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크리스마스 선물 인생은 짧다.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 사람들은 의외의 사건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말한다. 그럴 줄 알았어. 예감하고 있었던 일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건은 언제나 돌발적으로 일어난다. 이런 일이 현실 로 드러날 줄은 알았지만, 그 일이 '오늘이나 내일'일어난다고는 믿지 않는다. 예감 속에 오늘이나 내일은 없다. 오직 '언젠가'만 있을 뿐이다. 매일매일이 오 늘이거나 혹은 내일인데.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버지가 돌아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늘 오늘이나 내일은 아니라고 믿었 다. 아버지의 귀가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일어나는 사건이 될 줄은 정녕 몰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돌아왔다. 그렇게 나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나다. 별일 없으면 지금 좀 집으로 올래?" 점심 시간이 좀 지나서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시간에 나보고 집으로 오라니, 이상하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아버지의 얼굴이 명료하게 또올랐다. 혹시 아버지가? "니네 아버지 오셨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와라." 역시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었다." 그 시간에 퇴근하는 일은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다. 연말 연시는 우리 회사가 가장 한가한 계절이었다. 수입업체들한테 성탄절이 낀 앞뒤의 십여 일은 도무지 일을 할 수 없는 기간이었다. 책상을 정리하는 마음이 후두둑 뛰었다. 예기치 않 은 일은 아니었지만, 예기치 않게 그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본 것은 오 년 전이었다. 손님처럼 돌아와서 며칠 묵다 가 손님처럼 떠났다. 떠나는 아버지 얼굴을 나는 보지 못했다. 아르바이트를 끝 내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 혼자 벽을 바라보고 누워 있었다. 벽을 바라 보고 누울 수 있는 아랫목 그 자리를 어머니한테 넘겨 주고 아버지는 또 떠난 것이었다. 일 년 후에 돌아올지 아니면 이 년 후에 돌아올지 어떤 언질도 남기 지 않고. 하긴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버지에게 다시 만날 날이 언제인지 묻는 일처럼 부질없는 짓이 어디 있으랴. 아버지는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고 언제라도 돌아 오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그때쯤에는 남아있는 우리 가족들에게도 그것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 되어 있었 다. 손님이란 불현듯 들이닥쳐야 진정한 손님이었다. 그러나 정말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을까.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어머니의 심상치 않은 음성을 떨쳐 내기 어려웠다. 손님이 왔다고 근무 시간에 집으로 돌 아오라는 전화를 할 어머니가 아니었다. 어차피 밤이면 만날 아버지였다. 아버지 와 우리들 사이에 맺어진 무언의 약속은 돌아오면 적어도 두어 밤은 자고 간다 는 것이었다. 마치 애비의 훈기를 덜어 주려고 돌아오는 것처럼. 대문은 열려 있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입고 있는 방한 점퍼를 벗지도 않고 쪽마루에 걸터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얼른 나를 데리고 골목 밖으로 나왔 다. 어머니에게 이끌려 되돌아 나오기 전 나는 마루 밑에 가지런히 놓인 아버지 의 구두를 보았다. 너무나 오래 신어서 원래의 모양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낡은 구두 한 켤레. 앞부리는 뻣뻣하게 하늘을 향해 휘어져 있고, 뒤축은 무너져 내리고 있는 아버지의 구두. 아, 어떤 무엇도 저 구두만큼 단숨에 내 아버지의 모습을 극명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벗어 던진 구두만으로도 능히 어버지다 웠다. 나는 비로소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실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예감했 다. 