빈치의 그림 실력은 그의 능력 중 높게 평가되는 부분이다.
그가 남긴 그림은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한 것들이다.
그는 그림 실력 그 자체로써도 출중했지만, 새로운 화법의 실험이라는 면에서 높게 평가할 만한 인물로,
자신의 그림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 최초로 기름을 사용한 유화를 시도한 화가들 중 하나였다.
그 결과로 모나리자에서 공기 원근법을 처음으로 구사해내는 등 좋은 결과도 여러 차례 얻어냈다.
<암굴의 성모>나 <에르마인을 안고 있는 숙녀>는 르네상스 최고의 초상화로 손꼽히는 명작들이다.
반대로 지나치게 실험정신이 투철했던 나머지 프레스코 그림에 프레스코와는 상극인 유화 기법을 써서
그림이 그대로 녹아내리는 바람에 망치는 일도 있었다(<앙기아리 전투>).
그리는 도중에 그림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그림을 빨리 말리기 위해 화로까지 동원했지만,
결국 아랫부분 일부를 제외한 작업분이 전부 녹아내리는 바람에 그대로 버려졌다고 한다.
문제는 이 작품이 미켈란젤로와의 대결작이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라는 작품을 그려내지만,
<앙기아리 전투>는 현재 라파엘로 등 다른 화가들의 스케치 모사 밖에 남아있지 않다.
<앙기아리 전투>를 너무 대차게 말아먹어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지만 실험 정신이 지나쳐 망가진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심지어 유명한 <최후의 만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최후의 만찬은 완벽주의적인 그의 성격으로 당시 유행하던 프레스코 벽화
기법이 아닌 템페라로 그려져 바로 퇴색이 시작되는 등 그의 도전이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대에 확립된 그의 천재 미술가적 이미지는 사실 그의 작품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것에 기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실제로 그가 서양사에 오래토록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금기로 여겨지던 해부를 행하는 등
여러 시도를 통해 인체의 많은 부분들을 실질적으로 관찰해냈다는 것 때문이다.
인간의 태아를 최초로 그린 사람이기도 하고 많은 해부 스케치를 남긴 바 있다.
다빈치의 스케치인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인체 비례에 대한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로 유명하다.
다만 르네상스 시대에 교회에서는 인체 해부를 공식적으로 금지한 적도 없고,
실제로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 해부쇼가 유행할 정도였으며 당시 다른 유명한 화가들도 다들 해부를 했다.
흔한 레오나르도 과대 평가 떡밥 중 하나이다. 무슨 사회적 터부를 어기면서까지 진리 탐구에 몰두하고 시대를 앞서가고 그런 건
아니란 소리다. 오히려 다빈치의 해부가 불법이었던 건 다빈치가 정규 의대생이 아니었던 탓이 크다.
그렇게 생전에 완성한 그림이 얼마 되지 않고, 성격이 괴팍하기는 했지만 그 그림 실력 하나만큼은 천재적으로,
그의 스승 안드레오 델 베로키오는 그 당시에 유명한 화가였으나,
자신이 그리던 <그리스도의 세례>를 레오나르도가 몇 가지를 덧붙였는데,
스승 베로키오가 레오나르도의 솜씨를 보고는 '다시는 물감에 손대지 않겠노라'고 맹세한 기록이 있다.
이 당시의 나이가 스무 살. 하지만 실은 베로키오가 재능넘치는 도제에게 더 많은 그림을 위임하고
자기는 수익성이 높은 조각상 제작에 전념하겠다는 사업상의 결정을 내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작품을 완성시키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밀라노의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동상을 수년간 연구만 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일도 있으며, 오스만 제국에는 젊은 시절의 그가 메흐메트 2세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메흐메트 2세가
그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제작기간에 질려서 돌려보냈다는 식의 설화도 있을 정도였다.
이외에도 오스만 제국 보스포루스 해협에 다리를 디자인했는데 당시 기술로서는 도무지 이게 만들 수 있냐고
오스만 제국 황실에서 부정적이라 끝내 이뤄지지 못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냥 평범하게 나무로 길쭉한 다리로 만들어진다.
요즘에는 한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그림에 손을 대었던 것이 성인ADHD의 증상이 아니었나 하는 해석도 있다.
물론 모두 본인의 잘못은 아니었는데, 예를 들면 체사레 보르자에게 인정받아
도시 계획의 총책임자급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지만 체사레가 몰락한 탓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훌륭한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에 비해 다빈치는 건축 분야에서 뚜렷한 결과물을 남기지 못했다.
