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에 대한 추억 / 정성헌
유년의 기억이라야 특별히 좋게 떠오르는 것이 없지만 항아리에 대한 기억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햇볕이 잘 드는 장독대에서 빈 항아리에 머리를 묻고 “아--!” 외마디 소리로 시작해서 혼자서 흉내를 낼 수 있는 동물 소리를 내어보며 혼자서 잘도 놀았던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 작은 머리를 항아리 주둥이에 처박고 가슴까지 우려내는 울림이 신기해서 한참 지껄이다 머리를 들면 햇빛이 유난히 눈이 부셔 앞에 물체도 안 보이고 대낮인데도 눈앞에 별이 반짝거리며 어지럽기도 했었던 어린 시절엔 햇빛도 참 밝았던 것 같다. 종숙(從叔)네에 내 또래의 딸이 있었는데 그 여자아이와 장독대의 작은 항아리 뚜껑 위로 꼬막 껍데기를 올려놓고 그 안에 까마중 열매와 잡초를 얹어 놓고 이름 모를 풀꽃들로 밥상을 차리는 소꼽놀이도 했다. 냄새를 우려내느라 물을 담아 놓은 작은 빈 항아리에 도랑에서 잡아 온 송사리를 넣어 놓고 모기 유충들이 꼼틀대는 모습이 신기해서 한참씩 들여다보기도 했다. 항아리와 오가리라고 부르던 옹기는 작고 큰 것에 상관없이 그 시절엔 아주 필요하던 살림살이였고 장독대와 광에 항아리가 많을수록 부자로 여겼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먹거리가 풍성하지 않았던 서럽고 배고픈 시절이라 그저 목으로 무언가가 넘어가는 자체만으로 행복하던 그 시절이라 광방에 큰 항아리에 담긴 쌀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먹기도 했고 소박한 장독대에서 짭짤하고 매운 고추장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고 물을 한 사발씩 들이켜야 했던 만족감과 그 포만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빈 독 속에서 울려 나오는 귀울음, 웃음소리도 외마디 외침도 어느 소음도 다 품었다.
작은 항아리(오가리)들은 놀다가 깨질 것 같은 불안감이 있지만, 체격이 좋은(?) 간장독과 된장 항아리를 손바닥으로 쳐도, 몸이 부딪혀도 꿈쩍도 하지 않으니 장독대에서 놀아도 부담이 없었다. 내가 다섯 살 무렵 조그만 키에 그 큰독과 키가 거의 비슷하기도 했는데 떡을 먹다가 찰진 떡이 손에 묻어 손을 씻는다며 장독대에 올라가 간장독에 손을 씻다 장독을 깨뜨린 기억이 있는데 당시 어머니께 혼날 줄 알고 옆집으로 도망간 나를 놀랬을까 오히려 괜찮다며 달래주시던 어머님이 일 년 치 간장을 잃어버리고 마음이 어떠셨을까 생각해본다.
해마다 된장, 간장으로 채워져 많은 식구 입맛을 살려주고 건강을 보태주던 간장 항아리에 어느 가을인가 물을 가득 채워 넣고 냄새를 우려내며 바가지로 물을 퍼내서 아껴 쓰던 중 항아리가 실금이 갔다. 못내 아쉬워하시던 엄마의 원망 섞인 소리가 귓전으로 스치기만 했지 내가 너무 어려서 가슴속에 구구절절이 박히지는 않았었다. 항아리가 워낙 커서 가격도 꽤 나가고 한세상을 식구처럼 살다 보니 정도 들어 아버지께서 가는 철사로 항아리를 이리저리 동여매어 버려지지 않고 곡식의 낱알을 보관하며 내내 살림살이로 한구석 요긴하게 버티어냈다.
겨울엔 잡곡이 조금씩 담긴 자루들이 엉키기도 하고 귀한 물건들이 보관되기도 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별로 먹음직하지 않던 고구마를 쪄서 누룩과 섞어놓은 고구마 술을 담아 보관하면 봄이 되어서 냄새가 썩 좋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보릿고개가 있던 배 고픈 시절이라 봄이 되면 간식으로 먹기도 하고 물을 흥건하게 부어 가는 채로 걸러내어 끓이면 단술이 된다. 그 또한 목으로 쑥쑥 잘도 넘어갔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맛이 그립다 먹기 싫어서 밥을 달라고 떼를 쓸 만큼 싫었던 고구마 단술 그 맛은 이제 영영 먹을 수 없는 맛이 되어버렸다. 커다란 항아리에 양식이 거의 다 떨어지면 항아리 안에 짚불을 피워 열과 연기로 소독을 하고 물걸레질을 한 후 마른걸레로 닦아 계절이 바뀌어 곡식이 수확되면 담길 때까지 구석에 보관이 된다. 60년대 중반에는 누구나 가난과 싸워야 했던 시절이라 어머니는 큰집 사촌 누나가 서울에서 보내온 헌 옷을 재단하여 재봉틀로 박음질하여 작은 옷으로 변하면 색상에 상관없이 내 차지가 되곤 하였다. 앉아서 손으로 돌리는 재봉틀이었는데 나는 어머니 옆에 앉아 어머니가 돌리라 하면 돌리고 멈추라 하면 멈추는 상당히 숙련된 보조자였다. 어린 마음에 멋진 옷이 하나 더 생기려나 하는 기대감에 힘든 줄도 모르고 오른팔 왼팔을 바꿔가며 돌렸었다. 그런 이력 때문에 지금도 웬만한 재봉틀 박음질은 내가 한다. 어머니의 그 신기한 재봉틀 솜씨에 자랑스레 입고 좋아했던 기억도 잊을 수 없다. 천 조각 하나도 버릴 것 없이 조각조각 이어서 상보를 만들고 훌륭히 근검절약을 실천해내던 그 모습은 단추 하나, 옷에서 떼어낸 지퍼 하나도 심지어 고무줄도 이어서 쓰이던 아주 먼 옛날이야기다. 농사일에 품앗이를 하시면서도 다섯 자식 거느리며 건사하셨으니 자식들이 존경하고 효도하는 건 당연하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눈에 보이던 그 큰 항아리가 이사하면서 광이 없어지고 식구가 줄면서 서서히 쓰임새나 놓아들 곳을 찾지 못하고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듯했지만 그건 사라짐도 아니요 없어진 항아리가 아니었다. 잠시 잊혀 있었을 뿐 가슴속에 그대로 자리하고, 가끔 향수에 젖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추억 속에 자리매김하고 훈훈히 가슴을 채워주고 있다. 그래서 쌀독을 40kg이 들어가는 항아리를 쓰고 소금은 20kg이 들어가는 항아리를 쓰고 있다. 냉장고에 넣으면 오히려 보관이 안 되는 식자재가 있다. 고구마, 감자, 양파, 등등…….은 항아리에 보관한다. 뭔가에 부딪히면 깨어질 것 같은 항아리지만 쓰임새에 아주 만족스럽다. 어느 집 햇볕이 잘 드는 마당 한쪽에 가지런히 항아리들이 놓여 있으면 참으로 보기가 좋고 그 집의 된장과 고추장 맛이 궁금해진다. (‘23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