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 나는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 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상처는 상처로밖에 위로 할 수 없다. 이미 말한 바 있지만 나는 술이 세다. 내가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 있다면 그 것은 오직 하나, 여자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남자들과 겨루어도 지지 않을 정도 의 실력을 자랑하는 주량이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내 주량이 얼만큼인지 측정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다만 늦은 밤 거리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 잠드는 취객들이 몹시 이상 하다고만 생각했다. 내가 마셔 본 바에 의하면, 쓰러질 정도의 취기를 위해 필요 한 술의 양은 거의 무한정이었다. 바닷물의 부피를 잴 수 있는자. 누구인가. 대학에 들어와 보니 어젯밤 소주 두 병을 마시고 떨어졌다느니, 막걸리 한 말 을 셋이 다 마셨다느니, 체육과 누구는 중국집 배갈을 두 대접 연거푸 마시고도 끄떡없다느니 하는 식으로 제법 타인들의 주량에 관한 여러 가지 숫자적인 정보 를 들을 수 있었다. 비교할 수 있는 숫자가 있었고, 비교할 수 있는 상대방이 있 었으므로 비로소 나는 내 속에 들어 있는 어마어마한 아버지의 세력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나는 어떤 자리에서도 술을 사양해 본 적이 없었으며 또한 어떤 자리에서도 술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해 지척거리거나 주저앉아 본 적이 없다. 그랬지만 나는 내 주량의 꼭지점을 시험해 보기 위한 어리석은 시도 는 해본 적이 없었고 아울러 너무 마셔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는 남 자들의 무용담 따윈 한 번도 부러워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일에 확 트여 버리 면, 아주 뛰어나 버리면, 바닷물이 시냇물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돌아누워 끙 낮 잠을 자 버리듯이 그렇게 시시해져 버리는 것이었다. 술에 관한 한,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몸의 균형 감각을 잃지 않는 점은 확실히 아버지를 닮았 다. 내 아버지가 그랬다. 자신의 입으로 소주 몇병을 마셨다고 토로하지 않는 한 누구도 아버지가 얼만큼 술을 마셨는지, 아니 대체 술을 마시기는 했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 육체의 균형 감각을 잃기 전에 언제나 먼저 정신의 균형감각부터 무너지는 사람이 아버지였다. 그것이 내 아버지의 불행이었다. 내가 남들보다 술 에 대해 월등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된 대학시절 초반 몇 년을 제외하곤 가능한 한 술을 마시지 않은 것도 어쩌면 그런 두려움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타인들 앞에서 '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나를 장악할 수 없어 스스로를 방치해 버리는 순간을 맛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결단코 '나'를 장악하며 한 생애를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못 했지만, 나는 해내야만 하는 것이 었다. 그러나, 이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이상은 술에 대한 장황한 보고나 일 삼으며 에둘러 갈 수는 없다. 마침내 내가 나를 놓쳐 버리고 만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것을, 나에게도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 는 것이다. 하루 온 종일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불꽃 같던 단풍잎이, 벌레먹어 구멍 숭숭 뚫린 떡갈나무 이파리들이, 저 홀로 피고 지는 들꽃들의 잔해가 빗물에 쓸려 바 다로, 바다로 떠내려가던 날이었다. 서울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 었다. 내 옆에 그가 있었다. 김장우. 9월로 계획했던 우리들의 가을 여행은 아무리 기다려도 9월이 가을답지 않아 자연스럽게 10월로 미루어졌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여행이 연기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기는 했다. 우선, 김장우는 형이 경영하던 여행사가 산산조각으로 부 서지는 것을 두손 늘어뜨리고 지켜 봐야만 하는 고통이 있었다. 형은 가지고 있 던 아파트와 늙어서 행여 사랑하는 동생과 나란히 집 짓고 살수 있을까 해서 마 련해 두었던 시골의 땅자락과 자동차까지 다 팔았다. 동생은 잔액이 몇 십만 원 인 통장까지 모조리 형에게 내밀었다. 형은 잔액이 몇 십만 원인 통장만 받고 나머지 적금 통장은 동생에게 돌려 주었다. 야 이눔아, 죽지 않으려면 최소한 씨 앗 값은 남겨야지, 형은 이렇게 말하며 동생의 등을 툭 쳤다던가... 