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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산산맥(岷山山脈)을 타고 승천(昇天)하는 누런 용(龍)
(지상선경 같은 오채지 아래 자리잡고 있는 황룡사는 천상 도솔천을 연상시킨다)
(오채지의 가을 풍경)
누런 용을 뜻하는 황룡(黃龍)은 고대 중국에서 부터 전해 내려오는 오행사상에 기초를 둔 서수(瑞獸)로 오행사상(五行思想)에서는 천지(天地)를 네 방위로 나누고 네 방위(方位) 즉 사방(四方)을 지키는 신수(神獸)로 동쪽은 청룡(靑龍), 남쪽은 주작(朱雀), 북쪽은 현무(玄武), 서쪽은 백호(白虎)를 배치하면서 그들의 중앙(中央) 즉 한가운데에 황룡(黃龍)을 배치하여, 황룡이 이들 사신수(四神獸)를 통제,조정하는 위치에 있는 성스러운 짐승으로 여겨졌기에, 오행사상에서 중앙토(中央土)인 황색(黃色)에 대응되는 토덕(土德)에 해당하는 시대에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때문에 고대 중국에서는 서수[瑞獸: 재수가 좋은 상(祥)스러운 짐승]의 출현을 기념해서 연호를 바꾼 적이 두번 있는데, 그 첫번째가 후한(後汉) 선제(宣帝)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연호로 B.C. 49년의 1년간 사용되었던 황룡(黃龍)이란 연호가 용(龙)자를 사용한 첫 번째 연호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황룡이 출현하여 상서롭게 여겨 '황룡(黃龍)'으로 개원하였다고 하며, 두번째는 삼국시대 동오(东吴)의 군주(軍主) 오대제(吴大帝) 손권(孙权)의 두 번째 연호인 서기 229년 4월부터 서기 231년 까지 3년간 사용되었던 '황룡'이란 연호로 황무(黄武) 8월 4일 오나라(吳國) 왕(王) 손권(孫權)은 황제로 즉위하여 '황룡(黄龙)'으로 개원하였다. 이같은 일은 이웃한 일본에서도 일어났던 바, 일본에서도 황룡은 경사스러운 짐승이라 여겨져서, 우다(宇多) 천황이 즉위(887년 즉위)했을 때 황룡이 나타났다고 한다. 존재하지도 않은 황룡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 당시 기반이 약했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샛빨간 거짓말이였겠지만, 어쨌거나, 예나 지금이나 우매한 민중들은 사실유무에 관계없이 이같은 혹세무민적 군중심리 이용 전술에 혹하기 마련인가 보다.
(멀리서 보면 꼭 흰 만년설 광배에 둘러싸여 있는 부처가 하늘을 향해 누워 있는 듯한 민산산맥의 최고봉 설보정)
(해발 4007M고지 위를 통과하여 민산산맥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가다보면 산소 부족으로 차도 사람도 훨떡거린다)
신수(神獸) 중의 신수로 치부되는 황룡(黃龍)은 장족의 아홉마을이 모여 살고 있는 심산유곡으로 '동화의 세계' 또는 '인간선경(人間仙境)'이라고 불리우는 주자이거우(九寨溝)에서 북동(北東)쪽으로 68km 정도 떨어진 사천성(四川省) 쏭판현(松潘縣)에 위치하며, 동티벳의 만년설로 덮여있는 눈 덮인 산봉우리(Snow Mountain Peak)로 거대한 산괴(山塊)를 이루는 민산산맥(岷山山脈)의 주봉(主峰)이자 최고봉(最高峰)인 쉐바오딩[雪寶鼎,해발 5588m, 雪寶山(쉐프산)] 옥취봉(玉翠峰) 기슭에 빙해석으로 이루어진 퇴적층이 4.2km에 이르는 황룡거우(黃龍溝, 총길이 7.5km)를 따라 계단식으로 펼쳐진 3,400개의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환상적인 석회암 연못으로 이웃한 구채구와 함께 1992년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곳으로 3,400개의 석회 화채지(花彩池)외에 석회 하탄류, 종유석 용동 등이 있어 세계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구조가 제일 완정하며 조형이 제일 독특한 카르스트(Karst) 지형을 이루고 있다. 민산산맥의 주봉인 설보정 옥취봉 아래 평균해발 3,550m 지점에 길이 7.5km, 넓이 1.5km로 길게 펼쳐진 아름다운 관광지(풍경구)가 공중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마치 한 마리의 누런 황룡이 산림 속에 누워 꿈틀대듯 길게 뻗어 있어 '황룡(黃龍)'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이 지역을 풍수적으로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황룡은 단지 황룡이 꿈틀대듯 길게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산산맥을 타고 하늘로 날아 오르는 듯한 모습으로 풍수적으로는 '황룡승천형(黃龍昇天形)'이다. 황룡을 만든 이 연못들은 석회질이 침전된 연못 바닥에 물이 고여 자연히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연못들로 터키의 파묵킬레를 닮았는데, 하얀 석회암에 고인 맑은 물은 깊이와 보는 각도에 따른 빛의 반사각도에 따라서 다양한 빛깔을 내며 마치 용의 비늘처럼 반짝인다.
(황룡으로 가는 구절 양장 길)
( 해발 3530M망룡평에서 바라 본 설보정 옥취봉의 만년설)
이곳에는 에메랄드빛으로 다양하게 빛나는 참으로 맑고도 아름다운 3,400개의 연못외에도 '이승의 선경'이라고 불리우는 황룡의 중심사원인 '황룡사'와 '황룡중사', 그리고 연대비폭(蓮台飛瀑) 등 5개의 폭포와 황룡진인이 도를 닦아 선인이 되었다는 '황룡동(黃龍洞)'과 절벽에 생성된 석회암 동굴인 '세신동(洗身洞)'을 비롯한 4개의 석회동굴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만든다. 황룡구는 입구에서 부터 황룡사의 전화옥지(轉花玉池) 까지 약 4.2km 구간으로 면적이 3.4㎢에 달하며 사람들이 쉽게 올라 갈 수 있도록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황룡관광지(풍경구) 내에는 '오채지', '황룡사', '단운협', '설보정', '제호채지', '쟁염지' 등의 절경이 즐비하다.
(황금 쟁반에 담긴 에메랄드 같은 왕룡의 물색)
(해발 3550M고지에서 만난 기관지, 폐암에 특효라는 소나무겨우살이 송라)
이 아름다운 황룡을 제대로 관광할려면 잘 정비된 등산로를 따라서 천천히 감상하는게 좋겠지만, 평균해발이 3550m의 고산 지대이다보니 산소부족에 따른 고산증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보통은 입구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3,500m까지 올라가서 망룡평과 오채지를 감상한 후 걸어 내려오는 방법을 택한다. 케이블카 하차장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면 해발 3,530m지점에 설치된 해발이 가장 높은 전망대로 황룡의 주요 골짜기 및 만년설산(萬年雪山)의 산줄기를 바라 볼 수 있는 망룡평(望龍坪)이 있다. 민산산맥의 해발 4,000m 이상인 수 많은 높은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있고 뭇산에 울창한 원시삼림(原始森林)이 사방에 뒤덮었으며, 운무(雲霧)가 둘러싸여 있어 "천 층의 푸르름이 한 눈에 들어오고 용이 날고 봉(鳳)이 춤을 추니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린다"는 경지라는 풍광(風光)이 압권인 곳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흰눈 덮힌 만년설산 옥취봉의 풍광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웅장하게 다가온다. 풍광뿐만 아니라 황룡은 자연식물자원의 녹색보고이기도 하다. '사천 낙엽송', '민산 전나무', '독엽초', '성염초' 등 국가 1 ~ 3급 보호종 11가지를 비롯하여 500여 종류의 고등식물이 해발 1700 ~ 3800m 고지 황룡에 빼곡하니 들어서 있는 순수하고도 원시적인 삼림이기 떄문이다. 황룡의 압권은 만년설산 설보정 옥취봉 아래에 있는 오채지(五彩池)다.
('동화의 세계'같은 오채지)
(천상세계 오채지로 마치 무협소설에 나오는 판타지 같다)
발 아래 '황룡고사(黃龍古寺)'를 둔 오채지는 해발 3576m에 총면적 21,000평방미터, 총 693개 채색연못으로 이루어진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연못으로 세계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채지(彩池)가 가장 많으며 해발이 제일 높은 노천 칼슘 침적물 채지군(彩池群)으로 깊고 넓은 연못의 넘쳐 흐르는 물은 마치 푸르른 옥반(玉盤)과도 같고 붉은색, 자주색, 하늘색, 녹색, 비취색 등 농담이 서로 다른 여러가지 색조로 오색찬란하여 너무나도 아름답다.
