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아리랑 고개
조 흥 제
‘아리랑’이라는 단어에는 ‘곱고 고운님과의 가슴 아픈 이별’이란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거기에 기초를 두어 만든 노래가 아리랑이다. 노래의 시원(始原)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3국시대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것에 근거를 두어 정선 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 지방마다 특색 있는 아리랑 노래를 탄생시켰다.
우리가 아리랑의 원조로 알고 있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 병 난다.’는 아리랑 노래는 오랜 옛날부터 불리어졌던 노래가 아니라 아리랑 영화를 제작할 때 지은 서양음률이 들어 있는 가사와 곡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이름을 ‘아리랑’이라고 지은 것은 어쨌거나 민족 정서에 뿌리를 둔 것이리라.
성북구에서는 아리랑 영화의 촬영배경지인 아리랑 고개 길(돈암동 4거리에서 정릉 길 입구까지 1.4Km 구간)을 영화의 거리로 지정하여 아리랑 테마공원을 조성했고, 거리 양쪽에는 영화 포스터 조형물을 설치하였다. 개봉 영화관인 아리랑 시네센터는 3개의 상영관과 영화 전시장을 갖추었다. 부설기관인 아리랑도서관에는 2만8천여 권의 영화 관련 서적도 비치되어 있으며, 아리랑을 주연하고 감독한 춘사 나운규 탄생(1904~1940) 100주년을 기념하는 비석도 세웠고, 매년 5월 7일에는 아리랑축제도 연다. 2004년에는 성북문화 원년의 해로 ‘아리랑’에서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우리 영화 30편을 선정하여 영화 속의 의상과 분장으로 영화 역사퍼레이드를 펼치기도 했다. 따라서 아리랑 고개 길은 한국 영화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영화를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극작가가 대본을 써야 하고 그 대본대로 행동하는 배우가 있어야 하며 그것을 총 지휘하는 감독이 있어야 한다. 또 내용에 맞는 장면이나 배경을 찾아 가야하고 없으면 만들어 넣어야 한다. 그 장면들을 영상에 담는 촬영기사가 있어야 하고 그것도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라 몇 달, 또는 몇 년 걸리는 대작도 있으니 비용이 엄청나게 든다. 그 비용을 대는 제작자가 또 있다. 그 중에 한 가지만 빠져도 영화는 만들어지지 못한다. 그래서 종합예술이란 말이 나온 것이리라. 그렇게 힘을 들여 만든 영화라도 영화관에서 관객과 만나 반응이 좋아야 성공한 작품이 된다. 관객이 많지 않으면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물론 돈을 댄 사람은 망하게 된다. 그렇기에 제작자는 작품을 선정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이 작품이 나온 후에 관객들의 반응은 어떠할까를 미리 다각도로 검토하고 성공할 수 있어야 손을 댄다.
우리민족은 한(恨)의 민족이다. 남의 나라의 침입을 많이 받아 가족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 과정에서 이별을 하여 피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 간 때가 무척 많았다. 그것이 쌓여서 아리랑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나운규선생도 이런 민족의 한을 담아 영화를 만들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이 제작과 감독, 주연까지 맡았을 것이다. 그 영화가 나온 후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니 그의 예상은 들어맞은 것이다. 그 후 일제의 간섭이 심하여 민족혼을 담은 영화는 제대로 만들 수 없어 아리랑은 더욱 값진 작품이 되었다.
해방 후에 ‘자유만세’, ‘검사와 여선생’ 등이 나왔다. 흑백영화에 변사가 화면을 설명해 주는 영화였다. 나도 학교 운동장에서 신문지를 깔고 앉아 검사와 여선생을 보았다. 하얀 천(스크린)을 세워 놓은 것을 보면 관객 가운데 놓은 달달달 돌아가는 영사기에서 불빛이 나와 천에 비추면 상이 생기고 그 상은 움직였다. 그래서 영화를 활동사진이라고도 했다. 중간에 앉았던 사람이 일어나면 화면을 가려 관객들은 비키라고 여기저기서 소리 질러 소란스러워지기도 했다. 검사와 여선생은 많은 호응을 받았다.
어느 초등학교에 점심을 못 싸 오는 남학생이 있었다. 그 애는 점심시간이면 혼자 운동장에 나가 놀았다. 담임인 여선생이 불러서 자기 밥을 나누어 먹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여선생은 퇴직하고 그 남편은 노름꾼이 되어 집에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갖다 팔고 아내에게도 돈을 내놓으라고 괴롭혔다. 어느 날 남편은 눈이 충혈 되어 와서 돈을 내 놓으라고 하자 부인이 없다고 했더니 부엌에 들어가서 칼을 들고 나오다 문지방에 걸려 넘어져 칼에 찔려 죽었다. 여선생은 남편을 죽인 살범인으로 기소되었다. 여선생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정에서 그 사건을 맡은 검사는 피고가 범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검사는 범인의 죄를 무겁게 하고 변호사는 죄를 가볍게 하는 것이 임무인데 검사가 범인을 변호하고 나오다니 모두가 의아해 했다. 판사가 증거를 대라고 하니 ‘여선생과 남학생이 도시락을 나누어 먹던 얘기’를 했다. ‘도시락을 나누어 먹던 아이가 자라서 검사가 된 바로 자신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마음씨가 고운 여선생이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 장면을 변사의 흐느끼듯 하는 해설에 운동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토킹 영화보다 변사의 해설을 곁들인 흑백영화는 훨씬 더 박진감이 넘쳤다.
몇 년 전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와 ‘왕의 남자’도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우리 영화의 질과 수준도 높아져 관객들의 그런 큰 호응을 얻었다고 생각된다.
이제 한국 영화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스크린 쿼터’라는 올무에 걸려 풀고 나올 수 있을 지, 아니면 점점 더 얽혀 들어갈는지 알 수 없는 시험대에 섰다. 스크린 쿼터는 외화를 많이 수입하라는 선진국의 요구라고 한다. 그것을 거절하기가 사실상 어려운가 보다. 나라가 어려울 때 우리민족은 금 모으기 운동을 펼쳐 왔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오락물의 하나인 방화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 섰는데 국민들이 팔짱만 끼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인은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고, 전 국민은 방화 한 편 더 보기 운동을 펼친다면 스크린쿼터라는 올무를 풀고 나올 수 있음은 물론 한 단계 더 뛰어 올라 넓은 세계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방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리랑 고개를 한번 방문하여 지난날의 영화계를 되돌아보고, 영화계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영화인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으면 한다.
첫댓글 '달달달 영사기 돌아가는 영사기'라는 표현이 가슴에 깊이 와닿습니다.
봄이오면 아라랑 고개 길을 걸으며, 마음속의 영사기를 달달달 돌려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