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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씨(晉州鄭氏)
진주정씨(晉州鄭氏) 예계(藝系)의 시조(始祖)에 대한 정확(正確)한 기록(記錄)은 없었다.
경주정씨(慶州鄭氏) 지백호(智佰虎)의 후손(後孫)에서 갈라진 성씨(姓氏)라고 추측(推測)할 뿐이었다.
일부(一部) 다른 정씨(鄭氏)들은 지백호(智佰虎)의 후손(後孫)이라는 기록(記錄)이 남아 있으나 진주정씨(晉州鄭氏)는 그러한 기록(記錄)이 없다.
진주정씨(晉州鄭氏)의 도시조(都始祖)이신 휘(諱) 예(藝), 호(號) 백곡(柏谷)께서는 신라조(新羅朝)에서는 벼슬을 아니 하신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공(公)이 지니신 관직명(官職名)이 모두 고려조(高麗朝)의 것이기 때문이다. 일세(一世)이신 휘(諱) 시양공(時陽公)께서 고려(高麗) 문종조(文宗朝)에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이 되셨는데 승상공(丞相公) 정예(鄭藝)로부터 대제학공(大提學公)까지는 짧게는 290년간이고 길게는 341년간이 된다고 한다. ※ 휘(諱): 높은 사람 이름 휘.
공(公)의 후손(後孫)들이 일세(一世) 휘(諱) 시양(時陽)으로부터 고려말(高麗末)까지
대(代)를 이어 충성(忠誠)을 다하고 7위의 대제학(大提學)이 배출된 외에도
좌시중평장사(左侍中平章事), 태자첨사(太子詹事),문하시중(門下侍中) 등 여러 영직(榮職)을 거친 많은 선비가 배출되었는데, 도시조(都始祖)이신 승상공(丞相公) 정예(鄭藝)께 고려(高麗) 최고(最高)의 관직(官職)을 추증(追贈)하신 것으로 고찰(考察)된다.
승상공(丞相公)으로부터 대제학공(大提學公)까지 300여년간 조상(祖上)의 휘자(諱字)와 묘소(墓所)가 실전(失傳)되었으므로 후손(後孫)된 우리들은 안타깝고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 상공(相公): '재상(宰相)'의 높임말.
※ 승상(丞相)= 정승(政丞). 예를 들면 좌승상(左丞相)= 좌의정(左議政).
그러나 대제학공(大提學公)으로부터 고려말(高麗末)까지 즉, 일세(一世) 시양공(時陽公)으로부터 십삼세(十三世) 이오공(以吾公)까지 면면(綿綿)히 삼백여년(三百餘年)을 충절(忠節)을 다하는 진신(搢紳)의 사(士)를 배출(輩出)하였으니 이렇게 빛나는 가통(家統)을 세우신 시조공(始祖公)과 일세공(一世公)의 위덕(偉德)에 삼가 머리를 숙인다.
훗날 우리 후손(後孫) 누군가가 잃어버린 선대(先代)의 기록(記錄)을 찾아내서 자료(資料)를 보충(補充)하고 수정(修訂)할 날이 꼭 오리라 믿는다.
※ 진신(搢紳)= 진신(縉紳): 벼슬아치를 통틀어 일컬음. 지위(地位)가 높고 행동(行動)이 점잖은 사람.
[시조 유래]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때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菁州)로 개칭(改稱)되었다.
995년(성종 14)에 진주(晉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晉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晉州市)가 되었다. 별호(別號)로 진양(晉陽) 등으로 불리었다.
<진주8정(晋州八鄭)>으로 불리워졌던 진주정씨(晋州鄭氏)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세계를 달리하는 여러 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를 이어왔다.
원조(元祖)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신라(新羅) 6촌장 중 한 사람인 ‘자산진부’의 촌장(村長) 지백호(智伯虎)이며,
그의 후대(後代)에서 정씨(鄭氏)의 본관(本貫)ㆍ분파(分派)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믿을 만한 문헌(文獻)은 없다.