나도 만만치가 않았다. 나에겐 진모가 있었다. 진모는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검찰 수변에서 흘러 나오는 온갖 정보들을 검토하고 분석하 느라고 아예 가게문을 닫아 걸었다. 어머니 같은 보호자들만 골라 전문적으로 사기를 치는 사건 브로커에게 걸려 한 차례 생돈을 날린 후로 조금 기가 꺽였지 만, 그래도 어머니는 아침마다 건전지를 갈아 끼운 기계 인간처럼 싱싱하게 일 어나 온 종일 뛰어다니다 저녁이면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일과를 버리지 않았 다. 어머니는, 정말 어머니는 대단했다. 사건 브로커에게 걸려 돈을 뜯긴 후 어머 니는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형법에 관한 책을 한 권 사 들고 왔다. 법을 알아야 법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어머니의 논리는 지극히 당연했다. 문제는 그 전문 서적을 어머니가 읽어 낼 수 있느냐는 것뿐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나는 시 내의 대형서점을 뒤져서 전직 검사나 현직 변호사들이 법에 관해 쉽게 풀어 쓴 책들을 두 권 골라 냈다. 깊은 밤, 내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서 돋보기를 쓰고 법정 이야기들을 읽었다. 몇 달 전에는 그렇게 일본어 회화책을 읽었고 지금은 형법책을 읽는 어머니. 이미 말했듯이 어머니는 궁지에 몰리는 마지막 순간에는 버릇처럼 책을 떠올리 는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면, 예기치 않은 삶의 곤경에 처할 때마다 어머니가 읽 었던 여러권의 책들 중에는 형법책 못지않은 난해하고 어려웠던 독서가 또 있었 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책의 제목은 아마 '정신문열증의 이해와 치료'일 것이 었다. 어찌나 두꺼운지 읽다가 베개 삼아 잠들어도 좋았던 그 의학책은 아버지 를 위해 어머니가 선택한 책이었다. 그때도 그랬듯이 지금도 어머니는 진지하게 책을 읽었다. 아니, 그때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때는 없었던 돋보기가 어머니의 독서를 한층 그럴싸하게 만들고 있었으므로. 이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독서는 아닐 것이었다. 그것은 짐작 할 수 있지만 미 래에 내 어머니가 읽어야 할 책이 무엇인지, 세상과 맞서 싸우기 위해 또 어떤 난해한 분야의 책들을 골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 다. 다만 한 가지, 어머니는 결코 이모가 읽어 내는 그 많은 소설책이나 시집을 선택해 책값을 치르지 않을 것이란 점만은 분명했다. 이 쌍둥이 자매들은 똑같 이 책에 의지하는 성향이 강한 편이었지만, 선택하는 책은 이토록이나 정반대였 던 것이다. 마치 그들의 삶처럼. 어머니의 맹활약에 비하면 지난달 내가 진모를 위해 한 일은 한 번의 면회밖 에 없었다. 죄수복 차림의 진모 모습을 보는 일은 한 번으로 족했다. 나는 두 번 다시 면회 신청서에 내 이름을 기재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진모도 그런 점 에서는 내 생각과 같았다. "누나, 여기 오지 마. 엄마 오는 것은 괜찮지만 누나까지 이런 곳에 들락거리 하고 싶지 않아. 알겠어?" 알겠어,라고 확인할 때는 이마를 찌푸리고 제법 언성을 높였다. "여기도 괜찮아. 한번쯤은 와 볼 만한 곳이지. 오래 있을 곳은 못 되지만 말야. 생각보다 견딜만 해." 어떤 일이든 닥쳐서 견디고 나면 스스로가 대견한 법이었다. 그일이 비록 죄 를 짓고 갇히는 일이라 하더라도 진모는 또 폼을 잡고 있었다. 어떤 스타일로 자신의 모습을 연기해야 하는지 벌써 간파한 표정이었다. 이번에 진모가 택한 연기는 사형을 앞둔 거물급 사형수의 대담함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번 일로 진모가 개과천선해서 새 삶을 살 것이라는 교과서적인 기대는 일찌 감치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애시당초 진모에게는 새 삶이라는 것이 없을지도 몰 랐다. 그 애에게는 삶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다만 역할이 바뀔 뿐이었다. 어떤 역할이 주어져도 진모가 못 해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애의 마음 속에 확 고부동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 애만의 우상이 존재하는 한은. 진모 때문에 나는 울지 않았지만, 김장우는 자신의 형 때문에 내 앞에서 눈물 을 비쳤다. 진모의 일을 말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 험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내 불 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닌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 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나 역시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이러이러한 일로 지금 죄수복을 입고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 줄 수 있었다면 김장우의 아픔은 훨씬 가벼워졌을 것인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 다.