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學脈 (70) 忘憂堂 郭再祐(下)
郭再祐의 사상을 보여주는 저술은 남아있지 않다. 그는 저술보다는 행동으로 그의 사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에 편집된 「忘憂堂集」은 2권1책으로 된 그의 시문집으로 시와 임진란때의 소(蔬),계(啓) 및 국왕의 뜻을 담은 왕복관문(往復官文),서독(書牘)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생전의 그의 의병활동과 남아있는 시들 및 상소문과 계를 통해 알 수 있다.
「진실로 군사를 놓아버리고 멀리 명산에 들어가서 신선같은 생활을 하려고 하나 가장(假獎)으로서 병졸을 모집하고 군사를 일으킨 것은 군부를 위한 것이며… 왜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는 것은 국가를 위함이며…」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게 올린 편지이다. 이 구절에서는 「신선」과 「의병」의 두 큰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신선」은 개인적인 문제이지만 「의병」은 전체를 위한 일이다.
국가가 위난한 직에 이른 만큼 지금은 「개인」보다 「전체」를 위해 입장을 세워야 마땅하다는 그의 확실한 태도가 돋보인다. 이처럼 「전체」를 위한 일에 충실했던 그는 전쟁이 끝난 후 江湖에 묻힌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만족할 줄도 알고 기회(벼슬을 버릴 시기)도 알아 운명의 분한(分限)에 따른다」(知足知畿隨命分)는 명철보신(明哲保身)적 자세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의병장으로서 郭再祐는 뛰어난 지략가였다. 그는 한 번도 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었다. 鼎岩津전투에서 보인 전략은 특히 훌륭했다. 당시 왜군은 경상좌도를 점령하고 이어 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려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기도했다. 임란이 일어나던 해 5월말 또는 6월초순경이었다. 郭再祐는 왜군 대부대를 맞아서 복병, 유인 기습작전으로 대항했다.
그는 왜군 선발대가 정암진벌판의 진흙수렁을 피하기 위해 꽂아둔 말뚝을 밤에 군사를 시켜 뽑아 진흙수렁이 많은 곳으로 옮겨 꽂아놓게 하고 기다렸다. 이튼날 새벽 적의 대부대가 말뚝만 보고 진군, 수렁에 빠진 것을 복병으로 공격,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적의 병력은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적의 공격초점을 분산시키기 위해 자기와 똑같이 홍의백마(紅衣白馬)로 분장시킨 날랜 군사를 몇 사람 만들어 적들을 산골짜기로 유인한 뒤 기습을 했다.
또한 곳곳에 척후병을 두어 왜군이 백리 밖에 나타나면 미리 본영(本營)에서 알고 치밀한 전략을 짜서 작전을 펴는 등 용의주도하게 대처했다. 밤이면 한 막대기에 다섯 개의 횃불을 달아 의병의 군세가 큰 것으로 보이는 등 위장술에도 능했다.
정암진전투에서 승리 적을 격퇴한 후 郭再祐의 군세는 크게 늘어나 수천 명에 이른다. 그 기세를 몰아 의령을 출발, 현풍에 이르러 적군을 유인했으나 적은 겁에 질려 응하지 않았다. 그는 비슬산에 올라 횃불전술로 군세를 과장하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자 적은 서둘러 도망갔다. 그러나 靈山에 주둔한 왜군은 군새가 큰 것만 믿고 저항했으나 郭再祐가 이끄는 의병을 당하지 못하고 격파되었다. 이로써 비로소 경상좌우도의 연락의 길이 트이게 되었다.
그후 그는 진주목사 金時敏이 3천8백의 군사로 3만의 왜군에 포위되어 혈전을 벌이는 晉州城전투에 선봉장 심대승을 보내어 지원하여 진주대첩을 세우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또한 임란 후의 화의회담(和議會談)의 결렬로 왜군이 다시 재침(丁酉再亂)하자 그는 창녕의 火旺山城을 수비하기도 했다.