[본관 유래]
삼국사기(三國史記) 제1권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신라(新羅) 3대 유리왕(儒理王) 9년 서기 32년에 6부를 개정(改定)하여
① 알천(閼川) 양산촌장(楊山村長) 알평(謁平)에게는 이씨(李氏)를,
② 돌산(突山)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씨(崔氏)를,
③ 무산(茂山) 대수촌장(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孫氏)를,
④ 취산(嘴山)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伯虎)에게는 정씨(鄭氏)를,
⑤ 금산(金山) 가리촌장(加利村長) 기타(祇咤)에게는 배씨(裵氏)를,
⑥ 명활산(明活山) 고야촌장(高耶村長) 호진(虎珍)에게는 설씨(薛氏)를
사성(賜姓)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신라시조 박혁거세편’을 보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王)으로 추대(推戴)했던 육촌(六村) 중 진지촌(珍支村)의 촌장(村長)이 지백호(智伯虎)라 나와 있다. 취산(嘴山)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伯虎)에게 정씨(鄭氏)를 사성(賜姓)했다.
예로부터 ‘진주8정(晋州八鄭)’으로 불려진 진주정씨(晋州鄭氏)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세계(世系)를 달리하는 여러 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繼代)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를 비롯한 제문헌(諸文獻)에 진주정씨(晉州鄭氏)는 12파가 있는 것으로 기록(記錄)되어 있으나 정확(正確)한 소목(召穆)은 밝힐 수 없고 현존(現存)하는 계파(系派) 중에서 비교적(比較的) 널리 알려진 것을 살펴본다.
이른바 팔정(八鄭)을 편의상 크게 나눠, 정예(鄭藝)ㆍ정자우(鄭子友)ㆍ정장(鄭莊)ㆍ정헌(鄭櫶)을 시조(始祖)로 하는 4계통(系統)으로 대별(大別)하는 것이 통설(通說)이다. 충장공파(忠莊公派, 鄭藝), 은열공파(殷烈公派, 鄭子友), 공대공파(恭戴公派, 鄭莊), 어사공파(御史公派) 등은 진양정씨(晉陽鄭氏)의 4대 봉우리로, 현재의 진양정씨(晉陽鄭氏)는 이들 후손(後孫)들이 주류(主流)을 형성하고 있다. 본관지(本貫地) 진양(晉陽)은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선조(先祖)들이 살아오던 곳이다.
[가문(家門)의 번영(繁榮)]
고려(高麗) 때 양관대제학(兩舘大提學)을 지낸 정시양(鄭時陽, 一世),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歷任)한 정신열(鄭臣烈), 판도판서(判圖判書)인 정임덕(鄭任德), 예의판서(禮儀判書)의 정유(鄭愈),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정수(鄭需, 七世),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정록,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정을보(鄭乙輔, 十世) 등이 있다.
공민왕(恭愍王)때 전객령(典客令)을 지내고, 중국(中國)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의 장인(丈人)으로 목화종자를 재배(栽培)하고 보급(普及)하는데 큰 공적(功績)을 남긴 정천익(鄭天益)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人物)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상신(上臣) 1명인데 그의 아들이 정지산(鄭之産)이며, 대제학(大提學) 2명, 문과급제자(文科及第者) 59명과 정척(鄭陟), 정성근(鄭誠謹) 등의 청백리(淸白吏)를 배출(輩出)해냈다.
조선(朝鮮) 인조(仁祖)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정경세(鄭經世),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수제자(首弟子)였던 그는 나이 스물셋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호당(湖堂)에 뽑혔던 수재(秀才)이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하여 공(功)을 세웠고 성리학(性理學)뿐만 아니라 예학(禮學)에도 밝아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파(禮學派)를 형성(形成)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명장(名將) 정기룡(鄭起龍) 장군(將軍)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當時) 상주성(尙州城) 탈환(奪還), 정유재란(丁酉再亂)때의 성주(星州), 초계(草溪), 의령성(宜寧城) 탈환전투(奪還戰鬪)에서도 눈부신 전공(戰功)을 세웠다. 광해군(光海君) 9년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겸(兼) 경상우도(慶尙右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올라 남해안(南海岸)을 방어하던 중 1622년 2월 통영(統營) 진중에서 숨졌다.