(천상 극락세계 오채지와 道,佛이 융합된 황룡사, 그리고 티벳을 대표하는 타르쵸)
(오채지에서 바라 본 운무에 휩싸인 만년설산 설보정 옥취봉)
이 아름다운 오채지 바로 아래 만년설봉 옥취봉을 마주한 곳에 목조불교사원인 황룡고사(黃龍古寺)가 고풍스러우면서도 우아하게 서 있다. 1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설보정 옥취봉' 아래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설산사(雪山寺)'라고도 불리우는 이 사찰은 해발 3568m 고지의 총 1,000평방미터의 부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송번현지(松潘県誌)의 기록에 의하면, 명나라 병마절도사 마조근(馬朝覲)이 세운 도교사찰로 태고적 우(禹) 임금의 치수를 도왔던 전설 속의 '황룡진인(黃龍眞人)'이 이곳에서 수련하고 도를 닦아 선인이 되었다고 하여 후세 사람들이 사찰을 짓고 향불을 올렸으며 도교문화의 변천과 대우치수(大禹治水)의 사적을 고찰할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황룡사 전면 우측 아래 해발 3568m 지점에 높이 30m, 넓이 20m, 깊이 50m, 총 면적 1,000평방미터의 '귀진동(歸眞洞)' 또는 '불야동(佛爺洞)'으로도 불리우는 황룡진인이 수련하던 석회동굴인 '황룡동(黃龍洞)'이 있는데, 동굴의 깊이는 현재까지도 고증할 방법이 없다고 하며, 동굴 내에 동굴이 있고, 갖가지 자태를 뽑내는 종유석과 명대(明代)에 만들어진 석존삼불, 용 등의 조각품이 있어 경관이 아주 아름답다. 황룡동 아래 해발 3470m에 명대에 세워진 티벳불교사찰인 황룡중사가 고풍스럽고 위용이 있는 모습으로서 있는데, 이 절은 도(道).불(佛)이 서로 융합된 황룡풍경구 내의 종교문화적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사찰이다.
(형형색색의 물빛을 자랑하는 오채지는 마치 천상 도원경같다)
(사로 아름다움을 다툰다는 쟁염지)
(수면이 거울같이 맑아 물속에 거꾸로 비친 구름과 밀림의 그림자도 뚜렸하여 환상인지 진상인지 분별키 어렵다는 명경도영지)
또 '전화옥지(轉花玉池) '는 옥취봉 아래에 위치한 작은 연못으로 땅 속에서 솟아 나온 샘물이 소용돌이를 이루며 수면으로 꽃모양으로 나타났다가 물 흐름을 따라 흩어진다. 황룡중사를 뒤로 하고 내려오다 보면, 접선교(接仙橋)를 지나고 그 아래 황룡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경으로 꼽히는 곳으로 갖가지 색조를 띠며 빛나는 연못들이 주변 원시림과 대비되어 그 빛을 더하는 곳이자 황룡에서 두번째로 큰 연못군(池群)인 658개의 채색연못이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는 쟁염지(爭艶池)를 만난다. 해발 3,400m지점에 총 20,000평방미터인 쟁염지는 연못의 물 깊이와 제방의 식피가 각기 달라서 금황색, 푸른색, 주홍색, 오렌지색 등 여러색조를 띠어 마치 갖가지색을 가진 연못들이 그 아름다움을 겨루는 듯하다.
물색이 아름다운 오채지
望龍坪에서 바라 본 만년설산 설보정의 위용
이어서 만나는 사라영채지(婆蘿映彩池, 사라는 두견화를 상징한다)는 해발 3,415m에 있는 400개의 채지(彩池)로 매년 4 ~
5월이 되면 앞 다투어 피는 두견화가 연못의 물 및 푸른 하늘과 서로 어울려 빛나면서 사람을 도취시킨다. 그 바로 아래 해발 3,400m 지점에
있는 180개의 채색 연못인 명경도영지(明鏡倒影池)는 연못의 수면이 명경처럼 깨끗하고 거울과도 같아 물은 맑고 푸르며 물 속에 거꾸로 비친
구름, 설봉(雪峰)과 밀림의 그림자도 하도 뚜렷하여 환상인지 실상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그 바로 아래 해발 3,320m에 석회질이 침전되어
형성된 10여 개의 채지 샘인 분경지(盆景池)가 있다. 연못의 형태가 각기 다르고 연못 둑의 크기와 높이도 나무의 뿌리와 지세의 변화에 따라
서로 다르다. 층층겹겹을 이루며 다른 형태를 갖춘 연못들의 물 속에 잠겨있는 각양각색의 목(木), 석(石), 화(花), 초(草)들은 마치 천연
분재와도 같은데, 채지 속에 잠겨 있는 긴 고목과 그 주변에 있는 고목의 그림자가 샘에 비치는 모습이 장관이다.
연화좌대를 닮은 연대비폭)
(황룡의 절정 아름다운 비폭류휘)
이어서 나타나는 '물 밑에서 겹겹으로 피는 황금빛 칼슘 침적물 개펄'인 금사포지(金沙鋪池)를 지나면 해발 3,280m지점에 높이 10m, 넓이 1.5m, 깊이 40m인 칼슘 침전물이 내려 앉은 벽에 높이 1m, 너비 1.5m인 종유석이 아름다운 용동이 나타나는 바, 바로 절벽에 생성된 석회암 동굴인 세신동(洗身洞)이다. 선인(仙人)이 몸을 깨끗이 씻고 도를 닦던 곳이라는 이곳은 세차게 흐르던 물이 칼슘 침적물벽을 만나 한 줄기의 금빛 찬란한 칼슘침적물 폭포를 이루어 경치가 아주 좋다. 이어지는 연대비폭(蓮台飛瀑)은 해발 3,260m에 있는데 폭포 총길이가 167m, 폭 19m, 낙차 45m로 황금빛을 띤 칼슘침적물 퇴적은 길(吉)한 연화대(蓮花臺)와도 흡사하고, 또 '용의 발'과도 같으며 쏟아져 내려오는 은색폭포는 수림 속에서 부터 넘실넘실 떨어져 기세가 웅장하고 귀가 멍멍해진다. 이어지는 비폭류휘(飛瀑流輝)는 해발 3,245m에 위치하는데, 푸른 물이 흩날려 쏟아지면서 모양이 각기 다른 갈래 갈래의 제형폭포(梯形瀑布)를 이루며 폭포 뒤에 있는 가파른 바위들을 모두 말의 폐 모양과 같이 납작한 모양으로 된 칼슘 침적물로서 색채가 아름다워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아래 해발 3,230m 황룡의 입구에 있는 영빈지(迎賓池)는 구조가 정교하고 모양이 독특한 350개 채지(彩池)의 갖가지 빛깔의 연못으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채색연못들로 층층으로 연결되어 있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마치 즐거운 영빈곡(迎賓曲)과도 같이 사방에서 온 관광객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이같이 아름다운 황룡관광은 봄과 겨울에는 산 정상의 오채지를 제외한 모든 물이 얼어 붙기 떄문에 통상적으로 9, 10월이 가장 적기라고 한다. 이웃한 구채구와 마찬가지로 단풍이 곱게 들어 갖갖이 색이 물에 비치는 모습은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답기 떄문이다. 황룡관광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변화무쌍한 날씨와 산소부족으로 오는 고산증이다. 고산지대가 모두 다 그렇지만, 황룡도 예외가 아니다. 케이블카를 내려 오채지까지 3km 정도를 열심히 걸은 후, 오채지에 도착하면 천천히 구경하느라고 땀이 식으면서 한기를 쉽게 느낄 수 있기에 반듯이 여벌의 외투를 준비해가는게 좋다. 뿐만 아니라 맑았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기도 하니 비옷과 우산 등도 꼭 챙겨 가는게 좋다. 여기에 황룡구의 입구가 3,070m, 오채지가 3,576m로 우리나라 최고봉인 백두산보다 높은 고지대이며 입구에서 부터 정상까지 4.2km에 이르는 긴 거리이기 떄문에 체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걸어서 올라가기 보다는 위에서 설명한 바대로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까지 올라가서 걸어 내려오는 방법이 좋다. 정상에서 부터 걸어 내려오면 대략 4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볼거리가 많으니 천천히 둘러보면서 급하게 움직이지 않아야 고산증세를 피할 수 있다. 고산지대이기 떄문에 급하게 움직이면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우며, 어지럼증과 구토증상이 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촉으로 가는 길은 험하다. 이백의 '촉도난'이란 명시가 절로 읊쪼려지는 길)
(운무에 휩싸여 있는 장족마을 주위에 불경이 적인 롱다가 바람에 휘날린다)
비행장이 있는 성도공항에서 황룡으로 갈려면 사천성 최서북단(最西北端)을 가로 막고 있는 민산산맥의 해발 4,007m 고지 위로 닦여져 있는 구불구불한 길을 100번 이상 돌아서 가야 하기 때문에 체력이 약하다거나 나이가 많다거나 걷는데 자신이 없는 분들은 황룡을 가기 전에 반듯이 체력보강을 한 후에 가야 한다. 이 길을 가다보면 저 유명한 당대(唐代)의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의 대표작이며 이백으로 하여금 시선(詩仙)의 칭호를 얻게 해 준 고금의 명시로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려 있는 시(詩)이자 소동파가 절구가문(絶句佳文)이라고 칭송했고, 하지장이 이 시를 읽고 "이태백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탄복하여 이태백을 찾아가 자기가 차고 다니던 금구(金龜-황금으로 만든 거북이)를 팔아 같이 술을 마셨으며, 두보는 하지장과 이백을 술을 좋아하는 여덟명의 신선들이라고 부러워 하며 '음중팔선가'를 지어 헌납했을 정도로 유명한 이백의 명시(名詩) '촉도난(蜀道難)'의 시구(詩句)가 저절로 떠오른다.
