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2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미국인이 꼽은 최고 배우 ‘80살’ 클린트 이스트우드 ‘노장의 승리.’ 우리나이로 80살의 배우 겸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사진)가 2009년 미국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배우에 꼽혔다. 해마다 미국인들이 꼽은 영화배우 톱 10을 발표하는 ‘해리스 폴’은 26일 이스트우드가 3년 연속 1위였던 덴절 워싱턴을 3위로 밀어내고 1위에 뽑혔다고 밝혔다. 1970년대 <더티 해리> 시리즈의 스타이자 90년대 이후 감독으로서 더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이스트우드는 남성·공화당 지지자·중도파들과 45살 이상으로부터 압도적인 표를 얻었다. <캐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조니 뎁이 2위였고, 샌드라 불럭은 여자 배우 가운데 가장 높은 4위에 올랐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한겨레 2010-01-27 오후 06:37:54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01351.html
2010 - “줄어드는 남극 오존구멍, 온난화 가속화” 영국 과학자 주장 1980년대 이래 지구온난화의 상징처럼 인식되어왔던 남극의 오존구멍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오존구멍이 줄어드는 것 자체가 지구온난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영국 리즈대학의 대기과학자인 켄 카슬로 교수 등은 ‘지구물리학 리서치 레터’를 통해 오존구멍의 감소가 남반구 일정지역에서 온난화를 가속화할 수도 있다는 뜻밖의 주장을 내놨다고 <뉴욕타임스>가 26일 보도했다. 유럽중기기상예보센터가 확보한 1980~2000년 사이 지구상의 풍속데이터들을 종합분석한 결과, 오존구멍이 강한 바람을 일으켜 바다의 염분을 흡수해 형성시켰던 다습한 구름이 남극 상공에서 강력한 태양광들을 반사시켜왔다는 것이다. 오존층은 성층권(지상 25~30km)에서 인체에 해로운 자외선 흡수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존구멍이 1980년대 중반 남극 상공에서 발견되면서 세계 각국은 1987년 몬트리올의정서를 통해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가스 등 사용을 금지시켜나가고 있다. 미 우주항공국이 운영하는 오존구멍 감시사이트는 오존구멍이 매년 9~10월에 최대로 확대되며 2200만~2700만㎢의 크기로 안정적인 추세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기상기구의 최신 보고는 2060년이면 오존구멍이 1980년 이전 수준으로 없어질 것으로 예측한 바 있다. 미국 국립대기해양청(NOAA)의 주디스 펄위츠 박사는 이번 연구의 자료가 타당하더라도 결론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문제는 바람의 세기가 줄어드느냐는 것”이라며 “인류의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기온상승 또한 바람의 속도를 높여 비슷한 구름을 생성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류재훈 기자 hoonie@hani.co.kr /한겨레 2010-01-26 오후 08:58:02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401181.html
2003 - 중국-대만 반세기 만에 비행기 운항 오늘의 역사 (1월 26일)[2003년] 중국~대만 반세기 만에 비행기 운항 2003년 1월 26일 전 세계의 중국인들이 목이 빠져라 기다려왔던 상하이와 타이베이 간의 양안(중국과 대만) 첫 직항이 이루어졌다. 이날 중국과 대만은 54년 만에 처음 항공기 직항을 성공시켰다. 비록 정치적 완충 지대인 홍콩이나 마카오에서 잠시 머물기는 했지만 대만 항공기가 중국 상공을 비행한 것은 분단 이후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만에서 날아온 CAL기는 상하이에 거주하는 대만 비즈니스맨 258명을 싣고 대만으로 되돌아갔다. 대만 푸싱항공도 이날 대만 남부 가오슝에서 마카오를 거쳐 상하이를 왕복하는 직항기를 띄웠다. 새벽 3시55분, 대만 중정공항을 이륙한 CAL기는 홍콩에서 약 30분간 정류한 뒤 오전 8시52분 상하이 푸둥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푸둥공항에서는 대만 항공기가 내려앉자 준비된 환영 음악과 용춤 등 공연이 펼쳐졌다. 중국 민족 최대 명절인 춘절 연휴를 맞아 준비된 이번 항공 직항은 2월 7일까지 한시적으로 16편이 운항됐다. 홍콩이나 대만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던 기존 방식과 비교할 때 항공료는 1만6000 대만폐(약 56만원)로 비슷하지만 소요시간(약 4시간15분)은 1시간 정도 줄었다. 이번 직항은 대만정부 요구에 따라 대만 항공사 6개 만이 취항, ‘쌍방 직항’이 아닌 ‘편도 직항’으로 제한됐다. /조선닷컴 2017-01-26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30327_0014
오늘의 역사 (1월 26일)[1995년] 김영삼대통령, `마틴 루터 킹 비폭력평화인권상` 수상 미국 흑인 인권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마틴 루터 킹 비폭력 평화상`의 1994년도 수상자인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 1월 26일 청와대 춘추관 대회견장에서, 상장과 메달을 킹 목사의 부인 코레타 스코트 킹 여사로부터 전달받았다. 시상식에는 김대통령과 부인 손명순여사, 제임스 레이니 주한미국대사내외 외에도 우리나라 각계 인사 80여명이 참석했다. 김대통령은 수상연설에서 "오늘의 영광을 오직 평화의 길을 통해 자유와 민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던 자랑스런 동지들에게 돌리며, 숱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민주화 운동에 적극 동참했던 우리 국민 모두에게 바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날 수여한 비폭력 평화상은 흑인 민권운동가였던 킹목사를 기념해 인권운동과 민주주의에 공헌한 인물에게 매년 수여하고 있으며, 1973년 미국의 흑인지도자 앤드류 영을 시작으로 카터 대통령, 투투 대주교(남아공화국), 아키노 대통령(필리핀) 등이 수상했다. 킹센터는 1994년 12월 30일 김대통령을 18번째 수상자로 발표했었다. /조선닷컴 2017-01-26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910_0137
1981년 10월 15일 용산 소재 철도고등학교 실습장에 문을 연 철도기념관을 모태로 하여 1988년 1월 26일 경기도 의왕시 부곡에 철도박물관 부곡관이, 1997년 4월 1일 서울역에 철도박물관 서울역관이 각각 개관해 현재에 이른다. 서울역관이 제1관, 부곡관이 제2관이며, 철도청 현업 소속으로서 대규모 운송수단이자 국민의 생활수단인 철도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인식시키고자 설립하였다. /네이버