아버지는 다시 떠날 것이라고. 다시 떠나지 않으면 내 아버지가 아니라고. "니네 아버지가 이상해."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예전에 그랬듯이 손님 처럼 들이닥쳐서 며칠 묵었다 떠나는 아버지 같았다면 절대 이렇게 말할 어머니 가 아니었다. 어디가 이상하냐고 묻는 내 표정을 무시하고 어머니는 한참 동안 팔짱을 낀 자세로 이웃집 담장만 쳐다보았다. 불길한 침묵이었다. 어머니에게 새 로운 불행이 닥쳤다는 징후였다. 이윽고 어머니는 마치 무거운 형량을 언도하는 판사처럼 냉정하게 통고했다. "중풍 맞았나 봐."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 나이에는 그런 병이 올수도 있다는 사실 을 새롭게 머리에 새기느라고 뒷말을 잇지 못했다. "정신도 오락가락해. 치매까지 겹친 것 같다." "..." 나는 또 침묵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나이에는 중풍도 오고 치매도 올 수 있는 것이다... 정해진 세상살이를 벗어나 방랑하는 영혼에도 노년의 정해진 병 마는 침입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눈 뜨고는 못 본다. 사람 형사이 아냐. 가게로 들어오는 네 아버지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귀신이 들어오는 줄 알았다. 시장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구경을 할 정도면 말 다했지." 슬슬 어머니의 과장법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안심했다. 어머니가 저런 식으 로 나오면 해결책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내일은 크리스마스라고 난리들이니 모레나 병원에 데려가야겠다. 병원에 가 봐야 돈만 잡아먹는 병이지만 어떡하냐. 새끼들 아버진데 도로 내쫓을 수도 없고." 역시 어머니는 결론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보다 먼저 집으로 들어왔 다. 집 안은 조용했다. 마루 밑의 낡은 구두 한 켤레가 아니라면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다는 표시는 아무 데도 없었다. "소주 몇 잔 마시고는 떠메 가도 모르게 잔다." 방문을 열어 보라는데 뒤에서 어머니의 갈라진 목소리가 날아왔다. 방 안은 어두웠다. 바깥도 곧 어두워질 것이었다. 오 년전 마지막으로 집을 떠나던 날 아 침처럼 아버지는 아랫목에 누워 있었다. 흡사 그 사이에 오 년이란 시간은 없었 던 것처럼 아버지는 제자리에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본 아버지의 얼굴은 내 익숙한 느낌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렸 다. 다시 본 아버지 모습은 우리 사이에 오 년은 커녕 족히 오십 년도 넘을 시 간의 강을 파 놓고 있었다. 야윈 살가죽을 뚫고 돌출해 있는 광대뼈, 늘어진 주 름살 사이사이로 번지고 있는 거뭇거뭇한 반점, 수세미처럼 헝클어져 있는 반백 의 머리칼. 어버지는 시체처럼 잠들어 있었다. 호흡이 아니라면 살아 있다 말할 만한 눈 곱만큼의 활기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 말이 맞았다. 무참하게 무너져 내린 이 노인은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몇 달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 집에 돌아오던 아버지는 저런 모습이 아 니었다. 슬픈 일몰의 시간에 어둠을 등에 지고 들어오던 아버지의 쓸쓸한 귀가 는, 그 풍경 속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매혹이 있었다. 저녁 바람에 날리던 검 은 머리칼, 깊숙한 곳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 검은 눈동자, 구겨진 바지 주름 사이에 숨어 있다 아버지가 움직일 때마다 아슴아슴 풍겨 나오던 저 먼 곳의 냄 새... 나는 고약한 냄새가 배어 있는 안방을 빠져 나왔다. 어머니는 다시 시장에 나 가려고 벌써 목도리까지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나..." 나, 밤에 약속 있어,라고 말하려다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눈사람처럼 굴러 가게 옷을 껴입고 심란한 표정으로 전쟁터로 나가는 어머니에게 차마 할 말이 아니었다. "나가지 말고 꼭 지키고 있어라. 뼛국물 우려 내고 있으니 가스불도 살피고. 정신이 없어서 가게문도 다 열어 놓고 왔는데, 하필 오늘같이 손님 많은 날에, 아이구..." 어머니는 아무래도 진모 때처럼은 기운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푸념은 늘어 졌고 악물어야 할 입술은 방심한 듯 조금 벌어져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어디 가서 조용히 죽어나 주지, 앞으로 또 얼마나 내 진을 빼 놓을꼬. 