건축면에서 큰 발전이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인 만큼 레오나르도 역시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에서 건축 자문으로 활동하며 건축에 관련된 스케치를 다수 남겼지만,
레오나르도 본인이 독자적인 건축가로 활동하지는 못했다.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의 샹보르 성의 이중 계단에 대한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남겼고,
이 성의 건축가였던 도메니코 다 코르토나가 그것에 따라 설계했다는 설이 유명하지만
레오나르도가 그에게 그림을 넘겼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학자, 요리사, 수학자였으며, 키 194cm 외모도 빼어났다.
키를 보면 알지만 완전 장신이다. 2016년 현재에도 194cm면 남녀노소를 막론한 장신이다.
재능만도 막장인데 위너에 얼굴까지... 완전 15세기의 엄친아였던 것이다. 공학,식물학,조경 분야에도 이름이 남아있다.
그의 IQ 지수는 205에 달한다고 전해지는데... 물론 현대적인 IQ 계산법으로 계산된 것이 아닌 수치지만...
사실상 현대 IQ테스트 수치로 측정해도 180은 거뜬히 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자기소개서에선 그림의 재능을 마지막에 소개했을 정도고, 대부분을 군사용 공격병기를 이야기했다.
레오나르도가 어떤 인물을 그리고자 할 때면 그는 가장먼저 그의 성격과 본성을 고려했다.
즉, 그 사람이 귀족이냐 평민이냐, 활기찬가 진지한가, 고민이 많은가 행복한가, 젊은가 늙은가, 성격이 급한가 침착한가,
호의적이냐 악의적이냐와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것들에 대해 결심이 서면, 그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많이 찾을 수 있는 장소로가서 그들의 얼굴, 행동, 옷,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필요하다 싶은 것이 눈에 띄면 벨트춤에 항상 차고 다녔던 작은 책을 거내 펜으로 스케치를 했다.
이것을 아주 많이, 여러번 반복하면 아주 많은 양의 스케치들을 모으게 되었고, 따라서 그가 그리고 싶어하는 사람에 대해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음에는 그 그림들을 정교하게 그리는 데 집중하면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경이로운 성공을 해냈다.
"진실로 인간은 동물의 왕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잔인성이 동물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통하여 살아가는 살아있는 묘지이다. 나는 어렸을 때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며, 내가 그랬듯이 다른 사람들도 동물 살해를 살인과 똑같이 여길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을 남길만큼 동물들을 사랑했고 전쟁을 경멸한 사람이었다고도 전해진다.
무기를 디자인하긴 했지만 이건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미켈란젤로보다 한창 연장자지만 호승심(好勝心) 가득찬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를 존경하는 선배라기보다는 강력한 경쟁자로 인식했다.
비해서 그들보다 연하인 라파엘로는 명작 아테네 학당을 그리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를 모델로 삼아 존경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흔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양성애자였다는 것이 정설이며 본인도 이를 별로 숨기지 않았다.
실제로 1476년의 법정 기록을 보면 세 명의 젊은 남성과 같이 동성애로 기소된 전력이 있다.
세 명의 젊은 남성과 같이 동성애로 기소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기록이 있다.
죽을 때 작품들과 땅 유산은 제자 겸 연인이었던 멜지에게 전부 상속시켰는데...
사실 이 사람이 게이였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모른다.
2014년 10월 26일에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모나리자의 모델이 레오나르도의 제자이자 동성연인인 안드레아 살라이(Andrea Salai)일 것이라는 가설을 다루었다.
레오나르도의 동성애에 대해 해석한 프로이트의 논문이 있다.
굉장히 특이한 필기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좌우를 반전시켜 기록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제대로 읽으려면 반드시 거울을 옆에서 비춰야 했다.
이 필기 양상을 '거울형 글쓰기(mirror writing)'라고 불리는데, 현대에도 드물지만 이런 필기 양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다빈치코드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글을 쓸 때 본인만 알아볼 수 있게 속필로, 그것도 거꾸로 써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다빈치가 남긴 저작물은 이리저리 돌려보고 단어 하나 하나 유추해서 봐야 한다고한다.
어렸을 때도 비범해서 아버지의 친구가 방패에 무서운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괴물을 그리기 위해 살아있는 동물들을
산 채로 해부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는 나중에 인체 비례도를 그릴 때 시체보관소에 틀어박혀 인체를 연구하는 계기가 된다.