"촉으로 가는 길의 험난함이 푸른 하늘 오르기 보다 더 어렵구나(蜀道之難 難於上靑天)"라고 한 '촉도난(蜀道難)'의 시구(詩句) 한 구절을 읊조리면서 눈을 돌려보면 이백의 시구(詩句)가 참으로 실감나게 느껴지는 험준한 고산(高山)길이기 떄문이다. 통상 고산증세는 해발 2,400m부터 오기 시작하는데 평균 3,800m 고산에서는 산소 부족으로 어지럽고 메스꺼우며 머리 아프고 구토를 하기 떄문이다. 보통은 다이나 막스(고산증 예비약)나 비아그라(고산증 치료약) 등 고산증 치료약을 복용하고, 또 출발한 후에는 휴대용 산소통으로 코를 막아 어질어질한 기운을 애써 누르면서 원시림을 지나고 황룡의 아름다운 연못과 끊임없이 떨어지고 이어지는 물줄기들을 감상하다보면 어느새 어지럼증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 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황룡을 벗어나면 집중할 것이 사라져서 원래의 고산증세가 나타나기에 조심을 해야만 한다. 황룡과 만년설산 설보정을 보고 있노라면, 중국이란 나라는 땅도 넓고 인구도 많기도 하지만, 참으로 대단한 경관도 많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2, 고산준령으로 이루어진 천하의 요새이자 꿈과 팬더의 고향인 쓰촨성(四川省)
쓰촨성(四川省)은 중국 남서쪽 장강[長江,양쯔강(揚子江)] 상류에 있는 성(省)으로 총면적이 56만 9000㎢에 총인구가 무려 1억 2천만명이 넘는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성으로 만일 사천성이 중국에서 독립했을 경우에 이 숫자는 세계 8위의 인구 규모가 될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성이며, 성도(省都)는 청두(成都)이다. 성내로 금사강(金沙江), 민강(岷江)· 퉈강(蕣江)· 자링강(嘉陵江)의 4대 강이 흐르기 때문에 ‘사천(四川)’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사천성은 크게 동쪽의 쓰촨분지(四川盆地)와 서쪽의 서부고원으로 나눌 수 있는데, 쓰촨성(四川省) 동부, 충칭시(重慶市) 서부에 위치한
중국의 4대 분지 중의 하나인 쓰촨분지는 총면적 16.5만㎢, 동서길이 380~430km, 남북길이 310~330km이며, 완만한
향사구조(向斜構造)와 급한 배사구조(背斜構造)를 가지는 구조분지로 적색사암이 널리 분포하기 때문에 적색분지 또는 홍색분지라고 부른다.
민산산맥(岷山山脈)·다바산맥(大巴山脈)·우산산맥(巫山山脈)·윈구이고원(雲貴高原)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주위는 해발고도는
1,000~3,000m의 다량산(大凉山)·민산(岷山)·다바산(大巴山)·우산(巫山) 등의 산지와 고원이 펼쳐지는데 분지(盆地)의 바닥은 500m
이하로, 광대하고 비옥한 선상지 청두 평원도 있으나 고원의 대부분은 파상지를 이루고 있다. 양쯔강(揚子江)이 분지의 남부를 흐르면서 북쪽으로부터
분지를 관류하는 민강(岷江)·퉈강(沱江)·자링강(嘉陵江) 및 자링강의 지류인 푸강(涪江)·취강(渠江) 등을 합치고, 또 남쪽으로부터는
츠수이허(赤水河)·첸강(黔江)을 합친다. 청두(成都)평원 등 몇 개의 비옥한 평야가 있으나 대부분은 낮은 구릉지이다. 내륙임에도 불구하고 기온의
연교차가 적고 겨울에도 북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4℃ 이상이어서 서리나 눈이 내리지 않는다. 연강수량은 1,000mm 정도로 다습하다.
중국 유수의 농업지대를 이루어 인구가 조밀하고, 또 석유·천연가스·석탄·철광석 등 지하자원과 수력자원도 풍부하다. 수륙(水陸)교통이 편리하며,
촨강(川江) 위주로 하는 수운이 활발하며, 청쿤철도(成昆鐵道:成都~昆明)]·청위철도(成都~重慶)· 위첸철도(重慶~貴州) 등이 지나고, 분지
남서쪽에 피서지·휴양지로 유명한 어메이산(峨眉山:3,099m)이 있다. 칭창고원(靑藏高原) 남동쪽의 서부고원은 원래 시캉성(西康省)의 주요
지역으로 대부분이 해발고도 3,000m 이상이다. 산맥이나 하곡은 북서쪽에서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많고, 하곡은 깎아지른 듯한 협곡을
이루는가 하면 궁가산(貢嶇山)처럼 1년 내내 눈이 덮여 있는 7,000m에 달하는 산도 있다. 하천은 모두 양쯔강 수계에 속하고 양쯔강의 본류가
우산산을 횡단하는 성의 경계에는 예로부터 험하기로 이름난 싼샤(三峽)가 있다.
동부분지에서는 겨울이 따뜻하고 여름에 극심한 무더위가
계속된다. 강수량은 1,000mm 내외이며 ‘촉(蜀)의 개는 해를 보면 짖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안개가 잦다. 그 반면 서부고원은 서늘하고
건조한 기후를 나타낸다. 식량 생산량과 쌀 생산량 모두 전국 제1위이고 밀·옥수수·보리도 많이 산출되는데 특히 청두평원에는 만리장성 축성시에
조성한 도우장언(都江堰) 등의 관개시설이 정비되어 있다.
사천성 서부는 청장고원 동연이고, 동쪽은 사천분지이다. 천서고원 산지는 해발이 3,000m~4,000m에 이르고, 세로방향으로 배열된 금사강, 사노이산, 아롱강, 대설산, 대도하, 공협산 등이 있다. 대설산의 공알산은 해발이 7,556m로 전 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천동의 사천분지 저지대는 해발이 500m정도이며, 그 동부의 무산 부근의 장강수면의 해발은 약 75m로 전 성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성도 분지는 중국 4대 분지 중의 하나이고, 면적은 약 20만㎢이다. 분지 북연에는 미창산, 대파산 등이 있고, 해발이 1,100~1,800m정도이고, 동연에는 무산이 있고 해발이 1,000~1,400m정도이며, 남연은 대루산, 대경산으로 해발이 1,000~1,500m 정도이고, 서연은 용문산, 대상령으로 해발이 2,100~2,400m 정도이다. 분지 저부의 서북 변두리에는 유명한 성도평원이 있고, 용천산과 화형산 사이의 분지 중부에는 방산구릉이 있고, 화형산의 동쪽에는 북동방향으로 평행한 령곡지형이 있다.
하류는 장강과 황하수계로 나뉜다. 황하수계에는 흑하(黑河), 백하(白河)가 있고, 북부의 약이개 초지상에 분포하고, 전 성 면적의 3%를 차지한다. 장강수계는 전 성의 97%의 면적을 차지하며, 간류로는 금사강단과 천강단으로 나뉘고, 주요 지류로는 아롱강, 민강, 타강, 희릉강, 오강 등이 있다. 호수는 주로 사천고원상에 분포하고 있으며, 그 중 면적이 1㎢ 정도의 호수가 49개가 있으며, 로고호가 가장 크고(성내 면적은 51㎢), 공해거가 그 다음이다(31㎢).
산이 높은 관계로 사천성의 기후는 동서의 차이가 크다. 동부는 아열대 습윤기후이고, 겨울에 온난하고, 여름은 더우며, 가을에는 비와 안개가 많고 일조가 적으며, 서부는 고원 기후구에 속하고, 겨울이 길고 여름이 없으며 일조가 많고, 수직변화가 선명하고, 연평균기온이 서부는 0℃~14℃, 동부는 14℃~16℃, 1월의 기온은 서부가 -12℃~6℃, 7월의 서부기온은 10℃~24℃, 동부는 26℃~28℃이며 서북부의 색달은 -36.3℃(1961년 1월 16일)로 가장 낮은 기온의 기록이 있다. 동부의 중경, 기강, 부릉은 모두 42.2℃의 가장 높은 기록이 있어 '화로'라고 칭한다.
연강수량은 서부가 600~800mm, 동부가 1,000~1,200mm정도이다. 사천분지 서연산지의 아안은 연강수량이 1,805mm로 전 성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온다. 연 일조시간은 서부가 2,200~2,600시간이고 동부는 1,000~1,400시간 정도된다.
이같은 지형과 기후 탓에 지대성 식물로는 아열대 상록활엽림과 청장고원 고한식물 등이 있다. 전 성의 피자식물로는 182과 1,474속 8,453종이 있고, 그 중의 수전, 은전, 옥동, 연향수, 수청수 등의 464종이 희귀한 식물이다. 겉씨식물은 88종이 있고, 전국 겉씨식물수의 40% 이상을 차지하지만, 삼림복개율은 13.3%에 불과하다. 야생동물 종류도 매우 많아, 척추동물은 1,100여종이 있고, 큰 팬더, 금사원숭이, 야크, 백진노루 등 54종의 진귀한 동물이 있다. 이미 와룡, 왕랑, 금불산 등의 십여군데가 자연보호구로 지정되어 있다.