저런 병, 쉽게 죽지도 않는다!" 저런 병, 쉽게 죽지도 않는다! 어머니는 힘을 불러 오는 주문을 외듯이 그렇게 결연히 외치고 나갔다. 어머니의 결연한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머릿속에서 왕왕 울려 대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아버지가 깰까 봐 얼른 수화기를 집 어 들었다. "안진진. 나야." 김장우였다. 그의 음성을 듣자 참았던 막막함이 가슴에서부터 울컥 치솟아올 랐다. "회사에 전화했었어. 집에 일이 있다고 그러네." 김장우에게 내 아버지에 대해 어디까지 말했더라.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지 않 았을 뿐 거짓말은 하지 않았었다. 아마 내 나이 여섯 살, 혹은 일곱 살 무렵의 아버지 모습까지만 말해 줬을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이것저것 소소한 사업에 손대던 아버지, 몇 달은 카 센터 사장이었다가 또 몇 달은 조그만 인쇄소의 주 인이기도 했던 어버지. 무슨 일이든 벌여만 놓고 정작 몸바쳐 일 속에 뛰어드는 것을 겁내던 아버지. 김장우가 알고 있는 내 아버지의 모습은 거기까지다. 거기 서 못박혀 있다. "어버지가 많이 아프셔." 먹먹한 가슴을 문지르며 나는 아주 간단하게 사실을 설명했다. "그래...어떡하니...어쩌지..." 김장우는 말로 사람을 위로하는 데 몹시 서투른 사람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당황해하는 그, 지금 찾아가 뵈어도 좋냐고 묻는 그.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 대신 내일 형님 댁에 가기로 한 약속은 취소예요. 어 렵겠어요." "그래 그래. 나한테 신경쓰지 마...걱정하지 마." 성탄 이브에는 나영규를 만나 청혼을 정중히 사양하고, 성탄절에는 김장우와 함께 그의 집에서 정식으로 형의 가족들을 만난다는 것이 오늘 내일의 내 일정 표였다. 이제 겨우 내 인생의 물줄기가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 예측할 수 있다 고 생각했었는데,, 또 미루어지는가..." 나영규한테는 내가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는 이미 어제 오전에 오늘 있을 만 남의 세부 사항을 내게 모두 일러 주었다. "만나면 진진 씨한테 줄 선물이 두 개나 있어요. 그렇다고 오해하면 안 돼요. 진진 씨는 오직 말 한 마디만 선물로 준비하면 되니까 돈으로 사는 선물 따위 신경쓰지 말고 그냥 나오세요. 이쁘게 웃으면서 나오면 끝이에요. 알았지요?" 내가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 알 리가 없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한 번도 알아 보려고 하지 않은 나영규는 여전히 유쾌하고 명랑했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빛나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시계를 팔 아 머리빗을 사는 남자, 사랑하는 남자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팔목시계를 장식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칼을 팔아서 멋진 시계줄을 사는 여자, 어제 나영규 의 전화를 받고 내가 생각한 것은 저유명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야기였다. 가난 한 연인들이 자신들의 가장 귀중한 것을 팔아 마련한, 그러나 이제는 필요 없게 된 선물.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연인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생각하면서 나는 어 제 나영규에게 한없이 미안했었다. 비록 서로 어긋났지만 세상에는 그토록이나 감동적인 선물도 있는데..." 저녁 약속을 깨고 있는 나한테 나영규는 확실히 언짢은 기색이었다. 처음 있 는 일이었다. 그의 화난 기색에 나는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막 약속 장소 로 가려던 참이었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따지듯이 묻기도 했다. 늘 동 글동글했던 거의 얼굴이 네모로 일그러지는 것이 마음 속에 선연히 떠올랐다. 기이한 일이었지만, 그래 주는 나영규 때문에 나는 갑자기 편안해졌다. 편안해 지니까 불현듯 묻혀 있던 설움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마음놓고 울었다. 흑흑 흐 느껴 가면서 그렇게 편안하게 울었다.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쩔쩔매는 김장우 앞에서는 꼿꼿하기만 했는데, 자꾸 꼿꼿해지고 싶었는데, 정말 기인한 일이었다. "진진 씨, 왜 그래요?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알지요. 무조건 울지 말고 사정 을 말해 봐요." 