오늘의 역사 (1월 26일)[1985년] 테레사 수녀 내한(~29일) 노벨평화사 수상자 테레사 수녀가 1985년 1월 26일 내한했다. 테네사 수녀는 첫날 밤을 안양에 있는 ‘사랑의 선교회’ 수녀원에서 지낸 후 성라자로 마을을 방문해 나환자들을 위로했다. 이 마을 성당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주제로 강연하면서 “예수는 특별히 나환자들에게 관심을 가졌으며, 그분이 계실 당시에는 나병이 불치의 병이었으나 지금은 치유할 수 있는 병”이라고 환자들을 격려했다. ‘살아있는 성녀’라는 이름대로 비공식 방문임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이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사랑을 나누었고 28일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를 방문, 김수환 추기경과 환담한 후 출국했다. /조선닷컴 2017-01-26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29_0030
국제관세의날은 1981년 불가리아에서 개최된 제57회 관세협력이사회(Customs Cooperation Council, CCC, 현 WCO)에서 매년 CCC 창립일(1953.1.26)을 기념하자는 한국측 제안에 따라 시작된 것이며, WCO(World Customs Organization) 및 각 국 관세청은 이 날을 전후하여 기념행사를 매년 갖고 있다. /naver
1977 - 미국의 프로 농구선수 빈스 카터(Carter, Vince) 출생 카터 [Carter, Vince Lamar, 1977.1.26~ ] 빈스 카터(Vince Lamar Carter, 1977년 1월 26일 ~ )는 현재 미국 NBA에서 활약하고 있는 프로 농구 선수이다. 신장 198cm, 체중 98.8kg의 슈팅가드로서 2000년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면서 NBA의 대표적인 스타로 발돋움 하였다. 휴스턴 로케츠에서 활약하고 있는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와는 사촌지간이다.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North Carolina)를 졸업하고, 1998년 1라운드 5순위로 토론토 랩터스에 지명되었으며, 데뷔 시즌에 신인왕(Rookie of the Year)을 차지하였다. 04-05시즌 도중에 트레이드 되어 08-09시즌까지 뉴저지 네츠에서 활약하였고, 2009년 올랜도 매직으로 트레이드 되었다. /위키백과
1973 - 미국의 영화배우 에드워드 G. 로빈슨(Robinson, Edward G.) 사망 로빈슨 [Robinson, Edward G., 1893.12.12~1973.1.26] 루마니아 출신의 미국 영화배우. 1893년 12월 12일 루마니아 부카레스트(Romania, Bucharest)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엠마누엘 골덴버그(Emanuel Goldenberg)이다. 루마니아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생활하던 중 10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주 초기 뉴욕의 빈민가에서 생활하다가 아메리칸 드라마틱 아트 아카데미(AADA)에서 연기를 공부하게 되면서 연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13년 스탁 극단의 연극에 출연하였으며 1931년 《리틀 시저 Little Caesar 》에서의 리코 반델을 연기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주로 갱스터 영화, 범죄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작은 체구와 빠른 언어 구사, 걸걸한 목소리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가 출연한 영화는 《리틀 자이언트 The Little Giant》(1933), 《홀 타운즈 토킹The Whole Town's Talking》(1935), 《사소한 살인 사건 A Slight Case of Murder》(1938), 《브라더 오키드 Brother Orchid》(1940), 《절도 주식회사 Larceny, Inc.》(1942), 《에어리히 박사의 마법의 탄환 Dr Ehrlich's Magic Bullet》(1940), 《로이터 특파원 A Dispatch from Reuter's》(1940), 《이중배상 Double Indemnity》(1944), 《창 안의 여인 The Woman in the Window》(1944), 《스칼레 거리 Scarlet Street》(1945), 《키 카르고 Key Largo》(1948) 등이 있다. 또한 상당한 수준의 미술품 애호가이면서 수집가였으며 문화적 교양도 높았던 로빈슨은 1949년 《이방인의 저택》이라는 영화로 깐느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한번도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1973년 영화인생 50년을 높이 기리기 위해 아카데미 특별 공로상이 주어졌다. 1973년 1월 26일 79세를 일기로 암으로 사망하였다. /네이버
- Venera 7 descending to Venus
1971 - 소련의 금성 탐사선 베네라 7호, 금성으로부터 최초의 데이터 송신에 성공 베네라 7호(Venera 7) - 소련의 금성 탐사선, 1,180 kg, 1970년 8월 17일 발사, 베네라 7호는 1970년 12월 15일 금성에 도달 하였다. 베네라 7호는 금성 표면에 착륙한 최초의 탐사선이다. 이 탐사선은 외부 냉각 장치를 이용하여 착륙후 23 분동안 자료를 송신할 수 있었다. 이 자료에 의하면 금성 표면의 온도는 475도였고 대기압은 90기압이었다. /(kaist)
1965 - 베트남 전투병력 파견안 국회 가결 오늘의 역사 (1월 26일)[1965년] 국회, 월남파병안 가결 베트남에 전투병력을 파견하는 파병안이 1965년 1월 26일 국회에서 가결됐다. 파병 병력은 2,000여 명으로 공병, 수송 및 자체방위부대 등이었고, 파병안은 재석 125명 중 찬성 106표, 반대 11표, 기권 8표로 통과됐다. 이날 국군 월남파병안이 통과 됨으로써 국방장관에게 1월 29일 임명장을 받은 조문환 주월한국군 단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첫 과업은 홍수피해복구작업이라 밝혔다. 1964년 9월 제1이동외과병원 병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을 파견하면서 시작된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은 1964년 7월 15일 미국의 존슨 행정부가 한국 정부에 파병을 공식적으로 요청함으로 참전이 본격화됐다. 당시 미국은 주한미군의 베트남 이동안으로 한국정부를 위협하는 한편 한국군 봉급의 지급, 한국산 군수품 구매 등의 혜택을 제시하며 압박해왔다. 파병안에 따라 1965년 2월 2,000여 명의 비둘기부대가 파병됐고, 10월는 전투부대인 해병대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가, 1966년 9월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했다. 한국군 파병은 1973년 3월 23일에 한국군이 모두 철수할때까지 8년여 동안 총 31만 2,853명이 참전했다. 참전기간 동안 한국군은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 6,000회의 소규모 작전을 펼쳤으며 5,000여 명이 전사하고 수만명이 부상당했다. 하지만 참전 대가로 벌어들인 10억 3,600만 달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조선닷컴 2017-01-26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536
