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주시 부흥로1399번길 62 번지에 있는
양주 순교성지
[양주 순교성지는『치명일기』의 기록을 통해, 병인박해 때 다섯 분이 순교한 치명지를 2004년 의정부교구 설립 뒤에 새롭게 찾아내 성역화를 진행하고 있는 성지다.
증언을 통해 오래전에 순교지라는 표지석이 있었던 자리를 확인하고 토지 매입을 진행하여, 2016년 5월 28일 의정부 교구장 이기헌 주교의 주례로 성지 선포 미사를 봉헌하며 성역화를 시작하였다. 양주 순교성지 주변에는 양주 향교와 최근에 복원이 이루어진 양주 관아, 그리고 국가 무형 문화재 제2호인 양주 별산대놀이 공연장이 자리하고 있어 더 많은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순교하신 다섯 분에 대한 “치명일기”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 용인에서 살다가 양주관아로 잡혀온 “김윤오 요한”과 “권 마르타” 부부
* 성 김대건 신부님께서 부제로 조선에 왔다가 중국으로 갈 때 함께 간 사람으로 추정되는 최 프란치스코의 아내인 “김 마리아”
* 홍주에서 순교한 박사행 부부의 아버지인 “박 서방”
* 양주 일담리 출신이면서 아버지(홍몽노 베드로)와 삼형제가 함께 순교한 가족의 둘째 아들인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양주 순교성지
양주 순교성지에 있는
예수상
양주 순교성지에 있는
성지 방문 스탬프 박스
경기 양주시 부흥로1423번길 50 번지에 있는
양주 향교
양주 향교 안내도
양주 향교 명륜당
양주 향교 대성전
[양주 향교는 1401년(태종 1)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6·25 때 폐허화되었던 것을 1959년에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건축형태는 명륜당이 있고, 그 뒤 내삼문 안쪽에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한식 골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이고, 명륜당은 석축 위에 주춧돌만 남아 있다. 동재와 서재가 없다.]
양주 별산대 놀이마당
양주 별산대놀이(杨州 别山台戏)
정의 : 서울의 본산대놀이에서 영향을 받아 대략 200여 년 전에 형성된 중부 지역의 대표적인 산대 탈놀이.
역사
양주楊州 별산대놀이는 서울 지역의 본산대놀이를 받아들여 18~19세기 중엽에 현지에서 재현하였다. 양주에서 본산대를 초청해서 연희한 시기는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대 초로 알려져 있다. 양주 별산대놀이의 현지 정착과 관련하여 김성대의 증언과 이두현의 조사는 18세기 후반인 1760~1800년대 정착설을 뒷받침하며, 이 밖에 채록자 미상의 1957년본은 19세기 초반인 1820~1830년대 정착설, 송석하와 최상수의 기록에 바탕을 둔 19세기 중반인 1850~1860년대 정착설 등이 있다. 위의 세 가지 견해는 양주 별산대놀이의 정착 시기가 대체로 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에 걸쳐 있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정착했다는 견해는 문맥으로 보아 정착보다는 산대놀이를 시작했다는 시각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19세기 초반에는 양주의 산대놀이가 확실히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양주 별산대놀이는 서울의 본산대놀이 중에서 각각 아현 산대, 사직골 딱딱이패, 구파발 산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세 가지 영향설이 존재한다. 양주 지역에서 세 곳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언이 나오는 것을 보면, 양주 지역에 온 본산[대패](/topic/본산대패)가 일정하지 않고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본산대패들이 지방 공연으로 공연 날짜 약속을 지키기 어려웠고, 특히 초파일이나 단오, 추석 등과 같은 세시 명절이 끼어 있을 때에는 여러 지역에서 초청하는 관계로 본산대패들이 중복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다양한 본산대패들이 다녀갔던 것으로 보인다.