2010년 6월 20일에 신비한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Surprise Secret에서는 그가 요리사 활동한 적이 있다고 한다.
2014년 11월 30일자 서프라이즈에서는 그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그림이 후세에 그려진 가짜라는 주장을 다루었다.
레오나르도의 모작을 업으로 하던 화가가 가짜 자화상을 그려서 사기를 치자는 음모에 가담해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속 플라톤의 얼굴을 토대로 그린 것이고,
그의 다른 초상화와 비교해 봐도 얼굴에서 차이나는 부분이 많은데다 그만의 빗금선의 특징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다른 초상화는 비교적 샤프한 인상인 데 비해 후덕한 편이기는 하다.
198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발견된 코덱스 로마노프가
레오나르도가 남긴 요리에 관련된 문서이다. 이 내용은 EBS 지식채널e 에서도 다뤘다. 상당히 개그스러운 에피소드다.
갈릴레오보다 100년 먼저 중력 실험 연구를 하였다는 스케치가 해독이 되었다.
해당 스케치에는 이탈리아어로 '운동의 등가성'이라고 적혀있는 등 당시의 수학전 수준이나 실험도구가 부족한 시대였음에도
중력 가속도의 개념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레오나르도는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은 이성을 잃고 미쳐버린 짐승과 같다."라는 말을 할 만큼 전쟁을 싫어했다.
하지만 정작 그러면서도 여러 개의 포탄을 한꺼번에 쏘는 "오르간 건" 같은 최신형 무기들을 만들어서
여러 귀족들한테 납품을 했다.
전쟁이 좋다기보다는 자신의 천재성을 귀족들한테 보여주는 용도로 일부러 무기들을 만들어 보내는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레오나르도는 전차 같은 현대 무기들의 원리를 이미 고안해 내기도 했다.
다만 그가 살았던 시기에는 과학 기술이 지금보다 발달하지 않아서 그가 고안해낸 지 수백 년 후에야 실용화되었다.
"Birth of Venus(비너스의 탄생)" 1485년,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
"The Last Supper(최후의 만찬)" 1498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밀라노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The Mona Lisa(모나리자)" 1503-1506년, 루브르 미술관, 파리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다빈치가 활동하던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종이들을 묶어 책으로 만든 필사본을 코덱스(Codex)라고 불렀는데
다빈치가 남긴 코덱스들은 전 세계 박물관이나 도서관에서 보관되고 있다.
다만, 1995년 마이크로소프사 회장 빌게이츠가 '코덱스 레스터(Codex Leicester)' 원본을 3500만 달러(한화 약 350억원)에
영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구입하여 개인 소장하고 있다.
역시 왼손잡이인 빌게이츠가 남다른 애정을 느낀 듯 하다.
코덱스 레스터에는 그 유명한 헬리콥터, 잠수함, 낙하산 등의 설계도가 그려져 있다.
모나리자 그림의 탄생은 나이든 다빈치가 젊은 미켈란 젤로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에서 나온 걸작이라는 놀라운 사실...
다빈치가 해부학과 발명에 몰두하여 한동안 미술을 등한시 하던 중
혜성같이 나타난 이탈리아 미술계에 등장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던 미켈란젤로가 급기야 다비드상으로 인기가 급상승하자
이에 대한 질투심에 다빈치가 다시 붓을 잡아서 그린 그림이 모나리자다.
이탈리아 "아말피(Amalfi)" 포토존이 있다.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마을의 어느 옥상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전경을 구현한 곳이다.
아말피는 원래 자체 공화국이었는데 로마 제국에 의해 편입되었다.
이 아말피를 통해 제일 처음으로 외국의 카펫, 커피, 종이 등이 들어왔다.
아말피 출신의 가장 유명한 사람은 뱃사람들에게 가장 유용한 컴파스(compass)를 만든 플라비오 지오이아다.
두오모(Amalfi Duomo Cathedral)는 아말피에서는 가장 유명한 건물이다
9세기경에 건축되어 로마네스크로부터 고딕양식까지 계속 증개축되었다.
내부에는 아말피의 수호 성인인 예수의 제자였던 성 안드레아가 묻혀있다.
이 건축물이 유명한 이유는 아랍과 노르만 스타일의 건축 구조 때문이다.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길이 만만하지는 않다.