1962 - 덕혜옹주 일본서 환국 역사속 오늘[1.26] 덕혜옹주 일본서 환국 1962년 오늘, 고종황제의 외동딸인 덕혜옹주가 37년 만에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김포공항에서 열린 환영식에 의친왕의 며느리 등 많은 왕실인사들이 참석했다. 덕혜옹주는 행사가 끝난 뒤 창덕궁의 낙선재에 찾아가 순종의 계비(繼妃)인 순정효황후 (純貞孝皇后) 윤씨를 만났다. http://www.kg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9175
- Mexico-S. Korea Diplomatic Relation, 40th Anniv., 2002
한국은 1962년 1월 26일 멕시코와 국교를 수립하고 7월 11일 주(駐)멕시코 대한민국대사관을 설치하였다. 1978년 3월 11일에는 주한 멕시코대사관이 설치되었다. 양국은 1966년 무역협정을 체결하였으나 별다른 교역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197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교역량이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멕시코 대한민국대사관) /네이버
1962.01.26 - 한.멕시코 국교 수립 1962.07.11 - 주멕시코 대사관 상주공관설치 1978.03.11 - 주한 멕시코 대사관 상주공관설치 http://mex.mofat.go.kr/kor/am/mex/affair/relation/index.jsp
- Disco Music, 1970s
역사속 오늘[1962년 1월 26일] 미국 트위스트 열풍 1962년 오늘, 28살의 영화배우 소피아 로렌이 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을 췄다. /YTN 2013-01-26 http://www.ytn.co.kr/_pn/0422_201101242258196650
1961 - 캐나다의 아이스하키 선수 그레츠키(Gretzky, Wayne) 출생 그레츠키 [Gretzky, Wayne (Douglas), 1961.1.26~ ] 웨인 더글러스 그레츠키(영어: Wayne Douglas Gretzky CC, 1961년 1월 26일~)는 캐나다의 아이스하키 선수이다. 약 20년간 내셔널 하키 리그(NHL)에서 활동하며 아이스하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선수 중 하나로 '위대한 선수'(The Great One)이라고도 불리며 국내에서는 '살아있는 신화'로 잘 알려져 있다. 온타리오 주 브랜트퍼드에서 태어난 그레츠키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스하키를 즐겼다. 주니어 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78년 시니어 리그인 월드 하키 리그(WHA) 소속의 인디애나폴리스 레이서스에 입단했다. 곧 레이서스가 매각되면서, 그는 에드먼턴 오일러스로 옮겼다. 에드먼턴 오일러스는 1979년 NHL 소속이 되었다. 그레츠키는 처음에 아이스하키 선수로는 크지 않은 체구로 NHL에서 큰 기대를 모으지 않았다. 그러나 빠른 속도와 정교한 기술로 작은 체구를 극복하며 NHL의 새로운 팀인 에드먼턴 오일러스를 상위권으로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 1981년 NHL 최고 득점 선수에 올랐고 이후 7연속으로 최고 득점 선수 자리에 올랐다. 1982년에는 최초로 한 시즌에서 200골을 기록했고, 그의 활약으로 1983년 오일러스는 처음으로 스탠리컵 파이널에 진출했으며, 1984년에는 스탠리컵을 차지하였다. 그가 활동하는 동안 오일러스는 1984년·1985년·1987년·1988년 등 네 차례나 스탠리컵을 차지하였다. 또한 그의 활약으로 NHL의 인기도 더욱 높아져 신생팀이 창단되는 등 NHL의 위상도 높아졌다. 1988년 네 번째로 스탠리컵을 차지한 후 로스앤젤레스 킹스로 이적했다. 킹스에서 활동할 때에도 세 차례 NHL 득점왕에 올랐고, 8시즌을 뛴 후 1996년 세인트루이스 블루스로 옮겼다. 블루스에서 한 시즌을 보내고 뉴욕 레인저스로 이적했으나, 이때 이미 그는 30대 후반의 많은 나이에 부상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큰 활약은 펼치지 못했다. 1999년 은퇴했으며, 그때까지 894골의 정규 리그 최다 득점 기록과 1963개의 어시스트 기록 등 아이스하키 사상 가장 뛰어난 기록을 남기며 하키계의 전설로 통했다. 그의 등번호 99번은 NHL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고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은퇴 후 그는 지도자로 변신하여 2002년 동계 올림픽의 캐나다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며, 이때 캐나다 아이스하키팀은 숙적 미국을 꺾고 동계 올림픽에서 50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2005년 ~ 2009년에는 NHL의 피닉스 코요테스 감독을 맡았으나, 그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 코요테스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캐나다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 선수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는, 2010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제21회 동계 올림픽 성화 봉송 최종 주자였다. 훈장 * 1984년 캐나다 훈장 4등급(OC) * 2009년 캐나다 훈장 3등급(CC, 현행 최고등급) /위키백과
1960 - 서울역 압사사고, 31명 사망 오늘의 역사 (1월 26일)[1960년] 서울역 압사사고, 31명 사망 1960년 1월 26일 목포행 완행열차를 타려던 승객들이 서울역 계단에서 집단으로 넘어져 31명이 압사하고 4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망자 대부분은 설날을 이틀 앞두고 고향을 찾으려던 귀성객들이라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평소보다 3배나 많은 4천여 명이 승차했고, 출발시간 5분을 앞두고 개찰하는 바람에 먼저 열차를 타려는 승객들이 좁은 계단으로 무질서하게 몰려든 것이 사고원인이었다. 전형적인 인재였다. 교통부는 사망자 1인당 72만환을 지급하고 사고 다음날인 27일 교통부 앞광장에서 합동위령제를 거행했다. 검찰은 사고책임을 물어 서울역장과 여객주임 등을 구속했다. /조선닷컴 2017-01-26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535
제7회 동계 올림픽 경기대회는 1956년 1월 26일부터 2월 5일까지 개최, 32개국에서 820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경기는 6개 종목, 24개 세부종목이 실시되었다. 1949년 로마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IOC) 총회에서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의 대회유치를 결정했는데, 1944년의 동계대회 개최지로 선정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무산되었던 이 도시는 이미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3년 동안 막대한 경비를 들여 메인스타디움을 건설했는데, 2만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최신시설이었다. 눈의 질이 좋아서 신기록이 풍성하게 쏟아졌으며, 동계대회 사상 처음으로 텔레비전으로 대회상황을 중계하여 인기를 끌었다.