양주에서 산대놀이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초기에 이을축李乙丑이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어 관아의 잡역雜役에 종사하던 하층민들이 적극적으로 전승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또한 관에서 산대놀이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관아가 있는 읍치邑治 지역이라는 특성 등이 두루 영향을 미쳤다. 한편 하급 관리뿐만 아니라 거사・한량들도 전승에 참여하였다.
특히 양주에서 놀이가 성행할 때에는 곳곳에서 많은 구경꾼과 장사치들이 모여, 상인들에게 자릿세나 찬조금을 받아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다. 연희자 김성대는 1910년대 놀이판의 분위기를 증언하면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크게 떠드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엿장수・임시 술판 등의 움막이 형성되어 난장이 형성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양주 별산대놀이가 매우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18년 무렵에 퇴기退妓 박옥화가 당시 성행하던 양주 별산대를 기녀들에게 연습시켜 상업적인 전국 순회공연을 시도했으나 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실패하였다. 한편 1926년에서 1927년 무렵에는 성북동, 지금의 동구마케팅고등학교 밑에 있는 넓은 마당에서 탈춤 공연이 있었으며, 1929년 9월 12일 조선박람회 개장 시기에는 동대문 밖의 붕어우물 근처에서 수차례 공연하였고 그해 겨울에는 조 대비趙大妃의 거처인 경복궁의 자경전慈慶殿에서도 탈춤 공연 등이 있었다는 점에서 양주 고을 이외의 비정기적인 외부 공연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양주 별산대놀이는 일제강점기 말에 강제로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에 다시 단오 행사로 복원되었으나, 6・25전쟁으로 탈이 소실되고 다수의 연희자들이 사망하면서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1964년 사직당 주변이 산사태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고 여덟 명이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 이후 사단법인 양주 별산대놀이 보존회가 결성되고 전수관이 건립되었으며, 체계적인 전수 교육과 놀이마당에서의 정기적인 공연이 이루어져 전승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시대에 따른 양주 지역 공동체와 별산대놀이의 변화양상을 보면, 크게 5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인 19세기에는 관官과 민民의 밀접한 관련 속에 산대놀이가 지역 공동체 문화로 정착이 되었다. 연희 주도층은 관아의 하급 잡역부와 상인 계층이었다. 당시 초파일 공연의 실시와 무계巫系의 핵심적 참여로 산대놀이는 무속・불교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녔다. 따라서 이 당시 양주 별산대놀이는 지역의 세시적 대동놀이로 전승되었다.
2기는 갑오개혁 이후부터 1920년대까지의 시기로, 산대놀이가 민民 중심의 상업적 성격을 지니며 지역 공동체 문화의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상업성이 강화되면서, 지역의 판주와 상인층이 개최를 주도하면서 난장도 형성되었다. 또한 종교적 성격이 약화되고 연희 시기가 다양화되어, 상대적으로 놀이성이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일시적으로 외부 공연이 시도되었지만, 지역에서 벌이는 세시적 대동놀이의 구심체 역할을 여전히 수행했다.
3기는 1930년대 이후의 일제강점기 후반기로, 일제의 억압에 의해 세시적 공연이 중단되고, 마을이 빈한한 농촌으로 바뀌게 되어 전승이 침체되었다. 당시 산대놀이는 일부 주민들의 내적 욕구에 의해 자발적인 신명풀이의 형태로 전승되었다.
4기는 광복 이후부터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이전의 시기로, 복원과 중단이 반복되면서 전승력이 약화되었다. 광복 후에 비세시적인 상업적 공연을 통해 복원하려는 시도는 전쟁으로 타격을 입었으며, 산대놀이는 지역 문화의 구심체에서 마을 단위의 놀이로 축소됨과 동시에 공동체적 성격도 약화되었다.
5기는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이후로, 관의 재정적 지원이 증가하면서 체계적 전승이 이루어지고 외부 공연이 점차 증가한 시기이다. 하지만 관의 영향력 증가와 자체 전승 기반의 약화, 탈지역화 현상으로 말미암아 지역민의 공동체 문화로서 지녔던 위상은 크게 약화되었다.
