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헤어진 다음날 어제 아침엔 이렇지 않았어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오늘 아침에 눈을 떠 보 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어요... 12월이 되었다. 눈 대신 겨울비가 며칠 음산하게 거리를 적셨다. 밤이 되면 길거리의 웅덩이 들에 얼음이 얼었다가 낮 동안에 빗물에 녹는 날들이 되풀이되었다. 빙판길보다 그런 날의 살얼음이 더 사람들을 실족케하는 법이었다. 아침 출근 때마다 나는 살얼음에 속아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땅만 보며 걸었다. "보일러 그만 돌려. 더워 떠죽겠다..." 겨울 들어 어머니가 가장 못 견뎌하는 것은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였다. 나는 최소한도의 보온만 유지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 나라고 진모의 겨울 징역에 마음 아프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버스 정류소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 다리며 시린 발을 구르다가 문득, 거리를 걷다 목덜미로 스며드는 냉기가 괴로 워 외투의 목깃을 올려 세우다가 문득, 진모를 생각했다. 춥고 어설프며 괴로운 곳에는 언제나 진모가 먼저 와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비둘기가, 진모의 비둘기가 우리 집으로 날아 왔다. 한 번도 상상하지 않던 일이었다. 비둘기에 대해서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 적 이 없었다. 진모가 만나거나 만났던 여자들에 대해서 나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비둘기 때문에 진모가 징역을 살고 있었으므로 한 번쯤은 그 애를 원만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천만에 말씀이었다. 그 비둘기가 아니더라 도 진모는 자기가 갈 길을 갔을 것이었다. 그 애의 길 속에는 이미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여러 차례의 징역이 가져다 줄 어둠의 권위, 그것이 가져다 줄 보스의 위엄, 비둘기는 이런 것들을 위한 소도구였다. 소도구는 말 그대로 소도 구여서 언제라도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역활이 끝난 소도구가 새삼스레 등장한 것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 는 일이었다. 일요일 오전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시장에 나가고 없었다. 방문을 알리는 초인종 소리가 어쩐지 가늘고 머뭇머뭇했다. 문을 열자 거기 자그마하고 앳된 얼굴의 소녀가 서 있었다. "안진모 씨... 누나세요?" 그렇게만 물어 놓고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내가 뭐라 한마디만 하면 커 다란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말 것이었다. "저는 윤희... 예요. 저 때문에 진모 씨가..." 마침내 그 애의 창백한 볼 위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용서를 빌려구요... 용서해 주세요." 기가 막힌 일이었다. 진모가 그랬었다. 비둘기도 그냥 비둘기가 아니라 찬비를 맞고 떨고 있는 비둘기 같다고 그랬다. 나는 한눈에 이애가 바로 찬비 맞은 그 비둘기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나는 말없이 뒤로 좀 물러섰다. 들어오라는 표시였 다. 나는 그 애를 데리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까지 다정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한데나 다름없는 마루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는 일이었다. 윤희 하는 비둘기는 내 방에 들어와서도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토록이나 많은 양의 눈물이 흘러 넘치는데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희한했다. 마치 수도꼭지를 약하게 틀어 놓은 것처럼 안면 근육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고 그저 물만 줄줄 흐르는 것이었다. "그만 울어요. 이제 와서 울면 뭐 해." 동생의 여자였으므로 반은 올리고 반은 낮추는 말투를 사용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진모 씨는 안 된대요. 몇 번이나 찾아 갔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좀 도와 주세요... 어떻게 해야 진모 씨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까요... 도와 주세요..." 할 말이 없었다. 진모의 여자 편력 가운데 자기가 먼저 배신하고 돌아와 용서 를 구하는 이런 경우는 만난 적이 없던 나였다. 요즘 젊은애들도 이런가. 아니 요새 애들이라 이럴 수 있는가. "진모를 만났어요?" "면회를 여러 번 갔었어요... 아무 말도 안 해요.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래요... 이제 사랑하지 않는대요... 어떡해요. 난 안 그래요. 그때는 내가 잘못했어요. 이 젠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진모 말대로 해요." 그러자 비둘기가 갑자기 비명처럼 부르짖었다. "안 돼요! 누나가 도와 주세요!" 그러더니 내 무릎을 꽉 움켜쥐었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어린애다운 몸부림 이었다. 애잔한 매력이 넘쳐 흐르는 여자아이였다. 자신의 매력이 그것이라는 것 도 잘 아는 아이였다. 얻고 싶은 것은 모두 눈물로 얻어 내며 짧은 세상 상아온 이력이 저절로 보였다. 