경제작물로는 목화·저마·차·유채가 주로 재배되고 양잠업도 성하며 과일나무도 많다. 산지에는 1,000만ha나 되는 광대한 원시림이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목재 이외에 동유(桐油)·동백유·옻칠·오배자(五倍子)를 비롯하여 한방용 약재도 풍부하다.
사육 돼지와 소의 숫자도 전국 제1위를 차지하고 서부고원의 광활한 초원에서는 야크(소와 비슷하며 힘이 세고 큰 짐승)·염소·면양이
사육된다.
팬더나 모피를 얻기 위해 기르는 가축도 많다. 지하자원은 종류나 매장량이 모두 풍부한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석유·천연가스·석탄·철·금·구리·알루미늄·아연·소금·석면·운모 등이 있다. 소금은 쯔궁(自貢) 일대의 염정(鹽井)에서 산출된다. 석유·천연가스는
쓰촨분지의 중부에 널리 분포하고, 탄전은 성의 동부와 남부에 많다.
화잉산괴(華瑩山塊)의 중량산(中梁山) 광산은 석탄으로 유명하고,
치장(숴江) 이외에 시창전구(西昌專區)의 판치화(樊枝花)에서 대규모 철광산이 발견되었으며, 석면은 석면현(石棉縣)에서 많이 난다.
동부 대부분이 해발 500m 이하의 분지로서 비옥한 평원과 구릉 지대로 되어 있으며,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또한, 사천분지의 남쪽에는 장강이 흐르며, 그 대부분이 990.5m이상의 거대한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이 사천분지의 서쪽 말단부에 있는 성도평원은 생산성이 매우 높은 지대이다. 이러한 평야와 분지의 구릉 사면에서는 쌀이 주요 식량 작물로 재배된다.
팬더의 고향이기도 한 사천성은 현재 서남부의 중심지역으로 서부대개발의 교두보가 되어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중국이 시장개방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동부 해안 지역에 대한 개발 및 육성 정책이 시행되면서부터 동-서의 문화, 경제, 정치적 격차가 뚜렷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같은 경제개발에 힘입어 연안에 위치한 성.시(省.市)들이 경제특구 혹은 경제개발구를 만들어 외국의 자본을 끌어들인 뒤 눈부신 경제적 발전을 이룬 반면, 외진 곳에 치우쳐 있던 사천성은 그 혜택을 입지 못하여 동서격차가 심화되고 이에 따른 주민들의 불만이 점차 고조되어 가자 급기야 중앙정부에서 서부 유전을 비롯한 대대적인 자원개발계획을 발표하였는데 바로 '서부대개발 프로젝트'다. 공산정권 수립 후에는 철강·기계·전기·화학·방적·식품·제지 등의 공업도 급속도로 발전하여 충칭(重慶) 이외에 청두·난충(南充)·네이장(內江)·이빈(宜賓)·쯔궁 등의 발전이 두드러지고, 비단·동기(銅器)·칠기·죽세공 등 공예품의 생산도 활발해졌다. 특히 바오청(寶成)·청위(成身)·촨첸(川黔)의 3개 철도가 개통된 뒤에는 싼샤 항로(航路)가 정비되어 육상 및 수상 교통이 모두 편리하게 되었다.
사천의 경제는 비교적 발달하였는데, 1994년 전 성의 총 생산액이 2,778억원(元)으로 각 성구 중의 4위를 차지하였을 정도로 부성(富省)이였고, 그 중 농업이 27%를 차지하고 있고, 공업은 43%, 상업과 서비스업은 30%이다.
농업은 총 생산량 중 재배업이 57%를 차지하고, 목축업이 33%를 차지한다. 경지면적은 66만ha이고, 재배작물이 총 파종 면적의 79%를 차지한다. 벼, 소맥, 옥수수, 고구마가 위주이며, 그 중 벼 산출이 전국에서 수위에 드는 편이다. 경제작물로는 유채씨, 사탕수수, 홍황마, 누에, 차잎, 과일 등이 있다. 천구, 천궁, 충초, 사향 등의 한약재가 생산된다. 돼지고기 생산이 전 육류 생산의 7.4%를 차지하고 있다.
사천의 공업은 풍부한 광산의 기초를 두고 있으며 수력자원 매장량은 약 1.5억kg이 있고, 전국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양이다. 공업 총 생산량 중 중공업이 56%를 차지하고, 경공업이 44%를 차지한다. 중공업은 기계, 전자, 야금, 화공, 군수산업이 위주이다. 반지화 강철공업, 성도의 전기, 양구의 인구제조, 자공의 염화공업 등이 있고, 성내에서 중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경공업으로는 면방, 사방, 식품, 소금, 피혁, 제지 등이 있다. 산출되는 명주는 노주특곡, 선빈오량액, 면죽검남춘, 고린랑주 등이 있다. 전통 수공예품으로는 촉면, 파단, 하포, 돗자리, 죽제품이 있다.
사천(四川)의 산물(産物)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가 즐겨 마시는 차(茶)다. 현재 세계 여러 나라에서 널리 즐기는 차의 원산지는 중국의 운남성, 귀주성, 사천성 산간지인데, 이들 지역이 한결같이 고온다습한 곳이고 산간벽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차나무는 식물학적으로 동백과의 상록수에 속하는데, 당초 중국차는 처음에는 약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육우(陸羽)가 저술한 '다경(茶經)' 중에 중국 전설 상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하나인 신농씨(神農氏)가 인간에게 맞는 약을 찾아 산과 들을 돌아다니면서 초근목피(草根木皮)를 채취하여 먹었는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독초를 먹게 되었다. 그때마다 차의 잎으로 해독하였다고 하는 기록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진위를 떠나서 차의 역사는 지극히 오래되고 약으로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확실한 것 같고 열독(熱毒)을 중화(中和)시킬 수 있는 극냉(極冷) 성질을 가진 차의 물성(物性)으로 볼 때 설득력도 있어 보인다. 그래서 차(茶)도 약(藥)과 같이 마시는 것은 ‘복(服)한다’고 하는 것 또한 그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약으로서의 차의 역할이 상당기간 동안 지속되어 오다가 오늘날의 차의 위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당시에 차는 자생하는 것 밖에 없었으므로 생산량은 극히 적었기에 차는 귀족만의 음료였었다. 차가 대중음료로서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은 당(唐)나라(7∼10세기) 무렵으로 추측된다. 당시 대도시였던 장안과 낙양 등에서는 일반 가정에서도 차를 마셨지만 거리에는 다점(茶店)이 많이 출연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떄문이다. 차에는 떡차(餠茶)라고 불리는 차가 있었는데 차 잎을 따서 절구로 찧어 떡 모양으로 굳혀서 보전하는 고형차였다. 마실 때는 이것을 빻아서 분말로 만든 후 뜨거운 물에 타서 마셨는데 생강과 감초, 소금 등을 넣어서 마셨다. 원(元)시대에는 북방의 유목민족과 교류가 생기면서 차에 버터와 우유를 넣어 즐겨 마셨다. 이같은 고형차로부터 오늘날의 엽차(葉茶) 형태로 변한 것은 명나라 때부터인데 가마솥에다가 차를 덖어서 만드는 형태로 일대 제조법의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차에다 재스민 등의 꽃향기를 첨가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험준한 산세에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가 되었던 사천성은 사실, 우리에게는 매운 요리의 대명사인 사천 지방의 요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북경요리, 광동요리 등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요리 중의 하나인 매운 맛의 대명사인 사천요리는 촉이라는 나라 이름과 더불어 우리에게 아주 친근하게 알려져 있다. 사천 지방의 풍부한 지하자원으로 만든 각종 음식은 북경, 광동성 요리와 함께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어 이제는 친근한 음식이 되었기 떄문이다. 사천 지방의 요리들이 다른 지역의 음식과 특이한 점은 다소 맵다는 것이다. 사천성의 음식이 유달리 매운 것은 지역적 특성에 기인하고 있는데, 사천성의 수도인 성도를 비롯하여 사천 지방의 기온이 습하기 때문으로 이 습(濕)한 기운을 극복하기 위해 발산하는 성질이 강한 매운 맛을 추구했던 바, 그 결과 매운 것이 특징이 되었던 것이다. 즉 음식궁합을 맞추다보니 자연히 맵게 된 것이다.
사천 지역은 고대로 넘어가면 사천성은 촉이라 불리우면서 중국 지도의 한 부분을 할애하여 국가의 면모를 갖추어왔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저 삼국시대의 유비의 촉도 그랬고, 춘추시대의 촉도 그랬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그들만의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지형적 특성으로 사천성은 정복하기 힘든, 반대로 수비자 입장에서는 지키기 쉬운 곳이라는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단적인 예인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이렇게 사천지방은 촉이라 불리우면서 정복하기 힘든 그런 지방으로 생각되어져 왔지만, 실상, 중원이라 불리우는 중국의 중심지와 떨어져 있어 관심 대상에서 제외된 면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사천의 역사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사천성은 춘추전국시대에는 파, 촉의 지대였고, 진대에는 파군, 촉군에 속하였으며, 한대에는 익주에
속하였다가 당대에는 검남도, 산남서도로 분리되어 속하였다. 서기 757년(지덕 3년)에 검남도는 검남서천, 검남동천 양절도사로 나뉘었고, 간략히
서천, 동천(천은 평광야의 의미이다)이라고 칭하다가 송대에 와서는 익주(후에 성도부로 개명), 재주, 이주, 기주 사로로 나뉘었고, 합하여
사천로로 칭하였다. 원대에는 합사로가 사천행중서성으로 배치되었고, 또한 중경로 사천남도선위사로 배치되었다. 명대인 서기 1376년(명홍무
9년), 사천행중서성이 사천승선 포정사사로 개칭되었으며, 청대에 와서 사천성으로 되었다. 사천성은 간략히 천(川)이라고도 하고, 또한 성경서부가
춘추전국시대에 촉나라의 땅이었으므로 촉(蜀)이라고도 한다.