바로 두오모 옆에 있는 종탑은 이탈리아 내에서도 정말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완전히 아랍 스타일의 건축물로 12세기에 만들어졌다.
두오모 광장(Amalfi Duomo Square) 주변으로 상점이 많으며 레몬이 특산품이라 온 도시에 레몬 향기가 가득하다.
* 아말피 해안 감상
나폴리 관광의 목적은 나폴리뿐만 아니라 아말피 해안을 감상하려는 것이다.
아말피 해안은 정말 아름답다. 아말피 해안을 아주 잘, 그리고 가장 경제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소개한다.
1. 소렌토의 기차(국철이 아닌 사철)역 아래에서 아말피행 버스를 탄다.
2. 다시 아말피에서 내려 살레르노행 버스를 탄다.
3. 버스를 탈 때에는 반드시 버스 진행 방향에서 오른쪽 창가에 앉는다.(운전석이 없는 쪽)
4. 그리고 반드시 제일 앞 좌석(버스 정류장에서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에 앉는다.
5. 버스가 출발하면 아래쪽으로 펼쳐지는 구불구불한 해안 절경은 때때로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아슬아슬하다.
[출처: 다음백과]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죽기 전에 가봐야 할 50곳"으로 선정하여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나폴리 만에서 살레르노 만까지 이어지는 해안을 따라 곳곳에 숨어 있는 아기자기한 마을들이 아름답다.
가장 유명한 마을은 소렌토와 포지타노, 아말피이며 보통 나폴리를 기점으로 여행이 시작된다.
아말피 해안 여행의 종착점인 도시 아말피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탈리아의 4대 해상국 중 하나였다.
나폴리에서 여행을 시작한다면 아말피 여행까지 기차와 버스를 무제한 사용이 가능한 아르테 카드를 구입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로마에 숙박을 하면서 이탈리아 남부투어를 하면 폼페이-소렌토-아말피해안 이렇게 당일치기 코스로 되어 있다.
또는 나폴리에서 당일치기로 하루만에 돌아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된다면 마음에 드는 도시에서 하루정도 숙박하며 여유롭게 돌아보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이제 지하2층에서 4층 다빈치 전망대로 이동한다.
다빈치 전망대는 시계탑의 외관과 더불어 아말피 두오모 성당(Amalfi Duomo Cathedral)의 모습을 닮았다.
비록 아말피 해안이 내려다 보이지는 않지만 바다대신 청평호가 보인다. 수려한 산세와 더불어 충분히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말피 두오모 광장(Amalfi Duomo Square)에서 아말피 두오모 성당(Amalfi Duomo Cathedral)을 올려다 보는 것과 반대로
다빈치 전망대에서 다빈치 광장을 내려다 본다.
다시 다빈치 광장으로 내려왔다.
까라라(카라라) 갤러리(Carrara Gallery)에 도착했다.
까라라(카라라, Carrara)는 이탈리아 중북부 토스카나 마사(Massa)의 바로 북서쪽, 라스페치아(La Spezia)의 동쪽,
알피 아푸아네(Alpi Apuane) 산기슭을 흐르는 카리오네 강 유역에 있다.
1428년 말라스피나 가문의 지배를 받으면서 마사와 더불어 마사카라라 공국(1568)과 마사카라라 공작령(1633)이 되었다.
피사 양식의 12~14세기 대성당과 옛 공작 궁전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 등이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도시 부근에서는 카라라라고 하는 세계에서 품질이 가장 뛰어난 대리석이 채석되는데,
미켈란젤로에서 헨리 무어에 이르기까지 많은 조각가들이 이 대리석을 사용했다.
남서쪽으로 바로 인접해 있는 마리나디카라라(Marina di Carrara)는 리구리아 해(Ligurian Sea)의 해변 휴양지이며,
대리석을 취급하는 항구시설들이 갖추어져 있다.
이탈리아 카라라 국립미술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in Carrara)는 대리석 채석장과 연계하여 조각과가 특히 유명하다.
"보호자" 조르주 고리(Georges Gori) 아르데코(ART DECO) 스타일 청동 조각상, 프랑스 1930년경
가장 화려한 재료를 아낌없이 투자했던 아르데코 스타일은 대공항과 나치즘 바람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창조적인 영감을 건네주고 있다.
여자의 시대라 불리던 아르데코의 짧은 30여년은 큐비즘이나 야수파, 추상주의 등의 현대 미술 사조의 걸작들과
샤갈, 피카소, 자코메티 등의 예술가들도 낳았다.
