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참을 수 없는, 너무나 참을 수 없는 세상의 숨겨진 비밀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말 해도 좋다면, 몹시 불행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평생 동안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첫눈이 내린다는 기상 예고가 번번이 어긋나던 11월말, 불현듯 이모가 나타났 다. 퇴근 시간인 여섯 시 정각에 책상 위의 전화벨이 출렸을 때 나는 믿어 의심 치 않고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이모야." 그러나 김장우가 아니었다. 이모의 음성을 듣게 될 줄 몰랐던 나는 잠시 말을 잊었다. "퇴근 시간이지? 나올래? 저녁이나 함께 먹었으면 하고." 우울한 음성이었다. 김장우의 전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집 에 놀러 오라는 이모의 전화가 몇 번 있었는데,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잠깐 이모를 잊고 있었다. 이모는 회사 앞 작은 공원에 있었다. 시멘트에 나무 무늬 페인트 칠을 한 차 가운 벤치에 앉아 이모는 내가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자동차들이 오고 가는 복잡 한 도로 저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이모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 이었다. 이모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이모에게도 무슨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오늘은 정말 첫눈이 올 것 같아서 아침부터 눈 마중을 나왔는데 또 허탕이 야." 망연한 눈길을 거두고 나를 발견한 이모가 이모답게 웃는 것을 보고서 나는 또 생각했다. 이모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그것은 첫눈이 온다는 일기 예보가 자꾸 어긋나는 것 정도여야 어울린다고, 남루한 일상의 고통에서 홀로 자유로운 이모를 보는 것이 내 삶의 큰 위안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지? 그렇지? 오늘이 지나려면 아직 여섯 시간 이나 남았잖아." "참, 이모는. 그래서 내가 필요했어요? 집에서도 첫눈을 기다릴 수 있는데, 이 모부랑 함께 기다리는 것이 더 근사한데, 고작 안진진한테 같이 기다려 보자고 전화한 거예요?" "싫으니? 너, 다른 약속 있었어?" 순간 이모의 얼굴에 희미한 섭섭함의 흔적이 배어 나오은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말투는 내가 늘 이모에게 쓰는 것이었다. 이모가 나를 불러 줘서 고맙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나는 평소의 화법대로 말했던 것 뿐이었다. 이모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싫지요. 다 늙은 이모하고 하는 첫눈 마중이 뭐가 좋겠어. 사랑하는 사람하고 라면 모르지만." 나는 한 번 더 이모와 나 사이에 통용되는 화법으로 이모를 시험해 보았다. 역시 내 기우였다. 이모는 흔연스레 내 말을 받아 넘겼다. "그랬니? 그럼 할 수 없지 뭐. 나도 어디 중년의 로맨스나 찾아봐야지.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로맨스를 위해서라도 제발 오늘 첫눈이 내렸으면." 나는 하하, 웃었고 이모는 호호, 웃었다. 우리는 비밀 암호로 상대를 확인한 병사들처럼 안심하고 팔짱을 끼었다. "무얼 먹을까? 이런 날 어울리는 밥은 무엇일까..." 우리는 첫눈이 올지도 모르는 날에 먹으면 어울릴 음식을 찾아서 이곳 저곳을 헤매었다. 거리를 뒤덮은 휘황한 네온 사인과 들떠 있는 인파들의 무리 속에서 이모와 나는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팔짱을 풀지 않았다. 이모에 게서 풍겨 오는 아련한 향수 냄새, 이모의 모직 코트가 주는 푹신한 감촉, 따뜻 한 이모의 체온과 함께하는 겨울 밤은 참 좋았다. "좋다." "뭐가?" "겨울에 이모랑 함께 걷는 것." "나도 좋다." "뭐가요?" "안진진 같은 조카가 있다는 것." 이모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긋 웃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미소였다. 어머니는 아주 오래 전에 잊어버린 것들을 이모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모와 함께 있으면서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나도 원치 않 는 일이지만 도저히 어쩌해 볼 수 없는 숙명적인 연상 작용이었다. 