사천성에는 한족(漢族) 이외에
이족(彛族)·창족(藏族)·먀오족(苗族)·후이족([回族)·창족(羌族) 등 여러 종족이 살고 있는데, 사천 지방의 사람들은 매사에 호기심이 많고,
사소한 일이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는 유명한 일화들이 유래하고 있으며, 성내의 주요 도시로는
청도우·쯔궁·충칭·난충·완현(萬縣)·두커우(渡口)·네이장·루저우(濾州)·이빈 ·금양(綿陽)·다현(達縣) 등이 있다.
3, '동화의 세계', '인간선경(人間仙境)'이라고 불리우는, 아홉 장족(藏族) 마을(九寨)이 모여
사는 'Y'자형(字形) 골짜기 구채구(九寨溝)
'동화의 세계' 또는 '인간선경(人間仙境)'이라고도 불리우는 구채구는 거대한 산괴(山塊)를 이루고 있는 민산산맥(岷山山脈)의 카르스트(Karst) 지형에 펼쳐진 4,800m 높이의 계곡으로서 총 면적이 720㎢에 이르며, 수많은 호수와 늪, 낙차가 큰 폭포가 장관을 이루고, 다양한 삼림 생태계가 분포하기에 일명 하이쯔(海子)계곡이라고도 하는 곳에 목책을 둘러친 9개의 장족 마을이 'Y'자형(字形) 골짜기'를 따라 흩어져 살고 있기에 9개의 장족마을을 뜻하여 구채구(九寨溝)라고 불린다. 이곳은 해발 2,000m까지는 완만하게 높아지며 기후가 온난하고, 산꼭대기에서 계곡까지는 혼효림과 침엽수림이 우거져 있으며, 산중턱에는 소나무과의 침엽수가 자란다. 이곳에는 커다란 계곡이 3군데 있는데, 해발이 높은 2개의 계곡 바닥 부분이 또 하나의 계곡과 합하여 Y자를 이룬다. 구채구 보호구역 곳곳에는 140종의 조류가 분포하며 자이언트 팬더 등 멸종위기에 처한 동·식물종이 서식하기에 1992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이웃한 황룡(黃龍)과 더불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하였다.
(1) 천상(天上)의 빛을 고스란히 담은 동화같은 전설(傳說)을 간직한 '인간선경(人間仙境)' 구채구(九寨溝)
구채구(주자이거우, 九寨溝)는 총 면적 720㎢에 달하는 거대한 협곡에 총 인구 10만 명(1997년 기준)이 살고 있으며 중국 쓰촨성(四川省) 북부 바이룽강(白龍江) 지류인 바이수이강(白水江) 유역 아패장족강족자치주(阿壩藏族羌族自治州)를 가로질러 흐르는 민강(岷江)의 상류이자 가릉강(嘉陵江)의 시발점인 남평현(南坪縣)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의 명칭은 쑹판현(松潘縣)·난핑현(南坪縣)이며, 1997년에 주자이거우로 개칭되었다. 장족들은 원래 티벳을 근거지로 살았으나 라마교 종파의 분리로 험준한 이곳까지 쫓겨와 어렵게 살게되었다. 대부분의 장족들은 야크와 염소를 방목하는 목축이 주업이지만 삼림자원이 풍부하여 당삼(唐蔘)·당귀(當歸)·패모(貝母)·사향(麝香)·충초(蟲草) 등의 약재를 캐기도 한다. 그리고 옥수수·밀·유채·잎담배 등의 농산물도 산출한다. 이밖에 시멘트·목재가공 등 공업도 활발한데, 최근에는 주자이거우관광구로 지정되어 세계적인 관광명승지로 각광받으면서 정부로 부터 입장료의 일부분을 보조받기 때문에 마치 아메리칸 인디언들처럼 놀고 먹는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쉐라톤호텔 등 많은 숙박시설이 밀집되어 있고 장족 전통 민속공연장이 있지만, 겨울시즌이 되면 관광객이 급감하고 대부분의 상업시설은 봄까지 철수한다.
구채구의 짙은 삼림이 뿜어내는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만년설이 소복하게 쌓여 있는 설산(雪山)과 짙푸른 원시삼림(原始森林) 그리고 비취빛 거울 같은 연못이 한데 어우러진 구채구(九寨溝)의 신비로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림 동화 속에 빠져든 듯한 착각에 빠지기에 '동화의 세계', '인간선경(人間仙境)'이라고도 불리워진다. 구채구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四季)마다 서로 다른 분위기를 띠는데, 그중에서도 가을의 경치가 가장 빼어나다고 한다.
총 면적 720㎢에 달하는 거대한 협곡에 장족이 거주하는 9개의 촌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 구채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만물을 관장하는 신 비앙타명열파(比央朶明熱巴)에게는 지혜롭고 용감하며 예쁘고 착하기까지 한 9명의 딸이 있었다. 어느 날 설산 봉우리에 내려온 그들은 사악한 뱀이 물 속에 독을 뿜어 사람들을 죽이는 참혹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이에 그 뱀을 물리치고 나서 각기 장족 청년과 결혼하여 살았다. 그 후에 자손이 번성하여 이곳 9개의 촌락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구채구는 넓고 잔잔한 호수들로 온통 뒤덮여 있다. 호수의 물결은 숨을 죽인 듯 고요하여 정적이 감돌
정도이고, 그 빛깔은 때론 쪽빛으로 때론 비취빛과 잉크빛으로 드러나 누군가 고의로 물감이나 잉크를 풀어놓은 것은 아닌지 의심할 정도다. 장족은
이 호수들을 108개의 '비취빛 바다(翠海)'라 부른다. 어떻게 이처럼 아름다운 호수가 생겨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다른 하나의 전설을 통해 알
수 있다. 용감한 산신(山神) 달과(達戈)가 아리따운 여신(女神) 색모(色嫫)를 흠모한 까닭에, 뜬 구름으로 거울을 만들어 그녀에게
선물하였다.
그러나 색모가 실수로 그 보물 거울을 떨어뜨려 산산조각이 났고, 결국 그 조각들이 108개의 호수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호수들은 전설 그대로 거울처럼 투명할 뿐만 아니라, 쪽빛 구슬로 엮은 목걸이처럼 길게 이어져 있다. 그 앞에 서 있노라면, 잠시나마 비록
꾸며낸 이야기이겠지만 동화 같은 전설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 든다. 바로 구채구의 서북쪽에 위치한 해발 4,200m의 높은 산이 '달과'이며, 이
산을 마주보는 동남쪽의 산을 '색모'라고 한다.
이런 관념은 이 연인들에 관한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설산의 왕이 구채구를 엉망으로 만들자, 달과는 산림과 호수를 새로 만들 수 있는 녹색 보석을 찾으러 설산의 왕을 찾아갔다. 설산의 왕은 몰래
그에게 망각의 탕을 먹임으로써 색모의 존재를 잊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딸 보설공주(寶雪公主)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 후 색모의 눈물이 달과를
깨어나게 했으며, 두 연인의 사랑은 보설공주를 감동시켰다. 결국 보설공주는 그들을 도와 녹색 보석을 찾아내고 구채구를 예전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려놓았다.
공작새 꼬리를 닮은 오화해
에메랄드빛 金鈴海
이 사실을 알아차린 설산 왕이 보복하려 하자, 달과와 색모는 녹색 보석을 입으로 삼켜 두
개의 높은 산으로 변함으로써 설산 왕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처럼 거대한 산이 되어 구채구를 보호한 두 연인의 은덕에 감사하고자,
아직까지도 이 지역 사람들은 달과와 색모에게 제사지내며 복을 기원한다고 한다.
본래 구채구는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자연 환경 탓에, 장족들이 자급자족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외부의 문명과 단절된 채 살아가던 미지의 세계였다. 그러나 1982년에 중국의 국가급 명승지로 지정되었고, 1984년에 외부에 정식으로 개방되어 무수한 유람객을 유치하는 관광지가 되었으며, 1992년에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자연유산에 등록되었다. 그러나 환경 보존을 위한 중국정부의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 원래의 모습이 조금씩 훼손되는 듯 하여 추후 보다 더 엄격한 통제가 필요해 보인다.