[오늘의 역사]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 체결 1950년 오늘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됐다. 이 협정은 전문과 8조로 구성됐으며, 양국의 침략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되는 불안전을 제거하고, 경제발전을 향상시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원래는 미국이 한국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할 수 있도록 1949년 제정된 '상호방위원조법'의 후속적 내용으로, 미국정부가 원조를 제공하는 것과 한국이 이를 접수하는 것 등 구체적인 군사원조품목을 규정했다. 그러나 이 협정 조인 당시에는 북한의 남침이 실행 단계에 있었던 반면 양국의 협조 체계는 지지부진해 남침을 저지하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협정은 이후 1953년 한국과 미국의 상호방위조약으로 발전된다. /충청투데이 2010.01.26 00:06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7126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영국연방 중에서 총리 네루 아래 주권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의 반목이 영국으로 하여금 인도를 분열하게 하여 이슬람교인이 대부분인 동서파키스탄이 탄생하였다.
1938 - 프랑코 바르셀로나 점령 [책갈피 속의 오늘]1938년 프랑코 바르셀로나 점령 “인류는 정의가 실패할 수 있음을, 인간의 정신이 폭력에 꺾일 수 있음을, 그리고 용기가 무망하게 산화(散華)할 수 있음을 스페인에서 배웠다.”(앙드레 말로) 스페인 내전. 그것은 선(善)과 악(惡)의 직선적 대결이었다. 이 20세기의 참혹한 비극은 1936년 스페인령 카나리아군도에 좌천돼 있던 프랑코가 군사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된다. 국민이 선택한 공화파 정부를 마땅찮아 하던 대지주, 자본가, 가톨릭교회, 군부가 호응했다. 반란군은 쉽사리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민중의 저항은 거셌다. 대도시에선 반란군들이 대패했다. 스페인 민중의 힘은 전세계 지식인들을 흥분시켰다. 이상(理想)에 대한 정열과 행동에 대한 도취(陶醉). 스페인 내전은 예술인들의 행동주의 시대를 열었다. 세계의 지성들이 스페인으로 모여들었다. 말로, 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스티븐 스펜더, W H 오든…. 오든은 “우리들의 사상(思想)은 육체를 갖는다”고 노래했다. 당시 세계에 회오리치던 보수와 진보, 파시즘과 자유주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그 이념적 긴장과 대립이 스페인 내전 한판에 응축되었다. 그것은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고 ‘펜들의 전쟁’이었다. 3년간을 끌어온 내전은 그러나 공화파의 완패로 끝난다. 파시스트들의 국제적 연대가 공화주의자들을 압도했던 것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프랑코에게 대규모 화력을 지원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어정쩡했다. 1938년 1월 바르셀로나 함락. 1939년 3월 마드리드 점령.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에 이은 미국의 프랑코 정부 승인. 그것으로 끝이었다. 스페인 내전. 그것은 참으로 허망한 역사의 공전(空轉)이었다. 역사의 냉소(冷笑)였다.100만명 이상이 희생된 그 ‘피의 밭’에서 정작 자라난 것은 프랑코의 36년 철권정치였다. 천수를 누리다 간 프랑코. 그는 죽기 전 ‘적을 용서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내겐 적이 없다. 모두 사살되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동아닷컴 2004-01-25 18:41: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40125/8022742/1
- Daily broadcasting in the UK, 50th anniv.
닙코프의 전기 망원경을 상업화한 사람은 영국의 사업가 존 로지 베어드(1888-1946)였다. 비누, 젤리, 사탕 등의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 그는 네온등이 발명되자 이를 이용한 텔레비전이 큰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5년 그는 아버지와 친구로부터 2백50파운드를 꿔 다락방에서 닙코프의 원판을 단 기계식 텔레비전 시스템을 제작했다. 연장을 넣어두던 낡은 상자로 모터의 받침대를 만들고, 빈 과자상자로 네온등을 넣는 케이스를 만들었다. 주사용 원판은 마분지를 잘라서 만들었고, 못쓰는 자전거에서 떼어낸 렌즈도 도움이 됐다. 이렇게 해서 흉물스럽게 태어난 텔레비전은 30개의 주사선을 가지고 1초에 10번씩 번쩍였다. 베어드는 이를 ‘텔레바이저’(televisor)라고 불렀다. 홍대길 기자 /동아사이언스 2007년 08월 07일 http://news.dongascience.com/HTML/News/2007/08/07/20070807200000000013 /200708072000000000130108000000.html
1925 - 미국의 영화배우 폴 뉴먼(Newman, Paul) 출생 뉴먼 [Newman, Paul (Leonard), 1925.1.26~2008.9.26]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출생. 예일대학교를 중퇴하고 1935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다가 영화계로 뛰어들었다. 《상처뿐인 영광》(1958)으로 시작하여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1958), 《영광의 탈출》(1961), 《허슬러》(1961) 등에 출연, 차갑고 지적인 개성미로 인기를 얻었다. 성공을 거둔 영화로는 《내일을 향해 쏴라》(1969), 《스팅》(1973), 《판결》(1982) 등 다수이며, 대표작 《컬러 오브 머니》(1986)에서는 아카데미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내면적인 고독을 표출하는 깊은 연기를 보였고, 후에 제작·감독으로 진출하여 다양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네이버
차우셰스쿠 [Ceausescu, Nicolae, 1918.1.26~1989.12.25] 스코르니체슈티 출생. 1933년 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곧 중앙위원이 되었다. 1936년 당시 불법정당인 공산당에 가입하여 1936∼1939년, 1940∼1944년 2회에 걸쳐 투옥되었다. 루마니아 건국 후 당 중앙위원 ·국방차관 ·당 정치국원후보를 거쳐 정치국원이 되었다. 1965년 게오르기우데지의 사망과 더불어 루마니아공산당 서기장이 되고, 1967년 국가평의회 의장(대통령)이 된 이후로 1985년 4선 대통령이 되었다. 1989년 반(反)정부시위에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강행하다 임시정부에 의하여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네이버
