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울산교육정책연구소에서 개최한 제3회 정책 세미나에 다녀왔다. 정책을 고민하고 기획하기보다 학교 현장에 시달되는 공문의 교육정책에 따라 실행하고 움직이는 것에 더 익숙했기에 신선한 자극을 기대하며 교육연구정보원을 찾았다. 세미나에 초빙된 강사에 대해 궁금하여 미리 받은 강의 원고를 읽음과 동시에 인터넷으로 주전공 분야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분명 7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외모가 인상적이었다.
`교육기반 능력주의와 역량`을 주제로 한 세미나는 교육의 기회균등으로 학생 역량을 키워내기 위해서 진정한 교육기반 능력주의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연세대 교수의 강연을 시작으로 교육정책연구소 전문연구원의 지명토론과 미래교육에 대한 자유토론이 이어졌다. 사회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위해 학교 교육은 약자의 편에서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롤스의 철학을 기초로 해야 함을 강조했다. 롤스의 해법은 교육의 약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다시 기회를 제공하는 공정한 기회균등의 제도적 보장에 있다고 본다. 형식적 기회의 평등은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다고 보고 선행교육의 정도와 가정형편의 차이 그리고 개인차를 무시할 때 비로소 형식적 기회가 평등함이 인정된다.
세미나에 참석한 교원과 교육전문직, 교육청 관계자 등이 함께 울산 미래교육의 방향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밝히고 질문과 토론을 자유롭게 펼쳤다. 토론이 무르익을 때쯤 읽기 쓰기를 못하는 학습 부진아에 대한 역량은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화두가 던져졌다. 취약 계층 학생의 사례관리와 같은 교육복지적 접근에서 볼 때 가정형편이 어렵고 부모의 관심도 낮은 환경적 조건에 놓인 학생의 기초학습 역량을 키우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음을 시사하였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저서 `역량의 창조`는 전 남편의 도박과 폭력으로 이혼한 인도에 사는 30대 여성 바산티에 대한 삶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바산티의 신체조건, 영양상태, 친정의 경제력 및 가족관계, 교육 수준, 정치인식, 감정의 변화, 여가시간을 보내는 방식을 비롯해 그녀가 사는 도시의 법적 제도, 시행 정책 및 경제 현황을 모두 살펴 과연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깊게 관찰하였다. 누스바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는 삶을 살아가려면 생명, 신체적 건강, 신체 무결, 감각ㆍ상상력ㆍ사상, 실천이성, 협력관계, 자연적 환경, 놀이, 환경통제 영역 이렇게 10가지 핵심 역량들이 모두 최저 수준 이상으로 보장될 때 사회정의 실현이 가능한 역량접근법을 주장한다. 현재의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향한 연대와 서로를 이해하는 연민이 절실하다고 했다.
아시아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인도 출신 아마티아 센은 세계의 빈곤과 불평등에 놓인 소외된 이들에게 가장 통찰력 있는 지원군으로 역량의 회복을 통해 삶의 질이 향상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역량이란 한 개인이 달성할 수 있는 기능들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며 자신의 판단에 따라 특정한 기능을 달성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 그것이 바로 역량이라고 했다. 음식이 없어서 굶는 경우와 종교적 실천의 금식은 역량의 관점에서 전혀 다르며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 곧 자유의 확장임을 호소한다.
자원이 동일하게 주어져도 그것을 활용해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의 정도가 개인마다 달라 개인 실제 역량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빵을 똑같이 하나씩 나눠주는 것은 공평해 보이지만 실제로 개인의 체격과 활동량을 고려하지 않은 분배라는 면에서 평등하지 않은 결과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보편적 복지에서 맞춤형 복지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 센의 역량중심 접근법은 철저하게 개인의 사례를 들여다 보며 개인의 역량 강화에 중점을 둔다. 한 나라가 인간의 능력을 어디까지 개발했는가를 계량하여 종합적으로 나타내는 지수인 인간개발지수는 역량접근법의 현실적용 사례이다. 유엔이 매년 발표하는 인간개발보고서 중 인간개발지수는 2020년 기준 1위는 노르웨이, 2위는 아일랜드와 스위스, 한국은 23위였다. 국내의 인간개발지수 순위는 2018년 기준 1위 서울ㆍ경기ㆍ인천, 2위 부산ㆍ울산ㆍ경남이었다.
미래예측의 슈퍼스타로 불리는 통계학자 네이트 실버는 그의 저서 `신호와 소음`에서 잘못된 소음과 같은 정보를 거르고 진짜 의미 있는 신호를 찾으려면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겸손과 예측할 수 있는 것을 예측하는 용기 그리고 이들 사이의 차이를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다.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극단의 고통에 처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 인간답게 살도록 해주는 것, 어떤 경제 위기가 닥쳐도 그들이 굶어 죽는 일은 막는 것이 센이 주장하는 진정한 경제학의 임무이다. 코로나 위기 속 교육격차를 바라볼 때 교육의 약자가 보내는 의미 있는 도움의 신호를 빠르게 인지하여 기본적인 학습을 받도록 해 주는 것, 예측 가능한 미래를 위해 자신의 역량을 키워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이 교육의 임무가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자를 품을 수 있는 가슴 넓은 용기와 배려 깊은 지혜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한 아이의 작은 몸짓이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진짜 신호임을 알아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