해발 1,990∼3,150m에 이르는 높은 고도와 편도 총 32.5km의 긴 거리 때문에 관광객은 보통 산 아래에 자리한
매표소에서 구채구 관리소측이 운행하는 미니 셔틀버스를 타고 협곡의 정상에 도착한 뒤에 도보로 하산하거나 아니면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구간 구간을
이동하면서 경관을 감상하는데, 중국 정부의 환경 보존 정책 때문에 이곳의 관광차는 모두 환경에 무해한 연료로 운행되며, 호수에 뛰어드는 것은
물론 손을 담그는 것조차 철저히 금지되어 있지만, 다행히도 입구 근처에 있는 한두 개 호수에 손을 담그는 것 정도는 허가되어 있으니 필요사
구채구의 물 맛을 느껴 볼수도 있겠지만 삼가하는게 올바른 관람태도로 보인다.
구채구는 아직까지도 전역을 개방한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분을 개방하여 지금은 수정구(樹正溝)·칙사와구(則査洼溝)·일칙구(日則溝)의 세 가지 협곡이 개발되어 관광객의 유람을 허용하고 있는데, 우선
구채구(九寨溝) 유람지의 전체 면모를 살펴보면, 매표소 부근이 바로 수정구의 입구에 해당하고, 매표소에서 산을 따라 낙일랑(諾日朗)폭포까지 약
14.5㎞를 오르면 'Y'자 모양처럼 두 가닥의 협곡으로 나뉘는데, 바로 왼쪽의 것이 칙사와구이고 오른쪽의 것이 일칙구다. 칙사와구의 길이는
낙일랑에서 장해(長海)까지 18㎞에 이르는 여정이며, 일칙구 역시 낙일랑에서 정상의 원시삼림(原始森林)까지 그 길이가 약 18㎞에
달한다.
구채구 관광은 매표소에서 부터 올라 가는 순서대로 우선 수정구 초입에 위치한 갈대가 무성한 호수인 노위해(蘆葦海)로 부터
코뿔소가 뛰어든 호수라는 서우해(犀牛海)까지의 경관을 돌아보고, 다음으로 칙사와구와 일칙구의 분기점인 웅장한 폭포 낙일랑부터 칙사와구의 거대한
호수 장해(長海)까지를 둘러본 후, 끝으로 호수가 많아 볼거리를 제공하는 일칙구의 거울 같은 호수 경해(鏡海)와 팬더곰이 뛰어노는
원시삼림(原始森林)까지 차례차례 둘러보면 되는데, 쓰촨대지진의 여파로 팬더곰의 먹이인 전죽(箭竹)이 많이 죽어서 근래는 팬더곰을 잘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수정구(樹正溝)에 접어들면, 갈대 호수라는 의미의 노위해(蘆葦海)가 2.2㎞쯤 길게 놓여 있다. 말 그대로 호수 주변에 갈대풀이 무성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물이 맑아 물 속 잎사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이다. 그 위에는 쌍룡해(雙龍海)와 화화해(花火海)가 있다. 전자는 호수 바닥의 모습이 마치 꿈틀대는 두 마리의 교룡(蛟龍) 같아 붙여진 이름이고, 후자는 파도 하나 일렁이지 않는 짙은 남색의 호수 위로 가끔 햇빛이 반짝일 때에 마치 찬란한 불꽃이 튀는 듯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다음으로 거대한 용이 드러누운 듯한 호수 와룡해(臥龍海)가 자리하고 있다. 이 호수의 이름과 관련해서 아주 재미난 전설이
있다. 먼 옛날 근처의 흑수하(黑水河)에 흑룡(黑龍)이 살고 있었는데, 매년 이곳 9개 촌락의 백성들이 99일 동안 제사를 올려야만 비로소 물을
대어주었다.
백룡강(白龍江)에 사는 백룡(白龍)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자신이 관장하는 백룡강의 물을 보내주려 했다. 그러나 흑룡의
저지로 말미암아 백룡은 그만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산신(山神)이 내려와 흑룡을 항복시켰으나, 백룡은 힘이 쇠진하여 백룡강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오랜 세월이 흘러 호수 아래 누운 와룡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지만, 실제 호수 바닥에는 우윳빛 침전물이
있는데, 언뜻 보기에 그 모습이 마치 용이 살아서 꿈틀대는 듯하다.
이 호수를 등지고 얼마 안 가면, 수정군해(樹正群海)와 수정폭포(樹正瀑布)가 있다. 수정군해의 주변에는 측백나무나 소나무 등의 상록수들이 빼곡히 솟아 있고, 그 사이사이로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계단식으로 흘러내리며 수 많은 은빛 기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호수의 상류에 수정폭포가 자리하는데, 폭 62m에 높이가 15m로 구채구의 4개 폭포 중 가장 작은 폭포다.
수정폭포를 지나면 거대한 호랑이를 닮은 노호해(勞虎海)가 나오고 이를 지나면 수정구의 끝자락에 '코뿔소 호수'라는 의미의
서우해(犀牛海)가 있다. 이 호수는 해발 2,400m 상에 자리하는데, 그 길이가 2㎞이고 수심도 18m나 되는 수정구에서 가장 큰 호수다. 이
호수의 이름과 관련해서도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어떤 중병에 걸린 늙은 라마승(喇嘛僧)이 코뿔소를 타고 이곳에 와서 호수의 물을 마시니
병이 씻은 듯 나았다. 그 후로 이 라마승은 이곳을 떠나기 싫어, 아예 코뿔소를 탄 채 호수 안에 뛰어 들어가 살았다고 해서 코뿔소
호수(犀牛海)라고 명명되었다고 한다.일칙구(日則溝)와 칙사와구(則渣洼溝)로 나뉘는 분기점에는
웅장한 폭포라는 의미의 '낙일랑(諾日朗) 폭포'가 있다. 이곳에는 식당들이 즐비하기에 관광객은 보통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잠시 쉬어간다.
낙일랑 폭포는 총 18개의 호수로 구성된 낙일랑 군해(群海) 중의 한 경관으로 300m너비에 높이 20m의 낙차로 떨어지는 폭포를 말하는데,
본래 이곳은 폭포가 없고 평평하였지만, 다음과 같은 사건으로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해 찰이목덕(扎爾穆德)이라는 승려가 오랜 유람 끝에 천을 짜는 기구를 가지고 돌아왔고, 총명하고
아리따운 처녀 약의과(若依果)는 이 기구로 천 짜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이 기구를 낙일랑 호수에 두고서 동네 아가씨들이 보고 배우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흉악한 사내 나찰(羅扎)이 나타나 허튼 짓을 한다며 약의과와 방직 기구를 발로 차서 산기슭으로
떨어뜨렸다.
이때 갑자기 산 아래의 물이
치솟아 흉악한 나찰을 집어 삼키었고, 그 방직 기구는 지금의 폭포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티베트어로 '낙일랑'이란 '남신(男神)' 또는
'웅장하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하니, 낙일랑 폭포는 '웅장한 폭포'라 해석할 수 있겠다. 점심을 맛나게 먹고 이 폭포 맞은편에 있는 누각에 올라
호수를 내려다보면, 바닥끝까지 훤히 들여다보여 절로 기분이 상쾌해지는 맛을 느낄 수 있다.
낙일랑 폭포의 왼쪽에 펼쳐진 협곡 칙사와구로 접어들어 한참을 올라가면,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호수가 바로
하계절해(下季節海)와 중계절해(中季節海), 그리고 상계절해(上季節海)이다. 비록 세 호수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렇게 명명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데, 바로 계절에 따라 호수에 고인 물의 양이 달라진다는 공통점이 그것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가을철에 호수 가득 물이 고이며,
겨울과 봄을 지나 초여름이 되면 호수의 물은 거의 말라버린다. 그 즈음 호수 바닥에 풀이 자라나 소나 말을 방목하기에 좋은 곳이 된다는데,
필자가 갔을 때는 물은 마르고 없고 군데 군데 듬성 듬성 풀이 자라고 있는데 소나 말을 방목할 정도의 풀은 없었다. 그리고 상계절해의 바로
옆에는 다섯가지 색으로 빛난다는 조그마한 오채지(五彩池)가 있다. 본래 짙푸른 색을 띠는 이 호수는 바닥의 침전물이나 주변에 돋은 식물들의
색채와 석회질의 농담에 따라 각가지 색깔로 빛나면서 오색찬란하게 보인다. 이런 특색은 일칙구의 오화해(五花海)에 견줄 만하다. 때문에 만약
여름철에 구채구를 찾는다면, 관광차를 타고 정상에 가서 장해(長海)만을 본 뒤에 낙일랑 폭포로 되돌아가 일칙구로 향하는 방법도 좋을 듯
하다.
오채지에서 1㎞쯤을 올라가면, 칙사와구의 정상인 해발 3,100m에 닿는다. 이곳에는 폭이 600m나 되고 수심 100m를
넘어서는 거대한 호수 장해(長海)가 있다. 마치 바다를 연상시키는 이 호수는 깊은 수심 때문에 푸르다 못해 검은 빛을 띠며, 호수 가에는
노송(老松)이 솟아 있어 멀리 보이는 설산(雪山)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경치가 무척이나 아름다운데, 이 장해의 독특한 점은 이곳의 물이 다른
협곡에서 따로 유입되는 것이 아니라, 설산에서 녹아내린 눈이 고여 생성된다는 사실이다. 이곳 장해에서 맑은 공기를 흠뻑 마신 뒤에 소형 관광차를
타고, 다시 낙일랑 폭포로 내려가 경해(鏡海)에서 원시삼림(原始森林)에 이르는 일칙구의 경관을 감상해도 좋고, 아니면 오채지로 걸어 내려가도
좋다.