[가문 소개]
첫째, 충장공파(忠莊公派)는 고려(高麗)의 건국공신(建國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정예(鄭藝)를 시조(始祖)로 한다. 삼한통합(三韓統合) 고려벽상공신(高麗壁上功臣)으로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영절공(英節公) 정예(鄭藝)의 계통(系統)은 그 후(後)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문익공(文翼公) 정시양(鄭時陽)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있다.
※ 실전(失傳): 묘지(墓地), 고적(古跡), 등 세전(世傳)의 사실(事實)이 알 수 없게 됨.
그리고 시양(時陽)의 7세손 수(需)가 판도좌랑(版圖佐郎)과 좌사간(左司諫)을 역임(歷任)하고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일으켰고, 그의 후손(後孫) 을보(乙輔)는 정당문학(政堂文學)과 도감제조(都監提調)를 지내고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으며, 공민왕(恭愍王)때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한편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찬성사(贊成事)를 역임(歷任)했던 신중(臣重)의 아들 이오(以吾)는 조선 태종(太宗)때의 명신(名臣)으로 찬성사(贊成事)대제학(大提學)을 역임(歷任)했고,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長男) 분(苯)은 세종(世宗)과 문종조(文宗朝)에 걸쳐 조정(朝廷)의 중신(重臣)으로 많은 치적(治積)을 남겼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반대파(反對派)로 몰려 사사(賜死)되었다.
일월록(日月錄)에 의하면 그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음모(王位簒奪陰謀)가 무르익을 때 체찰사(體察使)로서 영남(嶺南)을 순회(巡廻)하고 충주(忠州)에 이르자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이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消息)을 듣고는 자신(自身)을 잡아 죽이려 관원(官員)을 보낼 것이라고 믿고 용안역을 지나가는데 관원(官員)이 달려오며 전지(傳旨)가 있다고 외쳤다.
※ 전지(傳旨): 임금의 뜻을 담아 관청(官廳)이나 관리(官吏)에게 전(傳)함.
분(苯)은 말에서 내려 재배(再拜)하며 말하기를 "노상(路上)에서 형(刑)을 받는 것은 상스럽지 못하니 역관(驛館)으로 갈 수 없느냐"고 하자, 관원(官員)이 말하기를 "나는 다만 명(命)을 받아서, 공(公)을 압송(押送)하는 것이요" 하였다.
십여 일이 걸려 유배지(流配地)인 낙안(樂安)에 내려가, 항상 조상(祖上)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제사(祭祀)지냈는데 하루 저녁은 자다가 일어나서 함께 있던 중 탄선(坦禪)에게 "네가 밥 한 그릇을 정하게 지어라. 내가 우리 조상(祖上)에게 제사(祭祀)를 지내겠다"고 하고 제사(祭祀)를 지낸 뒤에 신주(神主)를 모두 불에 태웠는데 조금 후에 관원(官員)이 와서 사사(賜死)하였다고 한다.
※ 전남(全南) 순천시(順天市) 낙안면(樂安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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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분(鄭#분37)
?∼1454(단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유(子$유03), 호는 애일당(愛日堂).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오(以吾)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아가 경승부승(敬丞府丞)에 이르렀고,
1416년(태종 16)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이조좌랑·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422년(세종 4) 사간원우헌납이 되었고, 이어 좌헌납·병조정랑·의정부사인에 올랐다.
1428년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으로 파견되어 수재상황을 살폈다.
1429년 사헌부집의에 올랐으며, 이듬해 결송사(決訟事)로 수금되어 원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아버지의 소청으로 양주에 이치(移置)되었다.
1432년 승정원우부대언에 발탁되었다. 이후 좌부대언·우승지·좌승지가 되었으나, 곧 부상으로 사직하였다.