양주楊州 유양동 지역에서 최소 150년 이상에 걸쳐 양주 별산대놀이가 전승될 수 있었던 배경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양주는 도시로서의 기반을 지닌,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고을이었다. 비교적 큰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초기 연희자들이 도중都中이라는 조합을 설립했다. 도중은 본래 상인들의 조합으로, 이를 통해 상인 세력이 연희의 전승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양주는 일찍이 본산대의 놀이패를 불러 놀이판을 벌일 정도로 물적 기반이 형성된 곳이다. 또한 일찍이 교통이 발달해서 서울에서 함경도 지역으로 나아가는 주요 길목이라는 점도 양주 별산대놀이의 전승에 영향을 미쳤다.
둘째, 양주는 읍치邑治(고을)로서 행정의 중심지였다. 조선 후기에 주내면을 별도로 이곳 읍치 지역에만 2,000여 명의 인구로 이루어진 큰 고을이 형성되었고, 목사 거주의 관아가 있어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따라서 향리 및 관속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었으며, 초기 정착 시기에는 관의 하급 잡역부들이 직접 놀이에 참여하였다. 하급 관속들은 놀이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지속시켜 왔으며, 관과 민의 매개 역할을 수행했다.
셋째, 양주는 서울과 근접하여 본산대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애오개・구파발・녹번의 본산대패는 단오가 되면 양주에 찾아와 놀이판을 벌였으며, 양주 주민들은 이들의 놀이를 배워 정착시켰다.
넷째, 이곳은 문화적인 포용성을 지닌 고을로, 관 주도의 양반 문화적인 성격과 더불어 무속적 성격과 민간신앙, 세시놀이를 바탕으로 한 기층 문화가 조화를 이룬 곳이다.
다섯째, 양주 지역 주민의 강한 신명성을 들 수 있다. “양주는 춤에 미쳤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탈춤의 전승에 적극적이었으며, 유일하게 본산대패의 탈놀이를 정착시킨 곳이다. 기능이 출중하고 신명 있는 많은 탈꾼을 계속 배출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본산대가 약화되면서 양주는 산대놀이의 본고장이 되었다. 한편 무속을 바탕으로 한 소놀이굿이 형성된 것도 이 지역의 신명을 증대하는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여섯째, 양주는 전통성이 강하여 세시풍속이 활성화되었고, 전통연희가 잘 보존된 곳이다. 양주에서 산대놀이가 연희되는 시기는 다양하다. 양주는 초파일에 국[사당제](/topic/국사당제), 단오 성황당제, 3월 4일 산신제・기우제를 지낼 정도로 전통성이 강한 고장이다. 특히 초파일이나 기우제 때에는 산대놀이 탈춤을 추기도 했다. 양주는 현재도 중요 무형문화재인 양주 별산대놀이, 양주 소놀이굿 이외에도 경기도 지정 문화재인 양주 농악, 양주 상여・회다지소리, 양주 향토문화재인 양주 들노래 등이 전승되는 무형문화재의 보고이다.
내용
양주 별산대놀이는 길놀이와 서막序幕고사에 이어 제1과장 상좌춤, 제2과장 옴중춤, 제3과장 옴중과 먹중, 제4과장 연잎과 눈끔적이, 제5과장 제1경 염불놀이・제2경 침놀이・제3경 애[사당](/topic/애사당) 법고놀이, 제6과장 제1경 파계승놀이・제2경 신장수놀이・제3경 취발이놀이, 제7과장 제1경 의막사령依幕使令놀이・제2경 [포도부장](/topic/포도부장)놀이, 제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의 순서로 진행한다. 과장별 주요 인물과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길놀이(거리굿)와 서막고사
각종 기, 탈패, 악사 등이 마을을 한 바퀴 돌며 길놀이를 하고, 일부 집을 방문해 걸립을 한다. 이어 놀이마당에 이르러 한바탕 논 다음에 탈을 앞에 진열해 놓고 탈고사를 지낸다.
