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 출근길 외 6편
출근길
빠지면 죽을 수 있다는 생각
깊이란 도랑과 강의 차이
깊이 없는 하루가 겨우 연명 된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누고 나면
휘휘 휘젓는 생각
나는 깊이가 없어서
금세 흙탕물이 된다
할짝할짝 물을 핥는 길고양이
해골 물이라 해도 토하지 않을
심연을 지니고 있다
깊이가 나를 피해 달아난다
꼬리를 치켜들고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표창을 날린다
어떤 유리도 깨지 못하고
툭 떨어지는 명함
다른 얼굴을 빌려줄 것도 아니면서
빌려주겠다고 빌리라고 빌다시피 하는
이 하루를 빌려 쓰고 나면
하루 뒤에 하루, 하루 뒤에 하루
내가 갚아야 할 건 뭘까
얼굴 대신 헬멧을 빌려 쓰고
달려 볼까 부릉부릉 저 깊은 곳으로
급류를 타고 곤두박질치더라도
아름다워라
천년도 넘게 잎이 떨어지고 있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잎을 맞으며
합장하는 사람이 있다
곧 앙상해질 나무에 기대 우는 사람이 있다
돌에 돌을 얹는 사람
낙엽을 주워 책 사이에 끼우는 사람
여기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사람에게는 못하고
나무에게 돌에게
아무도 이 나무에서 목을 매지 않았다
믿는다
나무가 주는 위로가 플라세보 효과라 해도
플라세보 플라세보 풀풀 가볍게
마음에는 진짜가 없으니까
노란 잎이 노랗게 떨어진다
천년을 살고도 다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나무에게
사람들이 몰려온다
아름답다고
아름다운
나무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돌아서며
쓰러진다 노랗게 쓰러져도
아무도 그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무수히 떨어지는 은행잎인 줄 알고
쌓이고 쌓이는 낙엽인 줄 알고
우리 비행기
무리하지 마라
너는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누군가에겐 사는 게 무리일 수 있다고
차마 말하지는 못하고
어제 누리호가 우주로 날아갔다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
지구 어딘가 안 보이는 곳에서
어떤 계시도 없이
하루의 포장지를 뜯는다
나는 비행기를 조종할 줄 모르는 파일럿
시인이 별을 서랍에 넣어 두듯이
비행기를 모으는 것뿐이다
종이비행기 오래 날리기 대회에서
28초면 세계 신기록
단 몇 초를 날아오르기 위해
무수히 추락하는 비행기를 만든다
비행기와 종이비행기가 다 같은 비행기라고
너는 믿고 있는 걸까
나에게 계속 날아 보라고 하지
위로와 격려가 섞인 짜증 같은 것
날아간다 날아간다
그래도 10초
쫙쫙 찢어버린다
그것은 기억 그것은 오늘 어쩌면 미래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다시 날려도 노래가 끝나기 전에
휘익 휘리리 곤두박질치는
깜빡깜빡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감기약은 매번 눈을 감기지
거실 등이 깜빡거린다
led 등은 어떻게 갈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모르는 것이 늘어난다
아이스크림 가게 키오스크 앞에서
숫자 초를 사려면 무얼 눌러야 할지 몰라
4와 9 대신 13개의 초를 들고 왔던 것처럼
눈을 깜빡거리며
어디에 연락해야 할까
의자 위에서 팔을 뻗어 등을 갈던
형광의 눈부신 순간을 떠올리며
전화기를 뒤적인다
누가 나를 보고 있다면 아마도 나는
하루하루 능력을 잃어가는 마법사
혹은 기억을 잃어가는 실험쥐
안경을 벗으면 안 보이는 세계가 보인다
경계가 흐려지는 건 한 순간이다
어서 전화를 해야지
통째로 뜯어내고 갈아버려야지 빛을 위하여 빛을
led 등의 수명은 얼마나 되나요?