호텔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 한 번쯤은 해봤거나 해보고 싶은 디자인이 바로 아르데코 스타일이다.
프랑스 소설가 뒤마(Dumas)의 말처럼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아름다운 물의 도시 "베네치아 마을"을 조성해 놓았다.
베네치아는 수상 도시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 원래부터 수상에 지은 것은 아니며,
현재 116개의 섬들이 409개의 다리들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동남아의 수상 가옥과는 다르다.
베네치아에 왔다면 곤돌라 한 번쯤은 타볼 만하다.
약30분정도 소요되는 여정인데... 비쌀 것이라 생각하지만 합승제여서 여러 명이 같이 타면 큰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곤돌라 사공, 곤돌리에레(Gondolière)의 16세기 성악 칸초네(canzone)를 들으며
유유자적 즐기는 곤돌라 투어는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베네치아는 철저하게 풍경 중심인 도시다.
로마, 피렌체 등의 경우는 부지런히 박물관을 다녀야 하지만
베네치아, 나폴리 등의 도시는 천천히 산보하듯이 몸의 긴장을 풀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면 되는 곳이다.
무엇을 구하러 오면 실망을 하고, 쉬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것을 안겨준다.
베네치아를 방문하기 제일 좋은 계절은...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다.
엶에 가면 뜨거워 돌아다니기도 싫고 무엇보다도 상점 주인들이 다 놀러 가 버리기 때문에 문이 닫힌 상점도 많다.
그런데 겨울에 가면 운하의 물이 넉넉해서 좋고 약간은 쓸쓸함을 느끼기에도 더없이 좋다.
베네치아는 복잡해도 치안은 좋다. 나폴리처럼 좀도둑은 별로 없다.
이곳은 고급 휴양지이기 때문에 치안이 철저해서 좀 지저분하게 보이는 애들은 무조건 경찰들이 불심검문이다.
이곳에 동양 노동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옷은 깨끗하게, 외모는 단정하게 하고 다니는 것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방법이다.
베네치아는 보통 하루 만에 다 볼 수 있는 곳이긴 하지만, 하룻밤을 보내면서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운치를 느껴보는 것도 좋다.
베네치아는 지금부터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도시 존재의 원천이었던 바닷물에 잠겨 영영 사라질지도 모를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맞닥뜨렸다.
매우 비관적 시각의 연구자들은 21세기 말이면 베네치아 섬의 90% 이상이 물속에 잠길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베네치아 침몰’의 결정적 원인은 바로 ‘해수면상승’이다.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산업화에 따라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되었고,
지구온난화로 대표되는 기후변화는 남북극과 고산지대 등 지구 극지의 얼음을 녹여 해수면을 걷잡을 수 없이 상승시킴으로써
베네치아 같은 저지대 도시들을 집어삼킨다는 것이다.
특히 베네치아는 애초에 물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바닷물 만조 때의 해발고도가 높아 봐야 1m 이내의 저지대라는 게 결정적 취약점이다.
한편, 베네치아가 해수면상승의 결과로 ‘침몰’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유일한 교통로인 내부 운하, 즉 물길이 가끔 말라 들면서
곤돌라와 수상버스 등 수상운송수단이 마비되곤 하여 베네치아는 이래저래 물로 인하여 극심한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평소 같으면 썰물 때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강인 포강 등 알프스 산맥 이남 이탈리아 북부의 풍부한 강물이
베네치아섬을 둘러싸고 있는 석호(潟湖)로 흘러들어 곤돌라가 다니는 뱃길인 골목 운하에 물을 대어주는데
극심한 가뭄으로 이탈리아 북부의 강물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올 2~3월 한때 일부 지역에서는 곤돌라 물길이 말라버리기도 했다.
이에 따라 골목 운하마다 곤돌라들이 시커먼 갯벌에 배를 깔고 멈춰있는 진풍경이 여기저기 펼쳐졌다.
물론 곤돌라가 멈춰 서면 베네치아의 교통은 그대로 마비된다. 베네치아는 육상 차량 교통수단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출처: 내외신문 김시월 기자]
이제 토스카나(Toscana)의 전통주택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티레니아 해에 면해 있으며, 마사카라라·루카·피스토이아·피렌체·리보르노·피사·아레초·시에나·그로세토 주로 이루어져 있다.
이탈리아 북부 지방과 이탈리아 반도에 걸쳐 있는 전이지대로 옛 토스카나 대공작령과 거의 일치한다.