어머니는 지난달 계획보다 두 달 늦게 식품가게를 개업했었다. 진모가 결심공 판에서 어머니가 원하던 수준의 형량을 선고받은 것이 최근 어머니가 받은 가장 행복한 선물이었다. 우발적 사건이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 피해자의 진술서 가 결정적으로 진모를 도왔다. 물론 그 진술서를 받아 내기 위해 어머니가 투자 한 돈을 생각하면 어머니 표현대로 피가 거꾸로 솟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 어머니 표현을 빌려서 자식이 중하지 돈이 중한 것도 아니고, 먹고 살 돈 버는 일이라면 이제 겁날 것 하나도 없는 어머니의 세상 경력이 그나마 위안이 라면 위안이었다. 그렇게 해서 진모는 늦어도 다음 겨울이면 집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와 동시에 어머니도 법률책을 떼고 다시 일본어 공부로 돌아왔다. 진모 때문에 어머니가 일껏 익혔던 모오 소로 소로 아끼데스네(벌써 가을입니다)는 써먹을 수가 없게 되었고 대신 모오 소로소로 후유데스네(벌써 겨울입니다)가 도입되어 야 앴다. 어머니의 식품가게는 예상했던 것보다는 매상이 저조했다. 어머니의 개업이 한 발 늦어진 탓이었다. 지난 여름과 가을 사이에 벌써 많은 가게들이 일본인 상대로 업종을 바꾸어서 크게 한몫을 보았다고 했다. 말하자면 어머니는 진모 때문에 막차를 탄 것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이 일에 대해 전혀 상심하지 않았 다. 세상 속에서 사는 일에 대해 어머니는 이제 완전히 철인의 무사가 된 느낌 이었다, 어머니는 첫눈 따위 오거나 말거나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한가한 것말 고도 어머니를 숨넘어가게 부르는 삶의 호출은 하도 많아서 어머니는 도저히 심 심할 틈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니네 엄마한테는 내가 첫눈 보자고 너 불러 냈다는 말일랑 아예 말아라." 문득 이모가 내게 다짐을 두었다. 이모도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 다. "그곳에서 추운 겨울을 지내야 할 진모를 생각해봐. 첫눈 오면 겨울인데, 내가 나빠. 난 정말 나쁜 이모야. 이러면 안되는데..." 이모의 얼굴은 미안함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모는 그런 사람이었다. 미안 하면 금방 얼굴이 붉어지고, 슬프면 금방 눈물이 고이는 사람, 이모에겐 모든 감 정이 다 진실이었다. "괜찮아, 이모 진모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은 엄마가 모두 손 을 써 놓았어요. 우리엄마, 세상일에 대해선 나보다 훨씬 유능하다고, 그런점에 서 나는 아주 바보거든." "그래. 넌 좀 바보야. 날 닮았어..." 이모는 자신의 코트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내 손을 꽉 쥐었다. 나는 이모를 많이 닮았지만, 그러나 이모의 딸은 아니었다. 내가 이모의 딸로 태어났다면 나 도 주리처럼 답답하고 재미없는 인간으로 성장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세상의 숨 겨진 진실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몹시 불행한 일이었다. 주리를 보면서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평생 동안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었다. 회사의 부장 한 사람이 중증의 당뇨병 진단을 받고 나서 사흘을 울었다고 했 다. 체구도 크고 평소 성격도 괄괄한 편이어서 그런 고백을 듣고 보니 어안이벙 벙할 지경이었다. 당장 위중한 병도 아니고, 병원에서 정해 주는 식단표대로 먹 으며 평소대로 살면 되는 일인데 왜 그러는지 처음에는 몰랐다. "자네들은 몰라. 이젠 맛있다고 배부르게 밥 먹는 재미가 없어졌어. 밥 한 공 기 이상 먹으면 죽을 줄 알래. 그뿐인 줄 알아? 퇴근 후 술 한잔 하는 맛으로 사는 나 같은 사람 보고 술 담배 안 끊으려면 병원에 오지도 말래는군. 내가 가 장 좋아하는 음식이 젓갈이나 장아찌 같은 것인데 그것도 절대 안 된대요. 그것 말고도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지, 이제 세상사는 재미 다 끝났 구나 싶으니 어찌나 절망적이던지. 이러구러 살다보면 또 익숙해지겠지만, 온갖 음식 다 먹다가 이제 와서 그렇게 살라면 어떡하냐구. 처음부터 아예 그런 음식 들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혹 견디기 쉬울는지 몰라도..." 거구의 중년 사내를 사흘 울린 식이요법,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주리 에게는 처음부터 절망 따윈 없었을 수도 있었다. 젓갈이나 장아찌로 비유할 수 있는, 삶의 다른 방법들을 주리는 애시당초 알지 못한 채 성장했다. 