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결국 말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왜 그랬는지, 왜 김장우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은지 여행을 떠날 때까 지 나는 정녕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마침내 나를 알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아직은 더 의심해 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되어 가고 있는 모든 일들의 앞뒤를 꼼꼼이 더 살펴봐야 한다고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다. 여행에 대하여 날짜를 못박은 사람은 나였다. 김장우와는 언제나 그랬으므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먼저 회사에 사흘간의 휴가를 신청하고 그 사 실을 김장우에게 통고하였다. "그래도 괸찮아?" 내 통고에 대한 김장우의 응답이었다. 무엇이 괜찮으냐는 것인지 알 수 없었 지만 나는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정말 괜찮아?" 그가 다시 확인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회사나 집 같은 외부 조건을 묻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역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디까지 괜찮을까... 괜찮아? 김장우의 이 질문은 여행의 시작은 물론이고 우리가 함께했던 2박 3일 동안 수도 없이 되풀이되었다. "도솔산 선운사로 갔으면 싶은데, 부안에서부터 바닷가 끼고 달리는 길이 좋거 든. 어때? 괜찮을까?" "아무 데나. 장우 씨 좋은 곳이면 나도 좋아요." 행선지도 이런 식으로 정해졌다. 떠나는 날짜가 정해졌으므로 이제부터는 바 람 부는 대로, 구름 가는 대로 떠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나영규가 아닌 김장 우에게 여행의 충실한 일정표를 기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김장우가 선운사, 라고 행선지를 입에 올린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약속 시간에 나타난 김장우의 지프는 몰라보게 산뜻해져 있었다. 그 나름대로는 열심히 여행에 대비 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하루 온 종일 닦고 광냈다는 표시가 너무나 역력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 나왔다. 마음에 담아 둔 것을 내보이는 데 한없이 서 투른 사람. 그렇지만 마음 속에 모든 것이 다 있는 사람. "안진진! 괜찮아?" 서울에서 고창까지, 점심 먹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대여섯 시간 달리는 중에도 그는 한 시간에 한 번씩 긴장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괜찮지 않으면 지금이 라도 늦지 않으니 당장 차를 돌릴 수 있다고 묻는 것 같았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 마음속에는 나도 모를 비장한 각오가 점점 굳세어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길을 달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디 그것뿐이었을까. 하염없이 반짝거리는 녹색 물결을 끼고 달리는 해안도 로의 절경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숨막히는 비장미를 뿜어 내고 있었다. 우리는 묵묵히 너무도 아름다워서 울고 싶은 풍경 속을 뚫고 달렸다. 저 바닷곡으로 이 지프가 굴러 들어가도 무방해...이 고단한 생애를 등지고 물결의 포말이 되어도 상관없어...정말 괜찮아... 그러나 다시 붉은 황토의 밭들이 나타나고 육지의 마을들이 차례차례 스쳐 갔 다. 나는 바다를 잊을 수 없어 연신 뒤를 돌아다 보았다. 세상의 모든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과거를 버릴 수 없는 것인지도. 석양이 붉게 물들 시각 우리는 선운산 도립공원 주차장에 차를 댔다. 여관과 술집, 식당들은 벌써 붉고 푸른 네온등을 밝혀 놓고 있었고 관광철답게 이곳에 도 사람들은 알맞게 붐비고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릴 줄을 모르고 망설이고 있 는 김장우를 보면서 나는 알았다. 지금은 다시 내가 앞장서야 할 순서라는 것을. "저기 저 모텔. 거기서 자고 싶어요. 그리로 가요. 괜찮겠지요?" 그리하여 우리가 두 밤을 자야 할 숙소도 그 물음과 함께 결정 되었다. 이번 에는 내가 서슴없이 그 물음을 차용했다. 외벽은 돌로 치장하고 방마다 작은 베란다를 붙여 놓아 수수한 별장처럼 보이 는 그 모텔에서 방을 교섭하는 일 역시 내 몫이었다. 숙박객이 많아서 그러 수 도 없었지만 애시당초 방을 두 개 달라는 주문 따위 나는 할 생각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영화에서나 소설에서 그런 연인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냉소했다. 