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영상은
근자에 우연히 찾은 것으로
일본에 가기 전 알았으면 좀 더
충실한 역사 문화 기행을
할 수 있었을 것을 ,
겁나게 아쉬움이 컸네 그랴!
먼저 이 걸 다 보고 나서
어쭙잖은 소생의 기행 자료를
보면 필이 쫌 더 올 것 같아서.....
후유?~ 정말이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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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사카 성으로 간다.
오사카에 거주하는 단독 투어 자격증을
소지한 대전 출신 가이드 겸 운짱과 함께
승용차가 아니면 두 꼰꼰대 연식은
이동 불능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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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도 식후경이렸다.
스시는 물려서 샤부샤부로,
가이드가 추천한 식당이다.
부인은 칸사이 공항 근무.
맞벌이 부부라고.
장모가 아이들을 돌본단다.
한국 유학생들 중 졸업 후
비즈니스 또는 취업하는
자들이 꽤 많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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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지 생활을 물었다.
은행 대출은 안 되고,
의료 보험을 비롯 4대 보험,
비즈니스, 취업 그리고 복지 혜택에서
일본인과 차별이 없단다.
키야~ 엄청 변했구나!
소싯적 소생 일본 체류 시는
일체의 소득 활동은 금지였고
의료보험은 아리송하다.
설령 있었다 해도 일본인들과는
차등이 있었지 싶다.
앞에 올린 도쿄 우에노의 안경종합상사
산키요샤(三共社)에서 연수가 끝나고
사원교육을 담당할 때
경시청 외사과 형사에게
조사를 받었었다.
기타오카 시케미(北岡茂美) 사장이
대학원에서 광학을 연구하는 관계로
회사 측에서 부탁을 한 것이고,
츠바키(椿) 맨션의 사원 기숙사에서
기숙 외에 급여 지불은 일절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써서 강제 출국을 막아주었다.
여튼 맴 조마조마 한 생활이었고
전반적으로 외국인 차별이 있었다.
(딱히 일본이 아니라도 남의
나라에서는 마이너리티니까, 뭐!)
나라가 부강해야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가난의 마지막 세대요,
풍요의 첫 세대인
소생의 그때는 가슴 옹그리고
눈치 본 세월이었다.
나라가 있고, 그것도 경제력이 있는
나의 조국이 있다는 게 을매나
든든하고 자랑스럽고 감사할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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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마간산 식 건성 귀경으로
두세 번 갔던 이 성을
이번엔 옹골지게 보자 맴 먹고
쪼까 사전 공부도 했다.
현재 가려는 곳은
원래 토요도미 히테요시의
오사카 성이 아니고
'토쿠카와의 오사카성' 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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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에 도쿠가와막부가 성을 재건했으나
이전의 성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후에도 벼락을 맞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1931년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지만,
성은 도쿠가와막부 시절의 모습과 건립
당시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인터넷에서)
'토쿠카와의 오사카성'이
된 2차 오사카 전투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다!
토쿠가와(토쿠로 약칭함)가 세키가하라에서
승리, 일본 천하인으로 패권을 잡은 후,
토요도미(토요로 약칭함)가 생전
어린 아들에게로의 세습 불안으로,
4차에 걸쳐 우주 최강의 요새로
만든 오사카성에는 아들 히데요리
그리고 섭정인 토요의 측실
요도도노 (淀殿, よどどの),
즉, 히데요리의 어머니와 적지 않은
가신들 또 전국에 동조하는 다이묘들이
있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겠지.
하여,
겨울과 이듬해 여름 오사카성 전투를 치르고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는디,
실력으로 쳐부순 게 아니고, 2차에서도
토쿠가 자결까지 하려는 패퇴였다 자녀,
해서 간계로
'철벽 방어 해자를 메우는 화평 조건'을
맺어 위 사진의 여름 전투에서 성에 진입
토요계를 작살을 내고서는 성을 불 질렀다고.
후에 다시 축소해서 세운 거라는 이바구.
(역사 기술은 행간을 읽어야지
중심이 잡힌다. 아주 그럴듯하게
꾸밀수록 특히 소설, 드라마 등
정보 미디어에는 허구의 삽입이
많다는 걸 사전 공부 험시로 느꼈다.
따라서 이 자료도 거리를 두고 보시 앞.)
현재 성(노란색 둘레)은 원래의
토요 성(보라색 둘레)의 1/4 크기란다.