2. 제1과장 상좌춤
첫째 상좌가 등장해서 중앙에서 합장재배와 천신재배를 하고, 이어서 4방위를 향해 사방치기춤을 비롯한 다양한 춤을 춘다. 이어 둘째 상좌가 등장해서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축귀逐鬼 의식무의 과장이다.
3. 제2과장 옴중과 상좌
옴중과 상좌가 등장해 막대기와 제금(바라)을 들고 서로 상대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면서 대립하다가 옴중의 힘에 밀려 상좌가 물러난다.
4. 제3과장 먹중과 옴중
옴중이 등장해 먹중의 얼굴을 치며, 옴이 오른 얼굴 모습과 머리의 벙거지 등 외모와 복식에 대해 희롱을 한다. 나중에 옴중이 먹중의 힘에 밀려 쫓겨나며, 이어 먹중 1, 2가 차례로 등장하여 춤을 춘다.
5. 제4과장 연잎과 눈끔적이
연잎은 부채로, 눈끔적이는 장삼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등장하며, 옴중과 먹중 등이 차례로 다가가 정체를 확인한다. 연잎은 부채로 춤을 추고 눈끔적이는 먹중을 쫓고 서로 춤을 춘다.
6. 제5과장 팔먹중놀이
1) 제1경 염불놀이: 완보를 비롯한 여덟 먹중이 등장해 자신들은 겉은 중이지만 실제는 오입쟁이임을 밝힌다. 그리고 염불을 외우면서, 중의 신분에 맞지 않는 언어의 유희로 비속한 말장난을 하고 <백구타령>을 부른다.
2) 제2경 침놀이: 먹중이 산대 구경을 나왔다가 같이 온 자식들이 갑자기 죽게 되었다며, 완보와 신주부에게 도움을 청한다. 완보는 <백구타령>을 하며 신명으로 살려 보려 하지만 실패하며, 신주부는 살이 낀 먹중의 자식들을 진맥하고 침을 놓아 소생시킨다.
3) 제3경 애사당 법고놀이: 왜장녀가 먹중에게 돈을 받고 딸인 애사당을 시중들게 한다. 이어 애사당이 법고를 치며 춤을 추자, 먹중은 애사당을 탓하며 법고를 빼앗고 쫓아낸다. 먹중과 완보가 법고치기를 하며 서로 상대를 희롱하며 장난을 친다.
7. 제6과장 노장
1) 제1경 파계승놀이: 노장이 상좌를 데리고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등장하자, 팔목(완보와 먹중들)은 한 사람씩 노장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접근한다. 이들은 노장을 향해 <백구타령>과 <뱃노래>를 부르며 희롱한다. 노장은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춤을 추다가 2인의 소무에 현혹된다. 두 소무에게 다가가 춤을 추며 유혹하지만 거절당하자, 노하여 송낙과 장삼을 벗어 던지고 다시 접근한다. 결국 소무는 노장을 받아들이고, 노장에게 옷과 염주를 착용시켜 주고 함께 어울려 춤을 춘다.
2) 제2경 신장수놀이: 신장수가 원숭이를 데리고 등장하여 신을 판다. 그는 노장이 소무의 신을 사려는 의도를 알고 치수를 요구하지만 흥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포기한다. 신장수는 젊은 여자와 놀아나는 노장을 힐난하고, 원숭이는 소무를 유혹한다.
