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렴 그정도일까 싶은데 마이클 하트는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 : 랭킹 100』에서 수문제 양견을 역사 발전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 100명 중 하나(82위)로 꼽고 있다. 100명 중 동아시아 인물은 일곱 명인데, 수문제의 영향력 순위는 진시황보다는 낮으나 마오쩌둥보다는 높다. 우리한테는 괘씸하기 이를데 없는 비호감이라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싶은데 서양사학자들은 그를 샤를마뉴와 비교하며,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문명권(유럽·중국)을 통일했다는 점에서 역사에 미친 영향이 크다고 말한다. 덧붙여 샤를마뉴가 유럽의 일부만 통일했고 그의 사후 유럽은 곧 재분열된 반면, 수문제는 중국을 모두 통일했으며 이후 통일 중국 체제가 지속된 점을 보면 수문제가 보다 더 역사적 중요성이 크다고 말한다.
역사는 객관적 접근이 사실 중요하다. 우리와 연관지은 사람이라 우리 눈에는 달리 보이지만 그렇다고 왜곡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런 그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원래 한 나라를 창시한 사람은 그가 죽은 후 부쳐주는 시호가 대개 태(太)나 고(高)자를 써 그 높은 뜻을 기린다. 이에는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서는 무력의 지원이 필수적이고 따라서 문치를 통해 나라를 세우기란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일 것인데 그 한테는 글월 문(文)자가 들어가 있다. 그렇다고 문을 앞세운 인물이 아니고 오히려 누구보다도 무력에 힘입어 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어쨌거나 그는 6세기 말 위진 남북조 시대로 나누어진 혼란기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을 통일한 사람이다.
양견(楊堅, 541~604년)은 17세가 되던 557년에 아버지 영충이 우문각의 쿠데타를 도와 북주를 성립시키는 데에 도움을 준 덕에 승승장구했다. 혼인을 통해 든든한 지지기반까지 마련한 양견의 입지는 더욱 굳어졌다. 그는 일종의 영약한 술수에 능했으며 재수도 억세게 좋은 인물이다. 당시 그는 그의 딸이 선제(宣帝)의 황후가 되었기 때문에 남북조 시대의 한 나라인 북주(北周) 왕실의 외척으로 할일없이 지냈는데 사위란 자 ( 선제란 인물)가 참으로 한심한 자여서 즉위한 이듬해 제위를 태자 정제(靜帝)에게 물려주고는 밤낮 환락만을 추구했다.
그런데 그는 그때부터 이씨조선의 대원이 대감처럼 빛을 발하여 몇 년에 걸친 공략 끝에 589년 천하통일을 완성한다.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가 한 일은 의외로 많다. 중앙집권책을 강화하여 지방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의 군사력을 강화시켰으며 능력보다는 가문과 문벌, 친소 관계 등에 따라 관리 등용이 이루어졌던 과거제도를 뜯어고쳐 기득권층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중국 전역에 걸친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하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제도로 싹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는 훗날 동북아시아 전 지역으로 확산된 뛰어난 제도가 되었으며 훗날 신라나 발해에 똑똑한 젊은이들까지도 당나라에 급제를 하기위해 밀려오는 등 성황을 이루는 결과도 낳았다. 우리가 잘 아는 신라의 최치원도 당나라 장원 급제 출신이다.
그래서 그토록 폭력적인 양견임에도 이 업적을 높이 사서 문제라는 시호가 주어진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그밖에도 그는 사치를 엄격히 금지하고, 솔선해서 반찬 하나로 식사하며 낡은 옷을 그대로 입었다. 궁녀들이 화장을 하거나 비단옷을 입는 것도 단속했으며 엄격한 법 집행 원칙을 세워 불법을 저질렀으면 황족이라도 용서하지 않고, 자신을 모독한 사람이라도 법조문에 규정된 이상으로 처벌하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일을 하여 훗날 당나라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대운하건설이다. 그로 당나라는 정관의 치라는 명예를 얻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하북 지방은 땅은 크지만 곡물이 부족한 대신 목축업이 발달했다. 반대로 하남지방은 농업은 발달했지만 목축은 위축되었다. 문제는 이런 불균형을 해소해야만 균형 잡힌 제국의 통치가 가능하다고 봤다. 그러니까 현대적 개념으로 보자면 거대한 물류 인프라 공사였던 셈이다. 그 덕을 당나라가 그대로 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안타깝게도 통일을 이룬 지 16년 만인 604년,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문제는 황후 독고씨와의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다. 앞서 본대로 딸은 선제의 황후가 되었고, 아들은 장남 용(勇), 차남 광(廣), 순서대로 준(俊), 수(秀), 양(諒)이었다. 황제에 오른 문제는 장남 용을 태자로 삼았고 차남 광은 진왕(晋王), 준은 진왕(秦王), 수는 촉왕(蜀王), 양은 한왕(漢王)에 봉했다.
그러나 명석하고 야망에 가득 찬 광은 이 정도에서 만족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스무 살 무렵 남조 평정에 나서 천하통일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더욱이 태자 용은 사치와 여색을 즐겨 모후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 이 기회를 잃을 리 없었던 광은 중신 양소를 포섭하여 태자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게 하였고, 결국 문제는 태자를 폐하고 광을 태자로 봉했다. 그러나 이는 나라에 위기를 자초한 꼴이자 문제 개인적으로도 불행의 시작이었다.문제가 세상을 떠나던 해였다. 후궁 가운데 하나인 진부인이 다급히 문제에게 도망쳐 왔다. 그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것을 본 문제가 그 까닭을 추궁하자, 진부인은 태자가 자신을 범하려 했다는 내용을 이실직고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문제가 폐태자 용을 다시 불러들이도록 했다.
