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은 줄어들고 생각은 많아진다.
생각이 많아져서 잠이 적어지는
것인지, 잠이 줄어들어 생각이
많아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비교적 잠을 잘 자는 편이지만
잠이 줄어든 것은 확실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보통 사람이
잠이 줄어들고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대개는 쓸데없거나 자기연민,
억울함과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일주일 전쯤 단톡방에 어느 분이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을 언급하면서
복잡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쓴
글을 올렸다. 최근에 쓴 글로
추측되지만 필자가 누구인지는
딱히 알 수는 없지만 글 내용으로
보아 우리 연배로 추측되었다.
그 글을 읽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은 그 전에
두번이나 읽기를 시도했지만
번번히 백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내용이 너무 딱딱하고 어려워
감당하기에 벅찼기 때문이다.
당시의 답답한 심정에다 자존심
같은게 작용하여 대출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도서관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간 김에 미시경제학자인 앵거스
디턴이 쓴 『위대한 탈출』도
빌려왔다. 이번에야말로 다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역시 어려웠고 인내심을 가지껀
발휘해야 했다. 인터넷 미디어
시대에 잘라내고 극도로 다이어트
한 말들에 중독이 되고 무슨 의미
인지 모르는 신조어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어 어렵고 재미
없는 글을 피하는 경향이
되어가던 터라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아시다시피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4년에 쓰여져 나찌
독일을 필두로 서구 제국의 집단
전체주의 기운이 거세던 가운데
전체주의의 사회주의의 위험성을
비판하고 경고해(특히 영국)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영국의 버나드 쇼와 시드니
웹 부부, 프랑스의 사르트르
같은 지식인들은 사회주의
신봉자로 공산주의를 옹호했다.
레닌은 이들 서구의 사회주의자
들을 "쓸모있는 똑똑한 바보들"
이라고 조롱했다.
어떻게 독일국민들이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에 현혹되어 그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는데 가담하게 되었
는지 몹시도 궁금해질 때가 있다.
독일 국민성에 대해 근면
검소하고 우직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독일에 가본 적도 아는 사람도
없어 단순한 편견일지 모르나
독일이 생산한 제품을 접하고
쓰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그런
인식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하이에크가 통렬히 지적했듯이
개인은 양심이 있지만 집단은
양심이 없다고 한다.
집단은 자유에 기반한 개인주의
보다 집단주의, 전체주의에
경도된다고 한다.
나는 내가 살아온 이 대한민국이
몹시도 자랑스럽지만 가끔은
좀 정도가 심한 사기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성형수술이
세계에서 가장 성행하는 나라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 더욱 그렇다.
잘 속고 잘 속이는 사회.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다는 우리의
속담, 직설적으로 표현해서
남의 고통을 은근히 기뻐한다는
의미라는 독일의 샤덴프로이데라는
말을 생각해본다.
그게 그말이 아닌가?
독일은 인류사에 크나큰 재앙을
초래하고 나서 벗어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민족사회주의
전체주의 환싱에서 탈피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안타까워진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스위스.
2016년에 전국민 기본소득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이성적인 스위스 국민들은
76.7%의 압도적 다수로
부결시켰다.
그 정책의 기본은 18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매월 2,500
스위스 프랑(약 300만원)을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650
스위스 프랑(약 78만원)을
기본소득으로 나눠주는 것이었다.
관광산업 의존도가 높은 스위스는
코로나 사태에도 재난지원금을
지급하지 않았던 것 같다.
동정심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든
쉽게 할 수 있고 흔하다.
동정심이 많으면 좋은 사람일까?
잠은 점점 적어지고 생각은
많아지니 마음이 어지럽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는
생각을 적게 하고 침묵의 시간을
많이 가지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