토요의 오사카성 별칭이 황금성
또는 비단성이었다고,
토요는 황금에 환장을 한 작자였던
모양으로 현재 천수각 3층
(시간 관계로 못 갔음)에는
집기 등 방 전체를 황금으로
꾸민 전용 다실이 있단다.
참고로 수많은 첩실에도 불구,
노년까지 2세가 생산되지 않자 한국
호랑이가 정력에 좋다고 하여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오기요마사(加藤淸正)의
주요 임무가 사냥해서 받치는 거였다고.
이 자의 침공로가 험한 함경도이었던 것도
호랑이 잡이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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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동영상은 토요의 오사카성을
고증한 모형.
한글역이 없어 안타깝지만
장대한 이 성의 규모에 입이 벌어지고
성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다.
자~
이제 들어갑니다.
百讀, 百聞이
不如一見이라니께
소생 관람 루트.
왼쪽 시작 회색 화살표 줄 따라
오테문-사쿠라문-혼마루 구역- 천수각 둘레
오테몬에서 우측 해자 모서리에 있는
로쿠반 아구라(망루)
좌측의 센간 아구라(망루)를 보면서
사쿠라몬(桜門) 도착
좌우 층층이 올린 성곽 돌의 크기와
접합의 총총함 그리고 문의 방어책이
난공불락의 구조다고 느꼈다.
사쿠라문 좌우 벽의 거석.
우와~ 넘넘 크다.
약 60평방 미터의 크기에 무게가
108톤이단다. 이 정도의 중심
거석들로 성을 세웠단다.
각 지역의 다이묘들에게 할당하여
거석을 바치게 했다는디
먼 지방에서 도대체 무슨 운송
수단으로 이 거석을?
육지에서는 미끈한 바다의 다시마를
다량으로 채취 바닥에 깔아 밀었고
다음은 해상으로 오사카만 까지
옮겼단다.(인터넷에서)
다이묘의 이름이 새겨진 운송된
돌들이라는 디,,
토쿠카와 성으로 복구할 때 주요 석재
공급처였던 시코쿠(四国)
카가와켄(香川縣 )에
속한 쇼도시마(小豆島)의 석재 중
남겨져 , 축성에 쓰이지 못해
유감이다는 뜻의 잔넨세키(殘念石),
여튼 야들은 벚꽃이라면
앞뒤 없이
기냥 뿅 ~가버린다.
성곽을 구축한 거석.
성곽석 일부분을 혼마루 정원에,,
전국 시대는 공성전이어서 성 쌓기가
승패를 좌우하였으리라.
왜군의 성 쌓기는 아마 세계 최강일지도,,
임란 때의 울산 왜성을 보라!
그 중에도 토요도미는 성 쌓기의 귀재로
알려졌다고,,,
우리 수원 화성 성벽돌은 비교가 안돼지롸 잉!
속이야 골골이어도
껍데기만 놓고 보면 아적은
쓸만 허지롸! ㅋㅋㅋ
천수각(天守閣)
멋지다.
본래의 토요의 천수각은
훨썽 현란했다고.
우측 천수각 입장권을 사려고
줄 서있는 관광객들.
지금 줄을 서면 2시간이단다.
해서, 깨끗이 포기하고,,
(첫 영상의 권유대로 안 오르기 잘했다.)
천수각 둘레를 벚꽃 귀경도 함시로
찬찬히 돌아보기로 했다.
해자는 엄청 깊고 굳건하다.
이런 해자를 건너 저 깊은 성벽을
창과 칼을 들고 올라 목을 베고,
베이고 가슴을 찌르고,
찔리는 쌈박질을 하다니,
소생은 도저히 납득이 아니 간다.
인간이란??
천수각 석벽이 어긋난 흔적.
일본 육군 관련 시설이 집중된 성이
1945년 8월 14일 최대의 폭격을 받았다.
천수각 북쪽으로 수 미터 지점에 떨어진
폭탄의 폭팔에 의한 것이다.
일본 군부의 최대 뻘짓 --
--카미카제(神風) 특공대
' ,,피어난 벚꽃이 지는 건
각오한 바 ! '
아름답게(?),
멋지게(??)
떨어져,
야스쿠니 신사로 간다.
...........
아버지!
어머니!
지금 특공 비행 출발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23년.
은혜 입은 부모님 보다
앞서 가는 불효를 짓습니다.
어머님!
우시지 말라! 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
'그래! 멋있게 죽었다!'??'
라고 말해 주세요!
이 아들은 조국을 지키려(?)
출정합니다.