방이 하나든 둘이는 이루어질 일은 다 이루어지며, 이루어지지 않을 일은 어떻 게든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사람들이 어디 있는가. 우리가 얻은 방은 다행히도 온돌방이었다. 김장우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을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침대라는 물건이 우리에게 줄 그 많은 이미지들 을 어찌 감당할는지 나는 도저히 자신할 수 없었다. 마음이 이미지를 이끄는 것 이 아니라 이미지가 우리들 마음을 이끌어 버렸을 때 그 자괴감을 어찌 견딜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세속의 도시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침대는 정신보다 육체 를 더 많이 요구하는 침구라는 사실이었다. 특히 숙박업소의 침대는 더욱 그랬 다. 여행의 첫 밤은 침대가 주는 경구를 충실히 지켜서 몹시 담백 했다. 저녁을 먹고, 숙소 주변을 산책했으며, 맥주 두 병을 사들고 방으로 들어와 그것을 한 병씩 나누어 마셨고, 차례차례 몸을 씻었으며, 요 두 개를 나란히 펴고 잠들었 다. 노후에 부부가 함께 온천 여행을 다닌다면 꼭 이럴것이었다. 자기 전에 확인 해본 시계가 세상에, 열한 시 오 분이였다. 이 시각이면 집에서도 좀처럼 잠자리 에 들 시간이 아니었다. "무엇이 무서워서 이렇게 일찍 자야 해요?" 불을 끄면서 나는 기어이 한 마디 했었다. "무섭긴. 운전하고 오느라 피곤해서 그래." 김장우는 씨익 웃으면서 고단한 척 돌아누웠다. 그뿐이었다. 나는 편안하게 잠 들었다. 김장우의 그 밤도 숙면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새벽이었던가, 아니면 한밤중인가, 베란다로 나가는 문이 열리는 기척은 느꼈지만 닫히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 김장우가 늘 들고 다니던 커다란 가방, 카메라와 렌즈와 필름통들이 가득 들 어 있던 낡은 가방을 이번 여행에는 동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다 음날 낮이었다. 선운사 경내를 돌아보고 도솔암을 찾아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중 그가 걸 음을 멈추면 거기 반드시 놓고 온 카메라가 생각 나는 야생화들이 있었다. "이거, 매미나물. 봄부터 가을까지 이렇게 숲 속에서 저 혼자 피고 지는 꽃. 줄 기를 자르면 안 돼. 아프다고 피를 흘리거든." 가느다란 줄기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노란꽃이 애닯다. "이게 바로 구절초. 우리가 흔히 들국화라고 부르는 꽃들의 진짜 이름은 구절 초야. 쑥부쟁이 종류나 감국이나 산국 같은 꽃들도 사람들은 그냥 구별하지 않 고 들국화라고 불러 버리는데, 그건 꽃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꽃을 사랑한다 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 줘야 해. 이름도 불러 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냐." "왜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았어요?" 카메라가 없으면서도 버릇처럼 이쪽 저쪽으로 구도를 잡아 보며 한참 동안 꽃 옆을 떠날 줄 모르는 김장우. "있으면 찍으니까. 보지는 못하고 찍기만 하니까." "그래요. 맞는 말이에요." 나는 김장우의 말을 이해했다. "이유야 또 있지. 안진진이 있잖아. 옆에서 말도 해주고 같이 웃어 주고 쉴새 없이 숨소리를 내는 안진진이 있어서 순간순간이 충만할 텐데 뭣 때문에 카메라 를 가져오겠니. 나는 이번 여행에서 사랑하는 꽃이름을 불러 주는 대신 안진진 의 이름만 열심히 부르기로 결심했어." 대답 대신 나는 김장우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말할 줄 아는 그가 마음에 들 었다. "나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젯밤처럼 오늘 밤도 안진진이 내 옆에서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 거라는 사실...실감하기 어려워. 나, 아까부터 그런 생 각 했었다. 살다 보면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는 것을,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너 무 외로웠구나, 하는 생각...이젠 그런 생각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되지? 괜 찮지?" 그래도 된다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괜찮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나 란히 숲길을 걷고 있는 그와 나 사이의 간격을 확실하게 좁혔을 뿐이었다. 어깨 가 맞닿았으므로 손을 맞잡고 있기는 불편했다. 적절하게도, 김장우는 그 순간 내 어깨에 팔을 둘러 우리들의 자세를 확실하게 조절하였다. 나는 그에게 기대 어 숲 향 그윽한 오솔길을 걸었다. 사실을 말하면 나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중이었다. 