북쪽과 북동쪽으로 토스코에밀리아노아펜니노 산맥과 아푸아네알프스 산맥이 경계를 이루며, 이 두 산맥 사이로
아펜니노 산맥의 지맥을 이루는 알바노 산과 프라토마뇨 산맥 등에서 뻗어나온 기다란 계곡들이 연속해서 늘어서 있다.
시에나 남쪽에는 메탈리페레 고개, 아르젠타리오 산, 아미아타 산 등과 같은 척박하고 고도가 높은 산악고원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 지방에서 저지대는 아르노 강 유역을 비롯한 내륙의 강 유역지나 마렘마와 같은 해안평야지대에서 나타난다.
토스카나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번창한 농업지역 가운데 하나로
밀을 비롯한 곡물, 올리브와 올리브유, 포도주 생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빈티지 가구로 꾸며진 내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응접실부터 주방, 침실 등 주택 내부의 빈티지 가구와 각종 소품,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탈리아에서 이렇게 주황색으로 넘쳐나는 도시는 바로 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로마냐 주 "볼로냐(Bologna)"라는 곳이다.
피렌체에서 북쪽으로 레노 강과 사베나 강 사이에 위치한다.
BC 190년경 로마가 식민지가 되었으며 12세기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권리를 인정받으면서 자유로운 자치시가 되었다.
1506년 교황령에 합병된 후 300년 이상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볼로냐는 이탈리아 중부·남부·북부 간의 대부분 교통이 반드시 통과하게 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도로·철도의 중심지이다.
지금도 중요한 농산물시장이자 식품가공 중심지이면서 한편으로는 중요한 공업요지로 발전해왔다.
공산주의 운동세력이 강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래로 공산주의자들이 지방행정을 장악해왔다.
"콜로디(Collodi) 광장"에는 중앙에 시원한 분수가 자리하고 있다.
피노키오 모험의 작가인 카를로 로렌치니는 어머니의 고향이자 유년 시절을 보낸 이탈리아 중서부 토스카나 지방의 마을
"콜로디"로 필명을 지었을 만큼 콜로디에 대한 애정이 컸다.
콜로디에 가면 피노키오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마리오네트 극 "피노키오의 모험" 공연을 관람하는 피노키오 극장이 있다.
피노키오의 모험은 월요일, 금요일, 그리고 주말과 공휴일에만 진행한다.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은 공연하지 않는다.)
공연 중 다른 관람객들에게 방해가 될 수 있어 사진촬영이나 동영상 촬영을 못하게 한다.
고프로10으로 불빛없이 촬영을 했더니 화면도 작고 엉망이긴 한데... 그래도 소리는 잘 들린다.
이제 "피노키오의 모험관" 관람을 시작한다.
당나귀로 변한 피노키오가 일하게된 서커스단의 단장으로 피노키오를 채찍질하며 서커스를 시킨다. 완전 무섭게 생겼다.
서커스단장은 "돈에 눈 먼 어른"의 표본이다.
동화의 원제는 피노키오의 모험, 꼭두각시 이야기(Le avventure di Pinocchio. Storia di un burattino)로 1881~1882년 동안
총 36회차로 로마 지역 어린이 신문에서 연재되었다.
콜로디가 로마 지역 어린이 신문에 피노키오를 연재하면서 원고료를 지급받지 못하자
콜로디가 홧김에 피노키오가 강도에 의해 나무에 매달려 죽게 되는 잔혹한 내용의 결말로 완결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결말 후 여러 독자들의 항의와 담당 편집자의 설득 및 신문사에서 밀린 원고료를 지급하면서
콜로디는 결말 내용을 다시 수정하여 피노키오가 사람이 되는 해피엔딩으로 완결하였다.
이후 원래 동화책으로 만들 예정은 없었지만, 인기가 매우 좋아서 연재를 마친 이듬해인 1883년에 책으로 출판된다.
옛날 옛적에 나무토막이 하나 있었다.
고급스런 나무도 아니다. 장작더미에서 나온 그저 그런 나무토막이다.
추운 겨울날, 방을 따뜻하게 데우려고 난로에 넣는 나무 말이다.
<소설의 첫부분>
월트 디즈니의 피노키오 생김새가 워낙 유명해서 "피노키오"라고 하면 대부분 디즈니 피노키오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원작 본문에도 제페토가 빵껍질로 모자를 만들어주었다는 구절이 있기도 하고
디즈니의 피노키오는 원작묘사를 비교적 충실히 따른 셈이다.