1906 - 슬로바키아의 독립운동 지도자 골리안(Golian, Ján) 출생 골리안 [Golian, Ján, 1906.1.26~1945] General Ján Golian (January 26, 1906, Dombóvár, Hungary – 1945, Flossenburg, Germany) was a Slovak Brigadier General who became famous as one of the main organizers and the Commander-in-Chief of the insurrectionist Slovak Army during the Slovak National Uprising against the Nazis. He was the supreme military leader of the uprising from April 27, 1944 (while the uprising was still in preparation) until the arrival of General Rudolf Viest on October 7, 1944. Afterwards, General Ján Golian served as Viest's adjutant. Despite fierce fighting, the outnumbered and surrounded insurrectionist army could not resist well-equipped German forces. When Viest and Golian ordered their remaining units to start a guerrilla war on October 27, 1944, they did not know that it would be the last order they issued. Both Generals were captured by German special forces on November 3, 1944 in Pohronský Bukovec. In violation of the international law, they were tortured and executed in a German concentration camp (1945). http://en.wikipedia.org/wiki/J%C3%A1n_Golian
맥브라이드 [MacBride, Seán, 1904.1.26~1988.1.15]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일랜드의 배우이자 애국자였고, 아버지는 1916년 영국에 대항하다가 처형된 군인이었다. 파리와 아일랜드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아일랜드의 자유를 지키려는 전사로서 아일랜드를 분할하는 데 반대하였다. 24세 때 아일랜드공화국군(아이아르에이)의 참모장을 지냈으며 그후 언론인과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얼마 후 아일랜드의 분할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무장투쟁의 무모함을 깨달았다. 1936년 공화당을 창당하였고, 1947년에는 아일랜드 의회에 진출하였으며, 1958년까지 자신이 창당한 공화당 당원으로 활약하였다. 1948∼1951년에는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그 기간 동안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부회장, 1950년에는 유럽회의 외무장관평의회 의장을 맡았다. 국제양심수기금(International Prisoners of Conscience Fund)과 국제사면위원회의 의장(1961∼1975)을 역임하는 등 인권과 관계된 여러 국제기구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973년 국제연합 사무차장과 나미비아 문제 담당자가 되어 1977년까지 활약하였다. 1977∼1980년에는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서 조직한 통신문제연구국제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가이탄 [Gaitán, Jorge Eliécer, 1903.1.26~1948.4.9] 보고타 출생. 아메리카 인디언과 흑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보고타의 콜롬비아국립대학에서 법률학을 배운 후 이탈리아에 유학하였다. 귀국 후 변호사로서 노동자의 쟁의권 강화 등 사회개혁을 위하여 활약하였고, 자유당 안에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오늘의 역사 (1월 26일)[1898년] 한성전기회사 설립 1898년 1월 26일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됐다. 이근배와 김두승 두 사람의 명의로 ‘서울시내 전차, 전등 그리고 전화의 시설 및 운영권’ 허가를 받아, 고종을 비롯한 황실이 단독 출자해 세운 기업이었다. 자본금은 일화 30만엔 규모였다. 미국 콜로라도 중부철도회사 사장을 지낸 콜브란은 황실과 용역계약을 맺고 전차-전등의 건설과 운영을 위탁받았다. 결국 미국인의 소유로 넘어간 이 회사는 전차 운행에 필요한 선로 부설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899년에는 한국 최초의 전차 구간이 정식 개통됐다. 이때 건설된 구간은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에 이르는 약 8km의 단선 궤도였다. 곧 이어 민간에도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해 일반인들도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1904년 한성전기회사는 한미전기회사로 회사명칭을 바꾸었고 1909년에는 일본 국책회사인 일한와사회사로 넘어갔다. /조선닷컴 2017-01-26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126_0006
1892 - 미국의 비행사 베시 콜먼(Coleman, Bessie) 출생 콜먼 [Coleman, Elizabeth "Bessie", 1892.1.26~1926.4.30] Bessie Coleman. biography Bessie Coleman was the first black woman to earn a pilot's license. Because flying schools in the United States denied her entry, she taught herself French and moved to France, earning her license from France's well-known Caudron Brother's School of Aviation in just seven months. Coleman specialized in stunt flying and parachuting, earning a living barnstorming and performing aerial tricks. She remains a pioneer of women in the field of aviation. http://www.biography.com/people/bessie-coleman-36928
미처 [Mitscher, Marc A(ndrew), 1887.1.26~1947.2.3] 제2차 세계대전중에 태평양 해역에서 58기동타격대의 항공모함들을 지휘했다. 메릴랜드 주 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1910) 후, 1916년 3등 해군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후 해군 항공기의 개발과 항공기를 함대에 편입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초 그는 항공모함 '호넷호'의 지휘관으로 미드웨이 해전(1942. 6)에 참전했다. 이 해전은 1941년 12월 일본에게 진주만 공격을 당한 후 미국이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중요한 전투였다. 1943년 솔로몬 제도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는 해군 소장으로서 모든 항공기의 지휘 책임을 맡았다. 이어서 그는 58기동타격대의 고속 항공모함들의 지휘관으로 캐롤라인 제도의 트루크 섬(1944. 2), 필리핀 해의 전투(1944. 6), 레이테 만의 전투(1944. 10), 이오 섬[硫黃島]과 오키나와[庶繩]의 공략(1945. 2~6) 등에서 공습을 지휘했다. 미처는 1946년 해군대장으로 승진하여 다음해 사망할 때까지 미국 대서양함대 사령관을 지냈다. /브리태니커