3) 제3경 취발이놀이: 취발이가 2인의 소무를 거느린 노장에게 다가가 노장을 질책하고 노장에게서 소무를 빼앗으려 시도한다. 노장은 이를 몸으로 막고 장삼까지 던지며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취발이의 힘에 밀려 소무 한 명을 빼앗기고 나머지 소무를 데리고 물러난다. 취발이가 소무와 결합하고, 소무는 아이를 잉태해서 사내아이를 출산한다. 취발이는 아이를 안고 어르고 노래하며 <천자풀이>・<언문풀이>로 글공부를 시킨다.
8. 제7과장 샌님
1) 제1경 의막사령놀이: 말뚝이가 샌님・서방님・도련님을 모시고 등장해서, 친구인 의막사령 쇠뚝이로 하여금 사처를 잡아 줄 것을 요구한다. 쇠뚝이는 사처를 돼지우리로 잡고 샌님에게 문안을 하며, 비속한 말로 샌님 일행을 희롱한다. 말뚝이는 이를 빌미삼아 쇠뚝이를 문책하게 하지만, 나중에 도리어 샌님에게 잡혀서 돈을 주고 풀려난다.
2) 제2경 포도부장놀이: 샌님이 젊은 소실인 소무를 데리고 등장하고, 젊고 힘센 포도부장과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샌님은 재물로 소무를 유혹하며 포도부장을 막으려 하지만, 소무는 포도부장에게 마음이 돌아서서 샌님을 구박한다. 결국 샌님은 울면서 소무를 포기하고, 소무는 포도부장과 어울린다.
9. 제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
신할아비가 산대놀이에 함께 온 미얄할미를 구박하자, 미얄할미가 갑자기 죽는다. 신할아비는 미얄할미를 회생하려다 실패하고 통곡을 하다가, 노름하다 집을 나간 아들 도끼와 3년째 소식이 없는 딸 도끼 누이를 부른다. 이어 도끼 누이가 무당이 되어 굿을 하며 가족들이 미얄할미의 넋을 풀어 준다.
양주 별산대놀이에는 인물의 갈등 방식을 바탕으로 전승 집단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신분의 전도와 팔먹중의 노장 희롱 등을 통한 탈일상성과 현실의 전도, 할미의 죽음과 먹중네 자식의 질병 치료를 통한 비극적 일상의 사실적 형상화, 말뚝이의 양반 희롱에 의한 파격적 일탈, 가부장제하의 남성 횡포 및 가족의 해체를 보여 주는 영감과 할미의 등장을 통한 부정적 현실의 풍자와 바람직한 삶의 구현, 그리고 전승 집단이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다 같이 모여 삶의 한과 고달픔을 풀어내는 대동놀이적 집단 신명풀이 등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과정에서 2세 교육을 통한 풍요로운 미래의 보장, 신분의 벽을 넘는 평등한 삶의 실현, 강한 성욕을 통한 생산의 증대, 액운을 보내고 복을 비는 기원과 축귀적 주술을 통해 민중 집단의 이상적인 삶을 구현하고자 하며, 궁극적으로는 갈등 극복을 통한 화해와 조화를 지향한다.
양주 별산대놀이의 놀이 공간은 원래 불곡산佛谷山 아래 사직골에 있는 사직단社稷壇이었다. 이후 마을 뒷산 송림松林 속의 잔디밭, 현 놀이마당 뒤편의 방선폭포 주변의 완만한 산비탈, 향교 외삼문外三門 안마당, 예전 전수관 동쪽 언덕의 솔밭, 마을 앞의 밤나무 동산, 승학교乘鶴橋 건너의 놀이판 등이 사용되었다. 무형문화재 지정 이후의 놀이마당은 1985년에 전수관 앞뜰에 완공한 타원형의 노천계단식 공간으로 마당에는 잔디를 깔았다. 이후 현재의 대규모 원형 야외 공연장이 완성되었다.