그러나 태자의 조력자인 양소는 이 명령이 집행되지 못하도록 방해했고, 그 틈에 문제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문제가 어떻게 하여 세상을 떠났는지 분명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이후 황제에 오른 광이 진부인과 관계를 맺었다고 하니 저간의 사정을 통해 문제의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황제에 오른 광은 즉시 거짓 유조를 내려 형을 사망케 하였고, 막내 동생 양 또한 소환하였으나 그가 불응하자 그를 잡아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가두어 버렸다.광은 사실 놀라운 추진력과 열의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황제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열의는 황제에 오른 후 도를 넘어섰다.
아버지가 내린 사치금지령을 보란 듯 어기며 온갖 사치를 일삼았고 대운하 공사를 다시 재개했다. 이에 대한 반발을 아버지처럼 해외원정으로 무마하고자 베트남과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고구려 원정은 막대한 비용만 들인 채 실패로 끝났다. 아직 천하가 통일된 지 몇 십 년 안 되던 당시, 온 힘을 다해 수성에 힘써도 모자랄 판에 그처럼 방만한 정치를 했으니, 결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618년, 수양제가 순행 중이던 강도에서 피살되고, 죽기 직전 제위를 물려준 손자 양유가 같은 해에 당고조 이연에게 나라를 넘김으로써 수문제의 통일대업은 건국된 지 겨우 37년 만에 멸망에 이르게 했다.황제가 죽은 후에 부쳐 준다는 시호, 그는 양제(煬帝)다.
양(煬)은 뜻만 놓고 보면 ‘구워 말리다, 불이 활활 붙다, 녹이다’와 같은 애매한 의미를 갖는다. 역사적으로 보면 임금의 능력이나 품성이 아무리 부족하고 폭군이었다 해도 시호에 그러한 인상을 남기지는 않는다. 우리 역사를 보아도 그렇고 중국 역사를 보아도 그렇다. 황제에게 이 글자를 붙인다는 것은 그의 품성이 불같다거나 세상을 불태워 버리는 무서운 황제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라가 망할 때, 또는 치세 기간에 슬픈 일을 겪거나 비명에 간 황제에게 붙여 주는 애제(哀帝)란 시호 외에는 가장 좋지 않은 시호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애제는 역사적으로 꽤 많았지만 양제(煬帝)는 유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면 그의 품성을 가히 짐작 할 수 있다. 양제의 최대 실수는 단연코 고구려와의 전쟁 그리고 대운하의 건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또 당나라에서는 큰 힘이 되고 동기부여가 되니 굴곡의 역사는 그러기에 흥(興)이 있으면 망(亡)이 있고 또 그로 더 거친 물결로 흥(興)하고 망하는 게 되풀이된다 싶기도 하다. 이번에 나는 상해를 거쳐 모처럼 소주 구경을 간다. 소주라 한다면 수 양제의 수로 시발점인 곳이다. 그곳에는 강남제비도 산다. 원래 강남은 중국의 양자강 이남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서, 제비가 겨울을 나기에 알맞을 정도로 따뜻한 곳이다 그러므로 본래 강남 제비라 함은 따뜻한 곳에서 겨울을 나고 봄에 다시 돌아온 제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올해는 몸이 몹시 안 좋았다. 따스한 기운이라도 받아보자고 작은 여행을 생각했었다. 상해는 두번 정도 보았으니 바로 강남 수향마을로 가볼 예정이다. 따스한 기운이 정말 내게 스며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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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 그렇게 많은 희생이 뒤따랐던 수로길로 중국은 훗날 큰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역사는 이어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수나라를 쓰러뜨리고 세운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했다. 멀리 서양과도 교역하는 등 번성했다. 우리말에도 ‘당(唐)~’이라는 접두사가 붙은 낱말은 거의 중국 수입품을 뜻하는 말이었고, 그건 당시 선진국이었던 중국 제품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 서린 말이 되었다. 그런데 당나라의 번성은 과연 무엇에 의해 가능했을까? 물론 뛰어난 황제와 신하의 조화가 빚어낸 정관의 치적(貞觀之治) 등 뛰어난 정치 역량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은 바로 수나라가 만든 운하 때문이었다.
운하는 단순히 물류 인프라로만 쓰인 게 아니라 전 제국에 대한 황제의 직할 통치와 직접 징세 및 조운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통일과 번영이 가능했다. 실제로 수나라 때 만든 이 대운하는 중국 통치 범위의 기본 틀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중국의 직할 통치의 원형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륙 전체의 경제가 균형 있게 성장하고 교통이 수월해짐으로써 직접 관리를 파견할 수 있는 범위를 확장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연속성이다. 하나의 왕조가 끝나고 다음 왕조로 넘어갈 때 단절이 아니라 개혁의 연속으로 볼 수 있는 시선도 필요하다. 하나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게 보이질 않는다. 시대정신은 그런 통찰력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전 정권의 4대강 토목사업으로 골치를 앓고 있다. 생태계가 파괴되었다고 다시 복원시켜야 한다는 말도 나오는 판국이다. 자칫하면 후세에 큰 짐을 떠안길 수도 있다. 역사의식이란 말이 새삼 실감난다. 어쨌거나 그런 규모의 대단한 에너지를 갖은 수양제를 고구려는 가뿐히 물리 쳤으니 그럼 고구려는 또 어떤 나라였단 말인가. 수문제가 역사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뽑혔다는데 그럼 그들을 물리친 영양왕 그리고 을지문덕은 서열 몇위안에 들아야하는 것은 아닌가. 나로선 수나라와의 전쟁은 불가사의한 일이라 말 할 수밖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