- 맥아더,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인천 노신웅 님 자료제공) 맥아더 [MacArthur, Douglas, 1880.1.26~1964.4.5] 오늘의 인물 (1880.1.26) 맥아더 [Douglas MacArthur] 맥아더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남서태평양 지역의 사령관이자 6·25전쟁의 처음 9개월 동안 국제연합(UN)군 총사령관직을 맡았던 미국의 장군이다. 1937년 12월 미국 육군대장으로 은퇴했던 맥아더는 1941년 7월 현역으로 복귀했다. 그해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필리핀에서 일본군 저지 임무를 맡아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영웅적인 전투를 수행했다. 이후 혁혁한 승리를 거듭해 1944년에는 필리핀을 되찾고, 1945년에는 일본의 항복을 얻어냈다. 종전 이후에는 일본 점령 연합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일본의 비군국화 및 민주화에 힘썼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곧 주한 UN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북한군을 중국과의 접경 지대까지 내몰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이내 퇴각해야 했다. 휴전을 명령하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 끝에 1951년 사령관직에서 해임당했다. 1952년 이후 레밍턴랜드사(社)의 이사회 회장 직무를 보는 것 외에는 별다른 활동 없이 뉴욕 시에 은거했다. /브리태니커 2017-01-26 http://preview.britannica.co.kr/people/people.asp "어떤 전쟁이든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의지 없이 시작하는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 더글러스 맥아더
- 'Woman on Balcony' 동겐 [Dongen, Kees van, 1877.1.26~1968.5.28] 네덜란드 출생의 프랑스 화가.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생. 로테르담 장식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1927년 프랑스로 귀화했다. 조숙한 화재(畵才)를 발휘하였으나 몽마르트르에서 가난하게 생활하면서 고학하였다. 피카소 등과 교제하면서 1905년에 그때까지의 인상파적(印象派的)인 화법을 청산, 야수파운동에 참여, 원색조(原色調)의 뚜렷한 색채와 힘찬 선의 묘사로 분방한 표현을 하여 개성을 인정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사교계의 유행 작가로 등장, 에콜 드 파리의 일원으로 그의 화풍은 운치 있는 관능미와 퇴폐미를 곁들였다. 작품에는 파리 거리 풍경이나 카페 ·무도장 등 외에, 많은 저명인사 및 귀부인의 초상화가 있으며, 독특한 스타일로 날씬하고 세련된 여성 표현을 하는 데 정평이 나 있다. 작품으로 《카지노의 홀》 등이 있다. /네이버
헤르만 공원은 우편엽서의 발명자 에마누엘 헤르만으로부터 연원한다. 1839년 클라겐푸르트에서 태어나 비인의 기술대학교수로 있던 헤르만은 1869년 1월 26일 ‘신자유언론’이라는 매체에 대한 기고를 통해 우편에 사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연락수단을 소개하였는 바, 이는 2크로이쩌 요액액면이 인쇄된 서간형태의 공개적인 엽서였다(당시 편지 요금은 4크로이쩌) 이로써 우편엽서가 발명이 됨에 따라 단기간 내 전체 도나우 왕조에서 즐겨 사용하게 되었고 그 후 전 세계적인 성공을 시현하게 되었다. /(2007.06.08 cantona 번역)
Über Emanuel Herrmann Der Herrmannpark verdankt seinem Namen Emanuel Herrmann, dem vergessenen Erfinder der Postkarte. Geboren 1839 in Klagenfurt, schrieb der Professor der Technischen Hochschule in Wien in einem Artikel in der „Neuen Freien Presse“ am 26.1.1869 “eine neue Art der Correspondenz mittels der Post” vor, eine offene Karte in Briefformat mit aufgedruckter 2-Kreuzer-Marke (ein Brief kostete damals das doppelte). Somit war die Postkarte erfunden, die sich binnen kürzester Zeit in der gesamten Donaumonarchie grosser Beliebtheit erfreute und danach weltweit zum Erfolg wurde. http://www.strandbarherrmann.at/?page_id=5
브라자 [Brazza, Pierre(-Paul-François-Camille) Savorgnan de, 1852.1.26~1905.9.14] 프랑스령 콩고의 창설자. 로마 근교 출생. 파리에서 공부하고, 1874년 프랑스에 귀화하여 프랑스 해군에 근무하였다. 1875년 오고우에강 유역을 탐험하여 알리마강과 리코나강을 발견하고, 1878년에 귀국하였다. 1879년 두 번째 서아프리카 탐험을 시작하여, 1880년 가봉에 도착, 오고우에강을 거슬러 올라가 지금의 브라자빌에서 콩고강에 도달하였다. 그곳 추장과 조약을 맺어 콩고강 북쪽 강변의 우선권을 확보하였고, 가봉의 해안 오지(奧地)를 탐험한 뒤, 1882년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콩고로 돌아가 식민지(브라자빌시)를 개설하였고, 1886∼1897년 프랑스 식민지의 총무장관이 되어 프랑스령을 지나 콩고 상류부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하였다. 7년 동안 은퇴했었다가 1905년 다시 콩고에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죽었다. /네이버
시에라 멘데즈 [Sierra Méndez, Justo, 1848.1.26~1912.9.13] Justo Sierra Méndez(Campeche, Mexico 1848 - Madrid, Spain 1913). Mexican poet, writer, historian, politician and educator. He was born on Jan. 26, 1848. His father, Justo Sierra O'Reilly, was one of Mexico's foremost intellectuals. Justo Sierra stands in the select band of historians who played in the life of their country a role equal to their place in its letters. Among his books are remarkable his biography of Benito Juarez and his "Evolución Política del Pueblo Mexicano". He was a member of the Mexican Academy since 1887. As one of the foremost propagandists of his day, Sierra edited and wrote regular columns for several newspapers. Sierra is well known for his voluminous historical and literary works. ... http://www.conservapedia.com/Justo_Sierra_Mendez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난징조약을 맺고 홍콩을 영국에 넘겨줬다. 홍콩은 이로써 주권이 영국에 소유돼 영국식민지로 전락했다. 이후 홍콩은 아시아 주요무역항으로 발돋움하며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가 됐다. 지난 1997년 1월 홍콩은 다시 중국으로 반환돼 1국 2체제의 독특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역사 속의 이번 주 (1월 21~27일) /경남신문 http://www.knnews.co.kr/?cmd=content&idx=677726