형광등보다 오래 가긴 해도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는 등 아래서
촛불을 켠다 훅, 불어 끄기 위해
Happy birthday Happy birthday
차가운 케이크 위에서
너무 많은 초가 한꺼번에 타오른다
아침 거미
아침에 거미를 보면 재수가 있다고
아침 거미는 죽이지 않는다.
거미에게는 정말 재수 좋은 날이겠다.
근거 없는 믿음이 죽음을 피하는 쪽으로
창을 여는 아침.
언니는 왜 아침 거미가 되지 못했을까, 생각하다
밤이 되면 다 밤 거미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다. 늦다. 자꾸 늦어져서 아침이 지나고
죽음의 눈에 띌까 봐 총총 걸어간다.
빌딩 외벽 청소부가 추락했다는 기사가 떴다.
몰라도 되는 소식이라고 폰을 닫으려는데
친구 아버지의 부고가 열렸다. 친구의 부고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일을 마치고 검은 옷을 입으러 집으로 간다.
태풍이 오고 있다. 발인 때 태풍이 오면 어쩌지.
유족처럼 걱정을 해도
나는 유족이 아니고.
아침에 봤던 거미일까.
대롱대롱 매달린 해를 녹여 먹고 있다.
벌겋게 허물어지는 하루.
하나뿐인 검정 외투의 단추가 떨어졌다.
나무 아래 벤치
너는 옹이를 딛고 올라가고 싶다.
가지에 앉아 숨어 있기 위해서.
무엇으로부터 숨으려는 걸까.
내가 묻기도 전에
스키니 바지가 죄다 작아져서
오늘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왔어
너는 이야기하며 계속 올려다본다.
보고 있으면 몸이 떠오를 것처럼.
괴애액 괴성을 지르며
크고 하얀 새가 날아와 앉는다.
비현실적이다. 도심에서 고함지르는 하얀 새라니.
그러나 새는 바로 위에 있다.
하늘이 어두워진다.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게 무언지 생각나지 않고.
새가 되면 좋을까, 너는 묻고
나는 새들에게는 새들의 고난이 있을 거라고
말하고 만다. 그렇게 말하지 말 걸
금세 후회하지만.
왜 저렇게 큰 소리로 우는 걸까.
새가 곡을 하는 것 같다.
어둠 속에서 어째서 하얀색일까.
무서운 게 없는 걸까. 숨지 않아도 될 만큼.
새똥이 떨어지는 건 아닐까, 내가 위를 쳐다보는 동안
유행이 다시 돌아오고 스무 살처럼 살을 빼서
스키니 바지를 다시 입을 수 있을지에 대해
너는 이야기한다.
마치 그럴 수 있을 것처럼.
물의 문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은 누구의 노크였을까. 아버지의 배에는 물이 자라고. 아이를 가진 것처럼 부푸는 배. 물의 아이가 응애 응애 울었던가. 울음소리를 듣고 집으로 흘러드는 강. 물과 물이 안팎에서 서로를 부를 때 물을 모르던 우리는 끝없이 허우적거리고. 그 틈에 아버지, 물에 쓸려 돌아가시니 가신 이를 어이할꼬. 무거운 강은 제집인 듯 눌러앉고. 나무토막 타고 오빠는 서울로 가고. 물속에서 숨을 참던 언니가 동그랗게 입을 열고. 벙긋벙긋 그 많은 강물을 끌고 나가는데. 어디로 가는 거야, 어디로 가는 거야. 따라 나가도 젖은 밤이 길을 막아서고. 똑 똑 물방울이 머리칼을 적시고 얼굴을 타고 내리는데. 뒤를 돌아보니 집이 둥둥 떠가는데. 집에서는 언제까지나 엄마가 염불을 외고. 밤이 다 내려도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모르고. 열기만 하면 쏟아질 것 같아 문고리를 잡고 다닌다. 문을 덮고 누우면 가슴이 눌린다. 밤마다 똑 똑 누가 문을 두드린다.
변영현_2021 경상일보 신춘문예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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