연희 시기는 원래 사월초파일과 오월단오가 중심이고, 주요 세시명절에 연희되었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음력으로 삼월삼짇날, 사월초파일, 오월단오, 중양절에 연희되고 국가의 경사, 관아의 나례儺禮, 기우제, 타 지역 초청 시에 비정기적으로 공연하였으며, 대략 1년에 최소 5회에서 많으면 10회 이상의 공연을 실시하였다. 현재는 양력 5월 5일의 어린이날에, 또한 봄~가을에 걸쳐 토요일 오후에 놀이마당에서 공연되고 있으며, 기타 외부 초청에 의한 부정기적인 공연이 이루어진다.
탈은 전부 바가지탈에 [창호지](/topic/창호지)를 덧대어 색칠을 한다. 그리고 눈과 입에 구멍을 뚫고, 코는 송피로 붙이며 눈과 입은 한지를 말아서 만든다. 염료는 현재 페인트를 사용하고 있다. 접착제는 풀을 사용한다. 탈보는 주로 흰색과 검은색이며, 붉은색도 사용한다. 크기는 대개 가로 20㎝ 정도에, 세로는 24~25㎝ 내외이다. 다른 탈에 비해 눈꼬리가 긴 편이며, 현재 스물석 점의 탈이 여러 벌로 갖추어져 있다.
춤은 거드름춤과 깨끼춤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거드름춤은 몸의 마디마디에 멋을 집어넣은 동작으로 사방치기, 용트림, 합장재배, 부채놀이로 다시 세분된다. 깨끼춤은 4박 타령장단에 맞추어 멋을 마디마디로부터 풀어내는 춤으로, 깎아 내리는 무예적인 깨끼사위와 고개를 끄덕거리며 상대를 유혹하는 고개잡이가 있다. 그리고 팔뚝잡이, 삼진삼퇴, 자라춤, 까치걸음, 여닫이(여다지),멍석말이, 곱사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황해도 해서 탈춤에 비해 춤이 섬세하고 우아하며, 손과 발을 이용한 다양한 춤사위가 발달해 있다.
장단의 경우, 섬세한 손춤을 중심으로 염불장단이 많이 나온다. 특히 춤의 경우 우리나라 탈춤 중에서 가장 분화・발전되어 있어서, 몸의 마디마디에 멋을 집어넣는 염불장단의 거드름춤과 함께, 매듭이 확실하고 섬세한 타령장단의 깨끼춤이 특징이다.
불림은 재담이 끝나고 춤으로 전환될 때 장단을 청하기 위해 사용하는 짧은 노랫말을 말한다. 대개 4음보 격의 가사나 잡가이며, 한자어가 삽입된 경우가 흔한 것으로 보아 양반 가사에서 삽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핵심 전승 계보를 보면, 19세기 초・중반 초기의 핵심 인물로 이을축・유인혁・노경무 등이 있으며, 1964년 지정 당시 보유자로는 신순봉(소무・상쇠), 고명달(노장・눈끔적이), 석거억(먹중・피리), 서정주(취발이), 함춘길(장구・먹중), 유경성(왜장녀・가면 제작), 박교응(첫 상좌・완보・옴중・말뚝이)이 있었고 이후에는 이병권(상좌・먹중), 김상용(먹중) 등이 있으나 모두 세상을 떴다. 현재 보유자는 노재영(옴중・취발이), 김순희(소무・미얄할미・해산 어멈)가 맡고 있으며 유한수・석종관・김순홍・홍상현・신해춘・김정선・김순응・유경수・이해윤・박기운 등이 주축이 되어 전승하고 있다. 양주의 경우 대를 이은 연희자들이 다수 나타나는데, 박준섭─박교응(2대), 김성운─김성태─김상용─김정선(현 전수 조교), 석성묵─석거억─석종관(현 전수 조교)가 대표적이다.
특징 및 의의
양주 별산대놀이는 약 200여 년 전에 서울 지역 본산대놀이를 현지인들이 토착화하여, 현재 본산대가 소멸된 상태에서 가장 오래된 산대놀이의 옛 형태를 전승하고 있다. 각 과장과 배역이 세분화되어 있고, 중 관련 과장이 다양화된 것이 특징이다.