나영규는 당황해했다. 그러나 나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준비한 크리스마스 계획이 뭉개지고 말 어떤 중대한 사정이 저 안진진이라는 여자한테 일어났으면 어쩌지 하는 조바심을. 그것은 나 안진진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목에 걸려 있 는 울음을 마저 토해내느라고 그랬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나영규의 조바심이 흘러 넘쳐 짜증으로 변해 주기를 은근히 기다리고도 있었다. 그렇게 흘러가야 진짜 삶,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알았어요. 그럼 다음에 만나요. 진진 씨가 전화해 줘요."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것을, 그것도 깊은 병에 걸려서 몰라보게 변해 돌아왔다 는 것을 알고 난 후 나영규는 말을 조심했다. 나영규는 아버지가 오랜 세월 가 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나영규는 아버지의 귀가가 오늘의 약 속이 취소될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연구와 분석, 그리고 예약과 확인을 거쳐 마련한 오늘의 멋진 이벤 트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미안해요." "할 수 없지요. 그것 참, 진진 씨 집에는 걱정이 그칠 날이 없군요. 어렵게 예 약들을 다 해놓았는데..." 마침내 나영규가 자신의 불편한 심정의 일단을 내비쳤다. 진모의 일까지 포함 하는 말이었다. 당연한 심정의 토로였다. 나영규는 그렇게 말해야 나영규다웠다. 원칙보다 예외가 많은 내 가족에 대해 언제까지나 관용을 구할 수는 없는 일이 었다. 나영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었기에, 나영규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었으 므로, 나는 정말 괜찮았다. 정말 괜찮았을까. 아버지가 먹을 뼛국물이 다 우러났는지를 부엌으로 가다 말 고 나는 우뚝 멈추어 섰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었다. 또한 나는 그와 결혼하지 않을 결심을 굳혔지만, 나영규는 이미 오래 전에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밝혔었다. 난는 괜찮지만, 나영규가 저렇게 말하는 것은 괜찮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나는 괜찮지만, 절대로 나영규 스스로는 괜찮을 수 없어야 한다는 논리에 사로잡혀 나는 안절부절 못했다. 결단코 자존심은 아니었 다. 빨리 진실을 말해 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 방으로 달려가 나영규의 전화 번호를 누르면서도 나는 몹시 급했다. 내가 나영규의 크리스마스를 망치고 있다 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도 못했다. "아, 진진 씨. 이제 막 예약들을 취소했는데..." 나영규가 반색을 했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저 말투. "잘하셨어요. 할 말이 었어서요. 바쁘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사무실이 텅텅 비었어요. 나만 남았어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아니어서 김이 샜다는 저 말투. "당분간은 아버지 병수발 때문에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요. 아시다시피 아버지 를 보살필 사람이 나밖에 없잖아요. 진모는 저지경이고." 굳이 진모까지 상기시키는 나 안진진. 그러나 화가 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얼 굴을 보지 않고 말하라면 나영규한테는 무슨 말이든지 할 수 있었다." "좋은 선물이라면 영규 씨 오래 기다리게 해도 미안하지 않지만, 나쁜 소식 전 하려면서 그럴 수도 없고..." "..." 긴장하는 나영규의 기척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하루 이틀 심사숙고한 것이 아니어서 오늘은 홀가분하게 말할 수 있었는데 사정이 이렇네요. 어쩌면 잘됐는지도 모르겠어요. 영규 씨 얼굴 보면서 그런 말 을 해야 될 입장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문슨 뜻이에요? 설마..." "그래요. 나쁜 선물이에요. 정말 많이 생..." "아, 진진 씨, 잠깐!" 나영규가 급히 내 말을 가로막았다. "아까 내가 짜증 낸 것 때문에 그러는 거지요? 미안해요. 그렇다고 그렇게 막 말 하는 것 아니에요. 이제 보니 진진 씨 나쁜 사람이네. 그러지 말고 아버지 병 환에 차도가 있을 때 만나서 이야기 해요. 순간적인 감정에 휘말리지 말고, 알았 지요? 전화 끊읍시다!" 그리고 정말 전화가 끊어졌다. 간단없이 들려 오는 통화중 신호음이 다음 말 을 잇기 위해 아직도 멍하니 입 벌리고 있는 나를 비웃었다. 