이것이 사랑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한쪽 어깨를 빌려 주고 기대는 것, 이것이 사랑일까..... 나영규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확실히 김장우에게는 있었다.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 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 있다. 끝까지 달려가 보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어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깨어져 죽어 버 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그 무엇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힘이 사 랑이라면,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의 손을 잡았다.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처음으로 나, 안진진의 사랑을 상면한 이후 내 기 분은 급격히 저조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나는 다만 이것이 사랑인가, 하고 사랑을 묻다가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답 했을 뿐이었다. 오직 그것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가라앉기만 했다. 걸음은 자꾸 허방을 디뎠고, 눈길은 쓸쓸하게 텅 빈 허공을 헤매었다. 마음자리 어딘가에 커 다란 구멍이 하나 생겨서 거기로 가을 찬바람이 쉭쉭 드나들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누구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사랑을 만난 다음 이 이렇다는 고백을 나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자매에게서 물려받은 기질로 잡다한 책들을 제법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는데, 영화광은 아니 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도 많이 보았는데, 그렇다면 모든 책과 영화들이 나를 속인 것이었을까. 사랑을 맞은 후의 느낌이 이토록 황폐한 것임에도 불구 하고 모두들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나에게, 이 안진진에게 문제 가 있음이 확실했다. 당황하면 엉망이 되는 것이 나의 약점이었다. 나는 여행의 둘째 날을 슬슬 망 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니, 그럴 조짐이 보였다. 갑자기 어제 지나왔던 서해 바다가 떠오른 것부터 수상쩍은 일이었다. "괜찮아? 안진진, 어디 아픈 것 같다. 아프면 방에 들어가서 쉬자. 나는 괜찮 아." 점심부터 먹자는 그의 제안을 뿌리치고 주차장의 지프를 찾아가는 나를 그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밥은 바닷가에서도 먹을 수 있잖아요. 먹어야 한다면 거기서 먹지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어요. 어디든 가요, 우리."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는 말은 또 얼마다 느닷없는가. 무엇을 하기 위한 시 간이? 이미 말은 쏟아졌고 나는 그런 내가 싫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자신이 시간을 화려하게 장식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는 김장 우는 미안한 표정으로 지프의 시동을 켰다. "머리가 아파요." 나는 시트에 머리를 기댔고 김장우는 내 머리를 짚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 을 감았다. 그것도 실수였다. 눈을 감다니, 이렇게 유치할 수가. 하지만 눈을 떠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뜨거워. 어떡하지?" 김장우의 호흡이 내 얼굴에 쏟아졌다. 그의 손은 아직도 내 이마에 있었다. 그 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의 낡은 지프 안에서 우리의 첫번째 입맞춤이 있었다 는 것을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내가 또 그렇게 싫었다. 순진하지 않은 나, 몽롱해지지 않는 나, 이마는 뜨거워도 머릿속은 한없이 명료 하기만 한 내가 정말 싫었다. 하필 그때, 몰입하지 않고 딴 생각 많은 스스로를 역겨워하고 있는 그때, 김장 우의 손이 움직였다. 그의 손이 머뭇거리며 내 볼을 쓰다듬었다. 내 코에도 입술 에도 그의 손이 닿았다. 숨쉬기가 몹시 불편해졌고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가 다 음에 어떤 동작을 취할지 어떤 말을 할 것인지 영악한 나는 다 알고 있었다. 다 알면서 모른 척하기는 싫었다. 심연으로 가라앉은 내 마음이 나에게 일렀다. 이 남자를 놀리지 말라고. 그래서 나는 눈을 번쩍뜰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로 그렇게 했었다. 그러나 늦고 말았다. 내 눈앞에 확대된 남자의 얼굴이 있었 다. 동시에 말도 있었다. "사랑해." 나는 김장우의 눈을 똑바고 쳐다보았다. 