낙일랑 폭포의 오른쪽에 일칙구(日則溝) 협곡이 펼쳐지는데, 그
초입에는 길이가 약 1㎞쯤 되는 거울 호수 경해(鏡海)가 자리하고 있다. 말 그대로 거울처럼 맑아 주변의 경관이 모두 호수에 비친다. 그리고 이
호수의 위쪽에 진주탄(珍珠灘) 폭포가 있다. 이 폭포는 너비가 200m이고 낙차의 폭이 약 40m인데, 떨어지는 물 알갱이가 햇빛에 반사되어
마치 진주 알처럼 빛나는 까닭에 붙여진 이름으로 참으로 아름답다. 그 위로는 구채구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경관이 3.5㎞나
펼쳐지는데, 우선 오화해(五花海)는 주변의 경치가 투영된 물빛이 마치 공작새의 날개처럼 다양하여, 비취색·감색·녹색·황색·적색 등으로 보이는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고, 다음으로 숲 속에 굽이굽이 펼쳐진 나무 계단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연달아 팬더곰의 호수라는 웅묘해(熊猫海)와 그들의
먹이가 되는 화살촉을 꽂는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인 전죽해(箭竹海)를 만나게 되는데, 이들 이름은 일칙구 정상인 원시삼림에 사는 팬더가 내려와
이곳에서 헤엄치고 먹이를 찾으며 물을 마신다는 풍문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팬더를 고양이처럼 생긴 곰이라는 의미에서
'웅묘(熊猫)'라 부르고, 그 팬더가 즐겨 먹는 화살촉처럼 뾰족한 대나무를 '전죽(箭竹)'이라 부른다. 예전에는 전죽해의 가장자리에 대나무 숲이
즐비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헤엄치는 팬더도, 그들의 먹이인 대나무 숲도 대지진과 기후변화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두
호수의 모습은 새파란 하늘에 떠다니는 흰 뭉게구름이 초록빛 호수 위에 그대로 투영될 만큼 신비롭기 그지없다. 그리고 여기에는 낙폭이 80m나
되는 웅묘해 폭포가 있다. 웅묘해 폭포는 구채구에서 규모가 가장 큰 폭포다. 폭포 근처에는 나무다리가 가로 놓여 있어, 그 위에 서서 호수를
내려다보면 호수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2) 토번왕 송찬간포와 당(唐) 문성공주의 애닲은 비화가 스려 있는 국경지역 송반현(松潘縣)
성도공항에서 구채구를 갈려면 반듯이 당나라 토번왕 송찬간포와 문성공주의 비화가 전해지는 송반현을 거쳐 가야 한다. 옛날 송반현(松潘縣)은 송주(松州)와 반주(潘州) 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유서 깊은 명승지다. 당(唐)나라 태종때 토번(吐蕃)의 수령 송찬간포(松贊干布)가 당시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으로 사신(使臣)을 보내 당 황실에 구혼한 바 있는데, 그 사신이 바로 이곳 송주를 지나다가 관가에 구류되었다. 이 때문에 크게 진노한 티벳왕 송찬간포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고, 전쟁이 끝난 뒤에 결국 당(唐) 태종(太宗)은 휴전의 공물(貢物)로 사랑하는 딸인 문성공주(文成公主)를 시집보내어 화친했다. 지금도 가기 힘든 험한 길을 따라서 당과 토번의 국경이였던 이곳까지 온 문성공주는 얼마나 가기 싫었던지 '일월정'에 올라 하염없이 울었다고 하며, 그 눈물이 흘러 지금의 민강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올 정도로 애처로운 일화가 전하는 곳이 바로 이곳 송반고성이다. 지금도 옛 명(明)나라의 변방 수비대가 주둔하었던 '송반고성(松潘古城)'이 그대로 남아 있고 고성 성문 앞에는 토번왕 송찬간포와 문성공주의 동상이 다정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으리라.
이 성곽은 '송반현지(松潘縣志)'의 기록에 따르면, 명(明) 홍무(洪武) 12년(1379)에 장군
정옥(丁玉)의 건의에 따라 변방의 강족(羌族)을 방위할 목적에서 시공했으며, 다시 정통(正統) 연간(1436∼1449)에 변방 소수민족의 봉기가
끊이지 않자, 결국 가정(嘉靖) 5년(1526)에 와서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청(淸) 함풍(咸豊) 연간(1851∼1861)에는
과중한 세금에 불만을 품은 강족(羌族)과 티베트족이 무려 6년 동안 반청(反淸) 봉기를 일으켜 얼마간 이곳을 지배하기도 하였다. 오색찬란한 물이
에돌아 흐르는 유명한 협곡 황룡은 바로 이들 소수민족의 생활 터전이었던 것이다.
4, 삼국연의(三國演義)의 무대이자 '하늘이 내린 곳간(天府之都)'으로 역동적인 소비 중심지 청두
(成都)
사천성의 성도(省都)인 성도(청뚜, 成都). 우리에게는 칭다오(靑島)와 청도(靑島) 등 유사한 지명들 때문에 혼동되는 곳 중 하나인 이곳을 보다 더 쉽게 기억하려면 중.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 봤을, 또 TV를 통해 한번쯤은 보았을 ‘삼국지(三國志, 혹은 三國演義)’를 떠올리면 위치를 파악하기 쉬워지는 이곳은 삼국지의 무대중 하나였던 ‘촉한(蜀漢)’의 수도였던 곳으로 그냥 ‘성도(成都)’라고도 불린다. 삼국지의 세 주인공 중 하나인 유비가 나라를 세우고, 그를 도와 신출귀몰한 솜씨를 자랑하는 제갈량이 간웅(奸雄) 조조를 상대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라는 절묘한 지략을 내세워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하고 급기야 대업(大業)을 달성하고자 기틀을 다져나갔던 터전이다. 그로부터 수 천년이 흘러 21세기가 지난 오늘의 성도는 촉나라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연 그 때의 유비나 제갈량은 지금의 성도를 예견할 수 있었을까?
(1) 역사적 배경, 지리적 특징
성도는 고대 촉(蜀)문화의 발원지이다. 당시 저명한 시인 이백, 두보, 이상음, 소식, 육여사 등은 성도에 머물면서 성도의 풍물을 시, 노래, 가사 등으로 읊었다고 하며 지금도 두보초당, 육여사, 양승업사 등의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있다. 성도라는 명칭은 사서에 의하면 “주나라의 태왕이 양산에서 기산으로 와서, 첫해에는 읍을 세우고 3년째에는 도시를 세웠기 때문에, 이를 성도(成都)라 명하였다고 한다. 이같은 성도는 중국 역사상 두 가지 특별한 점을 가지고 있다. 즉 첫째, 성도라는 지명이 2000여 년 동안 바뀌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것으로 이는 중국 역사상 매우 드문 일이고, 둘째, 2000여 년 동안 성도는 사천과 그 일대인 중국서남지역의 행정수뇌기구의 소재지 역할을 지속해왔다는 점이다.
(2) 기후
아열대 계절풍 기후로 인해 성도는 온난 습윤하고 사계절이 분명하다. 연 평균 기온은 16℃, 연 강우량은 1,000mm 안팎이다. 성도 날씨의 특징 중 하나는 안개구름이 많은 것과 그로 인해 일조시간이 짧다는 것이다.
성도 날씨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습윤한 것이다. 그래서 여름 기온이 그리 높지 않은데도(가장 높은 온도가 일반적으로 35℃) 아주 후덥지근하다. 반면, 겨울에는 기온이 평균 5℃ 이상이지만, 흐린 날이 많고 습도가 높아 아주 춥게 느껴진다.
(3) 정치, 경제적 상황과 주요 정책
중국정부에게 성도는 티벳지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하는 관문이 되는 도시이다. 성도는 노동력이 풍부하고 다른 대도시에 비해서 임금이 싸며, 실업자, 농민, 미진학자 등의 실업인구가 많다. 노무시장에서 직장을 구하러 나온 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성도는 연안의 발당지구에 비해서 특히 서비스업의 가격이 낮은 편이다. 성도지역에는 원래 기계, 방직, 전자(흑백브라운관) 군사(항공)과 같은 전통적인 공업이 발전하였다. 현재는 그러한 공업부문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으며 대신 통신기기 등의 전자제품, 그리고 약품, 사료 등의 산업이 새롭게 발전하고 있다. 외국자본투자가의 증가는 도시에 새로운 고용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외국인 투자는 주로 전자산업, 프로그래밍 등 선진항목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업종에는 고임금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가 모자라는 실정이다.