곽재우는 그동안 관찰사 金晬와의 불화로 도적의 누명을 쓰고 구금되었다가 초유사 金誠一의 장계로 무죄가 밝혀져 석방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대대로 내려오는 유산을 모두 털어 군기(軍器)와 군량을 준비했다. 그는 의병장으로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幽谷 察訪의 벼슬을 받았다.
그뒤 성주목사, 진주목사,안동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동치중추바사,경상좌우병사,삼도통제사,한성부우좌윤,함경도관찰사 등 벼슬이 잇따라 내렸으나 난리가 끝난 후 모두 사양했다. 벼슬을 사영했기 때문에 때로는 귀양을 가기도 했다. 3년 동안의 귀양이 풀린 후(1602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靈山의 동쪽 낙동강가에 있는 滄岩에 忘憂亭이라는 자그마한 정자를 짓고 솔잎으로 벽곡(辟穀=생식)하면서 신선처럼 살았다.
그는 광해군 5년(1613년)에 영창대군을 폐하여 서인으로 살았다는 말을 듣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광해군 9년(1617년)4월 10일 6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후 그에겐 병조판서 겸 知義禁府事에 추증되며 文翼이란 諡號가 내려졌다.
「영화와 녹을 버리고 구름산에 누웠으니/세상걱정 다 잊어 몸이 절로 한가롭네/ 고금에 신선이 없다하지 말라/내마음 한번 깨달음에 있느니」(辭榮棄祿臥雲山 謝事忘憂身自閒 莫言今古無仙子 只在吾心一悟間) 그가 만년에 거처한 망우정을 두고 지은 시이다.
忘憂亭은 「아래에는 장강이요 위에는 고산이 있는데/망우정 한 채가 그 사이에 있구나/시름 잊은 신선이 근심 잊고 누웠으니/밝은 달 맑은 바람이 엇갈리니 한가롭기만 하네」(下有長江上有山 忘憂一舍在其間 忘憂仙子忘憂臥 明月淸風相對閒)라는 그의 시처럼 낙동강가의 비슬산을 등지고 (창녕군 도천면 우광2구)서 있다. 이곳에서 그는 신선처럼 생식을 하면서 만년을 보낸 것이다. 흔히 郭再祐는 문무를 겸하고 유•선에 모두 심취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근본은 역시 유학이었다. 그의 시를 보면 자연에 대한 그의 인식이 잘 드러난다.
그는 자연 속에서 호방하게 마음 내키는 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마임이 흩어지지 않도록(心自收) 노닐었다. 곧 절제와 통제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자연 속에 그 마음을 풀어놓은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노장적인 입장이 아닌 유교적 입장에서 강하게 내보이는 자연관이다. 그는 자연을 전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자연과 신선에 몰두하게 된 것은 34세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파방된 충격이 큰 작용을 한듯하다. 그전까지 그는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욕구를 가졌다.
그러나 과거의 파방으로 그 꿈이 좌절된 것이다.그러나 그는 역시 큰 선비였다. 국가가 위난할 때는 개인적인 삶의 태도를 떨쳐버리고 대의를 위해 일어날 줄 알았던 것이다.
그의 유적은 달성군과 창녕군, 의령군 등지에 산재해 있다. 대구 忘憂공원에는 그의 동상과 기념관이 서 있어서 그의 충의를 오늘에 떠 올리고 있다. 그의 후손들은 달성군 유가면과 현풍면 등지에 많이 살고 있으며 그의 14대종손 郭春燮(60세)는 달성군 유가면 가태동에 살고 있다.
최근 郭再祐를 비롯한 의병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의병기념사업회에서 「의병의 날」제정을 추진하고 있는 일도 특이할 만하다.
▲참고문헌=「紅衣將軍」「韓國의 思想大典集」「망우당 곽재우의 문학」<李夏錫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