세상이 그 애를 단련시킬 수도 있었겠으나 이모와 이모부의 성실한 방어로 그런 기회들은 철저히 원천봉쇄되었다.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 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 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 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이모와 내가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첫눈이 올지도 모를 저녁의 식사 메뉴는 해물 스파게티였다. 발제자는 이모였고 나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이래도 좋고 저 래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닥쳐있을 때는 누구 한 사람의 강렬한 주장만큼 고마 운 일도 없는 법이었다. "난 말야, 로마에서 먹었던 새콤하고 달콤했던 스파게티 맛을 잊을 수가 없단 다. 서울에서는 어디서도 그런 맛을 만날 수 없어서 내가 직접 만들어 보기도 여러 번 했는데 늘 실패했지. 오늘 다시 로마의 추억에 도전해 보는 것이 어떨 까?" 그래서 나 안진진까지 덩달아 언제 가 볼지 모를 로마를 꿈꾸며 멋진 저녁식 사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로마의 이모부는 어땠어요? 이모는 보나마나 오드리 헵번처럼 굴었을 것이 고." "이모부?" 갑자기 이모부가 왜 나오냐는 듯이 눈을 크게 뜨는 이모. "아니, 이모부랑 같이 간 것 아녜요? 그때가 언제더라?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두 분이 유럽 여행 가셨잖아요." "그래. 맞아. 그 사람 아니면 누가 날 로마에 데려다 줬겠니? 그런데 내 기억 속에는 왜 니네 이모부가 하나도 없을까. 마치 나 혼자 다녀온 것 같아. 나 이상 하지? 그렇지?" "결혼 이십 년이면 아마 다 그럴걸." 나는 결혼 이십 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그렇게 말하고 만다. 하지 만 나는 이모부와 함께했던 이모의 유럽 여행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알 것 같 았다. 모든 사람에게 합의된 규칙들만 충실히 이행하면 삶이 성공이라고 생각하 는 이모부와 늘 파격적인 이벤트를 꿈꾸는 이모. 아니나다를까 이모는 배시시 웃으며 그때의 이모부를 설명해 준다. "이모부는 말야. 어디서든 사진 세 장만 찍으면 끝이야. 내 사진 한 장, 자기 사진 한 장, 그리고 우리 뚤이 찍은 사진 한 장. 그리고 밤이면 호텔로 돌아와 그날의 지출과 내일의 예상 지출을 계산해서 지갑을 정리하고 나면 곧바로 잠이 든단다. 내가 밤새 창가를 서성이며 냉장고 속의 술병들을 축내고 있는 줄은 꿈 에도 모르고 말야." 이모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찡그리고 있었다. 홀로 창가에 앉아 독한 위스 키를 마시며 그랬던 것처럼? 아니면 심심하고 또 심심했던 그때의 이모부를 원 망한다는 표시로?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말야, 또 밤마다 앉아 찍어 온 사진들을 앨범에 정 리하는 거야. 내 사진, 자기 사진, 우리 둘 사진. 페이지 하나에 똑같은 배경의 사진 석 장을 나란히 붙여놓고 다음 페이지에 또 내 사진, 자기 사진, 우리 둘 사진..." 이모는 여전히 이마를 찡그리고 있었다. 포크에다 스파게티 가닥을 둘둘 감았 다가 다시 풀었다가 하면서 이모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다녀와서 얼마 동안은 집에 손님이 오면 언제나 그 앨범을 내오곤 했어. 여기 가 그 유명한 로마 스페인 광장, 여기는 파리 노트르담 성당, 여기는 영국 런던 탐... 애들이 돌아왔을 때도 맨 먼저 그 앨범을 들고 왔지. 여기는 그 유명한 스 페인 광장, 노트흐담 성당..." 이모는 지금 사진만 있고 추억은 없는 이모부를 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모는 마치 제목만 있고 본문이 없는, 텅텅 빈, 기이한 소설책을 사 들고 망연자 실해하는 소녀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내가 그렇게 맛있어 했던 스파게티를 어디서 먹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해. 니네 이모부는 사진들이 나란히 붙어 있는 앨범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 대지." 이모는 마침내 포크를 열심히 감았다 풀었다 했던 스파게티 몇 가닥을 입에 물었다. 나는 벌써 반이나 먹었는데 이모한테는 그게 처음이었다. 나는 이모의 시식 소감을 기다렸다. "으음. 괜찮은데? 비슷해. 진단이 너랑 먹어서 그럴거야. 좋아하는 사람하고먹 으면 뭐든 맛있대잖아." 그럼 그 동안은 누구하고 스파게티를 먹으러 갔느냐고 나는 묻지 않았다. 동 행했던 사람들 중에 이모부가 없을 확률은 전무하니까. 