자기에게 나쁜 소 식은 이런 식으로 막아 내면 되는구나, 어이없게도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정녕 모르고 있었던 삶의 기교였다. 복잡한 인생 때문에 내 마음자리는 어수선했지만, 아버지는 고단한 인생을 혼 곤한 잠 속에 부려 놓고 오래도록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깥 세상은 떠들썩했으 나 우리 집의 성탄 전야는 한없이 고요하게 깊어 갔다. 그리고 또한 거룩했다. 행방 불명으로 먼 세상을 떠돌던 한 인간이 속세로 귀향하기에 이만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런 말을 알고 있다. 인생은 짧다고,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고. 아버지는 참으로 긴긴 인생을 살았다. 그것이 진정 아버지가 원했던 삶이었을까.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아버지의 머리맡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눈 을 뜨는 순간에 내가 거기 있고 싶었다. 혼곤한 잠 속에서 깨어난 아버지가 가 장 먼저 나를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방 안에는 마루에서 비쳐 드는 주홍의 백열구빛이 희미하게 사물을 비추고 있 었다. 아버지가 나를 알아보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이십 몇 년 전, 당 신이 참 진자를 두 개씩이나 넣어 이름을 지어 준 나, 그러나 운명적으로 '안'이 라는 부정의 성을 물려주어 안진진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 나, 떠돌아다니던 그 많은 낮과 밤의 아버지 시간들 중에 그런 내가 차지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 어 느 슬픈 일몰의 시간에 혹시 나를 생각하며 축축하게 눈시울을 적신 적은 없었 을까. 은밀한 어둠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들기 쉽다. 아버지의 머리맡을 지키며 나 는 마침내 아무렇게나 부려진 아버지의 팔을 잡고 내 손과 아버지 손의 크기를 맞춰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아버지가 그랬었다. 두 개의 손바 닥이 딱 맞아야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고. 맞지 않으면 영원히 아빠와 딸 사이 인지도 모르고 슬프게 살아가야 한다고. 그때까지 반쪽의 비밀을 잘 간직하고 살라고 내 아버지가 그랬었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마음 속으로는 여러 번 아버지의 팔목을 잡고 손바닥을 어루만지는 연습을 하고 있었지만 연습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돌연 잠 속에서 현실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아머니가 말 했던 이상한 아버지의 실체를. "누, 누구세요..." 아버지가 나에게 던진 첫마디는 나의 존재를 묻는 겁에 질린 질문이었다. 내 가 누구냐고? 안진진이 누구냐고? 나는 대답 대신 방의 불을 밝혔다. 내 얼굴도, 늙고 시든 아버지 얼굴도 모두 환하게 드러났다. 그래도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 지 못했다. "아가씨, 누, 누구예요? 내가 또 뭘 잘못했나...아이구, 그렇다면 날 좀 용서해 줘요. 예?" 아버지는 허겁지겁 이부자리에서 빠져 나와 방 가운데에 허리를 굽히고 서서 내 눈치만 살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다리, 어디다 떨어뜨려야 할지 몰라 정신 없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야윈 팔목, 오른쪽으로 비틀려 올라간 입술, 흘낏흘낏 나를 실피는 저 비굴한 눈빛. 나는 울었다. 추억 속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정에 다달았을 때 현실 속의 아버지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내 추억을 희롱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여 태 기다렸는데, 이건 부당한 일이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걷어 내 며 나는 방을 나왔다. 내 뒤를 따라 아버지도 허둥지둥 마루로 뛰쳐 나왔다. "어이쿠, 여기가 어디야, 내가 왜 여기에 와 있지? 아가씨가 이 집 주인이요? 그럼...그럼, 밥이나 한술 얻어 먹읍시다." 나에게서 별다른 악의를 발견하지 못한 아버지의 본능이 그 잠깐 사이에 아버 지를 공포에서 뻔뻔스러움으로 옮겨 놓았다. 밥이나 한술, 하면서 아버지는 히죽 웃었다. 누런 이빨을 있는대로 다 드러내 놓고, 울고 있는 나 안진진을 향해 히 죽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