1436년 충청도감사가 되었고, 1438년 이조참판·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443년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9년 전제상정소제조(田制詳定所提調)를 겸대하였고, 세종이 옮겨 살 영녕대군(永寧大君)의 집을 짓는 일을 감독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우찬성에 오르면서 계속 판이조사를 겸임하였고, 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가 되어 연변주현(沿邊州縣)의 성터를 살폈다.
1452년(단종 즉위년) 김종서(金宗瑞)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으로,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 인(皇甫仁)·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그도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고신(告身)을 추탈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이후 대신과 대간의 빈번한 청죄(請罪)가 계속되었지만, 1년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 사사(賜死)되었다.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기국(器局)이 있었다. 문신이지만 토목에 조예가 깊어, 세종말에서 단종초에 걸쳐 궁궐 조성·축성, 현릉(顯陵:문종묘) 조성 등에 공헌이 있었다.
1746년(영조 22) 김종서·황보 인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1786년(정조 10) 장흥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고, 1791년 장릉(莊陵) 충신단에 배식(配食)되었다.
1804년(순조 4) 충신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정문을 세웠다.
1808년 신창(新昌) 진사 이기선(李基善) 등의 상소로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조47之典)을 받았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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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빈호찬(長貧胡撰)에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관원(官員)이 형(刑)을 집행(執行)하려고 왔을 때 분(苯)은 목욕(沐浴)을 하고 관대(冠帶)를 갖추어 조상(祖上)의 신주(神主)에 재배(再拜)하고 신주(神主)를 태운 후 관대(冠帶)를 벗고 우장(雨裝) 옷을 입고 수건을 쓰고, 그의 아내에게 영결(永訣)하니 아내가 붙들고 통곡(痛哭)하자 그는 달래며 "조정(朝廷)의 명령(命令)이니 항거(抗拒)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 일은 그대가 다스리라" 하였다.
그러고는 죽음에 임하여 감형관(監刑官)이 형(刑)을 집행(執行)하려고 목을 얽을 때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명분(名分)이 다르다. 내가 만일(萬一) 두 마음이 있다면 죽은 뒤에 맑은 하늘이 그대로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상(異狀)이 있을 것이다" 하고 형(刑)을 받아 죽으니, 홀연(忽然)히 구름이 모여 들고 비가 쏟아져서 감형관(監刑官)이 우산(雨傘)을 받고 성(城)안에 들어왔다고 한다.
※ 감형관(監刑官): 형(刑)의 집행(執行)을 감시(監視)․감독(監督)하는 관리(官吏)
둘째, 고려조 호장(戶長)을 지낸 정자우(鄭子友)의 후손에서는 그의 6세손 신열(臣烈)이
고려 현종때 유일로 천거되어 여러 청환직을 거친 후 병부상서에 올라 거란의 침입을 격퇴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올라 진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선주지사 임덕(任德)의 아들 유(愈)는 아우 손(孫)과 함께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부사가 되었던 천익(千益)은 당시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서 향리로 돌다가 퇴헌정(退軒亭)을 짓고 자적하다가 사위인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왔으므로 이를 시배(始培)하여 <물레>와 <씨아>를 창안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셋째, 통정대부로 첨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던 장(莊)을 파조로 하는 계통에서는 세종조의 명신인 척(陟)이 뛰어났다.
척(陟)은 교서관 정자를 거쳐 봉상시 주부와 감찰을 지내고 판한성부사. 수문전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1463년(세조 9) 양성지와 함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했다.
척의 아들 성근은 천성이 굳세고 곧아서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소문쇄록]에 의하면 그가 성종때 대마도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일이다.