양주 별산대 놀이마당의
내부 모습
2023년 01월 12일(목요일) 양주시 [불곡산&도락산] 산행기 산 : 양주시 [불곡산&도락산] [불국산으로도 불리는 불곡산(佛谷山)은 해발 470m로 그리 높지 않지만 '대동여지도'에 양주의 진산으로 나와 있다. 양주시 유양동 및 산북동의 경계에 솟아있으며 서울 근교의 다른 산과 달리 주말에도 붐비지 않아서 좋다. 산의 규모는 작으나 기암들로 이어진 오밀조밀한 산세를 자랑한다. 인근의 도봉산에 밀려 빛을 못보고 있으나 교통이 편리한데다, 봄철이면 진달래가 만발하는 산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3대 도둑으로 꼽히는 임꺽정이 불곡산 아래 마을인 양주시 유양리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도락산(道樂山)은 두락산(頭落山), 돌압산(突壓山), 돌압산(突押山), 돌악산, 노락산으로도 불리었다. 이처럼 여러 이름으로 불린 배경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모든 산들이 서울 남산을 향해 가는데 불곡산이 가로막고 길을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나서 덕계리 동쪽 방향으로 돌아앉아서 이로부터 돌악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돌악산이라는 이름은 도락산 정상에 있는 바위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즉, 돌이 많은 악산이란 뜻으로 돌악산으로 부르다가 도락산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돌압산, 도락산, 두락산, 노락산과 같은 이름이 나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다른 전설도 있다. 고려 건국 후 지관(地官)을 시켜 송도(松都) 근처 500리 이내의 산천을 돌아보게 했는데 도락산만 송도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예를 드리는 모양이라고 해서 고려 시대에는 충신산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 한양에서 건국되고 다시 한양 근처 500리 이내의 모든 산을 답사하도록 하였는데 오로지 도락산만 한양을 배반하고 있다 해서 조정에서 산의 머리[山頭]를 치게 했고 그로 인해 산의 머리가 떨어져 두락산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전설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고려 왕조를 지지하고 조선의 건국을 반대한 세력들이 바로 이 도락산 주변 지역에 많이 살았음을 반영하는 이야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부터 약 200여 년 전에 두락산이라는 이름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두락산과 음이 비슷한 도락산으로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산행코스: [ 양주 향교 버스 정류장~ 양주 순교성지~양주 향교~양주 별산대 놀이마당~양주 관아지~임꺽정 생가터~백화암~마애불~백화암~불곡산 주능선~펭귄 바위~불곡산 상봉~상투봉~생쥐 바위~물개바위~악어바위 능선~임꺽정봉~청엽골고개~도락산~지장사~덕계 저수지~덕계역 ] 일시 : 2023년 01월 12일(목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양주시 산북동 : 최저기온 영하 6도C, 최고기온 11도C]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6시간20분 소요) 09:43~11:07 연신내역에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출발하여 종로3가역으로 가서 1호선으로 환승해서 양주역으로 이동 [1시간24분 소요] 11:07~11:21 양주역 2번 출구로 나와서 길을 건너 양주역 버스 정류장에서 양주 향교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51번 버스 승차 대기 11:21~11:28 양주역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양주 향교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7분 소요] * 11:28~11:31 양주 향교 버스 정류장에서 산행출발하여 양주 순교성지로 이동 [양주 순교성지는『치명일기』의 기록을 통해, 병인박해 때 다섯 분이 순교한 치명지를 2004년 의정부교구 설립 뒤에 새롭게 찾아내 성역화를 진행하고 있는 성지다. 