,,,,,,,
이성으로 대처해야 할
전쟁을 무슨
' 和,
神道,'
로
뒤범벅 된
비장한 감성으로
'死의贊美 예술 마당'으로
맹글라고
환장을 하지 않고서야,,
,,,,,,,,
미쳐도 단단히 미친
일본 제국 군국의 지도자들!
아직 완전히 피지 않은 벚꽃인
피 끓는 젊은이들을
'카미카제(神風) 특공대'라
부추겨 미항모에 부딪쳐 죽어라! 며
단 한 번의 소중한 젊은 생명들을
絶對死地로 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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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와 조종사를 거의 전부
소모시킨 결과, 종전 즈음엔
일본 상공은 방공 불능으로
미군 B-29 폭격기 맴대로의
하늘이 되어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는
대공습으로 쑥대밭을 맹글었단다.
그래도
교토, 오사카성 등 문화 유적지는
없애지 않은 건 다행이다.
보나마나
성의 대규모 군사시설을 폭격하려다
성 근처로 잘못 떨어진 거지.
앙 그려?
장구를 맨 무속인 차림의
한국 사람이 자리를 뜬다.
공연을 한 것일까?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적지 않다.
구 일본 제국 육군 4 사령부 건물
(지금은 레스토랑)
엇~!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젊은이들!
방가라 하고,,,,,
다가갔다.
소생이 : '반갑네요!'
??
' 한국 사람 아닙니까?'
???
'니혼진데스카?'
그때서야,
이예, 베트나므진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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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젊은 층 사이에
한류 열풍이 대단하고
일본 젊은 층도 마찬가지여서
성 앞에 한복 대여소가 있다고 한다.
오사카성 안 히데요리와
그의 어머니 요도 자결처.
오사카성 여름 전투에서
성이 함락당하자 이곳에서.
히데요리
요도도노
귀경 끝.
동시에 역사문화기행도 끝.
- 토요도미 히데요시의
사세구(辭世句=절명시?) -
이슬로 와서 이슬로서 떠나는
이 내 몸이여,
나니와(浪速)의 영화도 꿈속의
꿈이런가.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 토쿠카와이에야스의
사세구(辭世句=절명시?) -
먼저 떠나든 뒤에 남든
결국 같은 것.
함께 갈 수 없는 것을
이별이라 생각하네.
(先にゆき 跡に残るも
同じ事
つれて行ぬを 別とぞ思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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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생 단상
오랫동안 품었던
절명시의 진위.
잘 아시라 믿는
成三問 어르신의 절명시
첫 구절
擊鼓催人命.
(목숨을 재촉하는 북소리 울리고)
포승줄에 묶여 포졸들에 호송되어
형장으로 가실 때의 심정을 읊으신
정황이 확실헌디 말여,
도대체 이런 죽음을 앞둔 상황에
옆에 누가 있어 듣고 쓴 것인가?
위 일본의 두 사람의 사세구 또는
절명시도
사후 누군가가 죽은 이를 흠모하며
차분히 다듬어 쓰지 않고서야,,,,,,
(소생의 그저 그렇고 그런 생각임 )
친구 다카기는 시종 관람은 하지 않고,
구석 벤치에 앉아 쉬다, 성을
나가려니 일어서며 손에 감추는 연초.
한다는 말이
'저런 역사에 이름난 사람보다 나 같이
평범( 平平凡凡, へいへいぼんぼん)한
사람이 잘 사는 거여~'
얼씨구나!
맞다 마져~!
해서, 다시 나니와 서민 문화로 끝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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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사투리는 왠지 소생에게는
걸걸하고 구수한 게 정겨운
고향 사투리를 느끼게 한다.
오오키니( おおきに)
- 고맙습니다.
모우카리맛카(もうかりまっか )?、
- 돈벌이는 잘 되십니까?-
난보 (なんぼ)?
- 얼마입니까?-
엔카의 발상지가
나니와(浪花)지 싶은 멋대로의
상상도 해본다.
나니와부시(浪花節)라는 한 장르를
이룬다고 해도 좋을 의리 인정의
오사카 엔카가 많다.
그뿐 아니라 앞 편의 장기 명인
산키치(三吉) 고하루(小春)
에 뒤지지 않는
라쿠고(落語, 일본 만담?) 천재
하루단지( 春団治) 오하마(お浜)도
나니와의 부부라는 디,
그들의 엔카를 들으며 마칩니다.
- 광속 같이 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조잡한 기행문을 보느라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지나 않았나 싶습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은 귀국길 에피소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