갑자기 내 시선에 노출된 그의 검은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 안에 내가 담겨 있는 것을 나 는 보았다. 나는 슬그머니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김장우의 손도 원위치로 돌아 갔다. 그의 지프가 주차장 구석에 세워져 있던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고 나 는 생각했다. 어쩌면 김장우도 충분히 주위의 시선을 고려한 뒤에 내 이마에 손 을 얹었을 것이라고도 짐작했다.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나는 그 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참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나는 밖을 보고, 그 는 나를 보고. 그날 오후, 우리의 자세는 그렇게 고정되었다. 나는 시종일관 밖을 보았고 그 는 운전하는 틈틈이 나만 보았다. 내가 너무 고집스럽게 바깥만 보았기 때문에 마침내 그도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나는 나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사 랑이다,라는 결론이 난 후부터 나는 나를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김장우는 언제 이것이 사랑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는지 나는 알고 싶었다. 그런 뒤에도 아무렇지 않았는지 그에게 묻고 싶었다. 나처럼 이렇게 누군가 발목을 붙잡고 잡아당기고 있는 느낌, 가슴에 구멍이 뚫려 눈물이 나도록 외로운 느낌이 혹시 있었느냐고 의논하고도 싶었다. 바다는 다시 보아도 좋았다. 간간 고깃배가 떠 있고 고깃배 위로 뭉개구름 몇 조각이 친구하며 따라가는 풍경을 지나자 가파른 절벽 밑의 푸르른 물결이 나타 났다. 미풍에 흔들리는 물결은 자잘하고도 섬세한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저 바다에 광풍이 불기도 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랴. 나는 활짝 내 린 창턱에 고개를 괴고 물끄러미 바다만 보았다. 파도에 부서지는 가을 햇볕 사 이로 갈매기도 날았다. 거기 갈매기가 살고 있다는 너무 당연한 사실 앞에서 나 는 새삼스레 놀라기도 했다. 사랑에는 몰입할 수 없었지만 바다는 온 정신을 다 바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사랑이 아름답다고 하는 말은 다 거짓이었다. 사랑은 바다만큼도 아름답지 않 았다. 그럼에도 사랑은 사랑이었다. 아름답지 않아도 내 속에 들어앉은 이 허허 한 느낌은 분명 사랑이었다. 지금 내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굴곡 심한 도로를 운전하고 있는 이 남자는 처음으로 내게 다가온 사랑이었다. 마음 속으로 열두 번도 더 '안진진, 괜찮아?'라고 묻고 있을 이 남자를 통해 나는 앞으로 사랑을 배울 것이었다. 때로 추하고 때로는 서글프며 또한 가끔씩은 아름답기도 할 사 랑을... 믿지 않겠지만, 그날 우리는 부안과 고창 사이에 뚫려 있는 해안도로를 여섯 번 되풀이 달렸다. "한 번만 더 달려 줘." 해안도로에서 벗어나 육지가 나타나면 나는 금방 조바심을 느꼈다. 김장우는 묵묵히 샛길에서 차를 돌려 오던 길을 다시 갔다. "한 번 더. 이번에는 좀 빨리." 나는 명령하였고 김장우는 충실히 명령에 순응했다. 어느 순간부터 김장우의 손에 끊임없이 타고 있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고속을 감당할 수 없는 노후한 지프가 무지막지한 소음을 내지르며 바닷가를 달렸다. 전면이 트이지 않은 굽이 길을 달릴 때만 가까스로 속력이 낮춰졌다. 내 머리칼은 바닷바람에 미친 듯이 나부꼈다. 그래도 나는 결코 바다에 지치지 않았다. 아니, 바다에 지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차에서 내려 어딘가에 자리를 잡으면 무너지고 말 것 같다는 예감 이 나를 바다에 붙들어 매었다. 그러나 한없이 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달리기만 할 줄 알고 멈출 줄은 모 르는 자동차는 아무 쓸모도 없는 물건이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었다. 언젠가는 멈추기도 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섯 번째 질주에서 마침내 멈추었다. 가슴 속 구멍이 바다만으로 막기 어렵다면 술을 마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가까스로 나의 질주를 멈추게 하였다. 술을 마시면 남은 시간들이 더 엉망이 될지도 모른 다는 우려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자신 있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술에게 져 본 적이 없는 나 안진진, 마침내 운명의 대결을 벌일 시간이 왔 다는 비장감은 돌연 지독한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목이 말라요. 갈증 때문에 말도 못 하겠어." 격포의 한 횟집에 자리를 잡자마자 내가 한 말이었다. "아줌마, 여기 콜라나 사이다부터 한 병 주세요!" "그리고 소주도 한 병." 갈라진 내 음성이 김장우의 주문에 하나를 더 보탰다. 그가 나를 보았다. 