저런 애 앞에서 냉정하기란 몹시 힘들겠구나, 나는 생각 했다. 곧 진모를 면회해서 이 애 소식을 전해 주면 아주 으쓱해하겠구만, 하고는 생각했다. 그 애를 보는 내내 나 또한 재벌의 친척 명단이라는 그것이 무슨 두 루마리 문서처럼 자꾸 눈앞에서 아른 거렸으니까. "그랬을 거야." 비둘기가 집으로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는데도 진모는 놀라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이다. 진모는 어딘지 좀 달라 보였지만 건강에는 이상이 없어 보 였다. 오히려 혈색은 집에서 보다 더 좋아 보였다. 어머니의 옥 뒷바라지가 엄청 나게 세심하다는 증거였다. 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수염 미ㅍ에 철없는 표정을 찾아 내기도 어려웠다. "그 애 때문에 그 난리를 다 피우고, 그런데 벌써 딴전이야?" "윤희는 윤희의 길을 가야 해. 나 같은 놈한테 매달려 인생을 망치는 것보다는 그게 나아. 진심으로 행복을 빌어 주고 있는 거야." 그 말에 속을 내가 아니었다. 우울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잡는데는 이미 경지 에 이른 진모였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금방 간파했다. 비둘기는 아직 도 제 역활을 끝내지 않은 것이었다. 진모는 비둘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역 시 재벌의 친척 명단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애한테도 이런 식으로 목소리 깔고 슬프게 말하니?" "응. 진실한 사랑이란 떠나야 할 사람을 잡지 않는 법이라고 말하지. 이런 생 활 그만두고 부모님 뜻대로 공부를 계속하라고 충고하기도 했고. 너를 다시 만 나지는 않겠지만 언제 어디서나 너만을 생각하며 살겠다고 말했어. 꿈 속까지 쫓아가서라도 너를 지켜 주겠다는 약속도 했어." 하나의 거짓말을 수도 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나중에는 어떤 것이 진실인지 모 를 때가 있다. 진모가 그랬다. 자신의 말에 자신이 속아서 목이 메이고 있는 진 모. "이번엔 멜로드라마 작전니구나." "뭐? 멜로드라마?" "그래. 신파조 작전이야. 그렇게 해서 윤희라는 애를 확실히 잡아 두려는 모양 인데 조심해. 가만 보니 그 애 신파를 되게 즐기더라. 너무 재다가 진짜 네 말대 로 요조숙녀 되는 수도 있어. 그러면 다행이긴 하지만 내 동생이 좀 않됐잖아? 온갖 폼 다 잡았는데." "걱정 마. 그런 애들은 내가 더 잘 다루니까. 윤희 빼앗아 간 놈, 죽지 않을 만 큼 패 주려고 작정했을 때부터 나는 이런 날이 올 것을 다 계산하고 있었어. 처 음엔 그 녀석이 죽은 줄 알고 겁은 조금 먹었지만 말야. 멍청한 놈들이 하필 급 소를 때려서 말야. 하지만 이젠 잘 되고 있어. 모든 일이 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 고 있어. 윤희가 누나한테 또 가거든 잘해 줘. 진짜 내 마누라될지도 몰라. 그 애보다 더 나은 애 찾아 내기도 어렵거든." 진모는 자신만만했다. 한번쯤 톤이 바뀔 만도 한데 목소리는 한결같이 음울하 고 비장미를 풍겼다. 그 무거운 분위기가 주위를 압도하고도 남을 만큼 거의 완 벽에 가까운 변신이었다. 처음 진모를 보면서 어딘가 달라졌다고 느꼈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나는 포기했다. 숨겨 놓은 치부를 고백하고 있는 마당에 도 자신도 모르게 육성대신 가성을 사용하고 있는 그 애. 무엇이 육성이고 무엇 이 가성인지 분별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면, 분별을 할 필요가 어디 있으랴. 이 제는 그렇게 사는 일만 남은 것이었다. 하기야 진모한테 나 역시 떳떳한 것만은 아니었다. 양심 불량이라고 비난해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도 나 영규에게 당신 대신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 다. 역시 파렴치한 일로 매도당할 만한 일이지만, 지금까지 나영규는 이 결혼이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어떤 정보도 나한테 제공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런 상태로 지난 2일부터 회사에서 보내 주는 일본 단기 연수에 참가하고 있었 다. 15박 16일의 일정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이제 디데이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영규가 만들어 가지 고 있는 인생계획표를 대대적으로 손질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지금쯤 말해 주는 것이 예의였다. 나영규도 그런 기대 속에 일본으로 떠났다. "돌아오면 내게 멋진 선물 해줄 거지요?" 씁씁한 선물도 있다는 거을 모르는 사람이 나영규였다. 그런점에서는 나용규 보다 김장우 같은 남자에게 이별을 말하는 일이 훨씬 쉬울 것이었다. 고통을 받 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 그가 김장우였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 람은 나영규였다. "며칠 기다렸다가 아예 크리스마스 선물로 진진 씨 대답을 들을까요? 그게 좋 을 것 같은데. 우리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만듭시다. 근사하잖아요." 일본에서까지 전화를 걸어 이렇게 화려한 선물 전달식 계획을 짜고 있는 남자 에게 나는 이별을 말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영규는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자신이 만든 치밀한 인생계획표가 어긋나지 않을 범위에서는 충분히 내 의사를 존중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나영규에게 조금이라도 덜 미안한 것은 그가 나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이 그 인생계획표 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사랑이라고 결코 예외일 수 없었다. 