도주(島主)의 집앞에 이르면 도주가 문밖에 나와서 조선의 왕명을 받게끔 되어 있었는데도 도주가 문밖에 나오기를 꺼려하였다, 이에 성근은 밖에서 호상에 걸터 앉아
통역을 시켜 두번 세번 독촉하여 왕명을 의식대로 공경히 받게 하였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했던 성근은 연산군의 단상법(短喪法)을 어기고 친상에 3년상을 치렀고
또 성종이 승하하였을 때에도 3년상을 행하니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려 갑사사화 때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로 승문원 박사로 있던 주신(舟臣)이 아버지의 죽음을 슬피하여 음식을 입에 대지않다가 굶어 죽었으며, 주신의 아우 매신(梅臣)과 매신의 아들 원린(元麟). 원기(元麒)와 원린의 아들 효성(孝成)이 모두 효행이 뛰어나 4대 (四代) 6명(六名)의 정문( 門)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되자 80노모를 등에 업고 전남 광양군 골약면 마동리로
피난했다가 중동리에 정착했던 대유(大有)는 효성이 지극하여 도관찰사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그의 아들 5형제의 후손들이 현재 광양지방에 집중세거하면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다.
넷째, 문하시중평장사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던 정헌(鄭 櫶)의 계통에서는 그의 손자 온(溫)이 청맹(靑盲)으로 유명했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대사간을 역임했던 온(溫)은 눈뜬 장님을 가장하고 지리산 청학동에 숨어 살았는데, 조선이 개국된 후 태조가 수차례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매서운 절개를 지켰다.태종이 사람을 보내서 칼로 눈을 찌르는 흉내를 내어 보았으나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온의 아우로 고려 말에 감찰어사를 지낸 택(澤)의 10세손 경세(經世)는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여 주자학의 거두로서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내며 성리학자인 사계 김장생과 함께 우리나라 예학(禮學)의 금자탑을 세웠다.
다섯째, 고려 때 첨정(僉正)을 지낸 정중공(鄭仲恭)을 파조로 하는 계통에서는
그의 15세손 기룡(起龍)이 초명(初名)인 무수(茂壽)를 선조의 명(命)을 받아 기룡(起龍)으로 개명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에 올랐던 기룡은 거창과 금산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고, 곤양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방어했으며 상주 판관으로
상주성을 탈환한 후 이어 성주, 합천, 초계, 의령, 고령 등지의 여러 성(城)을 탈환하는데 무명을 떨쳤으나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통영 진중에서 일생을 마쳤다.
[계 파]
예계(藝系): 시조(始祖) 정예(鄭藝)의 호(號)는 백곡(栢谷), 시호(諡號)는 영절(英節)이다.
고려통합벽상삼한공신(高麗統合壁上三韓功臣) 광록대부(光祿大夫)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갑자보(甲子譜)’ 세록편(世祿篇)에 보면, 시조(始祖)로부터 제학공(提學公)까지는 중간(中間) 소목(召穆, 昭穆)을 밝힐 수 없어 제학공(提學公, 鄭時陽)을 1세로 계대(系代)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기세조(起世祖)는 제학공(提學公) 정시양(鄭時陽)인데, 그는 고려 문종조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분이다.
자우계(子友系): 시조(始祖) 정자우(鄭子友)는 호장(戶長)을 지냈다. 그의 6세손이며 고려조 현종 때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해진 정신열(鄭臣烈)을 중조(中祖)로, 또는 8세손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정진경(鄭晋卿)을 중조(中祖)로 삼는 파(派)가 있다. 역대인물 중 정진경(鄭晋卿)의 4세손 정천익(鄭天益)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판부사(判府事)를 지냈는데, ‘물레’와 ‘씨아’를 창안(創案)하여 이름을 떨쳤다.
장계(莊系): 시조(始祖) 정장(鄭莊)은 고려 말엽에 통정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를 지냈고, 그의 4세손(四世孫) 정척(鄭陟)은 조선 태종 때 판윤(判尹)을 지냈으며, 5세손 정성근(鄭誠謹) 충절공(忠節公)은 성종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또 공대공(恭戴公) 정척(鄭陟)을 중조(中祖)로 삼는 1파(一派)도 있다.
헌계(櫶系): 시조(始祖) 정헌(鄭櫶)은 고려말(高麗末)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封)해졌으며, 그의 장손(長孫) 온(溫)은 호(號)가 우곡(隅谷)으로서 고려 말에 대사헌(大司憲)을, 차손(次孫) 택(澤)은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한편 정택(鄭澤)을 중조(中祖)로 하는 1파(一派)가 있는데, 그의 10세손 정경세(鄭經世) 문장공(文莊公)은 선조때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충장공파(忠莊公派) : 고려의 건국공신으로 문하 시중평장사를 지낸 정예(鄭藝)를 시조로 한다.