증언을 통해 오래전에 순교지라는 표지석이 있었던 자리를 확인하고 토지 매입을 진행하여, 2016년 5월 28일 의정부 교구장 이기헌 주교의 주례로 성지 선포 미사를 봉헌하며 성역화를 시작하였다. 양주 순교성지 주변에는 양주 향교와 최근에 복원이 이루어진 양주 관아, 그리고 국가 무형 문화재 제2호인 양주 별산대놀이 공연장이 자리하고 있어 더 많은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순교하신 다섯 분에 대한 “치명일기”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 용인에서 살다가 양주관아로 잡혀온 “김윤오 요한”과 “권 마르타” 부부 * 성 김대건 신부님께서 부제로 조선에 왔다가 중국으로 갈 때 함께 간 사람으로 추정되는 최 프란치스코의 아내인 “김 마리아” * 홍주에서 순교한 박사행 부부의 아버지인 “박 서방” * 양주 일담리 출신이면서 아버지(홍몽노 베드로)와 삼형제가 함께 순교한 가족의 둘째 아들인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 11:31~11:35 사진촬영 * 11:35~11:36 양주 향교로 이동 [1401년(태종 1)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6·25 때 폐허화되었던 것을 1959년에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건축형태는 명륜당이 있고, 그 뒤 내삼문 안쪽에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한식 골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이고, 명륜당은 석축 위에 주춧돌만 남아 있다. 동재와 서재가 없다.] * 11:36~11:38 사진촬영 * 11:38~11:39 양주 별산대 놀이마당으로 이동 * 11:39~11:42 사진촬영 * 11:42~11:45 양주 관아지로 이동 * 11:45~11:53 양주 관아지 탐방 * 11:53~12:07 임꺽정 생가터로 이동 * 12:07~12:22 백화암으로 이동 * 12:22~12:24 사진촬영 * 12:24~12:30 마애불로 이동 * 12:30~12:48 사진촬영 후 간식 * 12:48~12:51 백화암으로 회귀 * 12:51~13:03 불곡산 주능선으로 이동 * 13:03~13:14 펭귄바위로 이동 * 13:14~13:17 불곡산 최고봉인 상봉(469m) 정상으로 이동 * 13:17~13:26 사진촬영 * 13:26~13:36 불곡산 상투봉(425m) 정상으로 이동 * 13:36~13:38 사진촬영 * 13:38~13:44 생쥐 바위로 이동 * 13:44~13:48 사진촬영 * 13:48~14:03 물개바위로 이동 * 14:03~14:05 악어바위 능선 진입지점으로 이동 * 14:05~14:22 악어바위 능선으로 진행하여 공기돌 바위, 아기물개 바위, 코끼리 바위, 신선대, 공룡바위, 악어 바위를 거쳐서 삼단바위로 이동 * 14:22~14:26 사진촬영 * 14:26~14:35 악어바위 능선 진입지점으로 회귀 * 14:35~14:42 불곡산 임꺽정봉(445m) 정상으로 이동 * 14:42~15:02 사진촬영 * 15:02~15:39 청엽골 고개로 이동 * 15:39~16:07 도락산 정상과 지장사의 갈림길 3거리로 이동 * 16:07~16:24 도락산(440m) 정상으로 이동 * 16:24~16:26 사진촬영 * 16:26~16:36 도락산 정상과 지장사의 갈림길 3거리로 회귀 * 16:36~16:48 지장사로 이동 * 16:48~16:55 지장사 탐방 * 16:55~17:07 덕계 저수지로 이동 * 17:07~17:48 경기도 양주시 덕계로 126 번지에 있는 덕계역으로 이동하여 산행 완료 [2023년 01월 12일 경기도 양주시 일몰시각 : 17시33분] * 17:48~17:52 덕계역에서 종로3가역으로 가는 1호선 열차 승차 대기 * 17:52~19:17 덕계역에서 1호선 열차를 타고 종로3가역으로 가서 3호선으로 환승하여 연신내역으로 이동한 후 6호선으로 재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1시간25분 소요] 양주시 [불곡산&도락산] 산행지도 불곡산 기암괴석 위치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