1826 - 스위스의 터널 기술자 파브르(Favre, Louis) 출생 파브르 [Favre, Louis, 1826.1.26~1879.7.19] Louis Favre (26 January 1826 – 19 July 1879) was a Swiss engineer, remembered as the builder of the Gotthard Rail Tunnel between 1872 and his death in the tunnel in 1879. He was born the son of a carpenter at Chêne, a small village some 3 kilometers from Geneva. At eighteen, he left to tour France and developed a career undertaking the design and direction of civil engineering works. He was not well schooled, but studied the principal bases of such sciences as were to be useful to him, and took evening classes to make up for what was lacking in his early instruction; not that he hoped to make a complete study for an engineer, but only to learn the indispensable. He was, according to a colleague "before all things, a practical man, who made up for the enforced insufficiency of his technical knowledge by a coup d'œil (glance) of surprising accuracy". In 1872 he was invited to build a tunnel through the Gotthard massif, connecting Switzerland to the Italian border. The project was, for the time, a vast undertaking, verging on folly according to many critics. Construction of the tunnel was accompanied by very considerable loss of life and escalation of cost, arising out of the novelty of the endeavour and the most insurmountable difficulties which presented themselves. Favre bore the brunt of continued criticism, including that deflected on to him by the board of the St. Gothard Company. In spite of this, the cost of the tunnel per running foot was a third less than that of the great Mont Cenis Tunnel. http://en.wikipedia.org/wiki/Louis_Favre
- 'Self-portrait'
- 'Guard Officer on Horseback' - 'The Raft of the Medusa'
1824 - 프랑스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Géricault, Théodore) 사망 제리코 [Géricault, (Jean-Louis-André-)Théodore, 1791.9.26~1824.1.26] 1791년 9월 26일 루앙에서 출생하였다.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로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이다. 1808년 파리에서 C.베르네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2년 뒤 P.N.게랭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믹한 정통에 불만이 있었고 동시대인으로서는 C.I.H.그로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또 P.P.루벤스에게 매료되었다. 1816년 이탈리아에 가서 고대의 작품과 르네상스의 화가들을 연구하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귀국 후 대작 《메두사호(號)의 뗏목》(1819)을 그려 일약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젊은 F.V.E.들라크루아를 감격하게 하였고, 들라크루아에 의한 낭만주의 확립의 위대한 도화선이 되었다. 메두사호의 구조된 선원들에게 실정을 듣고 뗏목을 만들게 하는 등 실감을 살린 이 그림은 격렬한 동세(動勢), 강한 명암과 색채효과 등 극적인 정경을 표현한 박진감에 있어 그 때까지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극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1820년 영국으로 건너간 후 영국의 풍경을 수많은 석판화로 묘사하고 또 말을 좋아하고 빨리 달리는 동물의 속도를 좋아하여 그 동작을 예리하게 묘사하였다. 작품으로서는 유화는 얼마 되지 않으나 그리스독립전쟁·노예제 반대 등 시국적인 것을 주제로 한 소묘에 뛰어났고 석판화를 참다운 예술품으로 끌어올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1822년 런던에서 돌아와 얼마 동안 가슴을 앓다가 33세로 파리에서 죽었다. 이 밖에 주요작품에 《돌격하는 샤쇠르》 《부상당한 퀴라시에》 등이 있으며 조각작품도 몇 점 남겼다. /네이버
제너 [Jenner, Edward, 1749.5.17~1823.1.26] 오늘의 역사 (1월 26일)[1823년] 종두법 발견한 에드워드 제너 사망 영국의 의학자로 우두접종법의 발견자인 에드워드 제너가 1823년 1월 26일 사망했다. 천연두는 종두법이 생기기까지 몇백년 동안 가장 무서운 전염병의 하나였다. 제너는 글로스터셔주 버클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때부터 의학을 공부하였으며, 1770년에 J.헌터로부터 2년간 외과학을 배우고, 세인트조지병원에 근무했다. 제너는 어떤 여성 환자로부터 "과거에 우두에 감염됐던 사람은 일생 동안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 는 말을 듣고 확인하기 위하여, 8세된 피프스라는 소년의 팔에 처음으로 종두를 실시하였다. 얼마 후 자연 감염의 경우와 똑같은 두진이 생긴 후 치유됐다. 그 후 그 소년에게 천연두 바이러스를 접종했으나 병이 발생하지 않았다. 즉 우두의 병원체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점, 또한 우두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 등이 실험적으로 증명됐다. 이로써 종두법에 성공한 그는 1798년에 `우두의 원인과 효과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의사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 뒤 효력이 인정되어 1803년에 런던에 우두접종 보급을 위한 왕립제너협회가 설립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접종을 해주었다. 영국의회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상금을 내리기도 했다. 제너가 발명한 종두법은 그 후의 모든 백신 개발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후 제너는 면역학의 원조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조선닷컴 2017-01-26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526