-은열공파(殷烈公派) : 호장을 지낸 정자우(鄭子友)를 시조로 한다.
-공대공파(恭戴公派) : 고려 말 통정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를 지낸 정장(鄭莊)을 시조로 한다
-첨정공파(僉政公派) : 고려 때 검정을 지낸 정중공(鄭仲恭)을 시조로 한다.
-우곡공파(愚谷公派) : 고려 때 대사헌을 지낸 정온(鄭溫)을 시조로 한다. 정헌(鄭櫶) 계통
-어사공파(御史公派) : 고려 때 감찰어사를 지낸 정택(鄭澤)을 시조로 한다. 정헌(鄭櫶) 계통
-지후공파(祗侯公派) : 고려 때 지후를 지낸 정신(鄭侁)을 시조로 한다.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 : 고려 때 판내부사를 지낸 정안교(鄭安校)를 시조로 한다.
첫째, 충장공파(忠莊公派)는 정예(鄭藝)를 시조(始祖)로 하는데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후손(後孫)으로는 문영공(文英公) 정수(鄭需)ㆍ문양공(文良公) 정을보(鄭乙輔)ㆍ감정공(監正公)
정길보(鄭吉輔) 등이 유명하다.
이렇듯 충장공파(忠莊公派)의 정예(鄭藝)는 다른 분들보다 앞선 시대에 나온 분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진주팔정(晋州八鄭)이 모두 정예(鄭藝)의 후손(後孫)이라는 생각 아래 ‘대동보(大同譜)’ 편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예(鄭藝)의 후손(後孫)이 8파로 나눠졌다는 문헌(文獻) 등 자료(資料)가 없어 아직 실현(實現)이 못되고 있고, 동조(同祖)라는 인식(認識)도 없는 상태다.
둘째, 은열공파(殷烈公派)는 호장(戶長)을 지낸 정자우(鄭子友)를 시조(始祖)로 한다. 고려조 호장(戶長)을 지낸 정자우(鄭子友)의 후손(後孫)에서는 그의 6세손 신열(臣烈)이 고려 현종때 유일로 천거되어 여러 청환직을 거친 후 병부상서에 올라 거란의 침입을 격퇴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선주지사 임덕(任德)의 아들 유(愈)는 아우 손(孫)과 함께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공민왕(恭愍王)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판부사(判府事)가 되었던 ‘정천익(鄭天益)’은 당시의 난정(亂政)을 개탄(慨嘆)하여 벼슬에서 물러나서 향리(鄕里)로 돌다가 퇴헌정(退軒亭)을 짓고 자적(自適)하다가 사위인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왔으므로 이를 시배(始培)하여 ‘물레’와 ‘씨아’를 창안(創案)하는데 결정적(決定的)인 역할을 하였다. ※ 씨아: 목화의 씨를 빼는 기구. 토막나무에 두 개의 기둥을 박고 그 사이에 둥근 나무 두 개를 끼워 손잡이를 돌리면 톱니처럼 마주 돌아가면서 목화의 씨가 빠진다.
은열공파(殷烈公派)는 정자우(鄭子友)를 시조(始祖)로 하는데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냈고, 후손(後孫)에 은열공(殷烈公) 정신영(鄭臣烈)ㆍ문충공(文忠公) 정천익(鄭天益)이 유명(有名)했다. 우곡공파(隅谷公派)는 정온(鄭溫)이 시조(始祖)인데, 고려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어사공파(御使公派)는 정택(鄭澤)을 시조(始祖)로 하는데 고려 때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고, 후손(後孫)으로 문장공(文莊公) 대제학(大提學) 정경세(鄭經世)가 뛰어난 분이었다.