이모부만큼 성실하고 자 상하게 아내를 챙기는 사람은 더 이상 본 적이 없으니까. 이모의 입에서 이모부 를 비난하는 소리를 듣는 일은 싫으니까. 한 번 더 강조하는 말이지만 이모부는 심심한 사람일지는 몰라도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돌출을 못 견뎌하고 파격을 혐오한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한다 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어쩌면 나는 이모의 넘쳐 나는 낭만에의 동경을 은근히 비난하는 쪽을 더 쉽게 선택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모부 같은 사 람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이모의 낭만성을 나무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쉽다. 그 러나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은 어떻 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 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 없는 모순... 이모가 제안하고 내가 동의한 저녁식사로의 스파게티는 사실 실패에 가까웠 다. 해물은 싱싱하지 않았고 토마토 소스는 들척지근했다. 나는 반쯤 먹은 후 식 사를 멈췄다. 이모는 그만큼도 치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모는 여전히 오늘의 스파게티가 로마의 스파게티와 닮았다고 주장했다. "근사했어. 이 집 실내 장식, 나 정말 마음에 든다. 로마의 그 레스토랑하고 닮 았어. 거기도 이 집처럼 바닥이랑 벽이 다 밝은 빛깔의 나무였거든." 이모가 근사했다면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식사를 마치고 커피까지 한 잔 마 신 다음 나와 본 바깥 세상은 우리에게 더욱 확실한 성공을 보장해 주고 있었 다. 눈이, 이모가 예감했던 첫눈이 한 잎 두 잎 풀풀 날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봐라! 내가 뭐랬니? 틀림없다고 그랬지!" 이모는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시작하고 있는 낌새가 첫눈치고는 꽤나 푸질 것 같았다. "됐어! 첫눈 마중 나왔다가 제대로 만났으니 이젠 됐어. 진진이 너랑 함께 맞 은 이 첫눈, 나 죽을 때까지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할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찰나에 불과했던 느낌이었지만, 이모가 조금 과장하 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이면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이모의 말버릇이긴 했다. 하물며 첫눈일진대 얼마 든지 이모답게 수선을 피울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모의 모습에서 한순간 문득 내 어머니의 과장법을 읽었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켜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극복의 힘을 얻어내곤 하던 어머니의 과장법이 이 모에게 응용되고 있다는 나의 순간적인 느낌을 그러나 오래 반추하지는 못했다. 걷자고, 무조건 걷자고 이모가 내 손을 이끌었던 것이다. 그것도 몹시 절박하게 그랬다. "빨리빨리 사람들이 뜸한 곳으로 가 보자. 여기서는 안 돼. 내리는 족족 사라 져 버리잖아. 어서 가자." 이모는 내린 눈이 사람들 발길에 짓밟히는 모습을 진정으로 보기 힘들어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눈을 확인하는 일이 이모 인생에 닥쳐온 최고의 고통인 것처럼 굴었다. 나는 축축하게 젖어 오는 이모의 뜨거운 손을 잡고 어두운 거리 를 달렸다. 달리는 우리 두사람의 머리 위로 눈은 점점 푸지게 쏟아지고 있었다. 참 이상한 밤이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내내 그 밤이 이상했고 이모가 이상했다. 그 래서 마음자리가 오래 뒤숭숭했다. 그 밤, 첫눈은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채워줄 만큼 많이 매 렸다. 폭설은 아니었지만 다음날까지 세상의 모든 지붕 위에 소복이 쌓인 흰 눈 을 즐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모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잡던 그 시각에는 별로 감동적인 적설량을 보여 주지는 못했다. 