1802 - 미국 의회도서관 관련법 승인 [책갈피 속의 오늘]1802년 美의회도서관 관련법 승인 1802년 1월 26일 토머스 제퍼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미 의회도서관의 역할과 기능을 규정한 첫 번째 법안을 승인했다. 미 의회도서관은 ‘도서관의 예산은 의회가 정한다’ ‘도서관장 임명권은 대통령이 갖는다’ 등의 규정에 따라 명실공히 법적 기구가 됐다. 미 의회도서관은 1800년 설립됐다. 필라델피아에 있던 의회를 워싱턴으로 옮기면서 의원들을 위한 도서관을 마련한 것. 도서 구입을 위한 첫 예산으로 5000달러가 배정됐다. 이 돈으로 이듬해 책 740권과 지도 3장을 구입했다. 이렇게 출발한 의회도서관은 현재 책 2900만 권, 사진 1200만 장, 지도 480만 장 등 모두 1억2800만 건의 자료를 소장한 도서관으로 성장했다. 의회도서관 발전사(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종종 3명이 꼽힌다. 제퍼슨 대통령은 1814년 발생한 화재로 책 3000여 권이 없어졌을 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 6000여 권을 기증했다. 이전까지 법률과 경제 등에 한정됐던 소장 도서의 범주가 이때 예술 문학 과학 등의 분야로 넓어졌다. 1864년 도서관장을 맡은 에인스워스 스포퍼드 씨는 의원 대통령 외교관만 이용할 수 있었던 도서관을 일반인에게 개방해 정보 대중화시대를 열었다. 또 1870년 저작권법 개정 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자가 저작권을 인정받으려면 책 2권을 의회도서관에 제출하도록 하는 규정을 포함시켜 소장 서적이 크게 늘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1899년 도서관장에 임명된 허버트 퍼트남 씨는 국내 도서관에서도 볼 수 있었던 12×7cm 크기의 도서 색인카드 등 현대적 도서관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그가 도입한 주제별 도서목록 간행, 도서관 상호 대출제도, 사진 복사 서비스 등은 세계에 전파됐다. 미 의회도서관은 현재 토머스 제퍼슨 빌딩, 존 애덤스 빌딩, 제임스 매디슨 기념 빌딩 등 3개 건물을 차지하고 있다. 매년 세계에서 약 200만 명이 이곳을 찾아 구텐베르크 성경에서부터 최신 과학서적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축적한 ‘지식의 업적’을 활용하고 있다. 초강대국 미국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단면이 아닐까. 김승진 기자 sarafina@donga.com /동아닷컴 2005-01-25 18:08:00 http://news.donga.com/3//20050125/8153444/1
오늘의 역사 (1월 26일)[1788년]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첫 상륙 1787년 5월, 영국을 출발한 11척의 배가 7개월만인 1788년 1월 18일 오스트레일리아 동쪽 보타니만에 도착했다. 배에는 총독으로 임명된 필립 아더와 788명의 죄수, 250여 명의 군인과 가족이 타고 있었다. 필립은 보타니만이 배를 정박하는데 부적당하자 북쪽으로 올라가 1월 26일 잭슨항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당시 자신을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낸 영국의 내무장관 시드니 경의 이름을 따 시드니라고 명명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770년 영국 탐험가 캡틴 쿡에 의해 알려져 영국 영토로 선언됐으나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776년 부터였다. 당시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 더이상 죄수들을 미국으로 보내지 못하게 되자 오스트레일리아를 새 유형지로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립이 끌고온 죄수들과 함께 시작된 시드니는 오스트레일리아 최대 도시로 성장했고, 1월 26일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날'로 정해져 국경일로 기념되고 있다. 179-년 두번째 죄수들이 보내지고, 이어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이주민들이 몰려와 호바트(1803년), 브리즈번(1824년), 퍼스(1829년), 멜버른(1835년), 아델레이드(1836년) 등이 새로운 정착지로 개발됐고 이 6개의 영토는 1850년, 영국 정부에 의해 자치정부로 승격됐다. /조선닷컴 2017-01-26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100125_0001
아르님 [Arnim, Achim von, 1781.1.26~1831.1.21] 후기 낭만파의 대표자이다. 여류 시인 베티나의 남편이다. 할레대학교·괴팅겐대학교에서 자연과학과 법률·경제학을 배웠으나 후에 작가가 되었다. 1806년 하이델베르크에 정주하여 하이델베르크 낭만파를 결성, 1808년 낭만파의 기관지 《은자신문(隱者新聞) Zeitung fur Einsiedler》을 발행하였다. C. 브렌타노와 협력하여 독일의 오랜 민요·동화·찬미가 등 약 600여 편을 수록한 《소년의 마적(魔笛) Des Knaben Wunderhorn》(1805∼1808)은 《그림 동화집》과 더불어 이 시대의 가장 큰 성과이자 독일 최초의 민요집으로, 당시로는 경탄할 가치가 있는 문헌적 지식으로 편저되어 후대의 시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창작 활동에서는 시나 희극보다는 소설 영역에서 성공하였다. 장편에는 호엔슈타우펜왕가의 재흥을 지향하는 비밀결사의 고난을 다채롭게 그린 역사소설 《왕관을 지키는 사람들 Die Kronenwachter》(미완), 사회소설 《돌로레스 백작부인의 가난, 부, 죄와 벌 Armut, Reichtum, Schuld und Busse der Grafin Dolores》(1810), 단편에는 카를 5세의 첫사랑인 집시 소녀를 그린 괴기소설 《이집트의 이사벨라 Isabella von Agypten》(1811) 등을 들 수 있고, 후기의 《할레와 예루살렘》은 내용과 구성면에서 가장 분방한 작품으로 낭만극 문학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네이버
- 'Child with Cage'
피갈 [Pigalle, Jean-Baptiste, 1714.1.26~1785.8.21] 파리 출생. 르 로랑 및 르모완에게서 조각을 배웠다. 1736∼1739년 로마에서 고대 조각을 모각(模刻)하였다. 로코코적인 우아함과 유동적인 기교 및 고전주의와의 조화에 힘써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조각계를 대표하였다. 만년에는 다시 자연주의적인 사실성이 첨가되어, 도리어 미적 균형을 잃었다. 1744년의 《날개를 달고 있는 메르쿠리우스》는 정(靜)에서 동(動)으로의 순간을 기민하게 잡아 경쾌한 감촉이 넘쳐 일약 명성을 얻었다. 동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그후의 대작으로 성토마스교회(스트라스부르)의 《모리츠 폰 작센 분묘》(1770)와 파리 노트르담성당의 《알쿠르 백작 분묘》(1771) 등이 있다. /네이버
뷔데 [Budé, Guillaume, 1467.1.26∼1540.8.20] 파리 출생. 법률과 그리스어를 연구하였다. 처음으로 역사적·언어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로마법 연구를 일신한 《유스티니아누스법령집주해(2권, 1508∼26)》 《고대화폐고(古代貨幣考, 1515)》 《그리스어고(語考, 1529)》의 저서가 있다. 또 프랑수아 1세의 측근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의 전신인 왕립교수단의 창설에 기여하는 등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추앙된다. /ya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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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