셋째, 공대공파(恭戴公派)는 고려말(高麗末) 통정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를 지낸 정장(鄭莊)을 시조(始祖)로 한다.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추증(追贈)되었던 장(莊)을 파조(派祖)로 하는 계통(系統)에서는 세종조의 명신(名臣)인 척(陟)이 뛰어났다. 척(陟)은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를 거쳐 봉상시주부(奉常恃主簿)와 감찰(監察)을 지내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으며, 1463년(세조9년)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撰進)했다.
척(陟)의 아들 성근(誠謹)은 천성(天性)이 굳세고 곧아서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소문쇄록(?聞?錄)’에 의하면 그가 성종(成宗)때 대마도(對馬島)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 일이다. 도주(島主)의 집 앞에 이르면 도주(島主)가 문밖에 나와서 조선(朝鮮)의 왕명(王命)을 받게끔 되어 있었는데도 도주(島主)가 문밖에 나오기를 꺼려하였다, 이에 성근(誠謹)은 밖에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통역(通譯)을 시켜 두 번 세 번 독촉(督促)하여 왕명(王命)을 의식(儀式)대로 공경(恭敬)히 받게 하였다고 한다.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했던 성근(誠謹)은 연산군(燕山君)의 단상법(短喪法)을 어기고 친상(親喪)에 3년상을 치렀고, 또 성종(成宗)이 승하(昇遐)하였을 때에도 3년상을 행(行)하니 연산군(燕山君)의 비위(脾胃)에 거슬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억울(抑鬱)하게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로 승문원(承文院) 박사(博士)로 있던 주신(舟臣)이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여 음식(飮食)을 입에 대지 않다가 굶어 죽었으며, 주신(舟臣)의 아우 매신(梅臣)과 매신(梅臣)의 아들 원린(元麟), 원기(元麒)와 원린(元麟)의 아들 효성(孝成)이 모두 효행(孝行)이 뛰어나 4대(四代) 6명(六名)의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 정문(旌門): 충신(忠臣)이나 효자(孝子)ㆍ열녀(烈女)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세우던 붉은 문. 작설(綽楔). 홍문(紅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진주성(晉州城)이 함락(陷落)되자 80 노모(老母)를 등에 업고 전남(全南) 광양군(光陽郡) 골약면(骨若面) ‘마동리’로 피난(避亂)했다가 ‘중동리’에 정착(定着)했던 대유(大有)는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도관찰사(道觀察使)로부터 표창(表彰)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5형제의 후손(後孫)들이 현재(現在) 광양지방(光陽地方)에 집중세거(集中世居)하면서 훌륭한 인재(人才)를 많이 배출(輩出)시켜 가문(家門)의 중흥(中興)을 이루었다.
공대공파(恭戴公派)는 정장(鄭莊)이 시조(始祖)인데, 고려 때 첨추(僉樞)를 지냈으며, 후손(後孫)에는 공대공(恭戴公) 정척(鄭陟)ㆍ충절공(忠節公) 정성근(鄭誠謹)ㆍ충경공(忠景公) 정백형(鄭百亨)이 유명(有名)하다.
넷째, ① 우곡공파(愚谷公派)는 고려(高麗)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정온(鄭溫)을 시조(始祖)로 한다. 정헌계통(鄭櫶系統)이다.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封)해졌던 정헌(鄭櫶)의 계통(系統)에서는 그의 손자(孫子) 온(溫)이 청맹(靑盲)으로 유명(有名)했다. ※ 청맹(靑盲): 당달봉사.
고려(高麗)의 국운(國運)이 기울어지자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던 온(溫)은 눈 뜬 장님을 가장하고 지리산(智異山) 청학동(靑鶴洞)에 숨어 살았는데,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된 후 태조(太祖)가 수차례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拒絶)하고 매서운 절개(節槪)를 지켰다. 태종(太宗)이 사람을 보내서 칼로 눈을 찌르는 흉내를 내어 보았으나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② 어사공파(御史公派)는 고려(高麗) 때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낸 정택(鄭澤)을 시조(始祖)로 한다. 정헌계통(鄭櫶系統)이다. 온(溫)의 아우로 고려 말에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낸 택(澤)의 10세손 경세(經世)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인(文人)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學統)을 계승(繼承)하여 주자학(朱子學)의 거두(巨頭)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며 성리학자(性理學者)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우리나라 예학(禮學)의 금자탑(金子塔, 金字塔)을 세웠다.