쌓이는 눈을 볼 수 있는 곳, 누구에게도 짓밟히지 않고 고스란히 추운 땅을 덮고 있는 흰 눈을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호흡이 가빠서 주저앉을 지경이 되어서야 이모와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었다. 아니, 이번에도 내가 그 사 실을 이모에게 일러주었다. 여기는 서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다는 강남의 번화가이고, 뒷골목까지 촘촘하게 모여 있는 술집과 음식점과 노래방들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첫눈 때문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달리는 틈 틈이 이모를 설득했다. 좀처럼 내말을 믿으려 들지 않던 이모가 어느 순간 거짓 말처럼 달리기를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이젠 됐어. 그만 돌아가자. 난 택시 타면 돼. 나부터 갈게." 이모는 그럴 수 없이 침착했다. 여태까지 한 짓은 모두 그냥해본 장난이었다 는 듯이. 실제로 택시를 타고 떠나면서 이모가 남긴 작별의 인사가 그랬다. "모처럼 신나게 잘 놀았다. 진진아, 주책없는 늙은 이모하고 놀아 줘서 고맙다. 안녕!" 첫눈 내리는 거리에 남겨진 나는 얼마나 황당했던지. 이모는 진짜 나와 신나 게 놀아 보려고 그랬는데 혼자 여러가지를 유추하고 분석했던 스스로가 얼마나 어리석게 여져지던지. 그래도 여전히 장난이 아니라고 우기는 내 속마음은 또 얼마나 강렬했던지. 이모와 헤어져 집에 돌아와 보니 김장우에게 두 번, 나여규에게 한 번, 그렇게 세 통의 전화 메모가 남겨져 있었지만 나는 두 사람 모두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나영규에게 전화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김장우에게 하기에는 내 감정 이 영 복잡했다. 그에게 전화를 하면 이모에 대해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모와 함께 첫눈 오는 거리를 달리다가 왔는데 아직도 해괴한 기분 이라고, 이모하테 내가 홀린 것 같다고, 그런 이야기를 그에게 하고야 말 것 같 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내가 여태도 고백을 하지 않았기에, 김장우에게 내 어머니는 이모였다. 나는 그 동안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그가 프랑스 식당에서 보았던 이모의 이미지에 어긋나지 않도록 늘 조심하곤했었다. 나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기 싫어했지만 김 장우는 내 어머니에 대해 말하길 몹시 즐겨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내 이모 에 대해서... "안진진 어머니, 한 번 보았지만 그림으로 그리래도 그릴 수 있어. 나한테 어 머니가 있었으면, 할 때 늘 떠오르는 모습이 꼭 안진진 어머니 같았거든. 안진진 은 엄마 닮았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한테 이제 와서 실은 내 어머니가 아니고 이모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겠는가. 나는 김장우에게 어머니 자매가 쌍둥이라는 사실만 조심스레 밝혀 놓았을 뿐이었다. 그래더니 김장우는 더욱 기뻐하는 것이었다. "와! 그렇게 멋진 어머니가 두 분이다 이 말이잖아. 근사하고 상냥한 어머니가 둘씩이나, 안진진 정말 횡재했구나. 생각할수록 나까지 신나는 일이데?" 김장우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내 어머니에 대 해서, 그리고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은 아버지와 남동생 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것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밖에 없는 형 에 대해서 내게 모든 것을 말해 주었듯이 나도 그에게 그렇게 해주길 그는 바라 고 있었다. 그의 기대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김장우에게 스스럼없이 모든 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보여 줄 수 있는 날이 오긴 올 것이었다. 서로 사랑하므로 결혼한다면, 결혼으로 서로의 사랑이 물처럼 싱거워진다면. 첫눈 오는 날의 이모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모야말로 자신이 등장 하는 삽화의 마무리를 그런 식으로 어설프게 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다. 이상한 밤이었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은 여태도 내가 이모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 다는 증거였다. "진진아. 