(4) 종교적 변화
대부분이 라마교도들인 티벳 장족들이 성도에 온 후 나타나는 가장 큰 변화는 특히 종교적 부분으로 티벳족 원거주지에는 크고 작은 라마교 사원을 중심으로 한 종교활동이 생활의 가장 우선 순위였는데 비해, 공식적으로 성도에는 라마교 사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신앙 생활이 개인영역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원거주지에서 라마사원은 티벳족 신앙생활의 중심 역할을 해왔기에 마을마다 크고 작은 사원이 있어서 그곳에서 경전통을 돌리며 기도를 하기도 하고 마을 단위로 라마를 불러와 염불을 하기도 하면서 절기가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가까운 큰 라마사원에 가서 염불을 듣고 공양을 한다. 유목지역에서도 라마사원을 방문해서 공양을 하거나 라마승들이 직접 장막을 돌아다니며 염불을 해주고 시주를 받는다. 이뿐 아니라 집집마다 아예 경당이 있어 그곳에서 기도와 제사를 지내며 종교생활을 한다. 이처럼 점을 본다거나 병을 고치거나 여러 의식과 절기마다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라마사원과 라마승의 역할은 지대하였고 원거주지내 티벳족의 경우 일년에 몇 번 성도에 있는 소각사나 석경사에 가서 예불을 드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성도의 티벳족 대부분이 바쁜 도시생활 속에서 사원과 라마승, 종교적인 성지나 성물로부터 격리되어, 이전에 가시적이고 공동체적인 종교활동이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부분으로 변해버린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또 하나 티벳족들은 원래 라마승을 찾아가 크고 작은 걱정거리나 문제, 진로를 다 점을 쳐서 결정을 해오던 사회구조에서 생활을 해왔는데 도시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로서 이들은 자신의 문제를 자기가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전에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권위를 가진 지도자가 자기를 인도해주어 그 지시를 따라서 살다가, 이제는 자기 인생에 대해 자기가 결정해야 하는 것이 가장 튼 변화이자 이들에게 어려움이 되고 있다.
라마불교, 애니미즘, 샤머니즘, 불교, 탄트라 불교가 혼합된 티벳의 토착화된 불교 등이 주요 종교이다. 라마가 샤만의 역할을 하며, 최고 존경받는 라마로 달라이 라마와 빤찬라마라는 양대 활불 전세가 있다. 라마불교에는 이외에도 수많은 활불전세들이 있어 라마승려를 중시한다하여 일명 라마불교라 불리운다.
사천성의 불교 역사는 1,800년 이상 되었다. 성도시내의 불교사원은 문화대혁명때 거의 파괴되었고, 현재 최고, 최대 규모의 불교사원인 무수원 외 보광사, 소각사 등이 있다. 성도시 불교협회에 따르면, 1996년 성도시 사원은 세계각국과 홍콩, 마카오, 대만 및 국내 여행객 약 10만 명을 접대했다고 한다.
사천성 청성산(靑城山)은 도교의 발원지로서 아바지구와 이웃하여 많은 영향을 주었다. 수당시기에 민강 연안에 이미 도교가 전파되었고 송, 명시대, 특히 명대에 아바지구에 유명한 송반황용사(松潘黃龍寺)가 건립되었다. 현재 사천성 아바지역의 도관(道觀)과 도사(道士)는 문천현, 송반현, 소금현, 무현, 금천현 등에 존재한다. 도교도는 거의 소수지만, 도교사상의 영향은 크게 남아 있다. 특별히 한족과 장족이 섞여 거주하는 농경지역에서는 여전히 도교를 신봉하며, 도가가 숭배하는 천신(天神), 지신(地神) 등을 숭배하고 있다. 도교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라기 보다는 문화 전반에 깊이 뿌리 박혀 있으며, 불교 안에 도교적인 요소로 혼재되어 있다.
성도에 약 4,000명 정도의 회족이 거주하는데 이들은 이슬람교도이며 시외 지역까지 하면 약 20,000명 정도 된다. 운남성의 곤명이나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적은 편이다. 성도에 있는 회족의 역사는 당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천지역의 인구가 부족한 상태에서 하남, 광동 지역에서의 인구이주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회족도 함께 이주해 왔다. 광서자치지구와 닝사회족자치구에서 장사를 위해 이곳에 온 회족도 있다. 이곳에서 회족의 교육과 역사를 연구한 유명한 종교연구가가 나오기도 했다. 성도시의 회족들은 주로 공장에서 근무하는 공산계층에 속하며, 일부는 장사를 하고 있다.
(5) 하늘이 내린 곳간, 역동적인 소비 중심지
예로부터 성도는 '재부지원(財富之元), 성공지도(成功之都)'로 소위 ‘천부지도(天府之都)’라고 해서 ‘하늘이 내린 곳간’으로 불렸다. 기후가 적절하며 명승고적이 많은데다 자원과 물산이 풍부하고 농축산물 등 식재료가 다양하며 전통공예품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고 민속민풍과 전원풍광이 인상적이며 관광자원 또한 유달리 풍부하기 때문으로, 그래서 '팬더의 고향', '이름난 역사문화도시', '천부의 전원풍경'은 성도의 3대 특징이다. 또한 이곳은 예로부터 실크로드가 지나는 길목에 해당하는 곳이라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접목되면서 상업과 교류가 번성했던 도시다.
그래서 성도시(成都市)에서는 ‘톈푸지국(天府之國)’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된다. 이 말은 청두의 풍요로움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먹을 것 걱정이 없고 입을 걱정이 없는 곳’이라는 의미다. 성도는 하늘이 내린 일종의 ‘파라다이스’를 가진 ‘살기 좋은 지역’으로 여겨지는 대목으로 오래전부터 이곳은 물산이 풍족한 소비의 중심지였음을 잘 알 수 있다.
성도의 소비력은 유명하다. 상사주재원들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많이 곳이 성도”라며 소비성향이 강한 곳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아 말한다.
“농산물과 축산물이 많고 성향 자체가 꾸미길 좋아해 패션의 도시로도 유명하고, 또 소비성향이 강한데, 이는 2008년 쓰촨 대지진 이후 가치관이 변한 이유도 있다. 성도 주변에 7개의 성시(省市)가 에워싸고 있는데 그들이 여기와서 소비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간다” 라고 이들은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린다.
성도 거리엔 유독 외제차가 많이 보인다. 실제 거리에서 중국차는 물론 한국 차를 발견하는 일도 흔한 일은 아니다. 최근 성도에서 현대자동차의 판매가 많이 이뤄졌다고는 말들을 하지만, 그래도 주로 눈에 띄는 차종은 폭스바겐, BMW, 벤츠, 토요타 등 대형 고급 세단이다. 성도의 소비력은 서울로 치면 명동이라고 불리는 쭝푸루(總府路)나 진강구에 자리 잡은 명품거리를 걸으면 더욱 확연하게 알 수 있는데, 쭝푸루에는 중국의 주요 백화점이 모두 집중돼 있으며 국내외의 다양한 패션 브랜드들이 총집합해 있다. 이곳엔 한국의 이랜드를 비롯해 베이직 하우스 등의 패션 브랜드 매장이 위치해 있어 성도 소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진장구 명품 거리엔 샤넬과 루이비통은 물론 베르사체, 티파니, 페라가모, 구찌 등의 명품매장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성도인들의 소비력은 명품매장 매출 기록만 봐도 잘 나타난다. 명품 여성화장품인 에스티로더 최고 매출 지점을 비롯해 이랜드, 유럽계 SPA 브랜드의 매출 1등점도 모두 성도에 있다. 그래서 “5000위안을 벌면 1만위안을 쓰는 곳이 청두”라며 “왕푸징이라는 현지 백화점이 고급백화점도 아닌데 평일에도 매출이 약 400~500억위안 정도가 나올 정도로 리테일 입장에서 중국 내에서 선호되는 대상이 북쪽은 심양, 남서부엔 청두가 꼽힌다”고 현지인들은 말한다.
성도이 이 같은 특색 때문에 최근 중국 정부는 이 지역에 해외 유통기업들의 유치를 장려하는 분위기다.
(7) 무후사(武侯祠)와 금리(錦里)거리
성도 시내에 유비묘와 제갈공명의 묘가 있다. 당초 이곳에는 유비의 묘만 있었는데 찾는 이가 없자 청나라의 강희제가 "황실을 능멸한다" 면서 그 당시 많은 참배객들이 찾았던 30km밖에 떨어져 있었던 제갈공명의 묘를 이곳으로 옮겨서 사람들로 하여금 제갈무후를 찾으려 올 때 저절로 유비의 묘도 찾을 수 있겠끔 만들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당시 죽은 이우들의 원수를 갚고자 홧김에 전쟁을 일으켜 육손에게 대패한 후 백제성으로 쫓겨와 화병으로 죽었던 유비의 묘인 '한소열릉'은 역대 황제릉 치고는 제일 초라하고 작아서 가짜라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제갈량며 덕분에 많은 이들이 찾고 있기는 하다. 이 무후사 담벼락을 마주하고 옛 삼국시대 비단을 장사하였던 거리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서 만들어놓은 전통거리인 금리(錦里)거리가 있다. 여러가지 골목들 사이사이로 비단을 비롯한 전통기념품과 먹거리들을 판매하고 있는데 군데 군데서 기념품과 맛있는 먹거리를 즐길수 있다.
5, 찾아 가는 길
아시아나 항공에서 인천공항과 성도 공항간 매일 정기노선(인천발 08:00, 성도발 00시 10분, 왕복운임 약 631,000원 정도)을 운항하고 있고, 아시아나와 연계된 중국 국제항공사에서 주 5회(월,수,목,금,일 인천발 15: 25분, 성도발 08: 05) 정기운항하고 있기에 이를 이용해서 성도까지 간 후 성도에서 수시로 운행하는 구채구행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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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앉아서 좋은 구경합니다.