다섯째, 첨정공파(僉正公派)는 시조(始祖)를 정중공(鄭仲恭)으로 하는데 고려 때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후손(後孫)으로 충의공(忠毅公) 정기룡(鄭起龍)이 유명하다. 첨정공파(僉政公派)는 고려(高麗) 때 첨정(僉正)을 지낸 정중공(鄭仲恭)을 시조(始祖)로 한다. 고려(高麗) 때 첨정(僉正)을 지낸 정중공(鄭仲恭)을 파조(派祖)로 하는 계통(系統)에서는 그의 15세손 기룡(起龍)이 초명(初名)인 무수(茂壽)를 선조(先祖)의 명(命)을 받아 기룡(起龍)으로 개명(改名)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별장(別將)에 올랐던 기룡(起龍)은 거창(居昌)과 금산(錦山) 싸움에서 무공(武功)을 세웠고, 곤양수성장(昆陽守城將)이 되어 왜군(倭軍)의 호남진출(湖南進出)을 방어(防禦)했으며,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상주성(尙州城)을 탈환(奪還)한 후 이어 성주(星州), 합천(陜川), 초계(草溪), 의령(宜寧), 고령(高靈) 등지의 여러 성(城)을 탈환(奪還)하는데 무명(武名)을 떨쳤으나 경상우도(慶尙右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1622년 2월 통영(統營) 진중에서 일생(一生)을 마쳤다.
여섯째, ① 지후공파(祗侯公派)는 고려(高麗) 때 지후(祗侯)를 지낸 정신(鄭侁)을 시조(始祖)로 한다. 지후공파(祗侯公派)의 시조(始祖)는 정신(鄭侁)으로, 고려(高麗)때 지후(祗侯)에 오른 분이다. ②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는 고려(高麗) 때 판내부사(判內府事)를 지낸 정안교(鄭安校)를 시조(始祖)로 한다.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는 정안교(鄭安校)를 중조(中祖)로 하는데, 고려(高麗)때 판내부사(判內府事)를 지낸 분이다.
이외에도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정효안(鄭孝安)ㆍ정지원(鄭知源)ㆍ정지정(鄭之貞)ㆍ정전ㆍ정지경(鄭芝卿)ㆍ정균(鄭均)ㆍ정송익(鄭松益)ㆍ정이(鄭貽)ㆍ정광원(鄭廣元)ㆍ정개(鄭愷)ㆍ정방진(鄭邦振)ㆍ정득훤(鄭得萱)ㆍ정지(鄭漬) 등을 중조(中祖)로 하는 파(派)가 있다고 하나 전(傳)하는 문헌(文獻)이 없어 알 수 없다.
[인구(人口)]
1985년 경제기획원(經濟企劃院) 인구조사(人口調査) 결과(結果)에 의하면 진양진주정씨(晋陽晋州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55,464가구, 231,2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集姓村)]
-본관지(本貫地): 경상남도(慶尙南道) 진주시(晉州市)-
경남(慶南) 진양군(晉陽郡) 사봉면(寺奉面) 마성리(馬城里) 북마성(北馬城)
경남(慶南) 진양군(晉陽郡) 사봉면(寺奉面) 사곡리
경남(慶南) 남해군(南海郡) 서 면(西 面) 정포리
전남(全南) 화순군(和順郡) 북 면(北 面) 서유리
전남(全南) 영광군(靈光郡) 군서면(郡西面) 덕산리
전남(羅南) 나주군(羅州郡) 봉황면(鳳凰面) 철천리(鐵川里)
전남(全南) 광양군(光陽郡) 골약면(骨若面) 중동리
전북(全北) 고창군(高敞郡) 무장면(茂長面) 덕임리
강원(江原) 홍천군(洪川郡) 서 면(西 面) 고곡리
[출처] 진주정씨(晉州鄭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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