점심 먹었니?" 점심을 먹고 돌아와 자리에 막 앉았는데 이모의 낭랑한 음성이 전화선을 타고 흘러 나왔다. 이모가 내게 전화하는 것을 단일 분만 미루었다면, 아마도 내가 먼 저 이모네 집 전화번호를 눌렀을 것이었다. 점심을 먹은 식당에서 직원들과 내 내 첫눈을 화제로 올렸기 때문에 돌아가면 곧바로 이모에게 전화하겠다고 마음 을 먹었었다. "전화하려고 그랬는데..." "어젠 잘 들어갔니? 나한테 좀 물어 봐 줘라. 어제 잘 들어갔냐고." 빙글빙글 웃고 있는 이모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환했다. 나는 안심했다. 이 모에게는 아무 일도 없는 것이었다. "이모, 어제 곧장 집으로 가지 않았구나?" 질문이 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모의 밝고 환한 음성이 어젯밤 나와 헤어진 후의 일들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계속 눈발이 굵어지는데 어떻게 하니? 사람들 머리에 하얗게 눈이 쌓이는데 어떻게 그냥 집으로 가니? 그래서 도중에 그냥 내렸지." 이모는 택시에서 내려 하염없이 걸었다고 했다. 밤이 깊어져 사람들이 발길이 뜸했기 때문에 사그락사그락 발에 짚히는 눈의 느낌을 실컷 즐겼다고 했다. 노 오란 불빛이 흘러 나오는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서 뜨거운 커피도 한 잔 마셨 다고 했다. 레코드점에 들어가 CD도 한 장 샀고 눈을 맞으며 고구마를 굽고 있 는 거리의 청년을 위해서 군고구마를 무려 열일곱 개나 샀다고 했다. "열일곱 개나?" "그래. 열일곱 개. 떨이 해준 거야. 청년의 애인이 기다리고 있대.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했으니까 지금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약속 장소에서 틀림없이 자 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래. 그래서 내가 그랬지? 어서 달려가 애인을 만나라고." 이모의 낭만주의를 잘도 공략해 낸 군고구마 청년이 하도 신기해서 나는 하하 웃었다. 이모는 속은 것이 분명했지만, 나는 아주 잘했다고만 말해 주었다. 시골 에서 아들 집 찾아왔다가 집을 못 찾아서 아들 주려고 가지고 온 꿀을 판다는 내용의 정해진 대사가 젊은이다운 발상으로 그렇게 변환되었으리라. "올해처럼 아름다운 첫눈은 아마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거야. 정말 좋았 어." 이모가 어젯밤의 만남을 최종적으로 정리했다. 나는 문득 이모 혼자 앉아 있 기로는 너무 큰 이모네 집 거실을 떠올렸다. 지금 이모는 눈의 흔적이 남아 있 는 마당을 내다보고 있을까. 어제 CD를 한 장 샀다는데 이모가 요즘 좋아하는 유행가는 무엇일까. 그런 생각 끝에 귀기울여 보니 아니나다를까 전화의 배경 음악이있었다. "무슨 노래예요? 어제 산 것?" "응. 오전 내내 듣고 있었어. 아무리 반복해서 듣고 또 들어도 너무 좋아. 나마 한참 동안 이 노래만 들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헤어진 다음날' 듣고 또 들어도 너무 좋다는, 특히 제목이 이모의 뒤통수를 칠 만큼 감동적이 었다는 노래가 '헤어진 다음날'이었다. 나는 이모에게 인사 삼아 유쾌한 농담을 던졌다. 전화를 끊어야 할 시간이었다. "누구랑 헤어졌는데? 흑시 이모 남몰래 다른 사람 좋아하고 있었다면 나한테 도 말해 주지 말아요. 나 감당하기 어려워요." "진진아. 난 정말 궁금해. 헤어진 다음날, 그 기분이 어떨까? 시간이 내 앞에서 어떻게 흘러갈까? 죽고 싶을 만치 견디기 힘들까? 난 정말 궁금해. 너무나." "이모, 대체 어떤 남자야? 누구와 헤어진 다음날?" "어떤 남자? 어떤 남자냐고? 그야 이모부지." "뭐예요? 아니, 이모..." "바보. 농담이야, 농담. 그럼 전화 끊는다. 안녕." 역시 못 말리는 이모였다.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나는 한참을 혼자 웃었다. 귀여운 이모, 장난꾸러기 이모... 이모가 좋았으므로 나는 이모에게 감염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날 퇴근하면 서 나는 일부러 레코드점을 찾아가 이현우라는 가수가 부른 '헤어진 다음날' CD를 한 장 샀다. 그리고 이모를 위해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가 들어 있는 새 앨범도 한 장 샀다. 이모가 좋아할 만한 노래였다. 어쩌면 이미 좋아해 버린 노 래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언젠가 큰눈이 내리면, 머리에 하얗게 눈 을 이고 이모를 찾아가야지. 이모는 아마 깜짝 놀라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진진아, 나, 이 선물, 죽을 때까지 영원히, 영원히 보물처럼 간직할 거야. 꼭 그 렇게 할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