바람 에 헝클어진 머리칼들이 그를 몹시 피곤하게 보이게 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 해 밖을 보았다. 거기에도 바다가 있었다.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 모래사장을 걷는 남자들과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깔깔 웃어 대는 여자들이 점령하고 있는 바 다가 거기 있었다. 처음부터 무작정 술만 마실 생각은 결코 아니었다. 운명의 대결을 하기 위해 서는 준비가 필요한 법, 제대로 밥을 먹고 난 다음에 수많은 소줏병들을 격파할 계획이었다. 행여 있을지도 모를 실수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빈 속에 술을 들 이붓는 어리석은짓을 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 잔의 술로는 타는 듯한 갈증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소주가 다섯 잔쯤 들어가자 비로소 숨쉬기가 편해졌다. 회가 나오기 전에도 한 상 가득 안주 거리 들이 차려졌지만 좀처럼 식욕이 솟지 않았다. 나는 나를 믿었다. 예전에 그런 일 이 많았다. 소주 몇 병을 마시고 귀가한 다음에도 나는 말짱한 맨정신으로 늦 은 저녁을 차려 얼마든지 한 그릇 밥을 비울 수 있었다. 술 몇 잔이 내 속의 오 만을 부추겼다. 그리고 시작이었다. 나는 단 한 숟갈의 밥도 먹지 않았다. 김장우의 강권으로 회 몇 점을 먹은 것이 전부였다. 어느쯤에선 김장우가 더 이상 주문을 해주지 않아서 내가 직접 나서야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손님이 라곤 우리밖에 없었기에 밖에서 해찰을 하고 있는 여주인을 찾아 내 술을 더 주 문하고 지금까지의 음식값을 모두 치르고 돌아온 기억까지 생생하니까. 그리고 또, 아무리 술을 마셔도 김장우의 빈약한 지갑 사정을 잊어버리지 못하는 스스 로에게 마음 속으로 엄중히 경고했던 것도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이봐, 안진 진. 잊어. 끊어. 제발 맹목적으로 마셔 봐, 제발... "그만. 그만 마셔. 괜찮아?" 김장우의 부르짖음이 열두어 번, 혹은 스물두어 번 있었을까. "제발, 그 괜찮아,라는 말 좀 그만 할 수 없어요? 제발 그 똑같은 대사말고 보 다 신선하고 새로운 말 좀 할수 없나요?" 이러한 나의 외침이 한 서너 번, 혹은 대여섯 번 있었을까. 그리고 또 몇 가지 말들이 오고 가기는 했었다. 돌아가서 마시자고, 나도 술을 마시고 싶지만 운전 때문에 못 마시고 있으니 어서 돌아가서 마음껏 마셔 보자고 나를 달래던 김장 우의 말이 있기는 하였다. 그럴 듯한 유혹이어서 나 역시 그러자고 대답했던 것 도 같은데... 그런 직후, 마침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거기까지가 내 속에 인화된 필름의 전부였다. 그 다음부터는 엉망진창이었다. 끊겼다,이어졌다, 다시 끊기고는, 그리고 영영 끊어져 버렸다.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시간의 실종이 내게 일어났던 것이었다. 완벽한 시간의 실종, 나는 경악했다. 돌아와서 모텔 옆 나이트클럽에서 양주를 마셨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 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또 김장우의 빈약한 지갑을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소주로! 소주로 마셔오. 섞어 먹으면 안 좋아..."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김장우가 알려 주었다. "낯설어 죽겠단 말야. 왜 그렇지? 장우 씨는 알아? 갑자기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무서워. 사는 법을 잊어버렸다구요. 사량하면 이런 거야? 사랑하면 이렇게 세상이 낯선 거냐고..." 소주에 관한 말은 끊겼지만, 낯설음에 대한 절절한 고백은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진실, 바로 그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달리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당황해하는 출발선상의 장거리 선수처 럼 나는 그날 오후 한없이 막막했던 것이다. 오른발부터 내밀고 달려야 하는지 왼발 먼저 힘을 줘야 하는 것인지, 아니, 어디를 움직여야 이 무거운 몸이 앞으 로 나가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된 마라토너의 절망이 고스란히 내 것이었음 을 김장우는 정녕 모를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우리들의 방으로 돌아온 것일까.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가 가장 처음 가진 의문은 그것이었다. 나는 전날 밤과 똑같은 요 위에서 눈을 떠 아침을 맞았다. 눈을 떠 보니 옆자리에 김장우가 지 친 모습으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얼굴을 내 쪽으로 하고, 팔 하나는 마치 무언 가를 잡으려다 놓친 사람처럼 방바닥에 쓸쓸하게 내던져 놓고. 그 다음 본 것이 바뀌어진 내 옷차림이었다. 