그런데 정작 이 원작이 이탈리아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을 때 표지에는
대머리 나무 인형이 파란머리 선녀와 함께 그려져있었다...ㅋㅋㅋ
피노키오 전망대에 올라가 보았다.
이탈리아 마을의 시작이었던 베니스(베네치아)를 대표하는 성당 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 a Venezis) 꼭대기다.
이탈리아 마을이 처음에는 넓어 보였는데 전망대에 올라와 보니 결국 이렇게 저렇게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덕 위에 자리한 이탈리아 마을에서도 높은 전망대이다 보니 쁘띠프랑스 너머 청평호가 내려다 보일 정도로 시야확보가 넓다.
통로가 조금 좁긴 해도 나름 이곳 저곳 내려다 보는 재미가 있었다.
"고래수족관"이라고 해서 나름 기대하고 찾아갔는데... 물은 없는 수족관이다. 월트디즈니의 힘은 위대하다. 상어가 고래로...
피노키오는 서커스단에 팔려가 재주를 부리다가 한쪽 다리를 부러뜨렸고, 한 남자에게 팔려간다.
남자는 당나귀의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려고 피노키오의 목에 줄을 매달아 바다에 던졌다.
시간이 흘러 당나귀가 죽었으리라 생각한 남자가 건져올려보자 당나귀는 온데간데없고 웬 나무 인형이 매달려 있었다.
피노키오는 죽은 물고기들이 다 물어뜯어 먹어치웠다고 말해 주고는 헤엄쳐서 달아나 버렸다.
한참을 헤엄쳐가던 피노키오는 한 작은 섬에서 자신을 부르는 파란 새끼양을 보게 되었고 요정을 떠올린 피노키오는
필사적으로 섬을 향해 헤엄쳐갔으나, 어디선가 나타난 거대한 상어가 피노키오를 한 입에 삼켜 버렸다.
피노키오는 상어의 뱃속에서 참치를 만나고, 그저 소화되기만을 기다린다는 참치를 뒤로 하고 상어의 뱃속으로 걸어들어갔다.
피노키오는 상어의 뱃속에서 제페토를 만났다.
제페토는 상어에게 통째로 삼켜졌으며, 상어는 그 다음 웬 상선을 하나 집어삼켜서, 그 상선 물건으로 2년동안 연명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피노키오는 함께 달아나자고 말하며, 상어가 자는 사이에 상어의 입을 통해 탈출하려 했다.
한 번은 상어가 재채기를 해 다시 뱃속으로 굴러떨어졌으나, 용기를 낸 둘은 마침내 상어의 뱃속에서 탈출해 육지로 헤엄쳐갔다.
디즈니 때문에 흔히 고래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상어다.
내가 읽은 동화가 눈앞에 실제로 펼쳐진다면 어떨까?라는 상상의 나래가 실사판으로 펼쳐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쁘띠프랑스의 어린왕자가 그렇고... 이탈리아망을의 피노키오가 또한 그렇다.
그래서 비록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장소로 남을 수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기분으로 방문하는 입장엔 어린왕자와 피노키오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대해서 사전지식을 갖고 방문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보면 어쩌면 적절한 타협점을 잘 찾아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야외공연장에서 마리오네트 퍼포먼스 공연을 할 시간이 되어서 제일 앞에 자리를 잡았다.
손인형극 기뇰 "빨간망토소녀"는 쁘띠프랑스 떼아뜨르별 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줄인형극 마리오네트 "피노키오의 모험"은 이탈리아 마을 피노키오 극장에서 공연을 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야외공연장에서는 마리오네트 퍼포먼스 공연도 진행을 한다. 정교한 줄 조종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분명 사람이 줄로 조종한다는 사실을 알고 보는데도 인형에 집중해서 보며 감탄을 하게 된다.
팝의 황제 마이클잭슨의 공연이 시작되고 어떤 춤동작이 나올 지 다 예상이 되는데도... 여지없이 감탄이 객석에서 흘러나온다.
프레디 머큐리의 공연도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처음에는 쿵푸 할아버지인줄...ㅋㅋㅋ
웃고 즐기는 사이 공연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렸다. 인형이었지만 그래도 마이클 잭슨과 프레디 머큐리도 반가웠다.
프랑스가 생각나고 이탈리아가 생각날 때 또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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