그 안에서 사랑하면 되는 것이었다. 굳이 표 밖에서 놀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나영규가 일본에 가 있는 동안 김장우는 다시 형 집으로 들어갔다. 엄밀히 말 하면 이번에는 형의 식솔들이 김장우에게로 들어 온 셈이기도 했다. 김장우는 자신의 작업실 전세금에 저축을 합치고 거래하는 출판사에서 받은 사진 인세 선 불까지 보태어 함께 살 수 있을 만한 아파트를 얻었다. 거처가 마련된 형은 중 국 시장을 상대로 보따리 무역상을 해볼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앴다. "형은 잘할 거야. 중국 아니라 어디라도 우리 형은 잘할 수 있을 거야. 여행사 하던 시절부터 형은 중국 전문이었거든." 자신의 돈을 다 털어 형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는 사실이 나한테 미안한 듯 김장우는 거듭거듭 형의 성공을 장담했다. 김장우는 결혼 자금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라고 해도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이럴 때는 내가 부자여야 맞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미안함을 덜 어 주기 위해서 나는 부자여야 옳았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의 곤궁함에 대해서 는 더욱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막차를 타는 바람에 단골도 못 잡 고, 늘어나는 재고와 까탈스러운 일본인 상대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는 내 어머 니 속사정 따윌랑 절대 털어놓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남김없이 다 솔직해 버리 면 사랑이 누추해지니까. 사랑이 솔직함을 원하지 않으니까. "안진진. 그래도 난 요즘 행복하다. 밤마다 형수 몰래 형이 벗어 놓은 냄새 나 는 양말을 빨아 줄 수 있어서 나는 너무 좋아..." 그렇게 해서 우리의 결혼은 함께 살 방을 구할 돈이 마련될 때까지 무기한 연 기되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암묵적으로 사실에 합의했다. 나영규 같은 꼼꼼한 인생계획표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편한 것일 수도 있었다. 즉시즉시 수정하고, 수정하다 안 되면 또 바 꾸고, 그래도 안 되면, 그래도 안 되면... 그래도 안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로 나영규는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공항에서 내게 전화를 했다. 잠깐만 만나자고 했다. 하지만 그날은 회사 망년회가 있었다.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다음날은 나영규에게 시 간이 없었다. "좋아요. 그럼 예정대로 우리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나요. 난 참을 수 있어요. 진진 씨도 참을 수 있지요? 가만있자, 성탄 전야를 근사하게 보내려면 지금부터 예약을 서둘러야겠어요. 좋은 밤을 보내려면 확실한 예약 없이는 곤란해요." 나영규는 니브를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나는 오래도록 전화를 끊지 못하고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 이게 아닌데 하는 의혹. 수화기를 제자리에 올려놓은 뒤에도 내 의문은 계속되 었다. 좋은 밤을 보내려면 확실한 예약 없이는 곤란해요, 라는 그 말, 그것 혹시 내 가 놓티고 있는 인생의 진리가 아니었을까... 그날 밤, 나는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깊은 밤을 지키면서 내가 한 일은 이모 가 추천한, 아니 이모를 사로잡은 노래, '헤어진 다음날'을 반복해서 듣는 것이 었다. 얼마나 되풀이 그 노래를 들었던가. 마침내 나는 가사집을 보지 않고도 노 래를 따라 부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대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아무렇지도 않았나요. 혹시 후회하고 있진 않나요. 다른 만남을 준비하나요. 사랑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봐요. 그대 떠난 오늘 하루가 견딜 수 없이 길어요. 어제 아침엔 이렇지 않았어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오늘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어요.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가져갈 수는 없나요. 그대 떠난 오늘 하루가 견딜 수 없이 길어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올 수는 없나요. 날 사랑했나요. 그것만이라도 내게 말해 줘요. 날 떠나가나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나영규와 헤어진 다음날 내 기분은 어떤 것일까. 나와 헤어진 다음날 나영규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방바닥에 턱을 괴고 엎드려 그 슬픈 노래를 듣고 또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노래는 나의 노래가 아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가까운 앞날의 나영 규의 노래일 수는 있다... 그리고 나는 또 생각했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사랑에 관한한 유행가가 옳 다. 인생의 진리는 모르지만 사랑의 진리는 유행가가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 시 이 노래는 나의 노래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