어제 분명히 청바지에 니트 스웨 터를 입고 있었는데 아침의 나는 잠옷 대신으로 가져온 간편한 면티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행 첫날밤에도 나는 이 옷을 입고 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옷을 갈아입은 기억은 기억은 없다고 나 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외치다 말고 나는 그만 요 위에 푹 엎드리고 말았다. 몇 개의 기억들이 토막토막, 퍼즐 기처럼 그렇게, 엎드려 있는 내게로 스며들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억의 조각들을 붙들었다. 아마 방이었을 것이다. 김장우가 물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 주었던것 같다... 구토를 했던 기억, 그때도 여전히 나는 무언가 겁에 질려 있었다...그가 내 얼굴 만 닦았던 것은 아니다...발을 닦아 주던 그, 목덜미를 닦아 주던 그, 차가운 물 수건이 가슴을 문지르던 기억도 나는데...... 그리고...그리고...그가 내 옷을 벗겼다.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그랬던 것 같으 나 자세히는...아,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던 김장우의 얼굴도 생각이 난다...그의 벗은 윗몸, 억세게 가로질러 있던 쇄골을 보았지...그 다음, 뭔가 기다 리고 있던 일이 일어났었어...그 일이 있고서야 내 정신은 잠 속으로 편안히 떨 어졌어...비로소 모든 일을 다 이루었다는 느낌이 내게 있었지...편안했어. 거기까지 조각 기억을 맞춘 나는 엎드렸던 몸을 펴고 편안히 누웠다. 내가 무 슨 일을 했는지 알았으므로 이제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이대로 한숨 더 자도 좋아, 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느낌, 이제는 그만 평화를 누리고 싶었다. 나는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곤한 잠에 빠진 김장우의 방심한 얼굴이 혈육같이 여겨졌다. 나는 방바닥에 내던져진 그의 쓸쓸한 팔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항아리 에 물이 넘치듯 사랑이 넘치는 느낌,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팔에 얼굴을 묻었 다. 잠시 후 김장우가 잠 속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선명하게 팔뚝을 통해 전달 되었다. "괜찮아?" 그가 물었다. 편안한 음성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꾼. 아, 지독한 술꾼." 김장우가 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으며 한탄했다. "왜 그랬어?" "뭘요?" 필름이 끊겼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나는 조심스레 되묻는다. 내가 또 무 슨 짓을 했는가. "저 아래 나이트클럽에서 말야. 안진진이 날 때렸어. 기억 안나? 내 빰을 치고 내 등을 마구 두들겨 팼지. 날 가두지 말라고, 무섭다고 그랬어...마구 큰 소리로 외쳤어. 가두면 죽이겠다고까지 그랬지. 내가 안진진을 그렇게 괴롭혔나 생각하 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한번 물어 보자. 안진진한테 나는 감옥이니?" 감옥? 간수? 내가 그랬다고? 아, 나는 전율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대사였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난동을 부 리던 그날 밤, 아버지가 말했었다. 당신은 나를 가두는 간수 같았어, 당신은 몰 라, 그 절망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내 속에 아버지가 있었다. 행방 불명인 아버지가 내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이 떨리고 있는 것을 감추기 위해 나는 더욱 더 김장우의 품 속으로 파고들 었다. 나를 안고 있는 김장우의 팔에도 더욱 힘이 가해졌다. "대답해 봐. 나, 너한테 감옥이 될 것 같아?" "아니요 절대로 아니요 내 말은...그 말의 뜻은...장우 씨를 너무 사랑하게 될까 봐 무섭다는 뜻이었어요 정말이에요. 진심이에요." "정말?" "그래요. 어제 처음으로 확실히 알았거든요. 내가 지금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그래서, 감당하기가 어려웠어요. 사랑은...힘이 들어요." 그에게 거듭거듭 다짐했던 대로 내가 그에게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술이 깬 다음날 아침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하는 말들이 모두 다 진실어었듯이. 나는 그날 아침 마침내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 는 것을. 어머니를 사랑했으므로 나와 진모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또한 절대적 이었을 것임을. 우리 모두를 한없이 사랑했으므로, 그러므로 내 아버지는 세 겹 의 쇠창살문에 갇힌 것이었다. 아버지가 탈출을 꿈꾸며 길고 긴 투쟁을 벌인 것 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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